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례 (1971년 3월호)

설  교  편

 1. 북방의 위력과 임마누엘의 날개 (사8:5~8) 

 2. 두 가지 인도와 두 가지 길 (마7:13~14) 

 3. 합해진 기도와 하나님의 진노 (계8:3~5) 

 4. 흑암 세력과 인의 역사 (계9:1~6)  

 5. 참된 증인의 심정 (빌1:3~11)  

 6. 원수를 갚는 날의 영광 (사59:14~21)

 7. 하나님 말씀을 받은 자는 신이다 (요10:34~39) 

 8. 말세에 나타난 구원 (벧전1:3~7) 

 9. 기독교 종말에 나타나야 할 기사 (미7:14~20) 

10. 하나님의 명령 대로 준행하는 노아의 가정 (창7:1~24)

11. 입으로 범죄치 않는 자의 기도 (시39:1~13)  

12. 촛대교회 수고와 양육 (계12:2~6, 13~17) 

13. 지혜로 낙을 삼는 자가 되자 (잠10:23) 

14. 주의 권한과 종 된 자의 할 일 (행1:6~11) 

 

장년 공과편 - 예수에 대한 이적의 증거

제1과  하나님의 아들된 증거 (막1:21~28) 

제2과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증거 (막2:1~12) 

제3과  안식일에 대한 증거 (막3:1~6) 

제4과  구원의 증거 (막4:35~41) 

 

어린이 공과편 - 요한복음 공부

제5과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는 예수님 (요3:1~14)

제6과  참된 예배를 가르쳐주신 예수님 (요4:19~26)  

제7과  심판하는 권세를 맡으신 예수님 (요5:19~23)  

제8과  생명의 떡이 되신 예수님 (요6:47~51)

 

논 설 편

1. 생명은 많고도 죽을 세상 

2. 해 놓은 일 없이 분주한 생활 

3. 밝은 것 같으나 어두운 세상  

 

신 앙 문 답

1. 기독교가 지금 와서 새로운 번역이 나와야 될 필요성은 무엇입니까? 

2. 성경을 기록한 목적과 성도의 할 일에 대하여 구체적인 설명을 듣고자 합니다 

3. 기독교가 크게 위기를 만났다고 봅니다. 그런데 이 위기를 어떻게 모면하느냐에 대하여 구체적인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4. 금일에 기독교인들이 말하기를 누구를 따라가며 누구의 말을 믿어야 되는지 정신을 차릴 수 없다고 하는데 이것을 어떠한 방침으로 그들에게 만족을 줄 수가 있겠습니까?

 

특    집

1. 3.1절에 우리들이 나갈 방향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2. 3.1절을 맞이하는 사명자의 눈물겨운 기도 

3. 3.1절부터 일어나는 진리용사 사명 동지들에게 부탁을 드립니다 

 

 

 

 

 

 

 

설 교 편

 

북방의 위력과 임마누엘의 날개

- 사 8:5~8 -

 

  조물주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원수에게 위력을 먼저 주시고 그 위력 앞에 모든 사람이 떨게 될 때에 홀연히 원수의 위력을 없이하는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므로 하나님의 사람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실 일을 행하시는 것이니 과거 이사야 시대에 북방 앗수르의 위력을 들어서 부패한 이스라엘을 짓밟고 들어오게 하는 동시에 히스기야왕의 간곡한 기도로써 북방을 승리하게 하는 증거를 보여주면서 인간 종말에 대한 묵시의 말씀을 책에 기록하게 하여 세계 인류에게 전하게 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의의가 있다.

 

  1. 경고가 됨 (5~7)

  이스라엘이 생명수와 같은 말씀을 버리고 이방적인 세력에게 속화가 되는 사마리아가 될 때에 앗수르를 들어 막대기를 쓴 것은 심판기에 부패한 교회가 하나님 말씀을 순종치 않고 이방과 타협할 때에 북방으로부터 심판의 위령을 가진 악의 세력이 올 것을 말씀한 경고이다.

  아버지 하나님의 역사는 예언적으로 나타난 역사도 있고 예언이 이루어지기 위하여 나타난 역사도 있으니 악자를 들어서 쓴 것도 하나님의 경륜이 이루어지는 과정의 하나가 되게 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일도 나타나도록 하는 것이니 과거 이스라엘에게 나타난 일은 임마누엘을 통하여 나타날 증거를 보여준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은 계통적인 역사니 묵시를 받는 선지들이나 묵시의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한 은혜 시대 역사나 심판기의 역사는 한 나라를 이루기 위한 계통적인 역사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왜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 하도록끔 하신 하나님께서도 계속적으로 역사하는 것이요 그때 마귀 앞잡이로 역사하던 악의 세력도 계통적으로 역사하기 때문이다.

 예를 든다면 큰 전쟁이 있을 때에 한 사람으로써 그 전쟁이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까지 아무리 희생자가 있다 하여도 계속으로 용사를 공급하는 나라가 되어야 전쟁에 승리할 수가 있다. 만일 어떤 나라가 전쟁을 시작하고 희생자가 있다고 하여서 용사를 보충시키지 못한다면 그 나라는 반드시 패전할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마귀와 싸우는 용사를 들어서 과거 앗수르, 바벨론 시대에 싸우도록 한 것이 구약 선지시대라는 것이다.  모든 선지를 통하여 하나님은 묵시로 말씀을 주실 적에 끝까지 승리하도록 계속으로 마귀편과 싸우게 하므로 필연코 이스라엘 왕국이 새 시대를 이룬다고 말씀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선지서다.

  그러므로 끝까지 악의 세력이 강하게 일어날 것을 말씀했고 또는 하나님의 종들도 더 강하게 일어날 것을 말씀할 때에 먼저 임마누엘이 되는 그리스도의 역사를 말할 때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했고 임마누엘이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하는 일을 하므로 새로운 시대가 올 것을 말했다(사7:14~15).

  그러므로 지금 북방의 공산당은 앗수르계의 계통이라면 우리 성도는 다윗의 뿌리가 되는 임마누엘의 계통이라고 보게 된다. 우리의 사명은 독립적인 사명이 아니고 계통적인 사명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나는 다윗의 뿌리라고 말씀하셨고 또는 그 자손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신성과 인성을 가르친 것이다(계22:16).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으로 나시기 전에 하나님의 아들인 신으로 역사해서 이스라엘을 통하여 다윗 왕국을 이루었으므로 다윗의 뿌리가 되는 신성을 가졌고, 또는 다윗의 자손으로 탄생하시어 완전히 십자가에서 승리하셨으므로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하여 다윗 왕국에 들어갈 자가 세계적으로 일어나게 되었고, 종말에 변화 성도를 통하여 완전히 마귀 세력을 지상에서 없이하는 대 승리를 이루게 될 것을 가르친 것이 선지서에 가르친 말씀이다.

  북방 세력이 아무리 강해도 이스라엘의 남은 자에게 멸망을 당하게 되고 새 시대가 온다는 것은 이스라엘 계통인 변화 성도를 뜻한 것이다(사10:22~23).

 

  2. 임마누엘의 통치 (8, 9:6~7)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고, 아담을 창조할 적에 아담을 통하여 세계를 통일하는 나라를 이루기 위한 목적은 아니었다. 왜냐 하면 아담을 통하여 영광의 나라가 이루어진다면 성부, 성자, 성신님께 영광이 될 수 없다.

  왜냐 하면 영원한 나라를 사람의 힘으로 이루어 놓으면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일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자기의 한 일을 자랑하는 일이 되겠으므로 가장 간교한 뱀을 창조하여 사람을 꾀어 보게 하고 사람이 어리석어서 꾀임을 받았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인생을 버리지 않고 성부, 성자, 성신이 사람에게 역사해서 타락한 인생을 다시 구원해주므로 영원한 나라가 이루어질 것을 가르쳐서 임마누엘이여! 그의 펴는 날개가 네 땅에 편만하리라고 하신 것이다.

  예를 든다면 비행기가 공중으로 날 때 날개 없는 인간이라도 그 비행기를 타면 같이 날게 되듯이 누구든지 완전하신 예수를 믿으면 예수님의 완전 승리의 역사의 힘으로 말미암아 타락한 인생들이 그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생을 창조할 때에 임마누엘의 역사를 믿어서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목적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람을 범죄케 하는 신은 아니다. 사람이 약해 범죄 하더라도 임마누엘의 역사로써 택한 자를 구원하여 승리하게 되도록 역사해 주는 것을 임마누엘의 나래라는 것이다. 어떤 신학자가 예정론을 말할 때에 사람이 타락하는 것도 하나님의 예정이라 하는 것은 탈선된 학설이라고 본다.

  사람이 마귀에게 꾀임 받아 타락했지만 하나님은 당신이 예정한 목적을 이루어 놓는데는 임마누엘을 통하여 이루어 놓되 회개하는 자의 죄를 사해 주시고 자기의 부족을 깨닫고 지혜를 구하면 지혜를 주고 능력을 구하면 능력을 주되 택한 자에게 회개하도록 징계하시고 완전한 인격을 이루도록 하시되 택한 자에게 믿음을 주어서 믿고 구하는 대로 주는 것을 임마누엘의 역사라는 것이다.

 

  결    론

  완전이라는 것은 독립적인 완전이 없고 대상자가 있으므로써만이 완전이라는 것을 이룰 수가 있는 것이다. 아무리 스스로 계신 완전한 신이 있다 하여도 그 신께서 홀로는 완전이라는 것을 나타낼 수 없되 완전 역사를 받을 수 있는 대상자가 되는 인생이 있으므로써 신의 완전 역사라는 것은 피조물된 인생에게 완전한 열매가 되는 것이다.

  또는 인생으로 하여금 신의 완전한 역사를 받는다 하여도 사람에게 원수가 되는 세력이 없다 해도 신의 완전 역사는 인생에게 큰 영광이 될 수가 없다. 그러므로 금일에 우리의 원수가 되는 북방 세력이 강하게 일어남으로써 임마누엘의 나래가 되는 강한 역사가 우리에게 완전한 열매가 되므로 새 시대가 완전히 이루게 되니 이것을 가르쳐서 북방의 위력과 임마누엘의 날개의 역사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두 가지 인도와 두 가지 길

- 마 7:13~14 -

 

  하나님은 자유의 신이신 동시에 인생에게 두 가지 인도와 두 가지 길이 있게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요소가 있다.

  첫째 : 순종의 여부를 따라서 갚아준다는 뜻이요,

  둘째 : 하나님께 합당한 자를 찾자는 것이요,

  셋째 : 사람에게 요구하는 대로 이루어 주는 것이니

  이렇게 하는 것은 의로운 사람을 찾는 동시에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기 위한 목적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창조할 때에 두 가지 길을 갈 수 있는 인격을 주는 동시에 두 가지 인도가 있게 했으니 그것은 다음과 같다.

 

  1. 두 가지 인도자 (슥3:1~5, 마4:1~11)

  이 성경을 보면 반드시 대표적인 사명을 가진 종들에게도 사단의 피해도 있고 천사의 인도도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마귀도 천사도 하나님이 부리는 영이라고 본다. 왜 이렇게 하느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요소가 있다.

  첫째 : 마귀를 이길 수 있는 인격을 이루기 위한 목적이요,

  둘째 : 하나님의 말씀으로 승리하는 역사를 이루기 위한 목적이요

  셋째 : 완전한 대표를 삼기 위한 목적이다.

  예수님께서도 신성만이 아니요, 인성만도 아니요, 신성과 인성이 결합된 인격이지만 성신의 인도를 따라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에 나가서 오직 좁은 길을 가느냐, 넓은 길을 가느냐하는 두 가지 시험을 가지고 시험해 보았던 것이다. 아무리 이적을 행한다 하여도 넓은 길을 가게 된다면 불법이 되는 것이다(마7:22~23).

  우리가 주의할 바는 아무리 사명을 맡은 자라도 두 가지 인도자가 나를 이끌고 있다는 것을 알아서 잘 분별하되 이것이 하나님 말씀에 탈선이냐, 아니냐 하는 것을 분별해야 될 것이다. 사단도 주의 종을 얼마든지 이끌고 갈 수 있는 권리가 있고 성신도 인도할 권리가 있는 데는 마귀도 법에 따라서 움직이는 것이요, 성신도 천사도 법에 따라서 움직이는 것이다. 불신자에게는 마귀 인도가 따로 있을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왜냐 하면 그들은 마귀에게 정복을 당해 있기 때문이다.

  마귀는 어떤 방법으로 인도하느냐 하면 사람에게 자유를 주는 것 같이 하면서 미혹을 주는 것이요, 성신의 인도는 구속을 받는 것같이 보이지만 실지는 자유가 있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어떤 부모가 어린아이에게 무조건 자유를 준다는 것은 오히려 그 아이를 망치게 하는 것이요, 그 어린아이를 자유를 주지 않고 어머니가 붙들어 주고 안아주고 업어주는 것은 그 어린아이에게 그렇게 하지 않으면 피해를 당하기 때문에 붙들어 주고 업어주고 안아서 보호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성신은 어린아이 같은 심령을 길러주기 위하여 조금도 잘못된 길에 서지 않게 하기 위하여 항상 구속을 주는 것 같이 하지만 실지는 그 길은 사는 길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마귀는 마음에 허황한 마음을 넣어주고 마음이 공연히 쓸데없는 일에 기울어지도록 만들어 놓고, 또는 하나님 말씀에 대하여 이상한 해석을 해서 사람의 마음에 임시 기분을 주는 일을 하므로, 사람들은 마귀의 인도하는 길을 따르게 되는 것이다.

  언제나 마귀의 역사는 사람의 마음을 붙들어 주는 것이 아니고 마음이 공연히 여러 가지로 치우치게 하는 마음을 주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이라는 것은 한 가지 획선이 있는데 그것을 생각지 못하게 하고 여러 가지로 이것 저것 생각이 나게 해서 이리 저리 치우치는 생활에 들어가도록 하는 것을 마귀 미혹이라는 것이다. 하와에게도 이러한 시험으로 왔던 것이다.

  첫째 : 하나님의 말씀은 그대로 볼 것이 아니라는 것,

  둘째 : 하나님은 그렇게 할 수가 없다는 것,

  셋째 : 사람에게 절대로 피해가 오는 일은 없이 잘 될 수 있다는 것으로 꾀었던 것이다.

  이러한 꾀임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에게 오는 것이니 우리가 참으로 나를 인도하는 신은 어떠한 신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친히 체험하는데서 분명히 분별해야 될 것이다.

  금일에 많은 종들이 있지만 이것을 분별치 못하는데서 영계 혼선을 가져오게 되고 큰 실패를 당하게 되는 일이 있게 되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니 무조건 다 하나님이 인도할 것이라고만 생각하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사랑하는 자에게 그 법대로 역사하는 것이니 언제나 두 가지 인도자를 들어 역사하면서 당신의 사람으로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되 여러 가지 시험을 통과시키는 것이다.

 

  2. 두 가지 길

  우리의 신앙 노선이라는 것은 두 가지 노선이 있는 것이니 여러 가지 방면으로 타협적인 노선을 갈 수도 있고 절대 타협이 없는 순교적인 노선도 있는 것이다.

  모든 선지나 사도들이 걸어간 노선은 순교적인 노선에서 인정을 받고 묵시를 받아 글을 쓸 적에 모든 선지는 하나같이 같은 야곱이요, 시온의 자녀이지만 반드시 두 가지 노선이 있다는 것을 말할 때에 타협적인 노선은 심판 날에 망한다고 하였고 순교적인 노선을 승리의 왕권 받는 노선인 것을 가르친 것이니 언제나 소수의 사람이 순교의 길을 갔고 다수의 무리가 세상의 권리를 쥐고 세상 향락에 도취가 되어 순교적인 신앙 노선을 걷는 자를 오히려 무시하고 어리석은 사람의 하나로 인정했던 것이다.

  홍수 심판시에도 수많은 셋의 후손이 다 노아의 방주를 부인하고 넓은 길을 갔던 것이다. 다윗 왕국의 말기에도 많은 사람이 참된 선지 예레미야를 무시하고 넓은 길을 가다가 예루살렘이 멸망하였고 메시야를 영접하는 때에도 많은 사람이 다 넓은 길을 가고  십자가의 길을 무시하다가 예루살렘이 다시 멸망을 한 것이다.

  언제나 흑암의 인도라는 것은 자세히 성경이 읽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요, 또는 성경을 해석하되 비밀에 탈선된 해석을 하도록 하여 인생에게 가야 할 길을 가지 못하게 하는 것을 마귀가 끌고 가는 길이라는 것이다.

  언제나 시대가 변천될 때에 소위 하나님만 공경한다는 자들이 다 속화되어서 넓은 길을 가게 될 때에 하나님의 비밀은 지극히 작은 자에게 나타나서 역사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알려주는 일이 없이는 그 비밀을 알 수 없는 것이다. 지금 기독교가 소위 평화주의라는 간판 밑에서 소위 기독교의 사랑이라는 것을 가지고 세속화 신학이라는 것까지 말하게 된다는 것은 넓은 길이라고 본다.

  이제 동방 땅 끝 한 모퉁이에서 하나님의 사람에게 입에 말씀이 임하여 아름다운 소식이라는 월간지를 내게 되는 것은 현 교계가 볼 때에 도저히 찾기가 어려운 세계의 것을 말하는 것이니 이것은 하나님의 비밀이 그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이루어진다는 신앙 노선이다.

  과거 선지시대에도 좁은 길이요, 은혜시대에도 좁은 길이요, 재앙의 날에도 좁은 길이 되는 비밀을 말한 것이 여호와의 말씀이란 것이다.  말세 재앙의 날에 남을 자는 쫓겨나는 자요, 미움받고 멸시받고 억압을 받고 지렁이 같이 짓밟혀 무시를 당하는 자가 새 시대를 이루는 역사의 선구자가 될 것을 말한 것은 기독교는 끝까지 좁은 길을 가는 자로 새로운 시대를 이룰 것을 뜻한 것이다.

 

  결    론

  의로운 심판이 있게 되는 것은 두 가지 인도자를 내세워서 두 가지 길을 가게 한 후에 심판을 내리는 것이니 심판 날에 남을 자가 되려면 좁은 길로 인도하는 인도를 받아 끝까지 그 길을 걸어간 자에게 지상 왕국의 축복을 받게 되는 것이다. 왜냐 하면 과거에 모든 선지나 사도나 성도들이 다 좁은 길을 가다가 순교를 했고 이제 남은 종이 될 변화 성도도 좁은 길을 가다가 변화 승천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왕국이라는 것은 좁은 길을 가던 자에게 왕권이 있게 되므로 성도의 나라가 오게 될 것이다.

 

 

합해진 기도와 하나님의 진노

- 계 8:3~5 -

 

  성도의 기도는 계통적인 기도이므로 서로 합해지는 것이다. 기도도 합해질 기도가 있고 합해지지 못할 기도도 있다. 우리의 기도에 있어서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구분을 지어서 말할 수 있다.

  죄를 고백하는 기도가 있으니 이것은 깨끗함을 받는 열매가 된다(요一1:9). 또는 성신을 받기 위하여 합심 기도할 때 큰 역사가 임하게 된다(행1:14). 또는 남을 구원하기 위하여 부르짖는 기도가 있으니 이 기도는 옛날 성도의 기도나 우리의 기도가 합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도 남을 살리기 위하여 부르짖는 기도는 종말에 진노의 날에 가서 다 이루어지는 것이다. 왜냐 하면 모든 선지와 사도와 성도들이 쓰러지기까지 부르짖던 기도는 전부 심판 날에 가서 원수의 세력을 없이하고 새 시대가 올 때에 다 하나같이 왕권을 받게 되는 종들의 기도이므로 이들의 기도가 연합이 되므로 다음과 같은 역사가 일어나게 된다.

 

  1. 해 돋는 편에서 나오는 역사다 (사41:25, 59:19, 계7:2)

  이것은 원수를 갚는 진노의 날의 역사를 뜻한 것이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말씀에 세 가지 요소를 말한 것이다.

  첫째는언약을 세우기 위하여 묵시를 보일 때에 예언적으로 보여준 역사도 있고, 또는 그 예언이 이루어지기 시작할 때에 이루어진 역사가 있으니 이것은 신약의 언약에 피로 성립된 구원의 역사다. 다음에 끝을 맺는 역사가 있으니 이 역사는 언약을 세울 때의 성도의 기도나 언약이 이루어지기 시작할 때 성도의 기도나 끝을 맺는 종말의 성도의 기도나 다 합하여질 적에 끝을 맺는 진노의 날에 남은 자를 통하여 다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해 돋는 편에서 일어나는 역사는 동방 역사를 뜻한 것이니 이 역사는 원수를 없이하고 완전한 성도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역사이므로 모든 순교자나 변화 성도가 합하여 통치하는 지상 왕국이므로 진노의 날에 성도의 원한이 다 이루어지게 된다(계18:20).

 

  2. 권세 역사이다 (계11:3~6)

  권세라는 것은 진노의 날의 역사를 뜻했다. 진노의 날에 예언의 말씀을 증거하는 종은 권세로 역사하는 것은 심판의 경고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역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권세는 성도의 피 값을 갚는 진리 운동이니 환란 재앙에서 이 종의 전하는 말을 순종하면 진노의 날에 사는 것이요 순종치 않으면 재앙을 받는다는 것을 권세 역사라 하는 것이다.  

