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례 (1971년 6월호)

설  교  편

 1. 주 재림시의 환란과 복된 사람 (단11:40~12:4) 

 2. 아담의 가정의 종교 싸움 (창4:1~12) 

 3. 아들의 영화와 아버지의 영화 (요17:1~7) 

 4.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는 역사 (요17:21~24) 

 5. 단물이 쑥물 되는 일과 죽음 (계8:10~11)

 6. 새 일을 고하고 행하시는 하나님 (사42:9, 43:19~21) 

 7. 여호와께 학자의 혀를 받은 종 (사50:4~11) 

 8. 일한 공력이 헛될까 조심하자 (고전3:10~23) 

 9. 하늘의 전쟁과 땅 위의 전쟁 (계12:7~9, 13:4~8) 

10. 그리스도의 영원한 제사 (히10:9~18) 

11. 믿음으로 구하고 의심하지 말라 (약1:5~8)  

12. 허락이 있어야 아는 비밀 (마13:10~17) 

13. 곤핍한 자에게 안식을 주는 여호와의 말씀 (사28:7~13)

14. 참되다고 인치는 믿음 (요3:31~36)

 

장년 공과편 - 예수님께서 십자가 부활을 증거하심

제1과  성전을 3일 동안에 다시 짓겠다고 말씀하심 (요2:13~22) 

제2과  이 시대에 큰 표적이 될 것을 말씀하심 (마12:38~45)

제3과  십자가를 강조하심 (마16:21~28) 

제4과  성경으로 십자가 부활을 증거하심 (눅24:44~49) 

 

어린이 공과편 - 요한복음 공부

제18과  믿는 자의 역사를 가르친 예수님 (요14:12~17)

제19과  참된 평안을 주시는 예수님 (요14:25~28) 

제20과  열매를 맺게 하시는 예수님 (요15:1~8) 

제21과  성신을 보내시는 예수님 (요16:5~13) 

 

논 설 편

1. 경고를 싫어하는 비극 

2. 천하가 다 슬퍼해도 기뻐할 일을 하는 사람이 되자 

3. 진리 없는 생활은 허무 

4. 미혹 많은 세상에 진리의 사람

5. 화가 있는 세상에서 받을 축복

6. 믿을 수 없는 일과 있는 일 

 

신 앙 문 답

1. 지금 많은 신자들이 각자가 자기네 영계가 옳다고 생각을 하고 서로 다투고 싸우는 가운데서 앞으로 어떠한 방면으로 영적 활동을 해야 되는지 구체적인 설명을 듣고자 합니다. 

2. 믿음이라는 것은 어떻게 신앙 생활을 하여야 구하는 대로 응답을 받게 됩니까?.

3. 아무리 일을 하려고 애써도 무슨 일이나 바로 되지를 않고 점점 막막한 일만 생기는 이유는 무엇인지 설명을 듣고자 합니다.

4.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보려고 애를 쓰다 보면 영광을 돌리는 것보다도 오히려 수치스러운 일을 당하게 되는 것은 무슨 원인인지를 알고자 합니다. 

5. 금일에 너무나 복잡한 일이 많을 때에 교회에 가도 예배가 안되고 도저히 피곤이 오는 것을 감당할 수가 없게 되는데 이 문제를 어떻게 하여야 해결할 수 있습니까?.

6. 현 시국을 위기라 하면서도 실지 생활은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점점 세상으로 치우치게 되는 원인이 무엇입니까?.

 

특    집

1. 6월에 대한 성도의 감상

2. 6.25의 억울한 피와 이 나라에 나타날 역사

3. 6월달을 당하여 지도자 되는 우리는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심각히 생각을 해야 될 문제를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4. 71년 6월을 맞이하는 사명자의 기도

5. 새일수도원의 기쁜 소식

※ 사명자의 호소문

 

 

 

 

 

 

 

 설 교 편

 

주 재림시의 환란과 복된 사람

- 단 11:40~12:4 -

 

  다니엘서는 재림의 주를 맞이할 시기와 복된 사람이 누구냐는 것을 목적 두고 묵시를 받은 말씀이다. 다니엘서 전체를 말하자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바벨론 포로 중 한 사람인 다니엘이 지혜의 영감을 받아 느부갓네살이 꿈꾼 묵시에 대하여 해석한 데서부터가 다니엘서의 종말관이 기록되었다.

  주 재림기의 환란은 여러 인종이 섞여서 살 때에 도저히 합할 수 없을 때 심판이 온다는 것을 목적 두고 말한 것이 다니엘서의 비밀이다. 금, 은, 동, 철, 반 철, 반 토의 우상이 나타났다. 이것은 금머리는 바벨론이 되고, 은은 메데바사가 되고, 동은 헬라가 되고 철은 로마가 되고, 로마 문명이 세계를 기독교화시키는 문명의 말기를 당하여 도저히 합할 수 없는 연방국과 합중국이 대립된 것이 미, 소 양국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여러 인종이 섞여 사는 연방국과 합중국이 합할 수 없는 것이 주 재림기의 환란이라는 것이다(단2:43~44).

  또는 네 큰 짐승을 보았는데 넷째 짐승이 세 짐승과 달라서 도저히 합할 수가 없는 것은 넷째 짐승이 심히 무섭고 이는 철이요 발톱은 놋이며 먹고 부셔 뜨리고 나머지는 발로 밟는다고 하였다(7:19~21). 이것을 보면 세 짐승은 흙과 같이 무르고 넷째 짐승은 극도로 강하다는 것을 말했으니 4대 강국의 세 나라는 자유 진영을 말했고 쇠같이 강한 것은 공산 진영을 말했다고 볼 수 있다.

  또는 11:40이하를 보면 북방 왕이 극도로 강하므로 중동을 중심하여 아프리카를 침투할 때에 동북의 소문을 듣고 떨다가 북방 세력이 망하는 것은 주님이 다시 오시므로 망한다는 것을 가르친 것이 다니엘서다. 그러므로 주 재림시의 환란과 복된 사람이 누구냐는 것을 본문을 통하여 말하고자 한다.

 

  1. 주 재림기의 환란

  첫째 : 물이 넘침 같이 북방에서 내려오는 환란 (11:40~41)

  이 환란이라는 것은 마지막 환란이니 이사야 선지도 8:7에 넘치는 큰 하수같이 환란이 올 때에 임마누엘 날개가 세계를 점령한다고 하였고 미가 선지도 5:5이하를 보면 북방 세력이 우리 지경을 짓밟을 때에 북방 세력이 망하고 남은 자가 승리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북방에서 내려오는 환란을 인력으로 막을 수가 없을 때가 주 재림기라고 모든 선지는 하나같이 가르쳤다.

  둘째 : 남방 구스가 북방을 시종드는 환란이다 (42~43).

  앞으로 큰 문제는 아프리카 사람이 북방 강한 세력과 합작이 되므로 중동 문제가 도저히 북방을 막을 수 없게 될 때에 주님이 재림할 것을 말했다.

  셋째 : 동북의 소문을 듣고 북방 왕이 분노할 때 (44~45)

  북방 세력이 성도를 대항하고 나오다가 동방에서 북방을 점령하고 들어가는 역사가 있으므로 북방은 최후의 발악적인 행동을 할 때에 주의 재림이 온다. 이사야서에도 동방 땅 끝 사람이 북방을 짓밟고 나갈 것을 말했고 사41:25, 42:10~13, 43:13~14 그 밖에도 모든 성경을 보면 성도의 권세가 북방을 짓밟고 들어가는 일이 있으므로 마지막의 역사가 끝을 맺는다고 한 것이다.

  넷째 : 개국 이래로 없던 환란 (12:1상반절)

  주 재림기의 환란이라는 것은 미가엘 대군이 일어나지 않으면 피할 수가 없는 환란이다. 환란도 전무후무한 환란이 있는 동시에 천사의 보호도 전무후무한 보호가 있을 것이다.

 

  2. 복된 사람

  첫째 : 책에 기록된 자 (1하반절)

  가장 복 있는 사람은 환란 가운데 구원받기로 작정된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은 천사의 특별 보호를 받으므로 새 시대의 영광을 백성으로 누릴 자들이다.

  둘째 : 깨어 영생을 얻는 자 (2)

  이미 죽은 자 중에도 다 부활하는 것이 아니고 왕권 받을 종만이 부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에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다고 한 것은 죽은 자가 다 부활할 것이 아니고 계20:4과 같이 순교자 부활을 가르친 것이다.

  셋째 : 지혜를 받아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인도한 자 (3~4)

  가장 복 있는 사람은 지혜로운 종이 되어 마지막 환란에서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인도한 자라고 볼 수 있다. 세계적으로 제일 빛나는 사람이요 영원히 별과 같이 빛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변화성도를 뜻한 것이다. 누구든지 지혜를 받은 자 외에는 다니엘서를 바로 깨달을 수 없다(12:10).

  다니엘서라는 것은 복음화 되어 있는 글은 아니고 마지막 환란 때를 분명히 가르친 글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지금 이 때가 주 재림기의 환란으로 들어가는 시기라고 보게 된다. 그 날과 그 시는 알 수 없으나 분명히 합할 수 없는 환란이 오는 때에 지혜로운 자가 되어 많은 사람을 옳은 곳으로 인도하는 자가 새 시대를 이루는 종이니 가장 별같이 빛나는 종이 될 것이다.

 

  결    론

  하나님께서 악한 자를 들어서 환란을 오게 하고 그 환란 가운데 주님이 오시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의의가 있다.  

  첫째 : 성도의 권세를 높이기 위한 목적

  둘째 : 하나님의 보호로 알곡을 모으기 위한 작정

  셋째 : 하나님의 큰 역사가 나타나므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 것을 만민에게 알려 주는 목적에서 환란이 있는 동시에 주님이 오시는 것이다.

 

 

아담의 가정의 종교 싸움

- 창 4:1~12 -

 

  종교라는 것은 질적 타락을 가진 사람에게 영혼 구원을 목적한 것이 종교의 시발점이었다. 사람이 선악과를 먹고 질적 타락이 없다면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선악과를 먹고 사람이 질적으로 타락이 될 때에 피로써 대속의 제사를 드리지 않는다면 도저히 그 영혼까지도 다 사망에 들어가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의 가정에 종교 싸움이 시작된 것이 금일까지 계속되는 싸움의 시발점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종교 싸움이라는 것은 왜 있느냐는데 대하여 다음과 같이 본문을 통하여 말한다.

 

  1. 응답이 있고 없는데서 싸움이 있음 (1~5)

  종교라는 것은 그 제사가 상달되느냐, 안 되느냐 하는데 의하여 합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좌우된다. 아무리 한 아담의 몸에서 난 가인과 아벨이지만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고 아벨의 제사만 응답이 있을 때에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왜냐 하면 예를 들 적에 한 가정에 두 아이가 있는데 한 아이에게는 맛있는 빵을 주고 한 아이에게는 주지 않는다면 받은 아이는 기뻐하고 받지 못한 아이는 성이 날 것이다. 그러면 부모가 빵을 주는 것도 아무 아이에게나 줄 수 있다. 속담에 미운 녀석 빵 조각 더 주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진리의 하나님은 아무리 사랑하는 아담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않을 적에 용서 없이 에덴 동산에서 쫓아내었거든 하물며 제사를 받으시는 하나님께서 중심을 보는 것이니 중심에 간절한 마음이 없는 사람의 제사는 받을 수 없을 것이고 간절한 사람의 제사만 받는 것은 합법적인 일이라고 볼 수 있다.

  이제 가인의 제사는 왜 받지 않았느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

  첫째 : 선을 행치 않는 죄이다(6~7상반절).

  하나님은 그 제물을 보는 것보다도 중심에 하나님의 시키시는 일을 단 마음으로 순종하느냐, 않느냐는 것을 보시는 것이니 하나님의 일을 단 마음으로 순종치를 않는 것이 큰 죄이므로 선을 행치 않는 가인의 영적 상태를 볼 때에 하나님은 그 제사를 받지 않았던 것이다. 심중은 간절하나 실수가 있는 사람보다도 제사는 드리면서도 그 중심이 간절한 것이 없는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았던 것이다.

  둘째 : 죄의 어미가 되는 일이다(7하반절).

  하나님은 가인에게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하였다. 죄도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자기가 고의적으로 지은 죄가 아니고 상대편에 끌려서 실수한 것은 죄의 어미가 되는 행동이 아니로되 옳은 사람을 이유 없이 미워하는 것은 죄의 어미가 되는 것이다.

