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례 (1971년 4월호)

설  교  편

 1. 순종과 성결 (벧전1:20~25) 

 2. 주 재림과 성경 해석 문제 (벧후1:16~21)

 3. 참는 종에게 나타난 계시 (계1:9~20)

 4. 환란에서 기쁨으로 받는 복음 (살전1:2~7) 

 5. 흙으로 돌아갈 몸과 하늘로 올라갈 몸 (창3:17~19, 계11:7~12) 

 6. 노아 가정에 나타난 말씀과 세계 (창8:20~22, 9:25~27)

 7. 해롭게 할 권세와 인치는 일 (계7:1~3)

 8. 하나님의 평강이 같이 하는 생활 (빌4:4~7) 

 9.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 (히7:18~25)

10. 불법을 행하는 자의 비극 (마7:22~23)

11. 배워지는 바울의 인격 (빌4:10~15) 

12. 베드로가 본 환상과 요한이 본 계시 (행10:9~16, 계22:6~7)

13. 신앙의 복된 가정 (창18:1~33)

14. 참된 지식을 따르는 생활 (빌3:5~16) 

15. 시험이 올 때 인정받는 자가 되자 (약1:12~18) 

 

장년 공과편 - 예수님께서 칭찬하신 믿음

제1과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심 (마8:5~13)

제2과  열두 해를 혈루증 앓는 여자의 믿음 (막5:25~34) 

제3과  가나안 여자의 믿음 (마15:21~28)

제4과  시몬 베드로의 믿음 (마16:16~20) 

 

어린이 공과편 - 요한복음 공부

제9과  참된 교훈을 가져오신 예수님 (요7:14~21) 

제10과  자유를 주시는 예수님 (요8:31~37) 

제11과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보게 하신 예수님 (요9:1~12) 

제12과  선한 목자 되신 예수님 (요10:11~18) 

 

논 설 편

1. 충성된 것 같으나 거짓된 사람

2. 쉬운 것 같으나 어려운 일 

3. 슬픈 일 같으나 기쁜 일 

4. 작은 일 같으나 큰 일 

5. 큰 일만 남은 세상 

 

신 앙 문 답

1. 지금 완전 무장을 갖추어야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완전 무장이 안 되는 원인이 무엇입니까?

2. 필요 없는 일에 시간을 보내지 않겠다고 결심하고도 필요 없이 시간을 보내는 생활을 하게 되는데 있어서 어떻게 하여야 되겠습니까?

3. 공연히 집안이 복잡해지고 합심이 안되고 심지어 어린아이들까지도 순종을 하지 않고 날마다 공연히 어지러워지는 일이 무슨 원인인지 구체적인 설명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 

4. 지금 교회에 영계가 이렇게 혼란한 가운데서 영계를 어떻게 하여야 조금도 혼선이 없이 완전 영계로 들어 갈 수가 있겠습니까. 이 일에 대해서 좀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특    집

1. 4월을 맞이하는 성도의 감상

2. 71년 4월을 맞이하는 사명자의 간곡한 기도

3. 멸공 진리 운동에 대한 의의를 다음과 같이 알려 드립니다 

4. 독자 여러분에게 부탁하는 말씀

5. 4월과 우리 나라

  ※ 알리는 소식 

 

 

 

 

 

 

 

 

 설 교 편

 

순종과 성결

- 벧전 1:20~25 -

 

  하나님께서는 완전한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니고, 순종하는 자에게 성결함을 주어서 당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을 기독교의 완전 역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은 우리를 완전하게 할 하나님의 진리를 순종하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 것이 생명을 받느냐, 못 받느냐, 완전한 인격을 받느냐, 못 받느냐는 문제가 결부되는 것이다.

  이제 순종과 성결에 대하여 본문을 들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진리를 순종할 일

  1) 우리를 위하여 나타났으므로(20)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이 당신을 찾아오는 것을 기다리는 신이 아니고, 친히 말씀하시고 예정하신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인생을 찾아 와서 모르는 인간들에게 알도록 나타내는 것을 하나님의 진리 역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조건 나타난 진리를 순종하는 것만이 타락한 인생의 할 일이라는 것이다.

  만일 인생이 요청하는데 의하여 하나님께서 맘을 돌이켜 주신다는 것은 복음 진리의 원칙이 아니고, 인생이 알지도 못하고, 구하지도 못했지만, 하나님께서 이미 아시고, 우리 인생을 깨우쳐 주고, 구원하기 위하여 나타난 것이 그리스도의 도성 인신의 역사라는 것이다.

  2)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했으므로(21)

  진리라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죽었다 부활했다는 것이 진리의 전체의 큰 뜻이 되는 것이다. 만일 인생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옳은 도리를 가르쳤다 하더라도 그 목적을 달성해 주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실천하는 역사가 없었다면 아무리 하나님의 진리가 인생을 향하여 분명히 기록되었다 하여도 인생 자체로는 도저히 그 진리를 믿을 수도 없고, 행할 수도 없는 것이 인생이므로 아들을 십자가에 죽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향하여 공의의 법칙을 따라 행하지 않고, 사랑의 법칙을 행하기 위한 선한 방법이다.

  왜냐하면 공의의 죄 댓가를 무조건 없애 버린다는 것도 진리가 아니요, 또는 인간이 죄가 있다고 덮어놓고, 공의의 법칙을 인간에게 행하여 죽인다는 것도 하나님의 진리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진리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대신 죽고 다시 살아서 인생에게 완전한 소망을 주어 그 소망 아래서 기쁨으로 순종하게 하는 것이 생명이 있는 진리 운동이라는 것이다.

 

  2. 성결하게 하는 일

  1) 영혼을 깨끗케 하심(22)

  하나님은 사람을 성결케 할 때에 먼저 그 영혼을 성결하게 하는 것이다. 사람의 영혼이라는 것은 마귀의 지배를 받을 적에 마귀의 종이 되고 하나님 신의 지배를 받을 적에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이니 우리가 피차에 사랑하고 하나가 되는 것은 사람의 힘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영혼을 깨끗케 해 주셨으므로 피차에 거짓없이 서로 사랑하는 단체를 이루는 것이다. 만일 어떠한 교회에서 사랑이 떠났다면 그것은 그 영이 죽은 증거라고 볼 수 있다.

  기독교의 성결한 사랑이라는 것은 육체의 정욕을 채우는 방랑적인 사랑이 아니요, 먼저 영혼이 깨끗하게 되므로 자동적으로 맘이 뜨거워지는 사랑이 있게 되므로 자아라는 것이 없는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아버지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것 뿐으로써 하나를 이루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은혜로 깨끗함을 주었으므로 자기라는 것이 결부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이 되는 것뿐이다.

  2) 영생의 씨를 받았으므로(23)

  우리는 성결함으로써 영생을 받는 것이 아니고, 썩지 않는 영생의 씨가 왔으므로 그 생명이 우리에게 약동할 때에 자동적으로 성결을 이루는데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승리할 수 있는 생활에 들어간다. 하나님의 말씀 자체는 거룩한 말씀이니 그 말씀이 역사하는 곳에는 성결이라는 것은 필연적인 열매가 될 것이다.

 

  결    론

  하나님은 인생에게 요구하는 것은 순종밖에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사람이 행함으로써 완전하게 되는 것을 요구하지 않고, 당신이 행함으로써 완전하게 되는 것을 요구하는 신이시다. 그러므로 사람을 창조할 때에 한 질그릇에 불과한 인격을 주었던 것이다. 이것은 아담을 통하여 천국을 이룰 것을 뜻한 것이 아니고, 둘도 없는 독생자의 역사로만이 이루어지는 것을 뜻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순종함으로만이 성결한 인격을 이루는 동시에 새 시대를 이루는 것을 하나님께서 영광으로 받으시는 것이다.

 

 

주 재림과 성경 해석 문제

- 벧후 1:16~21 -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이 해석할 수 없고, 주님께서 역사하므로만이 그 성경이 이루어지는 것뿐이다. 왜냐하면 성경 전체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통하여 타락한 인생을 다시 구원해서 그 창조의 목적을 달성하겠다는 언약의 말씀이니 이 말씀을 사람이 함부로 해석한다는 것은 예를 든다면 어떤 사람이 계약서를 쓸 때에 그 계약서를 쓴 사람이 책임을 질 글이므로 한 자라도 틀림이 없이 쓰는 것도 실천하는 것도 계약서를 써서 주는 자에게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생에게 계약서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언약으로 세울 때에 말로만 한 것이 아니고, 완전한 문서로써 기록한 것이 여호와의 말씀인 성경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날까지에 우리가 성경을 증거한 것은 예언대로 그리스도께서 실천하신 사실을 만민이 알도록 증거한 것뿐이다. 그러므로 부활을 증거하는 사명에 대표적인 사도 베드로는 주 재림과 성경 해석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1. 재림에 대한 징조를 봄 (16~18)

  베드로는 주님께서 재림하는 일에 대하여 자기가 변화 산에 올라가 본 징조를 가지고 재림하실 주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1) 큰 위엄을 봄(16)

  그리스도를 따라가던 제자들은 평소에는 자기네와 똑같은 사람이므로 침식을 같이 했고, 또는 역사를 할 때에도 그 역사에 동참해서 같이 수종을 드는 제자였던 것이다. 그러나 거룩한 산에 올라가서 갑자기 그리스도의 몸에서 큰 빛이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희어지는 광경이 보이면서 감히 두려워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 없는 모양으로 나타났다. 이것을 본 제자들은 무서워서 다 쓰러졌던 것이다.

  이것을 본 베드로는 재림의 주가 올 때에 그와 같은 모양으로 오실 것이라고 증거한 것뿐이다. 왜냐하면 초림의 주로 오실 때는 어린양의 제물로 나타났고, 재림의 주로 오실 때는 만왕의 왕으로 오시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초림의 주는 양같이 온유한 모양이요, 다시 오시는 주님은 위엄을 가지고 나타나서 원수를 갚는 때이기 때문이다.

  2) 친히 하나님의 음성을 들음 (17~18)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소리가 들려 올 때에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음성을 듣게 될 때에 분명히 인성만이 아니요, 신성을 가진 독생자라는 것을 깊이 깨닫고 증거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하나같이 그리스도를 증거할 때에 분명히 참 메시야라는 것을 전하기 위하여 피 흘리기까지 싸웠던 것이다.

 

  2. 성경 해석에 대하여

  1) 확실한 예언이 됨(19)

  초림의 주가 올 때에도 확실한 예언이 글자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요, 재림의 주가 올 때에도 확실한 예언이 글자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부활을 증거할 사명을 맡은 베드로는 자기는 재림에 대한 징조를 본 것뿐이고, 재림시에 될 예언은 더 확실한 것이 있는데, 이것은 다시 샛별 같은 새로운 역사가 나타남으로만 알게 된다는 것을 말할 때에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라고 말한 것이다(계22:16).

  2) 예언을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라고 함(20~21)

  예언은 예언대로 역사가 있게 될 때에 그 성경을 그대로 읽어서 증거할 것뿐이다(계10:7). 만일 기독교 종말의 예언이 어떤 사람의 해석으로서 분명히 알게 된다면 그 해석을 끼고 얼마든지 마귀가 역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마귀 미혹을 받지 않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재림의 주에 대하여 확실히 예언할 때에 선지서를 읽어보면 초림의 주가 올 것은 사7:14, 9:1~2, 42:1~4, 53장, 61:1, 65:1에 나타나 있다. 이밖에 이사야 선지서 전체가 재림의 주가 올 때 될 일을 세밀히 말한 것이고, 슥9:9, 11:10~14 이외는 전부가 재림의 주가 올 때에 될 일을 가르친 글이라고 보게 된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자기가 성경대로 십자가 부활을 증거한 외에는 성경을 사사로이 풀지 말라고 말한 것이다. 그런데 금일에 와서 선지서나 계시록을 어떤 박사들이 주석을 쓴다는 것은 그 종들의 사명이 아닌 것이니 그 주석을 가지고 재림의 주를 영접할 수 없고, 우리는 이 시대에 와서 사도가 증거한 외에 선지서를 그대로 읽어서 증거할 때가 온 것이 현실이라고 본다.

  우리는 구약 말기에 선지들이 당하던 그 시대를 만난 것이 현실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그 시대 종교 부패, 정치 부패, 인심 악화, 경제 혼란, 북방으로 오는 환란. 이것이 금일에 우리가 당한 난국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와서 그들이 묵시로 예언한 말씀을 글자 그대로 읽어서 증거할 때가 왔다고 본다. 지금 새로운 샛별의 역사가 나와야만 기독교는 성경을 바로 증거하는 동시에 난국을 돌파하고 남은 종이 되어 세계적인 성도 통치의 왕국을 이루게 될 것이다.

 

  결    론

  하나님의 종은 자기 사명과 성서의 한계를 바로 정해야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 사명의 한계선을 성경에서 바로 획선을 긋지 못한다면 오히려 자신이 위험하게 되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위험이라는 것은 말씀을 증거하는 종이 자기가 증거할 말이 아닌 것을 잘못 증거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혼선시키는 과오를 범했기 때문이다(사8:20).

  그러므로 우리는 주 재림과 성경 해석에 대하여 특별한 사명적인 노선에서 바로 서야만 될 것이다. 금일에 기독교가 너무나 영계가 혼선되고 진리가 혼선된 것은 주 재림과 성경 해석에 탈선된 과오라고 보게 된다.

 

 

참는 종에게 나타난 계시

- 계 1:9~20 -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종을 들어서 역사할 때에 참지 않고는 도저히 일할 수 없는 환경에 몰아넣고 끝까지 참고 나가는 종을 인정하는 동시에 보호하고 보호하는 동시에 그 종에게 하나님의 숨은 비밀이 무엇이라는 것을 세계가 다 알도록 글을 기록하게 한 것을 선지서와 계시록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큰 계시를 보일 때는 무서운 환란이 있게 하는 동시에 그때에 온 거와 같이 앞으로도 오는 환란을 보여 주었고 그때에 참는 종이 환란을 이기고 나간 것과 같이 앞으로도 끝까지 참는 종이라야 환란에서 남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계시가 즉 예언서라는 것이다.

  이제 참는 종에게 나타나는 계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본문을 들어서 말한다.

 

  1. 환란을 통과한 요한 (9상반절)

  환란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한 환란이다. 인간이 볼 때는 환란이 불행스러운 일 같으나 이 환란이 있으므로써 의로운 역사라는 것은 있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도 대중에게 환영을 받을 때가 의를 이루는 완전 역사가 아니고 대중이 일어나서 예수님을 욕하고 때리고 십자가에 못박는 환란이 오므로써 하나님의 의는 십자가에서 완성된 것이다.

  의라는 것은 남을 살리기 위하여 환란, 고통을 이기고 나간다는 것이 의이기 때문이다. 하나님도 인간을 살리고자 할 때에 아들에게 무서운 환란을 통과시키면서 의로운 일을 이루도록 하시었고 사도들도 무서운 환란을 통과시키면서 의로운 일을 하게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주님께서 환란을 통과할 때에 십자가 앞에서 인정을 받은 사람이요 네로 황제의 무서운 박해가 와서 그 환란에서 모든 종들은 다 쓰러지고 말았지만 사도요한은 하나님의 보호로 그 환란을 통과할 때에 그 영계는 최고도로 높은 단계를 이루게 되었다. 순교자는 죽어서 왕권을 받게 되는 것이요 환란에서 남은 자가 된 자는 살아서 왕권을 받는 영계에 들어가게 된다.

  만일 사도 요한이 환란에서 쓰러지고 말았다면 완전 계시를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환란에서 쓰러지지 않고 남은 자가 될 때에 완전 계시를 하나님께 받는 단계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은사는 무조건 거저 주는 은사요 완전 계시를 보는 것은 특수한 계시이니 이것은 하나님 앞에 완전히 인정을 받는 단계에서 시대적인 사명적 계시를 보게 되었던 것이다.

 

  2. 밧모섬에 있는 요한 (9하반절)

  인간이 볼 때는 환란을 통과한 요한이 쓸쓸한 밧모섬에 갇혔다는 것은 오히려 순교를 한 자보다 오히려 괴로운 자리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그 자리가 사도 요한으로서는 마땅히 가야 할 곳이므로 하나님은 밧모섬으로 요한을 인도한 것이다. 하나님의 인도라는 것은 직접으로 인도하는 것만이 아니고 원수를 들어서 쫓아내고 끌고 가는 것도 결국은 하나님의 인도가 된다.

  왜냐 하면 원수의 마음까지도 하나님이 주관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참는 종은 무엇이나 다 감사할 일이 되는 것이다. 왜냐 하면 하나님의 신이 항상 같이하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하나님은 동서양에 경계가 되는 밧모섬으로 인도했느냐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의의가 있다.

  첫째 : 마지막 환란과 재앙의 날에 될 일을 보여주기 위하여 밧모섬으로 인도한 것이다. 마지막 환란은 중동을 중심 하여 일어나되 지중해를 둘러싼 지경에서 있을 것을 보여주는 묵시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앞으로 될 일을 보여줄 때에 반드시 그 위치와 경계를 미리 정한 뜻을 요한에게 보여주기 위하여 지중해 밧모섬으로 인도한 것이다. 땅위에서 마땅히 될 일을 보여주는 것은 영적이 아니요 직접 실지적으로 지상에서 이루어지는 일이 되기 때문에 지상에 위치를 밧모섬으로 정했던 것이다. 

  둘째 : 지금 국제 정세를 볼 때에 과학적인 인류 전멸의 전쟁은 지중해를 중심 하여 있을 것은 과학 발전의 근거지가 지중해를 중심 한데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계시록은 인간 과학 발전으로 인류 전멸의 전쟁은 지중해를 중심하여 있는 것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셋째 : 어느 선지나 다 지중해를 중심 하여 묵시를 보게 되었던 것이다. 모든 선지는 하나같이 중동을 중심 하여 북방으로 환란이 올 것을 보여주었고 종말의 역사는 동방 땅 끝 바다 옆에서 일어날 것을 보여 주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계시의 비밀은 분명히 아시아를 중심 하여 올 환란과 아시아를 중심 하여 일어날 기독교 종말의 완전 역사를 보여 주었다고 보게 된다.

 

  3. 주의 날에 계시를 봄 (10)

  어찌하여 주의 날에 계시를 보았느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주의 날은 환란을 통과한 주께서 승리한 날이라고 보게 된다. 우리는 주님께서 승리하는 날이 없다면 세계 인류는 도저히 마귀의 권세를 이기고 벗어날 수가 없을 것이로되 주께서 이날에 승리하고 부활하셨으므로 마귀 권세 아래서 죽게 된 인간들은 사망의 권세를 벗어난 해방이라는 가장 복된 일을 보게 된 것이다.

  첫째아담이 마귀에게 졌으므로 아담은 축복을 빼앗겼고 둘째아담 예수님은 승리하셨으므로 잃었던 하나님의 축복을 다시 인간에게 주게 된 일이 그리스도의 승리의 부활을 통하여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의 날에 완전 승리의 평화 왕국이 올 계시를 환란을 통과한 요한에게 보여준 것이다.

 

  4. 두려운 주님으로 나타나심 (11~17)

  모든 제자들이 4복음과 편지서를 쓴 것은 두려운 주님으로 나타난 역사를 말한 것이 아니고 나사렛 목수의 한 사람으로 나타나서 가르친 일, 이적을 행한 일, 십자가에 죽은 일, 부활한 일 이것을 기록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글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우리의 구주라는 것을 믿게 하기 위한 전도문이라고 본다.

  그러나 두려운 주님으로 나타난 계시는 진노의 날에 용서 없는 재앙이 올 때에 하나님의 종은 어떠한 종이 되어야 하며 교회는 어떠한 교회가 되어야 하며 전할 복음은 어떠한 복음이라는 것을 보여준 것이 계시록의 목적이다.

 

  5. 촛대교회 사자에게 알려주는 비밀 (18~20)

  십자가의 비밀은 이방의 사도가 되는 바울이 계시를 받아 분명히 알게 되어 기록한 글이다(엡3:1~6). 그러나 계시록은 온 땅이 다 환란 재앙에서 망하게 되더라도 남은 교회가 될 촛대교회를 지킬 자에게 전할 말씀을 보여준 계시다. 그러므로 진노의 날에 남은 종은 반드시 일곱 교회에 써 보낸 계시록이 아니고는 환란에서 양떼를 살릴 수 없을 것이다.

 

  결    론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끝까지 참고 이긴 십자가로 말미암아 죄에서 구원을 받고, 사도 요한이 환란을 통과한 남은 자로서 받은 계시록을 통하여 환란과 재앙에서 영, 육이 아울러 구원받는 역사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될 것이다.

 

 

환란에서 기쁨으로 받는 복음

- 살전 1:2~7 -

 

  기독교의 복음이라는 것은 환란을 통과한 십자가 복음인 동시에 환란 가운데서 목숨을 바치고 전하는 동시에 받는 자로 환란에서 기쁨으로 받는 복음이다. 복음이라는 자체는 인간의 힘을 초월한 신의 역사로 되어지는 일을 복음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역사할 것을 선지들에게 묵시의 예언으로 기록한 데로 이루어지는 역사이니 사람이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니요, 사람이 하나님을 찾는 것도 아니요, 하나님이 사람을 찾아서 사람을 들어서 사람을 찾도록 하는 복음이라고 본다.

  이제 환란에서 기쁨으로 받는 복음 운동에 대한 일을 다음과 같이 본문을 통하여 알 수 있다.

 

  1. 항상 감사 기도하는 일이다 (2~3)

  우리의 기도라는 것은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이 올 때에 여기에서 믿고, 역사하고, 사랑하고, 수고하는 생활에서 서로 참고 서로 기억하는 마음에서 서로 서로 원망이 없이 서로 불쌍히 보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은 항상 감사함으로 기도하는 성도의 교통이라고 볼 수 있다.

  기도라는 것은 어려운 일을 극복하는 중에서 감사함으로 드리는 기도라야 그 기도는 하나님이 받으시는 기도가 될 것이다. 어느 종이나 아무리 어려움이 와도 감사함으로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참된 복음을 위한 종이라고 볼 수 있다.