  이 역사는 강하게 일어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 모든 성도의 기도가 합하여져서 일어나는 역사이니 칠 배나 강한 영감이 내리게 된다.

  둘째 : 하나님의 진노가 내릴 때에 진노의 하나님 대행자로 쓰여지는 것이니 그 종을 들어서 재앙으로 땅을 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계시록에 다른 천사가 나타나서 보여준 묵시는 진노의 날에 일어날 하나님의 역사를 보여준 것이다. 계시록은 전체가 진노의 날에 될 일을 목적하고 보여준 계시이니 선지서와 목적이 같은 것이다.

  선지서는 억울함을 당한 선지들에게 피 값을 하나님이 갚아 주고 새 시대를 이루겠다는 것을 목적으로 보여준 묵시요, 계시록은 그 묵시의 글을 종합하여 진노의 날에 전할 복음으로 조직화시켜서 보여준 계시이니 다른 천사가 7장에 하나님의 인을 들고 해 돋는 데서 나왔다는 것은 진노의 날에 남은 종에게 승리의 역사로 오는 권세 인이다.

  계9:4을 보면 진노의 재앙이 올 때에 인을 맞지 아니한 사람만 해하라고 한 것을 보면 분명히 하나님의 인은 진노의 날에 남은 종에게 주는 권세 역사라고 보게 된다. 그러므로 8장에 다른 천사가 금 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아 성도의 기도와 합해서 하나님께로 올린다는 것은 계5:8에 향은 성도들의 기도라고 한 것을 보아서 합해진 역사라고 본다.

 

  3. 세상 나라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는 종말의 역사이다 (계10:7, 11:15)

  천국을 목적한 복음 운동은 은혜 시대의 속죄 구령의 역사를 뜻했고 종말의 성도의 기도가 몽땅 이루어지는 역사는 세상의 악의 세력을 없이하고 성도만이 통치하는 나라를 이루는 역사이니 일곱 천사가 나팔을 부는 역사는 마지막 때에 성도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심판기가 오는 순서를 보여준 것이다.

  첫째 나팔은 혁명기

  둘째 나팔은 사회 혼란기

  셋째 나팔은 교회 혼란기

  넷째 나팔은 악의 발전기

  다섯째 나팔은 큰 시련기

  여섯째 나팔은 환란기

  일곱째 나팔은 심판기

  이렇게 계시록에 보여준 것은 인간 종말에 이러한 재앙이 올 때에 새로운 시대가 이루어지는 역사는 다른 천사가 작은 책을 들고 크게 외치는 역사인데 사도 요한에게 이 책을 받아먹고 세계 만방에 다시 예언하라고 한 것은 기독교 종말에 새 시대를 이루는 복음 운동을 뜻한 것이다.

  그러므로 계시록은 악의 세력이 최후 발악을 하는 역사와 의의 세력이 최고도로 강하게 역사 하므로 원수를 이기고 지상 평화 왕국이 이루어질 것을 목적하고 보여준 계시이니 기독교 종말의 역사라는 것은 부활 성도의 기도가 이미 금 향로에 담겨져서 말세 변화 성도의 기도와 합하여 역사가 일어나되 진노가 내려 악의 세력을 없이하고 완전한 성도의 나라가 이루어질 것을 뜻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리 부족한 사람이라도 남을 살리기 위하여 목숨을 아끼지 않고 나서는 자의 기도가 연합이 되어 종말의 역사를 일으키므로 완전 승리의 평화 왕국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결    론

  가장 위대한 역사는 합해진 기도의 응답으로 이루어지는 역사라고 보게 된다. 왜냐 하면 하나님은 완전한 평화 왕국을 이루는 것은 하나님 스스로 이루는 것이 아니고 성도의 원한을 이루어주는 것으로 완전한 평화 왕국이 이루어지도록 종말에 진노를 내리고 당신의 종과 백성을 아껴 보호하며 왕권, 시민권을 주되 기도가 상달되어 역사를 일으킨 종은 왕권을 받고 역사를 일으킬 때 회개하고 돌아온 백성은 새 시대의 종족이 되는 것이다.

 

 

흑암 세력과 인의 역사

- 계 9:1~6 -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신이시니 빛도 어두움도 환란도 평안도 자유롭게 창조할 수 있는 신이시다(사45:7). 하나님의 역사는 언제나 어두움의 권세를 먼저 역사하게 하고 다음에 하나님의 역사로써 어두움을 물리치고 승리케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요소가 있다.

  첫째 : 어두움을 들어서 미혹을 시켜 보는 것은 당신의 말씀에 권위를 세우기 위한 것이며

  둘째 : 말씀을 가지고 승리하는 종에게 왕권을 주기 위한 목적이요

  셋째 : 왕권을 가진 종으로써 완전한 승리의 왕국을 이루기 위한 목적이다.

  이제 흑암의 세력을 내보내는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이미 흑암에 잠겨 있는 백성을 구원하는 일 (사9:1~2)

  이 흑암이라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범하므로 그 영과 육이 아울러 죽게 된 흑암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담 하와에게 법을 주고 간교한 뱀으로 꾀어 볼 때에 그 법을 지키지 못하고 범죄한 데서부터 인간에게 온 흑암이다. 이 흑암은 인간의 힘으로는 벗어날 수가 없는 흑암이니 인간이 범죄 하므로 사망 아래에 떨어졌기 때문이다.

  이 흑암을 통하여 세계 인류는 도저히 영생이라는 소망을 찾을 수 없게 된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전한 승리를 이루는 십자가의 의로써 누구든지 그 의를 믿는 자는 그 흑암을 벗어날 수 있게 되는 것이 기독교의 구원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원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인생이 자범죄를 벗어날 수가 없는 자리에 떨어지므로 흑암에 떨어진 것은 그 죄를 사해 주는 공로로만이 흑암을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2. 해와 공기를 어둡게 하는 흑암 (계9:1~3)

  이 흑암이라는 것은 사람이 범죄하므로 사망에 떨어진 흑암이 아니요 마귀에게 권세를 주어서 당신의 자녀를 미혹해 보라는 흑암이다. 에덴 동산에 죄가 없는 아담 하와에게 꾀어 볼 수 있는 권리를 간교한 뱀에게 맡긴 것 같이 말세에도 중생 받은 하나님의 자녀와 종들을 꾀어 보는 흑암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영혼 구원을 목적하는 역사가 아니고 변화 승천의 역사를 일으키기 위하여 흑암의 권세를 개방시킨 것이다. 왜냐 하면 이 몸이 변화 승천하는 사람이 되려면 흑암을 뚫고 나가는 자에게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흑암 세력은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도 미혹시켜 보는 흑암의 역사라고 본다. 범죄로 말미암아 흑암에 떨어진 영들은 십자가의 승리의 보혈로 해방을 받고 올라오는 것이요 시험해 보기 위하여 허락한 흑암은 인의 역사를 통하여서만 벗어나게 된다. 이 인의 역사라는 것은 하나님의 인인데 다음과 같은 의의가 있다.

  1) 말씀 권세다

  이 말씀 권세라는 것은 마귀를 없애 버리는 다림줄을 가르친 것이다. 보혈의 능력은 속죄의 권세가 십자가의 의를 통하여 따르는 것이요 말씀 권세는 심판의 권세가 따르는 것이니 말씀으로 심판이 있고 새 시대가 오는 데는 아무리 마귀 흑암이 강하게 나온다 하여도 이 흑암을 들어 쓰는 것은 말씀 하나를 바로 증거하며 싸우는 사람으로 변화 승천의 역사를 하기 위한 목적이다.

  독생자의 승리는 죽은 영을 살리는 것이요, 심판의 말씀의 권세는 환란과 재앙 가운데서 당신의 백성을 구원해 주고 원수를 갚는 권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심판의 변론의 말씀을 바로 증거하는 종은 그 말씀 권세로 마귀를 물리치고 남은 종이 될 수 있다(사59:21~60:3).

  예를 든다면 하루의 기간을 정하고 일하는 사람이 아침에는 태양 빛이 흑암을 물리치므로 그 빛 아래서 역사 했지만 다시 어두움이 올 때는 등불이 아니고는 일할 수 없는 거와 같이 의의 태양이 되시는 예수님의 빛의 역사에서 세계적인 대승리를 보는 기독교 역사가 있었지만 종말에 하나님의 종들을 시험해 보는 흑암이 나올 때는 말씀의 빛으로만이 흑암을 물리치고 나가게 되는 것이다(사60:2).

  2) 통치의 권세다

  이 통치라는 것은 마귀 세력을 완전히 없애고 성도가 통치하는 것을 뜻했다. 그러므로 인 맞은 종들이 절대로 어두움을 이기므로 지상에 완전한 왕국이 인 맞은 종들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통치 시대가 온다. 성신의 인은 천국을 이루는 역사라면 하나님의 인은 지상 통치 왕국을 이루는 역사라고 보게 된다.

  왜냐 하면 엡1:13을 보면 “너희가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 침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의 보증이 된다” 라고 말씀했고, 하나님의 인은 계7:2에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 천사가 크게 외쳐 가로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 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 하더라 하였고, 계9:4절에 흑암에서 나온 황충이들에게 이르시되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을 맞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하라”고 말한 것을 보면 이 인의 역사는 세계 통일의 역사가 틀림없다.

  계14:1에 어린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14만 4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다고 한 것을 보면 이 14만 4천은 변화 성도로서 세계를 통일할 승리의 용사를 뜻한 것이다.

  세밀히 말하자면 천국은 중생과 천국이요, 새 시대는 승리와 새 시대라고 볼 수 있다. 천국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승리로 이루어지는 것이요 지상 왕국은 중생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말씀 권세역사로 승리하게 되므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결    론

  흑암의 권세가 세계를 덮고 나오는 것은 하나님의 권세가 악의 세력을 완전히 없애고 세계를 통일할 새 시대가 올 징조라고 보게 된다.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흑암의 세력을 뚫고 나갈 수 없는 난국을 당한 것은 분명히 하나님이 권세의 사람을 들어 쓸 징조이니 우리는 인의 역사를 받기 위하여 노력하는 데는 말씀의 완전 무장을 갖추는 일에 전력을 두어야 할 것이다.

 

 

참된 증인의 심정

- 빌 1:3~11 -

 

  기독교 안에 많은 사람이 진리를 증거하고 있지만 하나님이 볼 때에 어떠한 심정을 가지고 있느냐에 대하여 모든 역사는 좌우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인간이 볼 때에 환영을 받고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는 것 같으나 그 열매가 완전한 것이 없다면 그 종의 심정은 바로 선 사람이라고 볼 수 없다.

  이제 참된 증인의 심정은 어떠한 심정이 있어야 완전한 열매를 맺느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본문을 통하여 알 수 있다.

 

  1. 항상 간구하는 심정이 있어야 된다 (3~4)

  아무리 외형적인 열심이 있다 하여도 중심에 항상 간구하는 마음이 불타지 않으면 그 열심이라는 것은 얼마 가지 않아서 식어지고 말 것이다. 바울이 아무리 옥중 생활을 하지만 조금도 식어지지 않고 기쁨으로 항상 간구하는 마음이 불탈 때에 비록 옥중에 있지만 옥중에서도 많은 열매가 있는 종이 되었던 것이다. 그가 쓴 옥중 서신은 이 날까지에 큰 열매를 가져오는 진리 운동이 된 것이다.

  하나님의 종은 항상 간구하는 마음이 있는 자라면 어디를 가나 항상 열매 있는 종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는 것은 어려운 일을 당할 때 간구하는 기도는 다 주님께서 책임을 질 일이기 때문이다.

 

  2. 확신이 있어야 된다 (5~6)

  확신이라는 것은 양심적인 신앙에서 가지게 되는 것이니 조금도 인위적인 방법을 취하지 않고 순수하게 주님의 역사에만 순종하는 자는 아무리 어려운 일이 와도 마음에 확신을 가지게 되는 것은 모두 되어지는 일이 전부가 주의 역사에서 되어지는 일을 볼 때 자기를 확신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을 더욱 확신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확신한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러나 인위적인 방법으로 하는 일은 처음에는 될 것 같으나 그대로 되지 않는 것을 볼 때에 낙망을 하게 되는 것이요, 참된 증인이 하는 일은 자기가 하는 일이 아니요, 그 증거의 말씀대로 신의 역사가 점점 강하게 일어나므로 실패 같으나 모든 일이 뜻밖에 이루어질 적에 더욱 확신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증인의 생활은 날이 갈수록 점점 강해지는 것이다.

 

  3.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모함 (7~8)

  세상에 많은 사람이 사랑하는 자를 사모하지만 그 사모라는 것은 한 인정에 지나지 못한 것이로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모하는 것은 인정적이 아니요 참으로 심장으로 그를 완전히 복을 받도록 하겠다는 불타는 마음에서 목숨을 바치기까지 기도하면서 복음을 전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그리스도께서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되 그리스도의 영의 역사에 의하여 마음에 불타는 마음을 금할 수 없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나가는 종을 하나님은 인정하는 것이다.

 

  4. 남이 완전해지기를 원하는 마음이다 (9~11)

  언제나 참된 종의 심정은 사랑하는 양떼가 장차 어떻게 될 것이냐는 것을 심각히 생각해서 그 결말이 바로 되기를 바라는 심정을 갖게 되는 것이다. 거짓 선지라는 것은 일시 사람에게 흥분과 감정을 주는 것을 목적해서 자기를 따라오게 하려는 것이로되 참된 증인의 심정은 양떼가 점점 자라서 잘 분별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 흥분이 없이 완전한 열매를 맺도록 하는 것을 목적하고 일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양떼는 임시 자기에게 좋게 하는 것을 따라가게 되므로 결말이 좋지 못하게 되는 것이니 우리는 어떻게 하든지 주의 날에 부끄러움이 없이 설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하나를 목적 두고 일하는 것이 참된 증인의 심정이라는 것이다.

 

  결    론

  기독교의 사업이라는 것은 참된 증인의 심정을 떠나게 되면 오히려 사회 기관보다도 더 가증한 일이 될 것이니 항상 간구하는 마음과 확신하는 마음과 사모하는 마음과 남의 장래를 심각히 생각하고 나가는 마음이 있어야만 열매 있는 종이 될 것이다.

  금일에 하나님의 종들이 이 네 가지 마음이 없게 될 때에 하나님은 그 예배나 그 전도나 기도를 받을 수 없고, 오히려 하나님은 진노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은 완전한 사람은 없는 것이로되 참된 증인의 심정을 가지고 나가면 하나님께서 완전히 들어 쓰므로 완전한 인격을 이루는 동시에 완전한 열매를 많이 맺게 되는 것이다.

 

 

원수를 갚는 날의 영광

- 사 59:14~21 -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창조할 때 당신의 영광을 사람에게 주기 위하여 이루어 놓았지만 사람이 영광을 주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므로 범죄를 하게 되어 타락했지만 다시 그 영광을 주고자하여 세상에 오신 것이 그리스도의 탄생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사야는 40:5에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라고 하였다. 이 말씀이 이루어진 시대가 은혜시대라고 본다. 그러나 원수를 갚는 날의 영광이라는 것은 무엇이냐는 것을 오늘 본문을 통하여 알 수 있다.

 

  1. 강권 역사이다 (14~18)

  강권 역사가 없이는 원수를 갚는 날에 영광을 받을 자는 하나도 없으리만큼 부패될 것을 말했다(14~15). 그러므로 하나님은 원수를 갚는 날에 하나도 쓸 사람이 없으므로 자기 팔로 스스로 구원을 베푸시며 자기 의를 스스로 의지하사 라고 하였다. 이것은 강권을 뜻한 것이다. 택한 자를 강권으로 붙들어서 쓰시되 하나님의 의로써 당신의 종을 들어 쓰는 것이니 이 날을 원수 갚는 날이라고 했다.  강권 역사에 대해서 세 가지 요소가 있으니 다음과 같다.

  첫째 : 택한 자를 들어 쓰되 여호와의 도구로 쓰는 일,

  둘째 : 열심을 주되 원수에게 피해를 당하지 않도록 하는 일,

  셋째 : 조금도 부족함이 없도록 완전 개조를 시켜서 남은 자가 되게 하는 일이다.

이렇게 되는 것은 원수를 갚는 날이니 만큼 택한 자의 원한을 풀어주는 일이므로 아담의 가정에서 억울하게 죽은 아벨의 피로부터 이날까지 순교자의 피 값을 갚는 일이니 만큼 그들의 기도가 응답으로 나리는 것이다. 계6:10과 같이 피의 호소를 들으시고 계7:2~3같이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을 치는 역사를 강권이라 하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전쟁이 급할 때에 강권으로 용사를 붙들어다가 싸우게 하듯이 원수의 세력을 없이하는 종말의 역사는 강권이 없이 안 된다는 뜻을 가르친 것이다.

  인류 역사의 가장 영광스러운 일은 강권으로 역사할 때에 쓰여지는 종이라고 보게 된다. 왜냐 하면 모든 선지와 사도와 성도들은 원수에게 억울하게 쓰러져서 그 몸이 흙으로 돌아갔지만 원수를 갚는 날에 쓰여지는 종은 원수를 짓밟고 나가기 때문이다(사41:25).

 

  2. 해 돋는 편에 나타날 영광 (19)

  금일에 서방에서는 물질 문명이 극도로 발달하여 그 영광에 도취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지금 동방 사람은 서방의 문명을 받아들여 그 지도를 받고 있다. 심지어 풍속까지라도 서방 풍속을 받아들일 때에 동방의 예의까지라도 서방의 풍속에 물들고 보니 이것이 동방 셈의 민족의 영광이라고 볼 수가 없다.

  또는 소위 공산주의라는 침략적 정책이 동방 아시아의 기름진 땅을 다 점령하고 가장 아름다운 산까지도 메말라 붉은 산이 된 남한만 남았다는 것은 현재로 보아서는 영광이라고 할 수 없다.

  본인이 이 나라에서 출생하여 57년 생활에 걸어 온 길을 돌아보면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첫째:고아의 쓰라린 생활 15년, 둘째:일본 제국주의 정치 아래서 압박을 받던 생활,  공산 정치 아래 무서운 박해를 받던 생활, 셋째:6.25 동란에 피난민 생활, 넷째:깊은 영계의 생활에서 심령적으로 쓰라린 영적 전쟁에서 군대 마귀와 싸우는 영계, 대장 마귀와 싸우는 영계, 붉은 용과 싸우는 영계에서 억울한 말을 많이 듣는 피해를 당하게 된 금일에 1971년 새 봄을 맞이하는 입춘 절기를 맞이하여 간곡히 바라는 것은 여호와의 영광이 이 나라에 나타나 세계를 깨우치는 선지 국가가 될 것을 믿는 바이다.

 

  3. 성결한 자로 입에 말씀이 임하는 일 (20~21)

  이날까지의 많은 성자가 없는 것은 아니로되 그들은 다 완전 역사라는 것을 받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원수를 갚는 날의 남은 종에게는 완전한 역사가 임할 것을 가르쳐서 죄과를 떠난 자라 하였고 여호와의 신이 같이하는 자로 여호와의 말씀이 입에 있으므로 이것으로 영원한 새 시대를 이룬다고 했다.

  이날까지에 모든 선지는 영광스러운 일이 두 번 있을 것을 말할 때에 첫째는갈릴리 해변을 가르쳐 말했고, 둘째는해 돋는 편이라고 말한 것은 분명히 동방 땅 끝에 있는 우리를 가르친 말씀이다.

  지금 아름다운 소식의 월간지가 부족한 이 사람의 입술에 말씀이 같이 해서 얼마든지 받아서 기록하는 대로 내 입에서 말씀이 나오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이 크게 나타날 일이 시작되었다고 믿어진다. 왜냐 하면 내가 연구한다는 것은 조금도 영광이 못되겠지만 하나님께로부터 명령이 나려 수많은 책자가 내 입을 통하여 계속으로 나릴 때에 날이 갈수록 점점 더 하나님을 경외하게 된다. 조금이라도 “나”라는 생각이 들어갈 때에 한 자 글도 쓸 수 없이 되기 때문이다.

  언약의 말씀이 묵시로 나타난 나라는 적군에게 먹힘을 당해서 이날까지 긴 세월을 흘러 내려왔지만 그 묵시의 말씀이 햇빛같이 나타나서 세계를 밝히는 그 나라는 새 시대의 영광을 누리는 나라라고 이사야 60장에 가르쳤으니 역사상 큰 영광은 해 돋는 편에서 원수를 갚는 날에 나타나므로 완전한 영광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결    론

  인간들이 영광을 바라는 것이 욕망의 하나라고 보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원수를 갚는 날에 큰 화가 될 것을 영광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흑암으로 본다. 정권을 잡는 것을 영광으로 보고 물권을 잡는 것을 영광으로 보고 심지어 교회라 하면서 까지도 교권을 잡으려고 하는데서 부패된 세상을 원수 갚는 일이 심판으로 오게 될 때에 영광이라는 것은 말씀대로 원수를 갚는 날에 그 말씀을 바로 증거하는 종에게만이 본 영광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 말씀을 받은 자는 신이다

- 요 10:34~39 -

 

  하나님께서는 인생에게 말씀을 주실 적에 각자 각자에게 직접 주는 것이 아니고 대표적인 사람에게 말씀을 주는 동시에 그 사람을 신과 같이 들어 쓰므로 그 말씀이 널리 전파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 말씀을 바로 깨달아 믿게 하는 방법이라고 본다.

