차    례 (1970년 7월호)

설  교  편

1. 기독교의 혼란을 어떻게 수습할 것인가 (사28:6~13)

2. 해 돋는 편에서 두려워 할 영광 (사59:18~21, 60:1~3)

3. 기독교 종말의 완전 역사 (사32:1~4)

4. 진노의 날에 여호와를 위한 제단 (사19:19~25)

5. 성경과 신앙 사상 문제 (요5:39~44)

6. 참된 기도의 열매 (마7:1~12)

7. 기독교 통일의 완전성 (계10:11~11:2)

8. 교회를 위한 천사의 지시 (계22:16)

9. 베드로와 요한의 사명적 한계 (요21:15~25)

10. 난국을 당한 종들의 무장 (계7:1~3)

11. 환란을 통과한 요한이 본 계시 (계1:9~20)

12. 참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 (요4:22~26)

13. 새 시대를 이룰 인격 (사11:1~9)

 

장년 공과편 - 다윗 왕국의 승리

제1과  승리의 징조 (사7:10~22)

제2과  승리의 열심 (사9:1~12)

제3과  북방을 막대기로 쓰고 승리케 함 (사10:12~27)

제4과  가지로 승리케 하심 (사11:1~5)

 

논  설  편

1. 70년부터 기독교의 나아가야 할 방향

2. 기독교 통일의 전망을 말한다

3. 시국 난제 해결은 무엇으로 될 것인가에 대하여 말한다

4. 공산 청년과 기독교 청년에 대하여

5. 촛대교회 목회자에 대하여

6. 촛대교회 주일학교 선생에 대하여

7. 한국 교회의 사명에 대하여

8. 변화성도가 일어날 때는 왔다.

 

특   집

6.25를 회상하면서

※ 편집 후기

 

설 교 편

기독교의 혼란을 어떻게 수습할 것인가

- 사 28:6~13 -

 

  기독교는 진리 하나를 바로 전하기 위하여 세상에 교회의 확장을 이루게 한 것이요 또는 진리 하나를 위하여 싸워 승리하기 위한 데서 하나님의 종들을 세운 것이다. 그러나 금일에 기독교가 세계적인 대종교를 이루어 놓은 것만은 누구나 부인 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제 기독교는 어떠한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냐 하는 것을 누구나 다 주목하는 바이다. 이와 같은 난국을 당하여 `아름다운 소식`이라는 월간지를 세상에 내 놓게 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의의가 있다.

 

  1. 성서 본문주의로 깊이 들어가자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완전한 신이신데 목적을 두고 완전한 언약을 하셨고 언약을 따라 역사하는 진리의 신이시다. 만일 기독교가 십자가의 도로써 세계 인류의 죽은 영을 살려 하나님의 자녀의 명분을 얻게 하는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 자녀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로 가르쳐 주는 교회가 못된다면 큰 목적을 달성할 수 없고 오히려 불행을 가져오는 교회가 될 위기에 놓여있는 현실이라고 보게 된다.

  성경이라는 자체는 하나님의 법이 인간에게 나타나되 그 시대 시대에 따라 타락한 인류를 어떠한 방법으로 인도하고 다스려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달성하겠다는 것이 성경이기 때문이다. 이날까지에 기독교의 진리 운동은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이 다 이루어지는 역사에서 진리 운동을 한 것이 아니고 성경대로 십자가에서 영원한 속죄를 이루시고 성경대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그 진리를 사도들에게 성경을 깨닫게 하는 영을 주어 바로 증거하도록 하신 것이다(눅24:44~49).

  이 은혜를 받은 사도들은 선지서를 읽을 때에 십자가의 도가 정확히 깨달아지는데서 완전 변론을 하되 율법과 은혜라는 제목 하에서 율법주의에 잘못된 바리새교인들과 피 흘리기까지 싸웠던 것이다. 그 때는 신약 전서를 손에 들고 싸운 것이 아니고 율법과 선지서의 글을 가지고 예수의 행적을 전하며 또는 십자가의 도를 믿는 신자들에게 율법을 초월한 성도 생활에 지침이 되는 편지를 써서 보냈던 것이다. 이것은 깨닫는 영을 받은 사도들이 성경이 이루어진 사실을 바로 가르치며 모든 일에 완전한 열매를 맺어야 되는 성신의 도리를 기록했던 것이다.

  그 때에 성도들은 예수 행적과 사도행전과 편지서를 사도들에게 받아 가지고 이 글을 읽어가면서 교회를 세우는 동시에 가르치는 일을 했던 것이다. 지도자의 양성을 필요로 느낀 성도들은 교회 확장에 따라 그것을 가르치는 성서학원 신학원을 설립하게 되어 내려오던 중 금일에 와서 신학대학이라는 명칭까지 가지게 된 것이 기독교 종교 교육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금일에 이 신학으로만이 성경을 다 가르치는 일에는 불가능함으로 사28:7같이 되는 일이 있게되는 것은 사람이 억지로 선지서를 해석해 보는 과오가 시작되어 이것은 오히려 기독교에 혼란을 일으키는 현실을 이루게 된 것이다.  

  사도의 사명은 선지서의 목적을 다 이루는 데가 한계가 아니요  초림의 주가 오시어 신성과 인성을 가진 동정녀 잉태로부터 십자가 부활 승천, 성신 강림의 역사로 죄와 사망에 깊이 빠진 영들을 이끌어 내주는 일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행적을 쓰는 사도들이 선지서를 이용하여 자기의 사명을 하기 위한 목적에서 주님의 가르쳐 준 교훈에 의하여 신약 전서에 대강 기록한 것 뿐이다.

  이사야서를 본다면 사7:14, 9:1~2, 11:1, 28:16, 40:1~6, 42:1~8, 49:8상반절, 53:4~10, 61:1, 65:1을 증거한 것 뿐이다. 그 밖에 이사야서 전체는 환란과 재앙 속에서 변화성도로 눈물 흘려 다시 예언할 복음이 된다(계10:7).

  금일에 기독교는 선지서의 전체를 본문대로 들어가서 그의 경고를 우리가 나가서 전할 말씀이며 우리가 살아서 남은 종이 되고 남은 백성이 될 자들이 걸어 나갈 신앙 노선이 된다. 죄인을 부르는 은혜시대와 죄인을 없애 버리는 진노의 날이 있고 새 시대가 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활성도의 성서적인 활동과 변화성도의 성서적인 활동이 그 시대가 다르기 때문이다.

 

  2. 사명의 획선을 바로 찾자는 것이다

  사명은 사도적인 사명의 획선도 있고 선지적인 사명의 획선도 있으니 사도는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는 것만이 그의 획선이다. 행1:21~22의 사명은 속죄 구령의 사명이다. 이것이 금일까지에 기독교 강단에서 가르치는 사명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재림의 주를 맞이할 생존성도는 다시 예언의 사명을 하는 선지의 역할을 하게 된다(계11:3~12, 22:6, 17~19).

  왜냐하면 여호와의 말씀인 선지서는 목적이 심판과 새 시대를 목적했다. 이스라엘 말기에 극도로 선지국가인 다윗 왕국이 부패하여 바벨론에게 망하게 될 때에 그들은 눈물 흘려서 말씀을 예언했지만 부패한 정부가 거짓선지와 합작이 되어 참된 선지를 축출하고 학살시킬 때 하나님의 묵시가 피 흘리는 선지들에게 피 값을 갚아주는 일이 있을 것과 새로운 시대의 왕국이 올 것을 묵시로 보여 주었다. 그들은 묵시 가운데서 여호와의 말씀을 받아쓸 적에 심판의 다림줄을 세밀히 변론적으로 하나님께 받아 쓰게된 것이다.

  그러므로 속죄 구령의 도리는 쓰지 않고 심판과 새 시대를 쓸 적에 그리스도의 탄생이 있을 것과 세계적인 평화의 복음이 전파 될 것과 인류 종말의 재앙이 북방으로 올 것과 환란과 재앙 속에서 남은 자가 있게 될 것을 말할 때에 고레스의 역사로 바벨론에서 남은 자가 예루살렘을 복구한 사실을 들어서 인류 종말에 북방 환란에서 남은 자가 되어서 새 시대 갈 자는 동방에서 일어나는 역사로 말미암아 완전한 다윗 왕국이 세계를 통일하는 새 시대가 올 것을 말할 때에

  이사야 24장에 세계를 뒤집어엎는 진노의 날이 하나님께로 오는데는 동방 바다 옆에서부터 외치는 소리가 나온다고 24:14에 말했고 땅 끝에서부터 의로우신 자에게 영광을 돌리세 하는 노래를 부른다고 16절에 말했고 그 노래의 뜻을 설명할 때 25장에 설명했고 27장과 같이 심판이 오고 새 시대가 오는데는 심판의 대상자는 28장과 같이 주의 종들이 이상을 그릇 풀고 재판할 때 실수하는 죄가 많으므로 하나님은 11절과 같이 생소한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이 백성에게 말씀하시리라고 하였다. 이것은 안식에 대한 말이라고 12절에 말했고 이것을 듣지 않을 때는 반드시 환란에서 망할 것을 13절 이하에 가르쳤다.

  금일에 아름다운 소식이라는 월간지가 나오게 되는 것은 새일수도원 원장이 강단에서 설교하던 중 위로부터 서책을 받아쓰라는 명령이 있어서 수도를 받던 종들이 붓을 들 때에 입에서 말씀이 나리기 시작하여 아무런 서책을 보지도 않고 말씀이 나오는 대로 기록한 것이 조직신학 강의, 선지서 강의, 계시록 강의, 요한一서 강의, 인간론, 새일 성가집 등의 서책이 나오게 되었다.

  금일에 와서 이제는 입에 말씀이 임하는 대로 써서 아름다운 소식이라는 월간지를 발행하라는 지시에 의하여 1970. 6. 17일부터 기록하기 시작했으니 이 글을 읽어보면 누구든지 분명히 혼선된 진리가 없도록 목회 할 수 있게 되며 신앙 노선에 큰 발전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해 돋는 편에서 두려워 할 영광

- 사 59:18 ~ 60:3 -

 

  인류 역사상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 곳은 아시아라고 보게 된다. 에덴 동산을 창설할 때도 아시아요 인간이 타락하여 생활 개척에 번창의 시발점도 아시아요 무서운 홍수 심판의 방주를 타고 새로운 시대를 개척하는 노아의 가정도 아시아 사람이라고 보게 된다. 셈과 함과 야벳이 번창할 때에 하나님은 셈의 하나님이라고 하신 후에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난 일은 완전한 언약의 말씀이 모든 선지를 통하여 기록된 역사라고 보게 된다.  

  왜냐하면 조물주 하나님께서 당신의 비밀을 인간에게 나타나 보이기도 하고 역사를 보여 주는 동시에 이와 같은 역사가 앞으로 다시 있으므로써 모든 예언은 이루어져 평화의 왕국이 온다는 것이 과거에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난 일이라고 보게 된다(사46:10).  

  모든 예언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장소는 이방의 갈릴리라고 말씀한 대로 갈릴리를 중심하여 이방을 밝히는 빛이 나타났던 것이다(사9:1~2). 그야말로 얼마나 영화로운 일인가! 나사렛 골짜기의 한 목수의 가정으로 자리잡고 자라난 그리스도의 역사는 해변에 나가서 그물 한 채를 들고 있던 갈릴리 벳새다 동네의 어부들이 사도가 되어 세계 열방에 죽은 영들이 살아나는 빛의 종교를 이룬 것이 얼마나 영화로운 일인가.  

  이제 더 큰 영광은 어디서 나타나는가 하는 것을 성서를 통하여 알 수 있다. 이사야 성경의 목적이 큰 구원을 말한 것인데 이 큰 구원이라는 것은 세계 인류가 전멸되는 재앙에서 남은 자가 되어 눈물 없고 질병 없고 전쟁 없는 새로운 시대에 세세 왕권의 영광을 누리는 일을 목적 둔 것이다. 그러므로 갈릴리에서 시작된 빛이 시작이라면 해 돋는 동방에 나타난 영광은 끝을 맺는 역사라고 본 성경은 가르쳤다.

  이제 해 돋는 편에 나타날 두려운 영광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성서를 통해서 알 수 있다.

 

  1. 재림의 주를 영접하는 영광이다 (19~20)

  인류 역사에 하나님의 영광을 본 자가 많이 있지만 주 재림시에 남아 있는 자가 볼 영광을 목적 두고 선지와 사도와 성도들은 목숨을 바쳐 충성을 다했던 것이다(약5:7~10, 롬8:18). 그러면 이미 죽은 자들도 이것을 바라보고 싸웠다면 살아서 주님을 맞이할 자들의 영광을 가르쳐서 해 돋는 편에서 그 영광을 두려워할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재림의 주를 맞이할 변화성도에게 나타날 큰 역사는 해 돋는 편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가르친 것이다. 계시록 7장에도 해 돋는 데서 다른 천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나온다고 했으니 재림의 주를 맞이할 종들이 이마에 인맞는 역사가 무엇이라는 것을 계시록 10장과 11장에 분명히 가르쳤다. 그러므로 이 영광은 원수를 갚는 날에 남은 종이 받을 영광이다(19).

 

  2. 동방 사람에게 마지막 역사가 임하는 일이다 (21)

  역사적으로 모든 선지를 통하여 보여준 묵시의 말씀이 다 이루어지는 영광의 새 나라에 들어갈 백성들에게 전할 말씀이 해 돋는 편에 있는 사람에게 입에 임하여서 그 역사로 완전히 끝을 맺는 일이다. 이제 이러한 역사가 없이는 기독교 종말에 나타날 영광을 누릴 진리 운동을 사람으로서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직접으로 입에 말씀을 주어서 바로 증거하도록 하는 역사가 동방의 역사라는 것이다(사41:1~2, 24:14~15, 46:11). 이것은 두려워할 일이 된다. 왜냐하면 심판 권세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역사 중에 가장 큰 역사는 새 시대가 이루어지는 종말의 동방 역사이다.

 

  3. 열방을 통치하는 영광이다 (60:1~3)

  이 영광은 세계가 흑암이 덮이는 무서운 재앙 속에서 세계 인류를 구원해 주는 역사이니 새 시대의 왕국이 이루어지는 역사의 본부는 동방 해 돋는 편이라는 것이다. 잃었던 백성을 찾는 역사는 아시아 서편 지중해 옆 유대 나라요 하나님께로 돌아온 백성을 보호하여 새 시대로 인도하는 역사는 예루살렘에서 획선을 그어서 동쪽으로 나가면 우리 대한민국이 된다.

  현재에 극동에 모든 제단이 다 황폐화되고 한국만이 남아서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 나라 만세 라는 우렁찬 애국가를 부르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 나라에 나타나 보호하는 일이 있을 것을 작정하신 하나님께서 이러한 노래를 부르게 하신 것이라고 믿어진다. 기독교의 진리가 이것인 것을 모른다면 기독교는 지금부터 흑암에 떨어지는 비참을 보게 될 것이다.

  가장 영광스러운 일은 대한 민국에 나타날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성경에 목적을 둔 일이 지상 평화 왕국인데 이것을 이루는 진리가 햇빛 같이 말씀으로 새일수도원 강단에 임했다는 것은 만민 앞에 자랑할 영광이 될 것이다. 경솔한 인간들은 공연히 남의 말에 끌려 이 나라에 나타난 진리를 비소하지만 그들도 눈물 흘리며 회개할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이 나라에 모든 문제는 이 민족 위에 나타난 진리 이것으로 해결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사야 60장 전체를 읽어보아서 알 수 있다.

 

  결   론

  가장 영광스러운 일은 과거가 아니요, 이제부터 기독교에 나타날 것이니 이것을 바로 알려주는 일이 새 일을 고하는 일이다(사42:9 이하). 만일 누구든지 이 역사를 반대하는 자는 전멸을 당한다는 것이니 가장 두려운 일이다(사60:12).

 

 

기독교 종말의 완전 역사

- 사 32:1~4 -

 

  기독교의 역사라는 것은 지상 통치의 역사를 완전 역사라 하는 것이다. 이날까지의 역사는 지상 통치를 이루기 위한 목적에서 그리스도의 보혈로 세계적인 민족 중에 택한 자를 찾으시는데 불과한 역사이지만 종말의 완전 역사는 의로 통치하는 시대를 이루는 것을 기독교 종말의 역사라는 것이다. 완전 역사라는 것은 사람을 억지로 구속시키는 것으로서가 아니고 인력으로써 할 수 없는 것을 이루어 주는 것을 뜻한다.

