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례 (1970년 12월호)

설  교  편

1. 야곱의 집에 왕이 되신 예수님 (눅1:26~33)

2. 곤고한 사람으로 감사할 일 (롬7:22~8:2) 

3. 시험을 통해 오는 온전 (약1:1~4)

4. 성실과 정의의 하나님 (슥8:1~8)

5. 아는 것을 예배할 때가 이름 (요4:1~26)

6. 유익하도록 가르친 하나님의 교훈 (사48:12~22) 

7. 진노의 날에 거룩하다 칭함을 받는 자가 되자 (사4:1~6)

8. 그리스도의 가정 문제 (요7:1~7, 행1:13~14)

9. 온전한 사람을 이루는 요소 (잠2:1~12) 

10. 피와 말씀으로 승리하자 (계12:7~11) 

11. 미혹이 없는 천년 왕국 (계20:1~3) 

12. 2차 마귀 미혹과 대 심판 (계20:7~15) 

13. 때가 올 때 영화롭게 되는 일 (요17:1~2, 사24:13~15, 60:5~9) 

14. 하나님의 예정과 인격 (롬8:28~30) 

15. 심판할 이는 말씀 (요12:44~50)

 

장년 공과편 - 사명자의 생활

제1과  기도 생활 (딤전2:1~7) 

제2과  사명자 남녀 구별 (딤전2:8~15)  

제3과  사명자의 사생활 (딤전3:1~7) 

제4과  사명자의 목회 생활 (딤전3:14~16, 4:6~16) 

 

논  설  편

1. 가련한 양떼를 살리는 길에 대하여 

2. 전쟁이냐 평화냐에 대하여

3. 신앙의 정로는 하나 뿐이다 

4. 어려운 일과 쉬운 일에 대하여 

5. 인생 중에 제일 높은 사람 

 

신 앙 문 답

1.하나님이 받아 주시는 예배에 대하여 구체적인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2. 교회 발전에 대하여 구체적인 설명을 듣고자 합니다

3.종교가 완전한 단체를 이루는데 대하여 구체적인 설명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 

4. 기도의 힘을 얻고 얻지 못하는데 대하여 그 원인을 알고자 합니다

5.목회자와 교인들과의 관계에 대하여 어떻게 하여야 복을 받는 일에 대한 것을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특    집

1. 완전한 것 주고 싶어하시는 아버지의 심정을 내가 믿나이다 

2. 1970년도의 마지막 월간지를 세상에 내놓는 작은 종의 눈물겨운 감상

3.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는 사명 동지 여러분들에게 부탁의 말씀을 드립니다 

 

 

설 교 편

야곱의 집에 왕이 되신 예수님

- 눅 1:26~33 -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할 때의 목적은 왕국을 이루기 위한 목적인데, 피조물된 인격으로는 세계 통일의 왕국을 이룰 자는 전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예지와 예정이 계신 동시에 그 예정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두 번 이루어지는 것이다. 예언적으로 이루어지는 야곱의 집에서 왕 노릇 하는 다윗 왕국과 열매가 되는 그리스도의 왕국과의 연결성을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야곱의 집과 촛대교회와의 연결성을 말하자면

  과거에 야곱의 집이 하나님의 언약을 굳게 믿고 축복을 받기 위하여 싸운 것 같이 기독교 종말에 촛대교회도 성산의 축복을 받기 위하여 싸우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씨라도 축복을 등한시하는 에서는 아무리 사람이 볼 때는 강한 것 같으나 예언적인 왕국을 이루지 못하였고 사람이 볼 때 미약한 사람 같으나 축복을 위하여 싸우는 야곱은 예언적인 이스라엘 왕국을 이루어 놓은 것이다.  

  이와 같이 지금도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강한 세력을 가졌고 하나님의 성산의 축복을 두고 싸우는 자는 극도로 미약한 상태에 있지만 완전한 그리스도의 왕국을 이루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을 믿고 싸우는 자를 하나님께서 도와주고 보호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축복은 언약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가장 위대한 일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하여 싸우는 일이라고 보게 된다.

  2) 야곱의 집에 시련과 촛대교회의 시련

  언제나 마귀는 축복의 말씀을 믿는 자에게 시험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는 것은 축복의 말씀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 편이요, 축복의 말씀을 믿지 않는 사람은 마귀의 편이 되기 때문이다. 마귀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본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낼 때에는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그릇으로 창조했고 마귀는 얼마든지 축복을 받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피조물로 창조를 받았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지으신 것은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니 화를 위하여 역사하는 마귀의 역사와 축복을 위하여 역사하는 성도의 역사와 대립을 시켜서 축복을 받기까지 싸우는 집을 야곱의 집이라는 것이다. 과거에 이스라엘의 왕국은 야곱이 축복을 위하여 싸우는 열매로 이루어졌고 영원한 이스라엘의 왕국도 촛대교회가 끝까지 싸우는데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3) 야곱의 집의 왕권과 촛대교회의 왕권

  야곱이 끝까지 싸우므로 예언적인 다윗 왕국의 축복을 받게 되었고 촛대교회가 왕권을 받으므로 세세 왕국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천사가 마리아에게 지시하기를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 노릇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한 것은 육적 이스라엘을 가르친 것이 아니고 영적 이스라엘을 가르친 것이다.

  이제 예수님께서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이 되는 진리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성령으로 잉태된 몸이므로 왕 될 자격이 있다 (26~31)

  첫째아담이 마귀의 말을 순종하여 선악과를 먹은 그 피를 받은 사람으로는 그 몸이 썩지 않고 왕이 될 자는 전혀 없다. 왜냐하면 사망이 왕 노릇 하는 그 세력 아래 속했기 때문이다(롬6:17). 그러므로 예수님은 잉태할 때에 천사가 나타나서 사람의 몸에서 이루어지는 잉태가 아니고 하나님의 신의 역사로써 이루어지는 것을 말할 때에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네가 하나님의 은혜를 얻었느니라.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하면서 야곱의 집에 왕이라고 했던 것이다.  

  우리는 이 몸으로 왕 노릇 하는 것을 인생의 제일 큰 축복이라고 본다(계20:6). 완전한 몸을 가지신 예수님이 만왕의 왕이 되시므로 그를 믿는 자들도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살아서 왕국을 이루는데는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을 증거하기 위하여 순종한 자는 부활해서 왕이 되고 예언의 말씀을 증거하기 위하여 짐승과 거짓선지를 이긴 자는 살아서 변화를 받아 왕이 되는 것이다(계20:4). 우리 사람이라는 것은 타락했지만 야곱과 같이 축복을 믿고 싸워 나가므로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영원히 살게 되는 것이다.

 

  2.  큰 자가 되므로 (32)

  인류 역사상 제일 크게 된 자는 베들레헴 말구유에서 탄생하여 빈한한 목수의 생활을 거쳐, 피곤한 노방 전도를 거쳐, 쓰라린 심령의 고통을 주는 겟세마네를 거쳐, 쓰라리고 뼈가 저린 십자가의 사형을 거쳐, 캄캄한 무덤을 거쳐, 구름을 타고 올라가서 만민의 죄를 위하여 대제사장이 되어 기도하시며 성신을 부어 주시다가 구름을 타고 강림하여 죽도록 충성한 종들을 부활시키고 쓰러지기까지 싸워 나가던 종들을 변화시켜서 영원한 왕국을 조직하여 이루시는 예수님밖에 더 큰 이가 없으니 우리는 그를 믿고 끝까지 싸워 나가므로만이 복 있는 자가 될 것이다.

 

  3. 왕국이 다함이 없음 (33)

  세상에 아무리 강대국이라도 한 때는 강했지만 바람 앞에 등불 같이 꺼지고 만 것이 인류 역사가 증명하는 사실이다. 그러나 야곱의 집에 왕국은 영원히 세세토록 왕 노릇하되 지상의 천년 왕국을 거쳐 천국에 들어가서 세세토록 왕 노릇 한다(계22:1~5).

  이러한 왕국을 이루기 위해서는 성신으로 잉태된 몸이 마귀와 싸우는 생활을 거쳐서 만왕의 왕이 된 것 같이 성신을 받은 종들도 날마다 십자가를 지는 싸움을 거쳐 왕국의 반열을 이루게 된다.  가장 복된 자는 왕국의 반열에 들어가는 자라고 보게 된다(계19:9).

 

  결    론

  복되도다. 다윗 왕국이여, 산 깊은 골짜기에서 양을 치던 목자 다윗이 만왕의 왕조가 될 줄 누가 알았으며, 나사렛 골짜기 목수의 가정에서 목수 일을 하던 나사렛 예수가 만왕의 왕이 될 줄 누가 알았으며, 갈릴리 바닷가에 그물 한 채를 씻고 있던 시몬이 세계적인 왕국을 건설하는 운동의 선구자가 될 줄을 누가 알며, 어부의 한 사람으로 베드로의 뒤를 따르던 요한이 지상 왕국을 이루는 마지막 역사의 선구자가 될 줄을 누가 알았으리요, 낙심 말자, 우리의 소망은 여기 있다.  

  이 왕국 건설 운동은 너무나 크고 영원한 일이 되기 때문에 작은 일에 낙심하는 자나 잠깐인 고난을 참지 못하는 자는 들어갈 수가 없을 것이로되 작은 일에 충성하고 잠깐 동안인 고난을 참고 끝까지 싸워 나가는 자에게는 인간이 볼 때에 실패자 같고 망하는 자 같으나 이 왕국 반열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너무나 크고도 귀한 일이니 하나님께서 이것을 주기 위해서는 모략적인 방법으로 까불어 보는 일이 없이는 이룰 수가 없다는 것이다. 까불어 보는 때에 인격을 골라내고 수가 찰 때에 일한 대로 갚아 주는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요, 끝까지 참는 자는 그의 반열에 들 것이다.

 

 

곤고한 사람으로 감사할 일

- 롬 7:22~8:2 -

 

  인생에 있어서 곤고한 생활이 있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곤고한 자체는 아주 버림을 당한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요, 택함 받은 사람에게도 있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 곤고라는 것은 택한 자에게 없을 수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택한 자가 하나님을 경외해도 완전히 성신으로 이루어지는 인격을 받기까지는 자신 속에 싸움이 있기 때문이다.

  이 싸움이라는 것은 두 가지 법이 있기 때문이니, 첫째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사람도 있고, 둘째는 그 법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으니 첫째 사람은 양심이라 볼 수 있고, 둘째 사람은 육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아무리 택한 자라도 육체의 사람이 양심의 사람을 이기게 되면 죄를 짓고 양심의 사람이 육체의 사람을 이기면 의를 행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곤고한 사람이 감사할 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본문을 통해서 알 수 있다.

 

  1. 감사할 수 있게 되는 과정 (22~24)

  현재 많은 사람이 살고 있지만 감사할 수 있는 과정을 거치는 자는 적다고 본다. 왜냐하면 죄와 싸워 보려는 사람이 적기 때문이다. 불신 사회는 말할 것도 없지만 교회 안에서도 죄와 싸워 이겨 보려고 곤고를 느끼는 사람이 적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나님은 완전한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니고 죄와 싸우기에 곤고한 사람을 찾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 있다고 말한 것이다.

  하나님은 완전케 하고자 하는 사랑이 계신 동시에 죄와 싸우기에 곤고한 사람에게 완전이란 것을 주기 위해서 역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죄와 싸우는 자는 그 영이 하나님 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는 것은 완전하기 때문에 버리지 않는 것이 아니요, 완전해 보려고 애쓴다고 곤고한 자이기 때문에 버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도 요일5:16에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를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범죄자를 위하여 저희에게 생명을 주시리라”고 말했던 것이다. 예를 든다면 군대가 적군과 싸우다가 피곤하여 쓰러질 때는 그  사람을 보호할 책임이 군부에 있는 것 같이 이 세상 전쟁에서 죄와 싸우다가 곤고한 자를 하늘 본부에서 그를 버리지 않고 그에게 감사할 수 있는 일이 있도록 역사해 주는 것이다.

 

  2. 예수로 말미암아 감사할 일 (25)

  그리스도께서는 외모를 보지 않고 중심을 보시는 것이니 중심으로 하나님의 법을 사모하고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믿는 자를 그 마음의 소원대로 이루어 주는 역사를 하는 것을 성신의 역사라는 것이다. 우리가 완전해지므로써 성신을 받는 것이 아니고 완전해지고자 하여 죄와 싸우는 마음을 가지고 십자가를 바라볼 때 다음과 같이 감사할 일이 있게 된다.

  ① 결코 정죄함이 없음 (8:1)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누구든지 중심으로 죄를 미워하고 주님을 향하여 나갈 때에 결코 정죄하지 않고 그 사람을 완전한 사람이 되도록끔 역사하는 것을 십자가의 도의 역사라는 것이다.

  ② 참된 해방을 줌 (8:2)

  이 해방이라는 것은 성신의 법으로 말미암아 주는 해방이니 이것을 십자가의 도의 역사라는 것이다. 십자가의 도는 죄를 없이하는 능력이니 성령으로 와서 역사할 때 십자가의 능력이 믿는 자에게 오므로 죄를 이기는 승리의 생활을 하게 된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일은 전부가 성신의 법으로 되는 것이니 우리는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는 생활이다.

  하나님은 성신의 법에 의하여 역사하기 때문에 전부가 하나님께 감사할 것 뿐이라는 열매를 성령으로 맺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사람으로 감사할 수 있는 조건을 이루어 주는 것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체가 사랑이시니 사랑이라는 것은 당신의 아들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을 가장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결    론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것은 생명인데, 육체의 생명이 있는 몸에 곤고를 느끼게 되고 영적 생명이 있는 마음에 곤고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마귀와 대립하는 세상에서 육이나 영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새로운 것을 받으므로만이 곤고한 몸과 영은 소성을 받게 되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만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영적 곤고를 느끼는 생활에서 그리스도를 인하여 감사하게 될 때에 그는 괴로움을 당하는 것을 오히려 기뻐하게 되었다(8:18). 이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 자기에게 참된 해방이 온 것을 받는 생활에서 고난을 당한 것은 죄로 말미암아 오는 고난이 아니요, 자기가 받은 은혜를 다른 사람도 받게 하기 위한 목적에서 받는 고난을 영광으로 생각한 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고대하는 생활에서 기뻐했던 것이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바울은 넉넉히 이기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8:37~39).

  복음적인 생활이라는 것은 전부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감사하는데서 모든 일을 진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은 곤고한 사람을 찾는 사랑이요, 죄를 사하기를 원하는 사랑이요, 해방을 주기를 기뻐하는 사랑이요, 일한 대로 갑절이나 갚아 주기를 원하는 사랑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사랑을 받은 자는 억지로 하는 일은 전혀 없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영광으로 아는 생활에서 감사하는 생활을 하게 된다.

 

 

시험을 통해 오는 온전

- 약 1:1~4 -

 

  하나님께서 택한 자에게 온전한 것을 주시기로 작정했고, 또는 원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무조건 온전을 준다는 것은 공의가 아니기 때문에 시험을 해보고 참는 자에게 온전한 것을 주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 생활에 있어서 온전한 것을 이루기까지의 단계는 다음과 같다.

 

  1. 시험을 받을 자격 (1)

  시험이라는 것은 이스라엘이 된 하나님의 자녀에게 있는 법이다. 왜냐하면 마귀의 자녀가 된 사람은 시험을 통과시킬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 두 지파라고 한 것은 영적 이스라엘을 가르친 것이다.

  영적 이스라엘이라는 것은 하나님 편에 속한 자로서 마귀 편과 싸우는 생활을 하는 것이니 과거에 육적 이스라엘이 이방 사람보다도 시련이 더 많은 것은 이스라엘 나라로 말미암아 참된 영적 이스라엘의 교회를 이루기 위한 목적이요, 영적 이스라엘에게 여러 가지 시련을 주는 것은 그리스도의 왕국을 이루기 위한 목적이다. 누구든지 중생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는 반드시 시험을 통과시키는 것은 완전한 것을 주기 위한 목적이다.

 

  2. 온전한 기쁨을 가지게 됨 (2)

  기쁨이라는 것은 일시 흥분의 기쁨도 있고, 소망의 기쁨도 있으니 세상에 오락적인 기쁨이라는 것은 온전한 기쁨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시험이 올 때에 온전히 기뻐하는 것은 소망에서 오는 기쁨이라고 본다. 소망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 시험을 통과하므로 이루어진 일을 말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내가 지금 고난을 받는 것은 장차 받을 영광에 비교할 수 없다고  말한 것이다(롬8:17~18). 인생이라는 것은 온전한 기쁨을 가지므로써만 발전을 보게 된다. 왜냐하면 더욱 자라나는 지각이 있고 힘을 얻기 때문이다.

 

  3. 인내를 이루게 됨 (3)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사를 주는 것도 있고, 상급으로 주는 것도 있으니 은사라는 것은 거저 주는 것이요, 상급이라는 것은 참았다는 조건으로 주는 것이다. 참음이 많을 적에 상급이 많고 참음이 적을 적에 상급이 적고 참음이 없을 적에 빈 껍데기만 남는 생활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생의 발전이라는 것은 참음을 통과하므로만 있되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반열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악한 마귀를 들어 쓰는 것은 참음이 있나, 없나를 알아보기 위한 목적이다.

 

  4. 부족함이 없게 됨 (4)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부족함이 없게 해 준다는 것이 사랑의 한계가 된다. 그러므로 사람을 낼 때에 부족한 사람으로 창조한 것은 시험을 통과시켜 본 후에 부족함이 없는 과실인 생명과를 먹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한 것은 부족함이 없게 창조한 것이 아니고, 부족함이 없는 인격을 이루기 위한 목적에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는 것이니 이 세상은 부족함이 없는 사람을 이루는 인격 훈련소라고 보게 된다.

 

  결    론

  온전한 것이라는 것은 만물 중에 사람만이 받을 인격이 있고 특권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라는 것은 시험을 이길 수도 있고, 이기지 못할 때도 있는 것이 사람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보내어 참음의 길을 걸어가게 하신 것은 타락한 인생을 구원하는 동시에 참는 자로서 이룰 왕국 부서를 이루기 위하여 역사하는 것을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인데, 마귀를 쓰는 것도, 성신을 주시는 것도 목적은 시험을 이기므로 온전함을 이루는 사람을 만들기 위한 역사이다.

 

 

성실과 정의의 하나님

- 슥 8:1~8 -

 

  하나님은 아무리 예루살렘을 택했고 또는 자기를 공경하는 성전이 있지만 그들이 진리를 바로 증거하는 선지의 말을 순종치 않을 적에 말씀대로 북방 앗수르와 바벨론을 들어서 예루살렘을 황폐화 시켰고 심지어 성전까지라도 다 없애버리는 환란을 통과하게 했고, 그 환란에서 남은 자가 되어서 끝까지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는 자를 들어서 예루살렘을 회복할 때에 스가랴 선지를 통하여 인간 종말에 될 일을 보여준 것이 스가랴서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나는 성실과 정의로 그들의 하나님이 된다” 고 8절에 말했다. 이 본문은 과거 예루살렘 복구를 가르친 것이 아니고 새 시대를 목적하고 가르친 말씀이라고 보게 된다. 왜냐하면 다윗 왕국에 이루어진 일은 전부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질 성도의 나라에 대한 예언적인 역사라고 보게 된다.

  이제 하나님은 육적 이스라엘에 대하여 성실과 정의의 하나님이 되신 것 같이 영적 이스라엘이 된 우리에게도 성실과 정의로 하나님이 되실 것이다.

 

  1. 질투의 하나님 (1~2)

  하나님은 시온을 택한 것은 당신의 소원을 이루기 위하여 택한 것이니 아무리 시온이 부족하다 하여도 아주 버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도록 징벌을 하시고 회개하고 순종할 때에 시온을 위하여 싸워 주시되 승리하도록 역사해 주시는 것이다.

  아무리 한때는 시온을 징계해서 깨닫도록 하였으나 남은 자의 원한을 이루어 주기 위하여 싸워 주신 것 같이 기독교 종말에도 부패한 교회를 없이하는 환란이 오지만, 남은 자의 간곡한 기도 응답으로 하나님께서 시온을 위하여 싸우듯이 택한 교회를 위하여 싸워 주시므로 그 교회가 새로운 시대를 이룬다는 것이다.  

  환란이 와도 말씀대로 오고 다시 평화로운 왕국이 오는 것도 말씀대로 오게 하는 것은 한번 약속한 말씀은 그대로 행하시는 하나님이시므로 용서없이 환란과 재앙이 오기도 하고 또는 다시 불쌍히 보고 택한 자로써 승리하도록 해서 아름다운 시대를 이룬다는 것이다.

 

  2. 함께 하시는 하나님 (3)

  하나님은 언제나 택한 자와 함께 하기를 기뻐하신다. 그러나 말씀대로 순종하는 자에게 함께 하시는 것은 성실과 정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아무리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여도 성실치 아니한 자나 불의한 자는 함께 하실 수 없고 비록 적은 무리라도 성실하게 행하며 의롭게 나갈 때에 하나님의 신은 함께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함께 할 때에 진리의 성읍이라, 성산이라, 일컫게 되는 것이다. 우리 인생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것이 있으므로만 완전한 것을 소유할 수 있다.

 

  3. 사망이 없게 하시는 하나님 (4~5)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에게 사망이 없도록 하는 것을 완전 역사라 하는 것이다. 이 천지 만물을 창조할 때는 완전한 것으로 이룬 것이 아니고 완전한 것을 주기 위하여 이뤄 놓은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선악과를 먹고 그 몸이 죽게 되었지만 다시 그 몸이 죽지 않도록 해 주시는 것을 기독교의 완전 역사라는 것이다.  

  말씀대로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말씀대로 사람을 죽지 않게 하시는 진리의 신이시니 말씀을 순종치 않으므로 사망이 왔다면 말씀을 순종하는 자로 하여금 사망이 없는 왕국을 이루시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성실과 정의라는 것이다.

 

  4. 인도하시는 하나님 (6~8)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인도하시되 반드시 성실과 정의로 말씀대로 행하시어 여호와의 성산의 축복을 받게 하시되 영원히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인간을 대할 때에 성실과 정의로 대하시는 것이니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자를 남은 자라고 한 것은 아무런 어려운 시험이 와도 하나님은 절대 거짓이 없다는 것을 믿고 마음이 변치 않는 자를 남은 자가 되게 하여 새 시대를 이루는 것이니 누구든지 다 하나같이 완전한 사람으로서 완전한 왕국의 완전한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결    론

  천하에 가장 복 있는 자는 성실과 정의로 행하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환란과 재앙에서 남은 자라고 보게 된다. 모든 일에 완전한 것을 사람에게 주기 위하여 이모저모로 시련을 시켜 보는 것은 합당한 사람을 찾기 위한 방법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예루살렘이요, 친 백성일지라도 합당치 않은 자는 다 없애기 위하여 무서운 환란을 통과시키는 것이다.  