 

  2. 택한 자를 찾기 위한 복음의 역사 (4~5)

  복음을 전하는 역사라는 것은 아무리 어려움이 와도 택한 자를 찾기 위한 하나님께서 성신으로 역사하기 때문에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문이 열려지고, 또는 택한 자가 아무리 어려움이 와도 복음을 받아 믿게 되는 것이다. 복음은 인간의 힘으로 벗어날 수 없는 마귀의 시험에서 능력으로 택한 자를 구원해 내는 것을 목적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어디를 가나 환란을 당하게 될 때에 역사가 일어나서 복음을 전했던 것이다.

 

  3. 주를 본받는 자가 되는 일 (6)

  누구든지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가는 생활이 아니라면 기쁨으로 복음을 받을 수도 없고, 또는 전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은 도덕을 초월한 능력의 역사로서 그 생명을 구원해 주는 일이므로 언제나 환경의 지배를 받는 것보다도 환경이 어지러운 가운데서 복음을 받으므로 그 환경을 벗어나는 역사를 생명의 종교가 되는 복음 운동이라고 하는 것이다.

 

  4. 믿는 자에게 본이 되는 일 (7)

  하나님께서 환란 가운데 기쁨으로 복음을 받음으로써 교회를 서게 한 것은 모든 신자에게 표본이 되게 하는 역사로 하게 된다. 기독교가 만일 환란에서 역사를 못하고 쓰러진 기독교라면 우리는 도저히 앞으로 오는 환란을 이길 수 없을 것이로되 환란에서 기쁨으로 복음을 받아서 세운 교회이므로 앞으로 환란 가운에서 기쁨으로 승리하고 새 시대를 정복하게 될 것이다.

 

  결    론

  하나님은 완전한 사랑이 계신 동시에 그 사랑을 중심하여 인생에게 역사하는 것을 복음 역사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은 환란이 와도 기쁨으로 복음을 받을 수 있도록 역사해서 복음을 전하는 자로 상급을 받고, 복음을 받은 자로 큰 축복을 받는 동시에 완전한 신앙에 들어가도록 역사하는 것을 기독교의 초인간적인 역사라는 것이다.

 

 

흙으로 돌아갈 몸과 하늘로 올라갈 몸

- 창 3:17~19, 계 11:7~12 -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이신 동시에 사람도 그 역사에 따라서 움직이고 있다. 하나님께서 아담, 하와를 창조하시고 흙에서 창조를 받은 몸을 흙으로 돌아가지 않고 하늘로 올라가게 하는 것이 창조의 목적이었던 것이다. 흙에서 난 몸이 하늘로 올라가게 되는 것은 무조건 되는 것이 아니요, 반드시 간교한 뱀으로 시험을 해보고 이기면 흙으로 돌아가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다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였던 것이다.

  그러나 아담이 간교한 뱀을 이기지 못하므로 흙으로 돌아갈 몸이 된 인생을 다시 간교한 뱀을 이기고 그 몸이 하늘로 올라가기까지가 알파와 오메가가 되는 것이다.

 

  1. 흙으로 돌아가게 된 몸 (창3:17~19)

  아담이 간교한 뱀에게 미혹 받은 여자의 말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과를 먹었다는 것이 결국은 흙으로 돌아갈 몸을 이루게 된 것이다. 소위 왕권을 받아야 할 사명자가 여자의 말을 따라갔다는 것은 큰 과오가 아닐 수 없다. 하와는 뱀의 미혹을 받고 선악과를 먹을 때에 벌써 그 몸은 뱀의 도구가 되는 행동을 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생령이 된 아담을 통하여 생명과를 먹고 그 몸이 하나님과 동거동락하는 것이 창조의 목적이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몸이 없는 여호와께서는 몸이 있는 사람을 통하여 당신의 사랑의 만족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완전한 것을 줄 수 있는 완전한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완전한 것을 주는데는 완전히 이기는 사람에게 준다는 것이 하나님의 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상대하여 큰 나라를 이룰 사명을 맡은 자로서 뱀의 도구가 된 여자를 용납했다는 것은 벌써 하나님의 일꾼이 될 수 없는 자격인 동시에 선악과를 먹기까지 했다는 몸은 필경은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몸이라는 것이다.

  이제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몸이 되는 죄는 다음과 같이 볼 수 있다.

  첫째 : 주권을 상실한 것이다.

  남자는 여자를 지배하라는 것인데 여자 하나를 지배하지 못하고 여자에게 지배를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이 준 주권을 상실한 죄이다.

  둘째 : 여자의 손에 있는 선악과를 먹었다는 죄다.

  하나님의 일꾼이 남을 옳게 먹여야 할 사람이 여자의 손에서 주는 선악과를 경솔히 받아 먹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용납할 수 없는 죄이다.

  셋째 : 하나님의 일꾼이 하나님의 말씀을 두렵게 알지 않고 여자의 말에 끌렸다는 것은 말씀을 전할 자격이 없는 인격이다.

  하나님의 일꾼은 주권을 찾지 못하고 의무를 상실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하지 못한 자는 모든 일이 다 헛수고가 되고 또는 열매 없는 인격으로 흙 한 덩이로 이루고 마는 것이다.

 

  2. 하늘로 올라갈 몸 (계11:7~12)

  하나님께서는 이 날까지에 종들을 통하여 역사하신 것은 죽은 영을 살리는 일에 목적을 두고 역사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영들이 다 타락하여 죽은 영들이니 그 영을 살려 놓고야 하늘로 올라가는 몸이 되는 역사를 하겠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계 인류가 다 하나같이 죽은 영들이 살게되는 일이 있게 하고 산 영들을 한 번 시험을 해서 시험에 떨어지지 않으면 그 몸이 하늘로 올라가게 하는 역사를 하는 것이 오메가의 역사이다.

  죽은 영을 살리는 일에는 마귀로 시험을 해보는 때가 아니고 이미 마귀에게 사로잡힌 영들을 해방을 주기 위하여 회개 운동을 일으키되 민족적 국경의 차별이 없이 회개만 하면 무조건 그 죄를 용서하고 사망의 법에서 구원하는 역사이다(눅24:47~48).

  시험이라는 것은 죽은 영들을 시험해 보는 것이 아니고 산 영을 가진 자를 그 몸이 영생하게 하는 목적을 두고 역사 하는데는 에덴 동산에서 생령을 가진 아담, 하와를 간교한 뱀으로 시험해 보듯이 중생 받은 생령의 사람들을 시험해 보는 때를 인류 종말의 환란기라는 것이다. 에덴 동산에서는 아담이 여자의 말을 듣고 선악과를 먹었으므로 흙으로 돌아갈 몸이 되었고 기독교 종말에는 음녀적인 바벨에게 미혹을 받지 않아야 영생할 몸이 되는 것이다.

  이제 하늘로 올라가는 몸이 되는데 있어서 다음과 같은 요소가 있다.

  첫째 : 작은 책을 꿀같이 먹고 쓴 것을 통과하여 세계적인 예언을 다시 하는 대표의 사람이 나오는 일(계10:10~11).

  둘째 : 진리로 하나같이 척량을 받는 일(계11:1).

  셋째 : 권세를 받아 마귀의 세력과 싸워 이기는 일(계11:3~6).

  넷째 : 삼일 반 동안 쓰러져 있다가 썩지 않고 하늘로 올라가는 일(계11:7~12).

  첫째아담은 성신을 받지 못했으므로 이기지 못하였지만 말세의 종은 둘째아담 예수님의 승리의 왕권으로 오는 성신을 받아 예언의 말씀을 증거하는데는 권세까지 받게 되므로 옛 뱀 용의 앞잡이 짐승과 거짓 선지의 세력을 이기게 되어 변화 승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로 올라가는 몸이 되는 것은 말씀 권세로 마귀 권세를 이기고 들림 받게 되는 것을 기독교 종말 역사라는 것이다.

  우리 앞에 난국은 말씀을 지키나, 못 지키나 시험해 보기 위하여 붉은 용, 붉은 짐승, 거짓 선지가 권세를 받고 나와서 시험해 보는 것을 난국이라는 것이다. 이 난국을 돌파하는 것은 예언의 말씀을 조금도 가감 없이 증거하는 종을 통하여 난국을 돌파하고 다시 에덴 축복의 새로운 왕국을 이루는데는 마귀의 세력을 이기고 나간 자들로 지상 통치 평화 왕국이 이루어진다.

 

  결    론

  하나님은 흙으로 돌아갈 사람이 되게 한 것은 공의의 법칙이라면  하늘로 올라갈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은 사랑의 법의 완성이라고 본다. 사람이 아무리 타락해서 흙으로 돌아가는 인생이 되었지만 하나님의 사랑으로 다시 하늘로 올라갈 수 있는 사람을 만들어서 완전한 왕국을 이루는 것을 하나님의 의요, 승리라는 것이다.

 

 

노아 가정에 나타난 말씀과 세계

- 창 8:20~22, 9:25~27 -

 

  인류 역사상 가장 귀한 가정은 노아 가정이라고 볼 수 있다. 개인적인 신앙으로는 특별한 사람들이 역사적으로 많이 있지만 온 가정이 단합된 가운데서 세계 인류의 어머니 가정이 되는 노아의 가정은 대표적인 가정이니 만큼 그 가정에 나타난 여호와의 말씀은 세계 인류가 이 땅에 존재할 때까지 큰 문제를 놓고 나타난 말씀이라고 본다.

  이제 노아의 가정에 나타난 말씀과 세계 문제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자연계 문제 (8:20~22)

  하나님은 노아의 가정에서 드리는 제사를 향기롭게 받고 말씀하실 때에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고 하시었다.

  우리는 자연을 지배하는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안심하고 살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무엇이나 언약이 없이 행하시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만일 자연계가 움직이는 일에 있어서 자연이라는 모든 움직이는 일이 조물주의 언약이 없이 움직이는 것이라면 안심할 수 없는 세계라고 볼 수 있을 것이로되 노아의 가정에 나타난 말씀에 의하여 자연계의 어떤 변동이 있으므로 지구에서 사람이 살 수 없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왜냐 하면 노아의 가정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어서 온 가정이 홍수 심판에서 구원을 받은 가정이므로 그 가정에 나타난 말씀에 의하여 자연계에 큰 변동이 없는 장래를 의심 없이 믿을 수 있다. 어떤 과학자의 말보다도 우리는 노아의 가정에 나타난 말을 믿어야 할 것이다.

 

  2. 셈의 하나님을 찬송할 일 (9:25~26)

  하나님은 노아의 입을 통하여 “셈의 하나님을 찬송하리라”고 한 말씀은 노아의 가정에서부터 금일까지 셈의 장막에 하나님은 나타났다.  언약 시대나 율법 시대나 은혜 시대나 다 셈의 장막에서 시대적인 새로운 역사가 나타나서 시대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이 나타나는 동시에 이루어진 것이다.

  아브라함도 모세도 메시야도 다 셈의 장막에서 나타나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역사를 세상이 알도록 한 것이니 앞으로 심판과 새 시대를 앞에 놓고 급한 환란과 재앙을 피하고 남은 자가 되어 새 시대에 들어가는 역사도 동방 땅 끝이라고 말했고 하나님은 해 돋는 편에 영광으로 임하실 것을 말씀했으니 오늘에 지금 아시아 대륙에 적그리스도의 나라가 강한 위력을 가지고 다 삼켜 먹다 남은 땅은 우리 나라라고 보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보호는 우리 나라에 있으므로 셈의 하나님을 찬송하게 될 것이다.

  사24:16을 보면 “땅 끝에서부터 노래하는 소리가 우리에게 들리기를 의로우신 자에게 영광을 돌리세 하도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사42:10을 보면 여호와께 새 노래로 노래하며 땅 끝에서부터 찬송하라고 하였고, 사59:19에 “해 돋는 편에서 영광을 두려워하리라”고 한 것을 보면 셈의 하나님을 찬송할 때는 분명히 재앙의 날에 동방 땅끝 사람이 하나님을 찬송한다고 하였으니, 셈의 하나님은 셈의 장막에서 모든 묵시를 보여줄 적에 중동에서 북방은 망한다고 하였고, 동방에서는 여호와를 영화롭게 한다고 하였고, 서방 사람은 셈의 장막에서 나타난 역사를 따라가게 되므로 동방과 서방이 결합된 것을 말했다.

  하나님께서 동방에서 사람을 일으켜 새로운 시대를 이루는 일에 대표적인 사람이 되도록 역사할 것을 말씀했으니 아무리 지금 극동 난제를 인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난관이 닥쳐왔더라도 셈의 장막에서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는 새로운 역사가 나타날 때가 온 증거라고 보게 된다.

 

  3. 야벳을 창대케 하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는 일 (27)

  금일에 4대 강국이라는 세력은 세계 운명을 좌우하는 것 같이 보이지만 4대 강국의 과학적 문명의 세력이 세계를 평화의 왕국을 이루는 것이 아니고 결말은 셈의 장막에 와서 거하므로 새로운 시대를 이루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과학을 초월한 하나님의 역사는 셈의 장막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야벳이 창대케 되므로 그 물질 문명이 세계 인류가 그 세력 앞에서 머리를 숙이게 된 것 같으나 결말은 셈의 장막인 동방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므로 세계 열방의 재물은 하나님이 같이하는 동방 사람에게로 돌아오고 말 것을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인간이 볼 때는 야벳이 창대한 것을 놀랄 수밖에 없는 일이지만 셈의 하나님이 나타나므로 야벳의 창대한 세력은 다 굴복을 하고 셈의 장막에서 일어나는 역사를 따라오므로써 새로운 시대를 이루게 될 것이다.

 

  결    론

  노아의 가정에 나타난 말씀은 새 시대를 이루는 것으로 완전한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니 완전한 성경이 세상에 기록된 것도 노아의 가정에 나타난 말씀이 이루어지는 역사를 기록한 것이라고 보게 된다. 그러므로 노아의 가정과 같이 구원받는 일이 있게 되는 것은 그 가정에 나타난 말씀이 다 이루어질 때에 완전히 끝을 맺는 역사가 노아 때와 같이 이루어질 것이다.

 

 

해롭게 할 권세와 인치는 일

- 계 7:1~3 -

 

  하나님께서는 인간 종말의 역사를 보일 적에 해롭게 하는 권세와 인치는 일에 대하여 천사로 지시하신 것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큰 뜻이 있다.

 

  1. 해롭게 할 권세 (1~2)

  하나님은 해롭게 하는 일도 새 시대를 이루는 일에 큰 권세를 주는 것이다. 왜냐 하면 해할 자를 해하도록 하므로써 새로운 시대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금일에 인간 과학 문명의 선구자로 되어 있는 나라는 미, 영, 불, 소라고 본다. 이 나라의 과학 발전이 전 세계 인류에게 이날까지는 유익을 주었다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결국은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것으로 보여준 것이다.

  그러면 이 네 천사는 인류 종말에 해롭게 할 권세를 보여준 것 뿐이요 실지로 천사가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한다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를 들어 쓴다는 것이 계시의 목적이 아니요 천사를 보내어 속히 될 일을 지시한 것뿐이다(계22:6).  

  이제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에 있어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첫째는 하나님의 섭리가 이루어지기 위하여 되는 것이니 과학이 크게 발전하는 것은 새 시대를 이루는 역사의 한 도구가 되는 것이다. 과학 발전이 없다면 세계적인 활동을 할 수가 없겠으므로 과학이 발전하도록 하나님은 허락해서 세계 인류를 구원하는 일에도 도구로 쓰여지게 했고 세계 인류를 전멸시키는 일에도 도구로 쓰여지게 한 것이니 과학 발전의 도구가 없다면 기독교는 세계적인 종말의 활동을 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과학 발전으로 세계적인 전멸이라는 위기를 이룬 것은 분명히 심판과 새 시대의 역사를 일으키기 위한 정한 때가 된 증거라고 본다.

  둘째는 정한 때가 올 때까지 하나님은 그 권리를 쓰지 못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종들에게 하실 일을 다한 후에야 해할 권세를 허락하는 것은 종들에게 큰 역사를 해서 해할 권세를 받은 자를 지배하도록 하는 것은 하나님이  강권 역사를 당신의 종들을 통하여 일으키기 위한 목적으로 해할 권세를 주시고도 머물러 두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금일에 과학적 전쟁은 하나님의 종들이 할 일을 다 할 때까지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셋째는 해할 권세는 저주받은 만물을 다 없애기 위한 방법이니 저주받은 사람과 만물을 없애므로 만이 복된 시대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2. 인치는 일 (3)

  하나님께서는 기독교 종말의 역사를 이마에 인치는 역사로 보여준 것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요소가 있다.

  첫째는 피해를 당하지 않게 한다는 인이다(계9:4). 인을 치는 일은 하나님께서 종마다 직접으로 치는 것이 아니고 인의 권세를 받은 종에게 전권을 맡기어 인을 치는 역사를 하므로 한 단체를 이루게 하는 것이다. 몸이 죽고 그 영혼이 구원받는 것은 단체적인 구원이 아니고 개인이 한명(限命)에 의하여 천사의 인도를 받아 그 영혼이 낙원으로 가는 역사이다(눅16:22). 그러나 인을 치는 역사는 한 단체를 이루어 단체적으로 역사 하다가 단체적으로 주님을 맞이하는 것이다.

  둘째는 권리 행사로 되는 일이니 예를 든다면 큰 전쟁이 있을 때에 군부에서 권리로 군대를 모집하는 것이나 같은 뜻이 있다. 왜냐 하면 기독교 종말에 적 그리스도와 싸우는 역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동방에서 일어나는 역사는 적 그리스도의 세력과 싸우는 역사이므로 하나님께서 선구자가 되는 종들에게 권리 행사를 맡겨 강권으로 종들을 깨우쳐 즉시에 무장을 가지도록 하는 역사이니 은혜 시대의 역사와는 다르다.

  은사 역사는 믿지 않던 사람들이 각자가 깨닫고 회개할 때에 개인 개인이 은사를 받게 되는 일이요 하나님의 인의 역사는 이미 은혜를 받고 시련 가운데서 때를 기다리고 있던 종들이 각성을 받고 일어날 때에 하나같이 새로운 역사를 완전 영감으로 받게 되는 것이다. 만일 집회를 가진다 하면 다소를 막론하고 참된 종들은 일시에 인의 역사를 받는 일이 있게 될 것이다.

  예를 든다면 훈련소에서 군대들이 일시 훈련을 받고 나가듯이 하나님의 종들이 권리 행사를 행하는 종을 통하여 일시에 완전한 영감을 받게 될 때에 하나같이 권리 있게 싸우는 용사가 될 것이다.

  셋째는 하나님의 인은 마귀 권세를 때려부수는 역사를 가르친 것이니 예를 든다면 군대가 계급을 막론하고 꼭 같이 적군을 때려 부실 권리가 있듯이 14만 4천명의 사명 용사는 꼭 같이 황충떼의 피해를 당치 않고 주님 올 때까지 승리의 용사로서 자유롭게 복음을 전하게 될 것이다. 인의 역사를 받은 종이 아니고는 환란의 피해를 당치 않고 심판의 다림줄의 경고의 말씀을 전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역사는 대표적인 사람에게 완전한 인의 영감의 역사가 오므로써 그 종의 변론을 통하여 하나 같이 각성을 받게 되되 선구적인 단체가 동방에서 나온다는 뜻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해 돋는데서 나온다고 한 것이다(사41:25, 59:19).

 

  결    론

  해롭게 할 권세는 세상 정권의 강대국에게 있고 인을 치는 역사는 동방에 나타난 종들에게 있으므로써 하나님의 역사는 종결을 짓게 되고 하나님의 역사가 끝을 마치는 동시에 세상 정권은 자멸이라는 비참한 전쟁이 벌어질 것이다.

  이제 하나님의 인의 역사라는 것은 원수를 갚는 권세역사이니 만큼 이 역사가 있으므로 기독교는 택한 자의 원한이 다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환란 중에 역사하는 종들은 다 이스라엘적인 새로운 다윗 왕국을 이루게 되는 뜻으로써 보여준 것이다.

 

 

하나님의 평강이 같이 하는 생활

- 빌 4:4~7 -

 

  하나님은 평강을 주기를 기뻐하는 신이신 동시에 평강을 위하여 역사하시고 평강을 위하여 친히 갚아주는 신이시다. 하나님의 신의 성품은 피조물 된 인생에게 더욱 평강의 평강을 더 주는데는 무조건 주시는 것이 아니고 어려운 난관을 당하게 하시는 동시에 그 난관을 돌파하도록 역사해서 더 큰 평강을 주시는 데는 어떠한 자에게 주신다는 것을 본문을 통하여 알 수 있다.

 

  1.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는 자 (4)

  누구든지 아무리 어려운 난관이 와도 주안에서 기뻐하는 생활이 있다면 무엇이나 뜻밖에 평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 옥중에서 부자유스러운 생활에서도 항상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은 주안에 안겨 있는 생활이기 때문이다. 바울이 자기 죄로 말미암아 옥에 갇혔다면 불행 중에 불평의 생활이었겠지만 주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위하여 옥에 갇힐 때에 이것은 주안에 있는 생활이니 누구든지 남을 살리기 위하여 고난을 당하는 자는 다 주안에 있는 생활이다(요일3:24)

  인생의 참된 평강은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생활에서 초인간적인 평강을 누리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게끔 하는 역사를 하므로 사람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통하여 참된 기쁨과 평강을 누리게 된다. 인간이 볼 때에 불행스러운 일 같으나 오히려 더 큰 축복이 오게 될 때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생활이 있게 되기 때문이다. 바울이 로마 옥중에서 쓴 글은 오늘까지도 수많은 생명을 살리는 복음이 되었기 때문이다.

 

  2. 관용심을 가진 자 (5)

  인생을 저주하기를 기뻐하지 않고 용서하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은 남을 너그러이 용서하는 자와 함께 하기 때문이다. 남을 너그러이 용서하는 자에게는 다음과 같은 유익이 있다.