 

  1. 환경에 지배를 받지 않는 역사다 (1~2)

  아무리 광풍과 폭풍이 불어오고 아무리 메마르고 곤핍한 일이 온다하여도 거기에서 피해를 당치 않고 나가는 역사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어려운 환경이 오게 하는 것도 택한 자에게 더 좋은 것을 주기 위한 목적이니 좋은 것을 받을 수 있는 자리는 인력으로써 당할 수 없는 일이 올 때라고 본다. 이것은 하나님의 모략적인 방법이니 어려운 풍파가 일어나는 것은 당신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기 위한 방법이다.

  인간이라는 것은 어려운 난관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맛보게 되므로 영원한 왕국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있기 때문이다. 주의 인도하는 길은 어려운 일이 없게 하는 것이 아니요, 광풍 같이 폭풍같이 불어오는 환란에서 피할 길이 있고 아무리 메마른 땅에도 만족히 마실 물이 있게 하고 곤핍한 땅에서도 새로워지게 하는 일이 있으므로 진정한 신의 능력을 체험한 자 만으로 새로운 왕국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선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2. 보고 듣는 자에게 만족을 준다 (3)

  언제나 완전이라는 것은 보고 들을수록 만족함을 준다. 완전치 못한 것은 처음에는 좋게 보이나 자세히 보면 볼 것이 없고 처음에는 듣고 싶으나 자세히 들을수록 더 들을 것이 없는 것이지만 완전이라는 것은 처음 보는 것 보다 볼수록 더 볼 것이 있고 들을수록 더 깨달아 지는 것을 기독교의 종말의 완전한 진리라는 것이다.

  금일에 기독교가 소위 선교 국가라는 나라들이 모이는데 힘을 잃고 주일날 낮 예배만 드리고는 다시 모이지를 않는다는 것은 강단에서 완전한 진리를 가르치지 못하는 일이 있게 되는 동시에 들으나 마나 하다는 싫증을 낼 때에 소위 세속 주의라는 신학까지 나오게 된다. 우리는 이때에 들을수록 볼수록 은혜가 되고 만족해지는 역사가 없다면 교회는 이 시대에 필요 없는 기관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계시록에 읽고 듣고 지키는 자는 복 있다는 것은 기독교의 완전 역사를 뜻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시대 사람에게 완전한 것을 주는 것이니 지금 과학 문명을 자랑하는 인간들에게 더욱 만족을 주는 진리 운동이 아름다운 소식이라는 것이다.

 

  3. 조급한 마음에 지식을 준다 (4상반절)

  사람이라는 것은 공연히 마음이 조급해질 적에 큰 과오를 범하게 된다. 조급은 마귀 시험을 받는 일에 문을 열어주는 일이다. 에덴 동산의 아담 해와가 타락한 동기가 간교한 뱀의 말을 듣고 마음이 조급해지는 시험을 받아 하나님 앞에 물어본 일도 없이 선악과를 먹게 되므로 인류 타락의 시발점이 되었다. 기독교의 신앙심이라는 것은 무조건 무슨 일이나 급하게 서두는 것은 언제나 마귀 올무에 걸리는 행동이라고 보게 된다.  

  오늘의 기독교가 과학 문명이 최고도로 발달할 때에 완전한 진리의 지식이 없는 인간들이 과학 만능을 부르짖는 마귀 소리에 미혹을 받게 된다. 금일에 완전한 신앙 지식을 가진 자라면 이 시대를 바로 분별하는 동시에 시대적인 진리 지식에 입각하여 마음에 조급이 없는 완전한 인격을 소유한 성도의 생활에서 시국 난제를 해결할 지식을 성서에서 완전히 찾게 되는 일을 완전 역사라 하는 것이다.

 

  4. 말을 분명히 하는 자가 된다 (4하반절)

  오늘에 기독교 강단에서 말을 분명히 하지 못하므로 오히려 혼란을 일으키고 말하지 않은 것 보다 못한 역효과를 주는 일이 너무나 많다. 설교가 영을 살리는지 죽이는지를 모르고 무조건 떠든다는 것은 예배를 망치는 설교가 될 것이다. 분명한 말을 못하는 자로 강단 생활은 자신조차 흑암에 빠지는 일이 된다(사8:20).

  하나님의 말씀은 설교자로서 분명히 말할 수 있는 합리적인 변론이 구비된 글이다. 어떤 자들이 하나님 말씀은 아무렇게 각각 해석할 탓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교회를 망치는 말이라고 본다. 사45:19을 보면 나는 흑암한 곳에서 은밀히 말하지 않았으며 야곱 자손에게 너희가 나를 헛되이 찾으라 이르지 아니하였노라 나 여호와는 의를 말하고 정직을 고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

만일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들이 분명히 말할 진리를 주지 않고 무조건 나가서 증거하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런 하나님의 종이 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은 분명한 말을 못하면 완전한 인격을 가진 자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금일에 기독교의 완전 역사는 신자로서 분명한 말을 하게 될 때에 마귀의 흑암은 물러가고 천사는 같이하므로 백전 백승의 용사의 걸음을 걷게 될 것이다.

 

  결   론

  우리 인생의 참된 행복의 세계를 이루는 것은 과학을 초월한 하나님의 완전 역사로만이 완전한 인격을 찾게 되는 동시에 완전한 열매를 이루는 자로써 새로운 의의 통치 시대를 이루는 것을 기독교 종말의 완전 역사라는 것이다.

 

 

진노의 날에 여호와를 위한 제단

- 사 19:19~25 -

 

  기독교는 율법시대를 기하여 모든 선지들이 하나님께로 묵시를 받아 책을 기록할 때에 하나님께 대한 세 가지 역사를 중심하여 기록했다.

  첫째는 너그러이 용서하기 위한 하나님의 비밀을 말했고

  둘째는 진노의 날에 보호하는 비밀을 말했고

  셋째로는 새 땅 축복을 받는 일을 말한 것이 선지서의 3대 요지가 된다.

  그러므로 율법시대의 성전이 은혜시대의 다락방으로 이루어진 것은 하나님은 제사를 받으실 때에 진리를 따라서 그 시대에 말씀을 순종하는 제사라야 받으시기 때문에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는 기뻐하지 않고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 남녀가 합심하여 기도하는 장소에 성령의 역사가 불로 임하는 동시에 모든 사람이 하나같이 방언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때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하는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맹렬히 다락방 교회를 박해했던 것이다. 그러나 다락방 교회는 세계를 정복하고 예루살렘 성전은 무너져 없어지고 만 것이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말씀은 은혜시대가 지나고 진노의 날이 올 때에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제단은 어떠한 제단이라는 것을 가르쳤다. 하나님은 언제나 제단이 없이는 역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진노의 날에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이 있다는 것을 가르쳤다. 이제 어떠한 제단이 되어야 진노의 날에 여호와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남은 제단이 되느냐 하는 것이 오늘날 기독교에서 깊이 생각할 문제라고 본다. 만일 이것을 분명히 모르는 자가 된다면 헛된 수고를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제 본문에서 어떠한 제단이 되어야 하느냐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다.

 

  1. 진노의 날에 남은 종이 기둥이 된 제단이다 (19)

  제단이라는 것은 건물에 따라서가 아니고 그 시대에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고 기둥 같이 튼튼히 선 사람이 없이 여호와를 기쁘게 할 수가 없다. 3년 6개월 가물 때에 엘리야는 흔들리지 않고 담대히 서서 제단을 쌓고 손들어 기도할 때에 800여명 바알 선지를 쳐부수는 승리를 이루었던 것이다. 제단이라는 것은 다수가 모인다고 여호와께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요, 적은 수라도 기둥이 될 때에 하나님은 그 종을 통하여 승리하도록 응답을 나리는 것이다. 언제나 하나님은 담대한 사람이 올리는 제사를 기꺼이 받기 때문이다.  

 

  2. 표적과 증거가 된다 (20)

  하나님은 언제나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난관을 당할 때에 담대히 부르짖는 제단에 하나님은 오셔서 그 시대 사람이 깨닫도록 표적과 증거를 보여준 것이다. 앞으로 남은 교회가 되려 할 때 초자연적인 역사가 표적과 증거로 나타나야만 될 것이다.

  우리는 여호와께서 응답하므로만이 사명을 감당하는 제단이 될 것이니 아무리 원수의 압박이 있다 하여도 거기에 굴복지 않고 여호와를 위하여 그 시대적인 말씀을 증거하는 것이 있어야만 하나님의 보호가 같이 할 것이다. 오늘에 많은 사람이 예배하고 있지만 주님 오실 때까지 강하게 역사하는 교회는 여호와를 위한 제단이라고 보게 된다.

 

  3. 대 승리를 이루는 제단이다 (21~22)

  기독교의 승리라는 것은 개혁을 일으키는데 있는 것이니 이 개혁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제단을 통하여 응답을 나리므로 큰 변동을 일으키는 열매를 보게 된다. 악한 세상을 평화로운 새 시대를 이루는 것은 어느 교파를 중심한 데서가 아니고 인간의 어떤 정치나 무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한 제단을 중심하여 세계 통일의 완전한 평화 왕국을 이루도록 역사하시므로만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난제 해결은 여호와를 위한 제단이 없이는 도저히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예배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요, 예배를 하나님이 응답하고 하지 않는 것이 큰 문제라고 생각지 않을 수 없다. 진노의 날에 남은 제단은 진노의 날에 하나님의 뜻의 비밀을 바로 알아서 그 뜻에 순종하는 제단이 아니고는 아무런 열매가 없을 것이니 난국을 당한 이 때에 여호와를 위한 제단을 바로 쌓는 것이 급선 문제라고 본다.

 

  결   론

  어느 나라나 여호와를 위하여 옳은 제단을 쌓던 사람은 다 하나가 되어 새로운 시대를 이루어 원수의 나라가 다 이스라엘과 하나가 된다는 것을 23~25절까지 가르쳤다. 가장 복 있는 자는 여호와를 위하여 응답 받는 제단을 쌓는 자라고 보게 된다.

 

 

성경과 신앙 사상 문제

-  요 5:39~44 -

 

  금일에 성경이 세계적으로 번역되어 어느 나라나 그 민족들이 성경을 읽을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지킬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은 큰 축복을 받을 기회라고 보게된다. 그러나 성경과 읽는 사람의 신앙과 사상과 합치되지 않는다면 오히려 불행을 가져오는 과오가 있게 될 것이다. 성경을 하나님께로 받아 기록한 사람이 유대인이요, 성경을 많이 읽어본 사람이 유대인이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유대인들이 오신 메시야를 오히려 이단시하고 아직까지 메시야 오기를 기다린다는 무서운 과오를 범하고 있다는 것은 큰 유감이 아닐 수 없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생을 어떠한 방법으로 구원해 주는 동시에 심판을 나리고 새 시대를 이루고자 하는 것인데 신앙 사상이 그 하나님과 맞지 않으면 아무런 열매가 없는 마른  나무가 되고 말 것이다. 이제 어떠한 신앙 사상이 있어야 성서를 통한 열매가 있겠느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성경을 우상화시키지 말 것이다 (39)

  우상화라는 것은 유대인들이 자기 나라 사람이 성경을 기록했으니 자기에게만 영생이 있다는 관념이다. 성경을 순종하는 양심이 아니고 성경을 이용하는 것이 큰 과오가 된다. 그들은 성경에 기록된 진리를 전부 자기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이 원인은 독선의 교만이 있기 때문이다.

  언제나 성경은 목적이 무엇이며 누구를 가리킨 말씀인 것을 분명히 알기 전에 함부로 자기 주관에 맞춘다는 것은 성경을 우상화시키는 일이 되게 쉽다.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니고 성경대로 행하시는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 신앙 사상이 있어야 할 것이다.

 

  2. 겸손히 순종하는 것이 있어야 된다 (40~42)

  언제나 하나님께 겸손히 순종한다는 마음이 없는 자라면 성경을 읽어도 오히려 마음이 더 강퍅해 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실천 생활에 순종이 없이는 아무런 체험이 없으므로 성경을 많이 볼 수록 마음이 더 굳어지고 강퍅해질 우려가 있다. 왜냐하면 성경의 비밀을 모르고 잘못 해석하는 가운데 오히려 남을 판단하는 과오를 범한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을 때에 이 목숨을 바쳐 그 뜻에 순종한다는 맑은 양심에서 읽는 자라야 성경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직접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3. 하나님의 영광만 구하는 자라야 된다 (43~44)

  누구든지 사람의 영광을 목적하면 언제나 거짓 선지에게 미혹을 당하게 된다. 왜냐하면 거짓 선지라는 것은 언제나 사람의 마음을 끄는 방침을 가지고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영광을 구하는 자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자 보다도 인간의 무엇으로 보든지 옳게 보이는 일로 가장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광을 목적하고 하나님께로만 보이려는 사상이 아니라면 성경의 깊은 비밀을 도저히 알 수가 없고 하나님의 시대적인 비밀을 모르고 오히려 반대하는 과오를 범하게 된다.

  성경은 기록한 선지들이 억울하게 사람에게 멸시를 받고 핍박을 받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에만 순종하려는 생활을 할 때에 그 시대의 사람들이 다 인정하지 않는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인정받고 묵시로 받아 기록한 글이니 이것은 그 뜻을 바로 알자는 성경을 기록하던 선지와 같은 신앙 사상에서 하나님의 영광만 바라보고 나가는 자라야 하나님의 참된 신의 감화를 받게 되므로 시대의 비밀을 바로 알게 될 것이다.

  초림의 메시야가 올 때도 사람에게 영광을 구하는 제사장들과 교법사, 유사, 장로들은 오히려 예수를 이단이라고 판정을 내렸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묵묵히 기도하던 시몬이나 안나 같은 선지들은 어린 예수를 품에 안고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행하려고 성전에 들어갈 때에 벌써 메시야인줄 알았던 것이다.

  세례요한이 광야에서 외칠 때에 바리새교인들은 몰랐지만 베드로와 요한과 그 밖의 사람들은 세례 요한의 전도를 받고 메시야를 영접했던 것이다. 재림의 주가 오실 때에도 하나님의 영광만 바라보는 종들 외에는 다 성경의 비밀을 모르고 오히려 성경을 그릇되이 해석하므로 예언을 멸시하다가 멸망을 자취할 것이다.

 

  결   론

  성경을 손에 들고 신앙 사상이 잘못된 자 보다도 성경을 알지 못하고 마음이 정직하고 겸손한 자가 있다면 오히려 성경을 들고 잘못 해석하는 자보다는 시대적인 참된 증인의 전도를 받고 축복을 먼저 받는 일이 있게 될 것이다.

 

 

참된 기도의 열매

- 마 7:1~12 -

 

  기도라는 것은 참되신 하나님께서 들어주시는 기도가 아니고는 다 헛된 우상적인 종교에 불과한 것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사66:3이하를 보면 말씀을 순종치 않는 자의 기도는 가증하게 보고 우상과 같이 취급한다고 말씀했다. 오늘에 많은 사람이 하나님께 예배하고 기도하지만 그 기도가 하나님께서 더 좋은 것으로 줄 수 있는 기도가 되느냐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제 참된 기도가 무엇이냐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할 것이다.

 

  1. 마음에 들보가 없는 기도이다 (1~5)

  만일 어떤 사람이 마음에 자기라는 주관을 내세우는 들보가 있다면 하나님과 상대가 될 수 없다. 우리는 자기라는 주관이 앞서는 자가 될 때에 자칭 선지라는 교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참된 기도는 자기라는 자체를 뽑아버리는 희생적인 것이 없다면 도저히 하나님과 교통하는 기도를 가질 수 없다. 자기라는 들보가 없어지고 하나님만으로서 중심에 소유하게 될 때에 밝히 볼 수 있는 영안이 밝아지는 것이다. 인생 자체에는 빛이 없고 밝히 볼 수 있는 빛은 하나님께만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신자라 하여도 자기라는 중심에서 남을 판단한다는 것은 완전한 심판주가 되시는 하나님 앞에 심판에 해당하는 생활이 된다. 그러므로 오직 참된 판단은 하나님께만 있다는 마음에서 남을 판단하는 것보다 먼저 자기가 주 앞에서 판단을 받는 양심적인 회개의 기도 생활이 있어야만 될 것이다. 아무리 부르짖어도 공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판단을 받는 회개의 생활이 없다면 그 자체가 자동적으로 형식을 따르는 일이 있게 된다. 언제나 자기를 없애 버리는 사람의 기도라면 시간 시간마다 깊은 영계를 체험 할 수 있게 된다.