  미워하는 마음 자체는 그 마음을 정욕의 사단이 점령했기 때문에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니 상대편이 내게 감정을 주므로 끌렸다는 것과 상대편이 내게 옳게 대해 주는데 해코자 하는 마음이 생긴다면 그것은 벌써 그 속에 마귀의 역사가 주인이 된 증거라고 볼 수 있다.

  언제나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남을 사랑하는 마음과 자기 부족을 깨닫는 마음으로 제사를 하면 받으실 것이로되 자기가 옳다는 생각을 가지고 남을 미워하는 제사는 도저히 받을 수 없을 것이다.

  셋째 : 하나님의 대적이 된 일이다(8~9).

  대적이라는 것은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해치는 것도 내 대적이요, 직접 나를 대적하는 것도 내 대적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를 받았는데 가인은 아벨을 죽였으니 하나님의 대적이요, 하나님을 대하여 반항심을 가진 것이니 즉 하나님이 기뻐하는 아벨을 죽인 일인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적했던 것이다.

  종교 악이라는 것은 3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는 외식하는 일이요,

  둘째는 시기하는 일이요,

  셋째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불평을 두는 일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마음이 있는 사람은 종교를 믿어도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2. 억울한 피와 보응 (10~12)

  억울한 피가 이 땅을 적신 일은 대부분이 종교 싸움에서 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아담의 집에서 시작된 피의 호소가 이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 피 값은 새 시대가 이룰 때에야 갚아준다고 계16:6, 17:6, 6:9~10에 말했다.

  언제나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려도 응답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마귀의 도구가 되었고 제사의 응답을 받는 사람은 하나님의 종이 되어 억울하게 마귀의 도구가 되는 사람에게 피해를 당했다는 것이 이날까지 종교적인 싸움의 역사라는 것이다. 그 싸움은 이제 끝을 맺는 단계에 들어온 것이 우리 앞에 남은 전쟁이라는 것이다. 아담은 미약하므로 남에게 끌려 범죄했으니 그의 제사는 받았지만 가인은 남에게 끌려서가 아니고, 짐짓 하나님의 사람을 미워하고 죽인 죄이므로 하나님의 대적이니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고 저주를 받아 영원히 멸망의 자식이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금일도 종교의 싸움이 진리를 위하여 피해를 당한 자는 다시 살아서 왕권을 받을 것이고 피해를 주던 자는 영원히 멸망의 자식이 되는 것이다. 아벨이 형에게 죽은 것은 선악과를 먹은 죄 값에 죽은 것이 아니고 의로운 제사를 위하여 죽었으므로 그는 죽었더라도 왕권을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언제나 의로운 사람을 마귀의 도구가 되는 거짓 종교인에게 죽게 한 것은 피 값을 갚는 날에 왕권을 주기 위한 방법이라고 본다.

 

  결    론

  하나님은 마귀를 들어서 쓸 적에 아담, 하와는 직접 뱀으로 꾀어 보았지만 가인 때부터 지금까지는 종교인으로서 의로운 제사를 못드리는 자는 다 영적으로 마귀의 정복을 당해서 뱀의 도구가 되었던 것이다. 그것이 지금까지 내려와서 끝을 맺는 것이니 계13:11이하를 보면 거짓 선지가 참된 성도를 해치는 정책을 쓰는 것이 마지막 환란인 것을 가르쳤다.

 

 

아들의 영화와 아버지의 영화

- 요 17:1~7 -

  

  영화라는 것은 아들의 영화와 아버지의 영화가 무엇인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 기독 신자가 덮어놓고 영화를 바라본다는 것은 오히려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성자의 영화와 성부의 영화를 바로 아는 데서 우리는 영화롭게 될 수 있다.

 

  1. 성자의 영화 (1~2)

  예수님께서 영화롭게 된 일은 무엇이냐는 것을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첫째 : 사람의 몸을 입고 인간에게 온 일이다.

  성자께서 영원히 성자의 신으로 있다는 것은 영화가 될 수 없다. 하나님이 천지 만물을 창조하고 아담을 낼 때에 아담 자신이 영화롭게 될 인격을 준 것이 아니고 사람이라는 것은 아들의 이름으로만이 영화롭게 되기를 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심정이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둘째아담으로 나신 일이 창조의 목적을 달성할 하나님의 거룩한 뜻인 것이다.

  흙에서 난 몸이 흙으로 돌아가고 만 것이 영화가 될 수 없고 하나님의 소원이 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로 거룩한 물과 피가 마리아에게 임하여 그 몸이 인간에 탄생되었다는 것은 성자에게 가장 영광스러운 일이 되는 것이다. 사람이라는 것은 완전한 몸이 없이는 영화라는 것이 다 풀의 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성자의 신이 완전한 몸을 하나님께로 받았다는 것은 큰 영화를 가져올 싹이 되었던 것이다.

  둘째 : 그 몸이 대속의 제물이 된 일이다.

  아무리 성자가 완전한 몸을 성령의 잉태로 받았다 하여도 그 몸을 가지고 홀로 있다는 것은 영화가 될 수 없고 그 몸이 만민의 죄를 대신하여 죽음으로써만이 천하 만민이 예수님의 몸과 같은 몸으로 가지게 된다는 것이 큰 열매가 되는 것이니 영화가 되는 것이다.

  셋째 : 통치권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생을 통치하려 해도 죄진 사람을 그냥 두고 통치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가 없다. 그러므로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그 아들에게 맡긴 것이 만민에게 영생을 주는 일이 됨으로 영화롭게 된 것이다.

 

  2. 성부의 영화 (3~7)

  조물주 하나님은 영화를 목적 두고 창조하신 것이다. 여호와의 신은 자기 홀로 있어서 아무런 영화가 없으므로 대 자연을 창조하시고 자연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는 것보다도 그것을 바로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을 만들어서 그 사람을 통하여 창조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피조물이 된 사람은 자기 힘으로 도저히 자연을 바로 사용하는 인격을 갖지 못하므로 오히려 자연계를 지배하는 것보다도 자연계의 지배를 받고 오히려 그 물질 앞에 종이 된 인생이라는 것은 조물주를 영화롭게 못하고 노엽게 하는 일이 된다.

  이제 성부의 영화는 무엇이냐는 것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첫째 : 하나님이 시키는 일을 행하는 자가 있으므로(3~4)

  이 땅에서 하나님이 하라는 일을 하는 사람이 없게 될 때에 이 세상은 죄의 세상, 사망의 구렁텅이가 되고 마는 것이다. 아담, 하와가 하나님의 하라는 일을 다 하였던들 그야말로 얼마나 큰 영화가 될 것인가!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다고 말씀한 것이다. 예수님이 행하신 일이 없다면 하나님께는 아무런 영화가 될 수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천지 만물을 창조하고 그 영화를 이루지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보다는 하나님의 큰 슬픔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죄로 말미암아 죽은 인생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행하시는 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아 아버지 앞에 예배하고 하나님을 순종하게 되었다는 것은 큰 영화가 되는 일이다. 첫째아담이 순종치 않으므로 천하의 모든 사람이 질적 타락으로 본질상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사람이 되고 만 것이다(엡 2:3).

  그러나 둘째아담 예수님이 죽기까지 순종함으로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신을 받을 수 있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됨으로써 주고 싶은 사랑의 자체가 되신 하나님의 영화가 되는 것이다. 의중에 큰 의는 의로우신 하나님의 시키시는 일을 순종하는 일이라고 보게 된다. 그리스도 한 분이 하라는 일을 함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 것이다.

  둘째 : 아들과 함께 영화롭게 됨(5)

  예를 든다면 아버지는 아들과 함께 있지 않으면 아버지 마음이 슬퍼하는 것이 인간의 본질인 것과 같이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은 아들과 함께 영화롭게 되는 것을 기뻐하는 것이다. 아들이 영화롭게 될 때에 아버지는 그것을 자기 영화로 생각하는 것이 참된 사랑이라는 것이다(요14:13~14).

  인간이 행함으로 되는 것보다도 아들의 이름으로 응답이 와서 이루어지는 일을 하나님은 영광스럽게 아는 것을 우리 인생은 알고 겸손히 그 뜻에 순종하는 것 뿐이다.

 

  결    론

  영화라는 것은 사람에게는 있을 수 없고 성부, 성자의 영화 아래서 우리는 같이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것이 우리의 영화라는 것이다. 왜냐 하면 성부, 성자의 활동은 죄를 지은 인생들이 성부, 성자의 영화 아래 들어오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6~7).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는 역사

- 요 17:21~24 -

 

  인류 역사상 하나가 되는 일은 심히 어려운 일이라고 하는 것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온전함을 이루게 됨으로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성자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세상에 오신 것이다. 완전한 나라라는 것은 온전함을 이룬 사람들이 하나가 되어 이루어지는 나라라고 볼 수 있다.

  이제 온전함을 이루어서 하나가 되게 하는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본문을 통하여 알 수 있다.

 

  1. 주 안에 있게 되므로 하나가 됨 (21)

  주 안이라는 것은 주님의 사랑 안에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는 그 사랑 안에서 아들에게 사명을 맡기어 세상에 보내시므로 아들이 그 뜻에 순종하므로써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가 되는 일을 한 것과 같이 우리는 주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은 ‘나’라는 자체는 다 각각 다르지만 주님의 사랑을 받을 때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므로 아드님을 보내셨고 그 아들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므로 그 사랑 안에서 우리가 하나가 될 때에 우리는 아버지의 아들 안에서 하나를 이루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부, 성자, 성신이 우리를 사랑하는 그 사랑을 행하기 위하여 역사할 때 우리는 그 사랑에 이끌려서 하나가 되는 가운데 그리스도 품안에서 도덕을 초월한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 되는 것은 하나님의 그 사랑을 완전히 받아서 그 안에 들어가는 것으로만이 하나가 될 수 있고 그 밖에서는 도저히 하나가 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타락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2. 영광을 받음으로 하나를 이룸 (22)

  세상 영광을 바라보는 자는 서로 물고 싸우다가 피차에 망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영광을 받는 자는 완전한 인격으로서 하나를 이루기를 성부, 성자가 하나를 이룬 것과 같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는 것은 사람이라는 것은 만족한 영광을 소유하게 될 때에 더 이상 좋은 것을 바라지 않게 되므로 명예의 욕이나 물욕이나 그 밖의 모든 정욕이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다.

  왜냐 하면 정욕이라는 것은 완전한 것을 받지 못한 타락한 인생이 만족이 없음으로 더 얻어 보려는 마음이 있을 적에 정욕이라는 것은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받은 자는 세상 영광을 분토같이 보게 되므로 만족함을 얻은 인격으로 하나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어떠한 종이 세상의 어떤 영화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받지 못한 증거라고 본다. 그러므로 주께서 이 본문에 하신 말씀은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라고 하였다. 우리 인생은 주께서 주시는 영광을 받은 자가 아니고는 완전히 하나가 될 수가 없는 것이다.

 

  3. 성부 성자의 일체된 역사로 하나를 이룸 (23~24)

  하나님께서 인생을 일남 일녀로 창조했지만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의 몸에서 가인과 아벨이 나오게 되므로 하나를 이루지 못하고 형이 동생을 때려 죽였다는 것이 아담, 하와의 처음 열매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않은 가정은 골육 상쟁의 비참을 이루어서 피로 이 땅을 적시는 일이 시작된 것이다. 아무리 신앙이 좋다는 아브라함이라도 이스마엘과 이삭이 나오므로 원수가 되었고 이삭의 몸에서 에서와 야곱이 나오므로 원수가 되었고 야곱의 몸에서 열 두 아들이 있었지만 하나를 이루지 못한 것은 하나님 말씀을 순종치 않은 아담, 하와의 혈통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생자 예수님이 죽기까지 아버지의 뜻을 순종하므로 하나님과 예수님이 하나를 이루는 역사로 말미암아 타락한 우리에게 완전함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성부, 성자의 완전 역사로 말미암아서 만이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첫째아담이 하나님과 의합하지 않으므로 인간의 싸움이 왔고, 둘째아담 예수님이 하나님과 의합하므로 싸움이 없는 평화 통일의 왕국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결    론

  하나님의 소원이 온전한 사람으로 하나가 되어서 나라를 이루는 것이요, 사람이 원하는 것도 누구나 다 하나가 되기를 원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가 되기를 바라지만 하나님이 하나 되게 하는 역사를 순종치 않을 때는 오히려 하나가 되어 보겠다는 목적에서 피흘리는 전쟁이 역사적으로 벌어진 것이다. 왜냐 하면 언제나 강자가 약자를 잡아먹어서 강자의 세력으로 하나가 되겠다는 것이 죄악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인생을 찾아 오셔서 인생을 위하여 자기가 죽어서 하나가 되게 한다는 것이므로 이 사상만이 완전한 사랑이니 이 사랑의 역사로만이 세계 평화 통일의 하나를 이루는 승리가 있게 될 것이다.