  육적 이스라엘이 역사적으로 환란을 만났지만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황폐화시킨 때와 같은 환란은 없었던 것이요, 기독교가 아무리 환란이 역사적으로 있었다 하여도 계시록 13장과 같이 오는 환란은 없을 것이다. 이렇게 환란을 들어서 택한 백성을 치는 것은 성실과 정의의 하나님의 백성만으로 새로운 왕국을 이루기 위한 목적이다.

 

 

아는 것을 예배할 때가 이름

- 요 4:1~26 -

 

  인생이라는 것은 예배할 수 있는 인격을 가진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가 흘러오는 동안에 참으로 아는 것을 예배한 자는 큰 축복을 받았다는 것이 역사가 증명하는 사실이다. 사람은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할 적에 오히려 죄가 되는 것이요, 아는 것을 예배할 적에 의를 이루는 동시에 최고의 가치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인생이 타락하여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인격을 상실하고 보니 하나님께서 예배를 받을 수가 없게 된 이유는 인간들이 하나님 말씀을 순종치 않고 자기 마음대로 예배할 때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마귀를 숭배하는 우상적인 종교가 되고만 것이다. 아무리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야곱의 열 두 지파라 하지만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그대로 순종치 않고 예배할 때 북방 사마리아라는 나라가 생겼던 것이다.

  이것은 솔로몬이 하나님의 성전을 짓고 향기로운 제사를 드리므로 복을 받았지만 이방의 여신을 용납했다는 죄로서 결국은 알지 못하는 예배를 드리는 부패가 생겼던 것이다. 북방 사마리아가 남방 예루살렘과 원수가 된 것은 열두 지파 중 열 지파가 남방 예루살렘 성전에 예배하러 가지 못하도록 담을 막고 그리심산에 신당을 짓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예배할 때에 하나님은 그들에게서 떠나가고 우상적인 종교를 이룬 사마리아가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기독교 종말에도 소위 기독교 교인이라 하면서 예배를 방해하고 자기의 주권적인 운동을 해보려는 것은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예배라는 것은 하나님의 비밀을 바로 알고 그 진리에 따라서 예배해야만 될 것이다. 이제 아는 것을 예배하는 자는 어떠한 자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1. 예배를 받는 자의 심정을 알아야 한다 (1~20)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셔서 예루살렘 성전을 들어가 볼 때에, 노하여 강도의 굴혈을 짓지 말라고 하면서 모조리 채찍으로 때려서 내몰았던 주님은 사마리아 여인을 찾아가서 생수를 받으라고 했던 것이다. 아무리 그 여자가 남편이 많다 하여도 그 여자를 더럽다 하지 않고, 나는 메시야라고 하면서 지금은 아는 것을 예배할 때가 온다고 했던 것이다.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이 더러운 죄인으로 볼 수 있는 여자 하나를 앞에 놓고 안타까운 심정으로 생수를 받으라고 하는 심정, 나는 메시야라고 하는 심정, 참으로 예배하는 자는 어떠하다고 말씀하신 그 심정은 아무런 죄인이라도 아는 것을 예배할 때가 왔으니 너는 나를 누구인 줄 바로 알고 예배하라는 말씀이다.

  예루살렘 거리에서 자기가 옳다는 생각을 가지고 거룩한 거리에 거룩한 의복을 입고 왕래하던 무리들이 예배하던 성전은 황무지가 되었고 유대인이 볼 때 짐승같이 여기는 죄인들은 바로 알게 되어 성전을 짓고 예배하는 일이 온 세계에 가득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예배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아는 자만이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게 된다.

 

  2. 시대를 따르는 예배 (21~22)

  언제나 하나님은 시대를 따라 법을 세우고 법을 따라 예배를 드릴 때에 예배를 받으시고 축복하시는 것이다. 메시야가 오시기 전에는 아담의 집에서부터 양을 잡아 드리는 피의 제사로 하나님을 공경하되, 양심으로 공경했다(딤후1:3). 이 양심이라는 것은 오실 메시야를 기대하는 양심에서 어린 양을 제물로 드릴 때에 하나님은 그 제사를 받으셨던 것이다.

  그러나 신약시대가 이루어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으므로 어느 민족이나 다 같이 예배할 수 있는 비밀을 모르고 예배를 방해하던 유대인들은 다 망하고 십자가의 도를 바로 아는 자들이 예배할 때에 성령은 강하게 역사하므로 기독교는 온 세계 인류를 구원하는 대 종교를 이룬 것이다.

 

  3. 신령과 진리의 예배 (23~24)

  과거에는 모든 일을 몽학적인 교훈으로 예배 의식을 하나님이 주셨지만, 성령을 충만히 받은 사람이 되는 역사가 있을 때는 몽학적 교훈의 의식이 필요 없고 직접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교통하는 예배를 드리게 되는 것이다. 성령이 역사하지 않는 때와 성령이 역사할 때의 예배는 다르다. 지금 만일 어떤 교회가 성령의 역사 없이 예배 의식만 지킨다면 이 사람들은 아무 것도 모르는 형식에 지나지 않는 예배가 된다. 그러므로 초대 교회는 예배를 드릴 때마다 성령의 역사가 은사로 내렸던 것이다.

  지금은 예배하는 자가 그리스도의 완전성을 분명히 알고 예배하는 자라면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임하므로 은사의 체험을 받는 신령한 세계에서 그 영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같이 새로워지는 열매가 있게 된다. 그러므로 예배를 인도하는 자는 십자가 중심에서 날마다 십자가의 고난을 참고 나가는 승리의 생활이 있으므로만 마귀의 흑암을 이기는 예배가 될 것이다.

 

 결    론

  가장 복 있는 자는 지금 이때에 아는 것을 예배하는 사람이라고 본다. 금일에 예배하는 자가 많이 있지만 사랑을 떠난 교회에는 도저히 하나님을 바로 알 수 없으므로 그 예배는 아무런 응답이 없게 될 것이다. 이미 하나님의 사랑이 십자가에 나타나서 구원을 완성했으니 이제는 여러 가지 의식이나 제물이 필요 없고 구원을 완성한 그리스도의 사랑에 녹아져서 그 사랑 안에서 서로 사랑할 때에 적은 무리가 모여도 신령한 예배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라는 것은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받은 자들이 그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될 적에 사랑의 은사를 체험하고 사랑의 진리를 가지고 사랑이 넘치는 생활에서, 입으로 찬송하고, 입으로 기도하고, 입으로 증거할 때에 기도나 찬송이나 설교는 다 열매가 되는 것이다.

 

 

유익하도록 가르친 하나님의 교훈

- 사 48:12~22 -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생에게 가르친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을 발표하는 동시에 약속을 세운 것이니, 약속이라는 것은 사람이 행하면 주겠다는 교훈보다도 내가 행하겠으니 너는 순종하라는 교훈이다. 사람으로서 할 수 없는 것을 행하라는 것도 아니요, 또는 사람이 하나님의 행하실 일을 믿지 않아도 주겠다는 교훈은 아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순종하면 아무런 사람이라도 다 새 시대의 축복을 받게 해 주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교훈이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는 것은 택한 사람에게 유익하도록만 하겠다는 방침을 말한 것이다. 이제 하나님의 말씀은 어떠한 자에게 유익을 준다는데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귀를 기울여 들으라는 것이다 (12~14)

  하나님은 무소 불능하신 신이시니 누구든지 귀를 기울여 들을 때에 역사하는 신이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기뻐하는 자라면 하나님은 그 사람을 통하여 영광을 받도록 역사해 주시는 것이다.그러므로 언제나 하나님께서 제일 기뻐하는 것은 하나님 말씀을 듣는데 열중하여 그 말씀을 마음에 받아들이는 자에게 심령을 소성케 한다(사55:3).

 

  2. 인도를 따르는 자 (15~16)

  주님의 교훈이라는 것은 그 말씀대로 하나님이 인도하는 것이니 우리는 그날 그날에 그 말씀을 따를 적에 모든 일이 형통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생각할 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불리한 것 같고 심지어 큰 실패를 당하는 것 같으나 그 말씀을 따르는 자에게는 형통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따르는 자에게 그 말씀대로 행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보호할 것을 말씀했으므로 따라가는 자가 넘어져도 일어나도록 하실 것이요, 아무리 마귀에게 피해를 당했다 하더라도 필경은 승리하도록 하는 것을 하나님의 역사라 하는 것이다.

 

  3.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축복 (17~19)

  하나님은 언제나 기록한 말씀대로 재앙을 내리기도 하고 복을 주기도 할 것이니 교훈을 듣고 따르는 자에게 평강을 강같이 의가 바다 물결 같이 되게 하시며, 그 자손이 모래같이 많게 하시며, 그 이름이 영원히 끊어지지 않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택한 자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언약하신 말씀이니 언약을 완전히 이루기 위해서는 택한 자를 강권으로 인도하는 일도 있고 강권으로 열매가 많도록 해주는 일도 있다.  

  그러므로 주의 종은 교훈을 전하는 사명이니 만큼 그 교훈이 전부 나에게 복을 주겠다는 약속이라는 것을 믿는 자라면 하나님께서 먼저 그 사람에게 교훈대로 복을 주면서 나가서 이것을 남에게 알려주라는 것이니 이것은 완전한 지상 축복에 대한 말씀이니 만큼 하나님은 종을 여러 가지로 시험을 하되 바벨론을 들어 예루살렘을 치듯이 이와 같은 난관도 있지만 필연코 승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믿고 따라가는 자에게 있게 되는 것이다.

 

  결    론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내고 그 사람에게 시대적인 법을 주고 그 법을 모르는 사람에게 알려주고자 할 적에 하나님은 그 법대로 종을 들어 쓰기도 하고 그 법대로 종을 보호하기도 하고 그 법대로 자손 만대에 축복을 하시는 것이니 가장 복 있는 자는 유익하도록 가르치는 말씀을 믿고 순종할 것뿐이다.  

  그러므로 신앙 자는 내게 유익이라는 것은 책에 기록한 말씀밖엔 없다는 것을 알고 이말 저말에 치우치지 말고 하나님의 법인 말씀에 대하여 기록한 대로 나가는데 전력을 두어야 될 것이다. 금일에 하나님 말씀은 해석할 탓이라 하는 자들은 아무런 열매가 없는 나무같이 될 것이니 자손 만대에 복을 받으려면 하나님 말씀에 기록한 대로 될 것을 굳게 믿고 용기있게 싸워 나가야만 될 것이다.

 

 

진노의 날에 거룩하다 칭함을 받는 자가 되자

- 사 4:1~6 -

 

  하나님께서는 아름다운 새 시대를 위하여 역사하시되 아무리 타락한 인간이라도 거룩하다 칭함을 받을 수 있도록 역사해 주시는 것을 본문에 가르쳤다. 하나님은 거룩한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니고 거룩하다 칭함을 받도록 역사하는 신이시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속화된 세상에서 거룩한 사람을 만들어 거룩한 성산을 이루고 거룩한 나라를 이루어 거룩한 영광을 왕권으로 세세토록 주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되도록 역사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1. 여호와의 싹이 되게 한다 (1~2)

  하나님께서 새 시대에 들어갈 사람을 여호와의 싹이라고 한 것은 영, 육이 아울러 완전히 새로 지음을 받음을 뜻했다. 싹이라는 것은 완전히 깨끗해지고 새것이 된 것을 가르친 것이니 하나님께서 환란과 재앙의 날에 남은 자가 되게 하는데는 완전한 사람이 되어서 새 시대에 영, 육이 들어가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나라를 이룰 자들이라고 보게 된다. 극도로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 영화롭게 되는 것이니 그들은 아름다운 소산을 먹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선악과를 먹은 타락한 피를 받았으므로 다 죽을 몸이 되는 피를 받아서 났지만 여호와의 싹이라는 것은 완전히 거룩함을 받아 죽음을 맛보지 않고 새 시대에 들어가는 사람을 여호와의 싹이라고 했는데 육적으로 부정이 없는 사람으로 남녀의 관계가 깨끗하고 절대 거룩한 싹이 되는 자로서 영광의 한 반열을 이루되 남자의 영광의 이름을 따라서 한 반열이 된다는 뜻으로 일곱 여자가 한 남자의 이름으로 칭함을 받는다고 한 것이다.

  이것은 현세에 남녀 관계와 같은 것을 뜻한 것이 아니고 아름답고 영화롭게 되는 반열을 가르친 것이다. 그러므로 1절에 ‘그날에’ 라고 말했고 2절에서도 ‘그날에’ 라고 한 것은 3장과 같이 부패한 시온을 없애는 날이라는 것이다.

 

  2. 거룩하다 칭함을 받음 (3~4)

  이 거룩이라는 것은 진노의 날에 남은 자 된 자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우리 영혼이 구원받은 것은 중생을 받는데 있고 우리 몸이 살아서 영화롭게 되는데는 거룩하다 칭함을 받아야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의 어떤 도덕적 행위나 수양으로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심판의 영과 소멸의 영으로 그들을 깨끗하게 하되 피까지 정결케 한다고 했다. 이것은 은사 역사가 아니고 종말에 권세 역사가 나리는 때에 강권으로 죄악을 제하는 역사이니 슥3:9과 동일하다.

  영만을 구원하는 때는 그 영을 중생시키는 일이요 그 몸은 병들어 죽는 몸이니 그 몸에 피까지 정결케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 몸이 살아서 새 시대에 들어가는 자는 그 몸의 피가 영생할 피로 이루어지도록 그 몸에 있는 죄의 질까지 다 소멸 시켜서 그 몸으로 죽음을 맛보지 않고 영광을 누리도록 하는 역사이다. 이것은 진노의 날에 남은 자가 될 사람들에게 주는 역사이다.

  사람이 병들어 죽고 피곤해 쓰러지는 그 몸은 그 피가 조상 적부터 내려오는 죄악의 혈통이라고 보게된다. 그러나 기독교 종말에 완전역사라는 것은 강권적으로 하루아침에 그 몸을 완전히 개조시키는 일이 있게 되는 것이다.

 

  3. 하나님께서 보호하는 성회를 이룸 (5~6)

  이날까지의 구원은 개인적인 신앙과 영혼 문제에 따라서 하나님은 역사했지만 진노의 날이 올 때는 단체적으로 보호를 받되 모든 집회 위에 낮에는 구름과 연기로 밤에는 화염 빛이요 영광으로 덮어 보호할 것을 가르쳤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옹호한 일이 있었다.

  그러면 그 이스라엘은 한 예언적인 것뿐이었지만 이 집회란 것은 온전히 기독교 종말의 끝을 맺는 역사이므로 이 집회를 통하여 새로운 시대를 이루는 것이니 만큼 단체적으로 보호를 하되, 절대적인 보호가 있으므로 이 무리가 새로운 시대를 이루는데는 종말에 촛대교회 단체를 이루는 것이라고 보게 된다.

  하나님께서 선지를 통하여 묵시로 예언을 기록하게 할 때에 환란 중에 단체적으로 남은 자가 되어 새 시대 갈 것을 목적하고 말씀한 것이다. 기독교는 지금 이대로 교회가 끝을 맺는 것이 아니고 특별한 역사가 임하므로 특별 성회가 있게 될 때에 그 집회를 통하여 완전 승리의 역사가 있을 것을 가르쳤다.

 

  결    론

  가장 아름답고도 복된 일은 죽음을 맛보지 않고 남은 자로서 아름답고도 영화로운 단체를 이루는 역사라고 보게 된다. 우리는 앞으로 하나같이 성결함을 받아 하나같이 뭉쳐 부르짖는 역사가 아니고는 절대로 남은 자가 될 수가 없다는 것을 가르친 것이다.

 

 

그리스도의 가정 문제

- 요 7:1~7,  행 1:13~14 -

 

  하나님께서는 가정을 이루게 한 것은 하나님 경륜이 이루어지기 위한 한 단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가정이 합심된 가정은 심히 적었다고 본다. 아브라함의 가정에도 사라와 하갈의 싸움이 있었고, 이삭의 가정에도 에서와 야곱의 싸움이 있었고, 야곱의 가정에도 형들이 요셉을 애굽으로 판 일도 있었다. 이것은 가정의 천국이 아니요, 천국을 이루기 위한 과정의 한 단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한 가정에서도 천국과 지옥으로 갈라질 수 있고, 환란과 안식으로 갈라질 수도 있다. 아무리 천사를 보내서 롯의 가정을 구원코자 했으나 롯의 처는 멸망을 받고만 사실을 보아도 온 가정이 단체가 되어 보호를 받는 것은 최대의 행복이라고 보게 된다. 아무리 하나님의 아들이 자라난 가정이라도 하나가 되지 못한 사실을 볼 때에 가정이라는 것은 시련의 과정이 있고야 합심될 수도 있고 복을 받을 수 있다고 보게 된다.

  이제 그리스도의 가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본문을 통해서 알 수 있다.

 

  1. 예수를 믿지 않는 가정 (요7:1~7)

  마리아는 잉태할 때부터 천사의 지시를 받았고 성령으로 잉태되는 체험을 가지고 있지만, 이것을 알지 못하는 요셉은 마리아를 의심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는 마음까지 있은 것이다(마1:19). 그러나 천사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네 아내 마리아는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니 아들을 낳거든 이름을 예수라 하라”는 지시를 받고 사7:14이 자기 아내에게 응한다는 것을 알고 그때부터 의심하던 요셉은 아내를 끝까지 보호하고 합심하여 예수님을 기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모르는 동생들은 예수를 믿지 않았던 것이다. 왜냐하면 분명히 목수 일을 하는 것을 날마다 보았고 아무런 징조가 없이 그 날이 그 날같이 지내 왔기 때문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만민의 구주요, 십자가에 못박혔다가 부활하므로 그로 말미암아 온 세계가 다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믿지를 못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하는 것은 예수를 믿는 말이 아니고 불평을 두는 말이었다. 그 때 예수님은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하시면서 “세상이 너희는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한다.”고 하셨다.

  언제나 사람이라는 것은 신이 아니요, 또는 완전하지를 못하므로 언제나 눈에 보이는 대로 판단하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하나님의 종이 그 가정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고 미움을 받고 압제를 받는 일도 있을 수가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비밀을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 사명자로서 가정에 시련이 올 때에 깊이 깨달을 것은 예수님도 가정의 시련을 받았는데, 내게도 있는 것이 마땅한 줄 알고 깨닫지 못하는 식구를 원망하지 말고 “우리 가정을 불쌍히 보시옵소서” 할 기도를 할 것뿐이다.

 

  2. 합심 기도하는 가정 (행1:13~14)

  신앙이라는 것은 선구자가 있고 후진자가 있는 것이니 그리스도의 가정에 있어서 마리아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먼저 믿었고, 요셉이가 의심 중에 있다가 천사의 지시를 받고 믿으므로 합심된 신앙 부부를 이루었지만, 그 동생들은 주께서 부활 승천하는 것을 본 후에야 완전한 신앙을 가지므로 신앙의 복된 가정이 이루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신앙 가정을 이루는데 있어서 시련기를 지낸 후에야 합심된 가정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각오하고 사명자로서는 자기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영계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을 목적하고 노력할 것뿐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도 자기 사명을 다 하게 될 때에 의심하고 믿지 않던 동생들까지도 다 믿으므로 다락방에 모여 합심 기도하게 되므로 성신을 충만히 받고 야고보서와 유다서가 그 동생을 통하여 나타났던 것이다.

  우리 말세의 사명자는 완전한 신앙 가정을 이룰 때는 재앙으로 땅을 치는 역사가 있을 때에 어느 가정이나 다 합심된 가정을 이루게 될 것이다. 가장 복된 가정은 초림의 주를 모시고 합심된 요셉의 가정이라면 그보다도 더 복된 가정은 재림의 주를 영접할 때에 합심된 가정이라고 보게 된다.

  만왕의 왕이 자라난 가정도 새 시대의 축복을 받지 못했지만 왕권 받은 변화성도가 자라나는 가정은 새 시대의 축복을 받게 되므로 왕족적인 가정을 이루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가정을 깊이 생각하며 가정이 합심이 못되는 것을 원망할 것 없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으로만 복된 가정이 이루어질 것이다.

 

  결    론

  신앙 가정이라는 것은 먼저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자가 바로 열매 있는 신앙을 가지게 될 때에 아무리 반대하던 식구라도 그 증거를 보고 합심된 가정이 이루어질 것이니 내 가정에 합심이 되지 못한 것을 생각하여 낙심될 것도 없고 또는 귀한 종의 가정이 합심되지 못한 것을 비난할 필요도 없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자라난 가정도 주님께서 동생들에게 비방하는 일을 받은 일이 있거든 하물며 어리석고 부족한 인간들이 주를 위하여 일꾼이 되려고 할 때에 이해하지 못하는 비소나 또는 핍박이 있다고 해서 이것 때문에 타격을 받는다는 것은 종된 자의 자격을 상실하는 자라고 보게 된다. 그러므로 성경에 말하기를 원수가 네 집안에 있다고 하였지만 끝까지 참고 나갈 때에 하나님은 택한 종이 자라난 가정을 버리지 않고 다 환란 날에 구원해 줄 것을 믿고 나가야 할 것이다.

 

 

온전한 사람을 이루는 요소

- 잠 2:1~12 -

 

  인생이라는 것은 동물 세계에서 사는 동물이 아니요 동물 세계에서 사는 영물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이 온전한 인격을 이룰 때에 옳은 지도자가 되고 이루지 못할 때에 만물의 종이 되는 타락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이제 사람이 온전함을 이루는 요소는 무엇이냐는 것을 본문을 통하여 알게 된다.

 

  1. 계명을 간직할 것 (1)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계명을 주신 것은 온전한 인격을 주기 위하여 주신 것이니 그 계명을 항상 간직할 때 하나님의 신이 같이 하고 그 계명을 떠날 때에 하나님의 신은 떠나게 된다. 사람이라는 것은 완전한 인격을 가진 것이 아니고 완전한 계명을 간직할 때 완전한 사람이 되도록 하나님의 신은 역사하는 것이다.