 

  2. 애써 노력하는 기도가 있어야 한다 (7~11)

  아무리 하나님께서 주고자 하더라도 사람편에서 노력하는 것이 없다면 줄 수가 없다. 하나님의 약속은 해산의 수고를 다하여 구하는 자에게 준다는 약속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약속대로 행하는 신이시니 기도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방법이 있는데 하나님께로 받아야 할 인생이 먼저 필요성을 느끼고 구할 때에 두드리면서 찾아오는 심정이 생기기까지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환경에 떨어뜨리는 일이 있는 것이다(사26:16~17).

이것은 하나님의 선한 방법이니 하나님의 약속을 참으로 믿나 의심 하나를 보자는 모략의 방법이다. 그러므로 참된 기도가 있을 때는 반드시 어려운 환경에 떨어뜨리는 것이 더 큰 것을 주고자 하는 하나님의 모략적인 방법이다. 그러므로 과거의 역사를 보아도 큰 역사를 일으키는 종들에게는 다른 사람보다도 더 어려운 난관이 닥쳐왔던 것이다. 기도라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구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요, 할 수 없는 것을 믿는 것이 무소불능의 역사를 일으키는 하나님이 받으시는 기도가 될 것이다.

 

  3. 남을 대접하기를 목적 둔 기도이다 (12)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택한 자에게 더 좋은 것을 주어서 남을 살릴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해서 세세 왕권을 누리도록 하자는 것이 하나님의 큰 뜻이니 누구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마음보다도 남을 대접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인간을 초월한 하늘의 것을 주어서 기도의 사람을 통하여 남에게 만족한 것을 얻도록 한 것이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이다.  이것이 아니라면 기독교는 아무런 열매가 없을 것이다.  

  모든 선지와 사도들이 다 이러한 신앙 사상에서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을 마땅하게 생각하고 복음을 전했던 것이다.  그들은 조금도 사람에게 대접받기를 원한 것은 조금도 없고 하늘에서부터 주는 것 하나만을 목적했던 것이다(빌3:14~15). 그러므로 이러한 인격을 가진 자라야 조물주 하나님과 교통하는 기도에서 많은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결   론

  가장 어리석은 자는 기도를 하되 헛되이 구하는 자요, 가장 지혜로운 자는 참된 기도를 드리는 자로서 하나님께 더 좋은 것을 받아 길이길이 누리는 자라고 보게 된다.

 

 

기독교 통일의 완전성

- 계 10:11~11:2 -

 

  금일에 기독교가 세계적으로 대 확장을 본 것은 생명의 진리가 그 속에 있는 증거이다. 그러나 생명의 진리를 가진 종교가 통일이 못되고 여러 가지로 교파가 분열된 것은 유감인 동시에 결말이 어떻게 될 것이냐에 대하여 본문을 가지고 통일의 완전성을 말하게 된다. 오늘에 많은 교파가 십자가를 신앙하는 것만은 공통성을 가졌다는 것이 세계적인 승리를 가져 올 원동력이 될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를 신앙하는 자로써 무엇을 가지고 통일된 세계 평화의 왕국을 이루느냐에 대하여 깊이 알아야 할 일이라고 보게 된다. 기독교는 개인 영혼이 구원받는 것으로서 끝을 맺는 것이 아니고 단체적인 한 무리가 되어 새로운 시대에 지상 축복을 받는 것으로서 끝을 이루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으로써 한 단체가 되어 새로운 시대를 이루는 한 무리가 될 것이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세계적인 다시 예언이 있어야 한다 (10:11)

  다시 예언이라는 것은 이미 선지들에게 하나님께서 묵시로 보여준 예언서를 가지고 계10:7과 같이 외치게 되는 것인데 세상 나라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된다는 종말의 역사를 뜻한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말씀인 선지서는 목적이 지상 평화 왕국을 목적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 이때는 모든 선지의 예언서를 그대로 읽어서 증거할 시기가 왔다고 본다.

  예언서에 기록된 종말의 경고는 부패된 종교 지도자를 책망하는 일, 경제권의 세력에서 교만한 인간들을 책망하는 일, 백성의 뇌물을 먹는 정치인을 책망하는 일, 극도로 악화된 사회에 대하여 경고한 말씀인데 무서운 환란이 북방으로부터 내려올 것을 가르쳤고, 이 환란에서 남을 자는 이리저리도 치우치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용기 있게 나가는 자라야 필연코 하나님의 보호로 남게 될 일을 말할 때에, 주께서 심판자로 올 것을 가르쳤고, 가난하고 멸시받고 압박 받던 사람들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갈 때에 하나님의 응답이 내려 남은 백성이 될 것과, 하나님의 종도 시련 가운데 부르짖던 종들이 새로운 역사를 받고 동방에서부터 일어난다고 가르쳤다.

  그러면 이 때에 세계가 불탈 때라고 했으니 금일에 와서 누구든지 참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순교적인 정신을 가지고 나가는 자라면 다 하나같이 적그리스도의 나라인 북방과 타협할 수 없고 하나님의 정한 때의 묵시를 하나같이 깨닫고 환란과 재앙이 와도 교파를 초월하여 진리 안에서 하나가 되는 동시에 하나같이 증거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는데는 사도 요한은 계시로써 작은 책을 꿀같이 먹고 쓴 것이 있어도 다시 예언을 하라는 사명을 받았지만 이것은 종말의 사도 요한의 사명적인 영감을 받고 성경 전체의 예언을 다시 예언하는 대표적인 사람이 나타날 것을 뜻했다. 언제나 역사라는 것은 대표의 사람이 있으므로 일어난다는 것을 성경은 가르친다.

 

  2. 척량을 받게 되는 일로 완전 통일이 됨 (계11:1)

  언제나 척량이라는 것은 세계적으로 변치 못할 법이 있는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척량의 법을 지키지 않는다면 사회적으로도 큰 벌에 처하게 된다는 것은 일반이 아는 상식일 것이다. 그렇다면 말씀이라는 것은 아무렇게나 해석해도 좋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인간에게 어떤 방법으로 행하시겠다는 법이니 이 법을 어떠한 자나 변경할 수는 없다.

  이미 이루어진 십자가, 부활, 승천, 성신 강림도 선지의 예언이 일점 일획도 가감이 없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 기독교의 사도적인 사명이라면 이루어질 예언을 증거하는 일도 반드시 법적 측량이 있음 같이 법적인 해석이 있어야 할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예언의 말씀이 법적으로 되어 있지 않다면 기독교는 도저히 종말의 끝을 완전히 하나로 이룰 수 없는 열매 없는 종교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성전과 제단 안에서 경배하는 자라면 다 하나같이 척량을 받는다고 본서는 가르쳤다. 왜냐 할 때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양심으로는 이루어진 말씀이나 이루어질 말씀을 조금도 가감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종말에 완전한 영감으로 진리를 바로 증거하는 종이 나타날 때에 교파를 초월한 완전 통일의 진리 통합을 이루게 될 것이다.

 

  3. 척량을 받은 자 외에는 다 이방인에게 밟히는 환란에 떨어진다(11:2)

  하나님께서 이방 세력을 들어서 환란이 오게 하되 계시록의 붉은 짐승이 거짓 선지와 합세하여 나올 때에 용의 권세를 받은 짐승이 마흔 두달 동안 일할 권세를 받고 나오는 것을 대환란이라는 것이다(계13:4~5). 이것이 인류 역사의 마지막 환란이다. 이 환란에서 교회는 완전히 둘로 갈린다. 지금은 많은 교파가 있지만 그때는 환란에서 교회가 없어지느냐 남느냐에서 끝을 맺는 것이니 자동적으로 밟히는 교회가 나오고 주의 재림을 영접하고 새 시대에 들어가는 남은 종, 남은 교회가 나올 것이니 이것이 다시 예언의 사명을 가진 종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열매가 될 것이다.

  예언의 말씀을 합심하여 증거 하던 종은 신랑의 주를 맞이하여 변화 승천할 것이요 증거 하던 말을 순종하던 교회는 12장과 같이 예비처에 양육을 받고 15장과 같이 구원을 받게 된다. 세밀히 말하자면 예언의 말씀을 하나같이 증거 하던 종들은 권세의 종이 될 것이고 그 말을 듣고 회개하고 따라오던 무리들은 백성된 자격으로 계16:15과 같이 지상 강림하는 주님을 백성된 자격으로 영접하게 된다.

 

  결   론

  기독교 통일의 완전성이란 것은 자동적으로 통일을 가져올 시기가 올 것이니 예언의 말씀을 바로 증거하는 종을 통하여 재앙으로 땅을 치고 나가는 역사가 있으므로 기독교의 역사는 끝을 맺게 되므로 예언의 말씀으로만이 완전 통일을 보게 될 것이다. 이것은 예언대로 종된 자에게 승리의 역사가 내리고 예언대로 백성된 자에게 보호가 있고 예언대로 온 세계가 한시간 동안에 불탈 때에 남은 자가 새 시대에 들어가는 것이다.

 

 

교회를 위한 천사의 지시

- 계 22:16 -

 

  하나님께서 세계 만방에 교회를 세우신 것은 십자가의 승리로 이루어진 역사라고 보게 된다. 범죄에 떨어져 죽은 영들이 도저히 마귀의 흑암을 벗어날 수 없는 사망에서 승리의 십자가에 빛을 따라 올라오게 된 것은 기독교의 승리의 역사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잃었던 백성을 찾아서 생명록에 이름을 기록하는 것으로써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목적하여 모든 종들이 하나같이 기뻐하는 노래를 부르며 예배하는 것이 교회의 이날까지 내려온 역사로 보게 된다.

  그러나 천사를 보내어서 지시한 계시록은 영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천당으로 가는 것을 목적한 것이 아니고 무서운 환란과 재앙이 올 때에 모든 육체가 쓰러지는 진노의 날에 남은 자가 되어 지상에 천년 왕국이 이루어질 일을 목적하고 천사를 보내어 지시한 것을 계시록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날까지 교회 역사는 속죄 구령이라는 것으로만 목적했지만 계시록을 통하여 일어나는 역사는 화, 화, 화가 오는 재앙에서 그 화를 받지 않고 남은 종과 백성이 천년 왕국을 이루는 것을 지시할 때에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첫째 : 네 천사가 나타났다.

  이 천사는 땅과 바다를 해할 권세를 얻었다고 계7:1에 말했고 사람 삼분지 일을 죽이기로 예비한 자라고 계9:15에 말했다. 그러면 이것은 분명히 이 세상에 전멸이 오는 말기에 대표적인 나라를 뜻했다고 보게 된다. 인류역사가 강대국을 비롯하여 전쟁이 계속된 것이지만 이 네 대표의 나라로 말미암아 땅과 바다가 피해를 당하는 마지막 환란이 올 것을 보여준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환란이 올 때에 기독교는 어떠한 역사가 있을 것이냐 하는 것을 보여준 것이 다른 천사의 역사이다.

  둘째 : 해 돋는 데서 올라오는 다른 천사(계7:2).

  성도의 기도를 상달시키는 일(계8:3~5), 작은 책을 들고 사자같이 외치는 일(계10:3), 영원한 복음을 들고 바벨론이 망할 것을 말하는 일(계14:6~11). 이것은 분명히 기독교가 완전히 지상왕국을 이루는 역사를 뜻했다고 보게 된다.

  그러면 하나님의 종의 이마에 인을 친다는 일은 환란 가운데 남은 종이 재림의 주를 맞이할 때까지 역사할 일을 목적으로 보여준 것인데 이 종들의 역사는 끝을 맺는 역사이므로 기도가 상달되는 동시에 무서운 진노가 쏟아지는 것을 보여주는 반면에 작은 책을 들고 사자같이 외치는 것은 종말적인 심판의 경고가 되는 예언의 말씀을 증거하는 일이 있을 것을 뜻했고 바벨론이 망하는 동시에 누구든지 짐승 앞에 절하고 표를 받는 자는 다 망한다고 한 것은 심판 받을 것을 뜻했다.

  그러므로 이날까지는 그 영혼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이 교회에 종들의 사명이지만 재앙의 날에는 예언의 말씀을 증거 함으로 예언대로 교회가 보호를 받고 남은 백성이 되어서 지상왕국을 이루는 일을 목적 두고 증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언을 증거 하던 종들은 승천하는 일이 계시록 11장에 보여주었고 예언을 순종하던 자들이 환란에서 보호받고 새 시대 가는 것을 계시록 12장에서부터 20장까지 보여주었다.

  이날까지의 기독교는 이방 세력에 억울하게 박해를 받고 모든 종들이 쓰러져 죽으면서 영적 운동을 일으켰지만 종말에는 이방적인 짐승의 군대를 때려 없애 버리는 일을 할 것을 계시록에 백마 군대의 승리로 보여준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천사의 지시는 기독교가 완전히 원수를 승리하고 지상왕국을 이루는 것을 목적한 것이다.

  셋째 : 나팔부는 일곱 천사.

  이것은 인류 종말에 환란이 오는 순서를 보여줄 때에 8장에는 3분지 1의 피해가 올 것을 보여주었고 다음에 세계적인 화가 올 때에 첫째 화는 황충떼 난리가 날것과 인 맞은 종이 남은 자가 될 것을 보여주었고, 둘째 화는 대표적인 나라가 세계 인류의 전멸이라는 무서운 환란을 일으킬 때에 그때부터 오는 환란 속에서 보호를 받게 될 것을 보여주었고, 셋째 화는 지상 나라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될 것을 보여주었다. 그러면 이 나팔을 부는 천사는 환란의 순서를 보여준 것 뿐이다.

  넷째 : 일곱 대접을 가진 천사 (계시록 16장).

  이것은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이 재앙 심판을 받는 순서를 보여준 것이다. 그러므로 바벨론이 망해 버리는 것은 만 왕의 왕을 대적하는 짐승의 표를 받는 일을 하였기 때문에 만 왕의 왕이 지상 강림할 때에도 재앙을 내리어 몽땅 없애 버릴 것을 목적 둔 것이다. 이와 같이 천사가 지시한 일을 구약 선지서에 심판과 새 시대를 목적한 묵시의 글을 심판기에 교회가 바로 깨달아서 지키므로 지상왕국을 이루기 위한 데 완전한 복음이 되도록 보여준 것이다.

  이 복음 운동은 해 돋는 동방에서 나올 것을 보여주었다. 구약 시대에 바벨론이 동방 파사왕 고레스에게 멸망을 당하듯이 동방 역사 앞에 바벨론적인 세상은 망하게 되고 고레스의 명령으로 예루살렘이 복구되듯이 동방에서 일어나는 역사가 부패된 교회를 깨우쳐서 촛대교회를 이루는 지상왕국이 이루어질 것을 목적하고 보여준 계시라고 하게 된다.

 

 

베드로와 요한의 사명적 한계

- 요 21:15~21 -

 

  기독교는 사명의 한계선을 바로 지키는 것이 없다면은 주님은 역사할 수가 없다고 보게 된다. 그러므로 아무리 사명자가 부족하다 하여도 필연코 사명을 감당하도록 역사해 주는 것이 사명을 맡기신 주님의 의무라고 보게 된다.

  이제 베드로의 사명과 요한 사도의 사명의 한계선을 분명히 주님은 가르쳐 주셨다.

 

  1. 베드로의 사명적 한계 (15~19)

  아무리 베드로가 주님의 부활을 철저히 믿지 못하고 주님을 따라가다가 실수한 일이 있다 하여도 주님은 친히 베드로를 찾아오게 되었다. 왜냐하면 사명을 맡긴 목적을 분명히 알려서 베드로를 들어 쓰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고 있는 베드로를 두 번째 찾아갔다.  