  이제 하나님 말씀을 받은 자를 신과 같이 쓴 것을 성서를 보아서 알 수 있다.

 

  1. 율법과 계명을 받은 모세 (출4:11~12, 7:1, 14:21)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왕국을 이룰 때도 말씀을 받은 모세를 신과 같이 쓰므로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난제를 해결하도록 하신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말씀만 모세에게 주고 신과 같이 들어 쓴 일이 없다면 이스라엘의 왕국을 이룰 수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성경 말씀을 받아 기록한 사람은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그 때 즉시 말씀이 이루어지는 때의 종은 신과 같이 썼고 이루어질 것을 묵시로 받아쓰는 종은 잠잠히 글만 기록하는 것으로 머물러 둔 것이다. 모세는 아브라함에게 언약한 말씀이 이루어지는 때에 말씀을 받아 가르친 종이므로 그 말씀이 응하기 위하여 신과 같이 쓰여진 것이다(창15:12~14).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한 말씀대로 이스라엘이 이방의 객이 되어 애굽을 섬겼고 말씀대로 400년 동안 괴로움을 받았고, 말씀대로 그 나라를 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게 된 것은 언제나 사람을 들어 쓰되 그 입과 손을 들어 쓰므로 입에도 손에도 열매를 맺게 하므로 신과 같이 역사하게 하는 것이다. 모세는 애굽 나라에 신과 같이 나타나서 역사하므로 그 압박 속에서 이스라엘을 구출한 것이다.

 

  2. 말씀을 받은 베드로를 들어 쓰심 (행3:6~8, 5:3~6)

  많은 제자가 있지만 베드로를 통하여 신과 같이 역사하도록 한 것은 주님께서 “천국 열쇠를 네게 주노라” 하였고 또는 “내 양을 먹이라”고 한 것은 대표적인 사람으로 세운 것이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아무리 예수를 세 번씩 모른다고 부인한 실수도 있지만 말씀을 맡겼기 때문에 그 말씀을 증거하기 위하여 신과 같은 사람이 되도록 역사하신 것이다.

  사도 요한은 아무리 십자가 앞에서 대신 아들이라는 명분까지 받았지만, 은혜시대의 복음을 맡은 자가 아니고 영원한 복음이 되는 계시록을 잠잠히 받아 기록한 것으로 끝을 맺었다.

  사도 중에도 이방에 복음을 전하는 책임을 맡은 바울과 할례 받은 자에게 총 책임을 맡은 두 사도만을 들어서 놀라운 역사를 하게 한 것은 복음의 말씀을 위한 대표로 들어 썼기 때문이다.

 

  3. 예언의 말씀을 맡은 증인 (계11:3~6)

  모든 선지가 묵시의 말씀을 기록했지만, 그들을 통하여 큰 역사가 나타나지 않은 것은 그들이 묵시를 볼 때에 앞으로 동방 땅 끝에서부터 역사가 일어나되 원수를 회삼물같이, 진흙같이 짓밟고 나간다고 사41:25에 말했고, 불 가운데로 지나도 불꽃이 사르지 못한다고 사43:2에 말했고, 원수의 세력이 부끄러워 손으로 입을 막고, 귀가 막히게 되어 떨게 된다고 미7:15~16에 말했고, 하나님같이 쓰여진다고 슥12:8에 말했고, 동북의 소문을 듣고 북방의 세력이 번민케 되어 발악적인 행동을 하다가 망한다고 단11:44에 말했으니 이 모든 성경은 다 말세 재앙의 날에 선지의 예언을 가지고 다시 예언하는 종들의 역사라고 보게 된다.

  그 밖에도 모든 선지는 진노의 날에 남은 종은 불이 되고 원수는 초개같이 된다고 말씀했으니 우리는 말씀을 받은 종이 신같이 쓰여진다는 것만으로 그 시대에 모든 난제를 해결한다고 믿는 것이다. 율법시대가 시작될 때도 말씀이 임한 자를 신같이 썼고, 은혜시대가 시작될 때도 말씀이 임한 자를 신과 같이 썼으니 새로운 시대가 이루어지는 마지막 역사에도 말씀을 받은 종이 신과 같이 쓰여질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제 모든 난제는 말씀이 임한 종을 신과 같이 들어 쓰므로써 끝을 맺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말씀하기를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고 하신 것을 어찌 폐할 수가 있겠느냐”고 말씀하신 것이다.

 

  결    론

  기독교가 산 종교라는 것은 말씀만 있는 것이 아니고, 그 말씀이 이루어지는 역사가 있되 사람을 신과 같이 쓴 것으로써 그 시대 사람들에게 증거를 보여 주므로 원수의 무리를 이기고 나가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일이 과거도 있었고, 앞으로도 있게 되므로써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말세에 나타난 구원

- 벧전 1:3~7 -

 

  하나님은 말세의 구원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모든 선지에게 언약을 세울 때에 목적을 구원이라는 것을 인간에게 베풀겠다는 것이 언약의 총 대지가 된다.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창조할 때 사람으로 하여금 아무런 실수가 없이 생활할 수 있는 인격으로 창조한 것이 아니고, 사랑하는 자가 실수가 있어도 구원을 베풀어서 당신의 목적을 달성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예정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택한 자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경륜이라고 보게 된다. 아담 하와가 범죄할 것을 모르신다는 것보다도 범죄 하더라도 구원해 준다는 것이 하나님의 예정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죄를 짓게 하는 신은 아니시다. 택한 자가 약해서 쓰러져도 다시 일으켜 주고 어리석어서 속아도 깨우쳐 준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니 말세에 나타난 구원이라는 것은 언약을 세워 놓으실 때에 실천적인 언약을 세운 것을 구약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택한 성민에게 여호와가 나타나서 말세에 구원할 일을 증거로 보여 주는 동시에 빠짐 없이 말씀을 받아 기록하게 한 것을 성경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승천한 후에 행하는 일은 전부가 차별 없는 구원인데 이 구원은 말세에 하나님 말씀대로 실천하는 그리스도의 의로운 행동이라는 것이다.

 

  1. 하나님의 긍휼 (3)

  하나님의 긍휼이라는 것은 어떠한 자에게 임하느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첫째 : 자기가 날 때부터 아무런 이유 없이 원죄 아래서 나게 되는 일을 하나님은 불쌍히 본다. 왜냐 할 때에 아담, 하와가 어리석어서 미혹 받으므로 선악과를 먹고 모든 인간들이 다 무조건 죽게 되었다는 것은 인간에게 원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둘째 : 우상을 공경하는 나라에 태어난 사람들이 그것이 옳은 줄 알고 몰라서 섬긴다는 것은 그 자손들에게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셋째 : 억울하게 마귀의 권세 아래서 자기 힘으로 벗어날 수 없게 된 인간을 볼 때에 그들을 불쌍히 보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의의 하나님이라고 할 수 없다. 예를 든다면 사람끼리 길을 가다가 어떤 사람이 억울하게 알지를 못해서 죽을 수밖에 없는 자리로 떨어져 내려간 사람을 건져 낼 힘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냥 둔다면 건져낼 힘이 있는 자에게 책임이 있다고 본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을 구원해 줄 수 있는데 인간을 긍휼히 보지 않는다면 그 하나님은 타락한 인생과는 하등 관계가 없는 신이라고 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을 불쌍히 보되 아들을 대신 죽게 하고, 다시 부활시키므로 누구든지 예수만 믿으면 무조건 구원해 준다는 것은 말세에 나타난 마지막 방법이라고 본다.

 

  2. 다시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주심 (4)

  하나님께서 이 천지 만물을 창조한 것은 완전한 기업으로 준 것이 아니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받을 수 있는 인격을 이루기 위하여 사용하는 일용품이라고 본다.

  하나님 자체는 전부가 쇠하지 아니하는 것만을 가지고 계신데 이것을 주고자 할 때에 아무 사람이나 덮어놓고 준다는 것은 공의가 아니다. 반드시 어떤 공로가 있어야만 썩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받는다는 것이다.

  공로라는 것은 하나님이 직접으로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니고, 사람을 통하여 일을 하게 하되 완전한 기업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을 많이 내라는 것이 사람에게 맡긴 사명이다. 그런데 사람이 의로운 씨를 내지 못하고, 악한 씨를 내게 되므로 사람은 완전한 기업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이 없고 전부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을 많이 생산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할 일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둘째아담 예수를 나게 한 것은 영원한 기업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을 많이 내는 방침을 세운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맡은 사명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공로로는 도저히 쇠하지 않는 기업을 얻을 수 없게 되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운 공로를 세워서 그 공로를 믿음으로만이 그 기업을 얻게 하는 동시에 믿는 자는 무조건 그 기업을 받고 믿도록끔 하기 위하여 목숨을 바치고 복음을 전하던 자는 남을 믿도록 했다는 공로에서 믿을 수 있는 공로를 세운 예수님과 같이 왕권의 기업을 얻도록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공로를 믿으므로 시민권을 받고, 십자가 공로를 믿도록끔 증거하기 위하여 순교의 생활을 한 사람은 왕권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썩지 않는 기업에도 왕권과 시민권이 있는 것이다.

 

  3. 능력으로 보호하심 (5)

  하나님은 능력으로 역사하는 것은 어떤 의식이나 도덕을 따라서가 아니고, 다만 택한 자를 구원하기 위하여 능력으로 보호의 역사를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은 약한 인간을 보호해 주는 일이 아니라면 그 능력은 아무런 열매를 나타낼 수 없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내게 능력을 주어서 역사하는 그의 역사를 따라 수고한다고 하였다(골1:29).

  하나님의 종에게 능력을 주는 것은 그 종을 위하여 주는 것이 아니고 택한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하여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능력으로 보호함을 받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믿고 용기있게 나갈 때에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할 수 없게 될 때 능력으로 보호하는 것이다.

 

  4.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심 (6~7)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시험을 통과시키는 것은 구원을 받는 자로서 완전한 영광을 왕권으로 받게 하기 위한 목적이다. 같이 구원을 받아도 시험을 많이 당해서 이긴 자와, 시험을 통과해 본 일이 없이 평안히 나간 자와에 차별이 있되 시민권과 왕권으로 차별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말세에 구원을 나타내는 동시에 여러 가지 시험이 시련과 연단으로 닥쳐오게 하는 것은 주 재림시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받는 자를 완전히 수를 채우기 위한 목적이다.

 

  결    론

  아름답다! 구원을 받은 자여, 가장 복 있는 말세에 구원을 받게 된 자여, 모든 일에 감사하라. 항상 찬송하자. 무조건 감사하고 영광을 돌릴 것 뿐이다. 구원을 받은 자라면 하나도 원망할 일은 전혀 없다고 본다.

 

 

기독교 종말에 나타나야 할 기사

- 미 7:14~20 -

 

  하나님께서는 억울하게 마귀에게 미혹을 받고 타락한 인생을 구원하고자 할 때에 과거에 언약을 세우는 시대에는 아무런 기사가 없이 세운 것이 아니고 성경이 언약의 말씀으로 세상에 나타날 때에 앞으로 기독교 종말에 크게 나타날 일을 믿게 하기 위하여 나타났다고 본다.

  그러므로 예언적인 이스라엘 왕국이 시작될 때에 나타난 출애굽기의 역사는 완전한 그리스도의 왕국을 이룰 때에 행하실 일을 보여준 것이라고 본문을 통하여 분명히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미가 선지를 통하여 묵시를 보여줄 적에 1장~3장까지는 진노의 날에 망할 자의 형편을 보여주었고, 4장~7장까지는 진노의 날에 남을 자의 형편을 보여 주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쫓겨나듯이 심판기에도 쫓겨난 자로 강국을 이룬다고 하였고(미4:6~7), 또는 7장에는 의지할 곳 없이 하나님만 바라보고 나가던 자가 넘어져도 일어나고 아무리 흑암 세력이 와도 빛을 발하게 되고 아무리 죄를 범한 일이 있다하여도 하나님은 당신을 바라보는 종을 절대로 버리지 않고 들어 쓸 것을 말했다(7~10).

  하나님의 완전한 역사라는 것은 완전한 사람을 통하여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만 바라보는 자라면 무조건 들어쓴다는 것이다. 모세가 아무리 부족하지만 그가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만 바라볼 때에 기사를 나타내 보인 것은 말세에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 바라보는 사람에게 나타날 예언이 되는 것이다.

  기독교 종말에 나타날 기사는 다음과 같다.

 

  1. 주의 기업이 된 백성을 위하여 (14)

  가장 주께서 기뻐하는 백성은 아무리 악화된 세상에서라도 물들지 않고 끝까지 순종하되 징계를 받고도 오히려 하나님을 경외하는 백성이라고 본다(미6:9). 아무리 천천 마리의 양을 드리고 하수같이 많은 기름을 하나님께 바쳤다 하더라도 겸손히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없다면 이것은 오히려 가증히 여기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당신은 선한 목자요, 참된 백성을 양이라고 한 것은 순종하는 사람만이 주님의 기업이 된다는 뜻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순종하는 백성이 없다면 아무런 역사도 할 수가 없을 것이로되 비록 약하고 적은 무리라도 순종하는 자라면 그들을 당신의 소유로 삼아서 그들을 통하여 큰 기사를 나타내는 것이다.

  언제나 하나님은 당신의 기업이 되는 백성을 인간이 볼 때는 약하게 하고 어리석게 보이게 하시면서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사람이 되는 사상과 양심을 가진 자라면 중심 보시는 하나님은 그들에게 역사하는 것이다.

 

  2. 원수 세력이 부끄러워 떨게 하심 (15~17)

  하나님께서는 먼저는 악의 세력이 강하게 되어 당신의 백성을 압박하고 훼방하게 하다가 압박과 훼방을 무서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나가던 백성으로 하여금 수풀 속의 사자같이 강하게 들어 원수 세력을 부끄럽게 하고 떨게 하므로 원수 세력 아래 있던 백성들도 다 굴복을 시키는 동시에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일이 있게도 하고 또는 돌아오지 않는 무리를 다 없이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참된 하나님의 백성과 종들에게 큰 축복을 주기 위한 방법이다.

 

  3.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대로 축복을 주심 (18~20)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가정에 나타나서 맹세를 세울 때에 내가 너로 대적의 문을 얻게 하리라고 말씀을 했고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는다고 창22:17~18에 말한 것과 같이 응해지는 지상 축복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는데는 영혼 구원으로써 구원 완성이 아니요, 완전히 지상 왕국이 이루어지는 역사로써 구원을 완성하는 것이니 그리스도가 다시 나타날 때에 죽은 자는 부활하고 남은 자는 변화 받아 주님을 맞이하므로 대 구원의 사업은 완성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 전체는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신 대로 이루어지는 일은 십자가로 세계 민족이 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역사가 있고(갈3:27~29) 또는 아브라함 자손 된 자들이 살아서 새 시대를 이루는 역사가 기독교 종말에 나타날 기사로 되는 것이다. 세밀히 말하자면 모든 족속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는 일과 또는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는 일로 구원은 완성되는 것이다(계5:9~10).

 

  결    론

  기독교의 역사라는 것은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므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고 부활 승천하셔서 역사하는 일은 죽은 영들을 살리기 위하여 성령을 부어 주시는 것으로 기독교 신앙의 대상을 완전히 이루었고, 둘째:성신을 받은 종들이 순교의 피를 흘리면서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한 일이고, 셋째:큰 기사가 나타나서 원수의 세력을 복종시키는 일이 있으므로 마지막 환란에서 택한 자를 구원하여 새 시대를 이루는 일이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준행하는 노아의 가정

- 창 7:1~24 -

 

  인류 역사상 노아의 가정같이 하나님의 명령에 합심하여 순종하며 준행한 가정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롯의 가정도 소돔에서 구원을 받을 적에 합심이 안되므로 불행을 가져왔고, 아브라함의 가정도 하나님의 명령대로 완전히 준행치 못하므로 불행스러운 이스마엘이 나왔고, 이삭의 가정도 두 아들이 합심이 못되므로 불행스럽게 에서의 족속이 나왔고, 야곱의 가정에도 불행스러운 일이 많이 있어서 여러 가지로 하나님께 영광이 못되는 일이 있었지만 하나님은 끝까지 싸운 야곱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왕국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노아의 가정은 전 세계가 전멸되는 심판에서 세계의 어머니가 되는 가정을 이룬 것은 새 시대에 들어갈 촛대교회의 표징이 되는 일이라고 보게 된다. 이제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한 노아의 가정에서 행한 일을 본문대로 말하면 다음과 같다.

 

  1. 여호와 보시기에 의로운 가정 (1)

  하나님의 명령이 노아의 가정에 온지 120년 동안에 여러 가지로 어려운 문제가 많이 있지만 합심 단결하여 방주를 준비했다는 것은 의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시대 사람이 한 사람도 노아의 방주를 지지하고 협조한 자는 하나도 없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한 사람도 그 방주에 들어간 자가 없고 노아만 그 가정 식구를 데리고 들어간 것을 본다면 그 방주를 준비할 기간에 어려운 일이 많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 시대 사람들이 다 강포가 충만할 때라는 것을 창6:11~12에 말했다. 이러한 시대에서 그 가정이 합심이 안되었다면 노아는 도저히 방주를 준비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금일에 우리 촛대교회는 노아의 가정같이 합심된 교회가 되어야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롭게 준행할 수 있고 준행하는 일이 있어야만 큰 축복이 내릴 것이니 많은 사람이 모이고도 합심이 안 되는 것보다 적은 수라도 합심이 될 때에 완전한 촛대교회를 이룰 수가 있다.

 

  2. 순종하는 자를 다 구원해 주는 일에 전력을 두었다 (2~9)

  아무런 동물이라도 방주 안으로 순종해 들어오는 동물은 다 구원을 받도록 해 주었던 것이다. 노아의 방주는 사랑의 방주요, 은혜의 방주라고 볼 수 있다. 동물들이 아무런 수고한 일이 없지만 무조건 구원을 해 주었던 것이다. 그때에 아무리 방주에 수고한 일이 없다하여도 짐승과 같이 순종하고 무조건 뱃문을 닫기 전에 들어간 자라면 무조건 구원을 얻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방주와 같은 촛대교회에 들어오는 자는 단체적으로 보호를 받고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아무리 하나님을 공경하던 자라도 택민 보호의 진리를 믿지 않고 촛대교회에 들어오지 않는 자는 홍수 같이 내려오는 환란에 빠지게 될 것이요, 아무리 교회에 다니지 못하고 있던 자라도 말세 경고를 듣고 촛대교회에 들어와서 예언의 말씀을 그대로 읽고 듣고 지키는 자는 다같이 보호를 받고 새 시대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촛대교회를 세우기에 전력을 두는 자의 그 받을 영광은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이라고 본다.

 

  3. 큰 파도를 이긴 노아의 가정 (10~24)

  천하에 모든 인류와 동물은 큰 홍수에 파도를 못 이겨 전부 쓰러졌지만 하나님 명령대로 준행한 노아의 가정은 그 홍수의 부딪히는 파도의 피해를 당하지 않고 오히려 그 물결을 따라 자유롭게 움직이고 있는 가정이 되었다. 이것은 단지 하나님의 명령대로 순종했다는 조건에서 이루어진 축복이라고 보게 된다.

  사람이라는 것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하면서도 자기 고집을 가지고 앞으로 될 일을 말씀한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치 않는 인간들이라고 보게 된다. 우리 인간은 자기라는 것을 내세운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요, 지혜로우신 하나님의 명령대로 순종할 때에 인간이 볼 때는 어리석은 일 같으나 지나고 보면 지혜로운 일이 되는 것이다.

  아무리 홍수같이 환란이 온 세계를 덮는다 하여도 예언의 말씀을 믿고 준행하는 교회가 될 때에 홍수같이 밀려오는 환란은 오히려 촛대교회의 승리를 이루는 일이 되고 말 것이다. 지금은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하는 자가 더 수고롭고 시험이 많고 심지어 어려운 핍박도 있지만 물밀듯 내려오는 환란이 올 때는 방주와 같은 촛대교회는 반드시 안정처가 있게 되는 것이다(사33:20~24).

 

  결    론

  하나님께서 물로 심판할 때에 그 심판은 행위 심판이 아니고 복음 심판이라고 본다. 누구든지 방주 안에 들어가면 살고 못 들어가면 다 죽게 된다는 것은 앞으로 새 시대를 이룰 때에 짐승의 표를 받으면 죽고 안 받으면 산다는 심판과 대조가 된다.

  다시 말하면 노아 홍수 심판은 예언적이라면 종말의 예언의 말씀대로 인종 전멸의 심판과 재앙이 올 때에 촛대교회는 완전히 새 시대를 이루는 열매가 될 것이다.

  하나님 명령을 준행하면 살고 그 명령을 순종치 않으면 죽는다는 것이 노아 때나 주 재림기나 동일한 심판이 된다. 노아 홍수 심판 후에 지상에 새 시대를 이룰 수 있는 언약이 성립되었고 주 재림기에는 그 언약이 몽땅 이루어지는 것이다.