 

  2. 귀를 지혜에 기울여야 한다 (2상반절)

  사람이라는 것은 동물과 같이 입으로 먹는 것으로 온전하게 되는 것이 아니고 귀로 지혜로운 말씀을 들을 적에 그 지혜라는 것은 영원히 내게서 역사하는 인격의 요소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물이라는 것은 지혜로운 말에 귀를 기울일 줄 모르나 사람은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얼마든지 발전할 수 있는 인격을 하나님께 받는 것이다.

 

  3. 마음을 명철에 두어야 한다 (2하반절)

  마음은 명철이 있을 때에 밝아지는 것이요 밝아진 마음이 있어야 광명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마음이라는 것은 신령한 눈이니 명철을 받은 자는 마음의 위치를 밝은데 두었으므로 영적 활동의 새로운 발전이 항상 있게 된다.

 

  4. 지식을 구해야 된다 (3~4)

  사람이라는 것은 지식을 구하는 것이 있으므로 날마다 발전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은, 금만 구하고 지식을 구하지 않는다면 은, 금을 가졌다 하더라도 바로 사용할 수가 없을 것이다. 지식이 높으면 인격이 높고 지식이 낮으면 인격이 낮고 지식이 없으면 사람의 인격을 상실하고 동물에 불과한 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이 지식이라는 것은 하나님께로 온 지식을 말한다.

 

  5. 하나님을 경외하며 알게 되므로 (5~6)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바로 가지게 될 때에 하나님을 바로 알게 되고 그 하나님을 바로 알므로 말미암아 지혜와 지식과 명철을 나타내게 되는 것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이 인정하리만큼 경외할 때는 하나님은 완전한 인격이 되도록 그 사람의 입을 사용해서 역사를 하도록 하는 것이다.

 

  6. 행실이 완전한 자가 될 것 (7)

  인생이라는 것은 행실이 완전하게 될 때에 하나님은 언제나 방패가 되어 계시므로 원수의 피해를 당하지 않고 승리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종이 되는데는 하나님께서 싸워줄 인격이 되어야만 승리하게 될 것이다.

 

  7. 하나님의 보호가 있으므로 보존하게 됨 (8~12)

  인생이라는 것은 어리석고 약하고 부족하지만 하나님의 보호가 같이 할 때에 걸어가는 길에서 반드시 승리하도록 하나님은 보호해 주시는 것이다. 보호를 무조건 믿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요, 보호를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해 주신다는 것이 오늘 본문에 가르친 온전한 인격을 이루는 일곱 가지 요소라는 것이다.

 

  결    론

  인생이라는 것은 온전한 인격을 이루는 요소가 있으므로 인생의 가치를 발휘하게 되고 또는 여호와 영광을 나타내는 대 승리가 있게 되는 것이다.

 

 

피와 말씀으로 승리하자

- 계 12:7~11 -

 

  하나님께서는 마귀에게 미혹을 받아 타락한 인생을 구원코자 할 때 두 가지 방법을 세웠으니 주님의 보혈과 증거하는 말씀으로 마귀를 이기도록 법을 세운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보혈로 승리 (11상반절)

  죄라는 것은 도저히 인간 자력으로는 이길 수도 없고 또는 벗어날 수도 없는 것이 인간 타락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날 때에 질적 타락의 몸을 가지게 되었고 생활할 때에 영적 흑암을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 타락한 영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질적으로 영적으로 타락한 인생을 구원하고자 할 때 독생자의 보혈이라는 피의 제사가 아니고는 죄의 권세를 잡은 마귀를 인생으로서 도저히 이길 수가 없으므로 독생자를 보내 십자가에 승리하게 하시므로 그 피를 믿어야만 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며 또는 능히 싸울 수 있는 조건이 되는 것이다.

  십자가의 피가 아니라면 사망의 법을 벗어날 수가 없고 또는 마귀와 싸울만한 인격을 인생은 스스로 가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법이라는 것은 말씀한 대로 행하는 법이니 그 죄를 없애는 법을 세운 것이 십자가의 보혈이라는 것이다.

 

  2. 증거하는 말씀 (11하반절)

  하나님은 말씀을 명백히 책에 기록하고 기록한 말씀대로 행하시는 것이 심판이라는 것이다. 아들을 통하여 죄인을 위해 죽게도 하시고 또는 죄인들을 심판하기도 하는 것이니 십자가의 피로 잃었던 백성을 찾는 일에 승리하므로 이 땅은 완전한 그리스도의 왕국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혈로 승리하고 사망에서 나온 영들이 말씀으로 승리하고 영원한 왕국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말씀으로 승리하는데 있어서는 다음과 같이 되는 것이다.

  1) 말씀대로 천사가 싸워 줌 (7~9)

  하나님은 천사를 부리는 것은 말씀을 놓고 마귀와 싸우도록 하기 위하여 부리는 것이니 마귀는 이미 에덴 동산에서 옛 뱀으로 승리했으므로 용이 되고 마귀가 되고 사단이 되는 대 번창을 이루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마귀의 권세를 허락한 것은 얼마든지 이길 수 있는 권세를 허락한 것이다.

  예를 든다면 씨름할 때나 전쟁을 할 때나 양방에 동등권을 주는 것이니 이것이 하나님의 법인 동시에 양심의 법이라고 본다. 아무리 불신 사회라도 사람의 양심 속에는 하나같이 동등권을 가지고 싸워 이기는 자에게 권리를 준다는 것이 근본적인 양심의 원리가 된다. 이 양심이라는 것은 하나님께로 받은 양심이니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즉 그와 같다.

  옛 뱀을 창조할 때 가장 간교하게 창조했다고 창3:1에 말한 것은 얼마든지 사람을 대항할 수 있는 간교한 동물이다. 또는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었다고 창1:26에 말했으니 극도로 간교하게 역사할 수 있는 것이 옛 뱀이요, 극도로 진실하게 나가야만 되는 것이 사람의 양심이라는 것이다. 마귀는 거짓을 말하는 것이 사명이라면 사람은 양심대로 행하되 하나님의 법을 지키라는 것이 사명이다.

  그런데 사람이 간교한 뱀에게 졌으므로 사람의 몸은 흙으로 돌아갔고 옛 뱀은 그 몸이 변해서 큰 용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진실한 사람은 진실한 사람을 번창시킬 수 있고 간교한 뱀도 얼마든지 번창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간교한 뱀이 승리하고 보니 그 세력은 날마다 높아 가서 사람을 정복할 수 있는 자리에 이르렀으므로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주었던 말씀을 폐지하고 다시 말씀을 주실 적에 구속의 도리를 둘째아담 예수를 통하여 타락한 인생을 다시 구속한다는 것을 목적 두고 모든 선지를 통하여 인간에게 전하게 한 것이 기독교의 성경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으로 어떻게 이기게 한다는 방법을 세밀히 기록한 것이 구약 성경이라면 신약은 그 방법을 시행하기 시작한 것을 신약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마귀를 이기는 방법을 친히 실천하시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말미암아 이기게 된 것이다. 이기게 되는데는 이루어진 십자가를 믿으므로 이기는 시대도 있고 말씀을 믿고 싸우므로 이기는 시대도 있으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은 두 가지로 싸워 준다. 구원해 줄줄 믿는 사람에게는 구원을 얻도록 싸워 주고 남을 살리기 위한 사명을 위하여 싸우는 사람에게는 왕권을 받도록 싸워 주는 것이다.  

  영혼 구원을 위하여 싸워 주는 것이요, 육체가 구원받는 말씀을 믿고 싸울 때는 육체가 구원받도록 싸워 주시는 것인데 지금 하늘에서 싸우는 전쟁은 구원을 받기 위하여 싸워 주는 전쟁이 아니고, 자기 사명을 위하여 싸우는 자를 싸워 주는데는 마귀의 참소를 이기도록 싸워 주는 것이다.

  마귀 참소란 것은 범죄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주의 일을 옳게 하려는 자에게 반드시 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는 것은 옳은 종에게 왕권을 주기 위한 목적이다. 어느 종이나 아무리 옳게 일을 하려고 해도 천사가 싸워 주지 않으면 도저히 마귀의 참소를 이길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종말에 영계 혼란이 변화성도에게 극도로 강하게 오는 것은 하나님께서 마귀를 개방시켜 종들을 다 시험해 보되 말씀을 바로 증거하는가 못하는가를 시험해 보는 시기이므로 극도로 영계 혼란이 오는 것을 가르쳐서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라고 했고(7), 마귀가 땅으로 쫓겨 내려오는 것은 이 땅이 극도로 어지러워지는 시기를 말했다(9).

  우리 앞에 전 삼년 반이란 것은 하늘의 전쟁으로 영계가 혼란해질 것을 가르쳤고 후 삼년 반이라는 것은 마귀가 땅으로 쫓겨 내려와 극도로 괴롭히는 환란을 말했다. 하늘에서 일어나는 전쟁은 왕권 받을 종들을 위한 전쟁이요, 땅에서 일어나는 환란은 종족 될 백성을 골라 세워 심판하기 위한 목적이다.

  그러므로 하늘의 전쟁에 승리 용사가 되는 것은 종말의 진리를 바로 증거할 때에 원수가 피해를 주지 못하도록 천사들이 싸워 주는 것이요, 후 삼년 반은 연약한 양떼를 바로 인도하기 위하여 천사가 싸워 주되 완전 보호 양육이 있게 된다. 이것은 계12:6과 같이 양육하기 위한 보호이다.

  2) 말씀대로 승리하게 됨 (10~11)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었으니 라고 한 것은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완전 승리를 가르친 것인데 그리스도께서도 말씀대로 싸우므로 승리했고 모든 종들도 말씀대로 싸우므로 승리하는데는 마귀는 밤낮 참소하게 된다. 왜냐하면 왕권이라는 것은 말씀으로 마귀 참소를 이기는 자라야 그 반열에 들어간다는 것이 그리스도의 권세 법칙이기 때문이다.

  예를 든다면 나라의 권세도 적군과 싸워 이긴 자에게 그 권세를 맡기듯이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어지는 것도 만왕의 왕의 권세가 왕권 받는 종들의 수가 차므로 그 반열이 다 구성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도 극도로 마귀가 참소하는 것을 허락했고 말세에 들림 받을 종들도 극도로 마귀가 참소하도록 허락한 것은 말씀을 바로 증거하는 종을 뽑아 내어 그 권세 반열에 수를 채우기 위한 목적이다.

  예수님도 책에 기록된 대로 싸웠으므로 만왕의 왕이 되었고 우리도 책에 기록된 대로 싸워야만 되는데는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워야만 천사가 와서 싸워주므로써 말씀대로 승리하게 되는 것이다.

 

  결    론

  하나님께서 승리의 왕국을 이루기 위하여 만물을 창조했고 사람을 창조했고 사람을 창조하여 왕국을 이루는데는 가장 간교한 뱀을 내어 당신의 자녀와 싸움을 붙여 승리한 자로만이 왕국을 이루는데는 십자가의 보혈과 증거하는 말씀을 인하여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우는 자에게만 승리의 왕국의 권세를 준다는 것이 하나님의 법이다.

 

 

미혹이 없는 천년 왕국

- 계 20:1~3 -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이날까지 마귀 미혹이 있게 한 것은 미혹이 없는 천년 왕국을 이루기 위한 목적이었다.

  이제 마귀 미혹이 있는 이유와 없는 이유를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다.

 

  1. 마귀 미혹이 있는 이유

  하나님께서는 미혹이 있게 할 때에 미혹할 수 있는 자와 미혹을 받을 수 있는 자를 대립시켰으니 어찌하여 미혹할 수 있는 자를 창조했으며 또는 미혹을 받을 수 있는 사람으로 창조했느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의의가 있다. 미혹할 수 있는 가장 간교한 뱀을 창조한 것은 가장 진실한 사람을 통하여 완전한 왕국을 이루기 위한 목적이요, 사람을 미혹 받을 수 있는 정도로 창조한 것은 사람을 통하여 영광을 받고자 하는 방법이다.

  만일 피조물된 사람이 도저히 미혹을 받지 않을 완전한 인격으로 창조했다면 사람은 하나님을 공경하고 영화롭게 하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러므로 미혹을 받은 인간을 깨우쳐 주고 붙들어주고 구원해 주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미혹 받는 것을 원하는 신은 아니다. 미혹을 받지 말라는 것이 계명인 것은 미혹을 받지 않는 인격을 이루기 위한 방법이다.

  이제 마귀 미혹은 어떠한 방법으로 오느냐 하는 것을 먼저 말한다.

  1) 물어 보는 방법으로 온다 (창3:1)

  언제나 마귀는 이 방법을 에덴 동산에서부터 지금까지 쓰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 말씀을 참으로 믿나 믿지 않나 하는 것을 틈을 타는 것이니 사람에게 하나님 말씀이 참이라는 것이 마음에 불타지 않는 마음을 엿보는 방법이다.

  언제나 마귀는 조용한 시간에 지금도 은근히 물어 보는 정도로 미혹이 올 때가 있다. 이것은 하나님 말씀을 떠는 마음이 없는 자에게 오는 것이니 하필이면 하나님께서 이러한 말씀을 할 수가 있으랴 하는 마음이다. 왜 동산에 많은 실과가 있는데 그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그 말씀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가도록 물어 본 것이다. 지금도 마귀 압력은 하나님 말씀에 대하여 절대성을 가지지 못하도록 하는 것인데 이러한 환경을 당할 때에 마귀는 언제나 기회를 엿보는 것이다.

  2) 하나님 말씀이 달리 생각이 나도록 하는 것이다 (창3:5)

  지금 마귀는 하나님 말씀은 그대로 볼 것이 아니고 깊이 생각을 해서 변경을 시켜 해석하도록 하는 마귀가 들어오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을 자기 멋대로 해석을 붙인다는 것은 마귀의 미혹이 오는 방법이라고 본다.

  3) 마음이 끌려지도록 역사하는 것이다 (창3:6상반절)

  언제나 죄 되는 일에 마음이 끌려지도록 만드는 것이니 죄의 대상자를 볼 때 마음이 그리로 끌려지게 만드는 것이 마귀의 역사이다. 누구든지 자기 마음을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자기 마음이 하나님 말씀을 범하는 길로 쏠려지는 것이 마귀 역사라는 것이다.

  4) 말씀을 범하는 용기를 주는 것이다 (창3:6하반절)

  언제나 마귀 역사가 강하게 될 때에 죄를 짓는 일에 큰 힘을 얻는다. 마귀는 언제나 죄를 질 용기를 주고 있다. 그러므로 마귀 미혹이 오는 이 방법은 하와에게 시작된 것이 오늘날 교회에 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 마귀 미혹을 물리치는 방법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마귀 미혹을 이길 수 있는 인격을 준 것이 아니고 방법을 주신 것이다.

 1) 말씀에 완전성을 주심 (창2:17, 사34:16)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실 적에 사람이 가감할 수 없는 정확한 말씀으로 주신 것이다. 조금도 헛되이 찾지 않도록 주신 것이다(사45:19). 그러므로 누구든지 마귀를 이기려면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읽고 그대로 말해야 되는 것이다. 하와가 범죄한 것은 말씀 그대로 말하지 않은데서 시작한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람에게 읽고 듣고 지켜서 복 받도록 주신 것이다(계1:3). 사람이 간단한 말씀 한 절을 지키지 못하므로 타락한 것이 인간이다. 그러나 사람을 버리지 않고 다시 구속한다는 말씀을 할 때에 아들을 통하여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준행할 수 있는 역사를 하시겠다고 말씀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세상에 오실 때 글자 그대로 잉태되고 그대로 출생하고 그대로 자라나신 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요,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고 성신을 받은 후에 그때부터 마귀 미혹을 이기는 아들로서 하나님 말씀 글자 그대로 가르치고 싸워 나가신 것이다. 첫째아담은 말씀 그대로 순종치 않으므로 사망을 가져왔고 예수님은 말씀 그대로 순종하므로 부활의 생명을 가져온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지금 역사하는 것은 미혹 받지 않도록 성신을 보내서 역사하기 때문에 마귀 미혹을 이기는 자의 수가 차게 되는 것이다. 말씀을 주신 이도 하나님이요, 말씀을 행하는 이도 하나님이시다(사45:21).

  2) 마귀는 대적하면 물러간다 (약4:7)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마귀를 이기시고 우리를 거룩한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린 백성이니 마귀는 우리를 해칠 권리가 없다(요一5:18). 그러므로 언제나 예수를 믿는 하나님의 자녀는 아무리 죄가 있는 사람이지만 예수를 믿고 마귀를 대적하면 물러가는 것이다.

  3) 불타는 사랑이다 (요일3:14, 4:18)

  누구든지 형제를 살리기 위하여 목숨을 아끼지 않는 자는 마귀가 참소 할 권리를 행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마귀에게 허락할 때에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아끼나, 아끼지 않나 이것까지 알아보기 위하여 마귀를 허락했기 때문이다(계12:10~11).

  천하에 제일로 강한 자는 마귀의 미혹을 이기는 자라고 보게 된다. 그러므로 세세 왕권을 받을 인격은 말씀을 조금도 가감하지 않고 그대로 증거하는 동시에 마귀를 무서워하지 않고 대적해 나가면서 형제를 살리기 위하여 목숨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다 그리스도와 같이 왕이 되므로 천년 왕국에서 왕 노릇하게 된다.

 

  2. 마귀 미혹이 없는 이유

  마귀 미혹은 미혹을 이기는 자로 왕국을 이루기 위한 목적인데 완전한 왕국이 이루어지는 그날에는 그 미혹을 시켜 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미혹을 시켜 보는 것도 사랑의 목적을 이루는 방법이요, 미혹이 없이 안식을 누리는 것도 사랑의 목적을 달성하는 열매가 된다.

  하나님은 완전한 신이신 동시에 완전한 사랑이 있고 완전한 사랑이 있는 동시에 완전한 인격을 이루어 놓고 완전한 인격을 이루어 놓는 동시에 완전한 왕국을 이루고 완전한 왕국을 이루는 동시에 마귀 미혹이 필요 없는 시대가 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마귀를 들어 쓰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의의가 있다.

  완전한 사랑을 이루기 위한 목적, 완전한 역사를 하기 위한 목적, 완전한 축복을 주기 위한 목적, 완전한 영광의 나라를 주기 위한 목적이다. 마귀라는 것은 스스로 있다는 것도 성경에 탈선된 말이요, 천사가 타락했다는 것도 탈선된 말이요, 마귀를 간교한 뱀으로 창조해서 왕국을 이루기 위한 목적에서 진실한 자로 왕권 반열을 조직한 데서 마귀를 들어 쓰시고 그 마귀를 미혹하지 못하도록 하는 이가 하나님이라고 보는 것이 성서적인 것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바로 알려면 하나님의 성품을 바로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사랑의 성품인데 마귀를 들어 쓰는 것이 있으므로써 그 완전한 사랑의 법을 달성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마귀 미혹을 받아도 그 사람으로 하여금 새로운 사람이 되게 해서 천국을 이룬다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요, 아무리 사람이 어리석고 약해도 지혜와 총명과 능력과 권세를 주어서 그 사람으로서 세세토록 왕 노릇하게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완전성이다.

  마귀를 하나님께서 만들었다는 것보다도 가장 간교한 뱀을 창조 한데 있어서 그 뱀이 완전 승리를 보고 용이 되고 사단이 되고 마귀가 되었다는 것이니 이것은 그 옛 뱀이 승리하면 이와 같이 될 수 있는 데까지 기능을 허락한 것이다. 사람이 마귀를 이기면 흙에서 난 몸이 변화체가 되어 세세토록 왕이 되는 것과 같이 옛 뱀도 이기면 용이 되고 마귀가 되어 사망의 왕 노릇을 할 수 있게끔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간교한 뱀과 사람을 대립 시켜 놓은 것이 천년 왕국이 이룰 때 가서야 끝이 나는 것이다.

 

  결    론

  하나님께서 천년 왕국을 이루게 한 것은 마귀 미혹을 받고 축복을 빼앗긴 인간들에게 그 왕권의 축복을 다시 찾아 주는 역사이니 천년 왕국이라는 것은 창조의 목적을 완전히 지상에 이루어 놓는 시대라고 본다.

 

 

2차 마귀 미혹과 대 심판

- 계 20:7~15 -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에서 들어 쓰던 뱀이 용이 되고 마귀가 되어 온 세계를 꾀이는 기간은 1차 미혹이라고 본다. 이것은 왕권 받을 종을 이루기 위한 목적이었다. 그러나 2차 미혹은 천년 왕국에 들어간 자 중에 곡과 마곡을 미혹해 보기 위하여 마귀를 다시 들어 쓰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천년 왕국이라는 것은 마귀 미혹을 이기고 왕권 받은 자들이 통치하는 지상 왕국인데 이 왕권을 받을 자는 두 가지로 되어 있다.

  첫째 : 자기 맡은 일에 충실을 다하기 위하여 원수에게 순교를 당한 자이며,

  둘째 : 마지막 붉은 짐승과 거짓 선지의 세력과 싸워 승리한 자들이 주님 올 때까지 남은 자가 되어 천년 왕국을 이루는데는 왕권 가진 종들에 대하여도 부활성도 반열과 변화성도 반열이 있고 백성 중에도 두 가지로 구분되어 있다. 곡과 마곡은 마지막 증인들이 재앙으로 땅을 치고 나갈 때에 원수의 나라에서 굴복하고 들어와 남은 자가 된 자요, 또는 변화성도의 육적 혈통으로 남은 자가 되어 새 시대의 백성이 된 자도 있다.

  그러므로 곡과 마곡은 큰 확장을 이루었고 변화성도들의 혈통은 한 성을 이루었는데 그 성을 왕궁 도성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할 때에 변화성도의 왕족을 세세 영광을 누릴 것을 약속했으므로 미혹을 시켜 보지 않고 천국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사44:3~5, 59:21, 66:22를 보면 변화성도의 자손의 축복을 말했다. 그러나 곡과 마곡은 사60:10과 같이 되는 것인데 이 이방족의 그 자손들은 그냥 천국에 들어갈 수 없고 마귀로 미혹을 시켜 보는 것이다. 이제 그 진리를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1. 곡과 마곡을 미혹함 (7~8)

  이때는 천년이 찼으므로 곡과 마곡은 바다의 모래같이 대 확장을 보게 되었다. 이 무리는 계7:9과 같이 헤아릴 수 없는 무리가 새 시대에 들어간 것인데 큰 환란에서 나온 무리들이다. 성신을 받은 자가 아니고 변화성도의 마지막 경고를 듣고 회개하고 따라온 무리인데 영적 이스라엘이 아니요, 환란에서 나오므로 그 무리들은 왕국 반열에 들 수는 없다.