  첫 번에도 목수의 한사람으로 갈릴리 바다에서 베드로를 부를 때에 나를 따라오면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고 할 때에 베드로는 용기있게 따라갔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완전한 사도의 직을 할 수 없는 인격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에 다시 고기를 잡으러 갈릴리를 찾아갔지마는 밤이 맟도록 고기 한 마리도 못 잡은 어부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 때에 부활하신 주님은 베드로를 두 번째 찾아갔다. 베드로를 보고 나를 따르라는 말을 하지 않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할 때에 베드로는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는 "주께서 아시나이다" 한 마디를 할 때에 “내 양을 먹이라”는 말씀을 거듭하시면서 베드로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을 말했다. 이것이 사명자를 쓰는 주님의 뜻이라고 보게 된다.  

  부활을 증거하는 사명을 맡은 자가 아무리 부족해도 부활만을 증거할 수 있는 사람이 되려면 성신의 권능을 주어서 사명을 감당하도록 해주시고 단 마음으로 순교까지 할 수 있는 힘을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날까지의 모든 종들은 이 사명적인 한계 안에서 움직이는 종들이라고 보게 된다. 완전한 사람에게 성신을 주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부활을 증거할 신앙이 있다면 무조건 은사를 주어서 들어 쓰되 순교라는 끝을 맺도록 해주는 것이 은혜 시대에 사명자의 한계라고 본다.  

 

  2. 사도 요한의 사명적인 한계 (20~23)

  요한은 베드로보다도 실수가 없고 대신 아들이라는 명분을 맡겼지마는 요한에게는 “내 양을 먹이라”는 말씀이 없고 베드로가 사명을 물어볼 때에 “내가 다시 올 때까지 머물러야 한다”고 말씀할 때에 모든 사람은 무슨 뜻인 줄을 모르고 죽지 않겠다는 말을 할 때에 육이 죽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고 그 사명을 내가 다시 올 때까지 머물러 둔다고 하는 뜻을 말하면서 너희는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 했던 것이다.  

  이것은 사도 요한이 최고의 영계에 도달하는 사람으로 완전 계시를 받아서 그 글을 통하여 기독교 종말의 역사가 있으므로 재림의 주를 영접할 변화성도의 역사가 따로 있을 것을 가르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베드로의 사명적 영감과 사도 요한의 사명적 영감이 시대로 구분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움직이는 종이 되어야만 될 것이다. 부활을 증거할 목적과 계시록을 증거하는 목적이 시대로 구분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만일 어떤 종이 베드로의 사명적인 영감을 받아 그것으로서 끝을 맺는 역사인 줄 알고 계시록을 자기가 받은 영감에 한계를 탈선하여 억지로 해석한다는 것은 큰 과오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죄인을 부르는 주님의 심정과 재앙을 나리는 진노의 날에 하나님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종이 하나님의 진노의 날에 설 수 있는 사명이 무엇인 것을 모르고 무조건 믿으면 된다는 생각은 너무나 얕은 영감에서 과오를 범하는 말이라고 보게 된다.  

  이제 사도 요한의 사명적인 한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알아야 할 것이다. 완전 영감이 있어야 된다. 왜냐하면 영감이라는 것은 부활을 증거하기 위한 한계의 영감이 있고 성경 전체의 숨은 비밀을 전하는 영감도 있으니 베드로도 이 영감을 자기는 받지 못했으니 이 예언의 말씀은 새벽 별이 마음에 떠오르는 역사가 있을 때까지는 해석하지를 말라고 벧후1:19~21까지 말했던 것이다. 바울도 나는 십자가 외에는 더 말할 수 없는 영감이라고 말할 때에 그리스도 한 분을 아는 지식이 자기의 사명이라는 것을 말했던 것이다(빌3:8~9).

  우리는 사람이 자기가 진리를 연구한다는 것은 오히려 교만을 가져오는 폐단이 있게 될 것이다. 이날까지의 많은 종들이 여기에서 큰 과오를 범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은 계시를 받을 적에 자기가 작은 책을 꿀같이 먹고 배에는 쓴데 다시 예언하라는 계시를 보았던 것이다(계10:11).

  이것은 앞으로 세계적인 대환란이 올 시기가 이 땅 3분의 1이 피해를 당하고 계시록 9장과 같이 흑암이 세계를 덮고 인명 3분의 1이 죽어버리는 전쟁이 계9:15과 같이 일어날 때에 주님 오실 때이니 그때에 가서 완전 영감의 역사가 올 것을 그는 계시로 보고 쓴 것이 계시록 11장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중동의 위기를 앞에 논 금일에 와서 소위 세계 평화라는 간판 밑에서 영계 흑암이 교회를 침투하는 이때에, 사도 요한이 본 계시록 11장과 같은 영감을 받고 나서는 일이 없이는 기독교의 통일을 가져 올 수도 없고 남은 교회가 될 촛대교회를 이룰 수가 없고 승천하기까지 복음을 증거하는 선지 사명을 할 수 없을 것이니 금일에 우리 사명자들은 사도 요한의 계시에 완전 영감을 받아야만 된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교파를 초월하여 완전 계시의 영감으로 하나같이 예언의 말씀을 증거하는 푸른 나무가 이루어지는 새로운 단체가 나와야만 될 것이다.

 

  결   론

  사명과 시대 또는 시대와 사명에 대하여서 우리는 바로 알고 이 시대에 선지적인 영감을 받는 일과 하나님의 비밀이 그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이루어진다는 복음 운동에 승리를 이루어야만 될 것이다.

 

 

난국을 당한 종들의 무장

- 계 7:1~3 -

 

  인류 역사의 가장 어려운 문제는 인류 전멸이라는 피해가 올 문제를 앞에 논 종들에 대한 문제인 것이다. 왜냐 할 때에 하나님의 종이 아닌 사람들은 큰 책임이 있지 않지만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인류 전멸이라는 무서운 바람이 불어올 앞을 놓고 어떻게 하여야 종된 자의 사명을 감당할 것이냐에 큰 문제가 되는 일을 보여주는 계시가 계시록 7장에 하나님의 종들이 이마에 인을 맞아야 된다는 일이다.

  이제 기독교 종말에 끝을 맺는 인류 전멸이라는 환란을 앞에 놓고 하나님의 종으로서 어떠한 무장을 가지느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행위로써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종이 되어야 한다 (계14:4)

  행위라는 것은 도덕적인 행위도 있고 진노의 날에 하나님께서 그 종을 아껴야 될 조건이 되는 행위도 있다. 어떠한 행위를 가진 종이 아끼는 종이 되느냐에 대하여 말한다. 종은 독립적인 행동을 취한다거나 또는 타협적인 행동을 취한다던가 주권적인 행동을 취해도 안되고 더럽히지 않는 일, 절개 있게 나가는 일, 순종하는 일, 주님에게만 속한 인격으로 거짓과 흠이 없어야만 된다는 것인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재앙의 날에 아낄 만한 조건이 되는 행위라고 본다.

  그러므로 언제나 하나님의 종은 이 일에 대하여만 모든 전력을 두는 것 외에는 전부가 하나님 앞에 가증한 일이 된다. 사람 앞에 그럴듯한 행위가 있다 해도 하나님이 볼 때에 가증한 것이 될 수 있으니 난국을 앞에 논 종은 절대적으로 맡은 일에만 충성을 다하는 자라야 하나님의 이름과 어린양의 이름이 이마에 쓰여지는 역사가 올 것이다.

  이 인이라는 것은 진노의 날에 내가 너를 아껴 보호하고 지켜 주고 승리하도록 역사해 주겠다는 인정의 인이다. 예를 든다면 나라에 충성을 다하는 사람에게 모든 권리를 맡기듯이 종된 자의 행위를 따라서 인정받는 종에게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권리를 맡긴 것이 인의 역사라는 것이다.

 

  2. 자유로운 행동을 할 수 있는 권세를 받아야 한다 (계11:3~6)

  자유로운 행동이라는 것은 죄와 상관이 없는 사람에게 마음대로 재앙으로 땅을 치며 마음대로 얼마든지 자유롭게 행동을 취해도 조금도 범죄가 없는 인격을 받아야 된다. 만일 난국을 돌파하고 나갈 종이 자유가 없어도 안될 것이요, 자유를 악용하는 자가 되어도 안 될 것이요, 하나님께 받은 자유의 권세를 가지고 악마를 쳐부수는 싸움을 할 수 있는 인격이 있는 자라야 종들의 이마에 인을 치는 일도 할 수 있고 원수를 물리치는 일도 할 수 있다.

  인을 친다는 것은 자유로운 권세를 받은 종을 통하여 모든 종들이 그 권세 아래서 하나 같이 승리하고 돌진해 나갈 수 있는 무리가 된 것을 말한다. 예를 든다면 싸움을 싸우는 한 군단이 대장의 권리 아래서 뭉쳐진 단체가 되듯이 말세에 자유로운 권세를 받은 종을 통하여 원수를 무찌르기 위하여 한 단체가 이루어지는 것을 가르쳐서 14만 4천의 12 지파의 이름을 기록하게 된 것이다.

  과거에 야곱의 12 지파가 야곱의 자손으로 단체를 움직이는 족속이 되듯이 이방과 타협하지 않고 선민적인 이스라엘이 성별된 생활을 하는 것 같이 말세에 거룩한 변화성도들이 환란과 재앙 가운데서 성별된 단체를 이룬 것을 14만 4천이라는 것이다.

 

  3. 완전 승리의 열매를 거둬야 한다 (계9:4)

  아무리 황충떼의 난리가 나도 인 맞은 종은 절대 피해를 안 당하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만 왕의 왕권 아래서 움직이는 권리 행사에 14만 4천이다. 만일 마귀의 악당들이 만 왕의 왕의 군대를 피해를 준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황충떼에게 인 맞지 않은 사람만 피해를 주라고 했던 것이다.

  만일 마귀가 하나님의 허락 없이 인 맞은 종을 피해를 줄 수 있다면 난국을 돌파하고 나갈 수 없을 것이로되, 만 왕의 왕이 모략적인 방법으로 참된 종만을 내세우기 위한 방법을 취한 것 뿐이니, 인 맞은 종은 절대 마귀의 자식인 악당들이 피해를 절대로 못 주게 된 것을 가르쳐서 14만 4천의 완전 승리를 이루는 역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완전 무장이라는 것은 만 왕의 왕 그리스도께서 최후의 결전을 하기 위하여 강권으로 한 일을 이루는 역사를 하나님의 종들의 인을 치는 역사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진노의 날이니 만큼 성별된 단체를 이루어서 원수를 갚기 위한 목적에서 행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사야 41장을 보면 동방에서 나오는 종은 원수를 회삼물 같이 짓밟고 나간다고 한 것은 14만 4천명의 강한 군대를 일으켜서 승리하는 뜻을 가르친 것이다.

 

  결   론

  기독교는 난국을 당할 때에 약해지고 또는 부패해서 환란을 일으키는 원수에게 굴복을 당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 아니고 인력으로 당할 수 없는 난국을 당하게 한 것은 하나님의 이름과 예수의 이름만이 높아지는 대 승리를 이루기 위하여 모략적인 방법으로 환란의 바람이 불어오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앞에 닥쳐오는 난국은 참된 종에게 영광을 주며 그 종들을 통하여 영광을 받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 되는 환란의 고개라고 하는 것이 대 환란인 것이다.

 

 

환란을 통과한 요한이 본 계시

- 계 1:9~20 -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종에게 환란을 당치 않게 하는 것이 거룩한 뜻이 아니고 환란을 통과시켜서 완전 계시를 받을 수 있는 영계 발전 단계에 이르렀을 때에 완전 계시를 보여준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무조건 그 사람의 영계를 높이는 것이 아니요, 여러 가지 난관을 돌파하고 나가면서 그 영계의 새로운 단계를 올라가게 하는 것이 공의이기 때문이다. 무엇이나 향상이라는 것은 공의의 법에 따라서 있는 것이니 아무리 중생을 받은 자라도 어려운 환란이 올 때에 쓰러지고 만다면 이 사람은 새로운 것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을 상실한 자라고 보게 된다.

  그러므로 환란이 있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종에게 완전한 인격, 완전한 영계의 자리에 이르게 하는 법이다. 사도 요한이 그리스도의 무서운 십자가 고난을 통과할 때에 그는 도망하지 않고 십자가 앞에서 그리스도의 부탁을 받되 ‘대신 아들이다’라는 큰 사명을 맡았던 것이다. 여기에는 한 인사적인 정도의 말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몸으로서 할 일을 대신하는 아들이 되었다.

  여기에는 큰 뜻이 있으니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으로 말미암아 모든 영들이 사망의 법을 벗어나서 생명의 법으로 옮겨지는 중생의 역사가 있으므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열매가 되고 사도 요한이 완전 계시를 받은 진리를 통하여 세상에 성도의 나라가 이루어지므로 첫째 아담이 잃었던 지상 축복을 둘째아담 예수를 통하여 이루어지되 대신 아들이 된 요한 사도가 받은 사명을 통하여 완전히 붉은 용의 세력이 없어지고 새로운 시대가 이루어지게 하는 사명을 뜻하였다고 보게 된다.

  이제 환란을 통과한 사도 요한이 받은 계시를 간단히 요지대로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

  이것은 재림의 주를 세상에서 영접할 종으로서 어떠한 신앙 노선에 서야만 될 것을 경고한 글이다.

  1) 아무리 하나님의 종이라도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이 식어지면 재림의 주를 맞이할 수 없다는 일(에베소 교회)

  2) 아무리 환란 궁핍이 와도 죽도록 충성을 다해야 된다는 일(서머나 교회)

  3) 아무리 순교적인 계통을 받았다 해도 불의와 타협하면 재림의 주를 영접할 수 없다(버가모 교회).

  4) 아무리 모든 일이 발전했다 해도 악의 세력을 용납하면 환란에 떨어진다는 일(두아디라 교회)

  5) 아무리 살았다는 이름이 있어도 말씀을 지켜 회개하는 일이 없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일(사데 교회)

  6) 아무리 미약해도 말씀을 받아 지키면 시험의 때를 면코 남은 교회가 된다는 일(빌라델비아 교회)

  7) 아무리 모든 일이 부족함이 없이 부요하다 해도 영적 활동이 없다면 소용이 없는 교회라는 일(라오디게아 교회)

  이와 같이 계시를 보인 것은 아무리 환란이 와도 남은 종으로서 남은 교회를 지키다가 주님을 맞이할 종들을 뜻한 것이다.

 

  2. 일곱 인

  이 인의 비밀은 안팎으로 기록한 책의 비밀인데 이것은 주님이 재림할 때에 정치와 사상으로 대립되므로 불가피에 무서운 환란이 주님 재림시에 올 것을 보여준 것인데 흰 말 탄 자와 붉은 말 탄 자와 검은 말 탄 자와 얼룩말 탄 자가 나타난 것은 무서운 진노가 올 앞에 놓고 일어날 세력을 뜻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의의 세력이 승리하게 할 때에 악의 세력도 동등권을 주어서 대립시켜 놓고 하나님 편에 선 자로 끝까지 참고 나가는 자가 승리하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선한 모략의 방법이다.

  그러므로 4대 병마가 대립될 때 순교자의 동무가 되는 수가 차면 하나님의 진노의 날이 온다는 것을 계시록 6장에 보여준 것이다. 계시록은 억울함을 당하던 순교자의 피 값을 갚아 주므로 아담 때부터 싸우던 옛 뱀 용의 세력과 사단의 도구가 되는 인간들이 다 전멸을 당하고 끝까지 말씀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고 싸우던 자들이 승리의 왕국을 이루어 세세 왕권을 받게 될 것을 목적한 것인데 그 비밀을 천사를 통하여 지시한 것이다.

 

  3. 일곱 천사의 나팔

  이것은 말세에 환란이 오되 순서 있게 오는데는 악자를 들어서 1/3의 피해를 세상이 받게 하고, 세계적인 무서운 환란이 오되 권세 받은 종들이라야 남아서 역사 하게 되는 첫째 화가 오고, 하나님의 완전한 촛대교회가 무서운 대환란 중에서 악당의 피해를 당치 않고 보호를 받고 나가는 때에 오는 화는 여섯째 나팔 불 때에 중동에서 환란이 올 것을 가르쳤고, 택한 자만이 남아서 성도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날은 누구든지 참된 성도의 증거를 순종치 않던 무리는 망할 것을 가르쳤다.

  그러므로 일곱 천사는 나팔을 불어서 마지막 환란이 오는 순서를 보여줬고 바람을 잡은 네 천사는 인류 종말에 무서운 전쟁이 오는 광경을 보여 주었는데 대표적인 나라를 뜻했고 다른 천사는 기독교 종말에 마지막 역사를 보여준 것이다.