  첫째로 영적 축복을 받게 된다. 왜냐하면 용서하시는 주님의 사랑의 역사가 더 강하게 역사를 나릴 때에 많은 사람을 구원하는 열매가 있기 때문이요

  둘째로 하나님의 깊은 사랑 속에 더 들어가게 되므로 그 생활이 더욱 평화롭고도 자유로워지는 거요

  셋째로 주님이 다시 올 때 갚아주는 보응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그러이 용서해 주는 것이 있으므로만이 주의 종은 지금도 미래도 열매를 거두기 때문이다.

 

  3. 감사함으로 기도하는 자이다 (6)

  하나님 앞에는 무엇이나 억지나 불만이 있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체는 사랑이시니 무슨 일이나 전부가 하나님의 사랑이 이루어지는 과정이니 인간이 볼 때 억울하고 불만을 둘 일이 있는 것 같지만 그 일이 있으므로만이 오히려 감사할 수 있는 일이 열매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예를 든다면 목자가 양 무리를 인도할 때 높은 산을 넘어가면 양에게 만족을 줄 푸른 초장과 시냇물이 있는데 양은 그것을 모르되 목자는 알고 양의 무리를 억지로 몰아서라도 그 산을 넘게 할 때에 알지 못하는 양떼는 오히려 괴로워 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목적지가 되는 데까지 도착할 때에 뜻밖에 기갈을 면할 수 있게 됨을 체험할 때 그 때야 양들은 기뻐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주의 인도를 따르는 종은 무슨 난관을 만나든지 감사하므로 기도하게 되는 것은 생각밖에 홀연히 더 좋은 은혜를 받게 될 것이다.

 

  결    론

  평강이라는 것은 하나님께만 있는 것이니 하나님의 역사가 없이 평강은 있을 수가 없다. 하나님의 모든 역사는 자기에게 있는 평강을 택한 자에게 주기 위한 목적에서 주시겠다고 언약을 세우시고 (사48:18~19 미5:5~9) 그것을 주기 위하여 역사하는 것을 하나님의 완전 역사라는 것이다.

  평강을 잃은 인생에게 당신이 가진 평강을 주기로 언약을 세우시고 이것을 주기 위한 실천을 하신 것이니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공포 속에 문을 닫고 숨어있는 제자들을 찾아가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한 것이다. 그러나 다시 오시는 주님은 환란을 만난 자들에게 평강을 주시려 오는 것이다. 첫째는 영적 평강을 주고 다음에는 몸에 평강을 주는 것이다.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

- 히 7:18~25 -

 

  언약이라는 것은 예언적인 언약도 있고, 실천적인 언약도 있다. 구약 시대의 지성소에 드리는 대제사장의 직분은 예언적인 언약의 증거라면 신약 시대의 이루어진 언약이 영원한 속죄를 이룬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언약을 실천하는 일의 보증이 된다. 예를 든다면 구약 시대는 죄를 지으면 용서 없이 죽인다는 율법을 기준 하여 세워진 언약이며 언약의 증거요, 신약의 은혜는 얼마든지 살려 준다는 언약의 보증이다.

  다시 말하면 첫째는 공의를 목적 둔 것이라면 둘째는 사랑을 목적한 것이다. 죄를 지으면 용서 없이 죽인다는 언약을 받은 민족도 복되다 하였거든 얼마든지 살려 준다는 언약의 보증이 되시는 예수를 믿는 자에게 그 축복이야말로 감히 인간으로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이제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시는 예수님에 대하여 본문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계명은 무익하므로 폐하고 좋은 소망이 생기게 함 (18~19)

  하나님께서 계명으로만 행하는 하나님이라면 그 하나님은 무능력한 하나님으로 보게 된다. 예를 든다면 어떤 사람이 물에 빠졌는데 물 밖에 있는 사람이 그 사람을 보고 “정신을 차리라, 여기로 나오너라” 하는 말을 해 보았던들 그 사람을 물에서 건져낼 능력이 없다면 “정신을 차려라” 하는 말이나 “물에서 나오라” 하는 말은 하등 필요가 없는 말이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죄악의 물결에 휩쓸려 들어간 인생들을 향하여 “정신을 차려라, 죄에서 나오너라” 하더라도 그 인생을 끌어내어 올 능력이 하나님께 없다면 그 계명은 아무런 유익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무익한 법은 폐지하고 좋은 소망을 인생에게 준 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계명을 가르친 것은 하나님의 공의를 알도록 선포한 것 뿐이요, 그 계명을 인간이 행할 수 있다는 조건은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행할 수 없어도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는 법을 그리스도를 통하여 행하기 위한 과정에서 예언적인 증거를 보여준 것뿐이다. 인간이 행하므로 된다는 것은 소망이 될 수 없고, 인간이 행할 수 없어도 하나님은 행함으로써 인간을 구원해 준다는 것이 소망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물에 빠진 사람이 자기 힘으로 도저히 나올 수 없으나 다른 사람이 구원선을 타고 물에 빠진 자를 끌어 배에다 올려놓듯이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교회를 구원선과 같이 세운 것은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영원한 속죄제를 드리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여 성신을 내려보내므로 죽은 영들이 살아나는 교회가 이루어질 때에 이루어진 교회에서 전도하는 목적은 누구든지 이루어진 교회에서 나와서 은혜를 받으라는 것이다. 누구나 믿음으로 교회에 들어올 때에 다 같이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2. 맹세하시고 뉘우치지 아니하심 (20~21)

  하나님께서 맹세를 세우되 아브라함에게는 “네 씨로 말미암아 모든 족속이 복을 받으리라”고 하는 맹세를 세웠고(창22:16~18),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진 맹세는 완전한 속죄제를 완성하시고 누구든지 믿으면 이루어 준다는 맹세이니 이 맹세로만이 완전이라는 것을 이루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먼저 맹세는 아들을 보내서 만민의 죄를 위하여 영원한 속죄가 되게 한다는 것을 목적했지만, 은혜시대는 영원한 속죄를 이루었으니 이 언약의 피를 믿으면 무조건 구원한다는 맹세이다.

 

  3. 항상 살아서 간구하시므로 (22~25)

  만일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속죄를 이루었다 하여도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 없다면 보증적인 역사가 될 수 없다. 예를 든다면 어떤 사람이 보증을 서고도 책임을 할 능이 없어서 활동을 못한다면 그 보증은 무효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한 속죄를 완성하시고 맹세를 세운 동시에 그 맹세대로 실천하기 위하여 항상 택한 자를 위해 간구하는 기도가 있으므로 택한 사람에게 예정대로 모든 것을 다 이루시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속죄는 물에서 건져 주는 역사라면 간구하는 기도는 물에서 건져낸 사람을 완전하게 만들어서 완전한 일을 하도록 해주는 거와 같은 것이다. 사람이라는 것은 보증을 서고도 그대로 못하는 수가 있지만, 우리의 보증이 되신 예수님은 언약의 말씀대로 몽땅 다 행하시는 보증이시다. 가장 완전한 일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보증적인 인격을 가진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일이다.

 

  결    론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보증을 서 주는 신앙이라고 보게 된다. 완전한 계약서가 되는 하나님의 말씀에 완전한 언약의 속죄의 피가 이미 우리를 살려준 일이니 보증적인 그리스도의 역사로만이 앞으로 오는 모든 난제는 해결될 것이다.

 

 

불법을 행하는 자의 비극

- 마 7:22~23 -

 

  가장 불행스럽고도 부끄러운 일을 당할 자는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불법을 행한 자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수고를 하고도 제일 큰 화를 받기 때문이다. 차라리 하나님을 모르고 종교를 모르고 살던 사람보다도 하나님을 안다하며 종교적인 지도자라 하면서 불법을 행했다는 것은 큰 비극이라고 보게 된다. 선지 국가의 왕조가 될 사울 왕이 불법을 행하므로 받은 화나, 엘리 제사장이 불법을 행하므로 받은 화나 다 비극의 하나라고 보게 된다.

  이제 하나님의 일을 한다 하면서 불법을 행하는 자는 어떠한 자라는 것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은혜를 악용하는 일 (22상반절)

  아무리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가 되었다 하더라도 그 성직을 이용하여 자기의 주권이나 명예나 물질이나 안락을 취했다면 이것은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집에 도둑이 되기 때문이다. 은혜로써 성직을 받았다면 끝까지 은혜로써 끝을 맺어야 할 것이다. 불법이라는 것은 원칙을 떠나는 것을 가르쳤다.  

  종된 자의 원칙이라는 것은 세 가지 원칙을 떠나면 불법이 된다.

  첫째 : 하나님만 영화롭게 한다는 원칙이 있어야 된다.

  내가 괴로워도 죽어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절대로 순종한다는 원칙을 떠나면 불법이 된다. 종된 자는 주인이 하라는 것 외에 자기의 주관을 세운다든지 자기의 이익을 탐한다는 것은 불법이 되는 것이다.

  둘째 : 남을 살리는 일에 원칙을 세워야 한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보낸 목적은 죽을 인생을 살리겠다는 것이 목적이다(요일4:9~11). 누구든지 인생을 살리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원칙을 떠나면 불법이 된다.

  셋째 : 진리를 사수한다는 원칙을 떠나면 불법이 된다.

아무리 진리를 증거한다 하여도 그 진리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희생이 없다면 그 진리의 자체가 되시는 하나님 앞에 불법이 되는 것이다.

 

  2. 이적을 악용하는 일 (22하반절)

  하나님께서 이적을 행할 수 있는 은사를 주신 것은 이적을 위한 이적이 아니고 진리를 위한 이적이다. 그러므로 이적을 악용하는 일은 무엇이라는 것을 말한다.

  첫째 : 이적을 행하고 그것으로 사람을 자기 앞으로 이끌어 보려는 일이다.

  주님께서 이적을 나타내는 것은 어떤 종을 위해서가 아니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일이 목적인데 이적을 행할 때에 나는 이 만큼 영계가 높은 자라 하는 것을 내세우든지 내가 어느 종 보다 옳다는 것을 내세워서 양떼들이 자기만을 따라오게 만드는 것을 목적 둘 때에 사단은 기회를 타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도 이적이 나타날 때에 이것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말라고 까지 말한 것은 이적을 보고 많은 사람이 공연히 따라 오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이다. 진리를 목적하지 않고 이적을 보고 따라 오는 무리를 원치 않았던 것이다.  

  둘째 : 이적을 행하므로써 자기의 어떤 영리를 취하는 일이다.

  연보를 많이 내면 기뻐하고 적게 내면 많이 내라고 강조하면서 병을 고침 받고도 감사 할 줄 모르면 오히려 저주가 된다고 하는 말을 써서 위협을 준다는 일은 결말은 불법적인 행동으로 기울어질 것이다. 원칙을 세우자면 하나님께서 은혜로 준 것이니 거저 주는 것 뿐이요, 그 밖의 무엇을 요구한다는 것은 불법이 되는 것이다.

  셋째 : 이적을 행할 때에 그 사람의 생명을 구원해 낸다는 진리 운동을 목적하지 않고 이적이 나타나면 하나님께서 내게 역사하니 나는 조금도 진리에 잘못된 것이 없는 사람인 줄 생각을 하고 하나님 말씀의 깊은 도리를 바로 전하는 일에 전력을 두지 않으면 불법적인 일이 될 것이다.

  이적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을 바로 전하기 위한 목적에서 보여준 것인데 진리의 도리를 바로 가르치는 일을 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에 적극 순종해야만 될 것이다.

 

  3. 주께서 인정할 수 없는 일 (23)

  주께서 베들레헴에 나신 것은, 말씀대로 죽기까지 순종하려 오셨고 다시 오시는 것은 말씀대로 순종한 자를 일한 대로 갚아 주려고 오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에 떠는 자라야 재림의 날에 설 수가 있게 될 것이다.  

  이제 말씀대로 갚아 주시는 일에 있어서 세 가지로 되어 있다.

  첫째 : 말씀대로 중심이 성결한 자라야 주 앞에 설 수가 있다.

  마음에 성결이 없다면 벌써 그 마음이 하나님 말씀과 합치된 마음이 못되기 때문이다.

  둘째 : 활동한 일이 말씀에 맞아야 한다.

  아무리 활동을 했다해도 그 활동이 그 진리에 합한 일이 못된다면 그 한 일에 대하여 주께서 인정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셋째 : 말씀을 전했다 하더라도 전한 사람의 그 생활이 그 말씀과에 합치된 생활이 못된다면 말씀을 전했다 하더라도 그 일에 대하여 주께서 말씀을 전한 자에게 갚아 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말씀과에 대적이 되는 생활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씀을 전하는 자는 그 말씀이 인격화되고 생활화 되므로써 전한 자라야 인정을 받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결    론

  인생이라는 것은 진노의 날에 인정을 받는 인격이 될 때에 큰 축복이요 인정을 받지 못할 때에 영원히 화를 받는 비극이 될 것이다.

 

 

배워지는 바울의 인격

- 빌 4:10~15 -

 

  하나님께서 종된 자의 인격을 향상시킬 때에 날마다 배워지는 인격이 있게 하므로 종된 자로서 날마다 새로워지는 생활에서 모든 사람에게 유익을 주게 하신다. 예를 든다면 과실을 맺는 나무가 새로워지는 것이 있으므로 과실을 맺듯이 종된 자의 생활이 새로이 배워지는 인격이 되므로 그 인격은 마른나무 같은 인격이 아니고, 푸른나무 같은 인격으로 날마다 새로워지는 발전이 있을 때에 그 종을 통하여 많은 열매를 맺으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이다.

 

  1. 자족하기를 배우는 인격(10~11)

  사람의 인격이라는 것은 무슨 일을 당하든지 스스로 족하게 생각이 나도록 배워진다면 그 사람은 완전한 지각이 있는 인격이라고 본다. 마음에 불만과 불평이 있는 자는 지각이 없는 자요, 날마다 마음에 기쁨을 가지고 족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무슨 일이든지 사랑의 근본이 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는 자라고 본다. 왜냐할 때에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에게 무엇이나 유익하도록 하는 모략의 신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모략이라는 것은 택한 자에게 유익을 얻도록 하는 방침을 세울 때에 어리석은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오히려 낙심을 하고 불만을 두고 점점 떨어지는 인격을 가지게 되지만, 자족하기를 배우는 인격이라는 것은 무슨 일을 당하나 새로운 발전을 보게 된다.

 

  2. 비결을 배우는 인격 (12)

  인생이 완전한 인격에 도달하게 되는 것은 무슨 일이나 그 속에 숨어 있는 비결을 알게 된다면 무슨 일을 당하든지 그 일이 다 형통을 이루는 열매가 되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나무가 열매를 맺을 적에 추운 바람, 더운 바람, 뜨거운 태양, 부딪히는 폭우 등 여러 가지를 거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이 있음으로써 그 나무는 건전한 나무를 이루게 된다.

  이와 같이 사도 바울은 이방 사도로서 복음을 전하러 나선 몸으로 여러 가지 풍랑을 만났지만, 거기서 신비한 체험을 받게 되는 동시에 어찌해서 이러한 일이 내게 온다는 것을 깨닫고 오히려 감사했던 것이다. 인간이 볼 때는 죽는 길 같으나 살고도 남음이 있고, 굶주리는 일 같으나 그런 일이 있으므로 더 풍부한 것이 오고, 실패를 당하는 일 같으나 그것으로 말미암아 주의 일이 더 확장되는 것을 볼 때에 오히려 하나님의 완전 역사를 알게 되었던 것이다.

 

  3.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됨 (13~15)

  주의 종이라는 사람은 배워지는 인격을 가질 적에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인격이 된다. 왜냐하면 배워지는 인격에는 주의 능력이 나리기 때문이다. 주의 능력이라는 것은 주의 뜻을 따라 역사하되 바로 배워지는 인격을 들어 쓰기 때문이다. 능력이라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하게 하는 것인데, 이것은 주께서 어려운 시련을 주는 동시에 그 난관을 돌파하고 나가도록 역사하는 것을 주의 능력이라는 것이다.

  주께서는 사람에게 능력을 주되 법을 따라 주는 것이니 진리의 법이라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이 능력을 주어서 역사하게 한다는 것이 진리이기 때문이다. 능력을 줌으로써 일을 한다는 것이 원칙이지만, 그 능력은 어떠한 일에 어떠한 목적을 위하여 따른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주께서 능력을 주는 일에 대하여서 다음과 같은 요소가 있다.

  첫째 :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기 위하여 능력을 주는 것이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한다는 것을 아버지께서는 영광으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미워하시는 것이다. 왜냐 할 때에 하나님의 대적이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능력을 무시하고, 자기 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볼 때에 교만한 사람으로 보는 것이다.

  둘째 : 약한 자를 구원하기 위하여 주는 것이니 항상 약해서 쓰러지는 사람을 무시하지 말고, 불쌍히 볼 때에 능력은 쓰러지는 사람을 위해서 나리는 것이다.

  셋째 : 하나님은 마귀의 세력을 들어서 하나님의 종을 대적하게 하고, 종에게 능력을 주어서 역사하게 하는 것은 그 종에게 마귀를 이김으로써 세세 왕권을 받게 하기 위한 선한 방법이다. 아담, 하와는 능력을 받지 못했으므로 타락했지만, 지금 하나님의 종은 주님의 대행자로 나섰기 때문에 주의 이름으로 능력이 오게 된 것은 주의 손에 붙들린 인격이기 때문이다.

  천하에 제일 강한 자는 주의 능력의 손에 붙들린 종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을 대적하던 로마의 정권과 모든 교권은 다 무너졌지만, 사도 바울이 능력을 받아 세운 기독교는 세계적인 종교가 되는 동시에 세계 통일의 완전한 평화 왕국이 이루어질 것이다.

 

  결    론

  가장 인생 중에 복된 자는 배워지는 인격으로써 날마다 진보하는 성도라고 본다. 왜냐 하면 이 성도의 주권으로만이 세계 인류는 가장 행복된 세계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인간이 볼 때는 작은 일 같으나 제일 큰 일이 날마다 새로이 배워지는 종의 인격이라고 본다. 아무리 세계적인 강대국이라는 나라도 아무런 열매 없는 허수아비 같이 되었지만, 배워지는 인격을 가진 바울은 지금에 와서 큰 열매를 이루게 된 것이다.

 

 

베드로가 본 환상과 요한이 본 계시

- 행 10:9~16, 계 22:6~7 -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모르는 인간들에게 그 비밀을 알려 주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시대적인 복음을 전하게 하는데는 대표적인 사람에게 먼저 그 비밀을 알도록 보여 주고 그 대표 사람에게 준 사명을 모든 사람이 다같이 하도록 하시는 것이다. 사람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알게해 주므로 알 수 있고 또는 전하게 하므로써 전할 수 있는 것이니 이제 베드로에게 보여준 환상과 사도 요한에게 보여준 계시의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알아야 할 것이다.

 

  1. 베드로에게 보여준 환상(행10:9~16)

  주님께서 승천하실 적에 너희는 성신의 권능을 받아 가지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복음을 증거하라는 사명을 맡기고 승천하신 후에 성신을 예루살렘 다락방으로 보내 주시므로 성신의 충만함을 받은 베드로는 아직까지 깨닫지 못하고 이방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기에 주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비몽사몽간에 환상을 보이게 되었다.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은데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다.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색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는데 소리가 들려 오기를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으라고 하였다. 베드로는 대답하기를 주여 그럴 수가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 하였나이다 할 때에 다시 소리가 들려 오기를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고 하면서 이러한 일이 세 번 있은 후에 그릇이 곧 하늘로 올리워 갔다.  

  이것은 베드로가 전할 복음의 총 대지가 되는 뜻이다. 왜냐 하면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것은 아무리 짐승같이 타락한 인생이라도 다 하나같이 깨끗하게 해서 너와 같이 하나가 되게 할 것이니 너는 사람을 차별하지 말고 십자가를 전하라는 뜻을 보여준 것이다. 그때 베드로는 고넬료의 가정에 가서 서슴지 않고 복음을 전할 때에 이방 사람에게도 꼭 같이 성신이 임하는 것을 볼 때에 베드로는 큰 용기를 얻고 율법주의자와 싸우면서 이방에게 복음을 전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날까지의 사명은 어느 종이나 다 베드로가 본 환상의 뜻을 따라서 움직인 것 뿐이다. 십자가의 복음은 오늘날 야만인의 나라에까지 다 전파된 것은 이 환상의 뜻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2. 요한에게 보여준 계시(계22:6~7)

  이 계시는 베드로가 본 환상의 뜻이 다 이루어져서 어느 민족이나 다 같이 복음을 받은 후에 전할 복음을 보여준 것이다. 주 곧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결코 속히 될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보내어 보여준 계시다. 여기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요소가 있는 것이다.  

  첫째 :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자손된 선지들에게 묵시를 보여줄 적에 아브라함의 자손의 나라에서 예수가 나실 것을 말했고,

  둘째 : 그 소식을 세계에 전하므로 세계 민족이 하나님께 돌아오게 될 것을 보여 주는 동시에 하나님께로 돌아 온 백성을 심판할 때에 어떠한 자가 새 시대 간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셋째 : 구약 말기에 종교 부패, 정치부패, 인심악화, 경제혼란이 있을 때에 북방 환란이 내려 와서 부패한 종교와 정치와 악화된 인간들이 다 환란에서 망하는 동시에 경제권을 쥔 세력이 다 원수에게 먹힘을 당한 것 같이 인간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을 말했고 그 환란 가운데서도 끝까지 선지를 통하여 전해준 말을 믿고 참음으로 기다리는 자들에게 권리를 주어서 다시 다윗 왕국을 복구함 같이 인간 종말에도 아무리 환란이 와도 예언을 지키는 자라야 주님 다시 올 때에 복 있다는 것을 보여준 계시다.  