 

 

단물이 쑥물 되는 일과 죽음

- 계 8:10~11 -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고 저에게 축복하신 다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준 것은 그 말씀으로 말미암아 영원하고도 완전한 인격과 생활과 나라를 주자는 목적이었다. 그러나 간교한 뱀의 말과 하나님 말씀을 병합시킬 때에 뱀의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을 죽이는 열매를 가져왔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은 목적이 더 좋은 것을 주자는 목적이요 옛 뱀의 말은 사람을 죽이기 위한 말이었다. 하나님의 법이라는 것은 언제나 당신의 법이 있는 동시에 그 법을 반대하는 세력을 세워서 대항을 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완전한 역사의 법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사명을 맡긴 것은 완전케 하시는 하나님 말씀만 순종하라는 것이 계명이다.

  오늘 본문은 인간 종말에 완전한 평화왕국을 이루기 위해서는 기독교의 단물과 쑥물이 서로 대립이 되게 하는 동시에 단물과 쑥물이 합하면 죽는다는 것이 에덴 동산에서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는 말이나 같은 말이다.

 

  1. 교회에 들어오는 쑥물

  첫째 : 사악한 자(렘23:15)

  사악이라는 것은 사단의 감화를 받은 사람을 통해서 나오는 행동이다.

  포악이라는 것은 나타나게 악한 것을 말하는 것이요 사악이라는 것은 겉으론 옳은 것 같으나 중심은 악한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참된 예레미야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을 대적하는 자들이었다. 진실한 자에게서는 진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남을 살리는 역사가 올 것이고 사악은 하나님 말씀을 잘못되게 해석을 하고 증거하는 자가 될 것이다(사28:7)

  둘째 : 세상 영광을 따르는 자(암6:1, 12~14)

  소위 하나님의 종이라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학적으로 해석하며 진리를 증거하는 것보다도 자기의 유명한 학식을 자랑하며 세상의 안일한 생활에서 영계를 등한시하고 나가는 사람들이 쑥물을 먹이는 것이다(암5:6~7). 이스라엘이 북방 사마리아로 저주를 받게 된 것은 하나님의 말씀보다도 자기의 정권 야욕을 가지고 남방 예루살렘의 예배를 금하고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는 사람들이 그리심산에 산당을 짓고 금송아지를 섬기게 되므로 쑥물을 내는 사마리아가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기독교 종말에도 처음에는 진리를 믿던 자들이 세속으로 흘러갈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세속적인 방면으로 해석을 하고 하나님을 공경하는 일을 자기의 주권과 명예를 목적한 생활에서 형식적인 예배를 드릴 적에 하나님의 역사가 떠나게 되므로 자동적으로 쑥물을 내는 교훈을 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떠나갔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시대의 법이 되는 것이니 가해도 감해도 그 사람은 쑥물을 내는 사람이라고 보게 된다.

 

  2. 교회 안에 샘과 강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울 적에 완전한 인생을 찾기 위한 것이 아니요 더러운 죄인들을 위하여 또는 고통 속에 있는 인생을 위하여 교회를 세운 것이니 교회 안에 있는 샘과 강은 무엇이냐는 것을 성서를 통하여 말한다.

  첫째 :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슥13:1)

  하나님이 교회를 세워 놓은 것은 더러운 인간들을 성결하게 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니 그리스도를 통하여 샘과 같이 솟아오르는 완전한 은혜를 나리어 누구든지 십자가 보혈을 믿는 자는 샘솟듯 하는 은혜 속에서 성결함을 받게 하는 것이 교회라는 것이다.

  그러나 말세에는 쑥이라는 별이 샘에 떨어져 쑥물을 낸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완전성을 부인하고 보혈의 샘을 더럽히는 것을 가르친 것이니 성신의 잉태설을 부인하는 것이나 또는 성결을 부인하는 것이나 은혜의 역사를 인정치 않는 것은 다 마귀의 쑥물이라고 본다.

  기독교는 항상 솟아오르는 샘 같이 성결케 하는 역사가 없다면 이것은 쑥물이 들어온 증거라고 본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는 것은 항상 맑은 샘이 솟는 것과 같은 체험을 받게 될 때에 성결을 보존할 수 있는 것이다.

  둘째 : 평강의 강(사48:18, 66:12)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는 자에게 평강이 강같이 넘쳐흐르는 것이다. 기독교가 타협적인 노선을 걷게 될 때에 극한 환란을 당하게 되는 것이요 말씀을 떠는 마음으로 순종해 나갈 때에 아무리 환란이 오는 날이라도 평강이 강같이 흐르는 축복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교회가 일시 육체적인 안락을 따라 간다는 것은 쑥물을 먹게 되는 일이라고 본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에게 얼마든지 평강을 주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이 시대가 평강보다도 무서운 환란 고통이 오게 된 것은 하나님 말씀을 순종치 않는 자들을 없이 할 징조요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는 자에게는 완전한 평강이 강같이 흐를 축복이 올 징조라는 것을 성서를 통하여 알 수 있다.

  참된 평강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데 만 있다는 것을 성경은 분명히 가르쳤다.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을 대적하는 마귀를 들어 쓰는 것은 참된 평강을 순종하는 자에게 주기 위한 모략적인 방법이다.

 

  결    론

  쑥이라는 별이 강과 샘에 떨어져서 쑥물을 내므로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말세에 소위 지도자들이 더러움을 씻는 성결한 샘이 되는 십자가의 은혜와 완전한 평강을 누리게 하는 다림줄의 진리를 부인하고 인간의 학적으로 권리로 일을 하는 자들이 교회를 망칠 것을 가르친 것이다.

  금일에 기독교가 소위 평화라, 자유라, 사랑이라 하는 간판 밑에서 마귀와 타협하는 평화, 타협하는 자유, 타협하는 사랑, 이것을 따라 나간다는 것은 단물에 쑥물을 내므로 죽게 하는 미혹이라고 본다.

 

 

새 일을 고하고 행하시는 하나님

- 사 42:9, 43:19~21 -

 

  하나님께서는 새 일을 고할 책임도 있고 행하실 책임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새 일이라는 것은 인생이 행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이 이루어주시는 일이다. 사람이라는 것은 타락한 인생으로서 하나님의 새 일을 행하시는 일이 없다면 이 세상은 영원히 죄악의 세상이요 사망의 골짜기를 면치 못하게 될 것이다.

  독생자의 거룩한 피로 우리 죄를 사해 주시고 그 영혼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역사가 1900여년이 되는 금일에 이 세상은 더 악해지고 오히려 더 혼란을 가져오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새 일을 고하고 행할 때가 온 증거라고 본다.  

  이제 새 일을 고하고 행하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성서로 증거한다.

 

  1. 새 일을 고하시는 하나님 (42:9)

  하나님은 당신이 행하실 일은 당신이 빠짐없이 고하는 것이다. 사42:1~4를 보면 아드님을 보내서 교훈할 것을 말씀하고 그 교훈을 온 세계가 앙망하게 되는데는 이방의 빛이 되게 한다고 6절에 말씀했다.

  그러면 예수님의 교훈은 이방의 빛이 되는 교훈이다.  하나님도 모르고 천국도 모르고 아무런 진리도 모르는 이방 민족에게 하나님의 존재와 독생자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증거해서 사망의 권세 아래 있던 그 영들이 빛을 따라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역사를 한 것이 하나님의 아들의 교훈을 통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아들이 가르칠 교훈을 선지서에는 분명히 다 말하지 않고 교훈이 있다는 것만 말하고 간단히 독생자가 처녀 몸에 난다는 것을 사7:14에 말했고, 베들레헴에 난다는 말을 미5:2에 말했다. 갈릴리에서부터 이방의 빛이 되는 역사가 나온다고 사9:1~2에 말했고,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것을 슥9:9에 말했고, 은 삼십에 팔릴 것을 슥11:12~13에 말했고, 십자가에 죽을 것을 시22:16, 사53:5에 말했고, 부자 무덤에 장례할 것을 사53:9에 말했고, 부활할 것을 시16:10~11에 말했으며 그 밖에는 하나님께서 새 일을 행하실 것을 가르친 것이 선지서라고 본다.  

  선지서는 목적이 심판과 새 시대이니 새 일의 역사를 하나님이 미리 빠짐이 없이 말씀한 것이다.  독생자로 말미암아  새 언약의 피를 이루어 그 피로 모든 만민을 피로 사서 천국으로 인도하는 일을 하셨지만 새 일을 말씀한 것은 하나님께서 행하실 것을 말씀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교훈은 천국 복음이 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이 선지자들에게 나타난 것은 새 시대를 이루는 영원한 복음이 된 것이다(계10:7, 14:6). 그러므로 새 일에 대한 교훈은 은혜시대의 종들이 전할 복음이 아니요, 살아서 주님을 맞이할 변화성도들이 전할 복음이니 새 일을 가르친 말씀인 선지서를 전하게 되는 것이다(사48:6).

  천국 복음은 십자가를 증거하는 것을 목적한 것이므로 회개하여 죄 사함을 받도록 하는 것으로써 구원을 얻게 하는 것이요 종말에 전하는 복음은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께 보호를 받고 새 시대 가도록 전하는 복음이다. 이것이 선지서와 계시록이다.

 

  2.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 (43:19~21)

  새 일을 행하시는 일은 원수를 갚아 주는 역사인데 이날까지는 영혼 구원을 목적하고 하나님은 기다렸지만 새 일을 행하는 날에는 더 기다릴 것이 없고 원수의 나라를 다 없이 하고 죄인의 세력을 세상에서 없이하고 오직 하나님의 친 백성만이 남아서 지상 축복을 받게 하는 일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난제를 해결시켜 주는 일이다.  

  새 일을 행하시는 일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요소가 있다.

  첫째 : 주 재림 후에 행하시는 일이다.

  주 재림까지는 성신이 역사해서 신부 단장시켜 왕국 부서를 완전히 이루는 기간이요 재림 후에는 새 시대에 들어갈 백성들을 하나님이 보호하고 양육해서 새 시대의 축복을 받도록 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변화성도가 새 일 진리를 증거하는 것은 재림 후에 하나님이 어떻게 행하신다는 것을 전해주는 것을 다시 예언이라는 것이다.

  둘째 : 이 천지를 새롭게 하는 일이다.

  첫째아담이 범죄하므로 저주받았던 우주 세계를 다시 새롭게 해서 당신의 아들 예수를 믿는 사람들로 거룩한 나라를 이루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새 사람을 만드는 것은 영혼이 새로워지므로 천국으로 가게 한 것이 이날까지의 역사이지만 말세에는 당신의 자녀를 그 몸을 새롭게 해서 새 땅의 축복을 받게 하는 일이다(사43:7).

  이날까지는 신, 불신을 막론하고 그 몸은 하나같이 쓰러졌다(사40:6~7). 그러나 새로운 시대를 이루고 당신의 백성을 들어가게 하는데는 모든 사람이 다 불에 사름을 당해도 당신의 백성만은 남은 자가 되어서 새 시대에 들어간다는 것이 모든 선지의 전한 복음이다. 하나님께서 첫째아담은 감히 왕권을 받을 자격이 없게 창조했지만 둘째아담 예수로 말미암아서 완전한 왕국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이 행하시는 새 일의 역사가 된다.

 

  결    론

  하나님은 완전한 신이시지만 첫 번 창조로써 당신의 할 일을 완성한 것이 아니고 새 일을 행하시므로 만이 당신의 행하실 일을 완전히 행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고도 새 일을 행치 못하신다면 완전한 역사라고 볼 수가 없다.  

  예를 든다면 어떤 사람이 일을 시작하였다가 그 일이 성공이 못된다고 중지하고 만다는 것은 완전한 인격이 못된 증거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인생이 타락했지만 이 세상을 버리고 만다는 것은 완전한 하나님의 역사가 못되는 것이니 새 일을 행하므로써 하나님은 완전한 역사를 행하게 되는 것이다.