 

 

입으로 범죄치 않는 자의 기도

- 시 39:1~13 -

 

  하나님은 인생의 기도를 받아 응답하시기를 기뻐하시는 신이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생에게 자유를 주고 입으로 범죄가 없이 기도하는 자에게 응답을 내리어 그 입에 열매가 있게 하므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역사를 하시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나라에서 법을 세울 적에 그 헌법을 어기지 않는 신청이라야 헌법적인 접수를 하고 요구대로 준다는 것이 백성을 다스리는 옳은 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면 소위 죄인이 사는 세상에도 그 정치가 완전한 법에 따라서 시행하거든 하물며 하나님께서 거룩한 나라를 이루는 진리 운동에 있어서 입에 진리의 법을 지키지 않고 범죄 하는 자의 기도를 받을 수 없고 범죄치 않는 자의 기도라야 받아 주시는 것이다.

  이제 어떠한 자라야 입으로 범죄치 않느냐에 대하여 본문을 통하여 알 수 있다.

 

  1. 행위를 조심하는 자이다 (1)

  사람이라는 것은 조심하는 것이 없이 아무 사람 앞에서나 말을 함부로 한다는 것은 예를 들면 나는 새가 공중을 향하여 날아올라 가지 않고 그물을 찾아 들어간다면 날개가 있어도 그 새는 자유롭게 활동할 수가 없다.

  이와 같이 악인 앞에서도 입을 함부로 놀리는 것은 그 악인에게 걸려들 행동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악인이 내 앞에 있을 때에 내가 내 입에 자갈을 먹이리라고 하였다. 이 말씀은 말을 조심해서 하여야만 된다는 말이다.

 

  2. 마음이 뜨거운 묵상이 있어야 한다 (2~3)

  사람이라는 것은 아무리 할 말이 있어도 중심에 깊은 묵상이 있어서 그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고 반성해 보는 일이 있어야 한다.  왜냐 하면 사람은 자기의 부족을 모르기 쉬운 인간이므로 내가 이 말을 하므로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을 깊이 묵상할 때에 하나님은 그 묵상을 보시고 그 입에 열매가 있도록 역사를 내리시는 것이다.

 

  3. 인간의 모든 일이 허사라는 것을 깨닫는 마음이 있어야 된다 (5~6)

  사람이라는 것은 헛된 일에 동참하여 말하게 된다면 그 말은 다 실수가 되고 말 것이다. 인생이 아무리 인간 방법으로 튼튼히 선다 하여도 결국은 허사가 되는 것이다. 항상 기도하는 사람은 헛된 일이 무엇인지를 알고 모든 일을 진행해 나갈 때에 입에 열매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

 

  4. 주께만 소망을 두는 자가 되어야 한다 (7~9)

  소망을 주님께만 두고 나가는 자가 된다면 모든 일을 주님께서 역사해 주기 때문에 죄에 빠지지 않도록 악인에게 욕을 당하지 않도록 역사해 주시므로 입에 실수가 없이 이기는 자가 되게 하신다.

 

  5. 기도로 승리하게 됨 (10~13)

  아무리 징계를 받는 자라도 입으로 범죄 하지 않고 기도할 때에 오히려 악의 세력은 소멸되게 하고 당신의 사람으로서 승리하므로 어려운 일을 당한 것이 오히려 유익이 되게 하신다. 그러므로 완전 승리는 입으로 범죄 하지 않고 기도하는 자에게 있다는 것을 본문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아무리 악의 세력이 강하다 하여도 입으로 범죄치 않고 기도하는 사람 앞에 정복을 당하게 될 것이다.

 

  결    론

  완전한 승리의 개가를 부를 수 있는 인격은 입으로 범죄치 않고 기도하는 사람에게 있다는 것을 시40:1~3에 말했다.

  우리 주님께서도 십자가에서 한마디 말씀도 입을 열지 않고, 이 무리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하는 말씀과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시나이까, 내가 심히 목마르다, 나와 같이 낙원에 가리라, 저가 아들이니이다,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다 이루었다 하는 말씀 외에는 말하지 않으므로 주님의 기도는 세계 인류를 구원하는 제사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괴로워도 억울해도 입으로 범죄치 않고 기도한 자는 반드시 승리하게 될 것이다.

 

 

촛대 교회의 수고와 양육

- 계 12:2~6, 13~17 -

 

  하나님께서 사도 요한에게 계시를 보일 적에 기독교 종말에 남은 교회의 형편을 해를 입은 여자로 보여 주었다. 여자라는 것은 많은 열매를 내되 두 가지 사람을 낼 수 있다. 한 어머니가 자녀를 낳아도 왕권 받을 자와 시민권 받을 자를 낳을 수 있다. 아무리 한 어머니 배에서 한날 한시에 난 에서와 야곱이라도 야곱은 왕권을 받고 에서는 받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구약 시대도 시온을 아내라고 하였고 당신을 남편이라고 하시며 신약 시대에도 신령한 교회를 신부라고 했고 그리스도를 신랑이라고 한 것은 구약 교회나 신약 교회나 그 교회를 통하여 영원한 왕국을 이룰 인격자를 내어서 완전한 성도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목적했기 때문이다.

 

  1. 촛대 교회의 수고 (2~5)

  첫째 : 수고해야 될 이유(2~3)

  수고라는 것은 죄값으로 여자가 해산을 하는 것도 있고 또는 죄와 싸우기 위하여 행하는 수고도 있으니 첫째아담의 범죄로 헛된 수고가 왔고 둘째아담이 승리하므로 의를 이루기 위한 수고를 할 수 있는 일이 시작되었다.

  의라는 것은 믿음의 의도 있고 행함의 의도 있으니 믿음의 의는 그리스도의 의를 믿으므로 말미암아 시민권을 받는 의요 행함으로 받는 의는 왕권을 받는 의라고 본다. 그러므로 계19:8에 깨끗한 세마포는 성도의 의로운 행실이라고 하였고 계7:14의 흰옷은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다고 하였다.

  이제 해를 입은 여자가 수고하는 모양이 해산하는 여인같이 부르짖는 모양으로 보여진 것은 주 재림 전에 끝까지 마귀의 권세와 싸우는 광경을 보여주었다. 왜냐 하면 은혜시대에는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씨를 뿌리는 역사를 할 때 무조건 자라나게 하는 때이지만 기독교 종말에는 해산의 수고를 다하지 않고는 도저히 붉은 용의 권세를 이길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촛대교회는 믿음으로 은혜를 받는 때가 아니고 은혜 받은 자를 시험해 보는 시련기가 오므로 해산의 수고를 해야만 마귀 권세를 이기는 종이 나오게 되므로 변화성도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둘째 : 수고한 열매는 남은 종과 남은 교회를 이루므로 붉은 용의 피해를 당치 않는 역사가 있으므로 주님 올 때까지 남은 종으로 남은 교회를 지키고 나가게 되므로써 재림의 주를 영접하게 되는 것이다(4~5).

 

  2. 촛대 교회의 양육 (6, 13~17)

  첫째 : 양육할 이유 (6, 13)

  주 재림 전에는 촛대교회가 널리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하게 된다(계11:3~4). 이 복음이라는 것은 다시 예언하는 복음이다. 이루어진 십자가 부활을 증거하므로 중생의 역사가 일어나서 천국에 들어가는 역사가 있었고, 촛대교회가 다시 예언하는 일이 있으므로 증거하는 종은 권세를 받아 원수를 이기고 나가면서 예언의 경고를 하다가 재림의 주를 맞이하여 들림을 받게 되고, 예언의 말씀을 듣고 촛대교회로 모여든 양떼는 남은 교회를 이루어 양육을 받는 것은 예언의 말씀을 믿고 순종했기 때문에 말씀대로 예비처에 양육을 받게 된다.

  이때는 세상을 마귀에게 맡겨 버리고 어느 나라나 예비처 안에만 보호하는 일이 있게 된다. 왜냐 하면 13장과 같이 누구든지 짐승 앞에 절하지 아니하면 죽이는 일이 있고 표를 받은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는 환란이 3년 반 동안 있게 될 때에 촛대교회 외에는 다 환란에 떨어져서 원수의 칼에 죽는 자도 있고 그 짐승 앞에 절하고 표를 받는 자도 있다.

  그러나 이때에 죽는 사람은 촛대교회를 무시하고 그 교회에서 증거하는 예언을 믿고 순종치 않았으므로 재림의 주를 맞이할 권세도 못 받고 또는 보호의 진리를 믿지 않았으므로 보호도 받지 못하고 원수에게 피해를 당하는 것이다.

  촛대교회를 보호하는 이유는 첫째가 예언의 말씀을 믿고 순종했다는 조건이요, 둘째는 끝까지 싸우고 승리한 변화성도의 육적 혈통의 자녀와 영적 믿음의 자녀들이므로 그 남은 교회를 보호하여 양육하는 것은 들림 받은 종들이 지상 강림하여 세상을 통치할 때에 그들을 영접하여 모시고 왕으로 받들며 함께 지상 왕국의 영광을 누릴 백성이 된다. 다시 말하면 변화성도의 의로운 씨라고 보게 된다.

 

  둘째 : 양육하는 방침 (14~17)

  하나님께서 남은 교회에 큰 힘을 주어서 조금도 겁내지 않고 용기를 내게 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따라가던 종이 들림 받는 것을 볼 때 그 종들의 증거하던 복음이 더 확실히 믿어지고 또는 그 말씀대로 순종한다는 마음으로 단체가 된다.

  마치 예수님께서 승천할 때에 따라가던 사람들이 합심하여 다락방에 모여 합심 기도하므로 완전한 교회가 이루어지듯이 들림 받는 종의 인도를 따라가던 무리들이 완전한 단체를 이루어 예언대로 지켜 나갈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절대적으로 보호하므로 물같이 내려 미는 환란이 그곳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되 단12:1과 같이 시34:7과 같이 천군들이 적군을 막아 주므로 촛대교회는 환란 가운데 평안히 양육을 받게 된다.

  이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촛대교회를 위하여 맹렬히 역사 하기 때문이다. 전 3년 반에는 권세의 종을 들어서 역사할 때에 촛대교회로써 종들을 전부 결합시키는 일이 있게 되는 동시에 많은 사람을 깨우쳐 촛대교회가 왕성하게 되는 것이요, 후 3년 반에는 이미 세워진 촛대교회를 예비처로 인도하여 원수의 피해를 당하지 않도록 양육하는 일에 천사를 동원하여 역사하는 것이다.

 

  결    론

  가장 복된 교회는 촛대교회라고 본다. 왜냐 하면 그 교회로 말미암아 완전한 지상왕국을 이루기 때문이다. 가장 복된 종도 복된 가정도 다 촛대교회에 있는 자들일 것이다. 이들은 영혼만 구원받는 교회보다는 세 가지 축복이 더 있다고 본다.

  첫째 : 왕권의 축복,

  둘째 : 가족적인 축복,

  셋째 : 자손 만대의 축복이다.

  그러므로 해산의 수고를 다하는 광경을 보여준 동시에 보좌 앞으로 올라가는 광경과 예비처에 양육 받는 광경을 계시록 12장에 보여준 것이다.

 

 

지혜로 낙을 삼는 자가 되자

- 잠 10:23 -

 

  인간들이 즐거운 생활을 하기를 원하는 것은 하나님께로 받은 인격이라고 본다. 그러나 인간들이 무엇이 즐거운 일인 줄 모르고 이리저리 끌리는 생활에서 방황하는 것은 지혜로 즐거움을 삼는 생활이 못되는 원인이라고 보게 된다. 그러므로 지혜로 즐거움을 삼는 생활을 할 때에 지혜를 주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생활로 들어가게 된다.

  이제 지혜로 즐거움을 삼는 사람의 그 가치를 성서를 통하여서 알 수 있다.

 

  1. 통치권을 가지게 된다 (왕상3:9~13)

  무력으로 통치하려는 자는 야수적인 인격이요, 자기의 권리로써 통치하려는 자는 한 우상적인 사람이 되고 말 것이로되 지혜를 받아 통치하는 자는 하나님의 대행자로서 세계를 통일할 수 있는 것이다. 솔로몬이 비록 어린 소년이지만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므로 역사적인 훌륭한 통치자가 된 것은 앞으로 예언적인 역사라고 본다.

  지금 인류 종말에 세계 통일은 완전한 지혜를 받은 자가 되어야 된다고 사11:1이하에 가르쳤다. 지금 과학적 지혜와 지식을 자랑하는 것은 오히려 심판의 대상자가 된다고 본다(옵1:8).

  인생의 최고 인격은 하나님의 지혜를 즐거워하는 자라고 보게 된다. 언제나 하나님은 그 시대 시대에 대표적인 사람에게 초인간적인 지혜를 주어서 그 시대를 좌우할 수 있는 지도자를 삼은 것이다. 인간이 볼 때는 어리석은 자 같으나 지혜를 주어서 쓸 때에 하나님을 자랑하는 일이 있게 된 것이다.

 

  2. 미래의 비밀을 바로 알게 되므로 많은 사람을 바로 가르칠 수 있다 (단12:3, 10, 11:35)

  가장 인간 중에도 열매를 많이 맺을 자는 종말의 진리를 바로 알아서 가르치는 자라고 보게 된다. 왜냐 하면 앞으로 살길은 종말의 비밀을 바로 알아서 가르치는 종이 아니고는 남을 자가 없기 때문이다. 이날까지는 인간 지혜를 가진 자도 일시적인 지도자의 생활을 했지만 진노의 날이 올 때는 다 어리석은 자가 되고 말 것이다(사19:11~12).

  인류 역사상 가장 지혜를 즐거워해야 할 때는 이 때라고 본다. 그러므로 지혜를 받은 다니엘은 인간 종말의 환란은 북방으로 오는데 그 세력은 궤휼적이며 침략적이며 무신론적이며 최후 발악적인 행동을 하다가 망할 것을 말하면서 그때에 지혜로운 자가 비밀을 알고 북방 세력에게 피해를 당치 않고 많은 사람을 옳은 곳으로 인도하므로 별과 같이 빛나는 자가 된다고 말했다.

  주님께서는 다시 오실 때 지혜로운 종으로 때를 따라 그 집 사람들에게 양식을 나눠주는 자에게는 모든 소유를 다 맡긴다고 한 것을 보면 가장 복 있는 사람은 지혜를 받아 종말의 진리를 바로 가르치는 사람이라고 보게 된다.

 

  3. 완전 승리의 열매를 맺게 됨 (사11:3~5)

  어리석은 북방 세력은 하나님을 모르고 자기 지혜로 국경이 넓어졌고 모든 재물을 얻었다고 하는 것은 예를 들면 도끼로 나무를 찍을 적에 도끼가 자기가 힘이 있다고 자랑하는 것과 일반이라고 말했다(사10:12~15).

  금일에 잠깐동안 북방 세력을 들어서 부패한 세상을 치는 환란이 오게 할 때에 북방 세력은 자기네가 세계를 통일한다고 떠들고 있는 것은 어리석은 자 중에 하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지혜와 총명의 신을 받은 종을 통하여 원수의 세력을 몽땅 없이할 것을 11장에 가르쳐 주는 동시에 여호와를 아는 지식으로 통일된 새 시대가 올 것을 가르쳤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악의 세력을 들어 쓸 적에 어리석은 인간들은 하나님을 훼방하고 하나님이 없다고까지 하는 자리에 들어가도록 하였다가 홀연히 여호와 나타날 때에 지혜로운 자가 승리하게 하는 것이다(미7:10). 앞으로 가장 강하고도 위대한 인격은 하늘의 지혜를 받은 자로서 완전 승리를 이루므로 이 땅은 다시 전쟁이 없는 시대를 이루는 것이다.

 

  결    론

  인간의 최후의 미와 인격은 지혜를 즐거워하는 생활에 있다고 본다. 왜냐 하면 지혜라는 것은 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지혜를 주어 자기의 비밀을 알게도 하고 또는 주권을 주기도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지혜를 받은 자 밖에는 아무도 하나님의 일을 순종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너무나 위대한 신이시니 작은 인생을 들어 쓸 때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아서 순종하는 사람을 만들기 위한 목적이니 우리 사람은 지혜를 즐거워하는 사람이 될 때에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아 순종하는 것 뿐이요, 그 밖에의 모든 역사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이다.

 

 

주의 권한과 종된 자의 할 일

- 행 1:6~11 -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은 그 역사의 권한을 바로 알고 일할 때에 모든 일은 질서 있게 되어지는 것이다. 주님께서 승천할 때에 때와 권한에 대하여 말씀한 것은 그 제자들이 필요 없는 일에 간섭을 하기 때문에 말씀한 것이다. 하나님의 종이 할 일은 증인이 될 것 뿐이라는 것이다.

  이제 하나님의 권한과 종 된 자의 할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의의를 알아야 한다.

 

  1. 하나님의 권한 (6~7)

  예를 든다면 어떤 주인이 품꾼을 부를 때에 그 시간을 정하는 것은 주인의 자유에 있는 것이니 품꾼은 극력껏 맡은 일에 주인의 요구대로 일할 것 뿐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어느 종이나 들어 쓸 적에 예정 아래에서 한계를 정하여 일하게 한 것이니 사도들이 알 바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신은 어느 종이나 역사 하게 할 때에 그 기한은 알려주지 않고 마음 가운데 재림의 주를 갈망하게끔 역사한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한 종을 들어서만 그 사명을 하는 것이 아니고 그 종에게 어느 때까지 세상에서 일한다는 기한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가 할 사명을 할 때에 때와 기한에 있어서는 조금도 알아보려고 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목적이 그 기한 안에 수를 채우기 위해서는 모략적인 방법을 쓰되 그 종의 마음에 기한이 급했다는 마음이 생기게 하신다. 이것은 어느 종이나 자기가 일할 기간을 주었으므로 그 기간 안에 자기 할 일을 하라는 뜻에서 때가 임박한 줄 생각이 나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왕국을 기다리는 심정이 불탔으므로 “이스라엘을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 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선지를 통하여 묵시의 글을 기록하게 할 때에 목적이 이스라엘의 회복을 목적하고 말한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 육적 이스라엘이 그리스도의 왕국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말할 때에 이스라엘 말기에 바벨론에게 먹힘을 당하여 황폐화 되었다가 회복된 것 같이 그리스도의 왕국이 이루어질 때에도 극도로 교회가 부패하여 바벨적인 세력에게 밟혀서 인간의 힘으로 그 세력에서 벗어날 수가 없게 될 때에 그리스도의 왕국이 이루어지는 심판이 올 것을 말씀했다.

  그런데 이렇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 세계에 전파되어 십자가의 피로 산 백성이 완전한 그리스도의 왕국을 이룰 수 있게 되는 것은 세계적인 역사가 있게 될 것과 세계적인 환란이 북방으로 올 것과 세계적인 심판에서 구원받을 복음을 전하는 일이 다시 있은 후에 그 복음을 믿고 순종하는 자는 지상 왕국의 축복을 받게 되고 순종치 않는 자는 바벨론이 망할 때에 같이 망한다는 것이다(계10:7, 11:15).

  둘째 : 잃었던 지상 축복을 다시 찾는 일은 부활 성도가 이루는 것이 아니고 주 재림시에 남은 종이 될 자와 백성이 찾을 것을 말할 때에 선지서 전체는 부활 성도에게 해당되는 말이 아니고 변화 성도에게 해당된 말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너희가 알 바가 아니라고 말씀했던 것이다. 사도의 사명은 친히 주님의 부활을 본 자이므로 이것을 세계 만방에 전할 것 뿐이라는 것이다.

 

  2. 종된 자의 할 일 (8~11)

  첫째 : 성신을 받아야 할 의무가 있다.

하나님의 종이 성신 권능을 받지 않고 일하려는 것은 성령의 역사를 내리는 주님과에 대적이 되는 동시에 성신을 근심케 하는 일이 된다. 왜냐 하면 은혜시대의 법을 어기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받아야 한다고 명령했던 것이다(눅24:49). 왜냐 하면 성신을 받기까지 한 곳에 모여서 합심 기도하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한데 모여 전혀 기도에 힘썼던 것이다(14).

  하나님의 종들은 종 된 자격을 가진 것이 아니고 성신 권능을 받으므로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생각하고 해산의 수고를 다하는 것이 종 된 자의 먼저 할 일이라고 본다. 자기가 성신 권능을 받지도 못하고 나선다는 것은 자칭 유대인이 되고 말 것이다.

  둘째 : 순교적인 생활이 있어야 한다.

증인이라는 것은 순교가 없이 있을 수 없다. 왜냐 하면 우상이 가득한 나라에 들어가 그 나라의 역사적인 종교를 반대하고 역사적인 모든 풍속을 반대하고 예수만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는 것은 어디를 가나 박해를 받을 일이 아닐 수가 없다. 또는 유대 본국에 과거 종교 제도를 다 없애고 예수만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증거한다는 것은 자기 본국에서도 박해를 받을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유대인에게 핍박을 받았고 이방인에게도 핍박을 받았던 것이다. 기독교 역사는 증인된 생활에 피를 뿌린 종교라는 것을 역사가 증명하는 사실이다.