  왜냐하면 성신의 역사가 있으므로 종들의 수가 찬 다음에 일어나는 역사에서 회개했기 때문에 이들은 천년시대에 들어갔다 하더라도 아무런 주권이 없고 성도의 통치 아래서 순종하며 받드는 일에 전력을 두었던 것이다. 왕족은 그들에게 섬김을 받는데서 번창을 했고 그들은 섬기는 생활에서 번창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는 것은 구약 때 제사장족인 레위 족속을 모든 백성들이 섬긴 것과 같이 새 시대에도 왕족을 섬기게 되는 것이니 이것은 상급이 되는 봉사가 아니고 그 권세 아래서 통치를 받게 되는 것뿐이다. 이 무리들은 많은 봉사를 해 내려왔지만 아무런 영광의 주권이 없으므로 미혹이 올 때 성도의 왕권을 대항하게 될 것이다.

 

  2. 성도들의 진과 거룩한 성 (9)

  이것은 변화성도의 혈손으로 이루어진 도성을 말한다. 이 때에 왕궁 도성에는 변화성도의 혈손이 아니고는 거하지를 못한다. 그러므로 모든 백성이 다 사랑하는 성을 받들어 섬겨 왔던 것이다. 그리고 모든 예물을 바치는 일을 해 왔던 것이다(사18:7). 성도의 통치라는 것은 신정 통치니 거룩한 도성에서 통치하되 영광을 누리는 것 뿐이요, 아무런 피해도 없고 전쟁도 없고, 미혹이 없는 동산에서 영광스러운 도성을 이루어 세계적인 평화왕국을 보존하고 내려왔다.

  그러나 미혹 받은 백성들이 그 성을 둘러싸고 해치려고 할 그 때에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고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소멸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되므로 미혹 받은 자는 멸망을 당하고, 미혹 받지 않은 자들이 영원한 천국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때 미혹이라는 것은 어떤 말씀을 중심 해서가 아니고 성도의 왕권을 끝까지 순종하느냐, 안 하느냐 하는 것으로 갈라지게 된다.

 

  3. 대 심판 (11~15)

  이 심판은 복음 심판이 아니요, 행위 심판인데 죽은 자 중에도 두 가지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지옥 갈 사람도 있고 천국 갈 사람도 그 심판에서 갈라지게 된다. 구원받은 종이라도 왕권에 가입하지 못한 자는 행위 심판을 거치게 된다. 왜냐하면 왕권을 받은 자는 행함대로 왕권을 받았으니 그 밖의 사람들도 행함 따라 상급을 받되 왕권으로 받는 것이 아니고 시민권으로 받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행함 따라서 심판을 받되 책에 기록된 대로 받는 것이니 유황불에 고통을 받아도 행함 따라 고통을 받게 되고 천국의 영광을 누려도 행함 따라 누리되 왕권의 영광이 아니요, 시민권의 영광을 받게 된다. 다시 말하면 죄사함을 받은 자는 심판록에 있지 않고 생명록에 있으므로 그 책에 기록된 대로 상급을 받고 정죄함을 받는 자는 그 이름이 심판록에 있으므로 행한 대로 형벌을 받는 것이다. 아무리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는 심판이 된다. 왜냐하면 전부 그 책에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결    론

  천하에 제일 복 있는 자는 천년 왕국에서 왕 노릇 하는 자요 제일로 영광을 길이 길이 누릴 자도 왕권을 받은 자들이다. 그러나 시민권이라는 것은 이미 구원받은 자도 있고 환란에서 영, 육이 아울러 구원받은 자도 있는 것이니 가장 복 있는 자는 변화성도이며 그의 자손일 것이다.

 

 

때가 올 때 영화롭게 되는 일

- 요 17:1~2,  사 24:13~15,  사 60:5~9 -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정한 때를 두고 역사하시되 인간이 볼 때는 실패 같고 부끄러운 일, 수치스러운 일, 괴로운 일, 모든 난관을 당하게 하고 거기서 영화롭게 하는 일이 때가 올 때에 영화롭게 되는 일이다. 그리스도께서 영화롭게 되는 일은 많은 대중이 따라오고 환영할 때가 아니고 인간 죄를 짊어진 몸으로 겟세마네 동산과 골고다를 거칠 때가 영화롭게 되는 일이라는 것을 알 자는 전혀 없었다.

  이제 때가 올 때에 영화롭게 되는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시기를 분별해서 알 수 있다.

 

  1. 그리스도가 영화롭게 되는 정한 때 (요17:1~2)

  하나님께서 모든 선지를 통하여 언약을 세운 말씀은 정한 때에 가서야 이루어지는 것이니 그 때의 비밀을 아는 자는 심히 적었다고 보게 된다. 많은 유대인이 메시야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으나 메시야가 와서 만민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을 그 때에 비밀을 아는 자는 없었던 것이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올라 갈 때에 호산나를 부르며 종려 가지를 들고 옷을 벗어 길에 깔고 대 환영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 박힐 때에 가서는 한 사람도 내 죄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시나이까 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다 배척하되, 세 가지 사람이 나타났다.

  예수를 못박아 죽이려던 원수들과 대중은 합세하여 자기네가 큰 승리를 본 듯이 떠들며 예수님을 비소하게 되었던 것이다. 죽기로 결심하고 따라가던 베드로를 비롯하여 모든 제자는 다 도망을 가고 말았던 것이다. 또는 십자가 앞에서 쳐다보고 울고 있는 마리아와 사도 요한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 때가 예수님이 영화롭게 되는 시간 인줄 모르고 한편은 기뻐하고 한편은 낙망을 하고 몇 사람은 슬피 울면서 주님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렇게 될 때를 내다 본 주님께서 사랑하는 제자를 향하여 “너희들은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 하시면서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하는 기도를 하게 되었다. 이 영화롭게 되는 것은 주님만이 아실 일이요, 어리석은 인간들은 다 모를 일이다.

  인간이 볼 때에 나사렛 예수는 세상에 왔다가 비참한 죽음을 하는 그 광경을 볼 때에 그 누가 영화롭게 되는 일이라고 알 자가 있었을까. 의기가 양양한 대제사장과 모든 무리들은 자기네가 큰 승리를 본 듯이 떠들어댔다. 인간이 볼 때는 그들이 옳은 것 같고 예수님은 저주를 받은 것 같으나 하나님이 볼 때는 가장 영화롭고도 의로운 일인 동시에, 대 승리를 보는 때라고 보게 된다.

  우리의 영화라는 것은 대중이 알아주는 일보다도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는 일일 것이니 오늘의 기독 신자들이 참된 영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 중에서 하나님의 영화보다도 인간의 영화를 바라볼 때에 큰 부패를 가져온다.

  그리스도 한 분이 십자가에 죽음으로 율법의 시대는 끝이 나고 은혜시대가 들어오는 문이 열려지는 때였다. 하나님의 아들 한 분이 십자가에 죽으므로 세계 인류가 다 영생할 수 있는 영생의 길이 열렸다는 것이 얼마나 영화로운 일인가! 모든 대중은 참된 영화를 부끄럽게 알고 임시로 그 때 그 때에 자기를 영화롭게 하려는 생각은 멸망을 자취하는 어리석은 행동이 될 것이다(계18:7).

 

  2. 여호와를 영화롭게 하는 정한 때 (사24:13~15)

  모든 인간들은 지금 무신론 사상에 속고 있고 심지어 하나님이 죽었다는 신학설까지 나오는 이 때에 하나님의 진노는 반드시 올 것이다. 만일 이 때에 하나님이 잠잠하고 만다면 그야말로 무신론의 사상이 승리할 것이고 인본주의 사상이 복된 자라고 볼 것이다. 그러므로 이사야 선지는 24:1이하에 하나님께서 땅을 공허하게 하고 뒤집어엎어서 일반이 되게 할 때에 땅은 온전히 공허하게 되고 세계 인류는 불타서 남은 자가 적게 될 것은 그들이 여호와의 말씀인 영원한 언약을 파하였음이라고 했다.

  세상에 인류 전멸이라는 무서운 환란, 재앙이 올 때에 동방 땅 끝에서부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고 했으니 어떻게 하여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게 된다는 것이 이사야 24장~28장까지 기록되어 있다.

  인간 죄악을 짊어진 예수님이 영화롭게 될 때는 율법 시대가 끝이 나고 은혜시대가 올 때요, 은혜시대가 끝이 나고 무서운 환란, 재앙이 오므로써 세계 인류가 전멸되고 남은 자로 새 시대를 이룰 때는 하나님의 이름이 영화롭게 될 때라고 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새 언약의 피로 구원을 완성한 것이요, 심판과 새 시대는 여호와 새 일을 행하므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니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이 영화롭게 될 것이다(사43:19).

  이제 온 세계가 전멸되는 환란, 재앙이 올 때에 누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느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성서로 증명한다.

  첫째 : 끝까지 기다리고 있던 자이다 (사25:9)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시련을 준 것은 끝까지 기다리고 있는 자를 통하여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며 성산의 축복을 받게 하는 것이다.

  둘째 : 해산의 수고를 다하던 자이다 (사26:16~19)

  언제나 해산의 수고를 다하던 자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했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하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주님 다시 올 때도 해산의 수고를 다하던 자들이 1차 부활에 참여하는 동시에 여호와를 찬송하게 될 것이다.

 

  3. 동방 사람이 영화롭게 되는 정한 때 (사60:5~9)

  인생 중에 가장 영화롭게 되는 사람은 동방 사람이라는 것을 이사야 60장은 가르쳤다. 이것은 사59:19~21과 같이 되기 때문이니 동방 사람에게 신이 임하고 입에 말씀이 임함으로써 이것으로 영원한 왕국이 이루어질 오메가 역사가 되기 때문이다. 동방에 임한 말씀의 빛이 세계를 밝힐 때에 열방 재물이 동방으로 들어오는 동시에 지상 축복의 새로운 땅의 주인공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동방 사람을 통하여 새로운 시대가 이루어지는 역사가 오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버림을 당하고 미움을 당하고 심지어 지나가는 자가 없었으나 그가 영영한 아름다움과 대대에 기쁨이 되게 하시는 것은 열방의 모든 통치권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사60:12~16, 사62:1~3). 이것이 하나님의 대 사업이 되는 것이다. 간교한 옛 뱀을 만들어 천하를 꾀어 보는 것은 미혹을 받지 않고 이긴 자로 왕국을 이루기 위한 목적이다(계 12:7~11).

 

  결    론

  영화롭게 되는 일은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므로만 되는 것이니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계 인류의 죄를 사하는 진리가 말씀대로 이루어지므로 그리스도께서 영화롭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새 일을 행하시겠다는 말씀이 이루어지므로 하나님의 이름이 영화롭게 될 것이고 새 일의 진리를 완전히 하나님께 받아서 세계에 전파하는 자가 될 때에 영화롭게 되는 일이 있을 것을 때가 될 때에 영화롭게 되는 일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예정과 인격

- 롬 8:28~30 -

 

  하나님께서는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모든 만물로 사람을 돕게 한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완전한 인격을 이루기까지 돕는 만물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물까지도 완전한 인격을 이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롬8:18~20).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아담이 범죄하므로 전 세계 인류가 그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하고, 만물의 형상 앞에 머리를 숙여 절하는 우상을 섬기는 사람이 되었지만, 하나님의 예지와 예정 아래서 언약을 세운 하나님의 말씀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서 그로 하여금 맏아들이 되게 하고 그를 믿는 자녀들은 그의 형상을 본받게 하자는 것이 하나님의 예정인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 신자는 모든 생각이나 말하는 것이나 행하는 것이나 전부는 예수 형상을 본받고자 하는 목적 안에서 기도나 전도나 봉사나 모든 일을 행해야만 될 것이다. 이제 하나님의 예정 속에서 우리를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한 활동은 다음과 같다.

 

  1. 뜻대로 부르심 (28)

  기독교는 사람이 하나님을 찾는 종교가 아니고 하나님이 사람을 찾는 종교인데 아무 사람이나 찾는 것이 아니고 택한 자를 찾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택하는 것은 절대 하나님의 주권에 있는 것이니 택함을 입은 자는 모르나 택하신 하나님은 모태로부터 미리 아시고 하나님의 약속하신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하여 지방적으로 택한 자를 출생하게도 하시고 부르시기도 하는 것이다.

  부르시는 것도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시는데도 아무 때나 부르시는 것이 아니고 정한 때에 부르시는 것이다. 부르시는 하나님은 앞으로 될 일도 예정한 뜻을 이루기 위하여 부르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도자는 하나님이 택한 자를 찾기 위하여 쓰는 한 도구이다(행10:5, 13:48, 18:10). 그러므로 전도자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것 뿐이요, 조금도 인간의 어떤 방법을 취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주님께서도 세상에 오실 때에 어떤 인간의 방법으로 할 수 없는 낮은 자리와 낮은 인격을 가지고 역사했던 것이다.

 

  2. 본받는 자가 되도록 역사하심 (29~30상반절)

  예를 든다면, 포도원 농부가 극상 포도를 심고 극상 포도의 열매를 맺도록 노력하는 거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부르신 자를 그냥 버려 두는 것이 아니고 아들의 형상을 본받도록 역사하시되 행위를 보고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고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 하는 동시에 아들의 형상이 이루어지도록 성령으로 역사하신다(롬8:13~17).

  하나님께서 바울을 불러 쓰실 때도 그리스도를 반대하던 사람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받는 것을 영광으로 알고 나가도록 역사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완전히 승리하셨으므로 그를 믿는 자는 완전히 승리하도록 성령을 보낼 공로가 있으므로 누구든지 부르심을 받은 자는 성령을 무조건 부어주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성령으로 역사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는 그리스도의 대행자가 되도록 역사할 때에 주님께서 하실 말씀을 그 종이 하고, 주님께서 찾아가서 택한 자를 찾을 일을 종을 통하여 하고, 주님께서 손으로 하실 일을 그 종의 손으로 행하므로 예수의 형상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행하는 일을 저도 행할 것이요, 이보다 더 큰 것도 행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3. 영화롭게 하심 (30하반절)

  그리스도께서 영화롭게 되므로 만왕의 왕이 된 것 같이 택함 받은 사람도 그 왕권 반열에 들어서 세세토록 왕 노릇 하는 영광을 주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예정이다(계22:5). 누구든지 자기 스스로가 왕이 되려고 한다는 것은 오히려 죄가 될 것이로되 하나님께서 왕이 되도록 예정하셨으므로 그를 부르시고 의롭다 하는 동시에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예정하신 것은 그 뜻을 인간으로는 폐할 자가 전혀 없는 것이다(롬8:35~38).

 

  결    론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뜻은 그리스도의 왕국을 이루는 것이니 왕국이라는 것은 왕 될 자의 수가 차기까지 하나님은 쉬지 않고 역사하시는 것이다.

 

 

심판할 이는 말씀

- 요 12:44~50 -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생을 구원하고자 하는 마음은 간절하나 하나님도 말씀을 따라서 구원하기도 하고 심판하기도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말씀을 순종하지 않을 적에 오히려 슬퍼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소원이 이루어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언제나 하나님은 사랑이시니 말씀을 세우신 다음에 말씀을 따라 행하는 것이니 아무리 사랑을 하려고 해도 말씀을 순종치 않는 자를 사랑할 수도 없고 아무리 복을 주려고 해도 말씀을 순종치 않는 자에게 복을 줄 수 없을 때에 하나님은 슬퍼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는 것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는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고 하였다.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오신 예수님은 항상 말씀을 순종치 않는 인간들을 불쌍히 보는 심정을 가진 것이다. 이제 말씀이 심판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심정이 주님께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1. 빛으로 세상에 오심 (46)

  빛이라는 것은 모르는 사람을 알려주는 것을 뜻한 것이니 인간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대신 죽으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그 말씀 하나를 바로 알도록끔 하는 일에 전력을 두고 역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한 사람이 앞에 있다 하여도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 말씀을 바로 말해 주기 위하여 밤낮을 헤아리지 않고 역사했다.

  니고데모라는 청년 하나를 놓고 가장 중대한 진리를 말한 것이 요한복음 3장이요,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을 앞에 놓고 영생의 물을 말해 준 것이 요한복음 4장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친히 걸어가시면서 말씀을 가르칠 때는 부활하신 후에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를 데리고 길을 가면서 성경을 가르친 사실, 유대인이 무서워서 숨어있는 제자를 찾아가 마음을 열어 주면서 성경을 깨닫게 하시며 사명을 가르쳐 주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셔서 말씀 하나를 백성들에게 전해 주기 위하여 노력하신 것이니 누구든지 주의 종이 되려 할 때 말씀 하나를 바로 전하기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면 예수와 같이 왕 노릇 하는 것이다(계20:4). 그러므로 말씀을 밝힐 때에 빛이요, 말씀을 바로 전하지 못할 때에 흑암이다(사8:20).

 

  2. 세상을 구원하러 오심 (47)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대신 죽으시는 주의 심정은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다” 한 것은 메시야가 오신 목적을 말한 것이다. 지금까지 주님께서 길이 참으시면서 대언 기도하는 것은 자기가 십자가에 죽은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니 택한 자를 구원하여 수가 찰 때까지 정죄하지를 않으시고 용서해 주기를 위하여 기도하시는 주님이시다.

 

  3. 그 말씀이 마지막 날에 심판함 (48)

  심판이라는 것은 구원코자 하여, 말씀을 믿으면 구원하고 믿지 않으면 멸망하리라는 말씀에 의하여 끝을 맺는 것이니 인간 자체는 멸망할 사람인데 믿으란 말을 순종치 않을 적에 자동적으로 말씀대로 망하게 되는 것이다. 말씀을 믿어도 믿지 않아도 여기에 일반으로 취급한다면 그것은 말씀으로 심판하는 일이 되지 못할 것이로되 말씀을 순종하는 자를 구원해 준다면 순종치 않는 자는 구원하지 않는 것이 공의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심정이 심판하기를 원하는 것이 있다면 주님 자체는 사랑이라 할 수가 없다. 어떤 사람이 남이 죽는 것을 원한다면 그것은 악한 마음이 될 것이다. 하물며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이 심판하기를 원한다는 마음은 도저히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4. 아버지 말씀대로 이루시는 예수님 (49~50)

  예수님은 조금도 자유로 말하지 아니하고 친히 아버지의 명령대로 이루는 것뿐이니 그 명령 자체가 영생이라고 했다. 이것은 인생을 구원하기 위하여 명령하신 그 명령을 순종하는 것뿐이라는 것이다. 만일 아들도 그 명령을 순종치 않았다면 만왕의 왕이 될 수가 없을 것이로되 충성된 증인으로 끝까지 순종했기 때문에 만왕의 왕이 되신 것이다(계1:5). 그러므로 예수님은 절대 “나는 구원을 위하여 순종하는 것 뿐” 이라는 것을 말씀하면서 심판할 이는 말씀이라고 했던 것이다.

 

  결    론

  말씀이 있는 동시에 그 말씀에 의해서 행하는 것이 심판이라는 것이다. 성부, 성자, 성신이 신앙의 대상자가 되는 것은 그 자체는 사랑이신데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말씀을 세우시고 그대로 행하는 신이시니 우리는 그를 믿으므로만이 구원을 받는 것이요, 믿지 않으므로 말씀대로 심판의 형벌을 받는 것이다.

 

 

 

장 년  공 과 편 - 사명자의 생활

 

제1과  기도 생활

- 딤전 2:1~7,  요절:4 -

 

  서    론

  하나님께서 우주 공간에 대 사업을 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진리를 바로 깨닫고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을 목적 둔 것인데 이 사업은 사명자의 기도가 없이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역사를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구원이라는 것은 인간의 힘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역사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역사는 사명자의 기도에 의하여서만 역사가 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명자의 기도 생활을 본문에서 배우기로 하자.

 

  1대지 : 완전한 기도가 있어야 함 (1)

  완전한 기도라는 것은 자기가 자기를 위하여 하는 기도가 아니고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는 기도이다. 그런데 남을 위하여 기도하더라도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가 있어야 된다.

  간구란 것은 최선의 힘을 다하여 해산의 수고를 하는 기도를 뜻했고, 기도라는 것은 항상 마음으로 원하는데서 끊어지지 않고 드리는 기도를 뜻했다. 이 기도는 장소나 시간에 대하여 어떤 규정이 없이 항상 하는 기도이다. 도고라는 것은 입을 열어서 늘 고백하는 기도니 사람의 이름을 불러 가면서 사정을 말해 가면서 드리는 기도다.

  감사는 무슨 일이나 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깨닫고 핍박이 와도 고생스러워도 아무리 동역자에게 중상을 받는 일이 있다 하여도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고 감사하는 마음이 있을 적에 이것은 오히려 영계가 속히 향상되는 동시에 하늘의 상급이 크게 되는 것이다.

 

  2대지 : 국가의 안정을 위하여 (2~3)

  나라의 운명은 하나님께 있고 정치인의 마음도 하나님이 주관하는 것을 믿고 기도해야 된다. 기독 신자는 국가를 떠나서 있는 것이 아니고 그 국가 안에서 생활하면서 국민의 정신과 사상과 생활을 개혁시키는 것이 사명이기 때문이다. 금일에 우리 나라에 하나님이 보호하사 라는 진리는 기독 신자를 통하여 이루어질 진리다.

  사명자가 정치적인 야욕을 둔다는 것은 탈선이로되 정치인을 기도로 움직여 주는 것은 의로운 사람의 활동이라고 볼 수 있다. 한 사람의 기도가 하늘 보좌를 움직일 수도 있고, 원수의 나라를 물리칠 수도 있고, 모든 재앙이 물러갈 수도 있다는 것이 성서의 역사이라면 오늘의 모든 난제를 해결하는 것은 사명자의 기도 응답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소돔 고모라에 의인 열 명이 없으므로 망한 사실을 볼 때 의인이 다수는 못되어도 합심하여 올리는 기도가 국가를 움직이는 생명선이 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라고 본문에 가르쳤다.

 

  3대지 : 기도에 대한 하늘의 활동 (4~7)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라고 본문에 기록했다.

  하나님은 중보자 되시는 예수님의 대언기도를 통하여 세계 만방에 대 확장을 가져오도록 복음 운동을 전개시킨 것은 전부가 사명자의 기도 응답이 예루살렘 다락방에 성령의 불이 떨어져서 온 세계를 덮게 된 것이니 전부가 사명자의 기도의 응답으로써 이루어진 현실에 앞으로 온전히 성도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은 사명자의 기도 응답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결    론

  사명이라는 것은 각각 분야가 다르지만 전부가 다 기도 응답으로 그 사명을 감당하게 되는데는 그 중보자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니 우리는 대언자 예수님과 항상 긴밀한 연락을 기도로 하는 데서만이 승리의 열매를 거두게 되는 것이다.