 

  4. 일곱 천사의 대접 (계시록 16장)

  이것은 반 기독적인 사회가 모두 망하는 광경을 보여 주었다. 짐승의 표를 받은 음녀적인 세상이 완전히 망하므로 성도의 나라가 세상에 이루어진다는 것인데, 이 재앙은 피 값을 갚아 주는 재앙이다.

  그러므로 옛날 선지도 하나같이 억울하게 박해를 당하는 자리에서 심판과 새 시대에 대한 묵시를 볼 때에 하나님이 피 값을 갚아 줄 것과 새로운 성도의 나라를 보여 주었고, 사도 요한도 무서운 네로 황제의 박해에서 그 환란을 통과하고 남은 종의 하나로 쓰라린 고통을 참고 나가 밧모라는 섬에서 마지막 환란이 올 것과 마지막 역사가 일어날 것과 원수를 갚아 주는 심판이 오고 새 시대가 올 것을 보았다.

  그러므로 지금도 누구든지 억울함을 당하고 환란이 와도 참고 나가는 자라야 순교자들이 받은 묵시의 글을 바로 알고 나가서 전하게 될 것이다.

 

 

참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

- 요 4:22~26 -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예배를 받으시고 역사하는 신이시다. 왜냐할 때에 타락한 인생에게 완전한 것을 주고자 하는 것이니 죄를 진 인간에게 무조건 준다는 것은 불의와 타협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과거에 타락한 인생이 희생의 제물을 바치는 것을 받으시고 응답하셨지만, 그리스도의 완전 속죄가 성립된 후에는 희생의 제물이 중심된 제사가 아니고 예배를 중심 하는 것인데 참된 예배가 있는 자에게 역사하는 것이다. 이제 참된 예배를 드리는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의 심정은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의 요구를 들어주는 예배를 원하심 (22)

  하나님의 요구라는 것은 합심을 요구하신다(마5:24). 합심이라는 것은 하나님께로 향하는 마음인데, 서로가 부족을 깨닫는 동시에 하나님께로 오는 것을 받지 않고는 도저히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마음이 생길 때에 서로가 화목을 이루는 합심이 생긴다. 예배라는 것은 완전한 사람이 되므로 예배하는 것이 아니고, 불완전한 인간이 자기 부족을 깨닫는 동시에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하는 마음이 불타게 될 때에 자동적으로 예배는 신령한 세계로 기울어지게 될 것이다.

  구약 때 이스라엘에 사마리아가 생긴 것은 하나가 되지 못하고 따로 그리심산에서 예루살렘과 담을 막고 제사할 때에 하나님은 그들의 제사를 받지 않았던 것이다. 금일에 기독교가 예배를 드린다 하여도 이모저모로 서로 합심이 되지 않는 예배는 오히려 하나님의 마음을 괴롭히는 것밖에 없다. 이것은 자녀들이 각각 자기 요구를 들어 달라고 할 때에 부모의 마음은 오히려 괴로움을 느끼는 것같이 오늘의 기독교가 시대적인 하나님의 법을 순종치 않고 자기 주관을 내세우는 예배는 옛날 사마리아가 망하듯이 큰 화를 받게 되는 예배가 될 것이다.

 

  2. 시대적인 진리의 법을 따라서 예배하는 것을 원하신다 (23)

  하나님은 그 시대를 따라 법이 있고 법에 따라서 역사하는 신이시니 아무리 예배를 드린다 하여도 시대의 법을 순종치 않는 예배는 받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언제나 그 시대 사람에게 비밀을 알려주고 그 진리를 신앙하는 마음을 가지고 예배할 때에 진리를 순종하는 마음으로 예배하는 자에게 시대적인 축복을 나리는 것이다.

  아무리 예루살렘이 거룩하고 성전이 거룩하다 하여도 그리스도의 영원한 속죄인 십자가법을 무시하고 예배하던 예루살렘은 황폐화된 것이다. 비록 미약한 무리이지만 십자가 부활을 증거할 목적으로 예루살렘 다락방에서 기도하던 무리에게 큰 응답이 내렸던 것이다. 예배라는 것은 진리를 믿는 자들이 진리를 순종하며 진리를 따라 나리는 은총을 받기 위한 것이 예배의 목적이며 은총을 주고자 하는 하나님은 이러한 예배를 원하신다.

  아무리 예배한다 하여도 진리의 법을 그대로 순종하는 것이 없다면 진리의 신은 역사 하다가도 떠나는 것이다. 왜냐하면 진리의 신이 아무런 역사를 할 수 없는 불법이 있기 때문이다. 세상 나라도 국법에 위반된 요구를 들어준다면 요구를 들어준 자에게 혹독한 형벌이 있을 것이다. 하물며 조물주 하나님께서 진리의 법을 따르지 않는 장소의 예배를 조금도 받을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3. 신령한 역사가 영적으로 통하는 예배를 원하신다 (24)

  예배는 영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상대하는 것이니 아무리 의식과 모든 설비가 장치되었다 하여도 영적 운동을 중심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찬송이나 기도가 영으로 시행되어야 할 것이다(엡5:19). 언제나 영으로 하나님과 교통이 없는 예배라는 것은 아무런 열매가 없는 횡설수설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람의 영을 통하여 활동하며 역사하는 것이니 영적 예배를 드리려면 몸은 제물에 불과한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롬12:1). 몸이라는 것은 예배 시간에 아무런 활동이 없고 영에 이끌려서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게 사로잡히는 자리를 이루어야 될 것이다.

  예배 시에 몸에 국한된 생각으로 시간이 지루한 생각을 느끼게 된다면 영적 예배를 이루는 것이라고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예배에는 몸은 성령의 은혜 속에 잠겨 있을 것 뿐이다. 이렇게 되므로 하나님은 예배를 통하여 당신의 말씀을 새롭게 나타내기도 하고 말씀대로 열매를 맺도록 해 주시는 것이다.

 

  결   론

  예배라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찾는 것보다도 하나님이 사람을 찾는 사랑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니 누구든지 합당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사람으로 보일 때에 하나님은 그러한 예배를 받으시기 원하는 것이므로 억지로 되는 일이 없고 자유스러운 예배가 이루어진다. 이 자유라는 것은 성신의 자유다. 예배하는 자가 억지로 사람에 보이려는 의식이나 법에 국한된다면 자동적으로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 외식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참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는 것이 예배의 원칙이 된다.

 

 

새 시대를 이룰 인격

- 사 11:1~9 -

 

  새 시대라는 것은 원수의 세력이 북방으로부터 온 세계를 정복할 야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침략적 정치를 가지고 인간의 지혜와 총명을 자랑하며 자기의 독자적인 권리를 자랑하며 나오는 일이 세상 끝에 있을 것을 이사야 10장에 말했고 11장에는 북방이 아무리 강하지만 그것을 없애고 새 시대를 이룰 자의 인격을 말할 때에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완전한 새 시대를 이룰 열매를 맺는다고 가르쳤다.  

  이제 새로운 시대를 이룰 인격은 어떠한 인격이라는 것을 본문을 통하여 알 수 있다.

 

  1. 여호와의 신을 받은 자다 (2)

  하나님은 새 시대 건설에 왕권 가질 사람을 이새의 줄기에서 나온다고 한 것은 비록 농촌에서 양을 치는 목자의 하나의 이새의 가정에서 다윗 같은 용사가 나온다는 것에서 부터가 새 시대 건설에 원동력이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이새의 아들 중 여덟째 아들인 다윗이 여호와 하나님만 의지하는 용사로서 선지국가를 이루어 그 나라에서 모든 선지가 하나같이 묵시를 볼 때에 아무리 약소한 다윗 왕국이지만 필연코 새로운 시대를 이룰 왕권은 다윗의 왕권이라는 것을 중심하여 묵시를 보았던 것이다.  

  아무리 북방 앗수르와 바벨론이 강하여 인간이 볼 때에는 앗수르와 바벨론이 세계를 통치할 것으로 보이지만 새 시대를 이룰 때는 북방 앗수르가 망하고 다윗 왕국에서 나올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계 통일의 새로운 왕국을 이룰 것을 말했으니 이 앗수르와 바벨론은 어느 때를 가르쳤느냐 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인류 종말에 북방으로부터 오는 적그리스도의 나라를 가르쳤다.  

  그렇다면 새 시대를 이룰 인격은 그리스도 한 분을 가르쳐 말한 것이 아니고 그 계통인 사명자 말세의 종을 가르쳤다고 보게 된다. 종된 자의 인격이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인격이니 가지를 통하여 맺는 것은 말세에 변화성도의 인격을 가르쳤다고 본다. 변화성도라는 것은 그 종을 통하여 완전히 지상에서 남은 종으로 새 시대를 이루는 역사를 생존 변화성도의 역사라는 것이다.  변화성도가 전하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시대가 이루어지는 완전 지식이 된다.

  그러므로 완전 지혜와 총명의 신을 받으므로 새 시대를 이루는 진리 운동에 완전한 열매를 맺게 되니 이것은 그 종을 통하여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세상이 다 알게 된다. 이날까지의 숨었던 모든 비밀이 그 종을 통하여 다 알도록 전하게 될 것이며 아무리 원수의 세력이 악한 모략으로 강하게 들어온다 하여도 모략과 재능의 신이 여호와께로 오므로 오히려 원수가 그 앞에서 굴복을 당하게 된다. 이렇게 된 것은 북방 세력이 아무리 인간의 방법을 가지고 교만하게 나온다 하여도 결국은 새 시대를 이루는 하나님의 모략의 도구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신을 완전히 받은 인격 앞에 정복을 당하게 될 것은 모든 세상 만사가 하나님의 장중에서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모르는 인간들은 스스로 속는 인격이니 여호와의 신을 받은 사람 앞에 부끄러움을 당할 날이 오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여호와의 신을 받으므로만이 조금도 실수가 없는 지식의 사람이 될 것이다. 완전한 지식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분명히 아는 지식일 것이니 이 지식만으로 세계 통일의 인격을 이룰 것이다.

 

  2. 심판권을 받은 인격이다 (3~4)

  심판이라는 것은 조금도 잘못된 판단이 없는 인격이라야 되는 것이니 하나님의 완전한 역사를 받아서 신과 같이 쓰이는 자 외에는 세계를 바로 통치할 자가 없다. 자고이래로 인간의 정치라는 것은 사람의 두뇌로 하는 것이니 침략적인 정신을 가지고 남의 것을 빼앗고자하는 야심에서 불의한 정책을 하므로 반드시 망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신의 판단을 자신이 받고 신의 판단 아래에서 남을 바로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신의 도구가 될 수 있다. 하나님의 도구가 되는 인격이 아니고는 기독교 종말에 완전 역사를 하지 못하므로 세계 통치라는 것은 하나님의 도구로 쓰이는 자라야 필연코 새 시대를 이룰 것이다. 사람이라는 것은 아무 것도 바로 판단할 수 없는 것이니 오직 심판자는 여호와의 신이시므로 여호와의 신에 이끌려 쓰여지는 자로 새 시대를 이루는 열매가 있을 것이다.

 

  3. 공의와 성실로 이루어지는 인격이다 (5)

  사람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가 무엇인 것을 알 때에 조금도 가감이 없는 신앙 양심에서 성실로 몸의 띠를 삼고 나가는 자 외에는 새 시대를 이룰 수가 없다. 왜냐하면 새 시대는 공의로운 말씀으로 이루어지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이스라엘 야곱이라 하여도 공의로운 말씀에 순종치 않을 적에 용서 없이 죽이는 심판이기 때문이다.

  새 시대라는 것은 다림줄의 진리로 이루어지는 시대이니 공의로운 말씀이 완전히 무장된 인격이라야 될 것이다. 하나님은 조금도 말씀이 가감된 자에게 역사할 수가 없으므로 아무리 빈한한 자라도 말씀에 떠는 자라면 말씀대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권고가 같이 하므로 필연코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새 시대의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결   론

  새 시대라는 것은 지상왕국을 가르친 것인데 이것은 천국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가지된 종이 그리스도 왕국을 이루는 지상 평화 시대를 말한다. 창조의 목적을 완전히 이루는 시대를 새 시대라 하는 것이다.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했지만 아담이 범죄 하므로 이 땅에 저주를 받았던 것인데 말세에 나타난 그리스도를 통하여 종말에 남은 종으로 지상에 축복이 이루어지는 왕국을 가르친 것이다.

 

 

장 년  공 과 편- 다윗 왕국의 승리

 

  제1과  승리의 징조

  - 사 7:10~22,  요절:14 -

 

  서 론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하나님 편을 약하게 하고 원수의 편은 강하게 하여 사람으로서는 떨 수밖에 없는 난관을 당하게 한다. 아하스 왕 때에 이방적인 세력 앞에 다윗 왕국은 떨 수밖에 없는 사정을 당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실 때 반드시 승리할 징조를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1대지 :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한 것이다 (14)

  승리하는 것은 신성을 가진 사람이 아니고는 도저히 완전 승리를 이룰 자는 전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첫째 아담이 범죄 하므로 타락한 범죄를 부모의 피로 계통 되는 인생은 감히 세계 통일의 완전한 승리를 이룬 자가 없다. 왜냐하면 큰 짐승이 작은 짐승을 잡아먹듯이 세상 나라가 강한 자가 약자를 잡아먹었다는 것이 인류의 역사를 이룬 것이다.

  그러나 처녀에게 성령으로 잉태된 임마누엘은 인간이 볼 때에 가장 약하게 보이는 작은 나라, 작은 동네, 작은 가정, 작은 아이로 태어났지만 처녀가 남편이 없이 신의 완전성을 가지고 탄생하였기 때문에 이것이 세계를 정복할 완전 승리의 징조가 된다는 것이다.

 

  2대지 : 선을 택하는 일이다 (15)

  인간은 아무리 악한 일을 하는 자라도 세력을 주면은 그 앞에 굴복하는 것이 인간이다. 그러나 임마누엘은 아무리 약하다 하더라도 선한 자를 들어 강한 자를 거꾸러뜨리는 것이니 우리는 악의 세력을 조금도 무서워 말고 선한 그리스도의 뒤만을 따르는 자가 된다면 반드시 승리하게 되는 증거가 있게 된다. 만일 이러한 것이 없다면 새로운 시대는 도저히 이룰 수가 없을 것이로되 임마누엘은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할 수 있는 권리가 있으므로 반드시 세계 통일의 완전한 왕국을 이룰 수가 있다.

 

  3대지 : 인간의 힘을 초월한 승리의 역사이다 (18~22)

  북방의 세력이 아무리 삭도 같이 강하게 세력을 잡고 나간다 하여도 필연코 승리는 임마누엘에게 있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모략적인 방법으로 북방을 들어서 쓰는 것이니 이것은 남은 자로 새 시대를 이루게 할 목적이다. 우리는 금일에 북방이 강해지는 것은 필연코 우리 기독교가 승리할 징조라고 본다. 왜냐하면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을 기록하게 한 목적이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께서 해주신다는 목적으로 어려운 난국을 당하는 선지들에게 묵시를 받아서 기록하게 한 것이다.

 

  결 론

  하나님은 언제나 징조를 먼저 보이면서 역사하시는 신이시니 그리스도께서 동정녀 몸에 탄생했다는 것이 강한 북방이 망하고 새로운 시대가 올 큰 징조인 것이다. 우리는 금일에 완전 승리의 큰 징조가 이미 나타난 것을 믿을 때에 종말의 승리가 필연코 말씀대로 온다는 것을 믿고 담대히 나가야 할 것이다.

 

 

제2과  승리의 열심

- 사9:1~12,  요절:7 -

 

  서 론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약해서 도저히 악마를 이길 수 없는 것을 아시고 여호와의 열심으로 승리케 하되 어떠한 방법으로 승리하게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방법을 가르친 그 말씀에 순종한다는 결심만 가지고 나선다면 필연코 승리는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 있다는 것이다. 이제 승리의 열심이 하나님께로 인간에게 부여되는 일을 본문은 가르친 것을 알아보기로 한다.

 

  1대지 : 갈릴리를 영화롭게 한 열심 (1)

  세계 만국을 마귀 권세 아래서 구출시키는 역사가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 목수의 가정에서부터 시작되되 목수의 한 사람인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세계를 구출시키는 역사를 하되 벳새다 동네의 어부들을 택하여 금일에 세계적인 구원의 큰 열매를 이루어 놓았다는 것은 초인간적인 여호와의 열심이라는 것을 누구나 부인할 수 없다.