  그러므로 요한 계시록은 베드로가 선지서를 들어서 십자가 부활을 증거한 것 밖에의 예언을 혼선되지 않도록 증거하게 하기 위하여 완전 계시를 보여준 것이다. 사도 요한이 본 계시가 아니라면 선지서에 있는 심판의 다림줄을 정확히 증거할 수 없는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계시록을 보여 주고 그 계시에 의하여 선지서의 비밀을 햇빛같이 밝히 증거할 수 있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성도는 베드로가 받은 영감의 은사적인 계통이요 말세에 주 재림시기에 남은 변화 성도는 완전 계시를 본 사도 요한의 영감 계통으로 역사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권세의 역사가 되는 것이니 원수를 승리하고 나가면서 복음을 전하다가 재림의 주를 맞이하게 되는 역사라고 보게 된다.

  율법 시대의 교권주의 바리새 교인들이 베드로의 환상을 본 비밀을 모르고 이단시하다가 예루살렘이 망했고, 주님 다시 올 때에 요한이 받은 계시의 비밀을 바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거짓 선지의 미혹을 받고 이 예언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다 망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결    론

  우리는 대표적인 사람에게 한번 보여준 환상이나 계시를 조금도 등한히 한다는 것은 큰 죄가 되는 것이다. 은혜시대에도 베드로가 본 환상에 의하여 전하는 복음을 믿지 않는 사람은 다 망했고 주 재림 시기에도 요한이 본 계시의 비밀을 지키지 않는 자는 다 망하게 될 것이다.

 

 

신앙의 복된 가정

- 창 18:1~33-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가정은 왜 복된 가정이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본문을 통하여 알 수 있다.

 

  1. 손님 대접하기를 기뻐하는 가정 (1~5)

  아브라함은 비록 자녀가 없는 쓸쓸한 생활을 하고 있지만 있는 정성을 다해 손님을 대접하는데 전력을 두었던 것이다. 그는 부지중에 하늘의 천사를 손님으로 대접한 일이 있었다. 하나님께서 지극히 작은 소자 하나를 대접하는 것을 당신이 대접을 받는 것과 같이 갚아준다는 것이 하나님의 심정이다. 그러므로 손님을 대접하기를 기뻐하는 아브라함의 가정에 천사를 보냈던 것이다.

  인생의 가치라는 것은 물질적으로 대접을 받는 것보다도 대접하는 생활이 가장 물질을 바로 쓰는 생활이라고 보게 된다. 남의 것을 탐하는 것은 도둑의 생활이요, 남을 대접하는 것은 거룩한 하나님의 종의 생활이라고 본다. 하나님께서 물질을 사람에게 주는 것은 서로 대접을 하며 살면 더 좋은 것을 얼마든지 주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손님 대접하기를 기뻐하는 사람이므로 “너는 복의 근원”이라는 거룩한 이름을 받게 되었다.

 

  2. 합심된 가정 (6~8)

  아무리 좋은 일을 하려해도 가정에서 합심이 안되면 복된 가정이 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가정은 아브라함이 손님을 대접코자 할 때에 합심하여 급한 요리를 제조했던 것이다. 가정의 미라는 것은 남을 대접하는 일이라면 전 가정이 합심해서 일을 진행하는 것이 아름다운 복된 가정을 이루는 요소가 될 것이다.

  합심이라는 것도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어떤 가정은 손님을 대접하지 않고 자기네 가정만 잘 살아 보려는 데서 합심된 가정이라는 것은 아무런 가치를 발휘할 수 없을 것이로되 남을 살리고 대접하기 위하여 합심된 가정에는 얼마든지 하늘에서 남을 살리고 대접할 수 있도록 공급하는 축복이 있을 것이다.

 

  3. 이적으로 되는 가정 (9~15)

  아브라함의 가정은 세계적인 사명을 갖되 거룩한 씨를 전하는 사명이 있는데 인간의 무엇으로는 아무런 소망이 없는 가정이 되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사라는 다시 자기에게 거룩한 씨가 될 자식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하고 단념했던 것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가정에 나타난 천사는 말하기를 “사라의 몸에서 아들을 낳으리라”고 할 때에 사라는 그 말을 듣고 속으로 웃으면서 “내가 나이 늙었고 경수가 끊어졌고 노쇠한 사람이 이제 와서 어린애를 낳는다”고 하면서 코웃음을 쳤던 것이다. 그 때에 천사는 네가 왜 웃느냐고 하면서 하나님은 능치 못한 일이 어디 있느냐고 말하며 기한이 이를 때에 네가 아들을 낳으리라고 했던 것이다.

  그 말대로 노쇠한 몸에서 이적으로 거룩한 씨가 될 이삭을 낳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복된 가정에는 모든 일이 이적적으로 되게 하는 것이다. 인간 생활이라는 것은 과학에 국한된 생활에서 복된 가정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과학을 초월한 이적으로 되는 일이 있으므로 복된 가정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4. 강대한 나라를 이루는 가정 (16~18)

  가정은 국가를 이루는 본부가 되는 것이니 강대국을 이룰 수 있는 인격은 복된 가정에서부터 출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가정에서 과학을 초월한 이적으로 시작된 거룩한 씨는 악의 세력을 이기고 세계를 통일하는 강대국을 이루게 될 것을 성경은 가르쳤다.  

  아무리 자녀가 많아도 멸망의 자식이 된다는 것은 불행 중에 불행이요 아무리 작은 겨자씨 같은 이삭 한 사람을 낳은 가정이라도 그 씨가 새 시대를 이루는 열매를 가져왔다는 것은 복된 가정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인간의 참된 미라는 것은 결말이 좋아지는 일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가정의 씨가 세세 왕국을 이루게 된다는 것은 얼마나 복된 일이라는 것을 인간들은 모르는 것이다.

 

  5. 의를 위하여 택한 가정 (19)

  가장 복된 일은 하나님이 당신의 의를 이루기 위하여 택함을 받은 일이라고 보게 된다. 인간이 볼 때는 어리석은 일 같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들어서 당신의 의를 이루기 위한 사람이라면 누가 그 세력을 막을 자는 전혀 없을 것이다. 아브라함의 가정을 택할 때에 하나님께서 의로운 일을 개척한 것이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가정에서 시작된 그 일의 열매가 되는 사람이 될 때에 가장 복 있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누구든지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사람은 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말씀했던 것이다.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대 주재 하나님이 그 가정을 통하여 당신의 할 일을 행하게 하신다는 것이 큰 축복이 된다는 것을 말씀했던 것이다.

 

  6. 급한 비밀을 알려주는 가정 (20~33)

  소돔 고모라가 멸망할 때에도 그들은 내일의 멸망을 모르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집짓고 오락하고 춤추다가 한 시간에 멸망을 했다.그러나 아브라함의 가정에는 천사가 와서 그 비밀을 알려 주었던 것이다.

  아브라함은 소돔 고모라를 염려하여 “의인이 그 성에서 열 사람이 있으면 어떻게 하시겠나이까?” 하는 데까지 물어 볼 때에 하나님은 열 사람만 있어도 그 성을 멸하지 않겠다고 하실 때에 아브라함은 자기 조카 롯을 생각하여 의인 열 명이 되지는 않겠는가 생각한 일도 있은 것이다. 그러나 의인 열 명이 없으므로 그 성은 망했던 것이다. 앞으로도 복된 가정은 급한 비밀을 하나님께로 알려주는 일을 받게 될 것이다.

 

  결    론

  천하에 복된 가정이 아브라함에게 허락한 축복을 받게 되는 가정일 것이다. 우리가 받는 축복은 전부가 복된 가정인 아브라함의 집에서 시작된 그 축복을 받게 되는 가정이니 우리는 오늘 본문을 보아서 복된 가정의 시발점이 무엇인 것을 알아 끝을 맺는 복된 가정이 되어야 할 것이다.

 

 

참된 지식을 따르는 생활

- 빌 3:5~16 -

 

  인간이라는 것은 무엇을 따라 가는데 의하여 그 생활은 좌우되는 것이다. 돈을 따르는 생활은 그 생활이 물질을 초월할 수 없고 세상 권리를 따르는 생활은 그 생활이 그 권리를 벗어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참된 지식을 따르는 생활은 참된 지식 안에서 지식의 범위를 다 소유할 수 있는 열매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이제 참된 지식을 따르는 생활에 대하여 본문으로써 읽어 알 수 있다.

 

  1. 참된 지식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는 생활 (5~8)

  사도 바울은 가장 귀족이요, 가장 정통을 자랑하는 바리새인이요, 또는 인간적으로 희망이 가득한 청년이었다. 그러므로 영웅심이 강한 청년으로 기독교를 대적하고 나섰던 것이다. 그러나 자기가 핍박하던 그리스도를 알게 될 때에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한 일이니 이것을 분명히 알고 그 진리 안에서 복을 받으려 할 때에 그 지식의 대적이 되는 것은 다 분토 같이 보고 용기 있게 나섰던 것이다.

  사람이라는 것은 가장 옳은 지식을 찾게 될 때에 명예보다도 육체의 안락보다도 세상 권세보다도 가장 귀한 것은 참된 지식이라는 것을 알고 진리의 싸움을 하는 자라야 그 진리대로 이루어지는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2. 참된 지식 안에서 발견하려는 생활 (9)

  사람이라는 것은 무엇을 새로이 발견하는 생활이 있으므로 그 생활의 미를 이루고 또는 생활에 새로운 발전을 보게 될 것이다. 사도 바울은 믿음으로만이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지식을 남보다도 깊이 발견한 사람이다. 사도 바울이 믿음으로만이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진리를 발견하여 14권이나 쓴 글은 전 세계 인류를 살리는 진리 운동이 된 것이다.

  과학자가 과학적 지식으로 기계를 하나 발명해도 그 기계로 말미암아 세계 인류에게 큰 유익을 준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사도 바울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진리를 발견한 것은 전 세계 인류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역사가 되어 영원히 망하지 않는 나라를 이루게 될 것이다.

 

  3. 참된 지식을 위하여 생명을 바치는 생활 (10~11)

  참된 지식이라는 것은 내 생명보다도 귀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참된 지식이 없다면 생명은 있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생명보다도 그 지식을 더 사랑할 때에 생명은 더 풍성함을 받게 되는 것은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열매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생명이 피해를 당할까 무서워서 참된 지식을 위하여 싸우지 못한다면 이 사람은 참된 지식의 가치를 발견치 못한 자라고 볼 수 있다. 참된 지식이라는 것은 그 생명을 잃게 하는 지식이 아니요, 생명을 더 풍성히 얻는 것과 영광의 풍성한 것을 누리게 하는 지식이기 때문이다.

 

  4. 참된 지식의 온전을 위하여 진보하는 생활이다 (12~13)

  인간 생활이라는 것은 하루살이 생활이 아니고, 하루하루 사는 생활이 완전을 목표하고 전진하는 생활이 있어야 한다. 금일에 하루를 만족으로 안다는 것보다도 내일의 장래를 위하여 금일의 수고가 족한 줄 알 때 그 생활은 날이 갈수록 전진의 걸음을 걷는 동시에 온전이라는 그 세계에 도착하게 될 것이다.

 

  5. 참된 지식의 목적 (14~16)

  참된 지식의 목적은 자아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천지를 창조하신 조물주께서 완전한 것을 주는 데까지가 목적인 것이다. 인간에 국한된 지식은 아무리 애써 보아도 온전을 이룰 수가 없을 것이로되 인간을 초월한 무소불능의 하나님께서 주고자 하는 것을 받을 수 있는 지식은 온전이라는 것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과학적 지식이 발전하여 잠깐의 유익을 준다 하여도 온전이라는 것을 얻는 지식은 될 수가 없고, 온전한 것을 얻는 활동을 돕는 지식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과학적 지식을 무시한다는 것이 참된 지식이 아니고, 과학적 지식을 초월한 지식을 위한 생활에서 과학적 지식에 국한된 물질을 바로 사용하는 것이 온전을 이루는 생활의 열매가 될 것이다.

 

  결    론

  인생은 지식을 위한 인생이 아니요, 지식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니 사람은 그 지식을 바로 사용할 때에 인간의 할 일을 할 수 있는 데까지 도달할 수 있는 인격을 찾게 되는 동시에 참된 지식의 인격을 소유한 자에게 주는 온전은 왕권의 축복을 상급으로 받게 될 것이다.

 

 

시험이 올 때 인정받는 자가 되자

- 약 1:12~18 -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자는 시험을 참는 자라고 하신 것은 다음과 같은 의의가 있다.

  1. 시험이 오는 동기 (12~14)

  시험의 동기가 어디서부터 오느냐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할 것이다. 자기가 시험에 들어가는 것이 근본이 무엇인 것을 모른다면 그 자체는 정욕에 속한 자가 될 것이다.

  시험도 옳게 인정할 조건으로 오는 시험도 있고 옳게 인정을 못할 조건으로 오는 시험도 있으니 옳게 인정을 받을 시험은 다음과 같다.

  첫째 : 참는 마음에서 오는 것은 의를 위한 시험이니 정욕을 참지 못해서 받는 시험과는 다르다. 하나님께서 시험을 허락할 때에 인내력을 길러서 그 종을 쓰기 위한 목적이 있으니 이것은 인정을 하기 위한 방법이다.

  둘째 : 시험을 피할 수 있지만 사명을 하기 위해서 당하는 시험이 있다. 이것은 주님께서 시험을 해보는 것보다도 열심히 일하기 위하여 싸우는 조건으로 오는 시험도 있으니 이 시험을 통하여 남을 구원해 주는 일이 있으므로 인정을 받게 되는 것이다.

  셋째 :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당하는 시험이니 말씀을 지키지 않으면 그 시험을 당하지 않을 것인데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당하는 시험은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일이니 이 세 가지 방면으로 오는 시험은 상급이 될 조건이 있다고 보게 된다.

  그러나 욕심에 끌려서 받는 시험은 다음과 같다.

  첫째 : 마음에서 정욕이 발생하므로 받는 시험인데 이것은 마음으로 범죄하는 죄가 되므로 중심적인 개조를 받기 전에는 그 시험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둘째 : 말에 실수가 있으므로 오는 시험이니 이것은 입을 지키는 일이 있음으로만이 물러갈 수 있는 것이다.

  셋째 : 불의를 용납하므로 오는 시험이니 히스기야가 바벨론 사신을 용납한 죄로 큰 시험이 민족적으로 왔고, 베드로가 작은 계집아이에게 말을 용납해서 거기서 공포를 가진 것으로 시험이 왔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좋게 해 주든지 두렵게 해 주든지 하는 그 말에 충격을 받지 않아야 될 것이다. 히스기야가 바벨론 사신의 말을 기분 좋게 받아들임으로 시험받은 일이나 베드로가 작은 계집아이 말을 두렵게 들으므로 실수한 일을 보아서 불의한 자의 말은 절대로 충격을 받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2. 스스로 속지 말아야 한다 (15~18)

  스스로 속는 자라는 것은 자기가 욕심에 끌리고도 옳은 줄 아는 것이라고 본다. 욕심이라는 것은 위로부터 오는 것만을 바라보지 않고, 땅의 것을 생각할 때부터가 욕심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열심이 있다 하여도 위에서 주는 것을 받고자 하는 마음이 아니고, 사람에게서 받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이것은 열심이 있어도 스스로 속는 일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리의 말씀에서 자아의 인격을 완전히 찾는 사람이 되는데는 하나님께로부터 그 인격을 받아야 될 것이다. 신앙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믿되 그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을 따라 받는 신앙에 들어가야만 열매가 있게 된다. 그러므로 믿는다 하는 자들이 자아라는 인격을 바로 찾지 못하고 무조건 믿음으로 된다는 것은 스스로 속는 일이다. 말씀에서 바로 서는 신앙은 다음과 같이 알 수 있다.

  첫째 : 하나님의 말씀을 갈망하는 자가 되어야만 될 것이요

  둘째 : 그 말씀에 떠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요

  셋째 : 그 말씀에서 체험을 받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자가 되므로써 시험을 참고 나가는 자로 면류관을 받는 왕권에 도달하는 일이 있게 될 것이다.

 

  결    론

  신앙 생활은 시험이 없이 자랄 수 없고, 시험이 없이는 타락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시험을 참음으로 향상이요, 시험을 참지 못하므로 타락이다. 시험이라는 것은 왜 오느냐는 것을 바로 아는 것이 빛이라면 시험을 물리치는 것도 빛으로야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시험이 오되 억울하게 오면 그것 때문에 참지를 못하고 타격을 받는다는 것도 인정받지 못할 일이요, 짐짓 욕심에 끌려 시험을 받으면서 회개할 줄 모른다 해도 이것은 큰 실패를 가져올 것이다.

  이제 시험에 다음과 같이 결론적으로 말할 수 있다. 첫째 시험해 볼 사명을 맡은 자는 마귀다. 그러므로 마귀는 얼마든지 시험을 해보는 것이 자기 할 일이므로 마음에 기회가 있으면 마음에 들어가 역사하고, 가정에 기회가 있으면 가정에 역사하고, 교회에 기회가 있으면 교회에 역사하므로 개인과 가정과 교회를 망치는 일이 있게 된다.

  이제 개인의 시험은 개인의 인격 하나를 바로 가지므로 이길 수 있고, 가정의 시험은 그 가정이 단합되므로만이 물러가게 되고 교회의 시험은 교회가 진리 안에서 단결하여 목숨을 바쳐 싸우는 희생적인 순교의 정신이 없이는 교회는 신령한 교회로 보존될 수가 없는 것이다.

 

 

 

 장년 공과편 - 예수님께서 칭찬하신 믿음

 

  총    론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오신 것인데 믿음에 대하여 칭찬한 일에 대해서 공부하기로 한다. 인간이 볼 때는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라도 믿음을 보고 칭찬하신 것은 믿음으로만이 구원을 받게 하는 복음을 가지고 오신 주님이기 때문이다. 이제 칭찬 받은 믿음에 대하여 이 달에는 공부하고자 한다.

 

제1과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심

- 마 8:5~13,  요절:10 -

 

  서    론

  주님께서 제사장들과 유사와 장로들을 책망하셨지만 어찌하여 아무런 존재 없는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했느냐에 대하여 오늘은 공부한다.

 

  1대지 : 간구하는 믿음 (5~7)

  믿음이라는 것은 간구하는 것이 없이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간구하는 자라면 주시기로 약속하신 주님이니 주 앞에 간구하는 자를 하나도 물리친 일이 없다. 이 백부장은 자기 하인을 위하여 간구할 때에 주님은 서슴치 않고 내가 가서 고치리라고 하셨다.

  주님께서 인간을 볼 때에 다 같이 죄인들이지만 그 중에서 마음이 간절한 사람을 볼 때에 예수님을 반대하는 유대인이나 대제사장이나 그 밖의 모든 성직자보다도 마음이 겸손하고 간절한 사람을 기뻐했던 것이다. 지금도 주님 앞에는 간구밖에는 아무런 것도 칭찬 받을 조건이 없는 인간들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주고 싶은 심정에서 만민의 죄를 걸머진 어린양으로 세상에 왔기 때문이다.

  간구에도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정욕적으로 간구하는 것도 있고 남을 살리기 위하여 간구하는 것도 있으니 이 백부장이 간구하는 것은 남을 살리기 위한 간구이었으므로 내가 가서 고쳐 주겠다고 했던 것이다.

 

  2대지 : 예수의 완전성을 믿음 (8~9)

  신앙이라는 것은 대상자의 완전성을 믿을 때에 대상자는 기뻐하는 것이다. 백부장은 군인 백 명을 거느리는 사람인데 자기의 수하에 있는 군사를 명령하면 절대 순종하는 것을 생각할 때 그는 생각하기를 하나님의 아들이 한번 명령할 때에 무엇이든지 다 순종하게 되리라는 것을 믿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말하기를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명령하신다면 내 하인이 곧 완전하게 되겠나이다” 했던 것이다.

  이 신앙은 합법적인 신앙이라고 보게 된다. 주님은 완전한 신이시니 하나님의 아들된 권세로써 무엇이든지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권세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신앙할 때에 하늘과 땅의 권세를 받으신 예수님께서 무엇이나 다 명령으로 행하는 것을 의심 없이 믿어야 한다.

  예수님이 오늘도 하늘 보좌 우편에 계셔서 한마디 말씀만 해도 이 땅에 있는 우리에게는 모든 난제가 해결될 것을 믿어야 한다. 주님께서 이러한 자를 지금도 찾고 계신다. 오늘에 신자가 많이 있지만 예수님의 완전성을 믿고 담대히 나가는 자를 보기가 어렵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3대지 : 이스라엘 중에서 만나 볼 수 없는 믿음 (10~12)

  많은 신앙가가 이스라엘 가운데 있었지만 이러한 합법적인 신앙을 만나 보기는 어렵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보다도 그 완전성을 믿어야만 역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신이시니 그를 지배할 자는 전혀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명령은 천지가 움직이고 없이도 하고 있게도 하는 신의 완전성을 믿을 때에 하나님은 기뻐하시는 것이다.

 

  4대지 : 응답을 받은 믿음 (13)

  믿음이라는 것은 주님께서 칭찬할 믿음을 가질 적에 직접으로 응답이 내리는 것이다. 백부장은 믿은대로 직접 중풍병으로 누었던 하인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 예수님이 먼데서 네 믿음대로 되리라고 할 때에 먼데 있는 중풍병자가 나은 것을 볼 때 안수를 하지 않아도 낫는 기적을 볼 때 그는 더 용기 있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지금도 하늘에 계시는 예수님께서 말하는 대로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을 기도 응답이라 하는 것이다.

 

  결    론

  믿음이 없이는 우리 인생은 주님을 대할 수 없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는 죄인은 예수님께서 다 받아들였지만 믿음이 없는 바리새인들은 독사의 자식이라고 책망했던 것이다.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믿음으로 응답을 받는 것을 기독교의 산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다.

 

 

 제2과  열 두 해를 혈루증 앓는 여자의 믿음

- 막 5:25~34,  요절:34 -

 

  서    론

  가장 괴롭고 누추한 병은 혈루증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아무리 음식을 먹어도 영양이 다 빠져 버리고 언제나 더러운 옷을 입고 사는 생활이다. 이러한 생활에서라도 믿음을 보존하고 그 믿음으로 칭찬을 받고, 구원받은 신앙을 공부할 때에 다음과 같이 배울 점이 있다.