 

 

제2과  사명자 남녀 구별

- 딤전 2:8~15,  요절:11 -

 

  서    론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가장 으뜸이 되는 남자를 창조하시었다. 그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이루어진 인격이다. 그러나 그가 홀로 있는 것을 합당치 않게 하나님은 보시었다. 왜냐하면 천국을 목적 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큰 사명을 가진 남자를 돕는 배필이 있어야만 되겠으므로 남자의 사명적인 영광을 위하여 여자를 창조한 것이다.

  고전11:7을 보면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라고 바울은 가르쳤다. 9절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 받은 것이니”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타락하기 전 에덴 동산에서와 같이 사명자는 남녀의 구별을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죽은 영들인데 중생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동시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명을 받은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열 두 제자를 택할 때도 남자들로만 택한 것은 아무리 예수님의 은혜로 되는 일이라도 남녀의 구별을 둔 증거라고 본다. 주님 당시에도 많은 여종들이 따라가며 물질로 봉사하고 끝까지 수종을 들은 사실을 볼 수 있다. 이제 남녀 구별을 본문을 통하여 분명히 알 수 있다.

 

  1대지 : 남자의 합심 단결이 있을 것 (8)

  남자라는 것은 분노와 다툼이 없어야 된다는 것이다. 사명자가 분노와 다툼이 있다는 것은 큰 과오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만왕의 왕을 따라가는 자가 되려면 완전히 십자가에서 정과 육이 죽어야만 사명자의 인격을 가진 것이다. 마귀와 싸우는 군대가 되려면 싸우는 사명자 인격이 사단의 본질인 분노와 다투는 일이 없이 되어야만 될 것이다.

  우리가 마귀와 싸우는 군대로서 마귀를 대적하는 싸움 외에는 다른 일에 분노한다든지 싸우는 것은 벌써 영적으로 사단에게 정복을 당하는 시간이니 이것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할 때 여기서 더 사명을 할 수 있는 역사가 내리는 것이다. 언제나 사명 가진 남자들이 단결할 때에 역사는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하는 사실이다. 아무리 사명자라도 합심하여 하나가 되는 일이 없다면 하나님은 역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복지를 점령할 때에도 열 두 정탐꾼이 하나가 못되고 다툴 때에 40일이 40년으로 연기된 일이 있고 황폐된 예루살렘이 복구될 때에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가지고 예루살렘에 돌아왔지만 합심이 못되고 서로 다툴 때에 15년간 연장된 일이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한 것이다. 이 글은 로마 옥중에서 환란을 만난 바울의 간곡한 부탁이었다. 어려운 환란이 올 때에 남자들이 합심하여 기도하여야만 된다는 것이다.

 

  2대지 : 여자의 순종과 종용 (9~12)

  하나님께서 여자를 창조할 때 남자보다도 연약하고 부드럽고 아름다운 태도를 주어서 낸 것은 남자가 맡은 사명을 돕기 위하여 순종하면 된다는 뜻이요, 일선에 나서서 싸우라는 인격은 아니다. 또는 우렁찬 남자의 위엄을 무시하지 말고 종용히 그 권세 아래서 수종을 드는 자가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언제나 대표적인 종을 남자로 세운 것은 그 사명 아래서 여자는 순종하고 종용하게 해서 도와주라는 것이다.

  순종이라는 것은 남자가 두려워서가 아니고 순종하므로써 종용히 배우는 자리에서 남자를 가르칠 수 없고 남자를 주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여자가 여자를 배워주고 주관할 수는 있을 수 있으나 여자가 남자를 주관한다는 것은 사도바울의 신앙 양심에서 허락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3대지 : 남녀의 선후 관계 (13~15)

  하나님께서 남자 아담을 먼저 지었고 하와를 후에 지은 뜻은 남자에게 먼저 모든 것을 맡기고 다음에 여자를 창조하여 그 맡긴 일을 돕기 위해 두었던 것이다. 여자가 먼저 꾀임을 받고 죄에 빠졌으므로 남자에까지 그 영향이 미친 것은 여자에게 죄에 빠진 책임이 있으므로 여자는 해산의 수고를 하는 것이 있으므로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게 되므로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여자는 홀로 왕권을 받을 수는 없고 남자가 받는 왕권에 가입할 수가 있게 된다. 그러므로 언제나 여자의 사명을 남자가 돕는 것이 아니고 남자의 사명을 여자가 돕는 것을 하나님은 원칙으로 했던 것이다.

 

  결    론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은 이미 남자에게 임한 것인데 그 사랑 속에서 남녀가 다 같이 영광을 누리게 된다. 이와 같은 뜻으로 예수님도 성령으로 잉태될 적에 물과 피로 임하여 남자의 형상을 이루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하셨으니 하나님도 자기를 가르쳐 나는 네 남편이라고 사54:5에 말했고 예수님도 자기를 신랑으로 말씀한 것은 하나님의 형상이나 아들의 형상이 다 남자의 형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모든 영광은 다 남자의 영광이라고 볼 수 있다(사62:5).

 

 

제3과  사명자의 사생활

- 딤전 3:1~7,  요절:1 -

 

  서    론

  하나님께서는 은밀한 가운데 살피시되 사명자의 사생활에 있어서 작은 일에 바로 하는 자라야 큰 일을 할 수 있도록 역사를 내리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의 일을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것에 따라서 왕권을 받는데 까지 이르기 때문이다. 예를 든다면 나무가 대중이 보도록 아름다운 열매를 맺되 열매로써 일하는 자에게 힘을 공급하는 것과 같이 사명자가 항상 사생활에서 바로 되는 자라야 대중을 살리는 열매있는 종이 될 것이다. 이제 크게 쓰는 일꾼이 되려면 어떠한 생활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본문에 가르친 것이다.

 

  1대지 :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 (1)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가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이 있고 없는데 따라서 열매는 따라가는 것이다. 어떤 종이 주의 일을 할 때에 중심에 사모하는 마음이 없다면 중심보시는 하나님이 일을 한다 해도 외식하는 자라고 보게 될 때에 오히려 죄가 된다(마24:51). 누구든지 사명을 맡은 자로서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으로 기도할 때부터 하나님은 일할 수 있는 은혜를 내리므로 열매가 있게 되는 것이다.

 

  2대지 : 가정이 바로서야 한다 (2)

  가정은 사명자가 일할 수 있는 힘을 주는 내장과 같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부부의 신성과 절제, 근신이 있으므로 아담한 가정이 되어야 한다. 가정에서부터 신성을 떠나고 절제있는 생활이 없게 된다면 그 종은 아무런 활동을 할 수 없는 몸이 된 것과 같으니 자동적으로 힘을 낼 수 없고 열매를 맺는 단계에 들어 갈 수 없다.

  그러므로 사명자의 가정은 성도를 육적으로도 대접할 수 있고 영적으로도 진리를 잘 가르칠 수 있는 생활이 있게 될 때에 큰 일을 할 수 있는 종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종이 남에게 누를 끼치는 생활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 떠난 증거라고 볼 수 있다.

 

  3대지 : 거룩한 인격을 이루어야 된다 (3)

  하나님의 종은 그 몸이 존귀한 몸이니 그 몸을 정상적인 인격에서 움직여야 한다. 만일 취하는 술이나 또는 혈기내는 일이나 입으로 다투는 일이나 또는 물질에 끌리는 몸이 된다면 사명자의 인격을 상실한 자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먹는 일이나 혈기를 내는 일이나 다투는 일이나 돈을 따르는 일에 치우친다면 그 인격은 대중을 지도할 인격이라고 볼 수 없다. 그러므로 대중을 지도하는 종이 되려면 항상 너그러이 남을 용서하는 마음에서 움직이는 인격을 가져야 될 것이다.

 

  4대지 : 가정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 (4~5)

  가정이라는 것은 작은 것 같으나 큰 것이요, 가장 존귀한 것인데 가정을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이 대중을 지도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가정의 자녀가 하나님이 함께 하는 증거를 알도록끔 되는 종이 되어야 한다. 만일 자녀가 업신여기고 대적을 하게 된다면 벌써 그 종은 하나님의 종의 권위를 가정에서부터 상실한 자라고 보게 된다. 왜냐하면 가정에 식구들이 감동을 받는 일이 없게 된다는 것은 하나님이 같이하지 않는 증거라고 보게 된다.

  사44:3을 보면 “나의 신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내리리니” 하였고 49:25을 보면 “너를 대적하는 자를 내가 대적하고 네 자녀를 구원할 것임이라” 하였고 66:22을 보면 “새 하늘과 새 땅이 내 앞에 항상 있을 것 같이 너희 자손과 너희 이름이 항상 있으리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참으로 복 받을 종이 될 때에 가정 축복은 반드시 따라오는 것이다(마19:29).

 

  5대지 :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는 자가 되어야 한다 (7)

  사람이라는 것은 불신자도 양심이 있는 것이니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종이 될 때에 교회 밖의 사람도 그 종을 참 종이라고 인정을 하게 된다. 언제나 교회 밖의 사람들이 그 종을 무시하지 못하고 옳다고 증거하게 될 때 자동적으로 그 종은 전도할 문이 열리는 것이다. 전도란 것은 말에 있지 않고 먼저 열매에 있어야 한다.

 

  결    론

  하나님께서 가장 위대한 신이시지만 가장 세밀하시고 가장 무소 불능한 신이시지만 지극히 작은 백합화 한 송이까지도 입히시는 것이며 공중에 나는 새 한 마리도 먹을 것을 주시는 신이시니 이러한 하나님의 종이 되려면 사생활에서 바로 나가는 자가 되어야 한다.

 

 

제4과  사명자의 목회 생활

- 딤전 3:14~16, 4:6~16,  요절4:15 -

 

 서  론

  인류 생활에 가장 가치 있는 일은 목회 생활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정당 생활은 국민의 육적 생활을 지도하는 거요, 공장 생활은 물건 하나를 위한 생활이요, 군인 생활은 적군을 막기 위한 생활이요, 농민 생활은 열매 하나를 식물에서 얻고자 하는 생활이요, 상인 생활은 자기가 이익을 바라보는 생활이다. 그러나 목회 생활이란 것은 하나님의 대행자로서 모든 생명을 영생 세계로 인도하는 생활이다. 이 생활이라는 것은 저주받은 생활을 벗어나서 자신이 복을 받고 그 복 받는 진리를 남에게 가르쳐 주는 생활이다. 이제 목회 생활에 있어서 본문을 통하여 요소가 무엇인 것을 알 수 있다.

 

  1대지 :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라는 것을 알고 행하여야 된다

(3:14~16)

  조금이라도 진리가 혼선되면 교회가 아니요, 진리가 정확히 바로 서므로만이 하나님의 교회인 것을 알고 자신이 진리에 온전히 바로 서는 일에 전력을 두어야 한다.

 

  2대지 : 형제를 깨우치는 일을 해야 된다 (4:6)

  목회자는 언제나 깨우치는 일이 있게 된다면 자신이 발전할 수 있는 요소가 된다. 예를 든다면 싸우는 군대가 자기 홀로 싸울 수 없고 다 같이 정신을 차려야 되듯이 언제나 하나님의 종은 대중을 깨우쳐 주는 일이 있을 때에 모든 일은 순조롭게 되는 것이다.

 

  3대지 :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해야 된다 (7~8)

  사람이라는 것은 완전해져서 일을 하는 것보다 일을 하면서 바로 서도록 연습할 때 성령은 그것을 기뻐하시고 나날이 발전해서 바로 일할 수 있는 생활에 이르도록 역사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언제나 목회자는 모든 일을 경건하게 나가 보려고 연습적으로 노력할 때에 경건한 생활이 전부 이루어지는 열매를 보게 된다.

 

  4대지 : 소망을 하나님께만 두고 노력하여야 한다 (9~10)

  목회자는 조금도 사람에게 무엇을 얻어 보려고 할 때에 그 시간에서부터 실패다. 언제나 하나님이 갚아 주시는 것만을 바라보는 마음이 불탈 때에 하나님은 친히 갚아 주시는 것이다.

 

  5대지 :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야 한다 (11~13)

  모든 사람은 다 완전한 사람이 아니요, 부족한 사람들이라도 한 단체가 되어 그 대표적인 사람의 철저한 인격에 감화를 받고 따라가므로 좋은 열매를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니 목회자는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의 본이 되어야 한다. 이와 같은 인격으로써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일에 착념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6대지 :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내어야 된다 (14~16)

  언제나 목회자는 새로운 것이 있어야 된다. 예를 든다면 모든 식물이 새로이 진보하는 것이 없다면 열매를 거둘 수 없고 그 열매가 없이는 사회 생활을 이룰 수가 없음같이 목회자가 강단에서 설교할 때마다 새로운 것이 있어야 모든 영들은 그를 통하여 나타나는 역사에서 활동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되려면 전심 전력을 다해야만 되는 것이다.

 

  결    론

  가장 복된 자는 하나님의 집을 맡아서 주님 올 때까지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주는 자라고 보게 된다(마24:45~47).

 

 

 

 논 설 편

 

1. 가련한 양떼를 살리는 길에 대하여

  기독교의 역사상 지금같이 가련한 양떼가 어찌할 줄 모르는 때는 처음 된 일이라고 본다. 무서운 정치적인 박해보다도 어떤 환란이 온다는 것보다도 제일로 기독교에 급한 일은 가련한 양떼를 어떻게 살리느냐에 대하여 급한 문제라고 생각된다.

  가련한 양떼는 누구냐는 것을 먼저 말한다.

 

  ① 교회의 상부를 초대 교회와 같이 알고 덮어놓고 순종하는 양떼들이다.

  과거에 교회의 지도자들은 양떼를 위하여 죽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고 나서는 종들을 통하여 피 흘린 순교에서 교회를 세웠던 것이다. 그때에는 가련한 양들이 참된 사랑의 종들을 통하여 하나님이 누구시며 예수가 누구신지를 모르던 민족들도 다 알 수 있게끔 된 것은 목숨을 내 놓고 이방 땅에 우상이 가득한 나라를 찾아가서 싸워준 열매라고 보게 된다. 또는 굶주린 양떼가 생길까봐 빚진 사람같이 안타까운 마음을 가졌던 종들이었다. 그러므로 가련한 양떼는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가련한 양들이 누구냐 할 때에 무조건 따라가는 양떼들인데 자기 마음같이 목자를 믿고 따라갔더니 오히려 그 심령이 상처를 받게 되고 학설이 무엇인줄 모르고 무조건 옳은 해석인줄 알고 따라가고 보니 받은 은혜를 다 쏟고 빈 껍질만 남는 상태에 떨어진 자들이다.

 

  ② 은혜를 받고 시험이 올 때 이것을 바로 수습을 해주는 사람이 없으므로 무조건 날뛰는 자들이다.

  은혜를 받은 자는 확고한 진리를 받아야 되는데 말씀은 없으나 은혜는 된다고 따라가는 자들이다. 말씀 없는 은혜란 것은 대체로 무엇인가를 모르고 일시에 이상한 체험만 있으면 그것이 은혜인 줄만 안다는 것은 가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은혜를 받은 사람은 말씀으로 시험을 물리치는 일이 없이는 오히려 더 혼란을 가져오게 된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성령을 받고 일할 때는 마귀 시험이 왔던 것이다. 시험이 올 때에 말씀으로 물리친 그리스도는 가련한 양을 위하여 눈물과 피를 흘리는 충성된 증인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은혜를 받은 자는 시험을 말씀으로 물리칠 적에 신앙 정로를 걷는 생활이 있게 되는 것이다.

 

  ③ 덮어놓고 축복이라는 말이 믿어져서 있는 재산을 다 바치고 결말은 처자를 한데(방밖에) 내 놓고 할 일 없는 방랑자가 되는 자도 있다.

  축복이라는 것은 진리를 따라 살 때에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참고 나가므로 주 앞에 상급을 받는 것이 원 목적인데 물질을 바치면 물질의 축복이 열 배나 온다는 것에 끌린다는 것은 성경의 진리와 맞지 않는 노선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물질을 바치면 물질의 축복을 받겠다는 목적보다도 하늘 나라에 쌓아둔다는 목적에서 바쳐야만 될 것이다.

  이러한 혼란이 오는 때에 더군다나 큰 일은 영적 흑암이 오는 동시에 물질의 시련까지 닥쳐오게 되는 자리에서 어떻게 하여야 될 것이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첫째 : 자신이 말씀에 완전 무장을 갖춰야 된다

  왜냐하면 지금은 영적 흑암기가 와서 누구든지 중생을 받은 자라면 다 시험을 거쳐서 말씀의 빛으로 흑암을 물리치고 나가는 자라야 재림의 주를 맞이할 때가 왔기 때문이다. 은사를 받기 위하여 역사할 때는 성경을 몰라도 십자가를 믿으므로 은사를 받았지만, 마귀 흑암이 오는 이 때에는 누구나 다 각자가 그 흑암을 물리칠 수 있는 말씀의 무장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때를 당하여 하나님께서 강권으로 말씀 무장 할 수 있는 기관을 세웠으니 이것은 사람의 무엇으로 선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강권으로 불 가운데서 명령하여 새일수도원이 이루어진 것이다.

  새일수도원은 학과가 성경 해석법, 요한一서 강의, 조직신학 강의, 선지서 강의, 계시록 강의인데 이 학과는 간단한 책자이지만 이것을 가지고 25일간만 수도하면 말씀 무장이 어느 성도나 다같이 가지게 된다. 이렇게 되는 원인은 그 책이 사람의 연구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새일수도원 강단에서 설교하는 이 목사에게 책자를 받아쓰라는 명령이 하나님께로 오므로 그 시에 수도를 받던 사람들이 붓을 들어 기록하기 시작하여 계속으로 말씀이 내리어 책자가 이루어졌으니 누구든지 이 책자를 읽으면서 성경을 공부할 때 조금도 혼선이 없는 해석이 나타나서 만족한 해석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는 것은 어느 교회나 교회를 봉사할 제직까지라도 말씀이 무장되어야 될 때가 왔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역사하는 일이라고 보게 된다.

  둘째 : 인격을 무장해야 된다

  지금은 누구나 다 용사 인격을 가지고 나가지 않고는 교회를 유지할 수가 없는 때이니 용사의 인격을 가져오는데는 예배 시간마다 내리는 새 힘을 받아야 될 것이다.

  우리가 반공적인 투쟁을 하는 용사가 되어야 하나님의 보호가 같이 할 것이니 촛대교회가 이루어지려면 교회의 모든 성도들은 용사가 되는 인격으로 갖추어야 될 것이다. 우리는 죽어서 천당을 목적한 것이 아니요, 아무리 어지러운 일이 와도 사상적인 투쟁을 할 수 있는 인격을 하나님께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지금은 새일 성가를 부르는 예배를 드릴 적에 합심 호소하는 시간에 하늘로부터 강한 역사가 막힌 강물이 터져 내리듯이 내려오는 은총을 받아야 된다. 우리는 예배를 볼 때에 의식을 따르는 것과 시간을 지키는 것보다도 시간마다 하늘로 내리는 새 힘을 받는 교회가 되어야 될 것이다. 이렇게 되려면 강단에 선 종이 완전한 무장을 하고 완전한 인격을 가진 종이 서서 예배를 인도할 때에 하나같이 용사가 되는 인격을 이루는 교회가 될 것이다.

  셋째 : 완전한 단체를 이루어야 한다

  영혼 구원은 개인 문제이지만 환란 가운데 남은 교회가 되려면 완전한 사상으로, 진리로, 인격으로 구성된 단체가 되어야 된다. 앞으로 우리의 살 길은 개인 영혼 문제가 아니고 단체적인 교회 문제가 결부된다.

  이 단체란 것은 완전한 새 시대에 들어가는 단체이므로 철두철미한 무장을 갖춘 종들로 이루어진 단체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축복은 완전한 복을 받을 수 있는 교회의 단체가 이루어져야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될 것이다.

 

 

2. 전쟁이냐 평화냐에 대하여

  인간의 완전한 지식은 전쟁과 평화에 대한 진리를 분명히 아는 것이 20세기 말단에 처한 인생들에게 가장 필요한 일이라고 본다. 인간은 지식을 위하여 발전하고 있는 것이 인간의 미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낼 때에 지식에서 발전하고 지식에서 복을 받도록끔 한 것이 인간의 인격이며 향상의 생활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전쟁과 평화에 대하여 알파와 오메가의 진리를 알아야 된다. 전쟁은 어디서 시작되었으며 어디서 끝을 맺을 것이냐 하는 것을 먼저 알아야 된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할 때 사람을 위하여 창조했고 또는 이것을 바로 다스리느냐에 문제를 놓고 하나님은 시험해 보는 것이 사람에게 향상을 주기 위한 선한 방법이었다. 그러므로 시험을 하는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어야 한다.

  첫째 : 시험의 제목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둘째 : 그 말씀을 가지고 시험을 해보는 자를 냈으니 이것이 가장 간교한 뱀이란 것이다.

  하나님은 가장 간교하게 낼 수 있고 가장 진실하게도 낼 수 있는 것이 조물주 하나님의 창조력이라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토기장이가 진흙을 가지고 마음대로 얼마든지 그릇을 만들 수 있는 권리가 있는 것같이 창조주의 권리는 모든 것을 자유롭게 창조하되 만물을 다스리는 사명을 맡은 사람에게 가장 간교한 뱀을 내어서 시험해 볼 권리가 있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선생은 학생에게 시험을 쳐 볼 권리가 있고 또는 정치인은 백성들을 다스릴 때에 백성들에게 법을 따라서 벌할 권리와 또는 얼마든지 보장할 권리도 있다.

  이와 같이 조물주 하나님은 피조물된 만물을 사람에게 주는 동시에 사람을 기계화시키지 않고 더 향상을 시켜서 하나님과 동등가는 권리를 주기 위해서는 가장 간교한 뱀을 창조해서 사람과 싸움을 하게 하여 그 간교한 뱀을 이기면 하나님과 동등한 권리를 가지는 것이요, 이기지 못하면 이긴 자에게 지배를 받는다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로운 방법이었다.

  그러므로 옛 뱀이요 붉은 용이요 마귀요 사단인 세력이 지금 북방에 자리잡고 세계를 침투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선한 모략의 방법이 있다.