  하나님의 열심이라는 것은 가난하고 무식해도 겸손하게 순종하는 자에게 온다는 것을 우리는 여기서 배우게 된다. 그러므로 시작이 이렇게 된 기독교는 다윗 왕국이 완전히 이루어질 일도 여호와의 열심으로 될 것은 사실이다.

 

  2대지 : 사망에서 빛으로 옮겨 놓는 열심 (2)

  세상에 많은 종교가 있지만은 순간적으로 죽었던 영들이 갑자기 생명의 빛을 받아 살아난다는 것은 여호와 열심이 같이 하는 기독교 밖에는 없다는 것을 우리는 체험하게 된다. 이러한 체험이 없다면 우리는 도저히 금일에 새로운 힘을 얻지 못할 것이로되 내 영이 분명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내적 증거가 확실하기 때문에 무슨 일을 당하든지 하나님만 바라볼 때에 객관적인 영적 세계에서 오는 산 체험을 계속으로 가진 것을 열심이 있는 생명의 종교적 신앙이라는 것이다.

 

  3대지 : 약자로 강자를 이기게 한 열심 (3~7)

  과거에 기드온은 미디안 군대를 칠 때 하나님은 강한 군대를 원치 않고 적은 용사 3백명 만 요구하여 칼을 들지 않고 횃불을 들므로 승리의 열매를 이루게 한 것은 앞으로 우리 기독교가 아무리 이방세력이 강한 위력을 가지고 온다 하여도 진리의 봉홧불을 높이 들 때에 여호와의 열심이 천사를 동원하여 적군을 칠 것을 가르쳤다.

  아무리 원수가 강하다 하여도 여호와의 열심 앞에 전멸을 당하고 어린아이로 나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전한 왕국을 이루는 데는 영원한 왕국이 될 것을 말씀했다. 세세 왕권이라는 것은 어떤 권력이나 인간의 정권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의 왕국은 인간이 볼 때에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으나 여호와의 열심으로 이루어질 것을 말씀했다.

  우리는 금일에 여호와의 열심이 어떠한 자에게 오느냐 하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아무리 야곱이라 하여도 자기 힘으로 한다고 생각하는 자는 오히려 하나님께서 대적을 들어서 그를 치겠다는 것이다(8~12).

 

  결 론

  인간의 완전 승리는 여호와의 열심에 있다는 것을 믿고 순종한다는 것은 심히 드문 일이라고 보게 된다. 그러므로 기독교 역사가 갈릴리 바다에서부터 동방 바다 옆이 되는 우리 나라에까지 복음이 전파된 일은 장구한 시일이 걸렸지만 원수를 없이하고 다윗 왕국을 완전히 이룬다는 것은 오히려 잠깐 되는 쉬운 일이라고 성경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아무리 지금 원수의 세력이 강하다 해도 다윗 왕국이 승리한다는 것은 초인간적인 힘으로 되는 것이니 오히려 쉬운 일이라고 우리는 생각하게 된다. 인간은 어떤 장구한 계획적인 방법이 필요 없고 그때그때 믿음으로 순종할 뿐이다.

 

 

제3과  북방을 막대기로 쓰고 승리케 함

- 사 10:12~27,  요절:23 -

 

  서 론

  하나님은 언제나 악한 자를 강하게 들어 쓰면서 다윗의 왕국을 승리하게 한 것이 과거이며 또는 미래가 될 것이다. 구약시대에 강국을 들어서 환란이 오게 하면서 인간의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는 난국을 당할 때에 다윗 왕국을 들어서 이방을 이기게 하는 동시에 인간 종말에 될 일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제 다윗 왕국의 승리에 대하여 하나님의 모략적인 방법이 무슨 뜻이냐 한 것을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1대지 : 악자를 들어 쓰는 일 (11~15)

  하나님께서 공의의 신이시니 아무리 사랑한 자라도 순종치 않을 적에 하나님이 직접 치는 것도 아니고 순종치 않는 자를 지배할 권리가 있는 마귀의 나라를 들어서 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의 법이니 공의라는 것은 순종하면 하나님이 싸워 주고 순종치 않으면 마귀의 세력에 맡긴다는 것이 공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윗 왕국이 말씀에 순종치 않을 적에 언제나 강한 이방을 들어 썼던 것이다. 강한 이방이 이 모략을 모르고 오히려 교만해서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기 힘을 자랑하게 될 때에 강한 이방을 없애 버리는 하나님의 모략적인 방법이라는 것이다.

 

  2대지 : 거룩한 자를 들어 승리케 하심 (16~19)

  거룩이라는 것은 아무리 두려운 일이 와도 낙심할 일이 와도 마음이 동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떠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을 거룩한 생활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가 될 때에 하나님은 불같이 강하게 권세를 주어서 원수의 세력을 승리케 한다는 것이다.

 

  3대지 : 남은 자로 완전한 왕국을 이룸 (20~27)

  다윗 왕국은 거룩한 신정으로 이 땅에 세계 통일의 평화 왕국을 이룰 것을 목표하고 예언적인 왕국으로 세웠던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왕국이라는 것은 다윗 왕국의 종말에 승리를 예언한 대로 완전히 열매가 되는 다윗 왕국이다.

  이것은 남은 자로써 이루어지는 새 시대를 말한 것이니 남은 자라는 것은 북방 환란이 올 때에 그 세력 앞에 굴복하지도 않고 또는 죽지도 않고 초인간적인 하나님의 힘으로 싸워 남은 자가 되었으므로 이 사람들은 완전한 거룩한 왕국을 이룰 수 있는 사람들이므로 하나님은 구약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워 주신 것 같이 마지막 때에 완전 승리하도록 역사할 것을 말씀한 것이다. 우리는 아무리 지금 북방의 환란이 온다 해도 거룩한 자가 되고 보면 필연코 승리는 하나님의 역사에 있다는 것을 믿어야 될 것이다.

 

  결 론

  다윗 왕국의 역사와 또는 그 나라에 대하여서는 예언한 선지의 기록된 진리는 목적이 완전 승리의 왕국이 예수 그리스도가 통치하는 시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분명히 알도록 가르친 것을 여호와의 책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승리는 반드시 북방 환란이 종말에 오고야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북방과 타협하지 말고 싸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본다.

 

 

제4과  가지로 승리케 하심

- 사 11:1~5,  요절:2 -

 

  서 론

  하나님께서는 완전한 승리에 왕국을 이루는 것을 한 가지로 말미암아 승리에 열매가 이루어지므로 완전한 평화 왕국이 이루어질 것을 말씀하셨다. 그러면 가지라는 것은 환란과 재앙 속에서 남은 자가 새로운 시대를 이루는데는 그 역사는 가지 된 종에게 완전한 역사를 내려 완전한 열매가 된다 한 것은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자로서 북방 환란이 올 때에 승리를 이룰 변화성도의 역사를 가르친 것이다.

 

  1대지 : 완전한 역사가 임하므로 됨 (1~2)

  이날까지에 종들에게 임하는 역사는 완전역사라고 볼 수 없고 교회를 확장시키기 위한 역사라고 보게 된다. 그러나 완전한 열매를 이루는 역사는 교회 확장이 아니고 완전한 결실을 맺는 역사라고 보며 지혜, 총명, 모략, 재능, 지식, 경외의 신이 임하므로 이루어지는 역사이다. 이루어진 십자가 부활을 증거하는 역사는 죽은 영이 중생 받는 것으로써 목적을 두고 역사하기 때문에 완전한 역사가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성경이 완전히 다 이루어지는 역사가 아니고 이미 이루어진 십자가와 부활을 죽은 영들에게 전하므로 그 영을 구원해 주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북방 환란이 10장과 같이 오는 날에 그 환란을 이기고 그 몸이 살아서 새 시대를 이루는 역사는 성경에 모든 예언이 다 이루어지는 역사이니 가지 되는 종에게 완전한 역사를 부어 주지 않는다면 도저히 역사할 수가 없는 시기이므로 하나님께서 그때에 진리를 바로 전하기 위한 목적에서 완전한 신의 역사를 부어 주므로써 하나님의 숨은 비밀을 다 전하게 되는 것이다.

 

  2대지 : 완전한 인격을 이루심 (3)

  완전한 인격이란 것은 여호와를 경외하므로 즐거움을 삼는 인격이니 이것은 하나님과 직접 교통하는 인격이다. 이러한 자라면은 보는 대로 듣는 대로 판단하지 않는 영계 분별을 가지고서 다른 사람을 바로 지도 할 수 있는 인도자가 될 수 있다. 만일 어떤 종이 듣는 대로 보는 대로 치우친다면 그 사람이 완전한 열매를 맺는 가지가 될 수 없다.

  가지라는 것은 스스로 독립적인 행동을 할 수 없고 그루터기로부터 오는 진액을 받으므로써 움직이는 것이니 어느 종이든지 주님과 영적으로 교통하는 종은 사람에게 듣고 보는 대로 판단하지 않고 깊은 영감을 받아 모든 일을 바로 분별하므로 실수하지 않게 된다.

 

  3대지 : 승리의 권세를 받게 됨 (4~5)

  이 권세라는 것은 말세의 종이 원수를 무찌르고 나가는 용사로써 주의 명령을 따라서 악인을 쳐 이기고 세계 통치하는 권세를 맡은 것이다. 예를 든다면 대장의 명령 하에서 원수를 쳐 물리치듯이 말세에 북방 세력을 10:26~27과 같이 치는 역사라는 것이다.

  아무리 악자의 세력이 강하더라도 말세에 진리를 가지고 싸우는 용사 앞에 쓰러뜨림을 받게 되는 것을 기독교의 완전 승리의 역사라는 것이다. 이것은 원수를 갚는 하나님께서 가지가 되는 종에게 권세를 주어서 승리케 하는 일을 하겠다는 것이다(계19:19~20).

 

  결 론

  완전이라는 것은 새로운 왕국이 이루어지므로 6~9절 같이 이루어지는 역사를 기독교 종말에 완전 승리에 다윗의 왕권 통치에 평화 안식에 시대라는 것이다.

 

 

논 설 편

 

1. 70년부터 기독교의 나아가야 할 방향

  우리는 20세기 반기가 지난 60년부터 70년까지 시대적인 큰 변동을 가져오는데는 이날까지의 과학 발전은 인류의 생활에 큰 발전을 가져오는 과학이었지마는 60년부터 70년까지에 과학 발전은 세계 인류를 큰 공포에 떨어뜨릴 불안을 가져오는 사회를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이날까지의 전쟁은 기름진 땅덩어리를 점령해보려는 야욕을 가진 전쟁이어서 잃는 자는 슬퍼해도 점령하는 자는 세계에 영웅적인 기세를 날리며 강대국이라는 세력 아래서 그 나라 국민은 어디를 가나 모든 나라 사람에게 문화인이라 또는 강대한 국민이라는 이름 아래서 그때 그때에 세상의 향락을 누린 일도 없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금일에 와서 전쟁은 이러한 정치적인 소망은 없어지고 어떠하든지 싸우지 말고 나가 보자는 소위 평화 공존이라는 간판 밑에서 악질적인 야욕을 가진 공산 사상은 자기 때를 만난듯이 세계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무대를 갖되 양피낭심의 위선자의 탈을 쓰고 거룩한 이름을 빌려 가지고 교회에까지 침투하는 위기를 만난 기독교는, 소위 평화공존이라는 것을 가지고 십자가의 사랑이라고 하는 껍데기를 쓰고, 세계 교회를 음녀화시키는 행동을 하고 나오는 거짓 선지들이 소위 통합이라는 문제를 걸고 진리 통합보다도 큰 교파가 자기의 교권 아래 하나가 되는 데는 성경은 십자가를 믿음으로 다 이루었으니 이제는 성경만 가지고는 기독교는 시대적인 사명을 다할 수 없다는 소리를 하면서 성경을 전부 과거로 돌리는 학설을 뻔뻔스럽게 쓰고 있다.

  그러나 참된 크리스챤의 오메가의 역사는 세상 나라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는데는 계10:7, 11:15과 같이 된다는 것을 성경 본문주의로 들어가서 선지서의 목적을 바로 나가서 증거할 때가 왔다. 모든 선지는 다윗 왕국의 부패로 북방 앗수르와 바벨론에게 밟힐 때 그들은 눈물 흘려 경고의 나팔을 나가서 불게 될 때에 거짓 선지와 부패한 정권과 악화된 사회 사람은 참된 선지를 미친 사람으로 취급하고 가장 그 시대에 보조를 맞추어 나가는 거짓 선지라야 옳다고 인정하는 때에 참된 선지는 축출을 받고 멸시를 받고 심지어 죽이는 일까지 있었다.  

  그때 그들은 사람에게는 버림을 당했으나 하나님과 완전히 교통할 수 있는 영계에 들어가서 직접 하나님께로 오는 말씀을 받아서 기록할 때 목적이 원수를 갚아주고 너희를 통하여 새로운 왕국이 올 것을 묵시로 받아 기록할 때 그 왕국에 평화의 왕은 그리스도라는 것을 말할 때에 그리스도의 탄생과 십자가 부활, 승천, 성신 강림이 있되 이 역사는 세계적이라는 것을 말하고, 다음에 가서 구약 말기와 같이 종교 부패, 정치 부패, 인심 악화, 경제 혼란이 오는 동시에 북방으로부터 부패한 이스라엘을 짓밟는 환란이 올 것을 말하고, 북방에서 나오는 세력을 없애버리는 역사는 해 돋는 동방 땅 끝에서 나올 것을 말할 때에, 구약 종말에 바벨론을 친 고레스의 사실을 예를 들어서 말씀했던 것이다.

  이 때에 예루살렘이 복구된 사실을 들어서 성도의 나라가 영원히 이 땅에 이루어진다고 가르친 것이 성경에 기록한 인류 종말에 예언이 보였다.

  그러면 70년부터 우리 기독교는 과거의 케케묵은 정통 신학설 보다도 좀 더 진보적으로 나가는 심판의 다림줄의 변론이 있어야 될 것이며 은사에 날뛰던 사람들이 심든 사람과 같이 침착해지는 동시에 성경의 완전 지식을 배워야 할 것이며 소위 통합이라는 간판을 가지고 들어온 거짓 선지의 변론을 때려부수는 완전 변론이 충분히 나타나서 말씀 권세의 역사로 교회를 개혁시키는 촛대교회 운동이 일어나지 않고는 도저히 기독교는 이제부터 큰 위기를 만났다고 보게 된다.

  그러므로 각 교파에 있는 참된 크리스챤은 하나같이 각성을 받고 시대적인 변론에 바로 서서 봉홧불을 높이 드는 일이 있어야만 될 때가 70년이라고 보며, 이 해에 일어나야만 교회는 산다고 확실히 깨닫는 마음으로 간곡한 부탁을 하는 바이다.

 

2. 기독교 통일의 전망을 말한다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기독교는 통일될 것이냐 할 것은 어느 교파를 막론하고 하나같이 관심을 두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교파가 독자적인 세계 통일의 전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망상에 불과한 교만일 것이다.

  기독교라는 것은 교파를 위한 기독교가 아니고 진리를 위하여 피 흘려 싸운 것이 역사인 동시에 미래가 될 것이다. 그러면 우리 기독교는 마지막 싸움을 어떠한 진리로 싸워야 할 것이냐 하는 것을 깊이 깨닫지 못한다면 진리가 아닌 미로에서 허덕이다가 한 일 없이 끝을 맺게 된다면 주의 날에 설 적에 주님은 그들을 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이 다시 올 때에 그날은 용서의 날이 아니요 진노의 날이기 때문이다. 진노의 날에 기독교는 어떻게 통일이 될 것이냐 하는 것은 성서를 통하여서 분명히 알 수가 있다.