 

  1대지 : 낙망 중에서 주님을 따라 온 일 (25~27)

  이 사람은 많은 의원에게 자기 몸을 의탁하여 수 없이 괴로움을 받았고 많은 재산을 허비하였어도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하고 더 병세가 중하던 차에 예수의 소문을 듣고 따라온다는 것은 전심 전력을 다해 최후의 용기를 내는 일이다. 사람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 실패와 낙망을 당했다 하더라도 낙심하지 않고 용기를 낼 때에 주님은 불쌍히 보는 것이다.

  믿음이라는 것은 낙망 중에 주님을 따라 가는 것이 참된 신앙 노선이라는 것이다. 택한 자라는 것은 여러 가지 실패를 당하고 최후에 주님을 찾게 되는 것이니 이러한 자가 주님을 더 사모하게 되는 것이다. 아무런 실패가 없이 주님을 따라 간다는 것이 큰 믿음이 아니요, 실패를 당했지만 낙망하지 않고 주님을 따라가는 것이 택함을 받은 자의 가는 길이라는 것이다.

 

  2대지 : 구원을 확신함 (28~29)

  이 여인이 예수님의 옷에 자기 손만 대어도 자기가 구원을 얻으리라는 것을 확신하고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댈 때에 즉시 완전함을 받았다는 것은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이 여자는 일평생 자기가 원하던 소원이 이루어지는 축복을 의심 없는 믿음으로 받았다.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은 과학을 초월한 것이니 인간이 볼 때는 너무나 어리석고 단순한 일 같으나 이 중심을 하나님은 기뻐하신다.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은 확신이 있는 사람에게 무조건 오는 것이다. 어떤 신자가 인간의 생각에 될 것 같이 생각이 되면 믿고 그렇지 않으면 부인한다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아니다. 주 앞에 인정받는 신앙은 여인이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면 내가 나으리라고 믿는 그러한 믿음이 아니고는 기독교의 본능이 되는 큰 역사를 체험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구원이라는 것은 의심 없는 믿음에 있는 것이다.

 

  3대지 : 예수님께서 능력이 나간 것을 아심 (30~32)

  능력이라는 것은 의심 없는 믿음을 가진 자에게 가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예수님께 있는 능력이 의심 없는 믿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오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진액이 충만한 나무뿌리에서 가지로 가는 것은 조금도 그 사이가 틈이 없이 붙어 있을 때에 가는 것과 같다. 능력은 언제나 주님께 있는 것이요, 그 능력이 효과를 주는 것은 전부 완전치 못한 인생을 위하여 주는 것이다.

  아무리 예수님께 능력이 충만하다 하여도 믿음이 없는 자에게는 갈 수가 없고 의심 없는 믿음을 가진 자에게만 가는 것이다. 믿음이라는 것은 마음에 있는 동시에 행함이 있어야 된다. 이 여자가 믿고만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손을 내밀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다는 것은 행함이라고 볼 수 있다.

 

  4대지 : 축복을 받음 (33~34)

  여자는 모든 사실을 주 앞에 고백할 때에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 할지어다” 하는 축복을 받았다. 신앙이라는 것은 주 앞에 조금도 숨기지 말고 고백하는 일이 있게 될 때에 주님께서는 축복을 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고백하지 않아도 다 아시는 일이지만 사람에게 요구하는 것은 정직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예를 든다면 어떤 사람이 자기가 알고 있는데 아니라고 하는 자에게는 자동적으로 노를 발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주님은 고백하기 전에 먼저 다 아시지만 사람이 정직히 고백할 때에 은밀한 가운데 하는 일을 아시는 주께서 정직하다고 인정하시고 축복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따라 오지만 그 중에서 큰 축복을 받게 된 것은 의심 없는 믿음이라고 보게 된다.

 

  결    론

  믿음이라는 것은 주님께 있는 것을 받는 표가 된다. 무소 불능하신 하나님은 죄인들을 구원할 때에 믿음 하나만을 보시고 역사하기 때문에 아무리 성직자라도 믿음이 없는 자들은 책망을 받았고 믿음이 있는 자는 아무리 인간이 볼 때 더러운 사람이지만 큰 축복을 받았던 것이다. 믿음이 있으면 주고자 하시는 주님을 기쁘게 하는 거요, 믿음이 없으면 주시고자 하는 주님을 대적하는 일이므로 오히려 큰 화를 받게 되었다.

 

 

제3과  가나안 여자의 믿음

- 마 15:21~28,  요절:28 -

 

  서    론

  주님께서 믿음이 있는 자를 즉시 응답하지 않고 시험해 보는 일도 있다. 이것은 믿음이 크냐, 작으냐 하는 것을 알아보기 위한 방법이다. 오늘 가나안 여인의 믿음에 대하여 크게 배울 점이 있다고 본다.

 

  1대지 : 부르짖어도 대답을 아니 하심 (21~23)

  응답이라는 것은 그 즉시에 없다고 기도를 중지한다든지 낙심을 한다는 것은 참된 믿음이 있다고 볼 수 없고, 응답이 없을 때에 더 간절히 구하는 것은 가장 주님께서 기뻐하는 일이라고 본다. 예를 든다면 어떤 사람이 무엇을 요청할 때에 빨리 주지를 못했다 하더라도 조금도 변하지 않고 줄줄 믿는 것은 자기를 참으로 믿는 사람이라고 보게 된다.

  이와 같이 주님께서도 큰 뜻을 나타내고자 할 때에 받을 사람이 끝까지 변치 않고 나가는 자를 기뻐하시는 것이다. 사30:18를 보면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이시라. 무릇 그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 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주님께서 응답지 않는 것은 기도하는 자에게 끝까지 참는 것을 보기 위한 선한 방법이다.

 

  2대지 : 시험을 해 보심 (24~27)

  이 시험은 겸손한 자를 찾기 위한 시험이다. 주께서 택한 자를 시험해 보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의의가 있다.

  첫째 : 변함이 있나 없나 보자는 것이요,

  둘째 : 겸손하나 겸손하지 않나 보자는 것이요,

  셋째 : 낙심하지 않나 하나 보자는 것이요, 또는 큰 기대를 가졌나 가지지 않았나 보자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믿음이 있는 자는 변하지도 않고 교만하지도 낙심하지도 않고 큰 기대를 가지지도 않고 주님께서 주시는 대로 받는다는 마음이 있어야 된다. 또는 어떻게 하든지 주님께는 감사할 것 뿐이라는 마음이 있어야 된다.

 

  3대지 : 네 믿음이 크다고 칭찬하심 (28)

  주님께서 어느 사도에게도 네 믿음이 작다고 하셨지만 이 여자에게는 네 믿음이 크다고 칭찬하셨다. 믿음의 위대성은 주께서 시험할 때에 오히려 감사하는 자라면 큰 믿음이라고 보게 된다. 그러므로 어느 종이나 다 주께서 시험을 해보고 그 소원대로 이루어 주시되 하나님을 자랑할 수 있도록 역사해 주시는 것이다.

  신앙에는 시험을 거친 다음 가서야 큰 믿음이 되는 것이다. 믿음에는 작은 믿음이 있고 큰 믿음이 있는 것이니 작은 믿음은 주께서 시험을 해 볼 때에 마음이 흔들리는 믿음이요(마14:31), 믿음이 크다는 것은 아무리 시험을 해 보아도 오히려 더 감사하는 마음으로 의심하지 않는 믿음이다.

 

  결    론

  믿음은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믿음이다. 많고 많은 사람이 거룩한 옷을 입고 예루살렘 거리에 왕래하지만, 그 무리는 다 책망을 받고 버림을 받았는데, 가나안 여자 한 사람이 믿음이 크다는 칭찬을 받은 것은 오늘 우리에게 큰 교훈을 주는 일이라고 본다.

  믿음이라는 것은 어떤 의식이나 도덕이나 교리나 신조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아무리 어려운 난관이 와도 믿음으로 이기고 나가는 자가 될 때에 이것이 주 앞에 설 수 있는 믿음이라고 본다.

  가나안 여인이 주님 앞에 나와서 2, 3차나 시험을 해 보아도 주여 옳소이다 하는 믿음이라는 것은 위대한 신앙의 본질이 된다. 왜냐하면 죄를 진 인간이 죽어야 마땅한 사람으로서 아무런 불평도 둘 수가 없다. 무조건 주여 옳소이다 하는 신앙이라야 주님은 그 믿음 위에 축복하시는 것이다.

 

 

제4과  시몬 베드로의 믿음

- 마 16:16~20,  요절:16 -

 

  서    론

  기독교의 신앙이라는 것은 베드로의 믿음을 비롯하여 시작된 교회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믿음은 다 베드로와 같은 믿음이라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베드로의 믿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배워야 할 것이다.

 

  1대지 : 하나님께로 받은 믿음 (16~17)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하는 믿음은 하나님께서 알게 해 준 믿음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이것이 복 있는 믿음이라는 것이다. 믿음이라는 것은 사람이 가르친 것도 아니요, 스스로 연구한 것도 아니요, 하나님께서 택한 자에게 알게 해 주므로 믿는 것이 산 믿음이라는 것이다(마13:11).

  믿음은 택한 자에게 주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만왕의 왕이라는 것을 믿게 된다는 것은 인간의 지식을 초월한 신의 역사로만이 믿게 된다는 것이 천국에 들어가는 완전한 표가 될 것이다. 예를 든다면 어떤 큰 회석이 있을 적에 입장권이 있어야만 들어가는데는 그 입장권을 자기 마음대로 만들어 가지고 들어간다는 것은 불법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천국에 들어가는 자는 하나님께서 준 믿음의 표를 가진 자라야 들어 갈 수 있게 될 것이다(마11:27).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잃은 양을 찾는 역사에 한 표적이 되는 것이니 택한 자 외에는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 사도적인 신앙이다(행13:48).

 

  2대지 : 마귀를 이기는 믿음 (18)

  믿음은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생을 위하여 역사하신다는 약속의 말씀을 믿는 것이니 사람으로서 마귀를 이기지 못하고 사망의 권세 아래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을 이기고 벗어나도록 하는 동시에 완전히 이 땅에서 마귀 권세를 이김으로써 그리스도의 왕국이 이루어지는 것을 기독교의 완전 승리라는 것이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승리하시고 부활하신 것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중생을 받게 되므로 사망의 권세를 벗어 나는 것이요,

  둘째로는 예수님이 재림하시므로 이 땅에 마귀 세력을 완전히 없애고 성도로만이 평화의 왕국이 이루어지도록 역사하겠다는 예언을 믿고 순종하므로 완전 승리를 이루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승리로 말미암아 베드로를 들어 쓰므로 시작된 교회가 세계적인 대 확장을 보았고 예수님의 완전 계시인 계시록의 말씀으로써 종말의 역사가 있으므로 완전 승리의 왕국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세밀히 말하자면 죽은 영이 살아남으로써 교회가 서게 되고 죽은 몸의 부활과 산 몸의 변화가 있으므로 성도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3대지 : 천국의 열쇠를 줌 (19)

  이것은 믿음으로만이 천국에 들어가되 베드로에게 천국복음의 총 책임자로 세운 것이다. 베드로는 믿음으로 천국에 들어가는 진리 운동의 열쇠를 가진 자이다. 그러므로 이방 사람에게 구원을 베푸는 역사를 개척할 때에 베드로에게 묵시를 보여 주었던 것이다(행10:14~16). 이방 사람에게 성령을 부어 주는 일을 베드로를 통하여 시작했다(행10:44~48).

  하나님은 언제나 시대적인 역사를 할 적에 대표적인 사람에게 주권을 맡기는 것이다. 이 주권이라는 것은 복음의 주권이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는 것으로 말미암아 속죄의 은총을 받고 천국에 가는 복음 운동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행적을 기록하는 자들은 목적이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믿게 하기 위한 목적이다(요20:30~31).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는 다 영생을 얻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복음은 영생하는 말씀이라고 한다(요6:68). 이 복음을 전하는 목적은 회개하고 죄 사함을 얻게 하기 위한 목적이다(눅24:47~48).

 

  결    론

  베드로의 신앙은 하나님께로 온 것이니 이 믿음을 비롯하여 겨자씨 한 알이 온 밭을 덮는 나무가 되듯이 베드로 마음 속에 시작된 믿음의 씨가 금일에 세계적인 대 종교를 이룬 것이다.

  믿음이라는 것은 한 번 한 사람에게 오므로 그가 믿고 나가 증거할 때에 그대로 믿으면 똑같이 죄사함을 받고 성신을 받고 완전한 승리를 이루는 것이다. 그러므로 베드로를 통하여 이루는 회개 운동은 온 세계의 모든 사람에게 중생의 은혜를 받으므로 천국을 이루게 된 것이다.

 

 

 

 어 린 이  공 과 편 - 요한복음 공부

 

제9과  참된 교훈을 가져오신 예수님

- 요 7:14~21,  요절:16 -

 

  서    론

  학생들 무엇이 학생들에게 제일로 필요할까요. 아마 먹는 빵보다도 참된 교훈이 가장 필요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음식은 먹어도 학생들에게 완전한 사람을 만드는 효과를 주지는 못합니다. 참된 교훈을 잘 받는 학생들이 될 때에 그 교훈을 통하여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학생들이 학교에 가서 배우는 것은 사람들이 세상의 이치를 기록하여 가르치는 교훈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가져온 교훈은 세상의 사람들이 감히 알 수도 없고 가르칠 수도 없는 교훈을 가져 오셨습니다. 사람이 학교에 가서 교훈을 받았다 하더라도 예수님께서 가져온 교훈을 모른다면 그 사람은 밝은 사람이 될 수 없고 어두운 사람이 됩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님이 가져 온 교훈은 어떠한 교훈이라는 것을 오늘은 공부하겠습니다.

 

  1대지 : 하나님의 교훈을 가져 오셨습니다 (14~16)

  세상에 많은 선생들이 가르친 책이 있지만 그 책은 그 선생들이 스스로 연구해서 저술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에 오시기 전에 하나님께서 모든 선지들에게 앞으로 될 일을 기록하게 할 때에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을 처녀 몸에 성신으로 잉태될 것과 베들레헴에 날 것과 갈릴리 나사렛에서부터 자라나 이방의 모든 나라들에게 큰 빛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공자나 석가나 그 밖의 모든 사람들은 온 세상에 빛이 될 교훈을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가져온 교훈은 하나님의 교훈을 인간에게 분명히 알도록 가르친 교훈입니다. 예수님이 오지 않았다면 사람의 앞길을 바로 가르친 자는 전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천하 사람이 1971년이라는 단년을 쓰는 것은 예수님이 참된 교훈을 가져 오셨으므로 세상이 바로 깨닫게 되므로 금일에 모든 사람이 빛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2대지 : 예수님은 자기의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셨습니다 (17~18)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첫째는 목수 일을 많이 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돈을 벌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 가장 불쌍한 동네에서 그 사람들을 돕는 일을 했습니다.

  둘째는 병을 많이 고쳤습니다.

  그 나라는 너무나 가난한 사람이 많고 보니 병자가 많았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을 찾아가서 말씀을 전하고 병자를 전부 고쳐줄 때에 아무런 값을 받지 않고 거저 손만 대면 병이 나았습니다.  

  그러나 한번도 예수님은 내가 고쳤다고 하라 한 일이 없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라 했던 것입니다. 심지어 제자들의 발까지도 대야에 물을 떠 가지고 씻어준 일도 있습니다. 또는 밤이 맞도록 산에 가서 기도한 일도 있습니다. 이렇게 하신 예수님은 조금도 불의한 일을 한번도 한 일이 없고 거룩하게 말씀을 교훈하셨습니다.

 

  3대지 : 핍박을 받으셨습니다 (19~21)

  그때에 바리새교인들은 예수님을 귀신이 들렸다고 핍박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때에 바리새교인들은 아무런 역사가 없는데 예수님을 통하여 병이 낫고 또는 훌륭한 말씀을 가르칠 때에 예수님을 많은 사람이 따라 가는 것을 시기해서 악한 말로 귀신이 들렸다고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무리 핍박을 해도 그것을 대항하지 않고 남을 살려주기 위하여 끝까지 참으시면서 그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것은 하나님을 공경한다는 대제사장과 그밖에 모든 성직자들이 예수님을 마귀라고 하면서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것입니다.  

  죽은지 사흘만에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후에 예수님이 가르친 교훈을 들은 자들이 책에다 기록한 것이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복음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요한 복음을 공부하는 것은 요한이가 기록한 책입니다. 학생들 예수님을 귀신이 들렸다고 한 사람들은 다 망하고 말았습니다.

 

  묻 는  말

 1. 학생들에게 제일 귀한 것이 무엇입니까?

 2. 1971년이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3. 예수님은 왜 핍박을 받았나요?

 

 

제10과  자유를 주시는 예수님

- 요 8:31~37,  요절:36-

  

  서    론

  학생들, 억지로 무엇을 하는 것이 좋습니까, 자유롭게 하는 것이 좋습니까? 학생들은 누구나 다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하라고 하면 머리를 숙이고 입을 삐죽하고 보기가 나쁜 사람이 될 거예요. 학생들, 무엇이 재미가 있습니까? 하기 싫은 것을 해야 재미가 있습니까? 하기가 좋은 것을 해야 재미가 있습니까?

  오늘은 우리 예수님이 무엇이나 억지로 재미없는 일을 하라는 예수님이 아니라는 것을 공부하겠습니다.

 

  1대지 : 참된 진리를 알게 해 주심 (31~32)

  학생들 무엇을 먹는 재미가 좋습니까? 모르는 이치를 깨닫는 것이 재미가 있습니까? 사람이 먹는 재미만 알고 참된 이치를 깨닫는 재미를 모른다면 짐승같은 사람이 됩니다. 학생들 무슨 이치가 알고 싶습니까? 비행기가 하늘로 어떻게 날아가느냐 하는 이치를 아는 것 보다도 라디오가 어떻게 소리가 나느냐 하는 것 보다도 사진기에 어떻게 사진이 박히느냐는 것 보다도 녹음기에 어떻게 사람의 말이 녹음되느냐는 것보다도 더 학생들에게 필요한 이치는 예수님이 알게 해 주는 진리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과학적 이치를 알았다해도 그것으로는 내 마음에 완전한 자유를 얻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기계가 아니며 동물이 아니며 영원한 생명을 가진 영의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어떻게 하여야 영원히 죽지 않고 사는 진리를 깨닫게 되므로만이 그 영혼은 기쁨을 얻게 됩니다.

  학생들, 아무리 밥을 잘 먹고 옷을 잘 입었다 하여도 마음이 복잡하고 고통스러우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이 가르친 진리를 잘 알 때에 마음이 새로워지고 깨끗해지고 기뻐집니다.

 

  2대지 : 참된 자유를 주심 (33~36)

  마귀는 사람에게 자유를 주는 것보다도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옳은 생각도 나지 못하게 만드는 악한 귀신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학생들에게 머리 위에는 지혜와 총명을 주고 마음에는 깨끗하고 평안한 마음을 주고 몸에는 피곤치 않고 명랑한 사람이 되게 하시는 성신을 보냅니다.  지금 학생들 다 같이 호소할까요. (“참된 자유 줍소서”로 47장으로).  

  우리는 자유로운 사람이 되고 보면 자유로운 생활이 있고 자유로운 생활이 있는 동시에 자유롭게 사는 평화 왕국이 오는 것입니다. 학생들, 자유를 주시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가 이때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성신을 보내어 자유로운 사람이 되게 하고 다시 올 때는 자유롭게 사는 이 세상을 이루기 위하여 오십니다.

 

  3대지 : 자유가 없는 종교인 (37)

  아무리 종교를 믿어도 죄를 짓는 사람은 자유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아무리 가르쳐도 마음에 죄를 짓고 있는 바리새교인들은 참된 기쁨을 얻지 못하고 악해졌던 것입니다. 학생들 어느 나라 사람이고 그 나라 정치 아래서 죄를 지으면 어디로 갑니까? 형무소로 가서 갇혀 있게 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 앞에 범죄한 사람은 지옥의 권세를 가진 마귀에게 매여 마음이 복잡해지며 자기 마음을 자기 마음대로 못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죄를 사함받고 그 영혼이 마귀의 권세에서 벗어나면 참된 자유의 생활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묻 는  말

 1. 사람이 무슨 이치를 알아야 자유할 수 있습니까?

 2. 사람은 어떻게 되므로 자유로운 사람이 됩니까?

 

 

제11과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보게 하신 예수님

- 요 9:1~12,  요절:11 -

 

  서    론

  학생들, 세상에 제일 불쌍한 사람은 소경입니다. 오늘은 어머니 배에서 날 때부터 소경이 된 사람을 예수님이 보게 한데 대하여 재미있는 공부를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 공부를 할 때에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어떠한 분인 것을 분명히 학생들이 알아야 하겠습니다.

 

  1대지 :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심 (1~3)

  제자들은 예수님께 물어 보기를 이 사람이 날 때부터 소경이 된 것이 누구 죄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대답하기를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해서 된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능치 못하신 것이 없다는 것을 나타낼 때에 모든 사람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소경도 두 가지입니다. 눈이 보이다가 소경이 된 자도 있고 어머니 배에서부터 눈알이 생기지 않은 소경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눈알이 없는 소경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떴을까요? 이제 이 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2대지 :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 눈에 발랐습니다 (6~7)

  어찌해서 예수님은 눈알이 없는 사람에게다 흙을 발랐을까요? 학생들 웃을 일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어떤 사람이 소경의 눈에다 흙을 빤빤히 발랐다면 얼마나 웃을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여기에는 진리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낼 때에 흙으로 사람을 빚어 놓고 코에다 생기를 불어 넣어서 사람이 되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눈알이 없는 사람의 눈에다 흙으로 막고 얼마 있다가 예수님 말씀대로 순종해서 실로암 못에 가 씻었더니 눈알이 생겨서 보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만들었다는 표적입니다. 학생들 이것을 볼 때는 분명히 사람의 몸을 흙으로 빚어 내었다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일까요?