  셋째 : 승천한 그대로 오시는 예수님을 맞이하는 종이 할 일(9~11).

계시록을 보면 주님 다시 올 때는 예언을 지키는 자가 복 있다고 계22:7에 말씀했다. 그러면 예언을 증거하는 종도 큰 난국을 당하게 될 것이다. 왜냐 하면 하나님께서 붉은 짐승에게 용의 큰 권세를 주어서 세계를 침투하게 할 때에 그 짐승의 표를 받고 머리를 숙이면 멸망을 받는다는 증거를 해야만 될 것이다.

  왜냐 하면 계14:9이하를 보면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그도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라고 한 것을 보면 진노의 날에 양떼를 살리는 종이 되려면 예언을 증거할 때에 붉은 짐승의 환란에서 계11:6이하와 같이 증거하는 자라야 양떼를 살리는 종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말세 종은 권세를 받아야만 된다는 것이다.

 

  결    론

  이스라엘의 회복이라는 것은 말세 증인이 증거를 마친 다음에 죽은 자는 순교자라야 부활하고 남은 자는 예언을 증거하던 자라야 들림을 받아 그리스도의 왕국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데는 지상 강림할 때에 바벨론이 불타는 동시에 백마 탄 군대가 짐승의 군대를 없이 하므로 완전한 이스라엘적인 다윗왕국이 지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계19:19~20:4).

 

 

 

 장 년 공 과 편 - 예수에 대한 이적의 증거

 

제1과  하나님의 아들된 증거

- 막 1:21~28,  요절:24 -

 

  서    론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적에 언제나 말씀이 계신 동시에 그 말씀을 확증하는 이적이 따르게 한 것이다. 오늘은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확증하는 이적이 나타난 일을 공부한다.

  우리가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하늘에서 천사가 와서 마리아와 요셉에게도 현몽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거했고(눅1:32), 마3:17에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나님께서 증거하셨고 마17:5에도 증거했다.

  그러나 오늘은 더러운 귀신이 쫓겨가면서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증거한 일은 다음과 같다.

 

  1대지 : 마귀를 멸하려 왔다는 증거 (24상반절)

  예수는 세상에 오신 목적이 마귀를 멸하려 왔다는 증거를 하게 되었다. 이제 예수께서 마귀를 멸하는 일에 대하여 세 가지 요소가 있다.

  첫째 : 십자가의 승리는 개인적인 마음속에 있는 마귀를 멸하여 없애는 능력이 있다 (엡2:1~5)

  누구나 다 공중에 권세 잡은 마귀의 지배를 받으므로 본질상 진노의 자녀 행동을 하던 자들이 십자가를 믿을 때에 그 역사가 완전히 없어지는 일이 있게 되므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생활을 하게 된다. 아무리 애써도 인간의 힘으로는 마음 가운데 있는 더러운 정욕의 사단을 멸할 자는 전혀 없고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승리의 능력의 역사로만이 없어진다는 것은 기독교의 신앙의 산 체험이 되는 일이다(롬8:13).

  둘째 : 촛대교회 안에 마귀가 소멸됨 (계11:4~5)

  지금은 교회 안에 쭉정과 가라지와 알곡이 섞여 있다고 본다. 그러나 주 재림시 재앙의 날에 남은 교회가 되는 촛대교회 안에는 조금도 마귀의 역사를 하는 자들이 있을 수 없고 사단의 세력이 전부 소멸되는 권세 역사가 같이 하므로 그 교회는 완전히 승리하는 교회로 남은 교회가 된다(계12:13).

   셋째 : 성산에 마귀 역사가 없게 된다 (계20:1~3)

  지금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다 같이 세상에 살면서 오히려 마귀 자식들이 하나님의 자녀를 괴롭히지만 천년왕국의 성산이 이루어질 때는 마귀 역사를 완전히 세상에서 없이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는 것은 개인적인 구원을 목적할 때는 개인 속에서 역사하던 마귀를 멸하고 단체적인 교회를 구원할 때는 교회 안에 마귀를 멸하고 세계적인 평화왕국이 올 때는 세계적으로 마귀를 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귀신은 우리를 멸하려 왔나이까 했던 것이다.

 

  2대지 : 하나님의 거룩한 아들인 것을 증거함 (24하반절)

  아무리 더러운 귀신이라도 예수님을 거룩한 자라고 증거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 예수는 거룩한 몸이다.

  요일5:6을 보면 물과 피로 임한 자라고 하였다. 사람들은 다 그 피가 더러운 사단의 질이 있는 죄악의 피로 이루어진 몸이지만, 예수의 몸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룩한 물과 피로 임한 몸이므로 마귀도 예수를 볼 때에 자기와 상관이 없는 거룩한 자라고 했던 것이다.

  둘째 : 영적으로 거룩한 자이다.

인간의 영들은 다 마귀의 권세를 벗어날 수가 없는 죽은 영들이지만 예수님은 거룩한 아들의 영으로 세상에 보내심을 받아 온 것이다(요17:5~8). 그러므로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고 한 것이다.

 

  3대지 : 아들된 권세로 귀신을 쫓아냄 (25~28)

  언제나 마귀는 조금도 용납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도 귀신이 말하는 것을 허락지 않고 권세로 명령할 때에 귀신이 나갔던 것이다. 만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면 귀신은 순종할 수 없을 것이다. 귀신이라는 것은 범죄한 자에게만 침노할 권리가 있지만 죄가 없는 하나님의 아들 앞에서 떨면서 물러갔던 것이다. 지금도 예수를 믿고 거룩함을 받은 자 앞에는 귀신은 물러가게 되는 것이다(행16:17~18).

 

  결    론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바로 아는 데서부터 인생은 살 길이 있다. 왜냐 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온 것은 억울하게 마귀의 미혹을 받고 죄를 범하므로 죄의 종이 되어 마귀 권세를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오셨으므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믿지 않는 자는 영생이 없는 것이다(요일5:12~13).

 

 

제2과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증거

- 막 2:1~12,  요절:10 -

 

  서    론

  인류 역사상 많은 선생도 있고 또는 소위 성인이라는 이름도 가진 자가 있지만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사람은 예수님밖에 없다는 것은 확실한 증거가 있는 일이다.

  오늘은 예수께서 죄를 사하는 증거가 있는 일에 대하여 본문 성경에서 알 수 있다.

 

  1대지 : 믿음을 보고 죄를 사하심 (1~5)

  믿음이라는 것은 도덕적 행위를 초월한 의로운 행동이라고 본다. 친구의 병을 고치겠다고 중풍 병자를 네 사람이 메고 먼길을 왔다는 것도 또는 지붕에 올라가서 지붕을 뜯고 중풍병자를 예수님 앞에 상에다 달아 내렸다는 것은 그 믿음을 의로운 행동으로 보았던 것이다. 믿음이라는 것은 완전한 대상자를 의심없이 믿는 동시에 믿음으로 행동을 개시하게 되는 것이 있게 된다. 왜냐 하면 자기가 할 수 없는 것을 해 줄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신앙의 대상자로 삼을 적에 움직여진다는 것은 도덕을 초월한 행동이라고 본다.

  도덕이라는 것은 완전한 자에게 대하여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의를 세우기 위하여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도덕상이라는 인격의 행동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행동으로는 죄를 사한다는 응답을 주님께 받을 수 없고 중심에서 꼭 살려 줄줄 믿는 신앙 양심에서 움직여질 적에 사죄의 응답이 오는 것이다.

 

  2대지 : 중심에 잘못된 생각을 아시는 예수님 (6~9)

  소위 종교인이라 하는 서기관들이 자기만 옳다는 교만에서 눈이 어두워지므로 하나님의 아들을 모르고 중심에 예수님을 참람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고 하는 말이 사람이 볼 때는 가장 하나님을 존경하는 정통 신앙을 가진 자 같으나 실지는 자기 의를 세우려는 자이므로 주님은 그들을 향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네 죄를 사함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겠다’고 말씀하였다.

  금일에도 종교인들이 자기가 가장 옳다는 생각에서 믿음을 떠난 양심을 가지고 사랑을 떠난 마음에서 남을 함부로 판단하는 자는 성신을 노엽게 하는 멸망의 자식이 되기 쉽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서기관보다도 그 병자를 고쳐보려고 믿음으로 온 그들에게 하나같이 병을 고쳐 보냈던 것이다.

  언제나 교만한 종교인을 볼 때에는 책망을 했고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을 따라오면서 구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도 물리치지 않고 다 죄를 사하여 주며 완전한 사람이 되도록 하는 이적을 행했던 것이다.

 

  3대지 :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 알게 하심 (10~12)

  죄를 사한다는 것은 아무런 사람이나 말할 수 없는 일이다. 오직 만민의 죄를 걸머지고 세상에 나신 예수님밖에는 내가 네 죄를 사하노라고 할 자는 전혀 없다. 아무리 예수님이 내가 네 죄를 사하노라 하였다 하더라도 증거가 없다면 믿을 수 없는 일이로되 중풍병자가 즉시 일어나서 곧 상을 가지고 돌아간 일을 볼 때 모든 사람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는 말이 우리가 이런 일은 처음 본다고 했던 것이다.

  지금도 우리 기독교에서 죄를 사함 받은 증거가 없다면 생명의 종교라고 볼 수 없을 것이로되 지금도 확실한 증거가 있으므로써 예수님의 속죄 도리를 널리 전파하기 위하여 목숨을 바치기까지 싸워 온 것이다.

 

  결    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게 하는데는 친히 말씀으로서 십자가의 도를 증거하는 것만이 아니고 과연 여러 가지 이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도록 하는데는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모든 행한 이적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전하는 일에 큰 증거가 되게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못박히기 전이라도 예수님은 속죄권이 있다는 것을 세상에 알도록끔 이적으로 증거를 보여준 것이다.

 

 

제3과  안식일에 대한 증거

- 막 3:1~6,  요절:4 -

 

  서    론

  하나님께서 언제나 법을 주신 것은 복을 주기 위한 목적이요, 절대로 사람을 괴롭히는 것이 아니다. 안식일을 정해주신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을 하면서 복을 받으라는 것이다. 사람이 수고하여야 먹게 된 것은 죄 값이니 당신의 자녀들이 타락을 했지만 이레에 하루라도 헛된 수고를 하지 말고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면서 복을 받으라는 것이 안식일의 뜻이다.

  그런데 외식하는 유대인들은 이 날을 하나님을 위하여 봉사하는 날로 아는 것보다도 그날 하루를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하루 편히 쉰다는 것을 하나님을 공경하는데 전력을 둔다는 것보다도 이것을 가지고 자기네 의를 내 세우는데 정신을 두고 예수님을 책잡고자 할 때에 이적으로써 안식일에 대한 증거를 보여준 것이다.

 

  1대지 : 하나님의 날을 마음으로 더럽히는 죄 (1~2)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송사하려고 엿본다는 것은 마음으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죄라고 본다. 왜냐 하면 하나님은 사랑의 신이신데 혹 형제의 부족이 있다 하여도 용서하는 마음으로 그를 위하여 기도하면서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그 기도나 예배를 받을 수가 없을 것이다.

  지금도 어떤 사람이 참된 하나님의 종을 해코자하는 마음을 가진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예배를 드려도 제단을 더럽히는 사단의 자식이므로 하나님은 오히려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자 보다도 더 가증히 보는 것이다. 왜냐 하면 하나님의 교회를 더럽히는 자이기 때문이다.

  금일에 소위 하나님의 종이라는 자들이 동역자의 흠을 잡아 보려고 하는 마음이 있는 자가 강단에 선다면 이것은 미운 물건이 강단에 섰으므로 주님이 노여워 할 일이라고 본다. 주님께서 이러한 자들을 용납할 수가 없을 것이다.

 

  2대지 :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일을 기뻐하시는 예수님 (3~4)

  주님께서 원하는 것은 안식일은 남을 살리기 위하여 일하는 날이라는 것을 말씀하셨다. 만일 안식일로 말미암아 사람을 해치는 일이 있다면 이것은 안식일 날 큰 죄를 범하는 일이라고 본다.

  예수님께서 손이 마른 사람의 손을 회복시키는 일은 안식일에 할 일이라고 본다. 지금 양떼들이 마음이 마를 대로 말랐는데 그 심령을 소성케하는 일이 없다면 이것은 오히려 목자에게 큰 죄가 될 것이다. 죄 중에 큰 죄는 심령이 마른 양떼를 안식일 날 소성을 시키지 못한다는 것이 목회자의 큰 죄라고 알아야 할 것이다. 왜냐 하면 하나님께서 이 날을 주신 것은 메마른 심령들을 소성시키기 위하여 주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주님이 부활하신 날을 안식일로 지키는 것은 예수님께서 죽은 영혼들을 중생시키기 위하여 부활하신 날이니 우리 중생받은 영적 이스라엘은 주일을 안식일로 지키는 것이 마땅하다고 본다. 왜냐 하면 아담으로부터 예수님이 부활하기까지는 중생의 역사가 없고 생령의 계통인 사람들이 안식일을 지켰지만 우리 중생받은 사람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을 축복 받는 성일로 지키는 것이 마땅하다고 본다.

 

  3대지 : 주의 노하실 일과 긍휼 (5~6)

  주님이 가장 노하실 일은 사랑 떠난 거짓 선지가 하는 일이요, 가장 불쌍히 볼 일은 자유를 잃어버린 자라고 볼 수 있다. 소위 바리새교인들은 헤롯당과 합세하여 안식일 날 손 마른 사람을 회복시켰다는 것으로 어떻게 하여야 예수를 죽일꼬 하는 의논을 하게 되었다. 이것이 거짓 선지의 행동이다. 거짓선지라는 것은 자기의 주권을 위하여 싸우는 자라고 보게 된다.

  주님께서 손이 말라 일생 동안 아무 일도 못하는 사람을 볼 때 그냥 보낼 수가 없어서 미움을 받으시면서도 자유롭게 일할 수 있는 손을 만들어 주었다. 지금도 마음에는 원이로되 일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면 일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역사해 주는 주님이시다.

  이와 같이 우리는 우리의 주권을 세우려는 마음을 버리고 자유롭게 활동하지 못하는 사람을 자유롭게 활동하도록 해주는 것을 목적할 때에 안식일에 큰 축복이 올 것이다.

 

  결    론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주신 것은 사명을 맡긴 날이라고 본다.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고 만물을 내신 것은 사람에게 일할 수 있는 사명을 맡기기 위한 목적이었다. 그러므로 엿새 동안은 하나님께서 일하시고 이레 되는 날 사람을 축복한 것은 사명을 맡긴 날이라고 본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않으므로 만물을 바로 다스릴 수 있는 사명을 빼앗기고 오히려 사람이 땀을 흘려야 먹게 된 것은 축복이 떠난 것인데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죄를 걸머지고 안식일 날에 무덤에 있다가 이레중 첫날에 부활한 것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인생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는 동시에 사명을 맡긴 날이다(눅24:44~49).

  그러므로 우리는 주일을 이 몸이 쉬는 날로 지키는 것보다도 사명을 위하여 전적으로 일하는 날로 지켜야 할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안식일에 사람을 살리는 일을 원치 않는다면 역사를 내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를 강하게 내리는 것은 살리기 위하여 일하라는 증거이다.

 

 

제4과  구원의 증거

- 막 4:35~41,  요절:39 -

 

  서    론

  주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 이적을 행하신 것은 증거를 보여준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공과는 무서운 풍랑에서 제자들의 몸을 구원해 준 것은 앞으로 오는 무서운 환란에서 당신의 자녀를 구원해 줄 증거라고 본다.

 

  1대지 : 날이 저물 때 일어난 풍랑 (35~37)

  아침에 솟아오른 태양은 빛을 가리우고 도저히 사방을 바라볼 때에 내다 볼 수 없는 캄캄한 흑암이 덮인 가운데서 갑자기 풍랑이 일어나서 도저히 배를 타고 가던 그 배는 어찌할 수 없이 물에 잠기게 되었다. 인간이 볼 때는 불행스러운 일인 동시에 도저히 살길이 막막한 가운데 들어가게 되었다. 이 때는 초인간적인 역사가 없다면 꼼짝 못하고 다 전멸당하게 된 자리에서 주님은 이 풍랑을 모르는 듯이 주무시고 있었다.

  이와 같이 인간 종말에도 어두운 흑암이 덮인 세상이 올 것이고 홀연히 풍랑이 일어나듯이 무서운 환란이 올 것을 성경은 가르쳤다(사17:12~14, 사8:7~8, 단11:40~43 합3:15~16). 그러나 이 환란은 주님께서 세상에 나타날 때라는 것을 가르쳤다. 풍랑이 일어날 때까지는 주님께서 잠잠히 계시나 인력으로 어찌할 수 없을 때에 주님은 일어나시는 것이다(사8:8, 17:13, 33:3, 10, 42:14).

 

  2대지 : 부르짖는 일이 있어야 한다 (38)

  (참고성구 사 24:14, 26:16~17, 30:19, 욜 2:17, 미 4:10)

  하나님께서는 인생보다 먼저 그 사정을 아시지만 환란과 고통이 올 때에 부르짖는 자라야 구원한다는 것이 심판의 다림줄의 법이다. 왜냐 하면 주님께서는 어려운 일을 당치 않게 하는 것이 주의 뜻이 아니고 어려운 일이 올 때에 부르짖는 자를 구원해 주므로써 하나님의 능력을 더 감사하게 하며 하나님밖에는 없다는 생각으로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이다.

  주님께서 함께 하는 배도 풍랑을 만나서 물에 가라앉게 된 것은 주님께서 영광을 나타낼 때가 온 증거이다. 그러므로 말세를 당한 우리는 앞으로 아무런 풍랑이 일어나도 사명을 가진 종들이 부르짖을 적에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일이 나타날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사24:16).

 

  3대지 :풍랑을 잔잔케 하심 (39~41)

  예수님께서 바람을 꾸짖고 바다야 잠잠하라 고요하라 할 때에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졌다. 그 때에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는 말씀을 하셨다.

  인생이 무서워하는 것이 있다고 해서 주님은 버리는 것이 아니요, 믿음이 없다고 해서 택한 자를 버리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두려워하고 겁을 내며 부르짖는 자를 붙들어 주며 도와주는 것이다(사41:10~13). 주님께서 원하는 것은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원하는 것보다도 두려워하면서라도 부르짖는 자를 향하여 역사하기 때문이다(사35:3~4).

  인생이라는 것은 도저히 자기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모든 선지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두려워 말라, 겁내지 말라, 나를 바라 보라, 의지하라, 끝까지 기다리라, 부르짖으며 나를 찾으라 하는 말씀을 많이 하신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을 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미워하는 것은 자신이 있다는 자와 재앙이 와도 나는 문제가 없다는 자와 또는 아무런 피해가 오더라도 거기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보다도 자기 방법으로 해 보려는 사람을 오히려 기뻐하지 않고 버리신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환란에서 구원받는 것은 제자들이 무서워서 주님을 깨우면서 돌아봐 달라는 호소가 있을 때에 풍랑을 잔잔케 하듯이 앞으로 오는 모든 난제는 주님이 나타나심으로 하루아침에 다 해결되는 것이다.

 

  결    론

  천하에 제일 복된 일은 주님이 함께 하는 일이라고 본다. 모든 일이 다 잘된 것 같으나 주님이 함께 하지 않을 때에 실패요, 모든 일이 다 절망 상태에 들어갔다 하더라도 주님이 같이 할 때에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일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나타난 기사 이적을 과거로 보지 말고 그 주님은 앞으로 이렇게 역사한다는 것을 믿고 담대히 나가야 할 것이다.

 

 

 

 어 린 이  공 과 편 - 요한복음 공부

 

제5과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는 예수님

- 요 3:1~14,  요절:5 -

 

  서    론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전도하실 적에 바리새 교인들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유대 나라에서 가장 거룩하다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병든 사람, 가난한 사람, 또는 그 나라에서 천대받는 사람들을 불쌍히 보고 찾아가 전도하고 병을 고쳐주고 또는 그들과 같이 음식을 잡수시기도 하시고 그들과 같이 할 때에 바리새교인들은 예수님을 비웃고 조롱했습니다.

  왜냐 하면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면서 저렇게도 가치가 없는 더러운 사람들과 같이 음식을 먹고 함께 다닌다고 흉을 보면서 자기 교파 사람들은 거룩한 사람이니 그런 더러운 사람한테 가지 말라고 금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교인중에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밤에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이것은 낮에 예수님을 찾아오면 자기 교파 사람들이 못 가게 하므로 몰래 찾아왔던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하나님께로 온 선생님인줄 알았던 것입니다. 무슨 훌륭한 말씀을 들어보려고 찾아 와서 예수님을 뵈올 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니고데모는 물어보기를 사람이 어머니 배에 다시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은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라 말씀하셨습니다.

  학생들, 학생들의 몸이 어머니 배에 들어갔다 나온다는 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의 말입니다. 중생이라는 것은 거듭난다는 말인데 영혼이 마귀에게 잡혀 지옥으로 갈 영혼이 예수 믿고 마귀에게서 해방을 받고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인정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거듭나는 일에 대하여 세 가지로 우리 학생들과 같이 받아 읽으면서 공부해 보겠습니다.