 

  1. 에덴 동산에서 세웠던 법을 다시 끝을 맺는 것이니

  에덴 동산에서 가장 사랑하는 아담, 하와를 간교한 뱀으로 시험을 해 본 것은 이기면 왕권을 주기로 작정한 것인데 사람이 이기지 못하므로 간교한 뱀이 용이 되고 사단이 되는 발전을 가져오게 되어 사망으로 왕 노릇하는 권세 아래서 세계 인류는 다스림을 받게 되었다.

  그러므로 둘째아담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낸 것은 만왕의 왕으로 세우기 위한 목적이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완전히 승리하시므로 만왕의 왕이 되었고 그리스도의 권세로 마귀 권세 아래서 죽은 영들을 해방시키는 역사가 즉 기독교 십자가 복음 운동인데 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중생 받은 사람들에게 지상 왕국을 주기 위하여 다시 옛 뱀 붉은 용의 세력을 개방시키어 전 세계 인류를 꾀도록 한 것이다(계12:7~9).

  이것이 마지막 미혹이다. 이 미혹을 받지 않고 예언의 말씀대로 붉은 용의 세력이 망하고 새 시대가 온다는 것을 참인 줄 믿고 붉은 용의 표를 받지 않는 자라야 지상 왕국인 에덴 축복을 다시 받게 한다는 것이 기독교 종말론이다.

  그러므로 지금 전쟁은 무력전보다도 사상전이다. 이 사상이라는 것은 붉은 세력이 세계를 통일하느냐, 그리스도의 기독 사상이 세계를 통일하느냐에 대하여 사상전이 대립된다. 그러므로 공산당의 사상은, 봉건주의 사회가 자본주의로, 자본주의 사회가 공산주의로 이루어지는 합법적인 변론을 하고 있다. 이 변론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요 간교한 옛 뱀의 말이라고 계13:2, 11에 말했다.

  다시 말하자면 자본주의 사회와 사회주의 사회가 대립된 현실에 자본주의는 개인의 자본을 옹호하자는 주의요, 사회주의는 개인의 자본을 국유화시켜서 사회주의 노동당 정권의 자본이 되게 하여 이 자본을 노동당 정권이 지배하여 세계를 공산화시키는 목적을 두고 움직이되 사회주의 사회의 사람들은 전부 노력을 해서 사회주의 정권의 발전을 위하여 순종할 것 뿐이요, 전 국민은 다 목적을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하는데 총 궐기하자는 것이 소위 공산주의를 위한 사회주의 정치라는 것이다.

  이렇게 되는데는 자본주의 정치라는 것은 사회주의 정치 앞에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다는 이론을 세우는 것이다. 그 이론은 무신론자의 마음을 끌고 있다. 왜냐하면 개인의 자본을 위하여 종이 되지 말고 세계를 공산화시키는 이 운동에 손길을 맞잡아 준다면 너희는 얼마든지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사회가 온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과학적인 발전을 가져올 때 농장이나 공장이나 모든 전부를 과학적 기계로 움직일 때 사람의 손이 필요 없이 평안히 먹고 살 수 있는 사회가 올 것이니 그 농장과 공장을 개인에게 주지 말고 국가가 움직이는 사회가 되므로 국민은 차별이 없이 공평하게 사는 것을 공산주의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을 가지고 나오는 현실에 공산주의와 싸울 필요가 없다는 반전 데모가 미국에서 본격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의 성경을 비추어 보면 계시록에 만 왕의 왕이 지상 왕국을 이룰 때는 붉은 세력을 내보내서 전 세계 사람을 인간 육.육.육의 세력으로 미혹해 본다고 했으니 육이라는 것은 인간 과학적인 최고 발달을 가르친 것이다.

  그러므로 과학적으로서 기계화되는 공장과 농장으로 전 국민이 하나같이 잘 살 수 있게 한다는 공산주의는 하나님의 말씀을 볼 때 분명히 붉은 용의 앞잡이 짐승과 거짓 선지를 통하여 오는 미혹이라고 성경은 가르쳤다.

  그러므로 소위 협상주의라는 간판 아래 W.C.C라는 것은 성서로 볼 때 심판의 대상자가 되는 음녀적인 행동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사상을 대적하는 공산당을 용납한다는 것은 영적과 사상적으로 음녀라고 본다.

  우리는 사상전을 하는 것이 성서적이요, 또는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양심의 행동이라고 본다. 종교를 아편으로 보는 공산 사상은 참된 진리의 종교가 되는 기독교로서 사상전을 하는 것이 마땅히 할 의무라고 본다. 그러므로 우리의 전쟁은 영토를 위한 전쟁도 아니요, 정권을 위한 전쟁도 아니요, 진리를 위한 전쟁이다.

  진리를 대적하는 붉은 용의 세력을 이기는 방법은 진리 하나를 바로 변론할 때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진리대로 이루어지는 권세 역사를 주어서 마귀 권세를 이기도록 역사를 내리시므로 마귀 권세가 거꾸러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진리대로 끝까지 싸우는 사람을 내세우기 위한 모략적인 방법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리를 사상적으로 바로 변론해서 싸우는 사람이면 하나님은 붉은 용의 세력을 없이하고, 그 사람에게 지상 통치권을 맡기겠다고 예언을 했기 때문에 우리는 전쟁은 필연코 참된 하나님의 진리가 승리한다는 것을 믿을 때에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 나라 만세를 부르게 된다.

 

  2. 완전 평화의 왕국

  우리는 무신론자가 아니요, 신의 존재를 합법적으로 믿는 동시에 그 하나님과 교통하는 산 체험의 종교를 믿는 자로서 공산주의를 용납하는 평화라는 것은 한 미혹에 떨어지는 마귀의 술법이요, 공산주의를 없이하므로 이 세상은 참된 평화가 오는데는 사람의 무력으로써가 아니고 하나님의 심판이 붉은 용, 붉은 짐승, 붉은 여자인 바벨론에 온다고 하였으니 오늘에 성경대로 붉은 세력이 세계를 침투하는 것을 볼 때 성경대로 심판이 올 것은 틀림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세 비밀을 말하는 것은 우리가 망한다는 것이 아니고 붉은 세력이 망하고 평화로운 시대가 오는 것을 평화 왕국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죽어 천당을 목적한 것이 아니고 지상 평화 왕국은 붉은 세력이 망하는 것으로 온다는 것을 믿고 싸우는 것이 기독교 종말의 말세 비밀 진리 사상이라는 것이다.

  지금 이때에 기독교가 누구든지 믿으면 다 천당을 간다는 진리만 가지고 공산당도 믿으면 천당 간다는 것은 시대를 모르는 사람들의 잠꼬대와 같은 소리로 본다. 공산주의가 예수 믿고 천당 간다는 것으로 성경을 들고 교회를 들어오는 그 행동은 성경을 볼 때에 거짓 선지라고 본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말씀대로 승리가 오고 말씀대로 평화가 올 것을 믿는 것이 기독교인의 완전한 신앙 사상이라는 것이다.

 

 

3. 신앙의 정로는 하나 뿐이다

  신앙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세워 주신 언약을 믿는 것이니 언약이 이루어진 것을 믿음으로 영혼이 살고 이루어질 것을 믿음으로 완전한 새로운 시대를 이루는 데까지 들어가는 것이다. 이루어진 일도 하나님이 행하신 것이요, 이루어질 일도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이니 하나님은 언제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는 여러 가지 방침으로 변경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요, 어떻게 행하시겠다는 방침을 세우신 그 예정을 행하시는 데는 이미 말씀한 언약의 책대로 행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제 신앙의 곁길은 무엇이냐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할 것이다.

  1) 그리스도의 완전성을 부인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앙 대상자의 완전성을 그대로 믿지 않을 때에 완전성을 가진 주께서 역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완전성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행하시는 것으로써 완전성을 이루시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것은 초림의 주로서 할 사명을 다 행했다는 것이다.

  십자가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통하여 완전 속죄, 완전 구원을 완성한 것이니 구원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완전성을 통하여 믿는 자에게 거저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완전성을 그대로 믿지 않으면 구원을 받는 산 체험을 가질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타락한 인생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가 완전해지므로 만이 행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완전성을 그대로 믿지 않으면 자동적으로 곁길이 되는 것이다.

  2) 성신의 완전 역사를 믿지 않는 것이다

  아무리 예수를 믿는다 하여도 성신의 완전 역사를 그대로 받지 않는 사람은 아무런 열매를 맺을 수 없고 그 신앙이 마른나무같이 되고 마는 것이다. 성령은 영혼 구원만을 목적한 성령이 아니요, 사람으로서 완전한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져서 동등 가는 왕권에 이르기까지 목적 둔 성신인데 성신의 완전성을 그대로 믿지 않을 때에 그 신앙은 장성할 수가 없는 곁길이 되는 것이다.

  3) 성경을 가감하는 일이다

  이미 이루어진 일을 가감해도 탈선이요 이루어질 일을 가감해도 탈선이 되는 것이니 오메가의 역사로 기독교는 끝을 맺는 것이다. 아무리 은혜를 받는 자라도 종말의 진리가 탈선될 때에  그 사람은 자동적으로 흑암에 빠져 헤매게 되는 것이다.

  다음에 신앙 정로는 하나라는데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정로라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그 일을 그대로 믿는데는 우리가 주님의 손을 붙든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우리를 붙들어 인도하기 때문에 정로를 가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이루어진 일은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이니 행하신 일은 우리를 위하여 행하셨기 때문에 그대로 믿을 때에 행하신 일의 열매가 우리에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누구든지 예수께서 날 위해 죽으신 것을 확실히 믿을 때에 내가 완전히 속죄의 은총을 받는 체험이 있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살아 계셔서 나를 인도하실 줄 믿을 때에 주께서 성령으로 항상 인도하여 주시는 것이요, 주께서 나를 위하여 기도하시는 것은 나를 완전케 하기 위한 목적인 것을 믿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완전하게 되도록 역사해 주시는 것이다.

  이렇게 되므로 신앙은 체험의 종교가 되는 것은, 진리가 완전하지 못한 것을 체험으로 말미암아 믿음이 완전해지는 것이 아니고 진리가 완전한 것을 완전히 행하시는 역사가 주의 역사이므로 그 진리를 완전히 믿을 때에 우리에게 진리대로 이루어지는 체험을 기독교의 완전한 신앙 정로의 체험이라는 것이다.

  2. 행하실 것을 믿는 일에 있어서 정로를 찾아야 한다. 금일에 기독교가 행하실 일을 바로 믿지 못한다면 이 사람은 변화성도의 자격을 이룰 수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부활성도는 이미 행하신 일을 믿음으로 자기가 그 증거를 체험하고 피 흘리기까지 싸우면서 증거한 자들이요.

  변화성도는 이루어질 것을 증거할 때 완전한 무장을 말씀에서 하고 말씀대로 싸워서 승리하는 자들이다.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신 것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천국에 들어가는 거요, 이루어질 말씀을 그대로 믿고 싸우는 데서 승리한 자들이 새 시대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루어진 일을 믿는 것도 대표적인 사람의 증거를 받아 믿음으로 하나같이 체험을 받고 한 길을 가게 된 것이요, 앞으로 인류 종말에 이루어질 일도 대표적인 사람이 증거하는 대로 하나같이 믿고 따라갈 때에 그 정로를 바로 찾아 나가므로 하나같이 승리하고 남은 종으로 역사하다가 들림을 받는 동시에 들림 받는 종의 뒤를 따르던 양떼는 하나같이 복을 받고 지상 왕국의 축복을 백성된 자격으로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루어진 것을 믿는 신앙의 정로는 사도의 교훈에 있고 이루어질 일의 신앙 정로는 계시록과 선지서에 있는데 이 진리를 증거하는데는 반드시 대표자가 있으므로 하나님이 그 대표자를 통하여 한 정로를 가도록끔 역사하는 것이다(계11:1이하).

 

 

4. 어려운 일과 쉬운 일에 대하여

  조물주 하나님은 사람을 낼 때에 일하기 위해서 낸 것이다. 신께서 사람을 통하지 않고는 아무런 일도 할 필요가 없고 또는 일을 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뼈와 살이 있는 몸이 없이는 신만이 존재해 가지고는 아무런 열매를 나타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열매라는 것은 식물이 맺는 열매도 있고 사람이 맺는 열매도 있으니 식물이 맺는 열매는 사람이 하는 일을 돕기 위한 열매이며 식물의 열매를 사용하여 사람이 일하므로 열매를 맺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열매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다(요15:8).

  이제 어려운 일이 무엇이냐는 것을 알아야 한다.

  1. 마음이 끌리는 일이다.

  사람이라는 것은 자기 마음이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고 합당치 않는 일로 끌려지는 것인데 이것을 마음의 고통이라는 것이다. 마음이 고통을 받게 되는 것은 합당치 않은 일에 마음이 끌려지는 때에 오는 것이다. 에덴 동산에 있는 사람이 간교한 뱀의 말을 들을 적에 마음이 뱀의 말에 끌리게 될 때 죄를 범하는 일이 생겼던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이 괴로워지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지 않을 때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하여 일하는 자인데 그 말씀을 의심할 때부터 감당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이 마음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2. 부끄러운 일이다.

  부끄러움이라는 것은 인격을 상실하는 자에게 있게 되는 것이니 부끄러운 일을 당할 때에 심지어 자기 목숨을 끊는 데까지 이르게 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부끄러움을 모르던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범할 때부터 시작된 것인데 끝까지 말씀을 순종하지 않던 사람이 큰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3. 두려운 일이다.

  사람이라는 것은 하나님 다음가는 지위를 가졌으므로 얼마든지 두려움이 없이 살 수 있는 것이 인생인데 두려운 일이 생기는 것도 하나님 말씀을 순종치 않는 자에게 오는 것이다(사66:4).

  두려움이라는 것이 사람에게 올 때에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는 존재가 된다. 이것은 죽음이라는 것이 따라오는 증거다.

 

  4. 피곤한 일이다.

  사람에게 피곤이 따르는 것은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세상의 것을 바라볼 때 오는 것인데 하나님의 역사가 함께 하지 않는 때에 사람은 피곤해지는 것이다. 인생 자체에는 일할 만한 힘이 있지를 못하므로 하나님은 얼마든지 사람에게 새로운 힘을 주고자 하시는 것인데 그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을 때에 영과 육이 아울러 아무런 열매 없는 가운데로 떨어지고 마는 피곤이 오는 것이다.

 

  이제 쉬운 일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1.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쉬운 일을 인생에게 주기 위한 목적이다(마11:28~30)

  하나님께서 사람을 낼 때에 어려운 일이 없도록끔 냈던 것이다. 얼마든지 평화롭고 자유롭고 아름답고 즐거운 생활을 하게 하신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순종하지 않을 때부터 마음에 탐심과 몸에 부끄러움과 영적에 두려움과 생활에 피곤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마음에 자유와 인격에 담대함과 심령의 평안함과 생활의 상쾌하고 새로움을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인간에 와서 행하신 일은 인간이 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을 없이하고 쉬운 일을 할 수 있는 일을 이루어 놓기 위하여 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고 하시었다.

  2. 주님께서 시키시는 일은 다 쉬운 일이다

  왜냐하면 무엇이나 초인간적이 되기 때문이다. 만일 기독교의 복음이 사람에게 쉬운 일을 주는 복음이 아니라면 이것은 필요가 없는 복음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사람에게 어려운 일을 주는 예수님이라면 그 교훈은 복음이 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세우신 것은 어려운 일을 당한 인생에게 쉬운 일을 주시겠다는 약속이다.

  이제 쉬운 일에 대하여 세밀히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회개할 때에 즉시 그 영혼이 구원을 받는 일(눅23:42~43), 증거하는 말씀을 들을 적에 은혜를 받는 일(행10:44~46), 한번 설교할 때 대중이 중생을 받는 일(행2:37~40), 한번 말할 때에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일(행3:6~7), 옥중에서 나오게 된 일(행12:8~12), 그 밖에도 모든 일은 다 쉬운 일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승리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열매이다.

  기독교는 사람이 행하는 종교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당신이 행하겠다는 언약이 복음이라는 것이다. 이 복음을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그대로 행하시는 것을 기독교의 역사라는 것인데 제일 어려운 일은 하나님께서 맏아들 예수님을 통하여 행하게 하시고 그 밖의 믿는 자들에게는 전부가 쉬운 일로 역사하도록 하시는 것을 은혜라 하는 것이다.

 

 

5. 인생 중에 제일 높은 사람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낼 때에 제일 높은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제일 낮은 사람이 될 수도 있게 낸 것이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첫째아담은 제일 높은 사람도 아니요 제일 낮은 사람도 아니고 높아질 수도 있고 낮아질 수도 있는 인격으로 지음을 받은 사람이다.

  그러나 사람이 높아지지 못하고 낮아지기 시작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한 데서부터 그 말씀을 듣지도 않고 반대하는 데까지 떨어진 것이 이 세상이라는 것이다. 금일에 공산당은 하나님도 없고 사람에게 영혼도 없고 심판도 없고 천국도 없고 사람은 고등 동물이라고 하는 데까지 떨어진 것이 짐승의 사상이라는 것이다.

  이제 사람이 제일 높은 사람이 되는 과정을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사람의 향상이라는 것은 과학 발전에 있는 것이 아니고 신학적 발전에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과학이 발전된 현실에 인심이 더 악화되고 더욱 부패한 사회가 되며 더 무서운 전쟁이 있게 될 것을 인간들이 무서워 떠는 공포 속에 들어간 현실에 있어서 소위 신학이라는 것을 연구한다는 자들이 신학적 발전을 못 가져오고 점점 퇴보하는 소위 신 신학이라는 것이나 세속화 신학이라는 것까지 나왔다는 것은 기독교에 큰 화를 가져올 징조라고 보게 된다.

  이제 신학 발전에 의하여 가장 제일 높은 인격을 얻으려면 다음과 같이 볼 수 있다.

 

  1. 중생을 받은 자가 중생의 도리를 바로 성경에서 가르치므로 중생을 받는 사람들이 열매로 나타나고, 성신의 은사를 완전히 받은 사람이 은사를 증거할 때에 모든 사람이 은사를 받게 되고, 중심 성결을 받은 사람이 증거할 때 성결함을 받는 열매가 나타나므로 많은 열매를 맺는 종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가 중생이나, 은사나, 성결이나 이것을 받지 못한 사람이 신학을 연구한다는 것은 인격조차 없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금일까지에 기독교는 이 역사로써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대종교를 이루었다.

 

  2. 이제 와서 우리는 죽음을 맛보지 않고 변화 승천하는 인격을 가지려면 완전한 변화의 인격을 새 힘으로 받고 완전한 성경 지식을 지혜와 총명의 신, 모략과 재능의 신,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을 받아서 여호와를 경외하므로 즐거움을 삼고 보는 대로 듣는 대로 판단하지 않고 입에 권세를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조물주 하나님의 언약을 완전히 통달하는 지식을 가지고 많은 사람을 환란에서 구출시키는 지도자가 되는데는 완전 성결을 마음에 받고, 완전 개조를 몸에 받고, 완전 영감을 머리에 받고, 완전 변론을 입에 받고, 철장 권세를 손에 받고, 완전한 승리를 이루는 돌진 용사의 걸음을 걷는 자가 되어야 인류 종말에 세계를 통일하는 인격이 될 것이다.

 

 

 

 신 앙 문 답

 

【문】1. 하나님이 받아 주시는 예배에 대하여 구체적인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답】예배라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공경하기 위하여 한다는 것보다도 하나님께서 택한 자를 찾아 그에게 믿음을 주고 은혜를 주어서 그들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바를 받으시고 은혜 위에 은혜, 믿음 위에 믿음을 더 주는 동시에 하나님이 맡긴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은총을 축복으로 주기 위한 방법이라고 봅니다. 사람 편에서 예배를 하니 하나님이 마음을 돌이키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먼저 예배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성신으로 역사해 주시므로써 이루어지는 것을 기독교의 신령한 예배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1. 자기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만 순종한다는 마음으로 합심되는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를 드리는 자가 자기 주관이나 자기 이익이나 자기의 어떤 사적 욕망을 바란다면 그 예배는 우상적인 예배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자는 하나님께서 내 사정을 먼저 아시고 내가 구하는 것밖에 더 좋은 것을 주시고자 하는 그 사랑을 믿고 내게 어떤 핍박이나 혹은 물질의 손해가 되는 일이나 내 몸에 불리한 점이 있는 일이 있다 하여도 여기에 지배를 받지 않고 하나님의 거룩한 뜻만을 생각하고 기다리는 마음으로 예배할 때에 뜻밖에 홀연히 이루어지는 역사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 신자들은 핍박과 환란 중에서 그들이 생명을 바쳐 예배할 때에 큰 역사가 임했던 것입니다(행4:23~31).

 

  2. 위에서 오는 것을 받겠다는 마음이 불타야 합니다.

  예배라는 것은 습관이나 의식에 따르는 것보다도 그 시간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을 흡족히 받는 데에 목적을 두어야 합니다. 강단에 서는 종이 어떤 자기의 무엇을 나타내려는 것이 있으면 이것은 오히려 예배를 방해하는 미운 물건이 될 것입니다. 또는 대중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을 바라지 않고 그 사람의 인격이나 어떤 학설이나 웅변이나 그 위협을 따라서 움직인다면 이것은 인물 숭배의 우상적 예배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강단에 서는 종도 자기가 나타나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전부가 아버지 하나님께서 내려보내는 것만을 기다리고 입을 열 때에 그 기도나 찬송이나 설교는 전부가 여호와의 신의 응답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대중은 그 종을 통하여 하나님이 내리시는 은혜를 기다릴 때에 예배 시간마다 정상적인 응답이 내리므로 그 예배를 통하여 모든 심령들은 나날이 소성하고 발전하므로 신령한 교회가 이루어지는 동시에 큰 열매가 나타날 것입니다(행10:30~48).

 

  3. 성경을 조금도 가감없이 믿는 신앙으로 뭉쳐야 할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자가 성경 말씀을 그대로 믿는 마음으로 예배할 때에 그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열매를 체험케 됩니다. 예배라는 것은 조금이라도 하나님 말씀이 가감된 신앙을 가진다면 그 예배는 하나님이 받으실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말씀대로 역사하는 신이신데 그 말씀이 즉 생명이요, 빛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그대로 믿는 믿음으로 찬송과 기도와 설교를 할 때에 하나님은 그 예배에 응답할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진리대로 역사하려고 해도 말씀대로 믿는 자들의 예배를 통하지 않고는 그 말씀을 인간에게 알도록 역사할 수도 없고 또는 그 말씀대로 복을 나릴 수도 없고 그 말씀대로 싸워 줄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사65:11~16).