 

  3대지 : 눈을 뜬 사람이 담대히 증거함 (8~12)

  이웃 사람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학생들, 생각해 보세요. 우리 동네에 눈알이 없던 사람이 눈알이 똑똑히 생겼다면 얼마나 놀랄 일입니까? 그래서 그때 사람들이 서로 말하기를 혹은 그 사람이라고도 하고 혹은 비슷하다고도 했습니다. 그때에 그 사람이 말하기를 내가 그 사람이라고 담대히 말하니 모든 사람이 그러면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고 할 때에 그 사람 말이 예수란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씻었더니 보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때에 모든 사람들은 그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내가 소경되었을 적에 보지를 못했고 어디로 갔는지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 후에 얼마 있다가 예수님이 그 사람을 만나서 네가 나를 믿느냐 했습니다. 그때에 대답하기를 주여 그가 누구이오니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할 때에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너를 보고 말하는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한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사람은 깜짝 놀래어 예수님 앞에 와서 절을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심판하러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를 보게도 하고 보는 자를 보지 못하게도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9:35~40).

  학생들 예수님은 얼마든지 보게도 하고 못 보게도 합니다. 우리 학생들을 이 시간도 무슨 모든 진리를 깨닫게도 하시고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묻 는  말

 1. 소경이 몇 가지 입니까?

 2. 눈알이 없는 소경의 눈에 무엇을 발랐다고요?

 3. 무슨 물에 가서 씻었다고요?

 

 

제12과  선한 목자 되신 예수님

- 요 10:11~18,  요절:15 -

 

  서    론

  학생들 앞으로 나갈 길은 홀로 갈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학생들은 심히 약한 사람이요, 또는 내일 일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누구나 다 누구의 인도를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은 앞길을 바로 인도해 주는 선한 목자가 있어야 합니다. 많은 정치가도 있고 종교가도 있지만 우리의 선한 목자는 예수님이란 것을 오늘은 공부하겠습니다.  

 

  1대지 :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린 선한 목자입니다 (11~13)

  세상의 영웅이라는 사람은 사람을 많이 죽인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유익하게 하기 위하여 남을 죽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름 사람을 유익하게 하기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린 것입니다. 학생들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 한 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므로 온 천하 어느 나라 사람이든지 예수님의 보혈을 믿으므로 분명히 죄 사함을 받고 그 영들이 살아나서 구원을 받은 일은 너무나 똑똑한 사실입니다.  

  오늘 학생들도 예수님이 날 위하여 죽으신 것을 믿으면 확실히 죄를 사함받고 구원을 받는 체험을 받게 됩니다. 학생들 생각해 보세요. 아무리 학생들을 사랑해서 돈을 주고 좋은 물건을 준다하여도 학생들의 앞길을 살 길로 인도해 주는 사람이 아니라면 학생들에게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2대지 : 우리 사정을 아시는 선한 목자입니다 (14~16)

  학생들은 학생들의 사정을 예수님 만큼은 모릅니다. 왜냐하면 학생들이 세상에 날 때부터 예수님은 학생들이 자라나서 어떻게 살아야 되며 어떠한 일을 할 사람이라는 것을 미리 다 아시는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베드로를 부를 때도 네가 앞으로 사람을 많이 낚는 어부가 되리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학생들 오늘도 예수님은 학생들이 무슨 일을 당할지 내일과 내년에도 무슨 일을 당할 것인지를 다 아십니다. 그러므로 학생들은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고 답답한 일을 만나도 예수님은 학생들을 모든 어려운 일을 다 이기고 나가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천하에 제일 복 있는 사람은 예수님의 인도를 따라 가는 사람입니다.

 

  3대지 : 권세가 있는 선한 목자입니다 (17~18)

  천하에 권세를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생명을 버릴 권세도 있고 찾을 권세도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 생명을 인간을 위하여 버리기도 했고 다시 부활하기도 했습니다. 세상에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다 자기가 살아 보려고 해도 더 살수가 없어서 죽었고 다시 살지를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내가 만민을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산다고 말씀하신 대로 십자가에 못박혀 피를 흘릴 대로 흘리고 죽었다가 사흘만에 부활해서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성신의 은혜를 나리고 계시며 다시 구름을 타고 세상에 오실 예수님이십니다. 학생들 깊이 생각해 보세요. 앞으로 세계를 통일할 사람은 죽었다가 부활하셔서 승천한 예수님입니다.  

  지금 아무리 공산당이 예수를 대적하지만 예수님은 벌써 사도 요한에게 계시를 보일 때에 주님이 다시 오실 때는 붉은 짐승이 나와서 자기를 대적하고 많은 사람을 해치는 일을 하다가 예수님이 다시 와서 심판 할 때에 망한다고 미리 알려 주었습니다. 학생들을 참으로 살길로 인도할 선한 목자는 예수님입니다.

 

  묻 는  말

 1. 학생들에게 선한 목자는 왜 필요합니까?

 2. 선한 목자는 남을 죽이는 사람입니까? 남을 살리기 위하여 죽은 사람입니까?

 3. 살아 보려고 하다가 살지 못하고 죽은 사람이 선한 목자입니까? 남을 살리기 위하여 죽었다가 부활한 사람입니까?

 

 

 

 논 설 편

 

1. 충성된 것 같으나 거짓된 사람

  모든 사람은 다 무엇이든지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자기의 모든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충성이라는 것이 거짓이 없는 진리를 위한 것이냐 하는 것이 큰 문제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충성된 것 같으나 거짓이 되는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미혹 받은 자의 충성

  이것은 가련한 일이 된다. 왜냐하면 헛된 수고를 했기 때문이다. 가장 불행스러운 일은 거짓선지를 위하여 재산을 바치고 몸을 바치는 일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신앙이라는 것은 덮어놓고 열심이 있다는 것보다도 완전한 지식을 가지고 먼저 분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금일에 기독교 안에는 충성을 다한 것 같지만 실지는 거짓을 위한 충성이 된다는 일이 너무나 많다고 본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이 진리 하나가 바로 서는 데는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말씀 하나에서 자아를 바로 찾고 충성을 다해야 될 것이다.

  누구든지 참된 신앙 노선에서 진리 하나를 바로 찾아보려는 사람은 하나님이 기뻐하는 마음이니 반드시 옳은 종을 만나게 하고 미혹을 받지 않도록 해줄 것이다.

 

  2. 자기 주권을 위한 충성

  사람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순종하는 충성이 아니고는 아무리 열심이 있게 일했다 하여도 자기의 주권을 위한 일이라면 그것은 자동적으로 거짓이 되는 것이다. 거짓이라는 것은 진실한 것 같으나 참되신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위한다면 하나님은 그 사람을 진실이라고 볼 수가 없고 거짓된 자로 인정하게 되는 것은 자기 자체가 거짓 영에게 미혹을 받게 되므로 진리를 바로 알 수 없다. 탈선된 길을 가게 되므로 충성된 것 같으나 필경은 거짓이 되고 마는 것이다.

 

  3. 세상의 안락을 얻어 보려는 충성

  스스로 속는 자는 세상의 안락을 꿈꾸는 자라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이 볼 때에 제일로 어리석은 자는 현세의 안락을 위하여 충성을 다해 나가는 사람이라고 보게 된다.

  하나님은 영원한 평강을 목적두고 싸우는 자에게만 맑은 영감과 지식과 또는 총명도 주므로 무엇이든지 바로 알 수도 있고 인도할 수도 있는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니 아무리 애를 써도 세상 향락을 목적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지 않기 때문에 충성을 다한 것 같으나 결국은 바람잡이 생활이 되고 마는 것이다.

 

  4. 도덕적인 의를 위한 충성

  소위 도덕적인 사람 가운데서 자기는 양반이라는 행세를 하기 위하여 모든 정력을 바쳐서 예의를 행해 보려고 애를 쓰는 자가 사람이 볼 때는 점잖고 도덕이 높은 것 같으나 실지는 거짓된 자가 된다.

  우리나라가 과거에 소위 유교학자라는 사람들 중에서 이러한 일이 많이 있었으므로 이 민족이 발전을 못하고 거짓이 많은 사람이 된 것은 겉모양만 남에게 보이려는 것이 이날까지에 내려온 습관화된 자리에서 진실이라는 것을 잃어버린 일이 너무나 많다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소위 양반행세를 못하면 인정해 주지 않는 사회가 되었기 때문에 실지는 부패해지고도 겉은 양반이라는 것 때문에 국가를 망친 일을 볼 때에 충성을 다한 것 같으나 실지는 거짓이 되고만 것이다.

 

  5. 정통을 위한 충성

  기독교 안에 소위 정통이라는 사람들 가운데서 정통을 위한 정통이 되고 정통을 위한 교리가 되고 정통을 위한 예배가 되고 정통을 위한 열심이 있으므로 하나님이 볼 때는 하나님을 위한 충성보다도 정통의 교권을 위한 충성이 될 때에 도저히 그 예배와 기도를 받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을 이단이라고 판정해서 자기의 행동을 내세웠으므로 하나님은 그 죄를 회개하기 전에는 도저히 그 사람의 기도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언제나 종교가 부패할 때에는 소위 정통이라는 교권이 강하게 되어 정통의 교권을 순종하지 않으면 축출을 하고 압박을 하는 일이 있게 되는 것은 정통이라는 교만의 눈이 어두워진 사람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정통이라는 것을 내세우기 위한 충성이라는 것은 거짓이 되는 것이다.

 

 

2. 쉬운 것 같으나 어려운 일

  세상의 모든 일은 쉬운 것 같으나 바로 알고 보면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깊이 깨닫는 것을 완전한 지혜와 지식이라는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무엇이나 다 경솔히 보고 쉽게 여기는 것이로되 지혜로운 사람은 모든 일을 볼 때에 경솔히 보지도 않고 쉽게 여기지 않고 어렵게 여기는 동시에 초인간적인 하나님의 역사로만이 해결된다는 것을 믿는 것을 영적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제 쉬운 것 같으나 어려운 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지식에 대하여

  오늘에 인간들은 과학적 지식이 조금 발달했다는 교만에서 너무나 인생관을 과학적 지식으로 쉽게 판단하고 만다는 것은 멸망을 자취할 교만이라고 본다.

  사실인즉 아폴로를 타고 달나라에 가는 지식보다도 사람이 참된 진리를 바로 믿는 신앙의 지식을 바로 찾는 일이 더 크다고 생각지를 못하고 과학적인 지식으로 하나님의 완전 계약을 믿는 신앙을 쉽게 여기고 판단하는 일은 도저히 인간 영계에 대한 이치를 조금도 모르기 때문이다.

  인간의 흑암이라는 것은 어려운 일을 쉽게 보고 쉬운 일을 어렵게 보는 사람을 어두움의 사람이라는 것이다. 인간 자체는 하나님의 역사가 없이는 전부가 어려운 일 뿐이요 하나님의 역사가 같이 할 적에 어려운 일 같으나 모든 일은 다 쉽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물주께서는 인간으로 하여금 조물주의 역사없이 자기 힘으로 하려는 자에게 역사하지 않으므로 교만한 자는 넘어지게 되고 겸손한 자는 승리하게 되는 것이다.

 

  2. 싸움에 대하여

  모든 인간들은 자기가 어떠한 방침으로 해서든지 이겨보려고 하는것이 인간의 야심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실패는 다 여기에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서로 이겨보려고 싸우다가 피차 망하는 것이다. 인간들은 싸움을 많이 싸워서 이긴 사람을 영웅으로 보고 못이긴 사람을 못난 사람으로 본다.

  인간의 싸움이라는 것은 사실인즉 어리석은 싸움이다. 왜냐하면 참된 이치를 모르는 싸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기의 힘으로 싸우던 사람들은 결말은 다 후회하고 슬픈 비관으로 끝을 맺은 것이다. 금일에 싸움을 위하여 연구하다 보니 인간 자멸이라는 비참을 이루게 된 것이다.

  참된 진리를 위한 싸움이라는 것은 하나님 편에서 마귀편을 대항하여 싸우는 것이니 인간 생각으로는 어려운 일 같으나 싸우고 보면 쉬운 일이 될 것이로되 인간 야욕에서 싸우는 싸움은 쉽게 이길 줄 알고 싸웠지만 결말은 피차에 승부를 해결하지 못하고 전쟁의 난국을 이루어 놓은 것이다. 금일에 이 난국을 돌파하는 일은 서로 협상을 하는 것이 쉬운 일 같으나 이것조차도 후회할 날이 올 것이다.

  그러므로 난국 해결의 승리는 멸공진리 운동이라고 본다. 하나님편에서 말씀한 진리를 위하여 싸울 적에 붉은 마귀의 세력은 바람앞에 등불같이 꺼지고 말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어려운 일을 당하게 하는 이도 하나님이요 그 일을 하루아침에 해결시키는 이도 하나님이시다. 이렇기 때문에 진리를 모르는 사람은 싸움에 실패할 것이고 진리를 아는 사람은 싸움에 승리하게 될 것이다.

 

  3. 사업에 대하여

  모든 인간들은 사업을 위하여 노심초사하고 밤낮으로 날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업에 완전한 성공이라는 것을 본 자는 심히 적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욕심이 많은 인간들은 무슨 사업을 할 때에 욕심에서 쉽게 알고 시작했다가 실패를 당할 적에 오히려 사업을 하지 않은 것만 못한 실망을 당하고 만다.

  풀 한 포기에 열매를 먹고사는 인생이 자연을 지배하는 하나님을 떠난 사업이라는 것은 쉽게 보았지만 결국은 다 어렵게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대자연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축복 속에서 되는 사업은 어려운 일 같으나 모든 일이 쉽게 되는 것이요 축복이 떠난 사업이 될 때에 쉬운 것 같으나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4. 인격에 대하여

  모든 사람들은 다 자기가 잘난 멋에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자기가 잘난 것 같이 생각을 하나 자기의 잘못조차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은 자기를 위한 인격에서 결국은 수치를 당할 것이다. 자기가 자기를 위한 인격이라는 것은 무슨 일이나 쉽게 생각을 하나 다 실패가 되고 보니 쉬운 일같이 생각했던 사람으로 실지 어려워 못할 때에 자기인격이 수치라는것 하나를 나타낸 것 뿐이다.

  하나님께서 주는 것을 받은 인격은 자기를 위한 인격이 아니요 대중을 위한 인격으로서 모든 일이 어려운 일 같으나 말 한마디에 해결되는 인격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제 인격이 인격을 위한 인격이라는 것은 동물이 동물을 잡아먹는 세계와 같이 될 것이다. 인격을 위한 인격이 아니요 인격을 주시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는 인격이 될 때에 사람의 인격을 초월한 신의 사람으로 세계를 하루아침에 통일하게 될 것이다.

 

 

3. 슬픈 일 같으나 기쁜 일

  인간의 생활은 어떻게 하면 즐겁게 살아볼까 하는 것이 대자연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받은 인간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인간들은 즐거움을 찾으면서도 실지는 슬픔이라는 것을 면치 못하고 마는 것은 슬픈 일 같으나 기쁜 일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즐거운 일을 찾다가 오히려 슬퍼하는 인간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제 슬픈 일 같으나 기쁜 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부족을 깨닫는 생활

  인생이라는 것은 자기 부족을 깨닫는 애통의 눈물이 없이는 참된 기쁨의 세계라는 것을 맛 볼 수가 없다. 예를 든다면 어떤 사람의 몸에 나쁜 균이 들어가서 전염이 되는 상처가 있다면 그것을 사정없이 깎아내는 수술을 받을 적에 슬픈 일 같으나 오히려 이것은 기쁜 일이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인생이라는 것은 자기의 잘못된 죄가 무엇인지를 알 때에 오른손이라도 찍어 버리고 오른팔이라도 찍어버리고 눈이라도 뽑아 버리는 일은 슬픈 일 같으나 그 손과 눈과 팔이 있어 가지고 전체가 망하는 것 보다는 나을 것이다. 그러므로 슬픈 일 같으나 고치기 위한 일이라면 결말은 기쁜 일이 될 것이다.

 

  2. 정의를 위하여 싸우는 생활

  인간의 모든 생활은 싸움이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된 것이 타락한 인간 사회의 생활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정의를 위하여 싸우는 생활이 아니고는 싸움이라는 것은 자기가 자기를 위해 싸우다가 자기를 망치는 비참을 이룰 것이다. 그러나 정의를 위하여 싸우는 생활이라는 것은 싸우도록 점점 기쁨을 얻는 체험을 받게 된다.

  어리석은 인간이 볼 때는 정의를 위하여 싸우는 사람이 당하는 일을 망했다 실패했다고 보고 있지만 실지는 그 사람은 거기에서 하늘로부터 오는 기쁨을 얻고 인간 밖에의 미의 세계를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초대교회의 일곱 집사중 스데반이라는 사람은 정의를 위해 싸우다가 돌에 맞아죽는 자리에서도 그 얼굴이 천사같이 기뻐하면서 이 무리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요 하면서 그 영은 하나님 앞으로 가게 되었던 것이다. 바울이 정의를 위하여 싸울 때에 로마 옥중이 슬픈 일 같으나 오히려 항상 기뻐하라는 편지를 쓰게 되었던 것이다.

  인생의 참된 기쁨이라는 것은 정의를 위하여 싸우는 데서 체험한 자라야 참된 영원한 기쁨을 소유하는 인격을 가지게 될 것이다.

 

  3. 작은 일에 충성하는 생활

  모든 인간들은 각각 자기가 큰 일을 해보려는 영웅심을 가지고 날뛰다가 그대로 되지 않을 때에 심지어 자살을 하는 데까지 떨어진 일이 많이 있다. 그러나 빈곤 속에서 허덕이는 사르밧 땅 과부의 생활은 엘리야를 만나서 엘리야에게 떡 한 조각을 빚어주고는 과부와 그 아들 독자는 굶어죽을 비극을 만났던 것이다. 엘리야는 그 비극을 만난 가정에서 한번 기도한 후에 그 집에는 3년 6개월 비참하게 가무는 기근 속에서도 먹고 남음이 있는 기쁨이 있게 되었던 것이다.

  앞으로 모든 사람이 무서운 재앙을 받을 때에 기뻐할 자는 작은 일에 충성하던 빈곤한 자들이라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다. 인간이 볼 때는 돈 많은 부자가 큰 일을 하는 것 같으나 쓸쓸한 빈민굴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탄생을 했고 사도들이 나오게 되었고 모든 성도들이 다 비참한 카타콤이라는 빈민굴 속에서 싸워 승리하므로 전세계 인류를 살려내는 열매를 가져 왔다는 것은 슬픈 일 같았으나 기쁜 일이 된 것이다.

 

  4. 시련 속에서 참는 생활

  하나님께서는 크게 쓸 종에게는 남보다도 시련이 많게 한다. 쓰지 못할 사람에게는 시련을 주지 않고 크게 쓸 사람에게는 시련을 줄 때에 쓰지 못할 인간들은 그 사람을 비소하게 된다. 그러나 시련 가운데서 낙심하지 않고 눈물 흘려 밤을 새우면서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더 큰 은혜를 받게 되므로 슬픔에 잠겼던 눈물의 기도는 승리의 개가로 바꾸어지는 기쁨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가장 크게 쓸 종에게는 그슬린 나무같이 되도록 사단에게 피해를 당하게 하고 오히려 사단의 세력을 짓밟고 나가는 용사가 되게 하여 새로운 역사를 하게 하므로 그 종을 통하여 여호와를 자랑하게 하는 것을 촛대 교회의 스룹바벨 역사라는 것이다.

 

 

4. 작은 일 같으나 큰 일

  인간들은 작은 일 같으나 큰 일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작은 일을 큰 일로 보고 큰 일을 작은 일로 볼 때에 정치인이나 종교인이나 모든 학자들까지도 실패를 하는 일이 있다. 이제 작은 일 같으나 큰 일이 무엇이라는 것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정치적으로 작은 일 같으나 큰 일은 무엇이냐 하는 것을 바로알고 정치를 할 때에 그 정치가는 큰 승리를 보게 될 것이다. 정치가의 제일 큰 일은 작은 국민 하나를 바로 깨우치는 인격이 될 때에 전국민을 살리는 인격이 될 것이다. 어떤 정치가가 백성 하나를 바로 깨우쳐 줄 인격이 없다면 그 정치가는 어리석은 시민의 자격에 불과한 인격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적어도 백성을 다스리는 자는 한 사람 한 사람을 깨우쳐 줄 수 있는 인격을 가지고 대중을 지도 할 때에 대중이 하나같이 깨닫게 되는 일이 있게 될 것이다.

  2. 종교인으로서 제일 큰 일이 무엇이라는 것을 체험한 자라야 산 종교인이라고 볼 수 있다. 종교인은 골방 속에서 소리없이 묵상하는 일이 있으므로써 큰 일을 할 수 있는 영감을 받는 것이니 고요한 밤 고요한 침상에서 소리없는 묵상으로 하나님께로 교통을 받는 일이 종교인에게 없다면 그 사람은 큰 일을 하는 것 같으나 죽은 나무가 되고 말 것이다.

  3. 학자로서 작은 한마디 학설이 대중을 살리는 진리가 있느냐 없느냐는 것을 모른다면 그 학자는 간판을 위한 학자가 될 것이다.  소위 박사라는 간판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러나 박사가 간판을 위한 박사라는 것보다도 일언반구의 말 한마디에 생명의 진리가 없다면 그 학설은 생명없는 이론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진리를 바로 가르치는 학자가 되려면 한마디 말에 생명의 진리의 초점이 무엇이냐는 것을 날카롭게 분석하는 지혜와 명철을 받아야만 될 것이다.

  4. 사업에 관하여 작은 사업 같으나 큰 사업이 무엇인지를 모른다면 그 사업은 아무런 열매없는 일이 되고 말 것이다. 가장 작은 일 같으나 큰 사업은 예수님께서 지극히 작은 사마리아 여자 하나를 구원시킨 것을 내 양식이라고 하신 것과 같이 지극히 작은 소자 하나를 내 몸같이 알고 그 생명 하나를 구원해 주는 것이 가장 큰 일인줄 알고 전 사업의 초점을 여기에다 두는 사업이라면 그 사업 전체는 다 하늘에 보화를 쌓아두는 사업기관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성부, 성자, 성신 삼위께서 역사하는 초점이 이것이기 때문이다.