 

 

여호와께 학자의 혀를 받은 종

- 사 50:4~11 -

 

  하나님께서는 과거의 선지들에게 묵시를 받게 하고 말씀을 받아 기록하도록 한 것이 선지 시대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묵시의 뜻이 무엇이며 자기가 기록한 글도 무슨 뜻인지를 몰랐던 것이다. 그러나 심판기에는 학자같이 말하는 혀를 주어 모든 사람들이 다 무슨 뜻인지를 알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가 없다면 혼란기에 미혹을 받게 되겠으므로 이제 학자의 혀를 받게 하는 종에 대하여 본문을 통하여  알 수 있다.

 

  1. 곤핍한 자를 도와주는 역사 (4)

  지금 모든 영들은 다 곤핍을 느끼고 있다.  중생의 역사가 임할 때에 중생을 받고 은사를 받고 자라났지만 지금 곤핍을 느끼는 원인은 학자의 혀를 받은 종이 나타나야 할 때가 온 증거라고 본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말세에 남은 종이 될 자에게 학자의 혀를 주어서 곤핍을 느끼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소성을 받게 하는 역사가 있을 것을 본문에 말했다. 학자 같이 깨달아 듣게도 하는 역사가 학자의 혀를 받은 종을 통하여 있게 되는 것이다.

 

  2. 순종하게 하는 역사 (5)

  누구든지 학자 같이 말하는 종을 통하여 학자 같이 깨닫게 될 때에 용기있게 걸어 나가는 힘을 받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억지로 지배할 것이 아니고 종말의 진리를 바로 증거할 때에 듣는 자들이 완전히 깨닫게 되므로 용기있게 따라 가게 한 것이 완전 역사라는 것이다.

  종교는 맹목적으로 남을 따른다는 것이 있다면 그야말로 가련한 일이라고 본다. 그 진리를 완전히 깨달을 적에 절대 거역할 수가 없고 자진적으로 순종하는 것을 신앙 자유라 하는 것이다.

 

  3. 하나님의 도움을 받는 역사 (6~9)

  하나님은 덮어놓고 돕는다는 것이 아니요 진리의 법에 따라서 돕는 것이니 학자 같이 깨달아 듣는 자라면 그 진리대로 하나님이 책임을 지고 도와주시므로 절대로 수치를 당치 않고 승리를 하게 된다. 어떤 사람이 진리를 분명히 깨닫지도 못하고 하나님이 도와 줄줄 믿는다면 이것은 미신에 불과한 신앙이다. 이러한 자들은 큰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이다.

 

  4. 흑암을 뚫고 나가는 역사 (10~11)

  흑암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진리를 바로 깨닫지 못하는 자에게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학자 같이 깨달아 듣는 종은 아무리 흑암 중에서라도 진리의 봉홧불을 들고 용기있게 나가서 안식의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는 앞으로 오는 흑암을 뚫고 나가려면 덮어놓고 따라갈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학자의 혀를 주어서 바로 증거하는 종의 말을 듣고 따라 가야만 여호와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다.

  금일에 많은 종들이 진리를 가르치지만 직접 하나님의 신이 그 혀를 학자 같이 말하도록 사용하는 종이 아니고는 하나님 말씀을 바로 증거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사28:11에는 종의 입술을 하나님께서 사용한다고 말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밝히 증거하는 일은 하나님의 역사가 학자 같이 말하는 혀를 주어서 증거하므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하나같이 깨닫고 흑암을 뚫고 나가게 될 것을 가르친 것이다.

 

  결    론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의 종의 입을 통하여 시대를 따라 증거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큰 역사는 이적이 아니요 학자같이 진리를 바로 증거하도록 그 입을 열어지게 하는 역사라고 본다. 이 학자적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신이 종말의 비밀을 바로 증거하는 것을 가르친 것이니 하늘에서부터 온 하나님의 비밀은 하나님께서 그 종에게 학자같이 말하게 하므로 만이 바로 증거할 수가 있고 그 진리를 따라서 하나님이 역사하므로써 완전한 새 시대를 이루는 것이다.

 

 

일한 공력이 헛될까 조심하자

- 고전 3:10~23 -

 

  우리는 날마다 사는 생활이 집을 세우는 자와 같은 생활이다. 그러므로 집을 짓되 어떠한 집을 지어야 될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만일 집을 짓고라도 그 집에서 영광을 누리지 못하고 무너지고 만다면 오히려 집을 짓지 않은 것만도 못할 것이다.

  이제 어떻게 집을 지어야 그 공력이 헛되지 않을까 하는 일에 깊이 깨닫는 바가 있어야 할 것이다.

 

  1. 사도 바울이 닦은 터 위에 집을 짓자 (10~15)

  우리는 이 말 저 말, 이 생각 저 생각할 필요조차 없이 사도 바울이 14권의 성경을 쓴 그대로 신앙의 토대를 잡으면 그 이상 더 할 것이 없다고 본다. 왜냐 하면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십자가의 도를 남보다도 더 명확히 쓸 수 있는 영감을 주었다고 본다. 그러므로 바울이 전한 복음은 완전히 기독교의 정통 신앙의 터를 닦았다고 본다. 이 사람은 과거 청년 적에 바울 서신을 많이 본 것은 어느 성경보다도 내 신앙에 완전한 확신을 주기 때문이었다.

  누구든지 바울 사도의 기록한 서신에서 조금이라도 가감된 신앙을 가진다면 그 터를 바로 잡지도 못한 사람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므로 바울이 전한 복음에서 완전한 터를 잡고 다음과 같이 해야 될 것이다.

  첫째 : 다른 터를 닦을 자가 없다고 생각을 두어야 한다(11).

  우리는 대표적인 종이 받은 것 외에 다른 것은 없다고 보는 것이 옳은 신앙관이다. 왜냐 하면 하나님께서 세운 대표이기 때문이다. 바울 사도가 전한 복음에서 가해도 교만이요, 감해도 교만일 것이다. 왜냐 하면 바울 사도를 들어서 우리에게 완전한 신앙의 토대를 잡도록 성신이 역사하셨는데 여기에 기준하지 않고 다른 무엇을 생각한다면 바울을 대적하는 것보다도 성신을 근심케 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둘째 : 불타지 않을 것으로 세워야 될 것이다(12~15).

  우리의 수고라는 것은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주님께서 갚아 줄 수고도 있고 갚아 줄 것이 없는 수고도 있으니 만일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만을 중심하지 않고 어떤 인물이나 교파를 중심해서 수고했다면 주님은 책임을 질 수가 없다. 왜냐 하면 주님의 일은 어떤 개인이나 개 교파를 초월해서 많은 사람을 구원하고자 하는 것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어떤 사람에게 끌려서 그 사람에게 보이려고 일했다면 그 사람을 위해서 일한 것이니 이것은 풀이나 짚으로 지은 집과 같이 몇 날이 못 가서 없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작은 일이나 큰 일이나 주님만 중심해서 그 뜻에 복종하는 수고 외에는 다 헛수고가 될 것이다.

 

  2. 일꾼된 자격을 가져야 할 것이다 (16~17)

  일꾼이라는 것은 자기 홀로 일할 수 없고 성신이 내주하여 역사하는 대로 쓰여지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무소불능의 신이시지만 일하는 사람의 몸을 거룩한 성전같이 성별 되게 쓰는 것이니 일꾼된 자가 자기 몸을 함부로 아무 곳에나 쓴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것과 같다. 우리 몸은 주의 피로 산 몸이니 주님이 가실 곳을 우리 몸이 가고 주님이 붙들 사람을 우리 손으로 붙들어 주고 주님이 하라는 말을 우리 입으로 하게 되고 주님이 하시던 일을 우리 몸으로 하는 것이 일꾼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말씀하면서 성신을 받으라고 했던 것이다(요20:21~22). 하나님은 예수님의 몸을 세상 죄를 걸머지고 죽으라는 사명을 맡겨 보냈고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우리를 쓰시는 것은 주님이 행하신 일을 우리가 나가서 전하되 주님의 대행자로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일에 전력을 두어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주님은 신앙의 대상을 완성시킨 일을 하셨고, 우리는 모든 사람이 바로 믿도록 전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3. 지혜로운 자가 되어야 한다 (18~23)

  하나님께서 제일로 싫어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세상 지혜로 하려는 자라고 본다. 그러므로 세상 지혜를 어리석은 일로 보고 하늘의 지혜로만이 하나님의 일을 바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절대 사람을 자랑하지 말고 하나님의 완전 지혜를 받기 위하여 노력하는 동시에 그 지혜로만 모든 일을 이루어 나가려고 할 때에 지혜로운 건축자가 될 수 있다.

 

  결    론

  인간 생활의 가장 비극은 남지 못할 일을 위하여 수고하는 생활이라고 본다. 또는 인간 생활에 있어서 가장 복된 일은 작은 일에서나 큰 일에서나 영원히 없어지지 아니할 일을 하는 자라고 보게 된다. 그러므로 바울은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고 하였다(10).

 

 

하늘의 전쟁과 땅 위의 전쟁

- 계 12:7~9, 13:4~8 -

 

  인류 역사의 가장 큰 전쟁은 끝을 맺는 전쟁일 것이다. 전쟁도 영토적 전쟁도 있고 사상적 전쟁도 있는 것이다. 큰 전쟁은 영토전이 아니고 사상전이라고 보게 된다. 그러므로 계시록에 나타난 전쟁은 영토전을 가르친 것이 아니요 사상전이라고 본다.

  이제 사상전이 왜 큰 전쟁이냐 하는 것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하늘의 전쟁 (12:7~9)

  하늘의 전쟁은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우는데 붉은 용의 세력이 미가엘 대군에게 쫓겨서 땅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여 주었다. 이것은 과거를 말한 것이 아니고 인간 종말의 일인데 다음과 같은 요소가 있다.

  첫째 : 왕국 건설을 위하는 싸우는 전쟁.

  마귀는 얼마든지 왕국 건설을 방해할 권리를 받은 것이니 이것은 마귀의 방해를 이기는 자라야 왕국 건설의 왕위를 가질 수 있다는 하나님의 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미가엘 대군은 왕국 건설을 위하여 싸우되 자기가 왕권을 받기 위하여 싸우는 것이 아니고 왕권을 받을 수 있는 종들을 위하여 싸워 주고 있다.

  그러므로 마귀는 붉은 짐승에게 권세를 주고(계13:2), 하나님은 당신의 종에게 권세를 준다(계11:3). 마귀의 권세를 받은 짐승은 예언을 반대하게 하고 권세를 받은 증인은 예언을 하게 해서 싸움이 있게 하는데는 예언을 증거하는 종을 위해서는 미가엘 대군이 싸워 주고 짐승의 정권을 위해서는 마귀가 싸워 주게 되는 것이다. 이 영적 전쟁이 하늘에서 일어나게 되는 것을 기독교 종말의 영계 혼란기라 하는 것이다. 전쟁이라는 것은 양편에 동등한 권리를 주는 것을 뜻했다.

  이날까지는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셨으므로 그 십자가를 믿는 자가 마귀 권세에서 해방을 받아 하나님 편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기독교 종말에 있어서는 마귀 권세를 개방시켜 하나님의 종들을 대항하게 하여 큰 전쟁이 일어나게 하는데는 영적으로 큰 혼란이 오게 된다.

  둘째 : 영계의 전쟁은 그 사상 문제를 놓고 일어나는 싸움이 된다.

  마귀의 말을 가지고 나오는 거짓 선지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나오는 참된 종과 사상적으로 대립이 된다. 마귀의 사상은 하나님 말씀은 다 거짓이요, 자기의 말이 참이라는 것이요, 하나님의 종들의 사상은 하나님 말씀만이 참으로 믿을 말씀이요, 그 밖의 모든 말은 다 믿을 수가 없는 마귀의 말이라고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을 기독교의 정통 사상이라는 것이다.

  지금 소위 레닌 맑스 주의라는 것은 마귀의 말이라면 그를 대적하는 멸공 진리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사상전이라는 것은 어떤 사람이 공산당을 반대하기 위하여 꾸며낸 학설이 아니요, 공산 사상이 나오기 전에 벌써 하나님은 미리 말씀한 것이니 붉은 세력을 물리치기 위하여 이제 나오는 것보다도 이미 하나님께서 말씀한 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즉 금일의 사상전이라는 것이다. 붉은 사상이 나오는 것도 하나님 말씀이 이루어지는 과정이요, 그를 없이 하는 심판의 다림줄의 진리가 나오는 것도 하나님 말씀에 이미 기록된 대로 이루어지는 역사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공 운동을 하기 위하여 조직된 것이 아니요 하나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시대가 왔으므로 그 말씀이 조금도 어김없이 응하여지는 사실을 그대로 믿고 나갈 때에 자동적으로 사상전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천사도 말세의 종도 같이 된 종이다(계22:9).