 

  1대지 : 예수님이 죽었다가 사시므로 중생을 주심 (벧전1:3)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에 예수님은 믿는 사람의 영혼을 다시 살리는 일을 하십니다. 이것은 죄를 사하여 주실적에 누구든지 마음이 밝아지고 평화로워지고 깨끗해지고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우리 학생들, 꼭 같이 받아 읽으세요. 예수님이여 우리는 날 때부터 죄를 진 아버지, 어머니가 낳았으므로 날 때부터 죄에서 났고 나도 모르게 죄를 지었습니다. 예수님이여, 내 영혼을 예수님께서 거듭나게 해서 예수님만 따라가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아멘.

 

  2대지 : 영혼이 사는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벧전1:13)

  학생들, 학생들에게 제일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대답하세요. 내가 한마디 다시 물어보겠습니다. 생명을 보았습니까? 못 보았습니까? 우리 학생들, 생명이 어떻게 생겼죠? 이 생명은 보이지도 않고 손에 만져지지도 않고 하지만 생명이 있다 없다 하는 것은 학생들도 알 거예요.

  사람의 생명은 두 가지입니다. 영의 생명도 있고 육의 생명도 있습니다. 영생이라는 것은 영원히 죽지 않는 것입니다. 학생들, 이 세상 사람들은 다 육신의 생명을 보존해 보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예수님께로 말미암아 새로운 생명이 우리에게 온다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학생들, 나무 가지에 진액이 없으면 그 나무가 자라날 수가 없고 동물이나 사람은 몸에 생명의 피가 없으면 몸이 자랄 수가 없고 영적으로 은혜를 받지 못하면 그 영이 자라지를 못합니다.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 되려면 키만 크고 뚱뚱하다고 훌륭한 사람이 아니요 그 영혼이 은혜를 받고 자라날 적에 저 강변에서 고기를 잡아먹던 사람도 훌륭한 사람이 되어서 훌륭한 일을 많이 했습니다.

  학생들도 예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받으면 영이 자라나 훌륭한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중생이라는 것은 새로운 영적 생명을 받으므로 날마다 자라나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3대지 :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는 것입니다 (계20:15)

  학생들, 하나같이 받아 읽으세요.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학생들은 예수 믿고 거듭나는 사람이 될 때에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므로 마귀가 학생들을 지배하지 못하고 항상 천사가 보호합니다(계13:8).

  앞으로 무서운 환란이 와도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은 절대로 천사 보호가 있으므로 악한 짐승 같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당하지 않고 새 시대에 가게 됩니다.

 

  묻 는  말

 1. 예수님을 밤에 찾아온 사람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2. 거듭난다는 것은 육입니까? 영입니까?

 3. 거듭난 사람은 이름이 어디에 기록됩니까?

 

 

제6과  참된 예배를 가르쳐 주신 예수님

- 요 4:19~26,  요절:24 -

 

  서    론

  인생이라는 것은 참된 예배를 드리면 복을 받고 못 드리면 복을 받지 못합니다. 사람이 세상에 많이 살고 있지만 참된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옛날에도 적었고 지금도 적습니다. 예수님이 인생에게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역사를 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는 천하에 하나님께 예배하는 사람은 이스라엘이란 나라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나라는 옛날 야곱이라는 사람의 자손들이 한 나라가 되므로 나라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한 것은 그 조상 야곱이 축복을 받은 새 이름입니다. 그 나라 사람은 자기 조상의 이름으로 나라 이름을 정하고 그 야곱의 열두 아들이 있었는데 열두 지파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나라에서 사마리아라는 곳이 북방에 있고 남방은 유대 나라가 있었습니다. 북방 사마리아는 열두 지파 중에서 열 지파는 사마리아가 되었고 두 지파는 유대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유대 나라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을 나쁜 사람이라고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지금 우리나라에 북한 남한 하고 서로 미워하듯이 예수님이 세상에 올 때도 유대 나라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을 만나면 서로 말하지도 않고 서로 교제하지를 않았습니다.

  왜냐 하면 옛날에 사마리아 사람은 하나님을 공경하던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예배하러 가는 것을 못 가게 하고 자기네끼리 따로 예배를 드릴 때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그 앞에 제사를 드렸습니다.

  학생들 이것이 죄입니까? 죄가 아닙니까? 그래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유대 사람들은 그 사람들을 나쁜 사람으로 인정하기 때문에 유대 사람은 누구나 다 그 나라 사람과는 아무런 교제를 하지 않았는데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의 한 여자를 만나 전도하게 되었습니다.

  이 여자는 물을 길러 왔다가 길 가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 우물은 옛날 야곱이가 팠던 우물입니다. 길을 가던 예수님은 그 여자에게 물을 좀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 여자는 깜짝 놀랐습니다. 왜 놀랐을까요?

  이날까지는 유대인들이 자기 나라 사람보고 한번도 상종치 않았는데 점잖고도 훌륭한 사람이 물을 달라 할 때에 그 여자는 이상히 생각하고 물어 보았습니다. 당신은 내가 보니 유대 사람이요, 훌륭한 선생님인데, 어찌 나같이 더러운 사람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할 때에 예수님은 내가 누구인줄을 네가 알았으면 생수를 구했으리라고 말씀할 때에 예수님께 그 여자는 말하기를 내게 생수를 달라고 하였습니다.

  주님께서 네 남편을 데려오라고 했습니다. 그때에 그 여자는 남편이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말하기를 네 말이 옳다 하시면서 네가 남편이 다섯이 있는데 지금 있는 남편은 네 남편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 여자는 깜짝 놀랐습니다. 왜 놀랐을까요?

  이것은 자기 죄가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한 여자가 남편을 다섯이나 얻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죄입니까? 이것 보세요. 예수님은 남의 과거를 다 압니다.  그래서 그 여자는 머리를 숙이면서 주여! 했습니다. 그때에 그 여자가 하는 말이 어떻게 하여야 참된 예배를 드리는가요? 하고 물어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예배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1대지 : 내 말을 믿으라고 했습니다 (19~21)

  어느 나라 사람이든지 예수님이 가르친 말씀만 믿으면 다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자격이 있습니다. 학생들, 예수님의 말씀은 왜 믿어야 될까요?

  세상에 공자나 석가나 모하메트나 다 믿을만한 진리를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다 자기가 생각나는대로 사람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에 와서 행하신 일이 옛날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기록한대로 행하시는 동시에 사람이 깨달아서 바로 믿도록 참된 도리를 가르치고 만민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었다가 부활 승천해서 어느 나라 사람이든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예배하는 자는 하나같이 응답을 내려보내고 계십니다.

 

  2대지 : 아는 것을 예배하라고 했습니다 (22)

  지금 어리석은 사람들은 어느 것이 참 진리인줄 모르고 무조건 제사를 드리는 것은 오히려 화를 받을 일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분명히 깨닫도록 해주시는 것입니다.

  학생들, 교회에 나와도 아무 것도 모르고 왔다갔다하는 사람은 은혜를 못 받습니다. 내가 말하는대로 기도합시다.

  우리들은 귀가 있어도 깨달아 듣지를 못하고 눈이 있어도 성경을 보아도 모르겠습니다. 오늘부터 성경을 보아 알게 하시고 선생님의 가르친 말씀을 듣고 깨닫게 해 주시옵소서. 우리는 하나님의 참된 진리를 바로 깨달아 믿으므로 새 시대 갈 것을 바라보고 오늘 교회에 왔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3대지 :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라고 했습니다 (23~24)

  학생들, 사람은 영혼이 있으므로 신령한 감화를 받을 수 있습니다. 양심이 있으므로 참된 마음도 가질 수 있습니다.

  학생들, 신령한 사람이 좋습니까? 더러운 사람이 좋습니까?

  이 세상 사람은 더러운 것을 좋아합니다. 더러운 것이라는 것은 욕심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자기 욕심에 만족을 채워보려고 합니다. 자기 욕심만 따라가는 사람은 신령한 예배를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학생들에게 신령한 은혜를 알게도 하고 참된 믿음을 주기도 하시고 또는 신령한 것을 받아서 참된 믿음으로 예배를 드리게 하시고 이렇게 예배하는 자에게 큰 축복을 주어서 새 시대에 가게 하십니다.

 

  묻 는  말

 1. 사마리아 사람은 왜 나쁜 사람들입니까?

 2. 예배는 누구 앞에 드리는 예배입니까?

 3. 참된 예배를 드리는 사람을 무슨 복을 줍니까?

 

 

제7과  심판하는 권세를 맡으신 예수님

- 요 5:19~23,  요절:22 -

 

  서    론

  학생들, 오늘은 예수님이 심판하는 권세를 아버지 하나님께 맡은 일에 대하여 공부하겠습니다. 우리 사람은 다 심판을 받을 사람들입니다. 왜냐 하면 죄를 지으면 그 죄값으로 사람이 죽는다는 것이 하나님의 법이기 때문입니다.

  학생들, 죄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죄는 무엇일까요? 죄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사람에게 잘못하는 죄, 하나님께 잘못하는 죄 이 두 가지가 다 심판을 받을 죄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죄, 속이는 죄, 공연히 악평을 하는 죄, 중심으로 미워하는 죄, 이것이 다 사람에게 짓는 죄의 종류입니다. 하나님께 짓는 죄는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믿지 않는 죄, 순종하지 않는 죄, 원망하는 죄, 모든 것이 다 죄입니다.

  이밖에도 여러 가지 죄가 있지만 모든 죄의 근본이 이런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학생들도 이런 죄가 있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 범죄한 인간들을 심판하지 않고 예수님께 맡겼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심판하는 권세를 맡으신 것이 우리 학생들에게 얼마나 큰 유익이 된다는 것을 공부하겠습니다.

 

  1대지 : 아버지께서 행할 일을 아들 예수로 행하시는 일입니다 (19~20)

  우리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이 하실 일을 맡아 가지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무슨 일을 맡아 가지고 오셨을까요? 너는 세상에 내려 가서 내 앞에 죄진 인간들을 구원해 주는 일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학생들, 사람이 물에 빠져 자기 힘으로 나올 수 없는 것을 볼 때에 어떻게 하여야 될까요? 이것은 그 사람보다 힘도 세고 물에 빠지지 않는 기술이 있는 사람이 헤엄을 쳐 물에 들어가 물에 빠진 사람을 끌고 나와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능력이 많고 사랑이 많고 지혜가 많으신 아들을 세상에 보내서 하나님이 하실 말씀을 아들을 통하여 하시고 하나님이 능력으로 구원해 줄 사람을 아들을 통하여 구원하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아들을 통하여 영광을 받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2대지 : 아들을 공경하게 하기 위하여 심판을 맡기셨습니다 (21~23)

  하나님께서 살리고자 하는 사람을 예수님을 통하여 살리고자 하는 목적으로 심판하는 권세를 아들에게 맡기셨습니다.

  예를 든다면 어떤 왕이 아들을 형무소로 보내면서 네 마음대로 가 죄인들 중에서 살릴 자를 살려주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 태자는 옥중에 가서 죄인들을 모아 놓고 무슨 죄를 짓고 와서 고생하느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태자 앞에 와 자기들은 억울하게 옥중에 왔다고 합니다.

  이때 한 사람이 태자 앞에 와서 나는 사형을 받아야 마땅할 죄인인데 이날까지 생명을 보존하고 이곳에서 나라에서 주는 밥을 먹고 사는 것만 해도 너무나 감사한 일이라고 하면서 울 때에 그 태자는 그 죄인을 붙들고 같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태자는 하는 말이 이 옥중에는 옳은 사람만 다 와 있는데 당신 혼자 죄가 많다니 여기서 살지 말고 나가서 마음대로 살라고 해방을 주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죄 많은 인간들을 볼 때 자기 죄를 깨닫고 내가 이날까지 죄를 많이 졌지만 생명을 보존하고 사는 것이 감사해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을 예수님은 구원해 주시고 그 밖의 사람은 모른다고 합니다.

  심판이라는 것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심판을 받고 믿는 사람을 구원해 준다는 것이 심판의 법입니다. 학생들, 누구를 공경하고 싶습니까? 집에서는 부모님을 공경하고요 학교에 가서는 선생님을 공경하고요 노는 장소에 가면 제일 크고 힘센 아이를 공경해야죠. 그러나 학생들은 부모보다도 선생보다도 노는 동무보다도 더 공경할 이는 예수님입니다.

  이것은 부모도 예수를 공경해야 되고 선생님도 예수를 공경해야 되고 노는 동무들도 다 예수님을 공경해야 예수님이 다시 올 때에 새로운 시대에 들어가서 부모님도 선생님도 동무들도 같이 살 수가 있습니다. 아무리 학생들의 부모가 있다 하여도 예수님을 공경치 않으면 학생들과 같이 새 시대에 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 학생들은 예수님을 공경하는 학생들이 되어서 예수님이 심판하러 올 때에 예수님 앞에 칭찬 받는 사람이 되기 바랍니다.

 

  묻 는  말

 1. 세상에 죄가 없는 사람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2. 하나님이 예수님께 심판 권세를 맡긴 것이 학생들에게 유익이 됩니까, 안됩니까?

 3. 예수님을 왜 공경해야 됩니까?

 

 

제8과  생명의 떡이 되신 예수님

- 요 6:47~51,  요절:51 -

 

  서    론

  학생들 생명이 중합니까? 떡이 중합니까? 생명이 있어도 떡이 없으면 살 수 없고 떡이 있어도 생명이 없으면 그 떡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생명도 되고 떡도 됩니다.

  예수님은 전도하실 적에 여러 가지 훌륭한 이적이 있었습니다. 무슨 병자든지 예수님이 말씀만 하면 즉시 소경이 눈을 뜨고 귀머거리가 듣고 벙어리가 말하고 앉은뱅이가 걸어가고 문둥병이 깨끗해지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귀신 들린 자라도 말씀 한 마디에 귀신이 물러갔습니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이 따라 갔습니다. 학생들, 생각해 보세요. 오늘도 이런 일이 있다면 사람들이 많이 따를 것은 사실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에 그 나라에 가난한 사람이 많이 살았습니다. 하루는 넓은 광야에 가서 날은 저물었는데 수많은 사람이 먹을 것이 없이 다 굶어서 배가 고파 어찌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은 너희들 가운데 먹을 것이 얼마나 있느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들이 조사해 보니 먹을 것은 한 아이가 보리 떡 다섯 개가 있고 물고기가 두 마리 있습니다.

  학생들, 생각해 보세요. 사람이 5천명이 넘는 중에서 떡 다섯 개 고기 두 마리로 살 수가 있을까요?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보고 낙심하지 말고 그것을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떡과 고기를 놓고 사람들을 다 앉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곳은 잔디밭이었습니다. 사람이 5천명이나 줄을 지어 잔디밭에 앉았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 다음 제자들을 보고 나눠 먹게 하라고 했습니다. 이상하게 암만 떡을 주어도 자꾸 많아집니다. 이 떡은 어디서 오는 떡일까요? 하나님께로부터 응답으로 오는 떡입니다. 그들이 잔뜩 먹고 남은 것이 떡이 열두 광주리나 됩니다. 그때부터 이 사람들은 자꾸 따라 다니는 거예요.

  예수님은 그들을 보고 하는 말이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니 나를 믿으면 산다고 전도를 했습니다. 오늘은 예수는 생명의 떡이라는 공부를 합니다.

 

  1대지 : 믿는 자는 영생을 주심 (47~48)

  사람들은 다 죄를 범했으므로 예수님을 믿어야만 예수님이 자기에게 있는 영생의 생명을 은혜로 주십니다. 우리 다 같이 합심 호소합시다(47장으로 내게 영생 줍소서).

  학생들 천하에 제일 좋은 것은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2대지 : 만나보다 귀한 것은 생명의 떡입니다 (49~51)

  과거에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 복지를 갈 때에 사막이라는 곳을 거치게 되었습니다. 사막이라는 것은 모래만 있고 흙이 없어서 먹을 것이 없는 곳입니다. 그때에 하나님은 아침마다 만나를 내려주어 굳어지면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떡을 만들면 꿀을 섞은 과자같이 맛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다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말씀하기를 너희 조상은 만나를 먹고도 죽었지만 나는 하늘로 내려온 산 떡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영생을 얻는 것은 내 몸으로 만민의 죄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누구든지 믿으면 영생을 얻도록 역사하시겠다고 말씀했습니다.

  과연 예수님은 말씀하신 대로 온 천하 사람들이 지금 예수를 믿어 영생을 받게 되었으니 예수님은 생명의 떡이란 것은 믿는 자는 다 체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학생들 옆에 사람이 떡을 먹으면서 이 떡이 참으로 맛이 좋은 떡이라 하여도 그 말을 신용하지 않고 그 떡을 받아먹지 않는다면 그 떡이 그 사람에게 유익을 줄 수 없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를 믿는 것은 아무리 함께 사는 집안 식구들도 믿는 자라야 영생을 얻고 믿지 않는 사람은 영생을 얻지 못합니다.

 

  묻 는  말

 1. 예수님이 전도할 때 사람이 많이 따라왔습니까?

 2. 많은 사람이 굶주려 어찌할 수 없을 때에 어떻게 살려 주었습니까?

 3. 예수님은 왜 생명의 떡입니까?

 

 

 

 논 설 편

 

1. 생명은 많고도 죽을 세상

  이 세상은 생명이 가득한 세상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또는 죽음이 가득한 세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세상이 이렇게 되어 있는 것은 이 세상에서 바로 하면 살 수 있고 바로 못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을 거침으로 영생과 멸망으로 갈라서는 가장 복잡한 세상이 되었다.

  옛날 공자도 순천자는 살고 역천자는 망한다고 했지만 공자도 죽었고 석가는 말하기를 선한 일을 많이 하라고 대자비를 말했지만 그도 죽은 것이다. 누구나 다 살기를 위하여 도를 찾고 살기를 위하여 빵을 찾고 살기 위해서 과학을 연구하고 있다. 생명을 가진 사람이 살기 위하여 애쓴다는 것은 인간의 생활이 완전한 생활은 아니다.

  완전한 생명을 가질 적에 완전한 인격이 있고 완전한 인격을 가질 적에 완전한 생활이 있고 완전한 생활이 있으므로 완전한 사회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생명을 가져야 할 것이냐는 것을 바로 깨닫고 받아 체험하는 것이 참된 종교 신앙의 시발점이 되는 것이다.

  종교 생활을 하므로 생명을 얻는다는 것보다도 참된 생명을 찾으므로 올바른 종교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종교인의 올바른 노선이 되고 활동을 바로 하므로써 살 수 있다는 것보다도 올바른 활동을 할 수 있는 인격을 먼저 찾아 가지고 활동하는 것이 인간 생활의 정로가 될 것이다.

  이 땅에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많은 사람이 삶의 길을 찾아 보려고 노력하는 것만은 인생 생활의 원칙이 될 것이다. 그러나 참된 생명을 찾지 못한 종교와 또는 참된 인격을 찾지 못한 사회 활동이라는 것은 오히려 어지러운 세상을 만들어 놓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금일에 생명은 많으나 죽을 세상이 된 것이다.

  이제 이러한 세상에서 어떻게 하여야 생명을 잃지 않고 사망을 면하느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사망이 없는 생명을 받아야 된다

  이 생명이라는 것은 사망의 권세를 이긴 자를 통하여 받는 생명이다. 그러면 사망의 권세라는 것은 마귀에게 있고 사망을 이기는 생명의 역사는 그리스도께 있는 것이다. 생명이 있다 하여도 사망을 이길 수 없는 생명은 살았다 하나 실상은 죽은 것이요, 사망이 없는 생명을 받은 자는 비록 적은 것 같으나 최후에는 승리를 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사망이 없는 생명은 그리스도께만 있는 것이니 그 생명을 믿음으로 받은 자로서 움직일 때에 완전한 인격도 생활도 이루어질 것이다.

 

  2. 생명의 법에 의한 활동이 있어야 된다

  인생이라는 것은 법이 없는 활동은 있을 수 없다. 사망의 법에 속한 활동이냐, 생명의 법에 속한 활동이냐 하는 것에 의하여 인간들은 종국을 맺게 될 것이다. 가장 어리석은 인간은 사망의 법에 종된 생활을 하면서 살아 보겠다고 하는 자들이요, 가장 지혜로운 자는 생명의 법에 종된 생활을 하면서 초인간적인 활동을 하고 있는 자들이다.

 

  3. 용사적인 투쟁이 있어야 한다

  금일에 모든 사람이 세 가지로 흐른다고 볼 수 있다. 용사적인 투쟁에도 첫째:자기의 주권을 찾기 위한 투쟁도 있고, 둘째:남을 섬기기 위한 투쟁도 있고, 셋째:남을 살리기 위한 투쟁도 있다.

  이와 같은 인물들은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서 싸워야 할 일이라고 본다. 그러나 초인간적인 용사의 투쟁도 있으니 이 투쟁은 인간의 주권보다도 인간 주권을 지배할 수 있는 하늘의 주권을 위한 투쟁이며 인간의 것을 섬기는 것보다도 인간을 초월한 대상자를 섬기기 위한 투쟁이며 인간의 힘으로 살리는 것보다도 인간 밖에의 능력과 권세로 남을 살리기 위한 투쟁이니 이러한 용사라야 완전한 세계를 정복할 수 있는 용사라고 볼 수 있다.