  진노라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라도 그날에 관한 법칙이 되는 말씀을 안 지키면 아무리 사랑하는 자라도 용서할 수가 없다는 것이 하나님의 법이기 때문이다. 죄를 모르는 에덴 동산에서도 말씀을 지키지 않을 때에 용서 없이 쫓아내서 죽게 했거든 소위 하나님의 교회라 하는 간판을 가지고 말씀을 밝히지도 않고 지키려고 힘쓰지도 않고 덮어놓고 믿으면 된다는 망설을 하고 있는 형편을 우리가 보게 된다. 덮어놓고 믿음으로만 된다는 미명하에서는 얼마든지 사단은 교회를 침투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왜냐 할 때에 진노의 날이라는 것은 마귀 흑암을 개방시키어 누구든지 말씀을 가하고 감하는 자가 있다면 다 유혹을 주라는 것이 진노의 날이 오는 때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마귀를 들어 쓰되 진리로 하나되게 하기 위한 목적에서 하나님은 마귀를 들어 쓴다고 봐야 한다. 이제 붉은 용과 붉은 짐승과 거짓 선지의 세력을 극도로 강하게 들어서 교회의 통일을 자동적으로 되도록 이루어 놓을 것이다.

  왜냐하면 알곡을 한데 모으기 위해서는 무서운 마귀 세력을 들어서 쭉정이를 다 골라내는 환란의 바람이 오게하므로 남은 자만이 새 시대를 들어가는데는 남은 교회가 나오게 된다. 이것은 종말의 진리를 바로 알아서 바로 증거하고 지키는 자에게만 하나님은 역사하고 그 밖의 사람은 다 버리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말씀 중심에서 남은 종이 나오고 남은 교회가 나오고 남은 자를 들어서 역사 하는 종말의 역사가 크게 일어나고 주님은 다시 오실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통일을 위하여 사람의 어떤 방침이라는 것은 하등에 필요가 없고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분명히 바로 알아서 말씀 하나에서 종된 인격을 찾아내고 교회를 이루어 놓고 나갈 때에 이 사람들로 말미암아 남은 자가 되게 하는데는 이것만은 하나님께서 책임을 지고 싸워줄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를 바로 증거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역사하므로만이 바로 알 수도 있고 증거할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나”라는 자체를 없애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생활에서만 그날 그날에 바로 움직인다면 하나님은 그 사람을 통하여 바른 진리를 증거하도록 하는 것도 하나님이요, 이런 사람을 들어서 승리하게 하는 것도 하나님이니 인간의 힘과 능은 하등에 필요가 없는 진노의 날에 기독교 통일을 이루게 되므로 기독교로 말미암아 새로운 시대를 이루게 될 것이다.

 

 

3. 시국 난제 해결은 무엇으로 될 것인가에 대하여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그 시대 사람에게 새로운 일을 나타낼 때는 인력으로 막을 수 없는 난국을 당하게 하고 사람으로서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가는 자가 있을 적에 그 사람을 들어서 난국을 돌파함으로써 시대 변천의 새로운 역사를 하게 하는 것이 인류역사의 뚜렷한 사실인 동시에 미래가 될 것이다.

  양심 시대가 언약 신앙 시대로 바뀌어지는 때에 양심을 지켜야 할 셋의 후손이 양심을 떠난 가인의 후손과 혼혈이 되어 나날이 양심을 떠난 사람이 양심을 지켜야 할 사람을 삼켜 버리는 난국을 당할 때에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난국을 해결할 수 없이 되었다. 그 때에 하나님이 노아에게 나타나서 물로 심판할 것을 명하고 방주 준비의 예언을 전하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끝까지 부패에 떨어져서 순종치 않을 때에 다 전멸을 당하고 8명만이 남은 사람으로 영원한 언약이 성립되는 시대를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언약 신앙 시대가 율법 시대로 들어갈 때에 언약을 받은 야곱의 12지파는 인력으로써 어찌할 수 없는 난국을 당하게 된 것은 할례 받지 못한 이방 민족이 할례를 받은 민족을 학살시키되 아들을 낳으면 죽이는 일까지 있었던 것이다. 이때에 인력으로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난국에서 여호와 불꽃 가운데 나타나 모세를 들어서 그 난국을 해결하고 홍해를 육지같이 건너서 메마른 사막에서 하늘로서 내리는 만나를 먹고 반석에서 터지는 생수를 먹고 나가서 율법 시대에 관한 법률을 하나님께로 받아서 율법적인 교회가 완전히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성전이 어려운 난국을 당하게 된 것은 성전의 권리를 거짓 선지들이 잡게 되고 참된 양심 있는 자들은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난국에 처한 것이 메시야 탄생이라는 것이다. 예루살렘 거리에 왕래하는 바리새교인은 다 양의 옷을 입고 이리의 마음을 품은 독사의 자식이라는 책망을 받게 될 때에 예루살렘 성전 안에 있는 무리들은 세상 죄를 걸머지고 온 메시야와 큰 원수가 되고 그 나라 정권 잡은 정객들이나 교권을 잡은 바리새인들이 다 메시야의 원수가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셔서 죽기까지 싸워야 될 일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이 부패된 종교를 신약에 성신 역사 하는 신령한 교회로 이루는 은혜 시대가 올 때에 하나님은 큰 혁명을 일으키는 일을 할 때에 예루살렘 성전에는 저주를 내리고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는 불같은 성령을 부어 주게 되므로 율법적인 유대교가 복음적인 기독교와 큰 원수가 되는 대립이 되어 기독교는 세계적인 확장을 보게 되고 예루살렘 성전은 돌 한 개도 돌 위에 첩 놓이지 않고 무너지고 말았던 것이다.

  기독교는 세계 대 확장을 보게 된 금일에 기독교의 난국은 무엇이냐 할 때에 적 그리스도의 정권이 세계를 짓밟게 된 일, 거짓 선지자의 교권이 교회를 몽땅 삼키게 된 일, 세계 평화를 꿈꾸던 자들이 불가피 불바다가 되더라도 전쟁을 안 할 수 없게 된 일, 기독교 강단이 부패되어 가련한 양들이 다 피곤에 떨어지게 된 현실에 이 난국을 어떻게 돌파하느냐 하는 것이 제일 큰 문제인데 전무후무한 환란과 재앙이 있게 될 때에 전무후무한 역사는 기독교에 있을 것은 사실이다.

  그러면 기독교는 전무후무한 역사는 무엇이냐 하는 것을 우리는 성경에서 바로 알아야 되는 동시에 그 역사를 하나님께로 받아서 난국을 돌파하고 나가는 종이 되어야만 될 것이니 이러한 종이 되는 데에는 다음과 같은 요소가 있다.

 

  1. 모든 난제 해결은 말씀이 이루어지는데 있다는 것을 알고 조금도 말씀에 가감 없는 완전무장을 받아 완전변론 역사로 마귀 흑암을 물리치는 일일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말씀을 바로 읽고 듣고 지키느냐 하는 것을 시험해 보기 위하여 마귀 흑암을 개방시킨 것이니 말씀 권세의 종이 될 때에 흑암 중에서 남은 종이 될 것이다.

  2. 모든 난제는 하나님의 보호로 해결될 것이니 어떠한 교회가 남은 교회가 된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서 단체적으로 하나님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교회를 이루어 놓는 일이다. 하나님께서 앞으로 무서운 환란이 북방에서 오게 하는 것은 참된 교회만을 남겨 놓기 위한 방법이니 촛대 교회가 될 때에 그 교회는 절대 피해를 당하지 않도록 보호하는 것이 예언이 이루어지는 역사라는 것이다.

  3. 어떠한 방법으로 하나님은 보호한다는 진리를 믿고 순종하는 것 밖에는 없다. 그러므로 노아의 가정이 순종할 때에 난국을 돌파한 것같이 말세에 예언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만이 가정적으로 자손만대에 축복을 받게 되는 지상 왕국이 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가 이 난국을 돌파하는 것은 계시록과 선지서를 통하여서만이 완전 승리의 길을 가게 되는 동시에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신약의 4복음서와 편지서는 씨를 뿌리는데 필요한 복음이라면 계시록과 선지서의 전체는 종말에 난국을 돌파하고 새 시대에 들어가는데 필요한 복음이 되는 것이다.

 

 

4. 공산 청년과 기독 청년에 대하여

  우리는 청년이 없이 사회나 교회나 새로운 발전을 가져올 수 없다는 것은 일반이 아는 상식이다. 그러나 청년을 바로 지도하고 못하는 데에 따라서 사회의 흥망과 교회의 흥망이 좌우될 것이다. 지금 소위 세계 공산화를 꿈꾸는 공산국가는 청년을 기를 때에 공산사상을 넣어서 일종의 자기 한 도구로 삼는 수법을 쓰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허위 선전이 청년을 기르는데 교재가 된다.

  이것은 청년을 양심을 길러주고 그의 인격을 길러준다는 것보다도 짐승을 기르는 사람이 짐승을 길들여 부리듯이 사람을 자기의 도구로 쓰기 위한 목적에서 마비적인 상태에서 날뛰게 만드는 폐단을 보게 된다. 사람이라는 것은 거짓이 없는 진리를 받아서 진정한 자유에서 자유로운 활동을 할 수 있는 세계를 이루는 것이 인생의 가치를 발휘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자유를 악용시켜 한 정당 아래 국한된 자유로 공산 청년을 기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둘도 모르고 공산당 하나만 아는 좁은 범위 하에서 망령된 행동을 하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아무 것도 모르고 세계를 공산화시킨다는 그 욕망을 길러 놓고 아무 것도 모르는 허위 선전의 변론이 그들의 한 표제가 되게 만들어서 내세우는 것인데 이 청년들은 죽음을 피할 수 없이 나가야 된다.

  다시 말하면 그들의 죽음이라는 것은 위에서 죽인다는 공포 속에 떨면서 나가야 된다. 마치 짐승을 때릴 때에 짐승이 뛰는 것이 자기 스스로가 아니고 무조건 아파서 뛰듯이 공산 청년은 아무런 소망 없이 소위 최고인민위원회라는 그 기관에 복종해야만 되는 한 무리가 되고 마는 것이다. 이들이 강해지는 것은 완전한 인격에서가 아니고 악화된 사상에서 마귀 도구가 되는 것 뿐이다.

  그러나 기독 청년이라는 것은 어떻게 하여야 되느냐에 대하여 말한다. 지금 기독교 안에 청년들이 아무런 뚜렷한 진리를 못 가지고 기독교를 한 오락적인 취미에 드나들고 있는 무리도 있고 또는 한 수양적인 문화라는 정신에서 자기의 어떤 명예를 내세우는 자는 야욕적인 허영에서 날뛰는 자도 있고 또는 신비를 체험한 청년으로 신비의 세계에서 청년의 인격을 상실하고 공연히 쓸데없는 시간을 보내면서 광적인 신앙 노선을 걷는 자도 있다. 또는 정통이라는 관념을 신학적으로 받아 가지고 자기 외에는 정통이 없다는 좁은 길에서 바짝 마른 나무같이 자기가 배운 범위 하에서 고집만 부리는 폐단도 있다.

  우리는 이제 기독 청년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우리는 이 시기를 역사적인 신앙 체계에서 미래를 바로 알고 이 시대에 적합한 기독 청년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 시대 청년들에게 그 시대의 비밀을 바로 알게 하여서 진리의 도구로 쓰시는 하나님이니 우리가 이 시국에 대한 진리를 성서에서 바로 찾아 진리가 사상 정신이 되어 진리 안에서 새로운 역사를 인격적으로 받아 이 시대에 해야 할 일을 해야 된다고 본다.

 

  2. 기독 청년은 공산 청년과 같이 도구가 되면 이것은 아무런 가치 없는 일이 될 것이니 각자 각자가 하나님께로부터 지혜를 받고 총명을 받아 바로 보고, 바로 듣고, 바로 말할 수 있는 명철한 사람이 되되 인간 과학을 초월한 하나님의 지혜와 총명의 신을 받아 시대에 따라 움직여 할 일이 무엇인 것을 스스로 분별할 수 있는 영적 발전을 소유하여 영의 사람으로 움직이는 활동이 있어야 될 것이다.

 

  3. 지금은 천당을 목적한 청년들이 아니고 우리가 난국을 돌파하고 넘으면 어떠한 시대가 온다는 것을 계시록과 선지서를 통하여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의 대적인 공산 청년은 성서에 입각하여 어떠한 노선에서 허덕이고 있다는 것을 바로 알아 그 청년들의 결말이 성서적으로 무엇이라는 것을 아는 지식의 사람이 되어야 된다.

  왜냐 할 때에 공산당이라는 것은 심판기에 한 마귀의 도구로 쓰여지는 것 뿐이고 아무리 그들이 강하다 하여도 기독 청년 앞에 전멸된다는 진리를 성서에서 바로 알아 나의 승리는 여호와께 있다는 진리를 완전히 믿는 동시에 진리대로 오는 역사를 받아야 될 것이다.

 

  4. 하나님의 모략이 무엇인 것을 알아서 하나님의 모략적인 방법에서 아무리 난관이 와도 난관은 오히려 여호와의 영광을 보게 되는 기회라는 것을 분명히 믿고 과거에 하나님의 사람들이 역사적으로 내려온 일은 우리에게 될 표적이라는 것을 알고 강하게 나가야만 될 것이다.

 

  5. 가장 행복한 자는 기독 청년인 것을 알고 하나님의 축복을 목적하고 싸우는 야곱적인 청년이 되어야 될 것이다.

 

 

5. 촛대교회 목회자에 대하여

  촛대교회라는 것은 흑암이 온 땅을 덮을 때에 빛의 등대가 되는 교회를 가르친 것이니, 촛대교회의 강단은 마귀의 흑암을 뚫고 나가는 교회를 말한다. 이날까지 교회는 원죄와 자범죄로 흑암의 권세 잡은 마귀 지배를 받던 영들을 중생시켜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을 목적 둔 것이요, 촛대교회는 마귀가 죄가 없는 자라도 흑암으로 덮고 나올 수 있는 권리를 받고 나오는 때이다. 이것이 마지막 인간 종말의 영계라는 것이다.

  에덴 동산의 아담 하와가 죄가 없어도 마귀로 미혹을 시켜 본 일은 그 미혹을 이기면 네 몸이 영생을 하고 이기지 못하면 네 몸이 죽는다는 법을 놓고 시험해 본 것이다. 그와 같이 살아서 새 시대에 가는 에덴 축복 받을 하나님의 자녀는 다시 한번 마귀 흑암으로 미혹을 시켜 보는 시기를 인류 종말의 세계를 덮는 흑암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촛대교회 목회자는 말씀이 완전히 밝아서 강단에서 예배를 인도할 때 한마디 말도 혼선이 없는 변론으로 증거하되 흑암의 세력이 물러가도록 하는 말씀 권세가 있어야만 된다. 말씀 권세라는 것은 하나님 말씀의 비밀을 정확히 증거할 때 하나님의 권세 역사가 그 말씀을 통하여 같이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촛대교회는 속죄 구령의 진리를 중심한 것이 아니고 그 몸이 살아서 새 시대를 정복하는 목적을 두고 움직이는 진리 운동이니 만큼 이 진리에 조금도 혼선이 없는 자가 되어야만 하나님은 그 교회에 역사를 내리므로 재앙이 들어오지 못하는 교회가 된다. 다음은 자신이 변화성도의 인격을 하나님께로 받으므로 변화 성결이라는 체험을 가지는 동시에 아무런 일이라도 거기에 압력을 받지 않는 인격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은 은사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권세 새 힘으로 이루어지는 인격이니 변화성도의 인격을 말한다. 누구든지 사단의 압력을 받는 인격이라면 도저히 촛대 교회의 목회를 못할 것은 흑암 중에 남은 교회를 일으킬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은혜시대에는 중생을 받은 자라면 죽은 영들이 살아나는 은혜 역사를 할 수 있되 은혜를 받은 교회를 흑암으로 까불어보는 때이니 만큼 자신이 흑암을 뚫고 나가는 자격을 받는 자가 돼야만 주님 올 때까지 흑암 중에서 교회를 지켜 나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촛대교회 목회자는 언제나 쉬지 않고 노력할 수 있는 영력을 받아야만 된다. 왜냐하면 전쟁이 나는 그 때에 군대가 쉴 수 없이 맘을 놓지 못하고 싸울 수 있는 인내력이 있어야만 자격이 있는 것과 같이 마지막 환란 때 싸움에 승리하는 용사적인 영계에 들어간 자라야 남은 촛대교회의 종이 될 수가 있다.