 

  2. 땅 위의 전쟁 (계13:4~8)

  하나님은 하늘의 전쟁이 끝나게 하는 동시에 지상에 대 환란이 오게 한다. 하늘의 전쟁은 왕권을 받은 자의 수가 찰 때까지 싸우는 것이요, 수가 찰 때는 하늘에서 마귀 떼는 완전히 쫓겨 지상으로 내려오게 된다. 그 때에 이 세상은 마귀의 표를 받은 자 외에는 매매도 할 수 없고 또는 그 앞에 절하지 않고는 생명을 보존하기가 어려운 환란이 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환란을 앞에 놓고 참된 종은 누구든지 예언의 말씀을 지켜야만 대 환란이 올 때 하나님의 보호가 같이하므로 피해를 당하지 않고 남은 자라야 심판의 재앙을 피하고 새 시대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므로 자동적으로 사상전이 벌어지는 것은 짐승의 사상은 망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제 대 환란이 올 때 되는 일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첫째 : 종이 휴거를 받음(계11:7~11)

  재림시까지 남아 있는 종은 자동적으로 짐승과 전쟁을 하게 된다. 왜냐 하면 진리 사상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날까지의 정치라는 것은 기독교를 없애 버리는 사상을 목적한 정치는 없었다고 본다. 혹 기독교를 박해하는 정치가 있은 것은 단지 종교 문제에 있어서 큰 변론이 없이 자기네 종교를 순종하라는 것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공산당은 변론을 중심한 사상적인 문제를 놓고 나오는 정치이므로 성도는 자동적으로 전쟁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왜냐 하면 변화성도는 지상왕국을 목적했기 때문이다.

  둘째 : 그리스도 왕국이 지상에 이루어지는 것은 붉은 용, 붉은 짐승의 정권과 거짓 선지의 세력을 몽땅 없이 하는 진리 운동이기 때문에 사상적인 전쟁을 하게 되는 것이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재앙으로 땅을 치고 나갔지만 심판을 하기 위해서는 증거를 마치고 재림의 주를 영접하여 휴거를 받게 되는 동시에 완전한 왕국이 조직되는데는 짐승의 나라를 쳐서 없애는 것을 지상왕국이 이루어지는 전쟁이라는 것이다(계19:19~21). 이 전쟁은 아마겟돈 전쟁이라는 것이다. 지금 인력으로써 전쟁을 끝을 맺을 수 없게 되는 것은 성도를 통하여 초인간적인 역사를 일으켜 성도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증거이다. 그러므로 전쟁의 끝을 맺는 지상통치는 성도가 하게 되는 것이다.

 

  결    론

  전쟁을 위하여 우리가 싸운다는 것보다도 우리는 왕국을 이루기 위하여 싸우는 것이니 자신이 할 사명을 하기 위해서 싸우는 동시에 원수를 갚기 위하여 싸우는 것이 초인간적인 하나님의 역사로 끝을 맺는 전쟁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원한 제사

- 히 10:9~18 -

 

  그리스도는 영원한 것을 인생에게 주기 위한 활동을 개시할 때에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었다. 종교라는 것은 제사를 드리는 것이 종교의 중심이 되는 동시에 그 제사를 통하여 그 종교는 모든 일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기독교는 영원한 제사를 드린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이다.

  우리는 영원한 제사를 드리신 예수를 믿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의의가 있다.

 

  1. 폐하고 세우신 것을 믿는 것이다 (9)

  우리 인생 자체가 무엇을 폐하고 세웠다는 것은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폐하시고 세운 것은 우리에게 산 소망을 주는 조건이 된다. 만일 하나님께서 율법에 관한 것을 폐하지 않고 믿으라 하는 것이라면 우리 죄인들은 감히 그를 신앙할 수가 없다. 왜냐 하면 율법으로는 저주를 받아야 할 사람이기 때문이다. 또는 완전히 세운 것이 없다 해도 믿을 수 없다.

  왜냐 하면 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더 좋은 것을 주기 위한 목적이니 십자가상에서 예수님이 죽으시므로 폐할 수도 있고, 세울 수도 있는 조건이 확립된 것이다. 십자가에 죽으므로 율법의 저주는 폐한 바 되고 은혜의 법은 세운바 된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아무 조건 없이 법을 세웠다가 폐하고 아무 조건 없이 세우기도 한다면 이것은 진리의 신이라 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이 무슨 말을 하고 그대로 행치 않고, 그 말을 취소하고 또 다른 말을 하면서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신용이 없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한 번 말한 다음에 그 말을 폐하는 것도 합법적인 조건이 성립되고 다른 방법으로 세우는 것도 합법적인 조건이 성립되게 하는 자라면 이 사람은 법의 사람이니 그 사람을 참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한 번 말씀하고 그 말씀을 폐하는 것도 당신이 조건이 있게 폐하시고 다시 새로운 일을 세우는 것도 합법적인 조건이 있게 세운 것이 그리스도의 영원한 속죄라는 것이다.

 

  2. 단번에 거룩함을 얻게 하심 (10)

  그리스도의 영원한 속죄라는 것은 그 몸을 단번에 드리어서 영원히 다시는 제사를 드릴 필요조차 없이 된 것을 가르친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고라도 그것이 완전 거룩을 주는 열매가 없다면 우리는 그 십자가를 믿을 수 없는 것이로되 우리가 1900여년 전에 죽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영원한 속죄를 믿음으로 지금도 우리 마음에 거룩을 주는 증거를 받을 때에 영원한 속죄가 된다는 것을 체험으로 알 수 있다.

 

  3.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으므로 (11~12)

  우리의 신앙의 대상자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속죄제를 드리었으므로 하나님 우편에 앉아서 지금은 대언의 기도 한 마디면 얼마든지 세계 만민을 살릴 수가 있는 특권을 가지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한 번 말할 때에 하나님은 그 말에 응답을 나리게 되는 것이 예수님 이름으로 오는 응답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다 시행하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요14:13).

 

  4. 원수를 갚는 권세가 있음 (13)

  그리스도의 영원한 속죄제는 죄를 사하는 특권이 있는 동시에 원수를 갚는 권세가 따르는 것이다. 왜냐 하면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죽었으므로 그 피를 믿는 사람은 의롭게 여기는 동시에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이 억울함을 당하는 것은 원수를 갚아 주는 동시에 억울함을 당한 당신의 사람에게는 상급을 주고 당신의 사람을 억울케 하던 자는 멸망을 시키는 것이다.

 

  5. 영원히 완전케 하심 (14~18)

  주님께서 영원한 제사를 드리셨으므로 죄를 사해도 영원히 다시 기억하지도 않는 것이요, 영원히 영생을 누리게 하는데는 영원한 기업을 주시되 무엇이나 영원한 것으로 갚아 주는 것이다.

 

  결    론

  그리스도의 영원한 제사는 우리에게 완전을 주기 위한 제사이니 그 제사로만이 하나님의 뜻은 완전히 이루어지되 피조물된 인간에게 주고자 하는 모든 것이 전부 영원한 제사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이다.

 

 

믿음으로 구하고 의심하지 말라

- 약 1:5~8 -

 

  하나님 앞에 제일 큰 죄는 의심이라고 본다. 왜냐 하면 의심은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마음이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든다면 어떤 사람이 자기의 것을 없는 자에게 주고자 할 때에 받는 자가 자기를 의심한다면 자동적으로 마음 가운데 노여운 마음이 있게 되는 것은 인격을 무시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하고도 의심하는 것은 하나님 자체를 무시하는 것이니 아무 것도 받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과거에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은 아무런 일을 당해도 하나님의 언약을 의심치 않고 믿었다는 것이 믿음의 조상이 되므로 하나님이 친히 말씀하기를 “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한 것이다. 하나님은 주고자 하는 사랑을 가지신 사랑의 자체이신데 그것을 의심하는 것은 용납할 수가 없는 죄가 된다. 왜냐 하면 주겠다는 것을 의심했기 때문이다.

  이제 의심하지 않는 자라야 받는다는데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자기 부족을 깨닫는 마음에서 의심하지 않아야 한다 (5)

  하나님은 자기 부족을 깨닫고 의심없이 구하는 자는 다음과 같이 축복을 하시는 것이다.

  첫째 : 구하는 것밖에 더 넘치도록 주시는 것이다.

  둘째 : 완전하게 하시되 당신의 소원을 의심 없는 자에게 주므로써 이루는 것이다.

  셋째 : 당신은 참이라는 것을 의심 없는 믿음을 가진 자를 통하여 만민이 알도록 표적을 나타내신다.

  그러므로 과거에 어느 종이나 특별히 대표적으로 쓰는 종에게 의심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 몰아 넣고, 까불어 보는 것은 조금도 의심치 않는 자에게 주겠다는 약속의 말씀을 그를 통하여 세상에 전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모세도 40년간 미디안의 쓰라린 시련을 겪게 해서 세운 것이요, 아브라함도 백세가 되도록 시련을 주어서 세운 것이요, 모든 선지 중에서 대선지 이사야도 벗은 몸, 벗은 발로 3년 동안 전도하게 하시면서 말씀을 주신 것이요, 사도 바울도 무서운 박해를 당하여 어려운 난관 속에서 수많은 편지서를 쓰게 한 것이요, 사도 요한도 무서운 네로 황제 박해 속에서 쓴 환란을 통과하고 쓰라린 밧모 섬에서 계시를 받게 했던 것이다.

  이렇게 한 것은 그 성경 내막이 다 어려운 난관을 당해도 의심치 않는 자에게 주겠다는 비밀이 기록된 것이다. 그러므로 간교한 뱀을 들어서 하나님 말씀이 의심나게 꾀이는 그 역사는 아담, 하와로부터 새 시대가 이루어질 때까지 계속되는 것이다(계20:1~3).

  가장 정상적인 인격은 하나님의 지혜를 풍성히 받은 자에게만 있는 것이다. 이 세상 사람은 아무 것도 더함이 없는 바람잡이 생활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시대에 완전한 지혜를 받은 사람은 무엇이나 확정적인 진리에 서게 되므로 한 시간도 헛되이 시간을 보내는 일이 없게 될 것이며 한 마디의 기도라도 헛되이 기도하는 시간이 없는 동시에 무슨 일이나 다 열매 있는 생활이 될 것이다.

 

  2. 의심하는 자는 무엇이든지 얻을 수 없다 (6~7)

  최고의 불행스러운 사람은 구하고도 받지 못하는 자라고 본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후하게 주시겠다는데 이것을 하나도 받지 못한다는 것은 얼마나 불행스러운 일인가? 기도하지 않는 사람보다도 기도하고도 받지를 못한다는 것은 더욱 불행한 자라고 본다. 그러므로 가장 행복스러운 사람은 의심 없이 믿고 구하는 자요, 가장 불행한 자는 구해도 의심이 있어서 받지 못하는 자이다.

  하나님은 완전한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니고, 완전케 해 주시는 하나님을 의심치 않는 사람을 찾아서 주고픈 그 사랑을 다 이루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상적인 신앙이라는 것은 의심 없는 믿음으로 구하여서 지혜를 풍성히 받는 생활이라고 본다.

  가장 영화로운 일은 지혜를 구하던 솔로몬 왕이라고 본다. 왜냐 하면 그 손으로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했고 축복을 받았기 때문이다. 천지 만물을 다 창조한 후에 성전을 제일 먼저 지은 사람은 지혜를 받은 솔로몬이다. 그렇다면 성전을 시작하는 자가 지혜를 받아 시작했다면 완전한 촛대교회를 이루어서 새 시대에 들어가는 자도 지혜를 받은 자가 될 것이다. 우리가 지금 구할 것은 지혜라고 본다.

 

  결    론

  지혜를 구하고 의심하는 자는 마귀의 흑암이 올 것이요, 지혜를 구하고 의심치 않는 자는 하나님의 신이 올 것이다. 이제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치 않는 자의 받을 축복은 다음과 같다.

  첫째 : 몸의 영생이다.

  첫째아담은 말씀을 의심했으므로 그 몸이 죽었고 말세의 성도는 예언의 말씀을 조금도 의심치 않고, 순종할 때에 그 몸이 살아서 새 시대를 보게 되는 것이다.

  둘째 : 세계 통일의 통치권을 받는다.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했으므로 통치권을 상실했지만, 말세의 성도는 아무리 마귀 미혹이 강해도 조금도 의심치 않고 말씀을 지키므로 세계를 통치하는 사람이 된다.

  셋째 : 완전한 축복을 받게 된다.