  어떠한 종이 아무리 큰 사업을 하는 것 같이 보이나 소자 하나를 실족케 하는 일이 있는 사업이라면 그 사업 전체는 천국을 위한 것 보다도 지옥을 위한 사업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은 지극히 작은 생명의 소자 하나를 내 생명과 같이 아는 심정이 없다면 열매없는 가을나무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구원해 주는 일이 제일 큰 일이라는 것을 알 때에 큰 일을 할 수 있는 축복이 반드시 오게 될 것이다.

 

 

5. 큰 일만 남은 세상

  인류 역사상 큰 일이 많이 있었지만 지금같이 큰 일이 많은 세상은 없다고 본다. 인류역사상 크게 복 받을 일도 크게 화 받을 일도 이제 남았다고 본다. 이제 크게 화 받을 일을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사상 문제다

   이날까지 타락한 인간의 생활이 없이 온 것은 아니로되 지금같이 인간들이 사상적으로 타락한 때는 없었다고 본다. 크게 화 받을 사상은 배도적인 사상이다. 배도라는 것은 진리를 알지 못하는 데서가 아니고 진리를 듣고도 그 진리를 대적하는 행동을 하는 것을 배도라는 것이다. 금일에 유물론 공산사상이라는 것은 전부가 그리스도의 사상을 없애기 위하여 꾸며 가지고 나오는 것이다.

  이 사상은 간교한 옛 뱀 마귀가 최후 발악적인 행동을 하기 위한 사상이다. 잔인해도 극도로 잔인하고 기만적인 행동 중에도 극도로 기만적이요, 인생이 타락하는 중에도 극도로 타락한 사상이다. 이 사상이 금일에 세계 인류의 마음을 끌고 가는 것은 인류전멸이라는 큰 화를 가져오는 바벨론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이 사상은 죄악의 사상인데 사람을 금수화 시키는 사상이라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다.

 

  2. 전쟁 문제다

  이날까지에 전쟁은 역사를 이룬 것이다. 인류역사라는 것은 전쟁이 없다면 역사가 될 수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전쟁 중에도 세계 전멸이라는 전쟁을 완전히 무력으로 준비되었다는 것은 큰 화를 가져올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전쟁을 하는 일에 전력을 둔다는 것은 자기 생명을 자기가 끊는 일이 될 것이다.

  우리는 이 전쟁을 피하기 위해서 협상을 한다는 것도 큰 일이요, 이 전쟁을 강조한다는 것도 큰 일이다. 그러면 전쟁을 할 수도 없고 안 할 수도 없는 일이 오늘에 머리가 아픈 두통거리라고 본다. 세계 인류를 다 죽이고 몇 사람이 남아도 공산주의는 하고야 만다는 공산 정책이라는 것은 인류 전멸의 큰 화를 가져 올 일이라고 본다.

 

  3. 큰 미혹이다

  이날까지에 미혹이라는 것은 없는 것은 아니로되 이제 전 세계 인류가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 외에는 다 짐승의 표를 받게 되는 큰 미혹이 있은 다음에 표 받은 자는 몽땅 없애고 표 받지 않은 사람만 남게 하여 새 시대를 이룬다는 것이 인종 전멸의 심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큰 미혹은 거짓선지가 교회에 들어와 붉은 짐승의 세력 앞에 머리를 숙이도록 하는 미혹인데 이것은 세 가지 조건을 가지고 오는 것이다.

  첫째 : 세계 인류를 살린다는 조건이요,

  둘째 : 완전한 사랑으로 하나가 된다는 것이요,

  셋째 : 빈민을 살려준다는 간판 밑에서 큰 미혹을 가지고 올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과는 정 대적이 되는 사상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말씀하기를 인류종말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치 않는 사람은 전부 불로 살라 없이 한다는 것인데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덮어놓고 싸우지 않도록 해서 세계 인류가 똑같이 다 살도록 한다는 것이다. 또는 하나님의 말씀은 악자는 버리고 의로운 사람을 남은 자가 되게 하고 악자는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없이 하므로 새 시대가 온다는 것인데 이들은 말씀을 떠나서 덮어놓고 서로 사랑하므로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또는 하나님의 말씀에는, 곤고하고 가난해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를 보호하여 남은 자가 되므로 새 시대를 이루는 데는 교만하고 물질향락에 도취가 된 자는 다 없이 한다는 것인데 이들은 부자를 없이하는 것보다도 개인의 자본을 국유화 시켜서 누구든지 그 정치를 순종하는 자는 빵을 주고 순종치 않은 자는 무조건 죽인다는 것이니 이것은 가난한 사람을 살린다는 것보다도 자기가 주장하는 공산당에게 물건을 다 맡기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자들이 거짓선지를 이용하여 거짓선전을 하고 미혹을 시켜서 자기네 정치로 세계를 통일한다는 것이니 누구나 다 미혹을 받도록 허위 선전을 하는 것이다. 심지어 이적과 기사까지 마술적으로 행함으로써 다 표를 받도록 하는 미혹이 오는 것이다.

  이제 크게 복받을 일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예언의 말씀을 증거하는 종이라고 본다

  과거에 모든 선지들은 큰 축복이 성도에게 올 것을 묵시로 보았고 사도요한도 계시로 보았던 것이다. 모든 성도는 하나같이 환란가운데 남은 자의 축복을 목적두고 말씀한 성경을 알아보려고 애썼지만 하나님은 그들이 맡은 사명이 아니므로 이날까지 봉해 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때에 와서 그 비밀을 몽땅 알려준 것은 이 축복을 받을 때가 온 증거라고 보게 된다. 지금 이 축복을 받기로 택한 자가 있으니 이 사람들은 누구나 다 하나같이 예언의 말씀을 증거하도록 하나님은 강권으로 들어쓰게 될 것이다.

  종 중에 복 있는 종은 종말에 남은 종으로서 예언을 증거하다가 변화 승천하는 종이라고 보게 된다. 지금은 무엇으로 보든지 분명히 변화성도가 되어 큰 축복을 받을 시기라고 보게 된다. 부활성도는 순교의 피를 흘리고 죽은 자로서 부활하여 왕권을 받게 되는 것이요, 변화성도는 예언을 증거하던 종으로서 그 자손까지 지상에서 큰 축복을 받게 되는 것이다.

 

  2. 촛대교회라고 본다

  이날까지는 교회가 부분적인 지식에 은사를 가지고 한 사람 한 사람 그 영혼을 구원해 주는 역사를 하였지만 촛대교회는 완전한 신앙 지식을 가지는 동시에 완전한 역사를 하게 되고 완전한 역사를 하게 되는 동시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단체적으로 남은 교회가 되어 새 시대를 이루는 것이다.

  가장 복 있는 자는 촛대교회의 양떼라고 보게 된다. 왜냐하면 가정의 전체가 새 땅 축복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노아의 가정이 복을 받았다 하여도 새 시대를 이룬 것은 아니요, 아무리 예루살렘 다락방 교회가 복을 받았다 하지만 새 시대를 이룬 교회는 아니다.

  그들의 몸은 다 풀과 같이 쓰러지는 자가 되어 지금까지 흙이 되어 있다. 그러나 촛대교회의 양떼는 들림 받지는 못하였지만 예비처에서 양육을 받고 원수의 피해를 조금도 당치 않고 천사의 보호를 받아 새 시대의 영광을 누리는 것이다. 이제 큰 복을 받으려면 어떻게 하든지 촛대교회를 이루어야만 될 것이다.

 

  3. 동방 땅 끝의 나라이다

  모든 선지는 가장 복 있는 나라는 동방 땅 끝의 한 나라인 것을 말했다. 왜냐하면 그 나라에서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서 세계를 밝히며 열방의 복 받을 성도들이 자녀와 은금을 아울러 싣고 동방 나라에 들어오므로 그 곳이 영화롭게 되고 그 나라 전체가 세계에 빛나는 나라가 되어 시온이라 이스라엘이라 명칭을 가지게 된다고 하였다. 이 나라에 여호와의 영광이 비치는 반면에 새 시대의 주인공이 되는 나라가 된다고 하였다.

  이것은 틀림없이 대한민국이라고 본다. 우리나라는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 나라 만세라는 국가를 주신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중심하여 새로운 시대를 이루는 신정 국가가 이루어질 것이다. 지금은 우리 나라를 가장 불행스러운 나라로 보지만 초자연적인 신의 역사는 위기에 빠진 나라에 나타났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하는 동시에 이제 이루어질 일이다.

 

 

 

 신 앙 문 답  

 

【문】1. 지금 완전 무장을 갖추어야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완전 무장이 안 되는 원인이 무엇입니까?

【답】완전 무장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가지고 싶은 마음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완전 무장이 되는 일에 그 요소를 바로 알아야 할 것입니다.  

  첫째 : 완전 무장은 하나님께로 직접 받는 종도 있고 또는 완전 무장을 받은 종을 통하여 받는 종도 있을 것입니다.

  완전 무장을 하나님께로 직접 받은 종은 많은 사람이 못되고 대표적인 사람이 하나님께 받으므로 그 종을 통하여 받는 자들은 다음과 같은 생각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완전 무장을 시킨 종을 통해서 내게도 그 무장이 먼저 받은 자와 같이 된다는 것을 믿고 자기가 독립적으로 무엇을 따로 연구해 보려는 것이 없어야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법의 하나님이니 일단 한 종에게 주신 다음에 그 종을 대표로 세운 이상 그 종의 사명을 하나님께서 침범하지를 않습니다.

  예를 든다면 군대 훈련소에 훈련 소장을 세운 이상 그 소장을 세운 대장이 소장의 맡은 일을 가서 자기가 하려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말세에 완전 진리 무장을 하는 일도 한번 대표적인 종에게 진리를 가르치고 무장시킬 책임을 맡겼기 때문입니다.

  둘째 : 자신이 지켜야 될 일이 있습니다.

  이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내가 하나님께 한번 작정한 바가 있으면 아무런 일이 닥쳐오더라도 사명적으로 작정한 일은 죽어도 그 사명을 위하여 죽는다는 결심 하에서 변치 않고 진행해 나갈 때에 하나님 편에서는 진실이라는 것으로 인정하고 무조건 실수가 있다하여도 완전 무장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번 두 번 작정한 일을 진행치 않고 변하게 되면 하나님 편에서 불신으로 취급이 된다면 있는 것도 빼앗아 가고 아무 것도 주지를 않고 사명이 옮겨가는 것이니, 완전 무장을 받으려면 진실이라는 인정을 하나님께 받기 위하여 한번 작정한 것은 변치 않고 나가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셋째 : 게으르지 않아야 됩니다.

  하나님 편에서 완전 무장을 주는 목적은 환란이 박두할 때에 환란 가운데서 남은 종이 되게 하기 위하여 완전 무장을 주는 것인데 이 무장을 받고자 하는 자가 게으른 자가 된다면 하나님 편에서 그 사람을 들어 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완전 무장을 받고도 게으른 자가 된다면 할 일을 할 수가 없으므로 절대로 게으르지 않고 순종하느냐 않느냐 하는 것을 보기 위하여 여러 가지 모양으로 까불어 보는 일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완전 무장을 받으려면 적은 일에도 절대 게으르지 말고 철저히 열심을 내어 순종할 때에 하나님 편에서는 쓸 수 있다는 인정이 있게 되므로 무조건 완전 무장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완전 무장을 받으려면 작은 일에서라도 자기 책임을 다해 보려고 하는 열성이 있어야 됩니다.

 

 

【문】2. 필요 없는 일에 시간을 보내지 않겠다고 결심하고도 필요 없이 시간을 보내는 생활을 하게 되는데 있어서 어떻게 하여야 되겠습니까?

【답】이것을 마귀의 압력이라는 것입니다. 마귀란 놈은 사명자들을 어떻게 하든지 필요 없는 일에 시간을 보내게 하기 위한 방침에서 다음과 같이 시험을 한다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할 것입니다.

  첫째 : 필요 없는 말을 하도록 역사하는 것입니다.

  이런 시험은 대부분이 입에 말이 수다한 편을 통하여 오는 시험입니다. 입을 놀리지 않고는 참을 수 없으리만큼 오는 시험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이 말을 해 가지고 많은 사람이 그 한사람 때문에 헛된 시간을 보내도록 만들어 놓는 시험입니다.

  이런 시험을 막으려면 첫째는 말하는 사람이 말을 하지 않으려는 데서 하나님께 입이 더러운 것을 회개하는 일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다음은 이런 사람이 말을 하더라도 듣지도 말고 말할 시간을 주지 않도록 노력하는 일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 : 공연히 머리가 복잡하게 하는 시험이 마귀를 통해 오는 것입니다.

  이 시험은 필요 없는 생각을 할 때 들어오는 시험입니다. 필요 없는 생각이라는 것은 대부분이 머리가 예민한 사람에게 들어옵니다. 무엇을 볼 때에 쓸데없이 판단하는 생각이 떠오릅니다. 이러한 자의 쓸데없는 판단으로 많은 사람이 참된 종을 의심하게도 되고 또는 필요 없는 생각들이 들어오는 일이 있게 되므로 한 사람이 머리가 복잡해져서 시끄럽게 되면 다른 사람들까지도 다 시끄럽게 되어서 공연히 쓸데없는 생각 때문에 기도도 안되고 말씀을 들어도 은혜가 안되고 공연히 시간만 보내게 됩니다.

  이러한 시험을 막으려면 머리가 예민한 사람이 주의해서 하나님 앞에 완전한 영감을 받도록 노력하는 것이 있어야 할 것이며 혹 쓸데없는 생각으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 있다 하여도 이런 사람은 용납하지 말고 깨닫도록 해주는 일에 전력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제일 큰 죄가 함부로 남을 판단하는 죄인 줄 알고 필요없는 생각을 물리치는 일에 전력을 두어 기도하므로 그 압력이 물러가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셋째 : 육적 안락을 연구할 때에 사람에게 공연히 모든 일이 다 귀찮게 되는 시험이 옵니다.

  이러한 시험을 받은 자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을 제일 좋게 생각이 들어옵니다. 대부분이 이런 시험은 감정적으로 노는 사람들에게 이런 시험이 들어옵니다. 조금만 기분이 상하면 맥이 풀리고 기분이 좋으면 힘이 나고 하는 사람들인데 이러한 사람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까지도 하던 일을 못하게 되고 열심으로 일을 하려해도 이런 사람들이 끼워져서 일을 속속히 진행되지 못하게 됩니다.

  이런 시험을 막으려면 항상 감정으로 치우치지 않으려는 결심을 가지고 하나님께로 오는 감화를 정상적으로 받기 위하여 눈을 감고 조용히 묵상하는 시간이 많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혹 이러한 사람이 있다 하여도 여기에 치우치지 말고 용기있게 나가는 박력이 있어야 됩니다.

  넷째 : 큰 일을 기대하는 허영심을 없이 하여야 됩니다.

  대부분이 이러한 시험은 좀 영웅적인 인물이란 사람들에게 이러한 일이 많이 시험으로 옵니다.

  예수님도 세계를 구원하는 일을 할 때에 인간이 볼 때는 아무 것도 아닌 목수 생활에서 또는 노방 전도, 개인 전도, 병자 방문 전도를 하셨는데 공연히 큰 역사를 기다리고 큰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은 나사가 넘은 생활이니 이러한 생활에는 공연히 시간을 허송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도 한 날의 괴로움을 그날에 족한 줄 알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대로 영웅심을 가진 사람이 되지 말고 매일 같이 하나님께서 허락하는 대로 작은 일에 충성을 할 때에 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므로써 완전한 인격이 이루어지는 동시에 완전한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간을 허송하지 않으려면 무슨 일이나 양심대로 시간 시간 움직여 나간다면 모든 일은 열매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문】3. 공연히 집안이 복잡해지고 합심이 안되고 심지어 어린아이들까지도 순종을 하지 않고 날마다 공연히 어지러워지는 일이 무슨 원인인지 구체적인 설명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

【답】성도의 가정이라는 것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요소가 있어야 됩니다.

  첫째 : 가모가 되는 사람이 항상 하나님께 기도로써 새로운 영감을 받으면서 적은 일 하나라도 경솔히 하지 않고 마귀의 시험이 들어 올까봐 조심하는 마음에서 가정 일을 처리해 나가야 합니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기도의 어머니가 지혜롭게 움직이는 가정에서 어거스틴 같은 성자가 나왔고, 아브라함 링컨 같은 위대한 정치 혁명가가 나왔고, 루터 같은 종교 개혁자가 나왔고, 웨슬레 같은 부흥사가 나왔고, 에디슨 같은 과학자가 나온 것입니다. 이와 같은 역사를 본다면 기도하는 지혜로운 어머니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 : 가장된 호주의 굳센 마음에서 엄격한 교훈과 활동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아무리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었다 하더라도 아담이 엄격한 처리를 해 나갔던들 세상은 이러한 비극을 이루지 않았을 것입니다. 적어도 가정은 세계를 움직이는 본부인데 본부의 주동자가 죄와 싸우는 힘이 약하다든지 또는 세상의 어떤 사람을 대할 때에 약해서 흔들리는 자가 된다면 얼마든지 그 가정은 마귀가 틈을 타고 들어오게 됩니다.

  셋째 : 하나님의 성신이 함께 하는 가정이 되지 못할 적에 자녀까지도 다 사단의 기계가 되고 맙니다. 성신이 함께 하는 가정이 되려면 언제나 말씀에 떠는 가정 생활이 있어야 합니다. 노아의 가정은 말씀에 떠는데 합심이 될 때에 세계 인류의 모든 일에 모 가정이 되었던 것입니다.

  가장 큰 일은 가정에 성신이 역사하느냐, 사단이 역사하는냐는 문제가 세계를 움직이는 근본이 될 것입니다. 가정은 언제나 아버지나 어머니나 성신님이나 같이 움직이는 가정이 되어야만 새 시대를 이루는 가정이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깊이 생각할 일은 가정이 누구로 말미암아 이렇게 되느냐 하는 것을 깊이 깨닫는 지각이 있는 것으로 서로 부족을 깨닫는 마음이 있을 때에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신의 역사는 같이 하게 될 것입니다.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한다 하여도 가정 식구들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 있다면 기도를 많이 하는 것을 오히려 옳은 것으로 보지 않고 필요 없는 일이라고 생각이 될 때에 역효과를 나타내므로 오히려 기도를 등한시하는 식구들이 되기가 쉽습니다.

  왜냐하면 기도를 많이 하는 비밀이 그 식구들에게 아무 것도 아니라고 인정이 된다면 안 되는 것이니, 기도하는 사람은 사생활이 덕이 되어야만 동거하는 식구들에게 감화를 주는 것입니다.

 

 

【문】4. 지금 교회에 영계가 이렇게 혼란한 가운데서 영계를 어떻게 하여야 조금도 혼선이 없이 완전 영계로 들어 갈 수가 있겠습니까. 이 일에 대해서 좀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답】영계라는 것은 인생 자신이 좌우하는 것이 아니고 위에서부터 말씀대로 역사하기 위하여 영계를 좌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위에서부터 영계를 좌우하는 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알아야 할 것입니다.

  첫째 : 율법시대의 영계는 하나님께서 앞으로 영계를 움직일 것을 언약의 말씀으로 세상의 사람이 알도록 여호와의 말씀이 서책으로 인간에게 나타나는 때입니다. 그러므로 그때는 말씀 하나를 정확히 인간에게 알도록 기록해 놓도록 하는 것을 목적했기 때문에 은혜를 나리는 일이나 교회가 확장되는 일은 있지를 않았고 다만 선지들에게 여호와의 신이 감동 감화해서 그 시대의 선민에게 경고의 말을 하는 동시에 완전 계약의 다림줄의 진리가 인간에게 완전히 전할 수 있는 문서를 성립시킨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그때는 영계가 복잡한 일은 없고 선지들이 고독을 느끼고 핍박을 받은 일이 있습니다.

  둘째 : 신약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선지 시대에 예언한 말씀을 이루는 역사를 할 때에 첫째는 마리아 한 사람에게 성령으로 잉태를 이루기 위한 목적에서 역사했고 예수님이 삼십 세가 될 때에 요단강에서 침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올 때에 성신이 예수님께 비둘기 같이 강림하여 역사하므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만민의 구주라는 것을 이적과 표적으로 나타나서 완전한 복음을 만방에 증거할 수 있는 증거가 예수 행적으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일반에게 성신의 역사가 나리는 때는 아니었습니다. 바리새 교인들의 박해가 있었지만 영계가 혼란한 일은 없었습니다. 이때는 예수님 한 분이 역사하다가 충성된 증인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3일만에 부활하여 40일만에 승천하시어 10일만에 성신이 강림하여 일어난 그 역사는 죄로 말미암아 죽은 영들이 회개하고 중생을 받는 역사였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역사라는 것은 내려오는 중 중생의 역사가 강하지 못하고 속화되는 때에 그때 그때 중생의 운동을 일으키는 영계의 신령한 사람이 나타나서 기독교가 없는 지방으로 새로이 개척을 하는 역사가 있게 되어 세계적인 대 종교를 이룬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지금까지에 큰 혼란이 있는 것은 아니로되 약한데서 다시 강하게 일어난 것뿐입니다.

  셋째 : 현재에 영계 혼란이라는 것은 인류 역사상 없던 혼란이라고 봅니다. 지금은 하나님께서 성경대로 마귀 권세를 개방시켜 기독교를 시험해 보는 때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지상 왕국을 이루는 역사는 마귀 권세를 개방시켜 모든 사람을 시험을 해보고 시험을 다림줄의 진리로 이긴 사람에게 지상의 안식 축복을 주기 위한 선한 방법이라고 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혼란한 영적 미혹이 오는 때에 다음과 같이 하므로 올바른 영감과 신앙의 노선을 가므로 진노의 날에 남은 종이 될 수 있습니다.