  그러므로 계시록에 촛대교회 사자는 믿음으로 된다는 말이 없이 이겨야만 된다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영혼 구원은 믿음에 있고 환란 가운데 남은 자가 되는 것은 이기는 자만이 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촛대교회 사자에게 준 말씀대로 읽고 듣고 지킬 말씀은 계시록의 다림줄의 진리요 선지서일 것이다. 만일 이러한 일이 없다면 아무런 열매 없는 나무가 되므로 찍힘을 당하는 나무가 될 것이다.

 

 

6. 촛대교회 주일학교 선생에 대하여

  촛대교회 주일 학교라는 것은 그 어린이들을 새 시대의 종족으로 되게 하는 목적을 두고 움직이는 기관이다. 그러므로 선생이 언제나 어린이들에게 압력이 되는 죽음이라는 말을 무서워하지 않도록 절대 원수를 무서워하지 않도록 강한 정신을 넣어주는데 목적을 두어야 한다. 철두철미한 사상이 박히도록 훈련을 주되 너희는 절대로 재앙이 와도 죽지 않는다는 신앙심을 길러주는데서 그들이 말씀을 들을 때 씩씩한 용기가 생기도록 활발성이 있게 인도해야 된다.

  쓸데없는 동화를 엄금한다. 언제나 시국을 잘 말해주면서 공산당의 나쁜 점이 무엇이라는 것과 이것은 마귀의 도구라는 것과 이 앞에 조금이라도 굴복하면 하나님이 학생들을 미워하고 절대로 보호하지 않는다는 것을 철저히 말할 때에 언제나 소망이 있는 예언서의 간단한 성경 절수를 거듭 읽어가면서 그 예언의 말씀이 어린이들에게 마음 판에 박히도록 가르치는데 전력을 두어야 한다.

  이렇게 하므로 학생들이 학교에 가서 배우는 과학보다도 하나님 말씀이 귀하다는 생각이 나도록 할 때에 과학적 전쟁으로 사람이 죽게 되는 일을 말하면서 성경과 맞추어서 말할 때에 과학은 이렇게 사람을 죽이지만 우리 주일 학교에서 배우는 진리는 하나님 말씀인데 이러한 가운데서도 학생들을 살려주는 말씀이 얼마나 가치가 있고 귀하냐 하는 정신을 넣어주어서 학생들이 과학을 배우는 것보다도 하나님 말씀을 배우는 일이 더 귀하다고 생각이 나서 주일학교를 세상 학교보다도 더 훌륭하게 생각이 나도록 정신을 넣어주어야 한다.

  그리고 선생은 언제나 학생들을 가르칠 때에 묻고 대답을 시켜 가면서 그들에게 만족을 주도록 진리를 넣어 주어야 한다. 언제나 학생들에게 새 노래를 부르게 할 때 그 마디마디 가사를 가지고 설교를 중심하여 뜻을 말할 때는 반드시 그 축복을 받는 강한 호소를 시키면서 인도해야만 된다.

  주일학교에 오는 학생들이 재미있게 이야기를 듣는 데나 중점을 두지 않고 그 말씀대로 그 시간 시간 축복을 받고 간다는 생각이 불타도록 만들어서 학생들의 힘을 강하게 길러주어야 할 것이다. 학생들에게 사단의 행동이 강하게 올 것이니 주일 학교 선생은 학생들을 끼고 들어오는 마귀 압력에 눌려서는 아니 된다.

  그러므로 선생님이 권세를 받는 자가 되어야 학생을 끼고 들어오는 마귀 흑암이 벗어질 때 그들은 체험을 받는 일이 각각 있게 되므로 무신론 사상이 학생에게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는 일이 있어야 한다.

 

 

7. 한국 교회의 사명에 대하여

  우리는 셈의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한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왜냐하면 금일에 셈의 장막은 다 교회가 황폐되고 남한 반도를 내놓은 것은 여호와의 영광이 이 땅에 나타날 징조라고 보게 된다. 왜냐할 때에 셈의 하나님은 셈의 장막에 올 환란과 또는 동방 땅 끝에서 일어날 역사를 중심하여 하나같이 묵시를 보인 것이다.

  오늘에 셈의 장막에 억울한 피가 호소하는 그 응답은 야벳의 장막으로 올 것이 아니고 무너지다 남은 우리 남한 교회에 나릴 것이니 이제부터 한국 교회는 교파를 초월한 진리 통합에 목적을 두고 남한 교회에 보내신 심판의 다림줄을 굳게 잡고 나서야 할 것이다.

  우리가 오는 복을 받아야 할 것이니 어찌하여 이 나라에 임한 진리를 자세히 알아도 보지 않고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너무나 경솔하고 망령된 일이 아닐 수 없다. 한국의 정통 신학자들이 심지어 천년 왕국이 없다고 주장해도 이것은 정통 신학이라고 하면서 천년 왕국에 들어갈 참된 진리가 한국 교단에 나타난 것은 어찌 조금인들 경홀히 볼 수가 있는가.

  만일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뜻을 이루기 위하여 역사하는 데도 불구하고 대적한다는 것은 큰 막대기를 맞을 우려가 있는 것이니 하나님의 징계가 다시 올까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눈물 흘리며 종들이 기도할 일이요 남의 말에 동요 받는 경솔한 자 되지 말고 좀 더 무겁게 생각하고 이 나라에 나타난 말세 비밀의 진리를 완전히 상고해 볼 필요가 노회와 총회의 회원들까지도 있다고 본다.

  한국 교회가 W.C.C.에 정식 가입을 했다는 것은 한국 교회의 사명이 아니다. 우리는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할 남한 교회가 협상적인 노선에 발을 들여놓는다면 셈의 장막에서 피 흘린 종들의 피 값을 어찌할 것인가? 쓸데없는 일에 시간 보내지 말고 해야할 일을 시간을 아껴가며 하는 한국 교회가 되기를 바란다.

  우리는 심령 부흥회로 끝을 맺는 사명이 아니요, 세계를 깨우치는 다시 예언의 말씀으로 나서야 할 사명이 한국 교회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8. 변화성도가 일어날 때는 왔다.

  기독교는 변화성도가 단결하여서 일어나야 할 때는 오늘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모든 선지는 하나같이 묵시를 볼 때에 전 세계 인류에게 복음이 전파된 다음에 북방으로부터 앗수르와 바벨론적인 세력이 중동을 중심하여 남침하는 환란이 올 때에 인력으로 막을 수가 없으나 변화성도가 일어남으로 각 나라의 남은 자로 말미암아 북방이 망하게 되고 새로운 시대가 온다고 하나같이 묵시를 보았다.

  극동 난제가 해결될 일은 변화 승천할 종들이 엘리야 모세같이 역사하는 일이 있으므로 동방 난제가 해결될 것을 계시록과 선지서에 가르쳤으니 우리 기독교는 천당을 목적하고 싸울 때가 아니고 북방 세력이 무너지고 새 시대가 올 것을 목적하고 싸워야 될 것이다.

  변화성도가 전할 말씀은 계시록과 선지서이니 이것을 전하지 않고는 멸공 운동을 할 수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진리 없는 멸공이라는 것은 힘줄 없는 지체 같아서 아무런 열매가 없을 것이다.

  멸공이라는 것은 자본주의적인 정책으로 이긴다고 성경은 가르치지 않았고 종말에 진리 운동이 일어나서 진리로써 북방을 대적할 때에 하나님은 진리대로 북방을 때려부수고 진리대로 보호하고 진리대로 새 시대가 올 것을 가르쳤다. 그러므로 공산당의 허위 선전에 속지 않게 하는 것은 변화성도가 완전 변론의 진리를 가지고 공산당의 정책과 사상과 또는 멸망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성경에서 찾아 들고 나서야 할 때이다.

  오늘에 북방 세력이 강해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변화성도에게 권세를 주어서 북방을 치게 하고 하나님이 누구 신지를 세상이 알게 하는 동시에 큰 회개 운동이 일어남으로 많은 백성이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새로운 시대에 들어가는데는 북방 세력을 없애는 동시에 그를 용납하던 자 까지도 없앤다는 것이 기독교 성경의 종말론이니 이 진리는 변화성도가 싸워야 할 사명이며 받아야 될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특 집

 

1. 6.25를 회상하면서

  인간 역사상 가장 큰 일은 무서운 환란이 오고 환란을 통과한 후에 눈물 없고 죽음 없는 새 시대가 오는 일일 것이다.

  오늘에 6.25의 아침을 맞이하여 20년이라는 흘러온 역사는 생각해 보면 이것은 무서운 대 환란이 올 싹이 트기 시작한 때가 1950년이라고 보게 된다. 붉은 혁명의 불길이 지상 3분지 1을 다 살라 버리고 삼천리 금수강산에 허리를 북으로 끊어 절반을 집어삼킨 불길은 남한을 마저 집어삼키려 했지만 이것마저 없어진다면 모든 선지의 예언을 도저히 다시 세상에 전할 수 없는 일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동방 땅 끝 해 돋는 편에서 다시 예언하는 종말의 역사가 일어나서 세계 열방을 깨우치고 북방 세력이 그때 가서 동방 땅 끝에서 예언하는 역사 앞에 바람 앞에 겨가 날 듯이 없어지고 새로운 시대가 온다고 한 예언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남한을 붉은 마귀에게 먹힘을 당하도록 하나님은 버려 둘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때 하나님은 직접 나타나지 않으시고 열방을 격동을 주어서 그 불길을 남한에서 꺼 버리고 만 것이다. 하나님이 직접 나타날 때는 아직 아니기 때문에 의로운 종들이 쓰러지고 모든 건물이 다 파괴되어도 하나님은 이것이 마지막 때가 아니므로 잠잠히 순교자의 영들을 하늘에서 불러 그 반열에 수를 채우는 일도 했다고 본다. 왜냐하면 순교자의 반열이 지금은 죽어서가 아니고 변화성도가 일어나야 할 때가 왔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때부터 나팔 부는 시대로 들어가게 했던 것이다.  

  인류 역사상 제일 큰 일은 인류가 한 시간에 전멸되는 무서운 무력적인 전쟁이 완비되는 일일 것이다. 무서운 6.25 동란이 우리에게 피난 생활을 하게 했지만 이제 다시 환란의 바람이 터진다면 우리의 피난처는 하나님밖에 없는 때가 왔다는 것을 인간이 볼 때는 비극이요 영안을 뜨고 진리의 거울을 대고 들여다볼 때 분명히 우리의 안식할 새 땅이 뚜렷이 그 앞에 도착한 것을 보게 된다.

  또는 양떼들이 울며 나를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치는 슬픈 광경이 교회에 닥쳐왔다. 이것은 소위 평화라는 간판을 내놓고 심판기에 심판의 대상자가 되는 정권과 타협을 하는 것은 기독교를 죽이는 쑥물이 된다. 왜냐하면 심판기에는 붉은 짐승과 조금이라도 타협이 있으면 누구든지 죽는다는 심판의 다림줄이 성경에 뚜렷이 있기 때문이다.

  금일에 성경을 들고 자세히 읽어보면서 눈물 흘려 다시 예언을 할 때가 왔는데도 불구하고 그와 반대로 성서에서 떠난 소위 세속주의라는 신학까지 나온 것은 섶을 지고 불을 찾아 들어가는 격이라고 보게 된다. 왜냐하면 세상은 하루아침에 불타서 망할 수밖에 없는 심판기에 기독교가 세속화라는 것은 세상과 함께 망하자는 말이다.

  또 기독교가 큰 흑암을 만나게 된 일이 있는데 이 땅 3분지 1이 복음 운동을 못하고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된 일도 기독교의 큰 재앙이지만은 그것보다도 온 세계 교회가 이때에 깊이 잠들어 때를 모르고 오히려 세상에 교회 밖의 사람보다도 더 이 시대를 두렵게 생각을 안하고 방심적인 태도에서 오락화 되고, 음녀화 되고, 심지어 모이기를 싫어하고, 개인적인 방랑 자유를 찾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화가 올 일이 아니라고 할 수가 어디 있겠는가.

  사랑하는 종들이 어느 날까지나 짖지 못하는 개같이 할말을 못하고 교권에 눌리고, 자기의 생활 문제에 마음이 눌리고, 자기라는 위신 보따리를 뒤집어 이고 우물거리고 있겠는가. 우리는 오늘부터 박차버리고 나서는 새로운 출발이 없다면 우리의 앞길은 예루살렘이 바벨론에게 먹힘을 당한 것 같이 교회는 다 바벨화 되고 말 것은 사실이 아닌가. 만일 우리들이 바벨에게 먹힘을 당하는 광경을 보고도 짐짓 입을 다물인다면 두아디라 교회가 이세벨을 용납한 죄로 대환란에 빠진다는 경고가 우리에게 올 것이 아닌가.

  뜻 깊은 6.25후에 20년이라는 기간은 인간이 볼 때에 어제 같이 생각이 나지만은 이 기간에 세상은 극도로 심판이라는 불구렁이로 떨어져 들어가는 절정기를 이루었다. 교회가 만일 지금 상태로 나간다면 세상과 같이 망할 것이다. 20년이라는 기간은 우리 종들이 어떻게 지내왔는가? 무엇을 했는가? 과연 이제 오는 난제를 돌파하고 나갈 무장을 했는가? 이것이 우리에게 크게 근심할 일이며 또는 베옷을 입고 슬피 울며 제단 사이에서 울어야 할 일이다. 70년에 6.25 아침을 맞이해서 뜻 깊은 새로운 감사 속에서 눈물 흘려 기도하고 간단한 경고의 말씀을 여러 교회 앞에 기록하게 됩니다.

 

 

편 집 후 기

  오랜 산고 끝에 드디어 첫 울음을 터뜨렸다. 시작이 반이라는 옛말이 있듯이 이제 준비 과정을 마치고 이미 출항 명령은 떨어졌다. 그러나 막상 빈 두 주먹만 가지고 시작한 대업인 만큼 난항을 면치 못한 숱한 애로와 난관을 뚫고 기구는 물론 책상 하나도 없이 강권으로 시작케 하여 `아름다운 소식`을 탄생케 하신 여호와께 영광과 감사를 진심으로 돌립니다.

  - 흑암에 덮인 교계와 숨은 종을 찾아 국내는 물론 멀리 해외까지 건너갈 `아름다운 소식`의 사명과 면모를 갖추었을까 하는 두려운 마음은 마치 첫선을 보이는 처녀의 순진한 두근거리는 가슴과 같다.

  생각하면 감회 깊다. 지렁이와도 같이 밟히기만 하는 역경 중의 종이 불과 수개월 사이에 이토록 신앙과 사상이 변모하여 종말의 진리를 위한 문서 전도 운동 선봉의 일꾼으로 삼게 하신 주님의 사랑 생각할 때 이 몸 드려 바친들 감사에 조금인들 보답할 수 있으랴. 주여! 주의 것이오니 주의 뜻대로 이루소서.

  임시 사무실로 본 중앙교회 한쪽에서 준비에 주야가 없는 편집실로 여러 종님들의 사랑의 기도와 격려로 물심 양면 협조하여 주심을 진실로 감사하였으며 당신의 점식식사(도시락)를 권고하신 여종님을 비롯한 모든 종님들께 진정 감사를 드립니다.

  - 이뢰자 목사님의 입을 통하여서 그것도 단 5분, 10분 사이에 조직적이요, 생명의 생수가 넘치는 귀한 말씀 넘쳐 나올 때마다 나오는 아멘의 기성 정말로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단 30분도 되지 못한 설교 준비를 위해 1시간 2시간씩 주석과 외국 학, 박사 서적을 들추어 가면서 머리를 싸매는 현 교권자들의 실태를 생각하니 진정 어떤 것이 정통이며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인가. 현명한 종들은 판단과 옳은 진리를 따르기 바라며 이럴 때마다 주시는 격동은 기술적으로 더욱 노력해야겠다는 사명감만 충만하다.

  아름다운 소식 편집실에 새 식구가 한 분 늘었다. 옵셑 기술자이며 화공을 겸한 필경사이다. 멀리 월남전선에서 수훈을 세운 예비역 장군이다. 편집기간 고락을 함께 나누며 고된 일과에서도 말없이 순종함을 감사히 생각한다. 홍상엽 선생에게 많은 격려가 있기를……

  - 완성된 책자를 둘러보아도 만족치가 않다. 일하는 목수가 연장만 탓하는 격이 아니고 우리에게 좀더 좋은 기구(기계)가 자못 아쉽다. 많으신 충고와 물질적 숨은 종의 출현을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