  첫째아담은 말씀을 의심했으므로 축복을 빼앗겼고, 말세의 성도는 의심 없이 말씀을 지켜 나갈 때에 완전한 축복을 영원히 후손까지 받게 된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난다고 단12:3에 말했다. 이 날까지도 지혜로운 자가 복을 받았지만, 완전한 축복을 받을 자는 지혜를 풍성히 받은 자라고 본다.

 

 

허락이 있어야 아는 비밀

- 마 13:10~17 -

 

  비밀이라는 것은 일을 새로이 계획하고 행하는 자에게 있는 것이다. 악한 자는 악한 계획을 할 때에 숨은 비밀이 있고, 선한 자는 선한 일을 새로이 하려고 할 때에 비밀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언제나 새로운 역사를 할 시대가 올 때는 그 시대의 비밀이 있는데 그것을 먼저 합당한 자에게 알도록 허락한 다음에 그 허락을 받은 사람이 선구자가 되게 하여 그 시대의 빛이 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먹고 입고 사는 것은 세계 인류에게 다 같이 허락한 것이지만 당신의 비밀을 아는 것만은 누구든지 다 알게 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택한 자에게 알도록 허락이 있으므로 알게 되는 것이다.

  택한 자에게 비밀을 알도록 허락하는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본문을 통하여 알 수 있다.

 

  1. 진실함이 있는 자에게 알게 하심 (10~11)

  택한 자라는 것은 진실한 자이다. 아무리 인격과 지식이 훌륭하다 하여도 택함을 받지 못한 자는 진실성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루살렘 거리에 수많은 사람이 왕래하고 있었지만 참으로 진실한 사람이 아니고 교권, 명예, 안락을 도모하는 종교인들 이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그 시대의 숨은 종교인의 하나가 되는 어부들을 택하여 그 비밀을 알게 했던 것이다. 비밀이라는 것은 새로운 일을 계획한 자가 알려주기 전에는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나사렛 목수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만민의 구주요, 그로 말미암아 온 세계 인류가 구원을 받고 새로운 시대가 이루어진다는 비밀은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알 수가 없는 비밀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 비밀을 알려주는 자가 아니고는 예수를 믿을 자는 전혀 없다는 것이다(마24:25~27). 인간이 볼 때는 도저히 이해하기가 어려운 일이라고 보게 된다.

  만일 하나님의 비밀을 인간의 두뇌로서 허락이 없이 안다면 하나님과 인간과는 동등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조물주 하나님의 비밀을 두뇌로 안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가 없다. 이것은 하나님이 허락해 주어야만 알게 된다는 것이 기독교의 진리 운동이라는 것이다.

 

  2. 완악한 자가 깨닫지 못하도록 하심 (13~15)

  하나님께서는 완악한 자들에게는 오히려 깨닫지 못하는 신을 부어 주신다(사29:10~12, 사 66:4). 하나님께서 법을 세울 적에 순종치 않는 자는 마귀가 지배하도록 법을 세운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하나님의 종이라도 하나님을 순종치 않는 마음을 가진 자에게는 마귀가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왜냐 하면 하나님을 대적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가장 거룩한 신이시니 거룩한 마음을 가진 자에게만 당신의 비밀을 알도록 하기 때문이다.

 

  3. 정한 때가 될 때에 비밀을 알려 줌 (16~17)

  모든 선지는 메시아를 영접하기를 원하는 마음 간절하였으나 그들은 메시아가 올 것을 받아 기록하고도 때가 아니므로 다 세상을 떠나가고 주님 탄생시에는 아무런 선지의 역할이 400년 동안 없었던 것이다. 너무나 잠잠하고 희미한 상태에 내려간 것이 400년 역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극도로 예루살렘 성전은 부패하였고 참으로 진실한 사람을 찾아 볼 수가 없는 예루살렘이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갈릴리에 있는 어부들에게는 비밀을 알게 해 주시고 예루살렘에 왕래하는 대제사장, 유사, 장로 등의 무리들은 이 비밀을 아는 것은 허락지 않으므로 그들은 예수를 바알세불이 들렸다고 까지 말했던 것이다. 아무리 하나님의 아들이 말하여도 짐짓 더 악해진 것이 비밀을 모르는 유대교인들의 행한 일이라고 본다.

  하나님은 언제나 역사할 때에 당신의 비밀을 알려 주되 미약한 자, 어리석은 자에게 알려주고 교만한 자, 부(富)한 자들에게는 알려주지 않으므로 권리를 가진 종교인과 정치인이 그들을 반대하고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

  모든 선지에게 비밀이 묵시로 나타날 때에도 모든 부패한 정치인들과 종교인들이 그 종을 반대하게 되었고 그 선지 예언이 이루어지기 시작하는 때에도 메시아 탄생을 모르고 반대하는 무리들과 비밀을 안 사람들과 큰 싸움이 있게 되었던 것이다. 지금도 비밀을 아는 종과 모르는 자와의 큰 싸움이 있어서 교회는 반드시 갈라지게 될 것이다.

 

  결    론

  가장 복 있는 자는 그 시대의 비밀을 알도록 허락을 받은 사람이라고 본다. 알게 허락한 것은 그 복을 주기로 작정한 증거라고 본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의 비밀이 깨달아지는 자는 하나님의 허락을 받은 자라고 본다.

 

 

곤핍한 자에게 안식을 주는 여호와의 말씀

- 사 28:7~13 -

 

  하나님께서는 택한 백성에게 곤핍을 오게 하는 것은 안식을 줄 때가 온 증거라고 본다. 이사야 28장은 심판기에 극도로 곤핍해질 때에 안식을 주는 역사는 무엇이라는 것을 말할 때에 여호와께서 생소한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말씀을 하는 일이 있게 되므로 곤핍한 자들이 안식의 복락을 받게 되는 일이 있을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제 곤핍을 당하는 자에게 안식을 주는 일은 무엇이냐는 것을 본문을 통하여 알 수 있다.

 

  1. 곤핍해 지는 일 (7~10)

  심판기에 모든 심령이 곤핍해진 것은 교회의 지도자들이 독주를 먹고 이상을 그릇 풀며 재판에 실수하는 일이 있게 되므로 그들이 서는 강단에 은혜가 나리지 않게 될 때에 그 강단은 자동적으로 속화되므로써 모든 영들은 극도로 곤핍해질 것을 가르쳤다. 금일에 교계가 이 상태로 나간다면 도저히 새 시대를 이룰 수가 없다고 본다.

  새 시대라는 것은 아무리 하나님의 종이라도 말씀대로 심판이 내리는 것이니 하나님 말씀을 바로 해석하지를 못하고 혼란에 빠져 있는 이 교계를 하나님은 그냥 두고 심판할 수가 없고 또는 소위 교회의 상부라는 기관에서 참된 종이 누구인지를 모르고 예루살렘 공회가 예수를 이단이라고 하듯이 오늘의 교회가 함부로 남을 이단이라고 정죄한다는 것은 큰 실수라고 본다.

 

  2. 생소한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말씀하는 일 (11~12상반절)

  금일에 어떤 신학자들은 이 사람의 입술에 말씀이 임해서 아무런 연구가 없이 말씀의 칼, 조직 신학 강의, 선지서 강의, 계시록 강의, 인간론, 성경해석법, 요일서 강의, 새일 성가, 아름다운 소식의 월간지를 계속 발행하게 되는 것을 그 자체가 이단이라고 한다는 것은 너무나 경솔한 말이라고 본다.

  내가 지금 매일같이 책자를 쓸 때에 한 번이라도 내 생각을 집중시킨다면 도저히 입에서 말씀이 나오지를 않고 생각을 집중하지 않고 있어야만 입에서 말씀이 나와서 책자를 쓰게 되는 것을 보면 나 자체는 스스로 떠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성경을 택할 때에도 내 생각을 집중하면 택하여지질 않고 믿고 기도할 때에 입술에 말씀이 나오는 대로 성경이 택하여지고 제목과 서론과 대지와 결론이 스스로 나오게 되는 것을 보면 분명히 내 입술을 여호와의 신이 사용한다고 믿어진다. 하여튼 누구든지 이 책을 하나님의 말씀인줄 알고 자세히 읽어 볼 때에 하나님은 반드시 역사할 것이다.

 

  3. 듣지 아니할 때에 망하게 된다 (12하반절~13)

  하나님께서 과거의 선지를 통하여 기록한 글을 다시 알려주는 일이 없이 그냥 심판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지금 혹자는 성경을 모르는 것이 정통이라 또는 해석할 탓이라고 말한다는 것은 큰 과오라고 본다.

  이 사람이 이사야서를 읽지도 않고 그냥 말씀이 임하는 대로 기록하고 성경을 읽어 볼 때에 성경은 하나도 사람이 달리 해석을 할 것이 없이 그 본문 그대로 읽어서 완전히 변론을 할 수도 있고 확실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성경이다.

  그러므로 내 입술에 임한 말씀이 성경과 같다는 것보다도 성경을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 내막의 뜻이 무엇이라고 간단히 알려주는 식이다. 예를 든다면 어떤 사람이 글을 쓰고 다른 사람이 그 글을 읽어서 모를 때에 그 글은 무슨 뜻으로 기록했다는 것을 간단히 말해도 읽어보면 깨닫게 되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이 사람의 입을 통하여 간단히 그 내용을 깨닫도록 말씀을 나타냈다고 믿어진다.

  지금 월간지도 본문을 택할 때에 입에 말씀이 와서 택하고 또는 그 성경을 보아도 내용이 어떻게 되는 것인지를 모르나 입에 말씀이 임하는 대로 받아 기록하고 보면 그 본문 내용이 대지적으로 분명히 나타나는 것을 볼 때에 누구든지 이것을 대적하는 자는 반드시 망하리라고 본다. 왜냐 하면 성신의 훼방 죄 중에도 제일 큰 죄가 되기 때문이다. 이적을 보고 반대해도 훼방이라고 하였거든 하물며 여호와의 신이 합법적 변론으로 말씀을 나리는 데도 이 진리를 대적한다면 본문대로 반드시 망하게 될 것이다.

 

  결    론

  앞으로 기독교는 심판의 다림줄의 진리를 그대로 믿고 싸우느냐, 강한 이방 앞에 협상을 하느냐 하는 것으로 종말을 이루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14~16절을 보면 너희 말에 사망과 언약하였고 음부와 맹약을 하였은즉 넘치는 재앙이 유행할지라도 우리에게 미치지 못하리니 우리는 거짓으로 우리의 피난처를 삼았고 허위 아래 우리를 숨겼음이라 하는 도다.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가라 사대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초 돌이라.  그것을 믿는 자는 급절하게 되지 아니하리라고 하였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가르쳤는데 머릿돌 예수로 나타날 예수를 바로 믿으려면 절대로 타협적인 노선을 걷지 말라는 것이다.

 

 

참되다고 인치는 믿음

- 요 3:31~36 -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은 사람이 무엇을 찾는데서 얻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편에서 완전 계약의 말씀을 인간에게 주는 동시에 그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증거를 하실 때에 받는 자로서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볼 때 참되다고 인을 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확신이라는 것이다. 만일 이것이 없다면 완전한 진리의 종교라고 할 수 없다.

  진리라는 것은 참되신 하나님께서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해주시겠다고 말씀한 것이 진리인 동시에 그 진리는 다음과 같이 증거가 있다.

 

  1. 위로부터 오는 증거 (31)

  기독교는 전부가 땅에 속한 것을 목적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고 위로부터 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만일 만물에 속한 것을 말했다면 이것은 과학적인 지식에 불과할 것이로되 만물 위에 계신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보내는 증거가 즉 그리스도의 탄생인데, 그리스도의 잉태는 땅에서 올라 온 만물에 속한 혈통이 아니고, 위에서부터 온 것이니 즉 성령으로 말미암아 물과 피가 임하여 이루어진 몸이다. 만일 그리스도의 몸도 땅 위에 속한 혈통을 받은 몸이라면 그 몸은 참되신 증거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위에서부터 온 몸이요, 또는 신이시다.

 

  2.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함 (32~33)

  주님께서는 스스로 말씀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에게  알게 해 주는 동시에 그대로 행하시는 주님이시라 주님께서 모든 증거하는 일이 하나님의 말씀과 맞지 않는 증거라면 성경에 기록된 대로 오신 메시아가 아니고 거짓선지가 될 것이로되 주님의 증거는 하나님 말씀이 이루어지는 동시에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에 분명히 알게 해 주셨으므로 그 증거는 참되다고 인을 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3.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시므로 (34)

  아무리 예수님께서 성경을 증거했다 하여도 하나님께서 성령을 부어 준 역사가 없다면 참된 증거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도 예수님 머리 위에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는 것을 볼 때에 그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알았다고 증거했다(요1:31~34). 언제나 참된 증거라는 것은 성령의 역사가 따르는 것이다. 지금도 기독교가 아무리 진리를 증거한다 하여도 성신을 부어 주는 역사가 없다면 참되다고 인을 칠 수가 없다.