  이제 끝으로 생각할 것은 생명은 많으나 죽을 세상을 따라간다든지 또는 사모한다든지 하는 인격이라는 것은 소극적인 인격인 것이니 생명이 많은 동시에 사망이 없는 세계를 향하여 돌진하고 사모하고 싸우는 생활이 있어야 완전한 생명에서 완전한 인격으로, 완전한 인격에서 완전한 생활로 들어가는 동시에 새 시대를 정복하는 열매를 이룰 것이다.

 

 

2. 해 놓은 일 없이 분주한 생활

  지금 사람은 대단히 분주한 것같이 보인다. 너무 분주하게 다니다 보니 그전에는 없던 길을 닦느라고 심지어 외국에서 차관을 내기까지 하면서 수고하고 있다. 그러나 다니는 사람들이 무엇을 뚜렷이 해 놓은 열매는 세상에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못살겠다는 소리만 들려온다. 이것이 왜 이렇게 되느냐에 대하여 그 원인을 바로 아는 것이 완전한 지식이라고 본다.

 

  1. 인격 문제라고 본다.

  한번 가서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없는 인격이라면 열 번 백 번 왔다갔다해도 분주할 것 뿐이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분주하지 않고도 한번이면 되게 하는데 하나님을 떠난 벌레같은 인격이 되고 보니 주권자 없는 곤충떼같이 밀려다니는 복잡한 거리가 되고 분주한 것 뿐이요,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빨리가는 급행차 달리기만 분주하다. 완전한 인격을 찾게될 때 분주하지 않아도 열매가 많은 생활을 할 수 있다.

  사람이라는 것은 독립적 생활은 아무런 것도 할 수 없는 것이요 또는 많은 대중이 한다 하여도 완전한 지도자가 없다면 완전한 열매를 이룰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들어 쓸 적에 완전한 인격이 이루어지기까지는 그 사람을 들어 쓰지 않는 것이다.

  이제 한번 말하면 그 말한대로 되는 사람이 나타나므로만이 시국난제가 해결될 것을 선지서에 미리 예언한 말씀이다. 그리스도께서 걸어오신 길이 즉 한번 말하면 열매가 되고 한번 손을 얹어도 열매가 되고 한번 죽어도 열매가 되고 한번 살아서 열매가 되는 것이 그리스도의 역사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를 믿는 자로서 그 손에 붙들린 종이 될 때에 전부가 열매있는 인격의 생활이 될 것이다.

 

  2. 방법 문제일 것이다.

  조물주 하나님은 법이 없이 역사하지 않는다.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의 법을 떠나서 인간의 방법으로 해보려고 아무리 애써도 하고 보면 허사일 것이다. 인간의 방법이라는 것은 조물주 하나님 앞에 죄를 짓는 일이 되고 보니 공연히 분주하게 다니게 되는 것은 술 취한 사람이 공연히 떠드는 것같이 된다는 것을 모든 선지는 가르친 것이다(이사야 28장).

  방법이라는 것은 하나님 말씀에 의한 방법이 아니고는 다 꿈꾸는 일이 되고 말 것이다(사29:7~8).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의 법을 모르고 자기의 방법을 취해보려는 것은 다 멸망을 자취하는 수고가 되고 말 것이다.

 

  3. 분별일 것이다.

  지금 인간들이 극도로 미혹 받기 좋은 세상이라 본다. 왜냐 하면 전부가 그전에 없던 새로운 일이 닥쳐오기 때문이다. 1960년으로 70년까지의 기간에는 어제가 옛날이라고 하는 말이 속담이 되었다. 왜냐 하면 경제나 인심 상태 또는 과학기술이나 사람의 생활 상태가 여기에 따라서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됨에 따라서 종교가 큰 위기를 만났다고 본다. 왜냐 하면 종교인들이 왜 이러한 시대가 오는지 분별을 못하고 거기에 압력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기도도 못 하고, 성경도 못 보고, 은혜도 못 받고, 전도도 못 하고, 한 일 없이 분주한 가운데 머리가 복잡하고 심지어 신령한 마음이 둔해지는 상태에서 공연히 세월을 보내고 있는 현실이라고 볼 수 있다. 영계도 진리도 분별할 줄 모르고 남의 말에 충동받고 떠드는 자 되고 보니 해놓은 일 없이 분주한 생활하는 자는 교회안에까지 들어와 강단까지 점령했다고 볼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이 시대에 합당한 인격, 합당한 방법, 합당한 분별의 생활이 있어야 될 것이다. 기독교가 가장 열매가 많을 때는 이때요 시간을 다투어가며 일할 때가 왔다고 본다. 해놓은 일 없이 분주한 생활은 흑암의 생활이요, 인간이 볼 때에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으나 열매가 많은 생활은 지혜로운 생활일 것이다.

 

 

3. 밝은 것 같으나 어두운 세상

  금일에 20세기 문명을 자랑하는 세상이지만 실지는 어두운 세상이라는 것을 바로 아는 자가 아니라면 시대를 분별할 수 없고 때를 모르는 금수의 생활을 하게될 것이다. 밝은 것 같으나 어두운 세상이라는데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하나님이 없다는 세상

  요즘 사람들이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소위 문명한 사람이라고 인정한다. 내가 볼 때는 하나님이 없다는 사람은 무신론이 아니고 무식론이라고 본다. 왜냐 하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체험을 받고 볼 때 하나님이 없다는 사람은 너무 악해서 하나님과 그 사람 사이에 큰 장벽이 막힌 사람이라고 본다. 요즘 기독교가 강단에 선 사람이 하나님이 있다고 설교를 해도 신의 역사가 없을 때에 오히려 무신론 사상을 넣어주는 목사가 될 수 있다.

  오늘에 무신론 사상이 일어나는 것은 종교가 부패한 원인이라고 본다. 이 사람도 학생시에 부패한 목자를 볼 때 하나님이 없다는 점도 있어 보았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있다고 했고 예배를 드리면 아무런 은혜가 없을 때에 이것이 무엇 하는 일이냐 하는 감도 있어 보았다. 이때는 한국 교회가 신사참배가 죄가 아니라고 노회 총회가 말할 때다. 금일에도 기독교가 공산 사상과 협상을 해도 죄가 아니라고 한다면 교회안 사람은 다 아무런 은혜가 없게 될 것이니 결국은 짐승의 표를 받는 교회가 되고 말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 스스로 숨어 계셔서 누가 내 말을 가감없이 믿고 순종하나 잠잠히 살피고 있다. 나의 신앙 체험에 의하면 아무리 교회를 다닌다 하여도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해석하는 말을 따라가면 아무런 응답이 없는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고 본다.

  내가 과거에 장로교파 외에는 다 이단이라는 말을 듣고 교회를 다닐 때에 아무런 체험도 받아보지 못했고, 다음은 믿으면 구원을 다 받으니 주일을 거룩히 지킬 필요도 없고 애써 기도할 필요도 없고 감사할 뿐이라는 복음주의를 따르다가 큰 실패를 보았고, 또는 순교 생활을 한다고 나섰지만 중심에 성결을 부인하는 종들의 말을 듣고 중심 성결을 지켜보려고 노력하지 않을 때 아무런 체험을 얻지 못했고, 그 다음에 중심 성결을 얻기 위하여 중심으로 지은 죄를 회개할 때에 그때부터 중심에 뜨거움을 받고 기도할 때에 15년간 한번도 중심이 식어본 일이 없고 죄가 마음에서 발생해 본 일이 없는 생활에서 영계가 열려질 때에, 예배할 때나 기도할 때나 항상 하나님의 신의 역사를 계속으로 받게 될 때에 하나님의 말씀은 빛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말씀 자체가 성경 본문에서 햇빛같이 밝아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느 성경이나 한자도 혼선되어 있지 않고 온전한 빛의 세계로 인도하는 합법적 변론이라고 깨닫게 되었다. 이제 와서 기독교는 완전한 합법적인 진리의 빛의 종교이며 완전한 생명의 신의 종교이며 완전한 거룩의 성결한 종교인 것을 체험할 때에 이 세상은 밝은 것 같으나 흑암의 세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2. 협상적인 노선

  지금 공산당과 싸우면 이 세상은 망하게 되는 환란이 온다고 공산당과 협상을 해야만 된다는 것은 밝은 것 같으나 어두운 일이다.

  왜냐 하면 하나님 말씀에 여러 선지를 통하여 인간 종말을 기록하게 할 때에 북방을 자리잡고 나오는 무신론 사상과 침략적 정책과 기만적인 행동을 하고 나오는 세력은 인간이 볼 때는 강하게 보이므로 어리석은 인간들은 그 앞에서 떨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 말씀을 순종해서 북방의 세력을 무서워하지 않고 용기있게 나가는 자에게 초인간적인 역사가 하나님께로 나리게 되어 북방세력이 굴복을 당하고, 하나님의 심판의 불이 악의 세력을 사르는 재앙이 오므로 북방이 망하는 동시에 북방 앞에 타협을 하던 무리는 함께 망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싸우던 자들이 새로운 시대를 이룬다고 말씀했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는 이때에 말씀으로 빛을 발휘해야 될 것이다. 기독교가 민족적 국경의 차별 없이 예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나가 된다는 빛을 발하므로 세계를 구원하는 종교가 되었고 이제 종말에 심판의 비밀의 진리를 들고 빛을 발하므로 평화 왕국을 이 땅에 이루는 완전 승리를 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협상 노선이라는 것은 흑암으로 본다.

 

  3. 물질 문명에 도취가 되는 일

  금일에 인간이 물질 문명이 비약적 발전을 보게 될 때에 이것이 지상천국을 이룰 것 같이 본다는 것은 흑암중에 흑암이라고 본다. 왜냐 하면 물질을 지배하는 인격이 아니요 물질 문명에 기계화된 이때 그 기계의 종이 된 사람이니 타락중에 타락이라고 본다. 우리는 그 기계를 바로 사용하는 목적이 바로 서야 할 것이다. 기계는 기계에 국한된 사회를 이루는 것이 끝이 아니요, 기계를 초월한 신정적인 세계까지가 끝이라는 것을 알아야한다.

  성경에 보면 인간의 기계 문명은 별세계까지가 끝이요 세계 인류가 한시간에 불타는 진노의 병기가 나오는 것이 끝이라고 말했고 그 기계가 피해를 줄 수 없는 신의 역사로 남은 자가 있게 되어 신의 축복을 받는 신정적인 시온산 통치 왕국이 올 것을 가르쳤다. 그러므로 물질 문명에 도취가 된 세상은 밝은 것 같으나 어두운 세상이다.

 

 

 

 신 앙 문 답

 

【문】1. 기독교가 지금 와서 새로운 번역이 나와야 될 필요성은 무엇입니까?

【답】기독교는 번역을 따라 가는 종교는 아닙니다. 만일 기독교가 금일에 부패되는 것이 성경 번역이 잘못 되어 부패해졌다고 볼 수 없고 성경 본위를 떠난 신학설이 교회를 망치는 것은 그 신학을 받은 자들이 성경에 무식하고 영계가 밝지 못하므로 잘못된 신학설을 가지고 강단에 설 때에 하나님은 진리의 신이시니 진리를 잘못 증거하는 강단에 역사가 나리지 않으므로 부패한 것입니다.

  오늘에 성신의 역사가 없이 성경을 번역하다가 오히려 마귀의 세력이 번역을 끼고 들어올 염려가 없지 않습니다. 나의 체험에 의하면 현재 우리가 읽고 있는 신,구약 성경만으로도 얼마든지 하나님께서 역사 하시리라고 믿습니다.

  금일에 구교와 신교가 합해서 다시 성경을 번역해야 될 기독교라면 루터 종교개혁에 대하여 큰 의문이 될 일입니다. 만일 루터가 성경을 잘못 번역했다면 루터 종교개혁은 오히려 교회를 망쳐 버린 것이 될 것인가 하는 의문도 있습니다. 나는 기도 가운데 생각하는 바는 이제 와서 구교와 신교가 합해서 성경을 번역하는 것이 급한 것이 아니고 이미 들고 있는 성경을 바로 알아서 완전 무장을 하는 일에 종들은 전력을 둘 때라고 봅니다.

  가장 위험한 일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성신 떠난 사람이 기록한 신학설, 성신 떠난 사람이 번역하는 성경책, 성신 떠난 사람들의 다수 가결된 일입니다. 신학도 번역도 가결도 성신이 떠난 자리에서는 얼마든지 마귀가 역사할 수 있습니다. 왜냐 하면 순금 등대 교회는 인간의 힘이나 능으로 되지 않고 여호와의 신으로 되어야 합니다. 나는 금일에 와서 우리 기독교가 필요 없는 일에 성금과 시간을 낭비하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것뿐입니다.

 

 

【문】2. 성경을 기록한 목적과 성도의 할 일에 대하여 구체적인 설명을 듣고자 합니다.

【답】성경이 있기 전에도 성도적인 생활이 있었지만 성경을 쓴 목적은 성도들이 단체적인 행동을 할 때부터 기록했다고 봅니다. 노아나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때까지도 완전한 성경이 없이 개인으로서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행동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단체적인 나라를 이루기 시작할 때에 신정적인 국가가 시작된 것이 성민의 나라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민의 나라에 모든 법을 직접 모세에게 명령하여 기록한 것이 모세5경이라고 합니다. 이 성민에게 확실한 역사를 기록하도록 하는 동시에 확실한 법을 세워서 신정 정치의 나라를 세운 것이 다윗 왕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제사를 드려도 법대로, 성전을 지어도 법대로, 모든 정치를 하나님이 가르친 법대로 해 나갔으므로 성민이라, 성산이라, 성전이라 하는 말을 쓰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때에 이 종교는 성민적인 종교로 세웠던 것입니다. 성민 외에는 이 종교를 믿으려고 해도 믿을 수 없는 장벽이 이방과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자기네 성민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 사사기, 사무엘상 하, 열왕기상 하, 역대상 하,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 등의 역사책이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세운 법을 절대로 순종하지 않으면 남의 나라보다도 용서 없이 징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왜냐 하면 신정 정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에게 준 법은 한 몽학적 교훈에 지나지 않았고 그 나라에 거룩한 성도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때때로 여호와의 말씀이 임했던 것입니다.

  그 시대 사람이 이것을 인정하지 않고 반대하는 일이 있으므로 여호와의 말씀을 받는 자들이 성민에게 박해를 받는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선지들은 목숨을 바치고 자기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을 담대히 전했던 것입니다.

  그 때에 하나님은 이러한 종들을 인정하는 동시에 그들에게 앞으로 될 일을 묵시로 받아서 책을 기록하게 했던 것입니다. 이 책은 그 민족만 위하여 말한 것이 아니고 세계 인류적인 예언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 책을 그 시대 사람들은 인정하지를 않았던 것입니다.

  왜냐 하면 첫째가 예루살렘이 북방 앗수르와 바벨론에게 멸망을 한다는 말이 있고, 또는 동방 파사 왕 고레스가 예루살렘을 다시 복구한다고 했으니 하나님을 공경하는 나라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북방 앗수르와 바벨론에게 망한다는 일은 과거에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온 일을 생각할 때에 그 하나님이 어찌 이렇게 할 수 있으랴 하는 것이요, 또는 하나님을 공경치 않는 나라 사람이 예루살렘을 다시 복구한다는 말도 그 시대 사람이 다 반대했던 것입니다.

  또는 선지들이 기록한 글은 메시야가 탄생할 것과 천하 모든 족속이 다 그를 믿게 될 것과 인간 종말에 가서 이스라엘 말기와 같이 되는 일이 있는 동시에 이스라엘 사람만이 복을 받는 것이 아니고 천하 사람이 다 복을 받아 새 시대로 가는데는 아무리 이스라엘이요, 야곱이요, 시온이라도 부패한 자는 다 망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때에 부패한 이스라엘이 공연히 자기네만 복을 받는다는 교만한 사람들로 선지들이 받은 묵시를 오히려 자기네를 무시하는 글이라고 반대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선지의 글대로 예루살렘이 앗수르와 바벨론에게 망하고 바벨론 포로가 될 때에 선지서를 반대하던 사람들은 다 죽고 남은 자들이 선지들의 예언을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인 줄 믿고 조상의 잘못을 회개하면서 기도할 때에 몇 사람의 간곡한 기도로 예루살렘이 회복될 때에 권리를 잡고 다시 다윗 왕국이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은 전부가 세계적인 대 종교가 이루어질 예언의 역사가 되고 완전한 구약 성서가 기록된 것 뿐입니다.

  왜냐 하면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인데 아브라함에게도 나타나서 너로 말미암아 천하에 모든 민족이 복을 받는다고 창12:1~3에 말씀했고, 이삭에게도 나타나서 창26:4에 말씀했고, 야곱에게도 창28:13~14에 너로 말미암아 천하에 모든 족속이 복을 받으리라고 말씀했으므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 된 사람들에게 선지를 통하여 언약의 말씀을 세울 때에 모든 나타난 증거까지라도 다 앞으로 세계적인 구원과 심판에 관한 표적과 증거로 세우는 동시에 모든 민족이 다 그 성경을 보고 복을 받도록 기록한 책이라고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날까지의 기독교는 모든 민족이 하나님을 공경할 수 있는 십자가의 도를 전하여 교회를 세운 것 뿐이요, 이제 복을 받게 되는 것은 여호와의 말씀인 선지서가 전체로 이루어지는 환란과 재앙과 심판 속에서 교회로서 남게 되어 새 시대를 이루는 것이 기독교의 완전 구원, 완전 축복, 완전 승리의 왕국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약 전서는 왜 있느냐에 대하여 말하겠습니다.

  4복음을 쓴 목적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인 줄 확실히 믿게 하기 위한 목적이요(요20:30~31), 사도 행전을 쓴 것은 사도의 역사를 전해준 것이요, 편지를 쓴 목적은 십자가를 믿으므로 다 하나같이 한 지체가 되고 후사가 되었으니 서로 사랑하고 서로 위로하면서 신앙의 도리를 바로 지키고 생활 도리를 바로 지키면서 성신의 열매를 맺는 생활을 하라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러나 계시록은 선지서에 기록한 말씀대로 인간 종말에 환란 재앙이 올 때 미혹 받지 말고 심판을 받지 말고 재림의 주를 영접하여 새 시대의 지상 축복을 받을 성도들에게 주신 예언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서와 계시록과에 목적이 같고 신약 전서의 4복음과 편지서는 심판과 새 시대가 오기 전에 세계적으로 교회를 세울 때에 예수 믿고 성신 받고 일하다가 영혼이 구원받는 범위 하에서 전하는 천국 복음입니다.

  예수께서 가르치는 말씀이 4복음이요, 사도들이 성신의 감화로 쓴 것이 편지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은 예수 믿고 성신 받은 자로서 계시록과 선지서를 가지고 교회에 끝을 맺는 역사를 해야 할 때가 즉 이때라고 봅니다.

 

 

【문】3. 기독교가 크게 위기를 만났다고 봅니다. 그런데 이 위기를 어떻게 모면하느냐에 대하여 구체적인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답】금일에 기독교가 위기를 만났지만 실지 하나님의 섭리를 알고 보면 큰 역사와 큰 축복이 올 시기라고 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인도할 때에 극도로 어려운 난제를 당하게 하는 것은 당신의 백성을 통하여 더 영광을 받고자 하는 일이라고 봅니다.

  이제 기독교가 위기가 온 것은 어떠한 섭리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1. 기독교에 큰 개혁이 일어날 시기가 왔다고 봅니다.

  이 개혁은 하나님 편에서 행하시는 일입니다. 루터가 종교 개혁을 했다는 것은 성경에 예언의 확실한 증거가 없는 일이로되 금일에 기독교가 개혁될 일은 선지서와 계시록에 구체적으로 말씀한 일이라고 봅니다. 이 개혁은 시대가 변천됨에 따라 있어야 할 일입니다.

  지금 소위 W.C.C라는 운동이 일어나는데 이것은 이 위기를 타개해 나가려면 전쟁이 일지 않도록 해야만 된다는 것이 목적인 동시에 세계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피차 서로 이해를 잘 하도록 하는 것이 우리 할 일이라고 하는 것인데 이것은 인간의 두뇌로 연구해 보는 일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하나님의 교회이니 만큼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순종하는 것 외에는 다 필요가 없는 일입니다.

  구약 교회가 성민적인 종교로써 세계적인 새로운 출발을 할 때에 유대교가 기독교로 개혁이 되어야 할 때를 하나님께서 예수를 통하여 이루어 놓은 것인데 이 역사를 반대하던 유대교는 망하고 기독교는 세계적인 대 확장을 보았습니다. 이제 세계적인 종교가 세계 평화왕국을 이루는 일에 있어서 새로운 역사가 나와야만 될 것입니다. 이제 기독교가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할 사명보다도 하나님 말씀대로 환란이 와도 그 환란에서 승리하는 역사가 즉 성경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시대를 따라 가르칠 말씀이 따로 있고 일어날 역사가 따로 기록되어 있고 또는 세계 만국을 다 그 말씀에 따라서 움직이는 것인데 이날까지에 이루어진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출생과 전도, 십자가 부활, 성신 강림, 세계적인 종교가 된 일, 이것이 성경이 이루어진 일입니다. 그러면 이루어진 일이 성경 글자 그대로 되었다면 이루어질 말씀도 그대로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위기라는 것이 성경을 자세히 알고 보면 기독교는 때를 만났다고 봅니다. 이 때 기독교로 말미암아 새로운 평화 왕국이 지상에 이루어질 때라는 것입니다.