 

 

【문】2. 교회 발전에 대하여 구체적인 설명을 듣고자 합니다.

【답】금일에 기독교가 유형적인 교회는 발전되어 보이나 실지는 발전이 아니요 퇴보라고 봅니다. 기독교의 큰 난제는 이것입니다. 이날까지 타종교보다도 세계적인 발전을 본 기독교가 이제 어떠한 방향으로 흐르게 될 것이냐는 것이 큰 관심을 두고 생각할 일이라고 봅니다. 이제 교회 발전을 말하자면 다음과 같이 생각하게 됩니다.

 

  1. 교회는 이제부터 새로운 발전을 가져오려면 필요 없는 신학설을 버리고 순수한 성경 본문 주의로 들어가서 본문에서 본문으로 얼마든지 이 시대에 나가서 변론할 수 있는 역사를 하나님께 받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조물주 하나님께서 기독교 종말에 하나님의 종들로 어떻게 나가서 변론할 것을 미리 다 선지들을 통하여 빠짐없이 기록했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계시를 볼 때에 기독교 종말의 역사는 다른 천사의 역사로 보여줬는데 계시록10장에 작은 책을 들고 사자같이 외치는데는 하나님의 비밀이 옛날 선지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이루어지는 날은 심판이 오고 세상 나라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는 때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얼마든지 이 시대에 나가서 변론할 진리가 계시록과 선지서에 완전 변론으로 기록되어 있으니 누구든지 이대로 다시 예언하는 진리 운동이 있으므로만이 세계를 각성시켜 새로운 시대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2. 개 교회를 완전하게 촛대교회로 이루는 일에 전력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려면 교회의 청년 남녀를 진리로써 완전히 무장시키되 현 시국 난제를 어떻게 해결한다는 진리를 선지서와 계시록에 의하여 완전히 통달하도록 무장시키는 일에 전력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아무리 거짓 선지의 미혹의 말이 들어온다 해도 성경 본문 말씀으로 물리칠 수 있는 성경 지식을 갖도록 하는데는 용사적인 인격을 말씀에서 받되 아무런 미혹이 와도 말씀으로 물리칠 수 있는 진리 운동을 하여 기독 청년으로서 진리 반공 운동에 용사적인 투쟁이 있도록 하는 일에 전력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진리 싸움의 대상자는 공산주의 변론이며 거짓 선지의 협상적인 학설을 말씀으로 물리칠 무장을 청년들이 갖도록 하여야만 교회가 앞으로 발전할 수 있으며 참된 진리 사상에서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3. 교회를 완전한 신앙 노선에서 하나가 되는 운동을 하여야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려면 기독교 신앙의 완전한 지식을 성경에서 갖되 죽어 천당의 지식으로가 아니고 앞으로 어떠한 환란이 와도 담대히 이겨 나갈 수 있는 신앙 지식을 교회 모든 신자들이 다 갖도록 하는 운동인데 이렇게 되므로 교회를 교파적인 교권 아래 두지 말고 전부가 다 시국 난제를 지식적인 신앙 양심에서부터 해결하도록 만드는 것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되려면 문서 운동으로 어느 신자나 다 같이 아름다운 소식의 월간지를 보도록 만들어서 각자가 골방에 앉아서도 글을 읽을 때에 새로움을 받고 심령이 소성 받도록 하는 일에 전력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대적인 공산당은 공산 청년 남녀를 공산주의 학설을 문서 운동으로 전부 교양을 주어 그 사상을 그 학설에서 가지도록 하는 운동을 세계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계시록과 선지서의 말씀으로 얼마든지 공산주의를 대적하는 변론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독교 종말의 변론을 완전히 기록해 놓은 것을 선지서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선지서는 심판과 새 시대를 목적했는데 반 기독적인 사상과 정치가 북방으로 나올 것을 목적 두고 기록한 것이 여호와의 말씀인 선지서라고 보게 됩니다. 

 

  4. 이날까지는 은사로서 교회가 발전했지만 이제부터는 모든 신자들이 다 새 힘을 받도록 하는데는 새일 성가를 사용하여야 될 것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은 그 시대 사람에게 소망을 주는 동시에 소망의 노래를 부르게 해서 발전을 갖도록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어 천당을 목적하고 노래를 부를 때가 아니고 우리는 적 그리스도의 세력을 완전히 없이하고 새 시대 들어가는 것을 목적하는 새 노래를 불러서 기도가 되며 제사가 되며 승리의 인격을 얻도록 해야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새 노래를 보내신 것은 앞으로 교회에 큰 발전이 되는 요소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발전을 위하여 하나님의 종의 입에 말씀을 주어서 얼마든지 이 시대에 변론을 서판에 새겨 출판하도록 하시고 얼마든지 불러도 점점 새로워지는 새 노래도 종의 입술을 통하여 작사, 작곡을 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 일의 역사가 공산당의 압력을 받고 있는 남한 땅에 나타난 것은 기독교에 큰 발전이 될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문】3. 종교가 완전한 단체를 이루는데 대하여 구체적인 설명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

【답】성경을 보면 기독교 종말에는 단체적인 구원이요, 단체적인 싸움이 있는 동시에 승리가 있을 것을 가르쳤습니다. 예를 든다면 여름에는 씨를 뿌려 흩어 놓고 곡식이 포기 포기 나누어서 무럭무럭 자라도록 하지만 서리찬 바람이 불어오고 쌀쌀한 겨울이 오기 전에 포기 포기 가꾸어 놓았던 곡식을 한 단 두 단 묶어 타작 마당에 모아 놓고 타작기를 사정없이 두를 때에 알곡은 알곡끼리 모여서 한 단체가 됩니다.

  이와 같이 이날까지는 각 교파를 나눠 놓고 어느 교파나 다같이 신앙이 자라도록 했지만 북방으로 환란이 내려올 때 남은 자로 한 단체를 이루는 촛대교회가 되므로 예루살렘적인 새로운 나라가 이루어질 것을 목적하고 모든 선지는 묵시를 보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협상이냐, 반공이냐, 빛이냐, 어두움이냐, 승리냐, 굴복이냐 하는 것으로 결판을 내게 될 것입니다. 만일 어떤 종이 한 교파를 가지고 수가 많다 적다 하는 데만 둔다는 것은 어리석은 교권주의라고 봅니다. 우리는 이제 남은 교회가 되느냐, 또는 남은 종이 되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완전 무장을 목적 두어 나 자체가 남은 종의 자격을 이룰 때에 자동적으로 완전한 단체가 이루어지는 것이 타작 마당에 알곡이 자동적으로 모이듯이 남은 종으로 교파가 아닌 한 단체가 이루어지므로 재림의 주를 맞이할 교회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려면 대표적인 선구자가 나와야 할 것입니다. 이 대표자라는 것은 어느 교파 사람이나 참으로 신앙 양심을 가진 자는 하나같이 그 종이 들고 나오는 기독교 종말관의 진리를 호응하게 되므로 한 단체가 되는데는 죽어 천당을 목적 둔 진리 운동이 아니고 새 시대에 들어가는 진리 운동으로 하나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데는 어떤 종이 학적으로 연구한 진리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 종을 통하여 진리를 완전히 증거하도록 하는 역사가 오므로써 이루어질 것입니다.

  지금 평안할 때는 어리석은 인간들이 자기마다 자기 해석이 옳다고 떠들고 있지만 계시록9장과 같이 화, 화가 올 때에 남은 종, 남은 교회가 나오는 것은 이마에 인 맞은 종을 통하여 단체가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계9:4에 이마에 인 맞지 않은 사람만 피해를 준다고 한 것을 보면 인 맞은 종만이 남아서 한 단체가 될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면 이 인이라는 것은 다른 천사가 가지고 나오는 하나님의 인이라고 했으니 성신의 인을 맞은 종들이 이마에 하나님의 인을 맞으므로써 남은 종이 되고 또는 남은 교회가 나올 것은 틀림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는 것은 재림의 주를 맞이할 종들로 한 단체를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농부가 알곡을 모으기 위하여 사정없이 타작기를 두르듯이 하나님께서 남은 종을 한곳에다 모으기 위하여 타작기와 같이 강한 역사를 일으킬 것입니다.

 

 

【문】4. 기도의 힘을 얻고 얻지 못하는데 대하여 그 원인을 알고자 합니다.

【답】기도라는 것은 이방적인 기도도 있고 이스라엘적인 기도도 있습니다. 이방적인 기도라는 것은 진리가 없는 기도요, 이스라엘적인 기도라는 것은 야곱이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약속을 의심없이 믿고 하나님과에 기도로 승리하고 얻은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기도자가 자기의 욕망을 목적 두었다는 것은 얼마 가지 않아서 실패를 보고 말 것이로되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일을 확신하고 아무런 역사나 응답이 없다 하여도 하나님은 참되신 신이신 것을 믿고 그 언약이 이루어질 때까지 기다리는 심정에서 고난을 극복하는 자라야 정상적인 기도의 힘을 가지고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기도의 힘을 잃고 나가는 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1. 마음이 조급하고 진리의 지식이 없는 자가 기도의 힘을 잃게 됩니다. 기도라는 것은 영원한 것을 목적을 둔 것인데 잠깐인 일에 되느냐, 안 되느냐 하는 일에 조급한 마음을 가진 자는 그 일이 이루어져도 이루어지지 않아도 실패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루어지면 자기가 크게 성공이나 한 듯이 날뛰고 이루어지지 않으면 오히려 하나님을 의심하고 마는 폐단이 있게 됩니다.

 

  2. 남을 살려 보려는 마음이 없고 자기가 이긴다는 마음이 불타 가지고 공연히 떠들어대던 사람들이 얼마 안 가서 기도의 힘을 잃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의 대언기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공평하신 주님이신데 남을 이겨 보겠다고 하는 마음이라는 것은 주님의 마음과 합치되지 않기 때문에 얼마 안 가서 쓰러지고 마는 것입니다.

 

  3. 은사를 목적한 기도입니다. 기도라는 것은 은사를 목적한다면 어린아이들이 아무런 목적없이 입에 달콤한 것을 찾는 장난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은사를 내리는 목적은 자라나서 장부가 되어 진리로써 승리하는 용사가 되라는 것인데 그때 그때에 은사가 내리면 이것이 다인줄 알고 떠들던 자들이 은사로 말미암아 시험이 올 때에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이제 기도의 힘을 잃지 않고 점점 더 강해지는 사람의 상태를 말합니다.

  1. 말씀을 듣고 심령이 소성해서 감사하며 드리는 기도입니다

  이런 사람은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체험을 인격적으로 받기 때문에 정상적인 체험을 자기 인격에서 체험하게 되는 것인데 이 체험이라는 것은 완전한 열매가 되는 것이므로 점점 기도가 강하게 됩니다.

 

  2. 남을 살려 보려고 우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언제나 힘을 더 얻게 되는 것은 한 사람, 두 사람 볼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이 불타 오르게 되므로 계속으로 기도가 나오게 됩니다. 이러한 기도에는 항상 주님의 대언기도가 같이 하므로 남을 살릴 수 있는 인격이 하나님께로 올 때에 작은 데서 큰 것을 약한데서 강한 것을 이루는 발전이 있게 되어 대중을 살리는 큰 승리를 보게 될 것입니다.

 

  3. 숨은 봉사의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누가 알아주는 것을 오히려 기뻐하지 않고 알아주지 않는 것을 기뻐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항상 마음에 기쁨을 가지게 되므로 주님께로 오는 힘을 받아 기도의 생활이 점점 깊은 체험을 받게 되어 주님과 직접 교통하는 세계에서 나날이 새로워지는 영계의 생활을 하게 됩니다.

 

 

【문】5. 목회자와 교인들과의 관계에 대하여 어떻게 하여야 복을 받는 일에 대한 것을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답】목회자와 교인들과의 관계는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관계가 먼저 바로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우리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과에 함께 함이라고 말한 것입니다(요一1:3). 아무리 목회자가 바로 하려고 해도 교인들이 바로 못하면 할 수 없고 아무리 교인들이 바로 하려고 해도 목회자가 바로 못하면 할 수 없는 것은 다음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유대인들에게 진리를 말해도 그들이 듣지 않을 때에 너희는 내 양이 아니라고 말씀했고(요10:26), 아무리 양들이라 하여도 삯꾼은 양을 버리고 간다고 요10:12에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고 싸워 주는 것이 목자의 책임이라면 양은 그 말을 듣고 뭉쳐지는 것이 책임입니다(요10:15~16).

  이제 목회자의 할 일에 대하여 먼저 말합니다.

 

  1. 언제나 목회자는 주님의 대행자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이 할 말을 목회자가 하고 주님이 붙들 자를 목회자가 붙들고 주님이 사랑할 자를 목회자가 사랑하고 주님이 미워할 일을 목회자가 미워하고 주님이 슬퍼할 일에 목회자도 슬퍼하고 주님이 기뻐할 일에 목회자가 기뻐할 때에 이 목회자는 주의 손에 붙들린 종이라고 보게 됩니다(계1:20).

 

  2. 양떼들을 위한 식모가 되어야 합니다 (마24:45~46)

  식모라는 사람은 어떻게 하든지 그 집의 식구에 따라서 양식을 잘 제공하여 건강을 보존하도록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이것을 전적으로 책임을 지되 식모가 주인에게 생활비를 가지고 적합한 식물을 사 들이듯이 주님께서 주시는 것을 받아 가지고 때를 따라 적합한 양식을 공급할 책임이 있는데는 주인의 요구대로 할 것뿐입니다.

  이와 같이 목회자는 주님의 것을 받아 가지고 주님의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공급하되 자기가 무엇을 그 백성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없어야 될 것입니다. 만일 무슨 값을 요구한다면 식모가 집안 사람들에게 식대를 달라는 것과 같은 것이니 이것은 망령된 일이라고 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교인들에게 무엇을 달라고 요구한다는 것은 벌써 목회자의 위신을 상실하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신령한 양식을 하늘로 받아 공급할 때에 교인들은 건강한 영적 생활이 있게 될 때에 그들은 하나님 앞에 감사한 마음으로 성금을 바치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감사하는 것 뿐이요, 하나님께서는 당신 앞에 바치는 성금을 당신의 종이 사용하도록 하는 것은 당신의 백성을 잘 길러 주니 하나님은 그 종을 대접해 주는 것으로 되어야 될 것입니다.

 

  3. 대적을 물리치는 용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딤후2:3~4)

  목회자는 언제나 마귀와 싸우는 용사의 생활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어떤 목회자가 예배 시간이나 지켜주면 의무를 다했다고 보는 것은 큰 모순이라고 봅니다. 항상 쉬지 말고 정신을 차려 교회를 대적하는 마귀와 싸우는 생활에서 생명을 바치고 나가는 용사적인 생활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마귀를 대적해 싸우는 한 단체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가 싸워 이길 때에 교인들은 마귀 권세를 벗어날 수 있고 싸우지 않을 때에 교인들은 마귀 흑암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목회 생활을 할 때에 공중 세력은 그 목회자를 대항해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어느 목회자나 마귀 참소를 이기는 자라면 그 교회는 은혜 가운데 있게 되는 것이요, 마귀 참소에 지게 되면 그 교회는 혼란에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예를 든다면 일선 용사가 싸워 이길 적에 그 뒤에 있는 백성들에게 안정이 있고 싸워 주지 못할 적에 그 백성은 혼란 중에 빠지는 것과 같습니다.

  이제 교인들이 하여야 할 일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1. 갈망하는 마음이 있어야 됩니다

  교인들은 언제나 하나님께서 목회자를 통하여 자기들에게 풍성한 것을 주실 줄 믿고 목회자를 만나는 시간을 가장 귀한 시간으로 알고 목회자를 중심하여 모이는데 힘을 다하여야 됩니다. 예를 든다면 아무리 식모가 좋은 음식을 해 놓았다 하더라도 식구들이 그 음식을 합심하여 모여 먹기를 즐거워하지 않는다면 그 가정은 벌써 단체를 이루는 가정이 아니고 내막이 무엇이 잘못된 가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언제나 교인들은 자기가 개인으로 은혜를 받는 것보다도 목자를 통하여 은혜를 받는 것을 갈망해야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교회가 될 적에 하나님께서 그 목회자를 통하여 큰 은혜를 내려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2. 순종심이 강해야 됩니다

  일선에서 싸워 주는 목회자를 순종하지 않을 때 그 목회자는 전쟁에서 승리하기가 어려운 것이니 목숨을 바쳐 싸워 주는 목회자라면 절대로 순종심이 강할 때에 마귀는 큰 패전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양떼를 위하여 싸워주는 목회자에게 순종하지 않는다면 주님을 순종치 않는 것이나 같습니다. 왜냐하면 군대가 전쟁할 때 사령관의 지령을 받은 장교의 말을 졸병들이 순종하지 않는다면 사령관의 말을 순종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종의 영계를 간섭하지 말고 그 영적 지도를 절대로 순종해야만 신령한 싸움에 승리하는 것입니다.

 

  3. 목회자를 존경하는 마음이 있어야 됩니다

  이것은 내 생명을 위하여 자기의 모든 전부를 바치고 나선 종이기 때문입니다. 목회자를 주님보다 더 의지한다든지 또는 숭배한다는 것은 탈선이겠지만 귀한 종으로 존경해 준다는 것은 없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쓰시는 종을 무시한다는 것은 주님을 무시하는 것이나 같은 것이니 주님의 대행자로 쓰여지는 종을 존경할 때 주님께서는 대신 갚아 주시는 것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인들은 언제나 목회자를 자기 집의 식구보다도 더 존경할 때에 그 가정에는 무한한 축복이 오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할 일을 바로 하고 교인이 할 일을 바로 할 때에 이것을 완전한 교회라고 인정하는 동시에 그 교회를 통하여 영광을 나타내기도 하고 영광을 받기도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특  집

 

1. 완전한 것 주고 싶어하시는 아버지의 심정을 내가 믿나이다

  완전한 것 내게 주고자 하는 아버지의 예정과 섭리를 내가 더욱 깨닫게 되고 믿게 되나이다. 아버지를 공경하는 생활을 40년이 되는 금일에 크리스마스 성탄을 앞에 놓고 더욱 감사에 넘치는 생활에 금년도 성탄절을 맞이하게 되는 나의 마음 아버지께서 아시온즉 영광을 아버지께 돌리는 일이 있게 하실 줄 믿고 새로운 용기를 얻게 되나이다.  

  처음에 중생을 받고 성탄을 맞이할 때 기쁘다 구주 오셨네, 하는 새벽 찬양에 눈물겨운 감사를 드리며 기뻐하는 날은 벌써 40회를 맞이하면서 다음과 같은 감상이 있습니다. 40년이라는 세월이 인간으로는 이렇게도 변천이 많았습니다. 인간 과학이 시대를 바꾸어 놓고 있습니다. 인간 지식은 40년간에 완전한 것을 얻은 것 같이 인간들은 교만해졌다고 봅니다. 그러나 나는 40년간 신앙 생활에 내가 제일 약하다는 것, 어리석다는 것, 믿음이 없다는 것, 사랑이 없다는 것, 눈물겹게 깨닫는 심정 뿐입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은혜는 이렇게 흘러 왔습니다.  15세 고아로 인생을 비관하고 사망의 공포 속에서 인생 종말을 알아보려는 마음 가졌으나 답답함을 금할 수 없어서 밤잠을 이루지 못한 적이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16세라는 해는 극도로 타락의 길을 가보려고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1년을 허송하고 보니 정신이 바짝 나면서 내가 이렇게 가다가는 사람의 꼴이 안되겠다는 생각이 나서 영생이 있다는 성경을 구해다 놓고 매일같이 복음 책을 한 번씩 읽어보기로 작정하고 읽던 중 예수 믿을 마음이 생겨 믿기로 결심 한지 1주일 내에 중생의 체험을 받게 되었습니다.  

  캄캄한 마음은 밝아지고 공포에 떨던 마음은 큰 기쁨을 얻고 매일같이 성경을 읽는데서 예수님과 직접 대화를 하는 것 같은 감동을 받고 성경을 읽을 때마다 신비한 체험은 성경에서 진리가 나타나되 설교할 문제와 대지가 본문에서 나타나게 되어 마태복음 1장에서부터 유다서까지 모조리 빠짐없이 문제와 대지를 쓰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므로 20세 청년으로 어디를 가든지 설교를 잘한다는 칭찬을 받고 환영을 받을 때에 나도 모르게 교만이 있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남의 설교를 들을 적에 성경을 가지고 비판적으로 들을 때 성경과 맞지 않는 설교를 하는 사람은 무시하는 자리에 있게 되므로 나 자체에 영계가 더 올라가지 못하고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것으로 만족을 삼는 생활에서 내려오던 중 순교 생활을 한다는 결심을 갖고 개척 전도를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런 영적 발전을 이루지 못하고 신학을 배우려고 고려 신학에 입학했으나 거기에서도 영적 발전을 특별히 얻지 못하고 1955년 12월에 특별 기도를 작정할 때 중심에 완전한 성결을 얻어야 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고요한 기도원을 찾아가 높은 바위 위에 기도 장소를 정하고 하늘을 바라보며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상하게도 강단 생활하면서 마음으로 지은 죄가 나타나기 시작되어 억제할 수 없이 일어서서 하늘을 바라보고 탄식하는 기도는 마음으로 지은 죄를 고백하는 호소가 나올 때에 20세부터 강단 생활하면서 나도 모르게 숨었던 죄가 쓸어 나오기 시작하여 애통의 눈물이 옷깃을 적시고 계속으로 애통, 호소가 나오던 중 4일째 되는 날 하늘의 문이 열려지는 광경이 나타나면서 주님의 모양이 나타나되 내 기도를 듣고 계신 모양으로 보여지되 눈을 뜨고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중에 나타날 때에 나는 기도하기를 주님을 뵈옵는 것보다도 내 중심에 성결이 필요하다고 울 때 열렸던 하늘은 닫혀졌습니다.

  나는 계속하여 강단 생활에서 마음으로 지은 죄가 생각이 나면서 계속으로 고백을 하며 호소하게 되었습니다. 2일만에 다시 하늘 문이 열리며 주님께서 두 손길을 모으고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였다 들었다 하면서 기도하는 모습이 똑똑히 하늘에서 나타나 보입니다. 그때에 나는 기쁜 마음을 얻었습니다. 나같이 강단 생활하면서 죄를 많이 지은 사람도 주님은 버리지 않고 대언기도 하신다는 확신이 생기며 안타깝던 마음이 위로가 생겼습니다.  