 

  4. 영생이 있는 증거 (35~36)

  영생이라는 것은 현저히 그 생명이 믿는 자에게 온다는 것을 분명히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 생명이 오므로써 나날이 발전하는 영계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나뭇가지에 진액이 오므로써 그 가지에 순이 나서 자라듯이 영생의 생명이 흘러오므로 날마다 그 영이 자라나 큰 역사를 하게 되는 열매가 있게 된다.

  영생이 오는 것은 행함으로 오는 것이 아니고 믿는 자에게 영생이 있으므로 그 영생으로 말미암아 완전한 인격이 이루어지는 동시에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결    론

  기독교의 신앙은 하나님이 행하시겠다는 말씀을 먼저 선지를 통하여 세상에 나타나고, 그 말씀대로 행하는 증거가 그리스도의 성신 잉태로부터 십자가 부활, 승천, 성신강림으로 현저히 나타났다. 그러므로 택한 자는 이 증거를 받게 되는 동시에 참되다고 인을 치는 신앙에 들어가게 된다.

 

 

장년 공과편 - 예수님께서 십자가 부활을 증거하심

 

  총    론

  주님께서 친히 십자가 부활에 대하여 증거하신 것은 사람들이 너무나 깨닫지 못할 때에 십자가 부활을 바로 깨달아 증거하기 위하여 먼저 당신의 십자가의 의와 부활의 의를 가르치신 것이다. 만일 주님께서 증거한 것이 없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했다면 그 진리를 바로 증거할 자가 없으므로 십자가를 바로 믿고 부활을 바로 증거하는 종들이 되게 하기 위하여 증거한 말씀을 다음과 같이 공부한다.

 

제1과  성전을 3일 동안에 다시 짓겠다고 말씀하심

- 요 2:13~22,  요절:19 -

 

  서    론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전하기 시작할 때에 먼저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서 당신이 십자가에 죽으므로 과거의 성전은 필요가 없이 되고 다시 사흘만에 부활하므로 새로운 교회가 나올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1대지 : 성전 안에 있는 자들을 책망하심 (13~16)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에 오셔서 구약 때 세워진 성전을 가 볼 때 크게 노하게 되었다. 왜냐 하면 소나 양이나 비둘기를 가지고 제사한다는 무리들이 전부 부패한 것을 볼 때에 참을 수 없게 되었다.

  왜냐 하면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것은 한 상업으로 화해졌고 모든 하는 일은 전부가 다 하나님이 중심에 있는 것이 아니요, 자기 중심인 것을 볼 때에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양떼와 소떼를 때려서 쫓아내었다. 돈을 바꾸는 사람들의 그 상을 엎어놓고 크게 책망을 할 때에 “너희는 내 아버지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책망을 했다.

  하나님의 아들이 성전에 올 때에 하나도 누구인지를 모르고 전부 물질에 끌려서 눈이 어두워지므로 하나님의 성전 안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반대하게 되었다. 그 때에 예수님은 이 성전에 있는 자들과 나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는 표시를 나타내서 용서 없이 채찍으로 때렸던 것이다.

  세상 죄를 걸머지고 오신 어린양 예수님도 예언적인 성전의 부패를 보고도 참을 수 없었는데 하물며 재림의 주가 올 때에 하나님의 교회를 직업화시키던 무리들은 다 버림을 당하고 말 것이다. 아무리 소와 양을 잡아 드린다 하여도 하나님이 받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 하면 하나님은 그 중심을 보기 때문이다. 양을 잡아 드리는 것도 중심을 보는 것이요, 예수님의 피를 믿고 기도하는 것도 중심을 보는 것이다.

 

  2대지 :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만에 일으키리라고 하심 (17~19)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 할 때에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하시니 진리를 모르는 인간들은 예수를 미친 사람으로 알았던 것이다. 왜냐 하면 그 성전은 46년간 걸려 지은 것인데 사흘만에 짓는다는 말이 너무나 우스꽝스러운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구약의 교회는 폐지가 되고 새로운 교회가 나올 것을 뜻한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적에 성전의 휘장이 무너진 것은 구약 교회의 성전은 폐지된다는 뜻이요, 사흘만에 부활하신 것은 이레 중 첫날에 새로운 교회를 개척하여 그 교회가 세계를 구원하는 열매가 된다는 뜻이다.

 

  3대지 : 제자들도 부활 후에 가서 깨닫게 됨 (21~22)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므로 구약의 교회는 다 폐지가 되고, 사흘만에 새로운 교회를 세운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무도 몰랐던 것이다. 그러므로 제자들도 부활 후에야 분명히 깨닫게 된 것이다. 십자가가 무엇이라는 것을 바로 깨달아 증거한 자는 사도들이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고 부활했다는 것을 증거할 때에 그것이 무슨 뜻인지를 모르던 자들은 예수를 비방하고 조롱했던 것이다. 왜냐 하면 나사렛 목수가 만민의 죄를 위하여 죽었다가 부활한다는 것은 도저히 인간의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때까지 “성전을 헐라, 사흘만에 일으키리라”고 한 말씀을 가지고 비평했던 것이다.

 

  결    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찾아가서 하신 일은 큰 뜻이 있는 것이니

  첫째는 하나님의 아들된 권세를 행하신 일이요,

  둘째는 당신이 교회를 개혁하려고 왔다는 것을 증거한 것이요,

  셋째는 완전한 승리를 이룰 것을 말씀한 것이다.

 

 

제2과  이 시대에 큰 표적이 될 것을 말씀하심

- 마 12:38~45,  요절:40-

 

  서    론

  과거에도 큰 표적이 시대적으로 있었지만 온 세계가 믿어야 될 표적은 십자가 부활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표적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믿지 않는 자는 어느 시대 사람보다도 화가 더 크다는 것을 가르친 것이다. 왜냐 하면 하나님은 이에서 더 큰 표적을 보여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제 예수님께서 시대의 큰 표적이 되게 한 일에 대하여 공부하기로 한다.

 

  1대지 : 전무후무한 표적 (38~40)

  바리새 교인들은 예수님께 큰 표적을 구했던 것이다. 그 때에 주님께서 이 시대가 표적을 구한다면 요나가 큰 물고기 뱃속에 사흘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다가 다시 부활하므로 시대의 큰 표적이 될 것을 말씀했다. 이러한 표적이 있고는 그 밖의 다른 표적이 더 없이 세상을 심판하게 될 것을 가르쳤다.

  하나님의 아들이 만민의 죄를 대신하여 죽어서 땅 속에 장사된 바 되었다가 다시 살았다는 것 외에는 세계 사람이 믿을 만한 표적이 더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다른 표적을 보고 믿으려고 한다면 이것은 탈선된 길이라고 본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와서 만민의 죄를 위하여 죽었다가 부활 승천하신 것이 확실한 표적인데 이것을 믿지 않는다면 다시는 용서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2대지 : 정죄를 받는 일 (41~42)

  니느웨성이 악하다 하여도 요나가 큰 물고기 뱃속에 사흘 있다가 살아 나와서 외칠 때에 회개를 했고, 아무리 남방 구스가 미개하다 하여도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듣고 하나님을 알았던 것이다. 하물며 이러한 일을 보고도 믿었거든 독생자의 십자가 부활을 믿지 않는 자는 정죄를 받아도 마땅하다는 것이다. 요나의 전도보다도 솔로몬의 지혜보다도 더 큰 표적은 십자가 부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십자가 부활을 증거하는데도 회개치 않는 자는 다시는 더 기회를 줄 수가 없다는 것이다.

 

  3대지 : 믿지 않는 악한 시대의 종말의 화 (43~45)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승리하고 부활 승천하여 마귀 세력을 다 몰아 내고 해방을 준데도 불구하고 짐짓 이 진리를 버린 자는 종말의 일곱 마귀의 악한 재앙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더러운 귀신이 쫓겨 나갔다는 것은 은혜시대를 말했고, 귀신이 다시 찾아 왔다는 것은 마귀의 권세가 다시 허락을 받고 들어올 것을 뜻한 것이다.

  그러므로 은혜시대는 십자가 부활만 증거하면 그를 믿는 자는 다 마귀를 물리칠 권리가 있었지만, 마귀를 허락해서 다시 세상을 침투할 때에 세상의 악화가 더 크다는 것이다. 마귀의 권세가 처음에는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인간을 지배하고 있었지만, 마지막 때의 마귀 역사는 인간을 지배하는 정도가 아니요, 큰 화를 가져올 것을 가르쳤다. 왜냐 하면 마귀가 발악적인 행동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큰 표적이 되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화가 더 크다는 것이다.

 

  결    론

  가장 큰 표적은 십자가 부활인 동시에 그 표적을 반대하고 믿지 않는 자에게 심판 날에 큰 화가 있을 것을 말씀한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증거한데도 불구하고 이것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사는 시대는 악한 시대라는 것이다.

 

 

제3과  십자가를 강조하심

- 마 16:21~28, 요절:24 -

 

  서    론

  주님께서는 십자가 부활을 증거할 때에 이것을 면키 위하여 말하는 베드로를 책망하시면서 십자가를 강조하였다. 십자가가 없이는 영광이 없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십자가를 통함으로만이 내 제자가 되리라고 십자가를 강조하신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1대지 : 베드로를 책망하심 (21~23)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음을 당해서 제 삼일에 살아야 될 것을 제자들에게 강하게 말씀할 때에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이런 일이 결코 주님께 미치지 않도록 해 달라는 간청을 했다. 주님은 베드로를 보고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고 책망을 하시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다시 사는 것이 하나님께 받은 사명인데, 이것을 하지 말라는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넘어지게 하는 자라는 것이다.

  인간이 볼 때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는 것이 넘어지는 것 같지만 십자가를 지지 않는 것이 오히려 예수님은 넘어지는 일이라고 말씀하셨다. 우리 하나님의 일은 인간이 볼 때에 실패 같으나 하나님은 오히려 그것을 영광으로 여기시는 것이다. 인간들은 일시 자기 안락을 위하여 간사한 계획을 하고 있지만, 예수님은 인간이 볼 때 어리석은 사람 같으나 자기가 십자가에 죽으므로 하나님의 일을 성취하는 것을 말할 때에 제자들은 크게 근심하게 되었다(마17:22~23).

 

  2대지 :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하심 (24)

  십자가라는 것은 형벌 중에 가장 무서운 형벌이다. 손과 발에 못 박혀 애를 쓰리만큼 쓰고, 피가 빠지리만큼 빠져서 죽는 것이 십자가이다.

  이것을 지고 가신 예수님은 “나를 따르려면 너희도 이것을 지라”고 하신 것은 다음과 같은 의의가 있다.

  첫째는 남을 살리기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자라야 왕권을 받기 때문이요,

  둘째는 목숨을 바치고 싸우지 않고는 진리 운동을 할 수 없기 때문이요,

  셋째는 목숨을 바치는 자가 아니고는 참된 사람이라고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충성을 하여도 또는 충성을 하지 않아도 누구든지 왕권을 준다는 것은 공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3대지 : 재림시에 행한대로 갚아 주기 때문이다 (25~28)

  주님께서 초림의 주로 오셔서는 만민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므로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놓으신 것은 누구든지 그 일을 위하여 싸우라는 것이 우리에게 맡긴 사명이요, 다시 오실 때는 끝까지 싸워서 승리한 자에게 일한 대로 갚아 주기 위하여 오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단의 세력을 들어서 종들을 대적케 하는 것은 십자가를 지나, 지지 않나 보자는 모략적인 방법이다. 누구든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요, 누구든지 십자가를 진대로 상급을 받는다는 것이 하나님의 의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승리하시므로 왕권을 받는 동시에 누구든지 그 십자가를 믿으면 구원을 얻게 되었고, 십자가를 증거하는 종들이 죽기까지 충성을 다하므로 그 종들은 왕권을 받는 동시에 그 전도를 받고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다.

 

  결    론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인 동시에 희생의 종교요, 희생의 종교인 동시에 세계 통일의 왕국을 이룰 종교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은 자기만 지신 것이 아니고, 누구든지 십자가를 지라고 강조하신 것은 참된 사랑은 목숨을 바치는 것 외에는 없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요, 목숨을 바치는 것이 없이는 아무런 것도 받을 수가 없다는 것을 가르친 것이다.