  지금 인간이 볼 때 북방의 세력을 큰 문제로 삼고 정치인이나 종교인들이 협상이니 평화이니 하면서 인간의 정치적인 두뇌와 철학적인 두뇌를 가진 사람들이 최선의 노력을 하는 일이 협상과 평화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바로 안다면 북방 세력이 하등 우리와 큰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고 종교 지도자로서 이 시대에 할 일을 하느냐가 큰 문제입니다.

  그러면 종교 지도자는 협상적 평화를 한다는 것은 오히려 망할 행동이라고 성경은 가르쳤고 북방을 무서워도 말고 타협을 하지도 말고 이 때에 하나님의 신의 역사를 더 크게 받아서 북방 세력이 하나님의 역사 앞에 떨면서 도망을 가고 굴복을 당하게 한다는 것이 성경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할 일은 종교 지도자들이 큰 개혁을 받아야 합니다.

  내가 볼 때는 기독교가 지도자들이 이러한 상태로 나간다는 것은 성경과 거리가 너무 멀어진 느낌이 있습니다. 지도자의 사상, 정신, 생활이 성경과에 거리가 멀 때에 하나님과 거리가 멀어지고 보니 교회 안의 모든 일은 하나님이 있다는 정도의 교회요, 실지는 아무런 역사가 없게 될 때에 기독교는 자동적으로 시대적인 조류를 거스리지 못하고 그 물결에 흘러 떠내려가는 기독교가 되었습니다.

  예를 든다면 아무리 웅장한 나무라도 뿌리가 없는 나무는 물결에 떠내려 갈 것이고 아무리 작은 고기이지만 생명이 있는 고기는 자유로운 활동을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아무리 위대한 지도자라도 진리의 뿌리가 깊지 못한 자는 물결을 따라 세속주의로 협상주의로 흐르게 될 것이고 아무리 작은 자라도 이 시대의 진리를 깊이 알고 새로운 힘을 받은 자는 난국을 돌파하고 나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교 지도자들은 좀더 깊은 영계 체험이 있어야 하고 좀 더 깊은 진리의 지식이 풍부하여 영계로부터 오는 새 힘을 받고 완전한 진리의 변론적인 권세 역사가 있어서 오히려 이 시대에 하나님을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하는 것을 목적 두고 지도자 개혁 운동이 일어나야 할 것입니다.  

  소위 신학교라 하는 기관이 깊은 영계를 모르고 깊은 성경의 지식이 없이 쓸데없는 철학이니 어학이니 신 신학이니 세속화 신학이니 또는 바짝 마른 정통 신학이니 하면서 횡설수설하지 말고 지금은 지도자들이 하나님과 직접 교통하는 영계가 있어야 하고 성경 본문 그대로 읽어서 얼마든지 이 시대 사람에게 각성을 주고 감화를 주는 지도자가 되도록 하는 운동이 일어나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할 일은 종교 단체 문제입니다.

  현 종교 단체는 너무나 형식적이요 실지 사상적으로 진리적으로 사랑으로 뭉쳐진 단체는 못된다고 봅니다. 현 종교 단체는 소위 교파라는 관념 하에서 과거에 내려오던 습관 또는 의식, 교파의 법규에 따라서 움직이는 것뿐입니다.  

  처음에는 신령한 사람들이 교파 초월의 양심에서 시작되었고 물질을 초월한 영계 운동에서 시작되었지만 장구한 시간이 흘러 올 때에 그들이 가졌던 신앙과 양심과 영계를 떠난 자들이 다수가 되고 보니 그 교파의 세력은 신앙 양심과 영계를 떠난 자들이 좌우하게 되므로 실지는 단체가 된 것이 아니고 양심을 가진 자가 괴로워 할 일, 영계를 보존하는 자가 오히려 압력을 받을 현실에 처했다고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교파를 초월하여 같은 신앙 양심에서 같은 영계에서 괴로움을 느끼고 압력을 받던 종들은 총 궐기하여 십자가 중심에서 마음이 뭉치고 신령한 영계에서 오는 힘을 새로이 받아들이는 단계로 들어가야만 됩니다.

  예를 든다면 알곡은 알곡끼리 모여야 될 추수기라고 봅니다. 왜냐 하면 쭉정이를 불태울 시기가 왔으니 알곡은 알곡끼리 모여야만 그 불의 피해를 면하게 될 것입니다. 기독교는 신앙과 영계가 떠나면 아무런 일을 한다 하여도 불탈 쭉정이밖에는 될 것이 없습니다.

  셋째로 할 일은 종교 교육 문제입니다.

  이날이때까지는 부분적인 성경을 가지고 교육을 했지만 지금은 성경 전체의 완전 교육이 있어야만 될 때라고 봅니다. 우리가 이 시대 사람에게 만족을 주려면 성경 전체의 지식을 가지고 시국 난제를 그들이 해결할 수 있는 완전한 소망을 확실히 가질 수 있는 지식을 성경에서 가르칠 때가 왔다고 봅니다.

  만일 기독교가 이 시대에 난제를 해결 할 수 있는 진리가 없다면 이 시대에 빛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성경을 깨달은 바에 의하면 기독교는 이제부터 완전한 지식을 성경에서 가르치고 완전한 구원의 확실성을 가지는 동시에 완전 승리 평화 왕국을 이루는 진리 운동으로만이 난국을 돌파하고 나오는 역사가 일어날 것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종교 교육을, 완전한 구원이 영만이 아니요 살아서 새 시대 가는 진리를 정확히 가르칠 때가 이때이니 모든 성도들에게 새로운 교육을 해야될 것입니다 말로만 반공을 말하지 말고 진리를 바로 가르치는 교육이 있으므로 만이 완전한 반공 투사의 역사를 일으킬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기독 신자들이 성경이 햇빛같이 밝아지도록 교훈 해야만 앞으로 오는 흑암을 뚫고 나가게 될 것입니다.

 

  2. 종교적인 큰 각성을 주는 역사가 강하게 일어나야 할 때가 왔다고 봅니다.

  기독교는 이제 제일 큰 역사가 있게 될 것입니다. 모든 선지는 은혜시대 역사는 이방의 빛이 된다는 말과 교회가 확장될 것과 모든 나라 백성이 주님의 교훈을 앙망하게 될 것을 사42:1~8까지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그 밖의 모든 말씀은 전부가 기독교 종말에 일어날 역사를 말할 적에 동방 땅 끝에서부터 역사가 일어나므로 대적이 떨게 되고 세계 열방이 큰 각성을 받게 될 일과 하나님의 종을 들어서 모세 때보다도 더 강한 역사가 일어나므로 회개할 자는 회개를 시켜서 구원하되 새로운 시대가 이루어질 것을 가르쳤습니다. 이날까지는 그 영혼을 구원해주는 일에 목적을 두는 역사이지만 기독교 종말의 역사는 영과 육을 아울러 환란과 재앙이 올 때 구원해 주는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교훈 중에 제일 큰 일은 지상 왕국을 목적하고 말할 때에 과거 다윗 왕국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증거는 세상 종말에 일어날 예언이 되는 동시에 많은 선지를 통하여 빠짐없이 심판과 새 시대를 가르쳤으니 우리 인생은 이때에 하나님의 말씀에서 새로운 교육을 받아야 할 때가 이때라고 봅니다.

 

 

【문】4. 금일에 기독교인들이 말하기를 누구를 따라 가며 누구의 말을 믿어야 될는지 정신을 차릴 수 없다고 하는데 이것을 어떠한 방침으로 그들에게 만족을 줄 수가 있겠습니까?

【답】이것이 큰 문제라고 봅니다. 소위 교역자를 기른다는 신학교가 더 복잡해졌다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으로부터 30, 40년전 때만 해도 평양 신학이라면 귀한 종들을 많이 길렀다고 봅니다. 금일에 와서 신학교도 많고 신학생도 많고 교회도 많아졌지만 오히려 교인들이 하는 말이 우리 목사님도 은혜를 좀 받았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있는 상태를 볼 때 유감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는 성경을 든 지 40년 되는 오늘에 성경 본문을 그대로 읽어서 극도로 밝아지는 체험을 받았고 성경 본문만 가지고 얼마든지 상대편이 만족하도록 변론할 수 있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성경은 현 신학 박사들의 주석이 필요 없다고 봅니다. 왜냐 하면 하나님은 성경 본문에 완전한 변론을 빠짐없이 말씀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금일에 와서 신학적으로 무슨 신학, 무슨 신학 할 필요조차 없다고 봅니다. 또는 내가 생각하건데 성경은 이렇다 저렇다 할 수도 없고 또는 성경은 갖다 붙일 탓이라 말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신께서 어떻게 행하시겠다는 말씀을 선지들을 통하여 기록하게 하시고 그대로 역사하는 신의 역사를 받으므로써 인격적인 생활의 체험을 받게 되고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시국 난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는 것은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역사가 있으므로 해결될 것을 믿습니다. 어려운 일이 닥쳐오는 것이 예언대로 왔다면 그 어려운 일을 어떻게 해결해 주겠다는 것도 예언대로 될 것을 믿을 때에 난국을 돌파하고 나갈 수 있는 인격도 생활도 신의 역사로 완성될 것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때에 혼란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성경 본문이 햇빛같이 밝아지도록 증거해 주는 일과 또는 그들에게 새로운 신의 역사를 체험 하도록끔 인도해 주는 일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를 하려면 우리 자체가 그러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종교는 듣는 대로 보는 대로 판단하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즐거움을 삼는 자가 될 적에 말씀을 바로 증거할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잘못된 노선을 가면서 자기의 영계를 옳은 줄 생각한다는 것이 취한 자의 생활이라고 봅니다.

  우리는 종교를 지도할 때 그 교인들의 인격을 누구 말이나 듣고 따라 가는 정도에 있지 않게 말씀을 바로 깨닫게 하는 동시에 그 인격이 신의 체험을 받아 용사적인 투쟁을 할 수 있는 자가 되도록 하는 것이 있지 않으면 앞으로 교회는 도저히 거짓 선지의 더러운 영의 미혹을 막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인간 종말의 심판기에 형편을 빠짐없이 기록할 때에 본문만 읽어 가지고도 충분히 미혹의 영을 막을 수 있게끔 했다는 것을 확실히 깨달았습니다.

  사도의 교훈은 이미 흑암에 빠진 죽은 영들을 살려 천국에 들어가도록 목적을 두고 증거했다고 보며, 선지서와 계시록은 극도로 영계가 혼란하고, 교계가 혼란하고, 정계가 어지럽고, 인심을 수습할 수가 없이 악해지고, 경제가 혼란해서 생계를 유지할 수 없고, 도저히 앞일을 생각할 때에 살길이 없는 무서운 혼란이 올 때, 하나님의 자녀로서 완전히 바로 서서 나가도록 한 말씀이 계시록이요, 선지서라고 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시국이 올 때에 선지서를 다시 예언하는 역사로만이 많은 사람을 새 시대로 인도할 수 있는 일꾼이 될 것입니다.  

 

 

 

 특  집  

 

1. 3.1절에 우리들이 나갈 방향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첫째로 우리 민족은 3.1절에 억울한 피의 투쟁을 언제나 사라지지 않는 애국 애족의 불이 붙어야 할 것이다. 소위 양반이라는 학자들이 한국 청년을 기를 때에 자기네를 섬기라는 범위 하에서 길러냈다는 것은 결국은 이러한 비참을 이루는 민족이 되었던 것이다.

  청년을 기를 때에 민족을 살리는 용사로 길러야 할 것인데 자기네 양반 행세에 한 기계가 되는 청년으로 길렀다는 것은 삼천리 강토를 송두리째 떡 잘리듯이 아무런 가치없이 일본의 손에 먹혔다는 것은 애국 청년의 마음에 피가 찰 일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소위 종교인들이라는 사람들이 아무런 무기없이 만세를 불러 보았던들 아무런 효과를 못보고 억울하게 피만 흐르고 만 것 같으나 우리가 이러한 정신에 활동이 사라지지 않고 나간다면 이 정신 사상 속에는 모든 일이 따라오게 될 것이다.

  36년 일본의 노예화된 생활도 억울하지만 해방이라는 뜻밖의 일을 만난 민족이 아무런 가치없이 민족의 사상과 정신을 기르지 못한 이 민족의 살림살이는 남의 나라의 것을 얻어먹다가 세간살이 못하고 또 다시 빚을 지고 빚장이 소리를 듣게 되었다는 것은 우방 국가들에게 자랑할 일이 못되고 남을 거짓말로 악평하기 좋아하는 공산당에게는 공산 선전 거리가 되고 만 것 같은 환경 속에서 71년에 3.1절을 맞이할 때 반공이냐, 협상이냐 하는 싸움을 하게 되는 선거를 앞에 놓고 우리가 어떠한 방향에서야 할 것이냐는 것은 큰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때를 만나 아직까지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자기 양심과 사상을 살리는 시민주권을 가지지 못하고 술이나 한잔 얻어먹고 끌려가고 적은 돈을 받고 큰일에 자기 권한을 찾지 못한 허수아비 투표를 하는 사람이 없기를 바란다.

  금년의 투표야말로 멸공이냐 협상이냐 하는 큰 일을 좌우하는 일이니 사명 동지 여러분들은 투표를 위한 운동보다도 반공 진리 운동에 선구자가 되기를 바란다. 참된 진리 운동은 하나님이 움직여줄 일이니 조물주 하나님이 함께 하는 운동만이 하나님이 보호하사 라는 사상으로 세계를 통일할 새로운 나라가 동방 땅 끝에 나타나게 될 것이다.

  나의 생각은 필연코 승리는 하나님 편이 되는 자에게 있는 것인데 금년에 대통령으로 설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르나 하나님이 쓰고자 하는 사람이 서게 될 것이다. 왜냐 하면 금년부터는 우리 나라가 하나님께서 들어 쓸 때가 온 것이므로 누구든지 하나님이 들어 쓸 사람이 당선될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공산당을 심판할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보호를 믿고 기도하면서 반공 진리 운동을 할 때에 이 진리는 북방 세력을 하나님이 없애고 새로운 평화왕국을 세상에 이룬다는 진리 운동이니 인간이 볼 때는 작은 일 같으나 하나님은 제일 큰 일로 아시는 것이다.

  욜2:20을 보면 시온의 자녀들이 북방을 무서워하지 않고 금식일을 정하고 성회를 열고 합심하여 호소할 때 여호와께서 북편 군대를 없이하고 새 땅 축복을 주는 것을 제일 큰 일이라고 말씀했다. 인간들은 무엇이 큰 일인지 조차도 모르는 인간들이라고 볼 수 있다. 지금 진리 반공 운동이라 하니까 어떤 사람은 코웃음치며 경제 부흥을 해야 된다느니, 무력으로 완비를 가져야 된다느니 하고 있지만 사람은 경제나 무력에 속한 인간이 아니다. 경제를 초월하고 무력을 초월한 것이 인간의 위대한 인격이고 위력이라 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 국민이 하나님의 보호의 진리를 반대한다면 이 사람은 벌써 공산당에게 먹힌 사람이라고 본다. 왜냐 하면 공산당이 하나님의 보호를 반대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보호할 수 있는 인격은 3?1절의 정신보다도 좀 더 거룩하고 지혜롭고 담대하고 강한 인격에 올라가야만 될 것이다. 3?1절에 된 일이 싹이라면 금년 3월부터 일어나는 역사는 완전한 가지의 열매가 되어야 할 것이다.

 

 

2. 3.1절을 맞이하는 사명자의 눈물겨운 기도

  하나님이여 내가 무엇을 했다고 세상에 내놓을 것도 없고 하나님 앞에 입을 열어 한마디도 말 할 수가 없습니다. 중심과 사상을 보시는 아버지여, 골방 속에 엎드려서 빈민을 위하여 울 때에 내게 응답하여 나도 모르게 깊은 영계의 체험을 가지고 멸공진리의 비밀을 친히 받아 기록하게 하신 아버지여, 벌써 14년이 되는 이 아침에 3월달이 새삼스럽게 감격히 생각이 됩니다.

  1958년 3월 19일에 멸공진리에 대한 것을 받아쓰도록 하셨사옵고, 1960년 3월 1일에 이 서책을 민족 앞에 내놓게 하시고, 1969년 3월 1일부터 완전 영감의 변론의 입을 열어 주시고, 70년 3월 1일부터 서울에 새일 중앙 제단을 시작하게 하셨사옵고, 금년 3월 1일은 멸공진리운동을 하기 위한 진리 용사들이 일어나게 해주시는 것을 감사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여, 오늘부터 동방에 나타난 멸공진리운동에 생명을 바치고 나서는 종들에게 무조건 도와주시고 붙들어 주시고 주의 천사같이 해 주셔서 백전 백승의 돌진의 걸음을 걸어서 저 산을 넘어 하나같이 안식의 새 땅의 왕권을 받는 축복을 내려보내 주시옵소서.

  아버지여, 귀를 기울여 들으시옵소서. 이 땅에 이 민족의 아우성 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려 오나이다. 하나님 아버지여, 싸워야 하겠나이다. 일어나야만 하겠나이다. 싸울 무장을 보내주시옵소서. 일어날 새 힘을 막힌 강물이 터지듯이 강하게 보내주시옵소서.

  주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3.  3.1절부터 일어나는 진리 용사 사명동지들에게 부탁을 드립니다

  1. 완전한 인격적인 용사의 걸음이 무엇인 것을 아시고 피동적인 인격을 초월하여 승리 용사의 생활이 있기를 바랍니다. 타인의 인격에 끌리는 자 되지 마시고 잠자는 자를 깨우치는 인격이 되려면 흑암을 물리치는 진리의 빛의 변론이 강하여야 될 것입니다.

  진리 변론을 할 때에 상대편에게 끌려서 감정이나 흥분이나 또는 압력을 받지 마시고 날 센 칼이 무엇의 지배를 받지 않고 모조리 자르듯이 말씀의 변론이 칼같이 나가 횡설수설하는 거짓 영의 목을 자르는 변론이 있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되려면 아름다운 소식의 월간지에서 매달 나오는 신앙 문답편 논설편에 있는 말씀을 다시 한번 8월호부터 3월호까지 다 참고해 보시는 일이 좋을 것 같습니다. 언제나 월간지를 한번보고 버리지 마시고 8월호부터 잘 한 곳에 매어가지고 다니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2. 피차에 교제할 때 용사 동지들은 언제나 진리 변론에서 주고  받고 하는 시간이 많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잡담이나 농설, 또는 남을 판단하는 말은 엄금하고 동행을 하든지 동석을 하든지 항상 입에 말씀 변론을 하는 자리에서 시간을 보낸다면 자기도 모르게 입에 말씀이 오는 증거가 있게 될 것입니다.

 

  3. 남녀의 동행을 엄금하고 여자는 언제나 조용히 잠잠하게 방문 전도를 힘쓰게 하시고 남자는 노방 전도, 관공서나 각 기관에 가서 국가의 장래를 진리로써 말하는 시간이 많아야 할 것이며 쓸데없는 낭설을 엄금하고 언제나 마이크를 사용할 때는 하나님께로 온 경고문이나 전도문을 사용하며 진리를 탐구하는 자가 나타날 때는 조용히 그 사람만 깨닫도록 변론을 해 주어야 될 것입니다. 공연히 아무 사람이나 함부로 붙들고 시간을 보내지 않도록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왜냐 하면 진리를 받지도 않을 사단의 자식에게 참소를 받지 않게 하기 위한 목적입니다.

 

  4. 어느 사람을 만나든지 동방에 이러한 일이 나타났다는 진리 소개만은 듣든지 말든지 말해야 될 것입니다. 과거에 선지나 사도들도 하나님께서 나타난 일은 듣든지 말든지 말했던 것입니다(행 26:12~32). 이렇게 할 때에 하나님은 책임지고 역사할 것은 당신이 시작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5. 어느 사명 동지든지 자기가 직접 나서지 못할 경우에는 생명을 바치고 나선 종들을 내가 나선 것 같이 알고 그분들을 기도로 밀어주고 또는 할 수 있는 데까지 전도비를 내어 정성껏 도와 드린다는 마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물질 봉사에는 네 가지 방법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전도지나 서책을 사서 전할 자에게 주는 일, 혹은 성미를 떠서라도 식사를 돕는 일, 가정에서 경비를 절약해서라도 교통비를 돕는 일과 의복이 남루할 때는 친수로 세탁을 해주든지 어느 모로든지 추태가 없도록 해주는 일, 이런 등등의 일을 해야만 될 것입니다. 또는 물질을 바칠 마음이 계신 이는 새일수도원 주소로 보내도 좋습니다.

 

  6. 우리는 이 진리 운동을 3월부터 최선의 노력을 다할 때에 이 나라에 축복이 올 것이니 사명 동지 여러분은 총 궐기하시기 바랍니다. 만일 잠잠하게 계신다면 한냥중을 받은 자가 될 줄 알고 각자가 조심해서 정신을 차리고 전력을 진리 운동에 기울여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