  그러나 계속으로 중심 성결을 구하는 눈물의 호소는 하루를 계속했는데 이튿날 다시 하늘 문이 열리며 빛은 나 있는 곳으로 비쳐 내려옵니다. 이상한 손이 나타나서 하늘로 내려오며 내 머리 위에 임하여 안수를 하는 것이 나타나 있더니 손바닥에 못자국 자리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그 손은 다시 하늘로 올라갑니다. 그 후에 눈물도 없고 부르짖는 힘도 없고 조용히 앉아서 묵상을 하는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다시는 눈물이나 호소가 없게 되므로 기도를 마치고 부산으로 돌아가려는 길이었습니다.  

  마지막 길을 떠나는 아침 기도하던 장소에 잠깐 나가서 기도를 하던 중 강한 기도의 힘이 이전보다 몇 갑절 오면서 입에서 찬송이 터질 때에 “큰 죄인 복 받아 빌 길을 얻었네. 한없이 넓고 큰 은혜 늘 베퍼 줍소서.” 하는 찬송을 하던 중 내 마음은 타지는 것 같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 불은 마음에서 떠나지 않고 충만해 있으므로 15년간 신앙 생활에 마음으로 죄를 짓지 않고 설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음을 감사하게 됩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응답인줄 믿습니다.  

  또는 내 몸이 피곤을 모르고 13년간 봉사하게 된 것은 아버지의 큰 축복인줄 믿습니다. 나는 이것을 구해본 일은 없지만 1958년 3월 20일에 아버지께 받은 일입니다. 빈민굴에서 빈민을 위하여 주택을 짓고 교회를 지어 봉사하던 중 불쌍한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밤을 새워 눈물 흘려 기도하게 된 것은 영양 부족과 지나친 노동으로 병이 들어 쓰러진 것을 보고 잠을 자다가 큰 책망을 받고 일어나서 기도하기 시작하여 3일간 철야하던 중 강한 바람이 성전 안으로 들어오며 하늘로부터 생수가 내려 내 몸을 잠겨 놓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30분 이상을 자지 않고 하루 이틀 밤을 새워 기도하기 시작하여 약10개월을 계속하게 되었습니다. 이상하게도 머리는 명랑해져서 하루 종일 선지서나 계시록을 읽어도 지루하지 않는 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이사야나 계시록을 보아도 아무런 흥미가 없었는데 그때부터는 읽을 때마다 통달이 될 것 같은 느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약 1개월을 계속으로 읽던 중 이상한 힘이 하늘로부터 내게 와서 잠겨지는 체험이 있더니 그 힘은 움직여지면서 내 입 속으로 울려 들어올 때 말을 하는 것 같이 알려 오면서 계시록 4장~14장까지 똑똑히 해석이 알려 왔습니다. 1958년 3월 16일부터 19일까지 세 번 알려오고 네 번째 기록하라는 명령이 오므로 알려 오는 대로 책에다 기록하다보니 계시록 4장~14장까지 순서가 바뀌지 않고 하나도 빠진 것이 없이 다 해석이 기록되었습니다.  

  그때에 알려오기를 기독교 종말에 진리를 전부 네게 알려주기로 결정되었으니 너는 이것을 가지고 성경을 대조해 가면서 읽어보면 알게 될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지시가 오기를 너는 밤낮 쉬지 않고 이 진리를 증거하다가 재림의 주를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하면서 네 몸에 신창조를 줄 것이니 십자가를 바라보고 정신을 차려 있으라는 것입니다. 그때에 나는 너무나 이상하기도 하고 두려워 밤에 전기 등을 켜놓고 눈을 뜨고 정신을 차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상하게도 머리를 수술하는 증거가 나타납니다. 무슨 것인지 알 수 없는 것인데 내 머리를 모조리 뚫어 놓는 것 같이 침 같은 것으로 30분간 전부 차례로 수술하는 것입니다.

  다음에 인후를 수술하고 혀와 뼈의 관절 관절을 뜯어서 다시 맞추는 것이 있더니 다음에는 내 몸에 맥을 걷고 죽은 몸이 되게 해놓고 2~3시간 있은 다음에 다시 맥을 돌려놓은 후에 13년간 매일같이 머리가 명랑하고 몸이 상쾌한 생활을 하면서 성경을 3년간 대조해 보고 말세 비밀이라는 책자를 출판하게 되었습니다.

  그후에 쉬지 않고 집회를 인도하러 다니던 중 1964년 9월 24일부터 계룡산 상봉 앞에 수도원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나의 목적은 새로운 용기를 얻기 위한 목적이었는데 하늘로부터 세미한 음성이 들려오기를 이산에 너를 인도한 것은 천지 창조할 때부터 변화성도를 일으키기 위하여 제단 자리를 준비한 곳이 있으니 그 곳을 찾아서 제단을 쌓고 변화성도가 될 사람들을 무장시키는 일에 전력을 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나는 무슨 뜻인지를 모르고 당황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목회 일을 보던 사람이 큰 교회를 내놓고 어떻게 이 산에 들어와서 이런 사업을 할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계속으로 기도할 때마다 2, 3차 알려오므로 산을 편답하던 중 지금 새일수도원 자리를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조속한 시일 내에 이런 웅장한 건물이 설 줄은 몰랐던 것입니다. 이상하게도 산 주인 되는 사람이 나를 만나 무조건 수도원 대지 400평을 기증한다는 기증서를 써서 주는 것입니다.

  그 기증서를 받고 기도하던 중 1964년 9월 24일 새벽 3시에 하늘로부터 큰 불덩이가 내려오면서 기도하는 나를 때리는 것입니다. 깜짝 놀라서 어찌할 줄 모르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그 불은 산을 덮고 그 불 속에서 음성이 들려오기를 너는 이름을 뢰자라 하고 이제부터 곧 성전을 짓되 자수로 노동을 하면서 성전을 건축하면 이 성전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서책으로 임하게 될 것이니 너는 이것을 가지고 종들을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성전 모양을 앞에는 삼탑을 쌓고 70평으로 짓되 튼튼하게 집을 지으라는 것입니다.  

  물질을 아끼지 말고 완전한 건물을 세우라는 것이므로 공사를 시작하여 완전한 수도원을 이루게 된 금일에 하나님의 힘이 새 힘으로 내게 임하는 동시에 말씀이 입에 임하여 강단에서 설교하던 도중에 책자를 받아 기록하라는 명령이 있으므로 모든 사람들은 붓을 들게 되고 내 입에는 말씀이 내리기 시작되어 책자를 받아서 기록하게 된 것이 성경 해석법, 요한一서 강의, 계시록 강의, 조직신학 강의, 선지서 강의, 인간론 등의 학과 책이 나오게 되어 이것을 가지고 성경을 공부할 때 완전 무장을 갖출 수 있는 진리의 역사가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같이 외로운 고아 중에도 고아인 한 사람으로 멸시를 받을 대로 받았고 고생을 할대로 해서 이 몸은 쓰지 못할 몸이 되었지만 몸까지 완전 개조를 시켜 매일같이 10시간씩 수도생들을 학과로 가르치는 일에 피곤없이 감당하게 하시고, 그 남은 시간은 입에 말씀을 주어서 기록하는 대로 말씀이 임하여 매월 70페이지의 월간지를 발행하게 아무런 지장이 없게 해주시고 날마다 하늘로부터 신령한 영양을 채워주므로 채소와 과실만 사용하는 가운데도 영양의 충만을 받아서 명랑한 몸으로 일하는 것을 생각할 때 아버지께서는 완전한 것을 주고 싶어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날마다 새로이 체험하게 됩니다.

  기독교 영계라는 것은 너무나 차이점이 중생 단계로부터 이렇게 높이 올라갈 수 있는 하나님의 역사가 있는 것을 40년간 체험한 나로서, 앞으로 재앙으로 땅을 치며 나가는 일이나 구름을 타고 승천하는 일에 대하여 더욱 확신을 갖게 되며, 크리스마스와 새해를 맞이하면서 더욱 완전한 역사가 동방에 임하여 새해에는 동방에 임한 새 일의 역사가 무엇인 것을 세계가 다 알도록끔 귀한 종들이 많이 일어나기를 기도하오며, 완전한 역사가 이 나라에 나타나서 세계를 각성주는 일이 있기를 바랍니다.

  나 같이 못나고 부족한 사람에게 이런 역사가 오는 것은 어느 종님이든지 다 같이 새 일의 축복을 받을 증거라고 믿어집니다.

 

 

2. 1970년도의 마지막 월간지를 세상에 내놓는 작은 종의 눈물겨운 감상

  슬프다. 아리엘이여, 아리엘이여 너는 어찌하여 티끌 속에 묻혀 있는 지렁이 같고, 그슬릴 대로 그슬린 나무가 되었다고 누가 그 나무를 만지기 좋아하며 누가 그 지렁이를 만져보기 좋아할 자 있으리요. 인간이 볼 때는 신접한 자 같이 보이나 하나님이 보실 때는 아리엘의 역사로다. 이날까지 숨겨 놓았던 비밀의 말씀을 내 입술을 통하여 매일같이 서판에 새겨 누구든지 읽어보고 심령 소성 받게 하고 작은 골방 깊이 잠겨 잠들었던 자들이 이 글을 읽을 때에 맑고 맑은 영감 받아 하나님 말씀 밝아지고 맛을 잃었던 자들이 새로운 진리를 맛볼 때에 용기있게 달려오는 그 모양 아름답습니다.

  하나님께서 지렁이 같이 밟히게 하고 그슬린 나무같이 되게 하신 것은 하나님만을 영화롭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선한 모략인줄 믿습니다. 내가 무엇을 자랑할 수 있사오리요, 여호와 하나님만 자랑하겠나이다. 지금은 반딧불 같이 보이나 세계를 밝히는 빛이 되고 지금은 작은 겨자씨 한 알 같이 미미하오나 세상을 덮는 역사가 될 것을 믿습니다.  

  70년부터 일어나는 두 가지 역사는 시작되었습니다. 거짓 선지의 역사도 참된 진리의 운동도 이해부터 일어났사오니 필연코 승리는 약한 자에게 있고 멸시를 받는 자에게 있고 억울하게 쫓겨난 자에게 있고 이유없이 이단이라고 정죄를 받는 자에게 있다는 것이 선지의 예언인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이와 같이 역사하시는 것을 내가 믿나이다. 황금 만능 시대에 일전 한푼 없는 거지같은 사람이 이 일을 할 수 없사옵고 20세기 문명을 자랑하는 금일에 소학교 간판도 없는 사람이 이 일을 할 수 없사옵고 진리를 대적하는 공산당이 온 세계를 침투하는 금일에 지렁이 같은 미약한 존재가 어찌할 수 없나이다. 그러나 야곱이 미약하오니 어떻게 서리이까 할 때에 황충떼 피해도, 불의 피해도 당치 않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말씀을 내가 믿나이다(암7:1~6).

  이 일을 시작하신 이는 내가 아니옵고 여호와의 신이온즉 내가 한 자의 글인들 일점일획도 스스로 쓴 일은 없나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보증할 일이라고 봅니다. 춘하추동 사시의 절기는 변함없이 돌고 있어 태양은 다시 바뀌어질 수밖에 없는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새로운 해에 해 나갈 일은 아무런 생각조차 나지 않고 용기조차 나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소식의 월간지를 어떻게 기록한다는 한자의 연구도 미리 준비한 일이 없습니다. 일전의 한푼 금액도 준비한 일은 없습니다. 누가 나를 도우리요 할 때에 하나님의 일이오니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는 기도밖에 할 수 없는 이 사람입니다. 지금 5천부라는 책수를 출판하지만 아무런 조직을 이룬 단체도 없고 아무런 기사를 맡은 종님도 있지 않고 매일 매일 시간 따라 어린 학생 한사람이 받아 기록하는 것만이 이 책자를 발행하는 기본입니다.

  할렐루야로 영광을 돌릴 날은 분명히 있을 줄 믿고 용기있게 걸어가고 있습니다. 인간이 볼 때에 아무런 예산 없사오나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예산이 있을 것이고 인간이 볼 때는 작은 일 같사오나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제일 큰 일로 여기신답니다. 왜냐하면 과학을 초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볼 때에 거짓말 같이 보이나 참이요, 영계가 어두운 자들이 이단같이 보이나 밝히 본다면 오메가의 정통입니다.

  인류 역사의 끝을 맺는 역사는 입에 말씀이 임해서 되는 일이 마지막이라고 이사야 선지는 사28:11, 59:21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입에 임해서 기록하다 보니 이 책을 기록하는 책상에는 원고지 한 권, 성경 한 권밖에는 아무것도 있지를 않습니다. 이것이 여호와를 자랑할 일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절대로 복잡한 일이 아니고, 대중이 일어나는 일이 아니요, 명랑한 가운데서 적은 사람이 시작되는 일입니다.

  가난해도 일할 수 있고, 일자무식도 서책을 낼 수 있고, 지렁이 같이 약해도 원수를 이길 수 있는 일이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70년에 끝을 맺는 이 글을 쓰면서 새해를 당하여 1월호부터 대 승리를 보는 책자로 발행될 것을 믿습니다. 아무쪼록 독자 여러분들은 이 글이 하나님의 말씀인줄 아실진대는 하나님의 축복과 완전한 승리가 이 진리 운동을 통하여 귀 교회와 귀 가정에 있기를 저도 기도하고 독자 여러분도 기도할 것 뿐입니다.

 

 

3.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는 사명 동지 여러분들에게 부탁의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는 크리스마스를 오락화시키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1971년 해를 앞에 놓고 오락을 할 때가 아니고 심각히 생각할 일은 71년도에 닥쳐오는 난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에 대하여 이 해가 가기 전에 다음과 같은 반성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1. 지나간 70년을 어떻게 지냈는가 하는 것을 생각할 바는 우리가 앞으로 오는 난제를 극복할 인격을 70년에 갖추었느냐 하는 것을 반성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대적을 앞에 놓고 싸울 수 있는 무장이 인격적으로 갖추어졌느냐에 대하여 자문 자답할 일이 있습니다. 내가 공산당에 궤휼적 정책을 대항해서 싸울 영적, 육적으로 무장이 되었느냐는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 붉은 공산당은 용의 큰 권세를 받고 나오는데 나는 그 권세를 대항할 수 있는 것을 하나님께 받지 못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자동적으로 오락적으로 크리스마스를 맞이할 것이 아니고 이 해가 가기 전에 사명자는 합심 단결하여 해산의 수고를 다하는 호소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2. 내가 간교한 사탄의 변론을 무찌를 수 있는 말씀의 변론이 내 입술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입에서 횡설수설하는 말이 나올까봐 떨리는 것 뿐입니다.

  예를 들면, 학생이 내일은 시험을 보는 날인데 물어 보는 문제를 분명히 답을 못하고 횡설수설 글을 쓴다면 학교에 다닌 효과가 없는 학생이 되는 것과 같이 교회를 다니며 교회를 인도한다는 사명자들이 71년도에 닥쳐올 시험에서 할 말을 못하고 횡설수설한다면 소위 사명자라는 우리들에 무슨 효과를 볼 수가 있을 것인가! 한 바람잡이 생활에 불과한 자가 될까봐 좀 더 깊은 진리에 들어가기 위하여 완전 진리 무장에 전력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3. 국가에 대한 문제를 등한시 할 것이 아니고 세계가 협상주의로 흐르는 금일에 우리 나라는 어떠한 태도로 나갈 것이냐에 대하여 생각할 때 우리 사명자들은 좀더 단결해서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일어나는데 있어서 내가 선구자가 되겠느냐 하는 것을 자신이 물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남의 뒤는 따라 갈지언정 앞장서서 나갈 용기는 나질 않습니다. 남이 다 못 나서도 내가 나선다는 인격은 하나님께로 와야 할 것입니다. 71년도는 다소를 막론하고 선구자가 나서서 진리 반공 운동을 세계적으로 선포해야 될 것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무력전이 아니고 사상전인 동시에 영적 싸움이 됩니다. 왜냐하면 분명히 공산당은 민주국가의 일개 정당만이 아니고 분명히 세계를 사상전으로 침투하는 동시에 붉은 용의 권세로 위협을 주고 나오는 것이니 우리는 이것이 심판의 대상자인줄 알고 심판의 다림줄의 진리를 들고 나가서 외치는 나팔을 불므로 붉은 용의 세력은 영적으로 물러가는 동시에 사상적인 문제가 자동적으로 해결될 것입니다. 사상전이라는 것은 육적으로 관계가 아니고 영적으로 관계가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또는 우리가 기쁘다, 구주 오셨네. 만 백성 맞으라. 하는 새벽 찬양을 부를 때가 아니고 진노의 막대기를 드신 예수님 앞에 어떻게 설 것이냐 에 대하여 깊이 생각할 때 현 교회가 이 상태로 나가서 말씀대로 심판이 내리는 진노의 날에 남은 교회가 될 것이냐가 문제이니 기독 청년들은 그날에 새벽 찬양을 부르는 것보다도 합심하여 성전에 모여 하나님께 호소하기를 만왕의 왕 예수님이여, 일어나시옵소서. 만왕의 왕을 대적하는 붉은 군대를 물리칠 수 있는 우리가 되도록 권세 역사를 우리에게 내리옵소서 하는 호소를 하며 새로운 출발을 가져야할 때가 금년 크리스마스를 맞이할 절기라고 봅니다.

  공산 청년은 완전 무장을 갖추고 최후 발악적인 행동을 할 위기가 71년도라고 봅니다. 기독 청년이 공산 청년을 회개시킬 변론이 있고 권세가 있고 불타는 사랑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기독 청년들이 기독교 종말에 오메가 역사가 무엇인지 모르고 한 오락적으로 흐르고 맹목적인 피동을 받아 이리 저리 쏠린다는 것은 기독교의 오메가의 진리가 완전히 있지 못한 증거라고 봅니다.

  기독교의 오메가의 진리는 붉은 군대가 백마 탄 군대에게 전멸을 하므로 성도의 나라가 온다는 것이 오메가 역사의 끝을 맺는 일입니다(계19:19~20:3). 우리 기독 청년은 백마 탄 군대가 되어야 됩니다. 금년 크리스마스 새해를 맞이할 때부터 백마를 타고 붉은 군대를 쳐 없앨 사명 용사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71년부터 나갈 길은 죽어 천당을 위하여 싸울 시기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지상 왕국을 위하여 싸울 시기가 왔다고 봅니다. 공산 청년은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로 사회주의가 공산주의로 흐르는 시대가 왔다고 자기네가 일할 것은 이 길밖에 없다고 하면서 누구나 다 하나같이 과학적인 변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 청년들은 붉은 세력이 허락을 받고 나오는 것을 분명히 붉은 세력이 망하고 새 시대가 올 때라는 것을 계시록을 통하여 분명히 알 수 있고, 시대 조류가 어떻게 흘러갈 것을 모든 선지는 선지서에 미리 말할 때에, 그리스도의 탄생, 십자가 부활, 승천, 성신 강림, 세계적인 대 확장을 천국 복음으로 이루게 되는 동시에, 극도로 종교 부패, 정계 혼란, 과학 발전, 인심 악화가 올 때에 북방에 반 기독적인 붉은 세력이 아시아를 중심하여 북방의 넓은 땅을 차지하고 무신론적인 침략적 정책을 한다는 것과, 열방의 모든 사람에게 공포를 주며 나오다가 주님의 재림이 임하므로, 붉은 세력과 싸우던 용사들은 대 승리를 보게 되고 초인간적인 신의 역사가 말세에 적그리스도를 대항하는 종들에게 나타나서 세계 열방을 깨우쳐 주며 동방에서부터 일어나는 역사로 말미암아 북방 세력은 망하게 되고, 동방에서 일어난 역사로 말미암아 세계적인 평화 왕국이 이루어질 것을 가르친 것이 모든 선지의 예언이며, 계시록의 숨은 비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 청년들은 공산 청년을 무서워 말고 오히려 불쌍히 보고 북진하여 복음을 전할 날이 올 것이니 우리는 완전 무장이 급선 문제입니다. 아무쪼록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는 새해부터 기독 청년을 깨우쳐 한 곳으로 모이는 단체가 되도록 하는 운동을 하는 선구자가 나와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사명 동지들은 진리 반공 운동의 용사를 길러내는 일에 전력을 두되 대중적인 활동보다도 순에서 순이 나듯이 각자 각자가 사명 동지를 찾기 위하여 노력할 때에 아름다운 소식의 월간지를 무기로 삼아 운동해야 될 것입니다.

  이 책을 인쇄하는 일은 각자가 책임을 지고 책대를 인쇄비로 보내도록 하되 가급적이면 인쇄비를 많이 모집하는 일에 활약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서울에 승복 인쇄소를 이 복음 운동에 쓰기로 했습니다. 일본이나 미국이나 대만이나 이 3국의 말로 번역을 해서 문서 운동을 하기로 작정인데 크리스마스를 기하여 좀더 단결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한 사람의 입을 통하여 서판에 새기게 하는 것은 말씀으로 통일시키기 위한 방법이라고 봅니다. 이 사람의 입을 하나님이 쓰시는 것은 하나님의 예정 속에서 1956년 1월 4일부터 내 마음에 여호와의 불이 올 때부터가 시작인데 약15년간 나를 강권으로 이끌어 주시므로 금일까지 온 것입니다.

  나는 금일에 와서 더욱 확신이 있는 것은 15년 동안에 아무리 마귀 세력이 첫째는 군대를 지어 대항해 왔고, 다음에는 대장 마귀가 대항해 오고, 다음에는 붉은 용 두 마리가 나를 대항해 왔지만 군대 마귀는 예수의 이름으로 물리쳤고, 대장 마귀는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으로 물리쳤고, 붉은 용 두 마리는 내게 준 다림줄의 진리로 물리치고 1969년 3월 1일부터 완전 영감으로 입에 변론이 열려 1년간 변론의 역사가 날마다 발전되어 지금에 와서 변론적인 월간지를 얼마든지 내 입으로 말이 나와 일점 일획 가감없이 기록하여 세상에 내놓는 것은 완전 승리의 역사가 될 것을 믿습니다. 왜냐하면 15년 동안에 마귀를 3계단으로 싸워 이겼기 때문입니다.  

  이 진리 운동은 한 자의 글도 사람이 생각하는 것은 없이 입에 말씀이 나타나는 대로 기록하여 출판하는 것 뿐이오니 여러 사명 동지께서는 여러분들의 입에 임한 말씀같이 믿고 활약을 한다면 여러분들의 입에도 변론이 임할 것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