  ① 완전한 권세의 영감을 받아야 합니다

  이날까지의 역사는 죄인들에게 무조건 주는 은사의 영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은혜시대에는 죄로 말미암아 죽은 영혼을 살리는 역사이므로 은사 영감이었으나 피 값을 갚는 심판의 다림줄의 진리의 영감은 권세의 영감입니다. 이것은 진리를 따라서 영감을 주기 때문입니다. 은혜 시대 진리는 속죄 운동의 영감이요 진노의 날의 영감은 심판 권세의 영감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심판의 다림줄의 진리를 따라 오는 권세 영감을 나리는 것을 하나님의 인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이 역사는 심판의 다림줄의 진리를 따라서 오는 역사이므로 어느 종이나 이 진리를 완전히 전할 수 있는 사람이 될 때에 일어나는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진리를 위하여 싸우는 사람이 될 때에 이길 수 있는 권세를 주는 것입니다.

  ② 말씀에 떠는 심정으로 싸워야 합니다

  마귀는 얼마든지 말씀을 혼선시키는 일을 할 수 있는 권세를 받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귀를 없애는 심판의 다림줄의 말씀 권세가 아니고는 도저히 마귀의 흑암권세를 물리치고 나갈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심판의 다림줄의 진리를 가지고 종들을 하나되게 하는 역사이므로 어느 종이나 말씀이 혼선되면 다 흑암에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③ 완전 개조의 인격을 받아야 됩니다

  은혜시대는 몸은 흙으로 돌아가고 그 영만은 중생 받은 시간에 지옥을 면하게 되는 역사이므로 몸이 완전 개조를 받을 필요조차 없습니다. 그러나 이 몸이 살아서 변화 승천할 때는 마귀의 흑암을 뚫고 나갈 수 있는 몸으로 신 창조적인 개조를 받은 자만이 환란에서 남은 종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강권 역사가 하나님의 종들을 완전한 인격을 이루어 주므로 완전 승리의 열매를 맺는 종이 되게 하므로써 재림까지 촛대교회를 지키게 합니다(사43:1~7).

  끝으로 알아야 할 것은 이 역사는 모든 사람이 다 직접 하나님께로 받는 것이 아니고 대표적인 사람에게 완전 영감, 완전 개조, 완전 변론의 역사가 임하므로써 모든 종들이 다 그 종의 역사로 말미암아 하나같이 승리하는 단체를 이루게 됩니다. 예를 든다면 큰 전쟁이 났는데 전쟁을 지휘하는 대장에 의하여 모든 군대는 승리를 이룰 수 있는 한 단체가 이루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특  집  

 

1. 4월을 맞이하는 성도의 감상

  엄동 설한 시달린 찬바람 속에 자기의 아름다운 빛의 본색을 나타내지 못하고 다 하나같이 캄캄한 빛으로 시달리고 있던 초목들은 양춘의 가절을 또다시 맞이하여 자기의 아름다운 빛을 다시 자랑하는 4월입니다.

  아브라함의 씨가 이방의 객이 되어 400년 동안 악독한 애굽 바로의 정권 아래서 이스라엘의 아름다운 빛을 나타내지 못하고 이방 민족의 어두운 세력 앞에 머리를 숙이고 압박을 받던 거기에서 하나님의 종 모세의 인도를 받아 열 가지 재앙 속에서 피해를 당하지 않고 홍해를 육지같이 건너 이스라엘이라는 영광의 빛을 나타내던 달이 4월입니다.

  또는 만민의 죄를 짊어지고 쓸쓸한 말구유에 탄생하여 뼈저린 노동의 목수 생활을 거쳐 비소와 조롱을 받고 핍박을 받는 노방 전도, 병자 방문, 개인 전도에 애달픈 전도의 길을 걸어 차디찬 이슬 나리는 겟세마네 찬 바위틈에서 심령의 고통을 죄 값으로 받고 쓰라린 십자가 불평없이 지고 참으면서 죄인들을 위하여 기도하신 예수님 다 이루었다는 말씀 한마디로 운명을 하시고 그 몸은 무덤 속에 장례를 받았지만 무덤을 헤치고 다시 부활하여 모든 죽은 영들을 살리는 새 역사를 개척한 부활절이 이 달이며, 네로 황제의 가장 잔인하고도 기만적인 폭행 학살 속에서도 피해를 받지 않고 남은 자가 되어 종말에 붉은 용, 붉은 짐승, 붉은 여자의 세력을 완전히 때려부수고 지상 평화 왕국이 올 완전 계시를 받던 달이 이 달입니다.

  이와 같이 뜻깊은 4월을 맞이해서 우리 나라의 역사의 한 페이지가 될 선거를 앞에 놓고 다음과 같이 소감을 말합니다.

  우리는 새로운 역사를 일으켜야 할 때는 이때라고 봅니다.

  아시아 대륙은 붉은 정권 아래에서 참된 진리의 자유로운 빛을 나타내지 못한 지도 20년이 초과했고 우리 남한의 남은 교회도 신앙 자유라 하지만 모든 성도들은 교권의 탄압을 이기지 못하고 자기 양심의 괴로움을 당하면서도 입을 열어 말하지 못하는 압력 속에서 잠자는 상태에 있다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진리가 빛을 발하면 흑암은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동시에 없어질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명동지 여러분이여! 하나같이 진리의 봉홧불을 들어야만 할 때가 왔습니다. 소위 평화라는 간판 밑에 빛을 발하지 못하고 오히려 흑암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차마 볼 수 없는 일이고, 소위 십자가의 사랑이라는 간판 밑에서 타협을 하고 보니 음녀가 된 꼴을 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모세 한 사람이 담대히 나서므로 유월절이 이루어졌고 예수님 한 분이 이기시므로 부활의 소망의 절기가 이루어졌고 사도 요한이 환란속에서 남은 자가 되므로 완전 계시를 받아 그 진리가 금일에 멸공 진리 운동이 되었습니다.

  친애하는 사명 동지 여러분! 우리는 반공이 아니요 멸공입니다. 멸공이라는 것은 사람이 하는 일을 가르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심판을 뜻한 것입니다. 사람이 반공이라는 것은 이날까지에 승부를 결하지 못하고 오히려 협상이라는 세계로 들어가는 금일에 4월부터 하나님께로 멸공 권세 역사가 모세를 통하여 애굽을 치듯이 금일에 진리의 용사를 들어서 붉은 짐승을 쳐부수는 새로운 역사가 권리 행사로 나타나야만 할 때가 이때라고 봅니다.

  사랑하는 사명자 여러분이여,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가 멸공인 것을 믿을진대는 진리 안에 굳게 뭉쳐 싸워 나가는 새로운 출발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2. 71년 4월을 맞이하는 사명자의 간곡한 기도

  하늘은 또다시 온양한 봄빛을 비쳐주므로 찬 바람에 얼었던 모든 만물은 다시 자유로운 활동을 할 때가 온 이날에 우리에게도 새로운 출발을 가질 수 있는 뜨거운 사랑의 격동을 주실줄 믿고 4월부터 좀더 새로운 순의 종이 나오기를 기도하면서 감사함을 드리나이다.

  모든 식물은 언제나 때를 잃지 않고 새 순을 내건만 우리는 금년도 아무런 순을 내지 못하는 거슬린 나무가 될까 두렵사오니 4월달부터는 거슬린 나무가 되지 말고 새순을 낼 수 있는 역사를 나려 주시옵소서.  

  아버지여, 말씀을 동방으로 보내실진대는 말씀으로 이 나라가 복된 나라가 되도록 역사를 나리시옵소서. 우리나라는 은, 금으로 이 민족을 살릴 소망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말씀으로 이 민족을 살리는 역사를 주시옵소서. 달러를 자랑하는 민족보다는 진리를 자랑하는 민족 되게 해 주시옵소서. 아시아의 모든 난제는 성경대로 이루어지는 난제이온즉 성경대로 이루어지는 역사로 해결될 것을 믿나이다.

  이 민족이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나라 만세라는 진리를 무엇인지 알 수 있게끔 역사를 나리시옵소서. 이날까지 인간이 알지 못하도록 숨겨 놨던 진리를 이 나라에 나타내서 전할 사명을 맡길진대는 강권으로 선지 국가를 이루어 주셔야만 되겠나이다. 약자로 강국을 이루는 진리를 내가 믿사오니 진리 안에서 하나님을 자랑케 하옵소서.

  진리를 보내신 아버지여 진리대로 이루어지는 역사를 4월부터 나타내시옵소서. 하나님의 작정은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을 때에 여호와의 권세와 능력이 나타나는 것을 내가 믿나이다. 다리오의 마음을 감동시켜 권리 행사로 예루살렘 성전을 준공케 하시던 하나님이여 이 달에 아버지의 역사가 이 나라 정치인들에게 임하시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빛나는 선지 국가를 이루게 하시옵소서.  아멘.

 

 

3. 멸공 진리 운동에 대한 의의를 다음과 같이 알려 드립니다

  멸공 진리라는 것은 심판의 다림줄의 진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어느 선지를 막론하고 심판과 새 시대를 목적하고 묵시를 받을 적에 인류 종말에 전 세계 인류가 불에 사름을 당하는 재앙이 있고 남은 자로 새 시대를 이룰 것을 꼭 같이 기록했습니다.  

  이러한 때에 중동을 중심하여 북방에 자리잡고 나오는 악한 정치가 나올 것을 말할 때에 그 정치는 자고 이래로 없던 정치라는 것을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정치는 첫째는 신의 존재를 부인하는 자인데 심판할때까지 형통한다고 했고(단11:36~38), 둘째는 궤휼적 정책이라고 하였고(단11:32), 셋째는 모든 백성의 재물을 노략한다고 하였고(나2:9~12), 넷째는 심판의 위령을 가졌다고 했고(합1:7), 열왕을 멸시한다고 하였고(합1:9~10), 죄를 짓는 정치를 한다고 하였고(합1:11) 또는 그밖에 미가서나 이사야서나 모든 전체를 보면 북방에 배도적인 세력이 극도로 강하게 일어났다가 하나님이 일어나 북방을 없이하는데는 초인간적인 역사로써 북방을 없애되 북방 세력과 타협을 하던 시온과 이스라엘이 망할 것을 말했으니 우리는 멸공 진리운동을 하는 것은 그 사상을 진리로써 없애는 운동입니다.

  아무리 공산 사상이 있던 자라도 이 진리를 알게 되면 자동적으로 그 사상은 없어질 것입니다. 또는 협상주의를 없애자는 것이니 이 진리를 알게 될 때에 자동적으로 협상 사상은 없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반공이라는 것은 진리에 없고 멸공이라는 것이 진리 안에 있는 것을 볼 때에 멸공 진리 운동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반공적인 하나님이 아니고 멸공 심판의 하나님입니다.

  공산당이라는 것은 민주 국가의 일개 정당으로 볼 것이 아니고 이것은 계시록대로 허락을 받고 나오는 붉은 말의 세력입니다. 붉은 말은 심판의 대상자이며 그 붉은 세력과 하나가 되어 붉은 짐승의 표를 받게 하는 거짓 선지도 심판의 대상자가 되며 미혹을 받고 그의 표를 받은 인간들도 심판의 대상자가 되는 것이니 멸공 진리 운동이라는 것은 다음과 같이 하는 것입니다.

  첫째 : 멸공 진리가 되는 심판의 다림줄의 진리를 가지고 사상 투쟁의 변론을 하는 용사들을 무장시키는 것이니 아무런 난관이 와도 굴복하지 않고 싸우는 권세를 하나님께 받은 용사가 일어나도록 완전 무장을 시키는 일을 목적두고 특별 수도가 있어야 될 것입니다.

  둘째 : 문서 운동입니다. 이 운동은 어떤 사람이 각자가 책을 저술하는 것이 아니고 사28:11과 같이 하나님께서 택한 종의 입술을 사용하여 얼마든지 멸공 진리에 대한 변론이 서책으로 나오고 있으니만큼 계속적으로 새로운 출판을 하여 누구든지 달려가면서라도 읽어 볼 수 있게 하는 것이 있어야 됩니다(합2:2~3).

  언제나 진리 운동이라는 것은 새로운 문서가 없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새로운 변론이 대표적인 종을 통하여 나타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변론의 문서 운동을 얼마든지 세계에 전할 수 있는 기관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 문서 운동을 하는데 있어서는 변론 원고를 작성하는데 얼마든지 대표적인 종이 담당할 수가 있는 것이니 여러 사명 동지들은 멸공 진리 운동에 물심 양면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인쇄비를 돕는 일, 날마다 편집에 책임을 지는 일, 교정을 보는 일, 번역하는 일, 책을 선전시키기 위하여 몸소 활동하는 일, 이 문서를 들고 읽으면서 전하는 일에 전력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셋째 : 친히 문서를 널리 보급하여 다 읽어 볼 수 있도록 하는 일에 활동 기관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문서 운동이라는 것은 합심된 단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날까지에 많은 문서 운동이 있었지만 이와 같이 완전한 변론이 하나님께로 오는 일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사41:1이하와 같이 동방 사람을 일으켜 변론을 하시는 일이라고 믿어집니다.

  기독교에 많은 서책이 있지만 멸공 진리 운동의 완전 변론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금년부터 새 출발로 나가는 일은 하나님께로 나리는 변론의 역사를 대대적으로 문서화시켜 어느 나라 사람이나 다 하나같이 멸공 진리 운동에 합심되어 전파하므로 각성을 받고 일어나는 자는 새 시대에 들어갈 자격을 진리의 지식으로 갖추게 될 것입니다.

  넷째 : 하나님께서 특별히 보호해 주는 일이 없이는 오는 환란에서 남을 자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멸공 진리 운동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붉은 세력을 없이하는 재앙으로 심판할 때에 보호와 구원을 받을 자는 멸공 진리의 말씀을 참으로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이 진리 운동을 위해서 세 가지 방면으로 활동해야 될 것입니다.

  1. 가정 방문과 노방 전도가 있어야 합니다.

  2. 부흥 전도단이 있어서 성회 운동을 대대적으로 해야 합니다.

  3. 촛대교회를 어디나 세워서 매일같이 멸공 진리의 말씀을 가지고 가르치는 일에 전력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4. 독자 여러분에게 부탁하는 말씀

  이 사람은 이 월간지를 기록할 때마다 다음과 같은 감상이 있습니다.

  나는 매일 10시간씩 수도 학과를 가르쳐야만 될 자리에서 아침 5시 30분부터 강단에 서면 9시 30분까지 강단을 떠나지 못하고 계속으로 서야만 합니다. 10시에 조반을 먹고 그 자리에서 즉시 월간지를 쓸 때에 받아 기록하는 사람이 붓을 들고 기다리고 있다가 내 입에 말씀이 나리는 대로 원고지에다 직접 받아 기록하는데 오후 1시 30분까지 기록하고 그 즉시 강단에 서면 4시 30분까지 강단에서 가르치고 저녁을 먹은 후에 5시부터 말씀을 받아쓰게 되면 7시까지 쓰게 되고 7시부터 강단에 서면 9시 30분에 저녁 공부를 필하게 됩니다. 그 다음 시간은 방문할 사람이 있으면 좌담할 기회가 한 시간 있게 되고 그 다음에 기도하며 침상에서 밤을 지내게 됩니다.

  이러한 중 너무나 분주해서 여러분들의 서신을 받을 때도 특별한 일이 아니고는 회답하기가 어려운 상태입니다. 바라옵기는 혹 월간지에 소식을 기록할 마음이 계신 분은 특별한 소식을 특집에 기록하도록 연락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 문서 운동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뿐이고 아무런 원조 기관도 없고 그 달마다 인쇄비를 성도들이 연보를 보내는대로 출판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어떤 사람이 저술한 책이 아니므로 책의 정가도 없고 전도용이라는 것으로 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의의가 있습니다.

 

  1. 시대적인 변론이므로 이날까지 교계에서 없던 변론을 계속으로 출판되므로 강단 생활하는 종들에게 필요한 책이 될 것입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명 동지들은 적어도 매달 10권 이상은 종들에게 전하도록 힘써야만 되겠습니다. 현저히 목회자들에게 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2. 누구든지 읽어보기에 쉬운 말로 기록되었으므로 문학이 높지 못한 분이라도 가정에서 읽어 그 신앙 생활이 건전하게 될 것입니다.

  아무쪼록 가정에 늘 있어서 조용히 기도하는 숨은 종들에게 전하도록 힘써 주시기 바랍니다. 모든 영들은 이 책을 읽으므로 소성을 받게 될 것입니다.

  3. 가급적이면 이 책에 대하여 책대로 알지 마시고 인쇄비로 아시고 송금을 하시되 40원 가량은 보내 주시도록 하셔야 이 진리 운동을 하는 일에 지장이 되지 않겠습니다.

 

 

5. 4월과 우리 나라

  이날까지 감추었던 용사들은 이제 나타나리로다. 동방 땅 끝 숨은 비밀 알자가 심히 적다. 이 비밀 알고 보면 멸공 용사 되리로다. 비밀 몰라 두려워하고 비밀 몰라 낙망하는 백성에게 멸공 진리의 비밀을 알려 줄 때는 왔다. 이 나라의 될 일 하나님의 보호 아래 하나님 자랑할 일 나타나리로다. 빈곤속에 허덕이던 이 민족 하늘의 응답 받고 보니 세계의 자랑 거리되는 나라 되리로다. 황충떼 일어나도 이것이 문제가 아니요 인의 역사 받은 종이 되느냐 못되느냐가 문제로다.

  부모 멀리하고 고향 떠나 만리 타국 좋다고 가는 신사 되지 말고 한평의 땅을 바로 개간해서 생산을 내는 농민의 하나가 되더라도 나라를 지키는 것이 하나님 보호받을 일이라고 본다. 우리 인생 살 길 무엇인가 달러를 따라가는 길은 아닐 것이다. 달러가 사람 살리는 것으로 난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달러를 바로 쓸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되는 것이 문제일 것 같도다. 천천히 걸어가는 양반 되지 말고 달음박질하는 용사가 되어 보자.

  기지개 켜고 잠자면서 정통 정통하지 말고 해산의 수고를 다하는 부르짖는 기도의 사람 되어 보자. 신학 신학 하면서 소경 노릇하지 말고 성경 본문 바로 읽어 진리의 눈 떠 보자. 내파 네파 논쟁 말고 예수님께 매달려 백마 탄 군대되어 보자. 놀기 좋다고 쓸데없이 싱글벙글하지 말고 앞일을 곰곰히 생각하고 몸부림치며 용기있게 진리 위해 싸워 보자. 할렐루야 영광 돌려 예배하는 사람되어 입술로만 떠드는 자 될까 조심하여 묵묵히 묵상하는 십자가 정신, 불타는 마음 가지고 주의 뒤를 따라가는 생활에서 잠잠히 주님을 의지하는 마음에서 체험의 생활을 가져 보자.  

  사랑 사랑 하면서 타협하지 말고 말하지 않는 중심 속에 절개있는 신앙으로 생명 바쳐 싸워 보자. 이것만이 주의 영광 나타내는 열매가 될 것이다. 반공 반공 말만 하지 말고 반공보다도 멸공의 진리를 깊이 알아 진리 안에서 완전 인격 찾아 가지고 환란중에 남을 자격 특권 형체 이루어서 용기있게 저 산 넘어 세세 왕권 받아보자.

 

 

알 리 는  소 식

  하나님의 크신 섭리는 세계에 새일 중앙 교회를 통하여 반드시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은 다음과 같이 알려 드립니다.

  첫째, 각 지방의 사명자들은 격동을 받고 새일 중앙 교회로 모여들어서 매일 같이 하나님께 부르짖는 호소를 올리면서 매일 같이 서울 거리에 나가서 멸공 진리 운동에 대하여 각 기관이나 모든 시민들에게 알려주는 일이 있게 된 것은 어떤 사람이 지도를 한 바가 없이 각자가 개인적인 행동에서 불타는 마음으로 진행되는 일인데 이것이 앞으로 정계와 사회에 새로운 감상을 주고 감화를 주는 일이 되었다고 봅니다. 자고이래 기독교에서 개인적인 격동에서 많은 사람이 한데 집결하여 나와서 외치는 일은 처음이라고 보게 됩니다(30~40명).

  둘째, 천도회관을 집회 장소를 정하고 3월 22일~23일까지 이뢰자 목사가 멸공진리 대 강연회를 하게 된 연제

  ① 알파와 오메가적인 멸공

  ② 역사적인 증거와 멸공

  ③ 동방 역사와 멸공

  ④ 새 시대를 이루는 멸공

  이러한 제목으로 강연을 한 바에 의하여 멸공진리를 무엇인지 정계가 알게 되고 일반 시민들이 알게 된 것은 앞으로 큰 열매가 될 일로 보게 됩니다.

  셋째, 4월 1일부터 멸공진리 운동을 위하여 전국 도시를 중심하여 적극 활동을 하기로 결심하고 각각 개인적인 행동에서 자비를 써 가면서 순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멸공 사상에 불타는 용사들이 목숨을 바치고 나서는 일이므로 이것은 작은 일 같으나 앞으로 새 나라 건설에 큰 도움이 될 것을 믿습니다. 각 지방에 계신 사명 동지들은 이번 서울에서 외친 종들이 지방으로 갈 때 기도로 도와주는 동시에 많은 협력이 있기를 바랍니다.

  넷째, 정식 전도지를 출판하여 사명자들에게 필요에 따라서 공급하게 되었으니 필요한 분들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가 3번지 광화문 비각 옆 의사 빌딩 10층 새일 중앙 교회로 연락하시면 보내 드리겠습니다.

  다섯째, 사명 동지 여러분, 멸공진리 사상을 일반 국민들에게 알려드리는 일에 전력을 두시고 활동을 하되 금번 선거도 멸공진리를 중심해서 우리 나라가 하나님의 보호 아래에서 승리하는 축복이 임하기 위하여 최선의 힘을 다하여 기도 하시면서 협력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