 

 

제4과  성경으로 십자가 부활을 증거하심

- 눅 24:44~49,  요절:45 -

 

  서    론

  사람은 이미 이루어진 일도 성경을 깨닫게 해 주므로 알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제자는 3년간 주님을 따라가면서 이적을 보고 교훈을 받았고, 십자가에 죽었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지만, 주님께서 마음을 열어 깨닫게 해 주므로 십자가 부활의 진리를 제자들이 깨닫게 된 것이다. 주님은 십자가 부활을 증거할 사명이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서 부활한 몸을 만져 보라고 하면서 친히 성경을 들어 십자가 부활을 깨닫도록 증거해 주신 것이다.

  이제 십자가 부활을 증거하는 사람들의 할 일을 가르친 말씀을 다음과 같이 알 수 있다.

 

  1대지 :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심 (44~45)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에게 나타나서 모세의 율법과 선지서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씀이 이것이라고 하시었다. 이것은 성경대로 십자가에 죽으시고 성경대로 부활한 사실을 제자들에게 증거해 주신 것이다. 우리 사람들은 아무리 성경을 보아도 무슨 뜻인지를 모르는 것이 인간의 생각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주님이 성경에서 은혜 시대에 관한 예언의 말씀이 이루어진 사실을 전부 가르쳐 준 것 외에는 그 밖의 성경은 이 날까지 사람이 모르게 되었다. 4복음서와 사도 행전과 편지서를 기록한 사도들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깨닫게 해 준 성경을 들어 가지고 예수 행적과 사도들의 행한 일과 편지서를 기록한 것이 신약 전서란 것이다.

  그러므로 신약은 율법과 선지의 글과 시편의 기록한 말씀 중에서 십자가 부활을 가르친 성경을 이용하여 예수님의 행하신 일을 기록한 것이 4복음이요, 사도들이 행한 일을 기록한 것이 사도 행전이요, 성신의 역사하는 일을 체험한 사도들이 기록한 글은 성신의 은사에 대하여 세밀히 기록한 글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루어진 일을 성경에서 깨닫고 증거한 책이 4복음, 사도 행전, 편지서이다. 이것은 주님께서 가르쳐 준 성경에 의하여 세밀히 기록한 책이다.

 

  2대지 :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를 전파하라 하심 (47)

  십자가 부활은 회개와 중생을 목적한 것이라는 것을 가르쳤다. 십자가의 보혈로 죄를 사하는 영원한 속죄가 되었고, 부활로 말미암아 죽은 영들이 중생을 받게 한 것이다. 이것을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이다.

  이 비밀은 그리스도의 비밀이다(엡3:4~6). 이 복음은 중생과 천국을 뜻한 것이다. 이 복음을 모든 족속에게 전파할 것을 주님께서는 명령하셨다. 이와 같이 금일에 세계에 전파된 것은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교훈에 의하여 십자가 부활을 만방에 전파한 것이다.

 

  3대지 : 성령을 보내어 십자가 부활을 증거하게 할 것을 말씀하심(49)

  아무리 십자가 부활을 주님께서 깨닫도록 해주었다 해도 성신의 역사가 없이는 증거할 수가 없다는 것을 주님은 말씀하신 것이다. 인간이라는 것은 알 수도 없고, 증거할 수도 없는 것이 인간이다. 깨닫게 해 주므로 깨닫고, 증거하게 하므로 증거하게 되는 것이 사람의 할 일이다.

  아무리 십자가, 부활, 승천, 성신강림이 있으므로 역사한다 하여도 사람을 통하지 않고는 역사할 수가 없고, 역사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왜냐 하면 죄를 사함 받는 것도, 중생을 받는 것도 성신을 받는 것도, 왕권을 받는 것도, 사람이 받아야 할 책임이 있기 때문에 부활하신 주님은 사람을 찾아 와서 당신의 부활하신 몸을 만져 보라 하면서 깨닫게 하고 사명을 맡기어서 성신을 부어 주어 역사하게 한 것이다.

 

  결    론

  십자가 부활을 증거할 제자들을 데리고 예수님은 3년 동안 친히 증거를 보여 주시면서 교훈하여 4복음을 기록할 수 있게 하였고, 부활하신 후에 다시 나타나서 깨닫게 해주는 동시에 성신을 부어 주어서 세계 만방에 복음을 전파하게 한 것이다.

 

 

 어린이 공과편 - 요한복음 공부

 

제18과  믿는 자의 역사를 가르친 예수님

- 요 14:12~17,  요절:14 -

 

  서    론

  학생들 제일 큰 일을 세상에서 하는 사람은 누구인지 아십니까? 참된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세상에 아무리 훌륭한 영웅이라도 참된 믿음이 없는 사람은 아무런 열매가 없이 죽고 만 것입니다. 그러나 저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 베드로와 요한은 참된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온 세계 사람을 구원하는 큰 역사를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왜냐 하면 믿음이 없는 자는 하나님의 역사가 같이 하지 않아도 믿음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역사가 같이 하므로 앞으로 새로운 시대를 완전히 이루는 사람은 참된 믿음이 있는 자입니다.

  이제 믿음이 있는 자의 역사에 대하여 오늘은 공부하겠습니다.

 

  1대지 : 참된 믿음을 가르치심 (12)

  참된 믿음이 있는 사람은 예수님이 한 일을 행하게 됩니다. 지금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지만 참된 믿음을 가지지 못했으므로 아무런 역사가 없다고 봅니다. 누구든지 참으로 예수를 믿을 때에 예수님은 그 믿는 자에게 역사를 나리십니다. 세상에 종교가 많이 있지만 참 믿음이라는 것은 예수를 믿는 자에게 있습니다. 참으로 인간의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신 예수를 믿는 믿음만이 참 믿음입니다.

  학생들 앞으로 훌륭한 사람이 되려면 참되신 예수를 바로 믿을 때에 예수와 같은 일을 할 수가 있게 됩니다.

 

  2대지 : 참된 기도를 가르치심 (13)

  참된 기도라는 것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해야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하고 있지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자라야 예수님이 응답을 나리십니다. 학생들 앞으로 참된 기도를 하는 사람이 되어야만 살 길이 있습니다. 앞으로 무서운 환란 재앙이 올 때에 기도하는 대로 하나님이 응답해 주는 사람이라야 죽지 않고 새 시대에 가게 됩니다. 우리 사람은 기도할만한 공로가 없습니다. 왜냐 하면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기도는 예수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에 예수님이 대언 기도하므로 학생들에게 응답이 나립니다.

  학생들은 기도할 때에 우리는 아무런 것도 잘한 일이 없으므로 예수님의 이름으로만이 학생들의 기도가 상달되고 응답이 나리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는 예수님의 이름이 아니고는 기도가 절대로 올라가지를 못하는 법입니다.

 

  3대지 : 믿는 자에게는 성신님이 같이 하십니다 (14~17)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은 마귀와 같이 하고 예수를 참으로 믿는 사람은 거룩한 성신이 같이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제일 기뻐하는 사람은 항상 같이 하는 것입니다. 학생들 생각해 보세요. 마귀가 같이 하는 것이 좋습니까? 성신이 같이 하는 것이 좋습니까? 누구든지 마귀가 같이 하면 아무 것도 깨닫지를 못하는 사람이 되고 성신이 같이 하면 모든 것이 다 잘 깨닫게 됩니다. 학생들도 예수믿고 성신이 같이 하는 사람이 될 때에 모든 진리를 깊이 깨닫게 됩니다.

 

  묻  는  말

 1. 누구를 믿어야 참 믿음입니까?

 2. 누구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응답이 옵니까?

 3. 예수를 믿는 사람은 누가 같이 합니까?

 

 

제19과  참된 평안을 주시는 예수님

- 요 14:25~28,  요절:27 -

 

  서    론

  참된 평안은 예수님밖에는 사람에게 주는 이가 없습니다. 학생들 참된 평안이 학생들에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학생들 사람을 만날 때에 안녕하십니까? 하는 것은 평안합니까? 하는 말이 아니겠어요? 우리는 예수님을 믿을 때에 참 평안이 있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이 주시는 참 평안에 대하여 공부하겠습니다.

 

  1대지 : 성신이 가르쳐 주는 일입니다 (25~26)

  학생들 아무리 좋은 옷을 입고 맛있는 음식을 먹었다 하여도 아무 것도 깨닫지를 못하는 사람들은 마음이 답답하고 캄캄합니다. 그러나 좋은 옷과 맛있는 음식을 먹지 못한다 하여도 모든 것을 바로 깨닫는 사람은 참으로 평안함을 얻게 됩니다. 왜냐 하면 사람은 동물과 같이 먹고 사는 것이 사람의 만족이 아니요 사람이 앞으로 나갈 길을 잘 깨닫고 나가는 자라야 앞으로 무슨 일이 닥쳐오든지 참으로 평안한 생활을 하게 됩니다.

  예를 든다면 길을 가는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소경이요 한 사람은 밝히 보는 사람이라면 무서운 낭떠러지와 구렁텅이가 있을 때에 밝히 보는 사람은 거기에 빠지지 않지만 모르고 가는 소경은 얼마나 위험한 일이겠습니까? 이와 같이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된다면 앞으로 무서운 환란과 재앙이 올 때에 내일의 멸망을 모르고 있다가 거기에 빠질 것이 아니겠습니까?

  학생들은 성신이 가르쳐 주는 사람이 될 때에 앞으로 환란 재앙이 온다하여도 평안히 새 시대로 갈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신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깨닫게 해 주므로 조금도 죽지 않도록 화를 받지 않도록 해 주시는 것입니다.

 

  2대지 : 세상을 초월한 것입니다. (27)

  우리가 받는 평안은 세상에서 누구나 얻지 못하는 평안입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이 평안을 얻지 못하고 아무리 세상의 지식이 많아도 이 평안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죄악의 세상이요 앞으로 멸망을 받을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아무리 대통령이라 하여도 평안을 얻지 못할 것이요 아무리 돈이 많은 부자라도 평안을 얻지 못할 것이요. 아무리 기술이 좋은 과학자라도 평안을 얻지 못합니다.

  참 평안은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고 세상 밖의 하나님께로 오는 것입니다.

 

  3대지 : 주님이 다시 오시므로 (28)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 인생들이 죄를 짓고 죄에서 그 영들이 죽는 것을 살리기 위하여 세상에 오셔서 인간의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다시 부활해서 하나님께로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 갔습니다.

  지금은 우리의 있을 곳을 예비하고 계시다가 우리를 환란과 재앙 속에서 구원하려 다시 오시는 것이니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목적이요 구름 타고 오시는 것은 우리를 환란 재앙에서 구원하려 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으므로 마음의 평안도 지금 받는 것이요. 앞으로 환란과 재앙이 온다 해도 참 평안을 받게 됩니다.

 

  묻 는  말

 1. 참 평안이 있으려면 누가 같이 해야 합니까?

 2. 참 평안은 이 세상에 있습니까? 이 세상 밖에서옵니까?

 3. 예수님은 무엇하러 세상에 오셨다가 다시 오십니까?

 

 

제20과  열매를 맺게 하시는 예수님

- 요 15:1~8,  요절:5 -

 

  서    론

  학생들 열매가 없는 나무는 무엇하며 열매가 있는 나무는 무엇에 쓸까요? 열매 없는 나무는 찍어서 불을 땝니다. 열매있는 나무는 가꾸고 비료를 주고 물을 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열매를 바라 보는 사람이 그렇게 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좋은 열매를 맺는 나무를 가꾸듯이 학생들이 좋은 열매를 맺는 사람이 되면 하나님께서 보호하고 아껴주시기 때문에 절대로 환란과 재앙에서 피해를 당치 않고 새 시대의 축복을 받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스스로 좋은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고 했습니다. 이제 학생들이 열매를 많이 맺는 훌륭한 사람이 되려면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오늘 공부하겠습니다.

 

  1대지 : 깨끗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1~3)

  학생들, 우리는 깨끗한 사람이 되려면 예수님께로부터 오는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포도나무 가지가 진액을 받듯이 예수님께로 오는 은혜를 받는데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깨달은 사람이 될 때에 하나님은 말씀대로 학생들에게 은혜를 나리기 때문에 마음이 깨끗하고 머리가 명랑한 사람이 되므로 모든 일을 하나님의 뜻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2대지 : 예수님 품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4~6)

  예수님은 학생들을 암탉이 병아리를 품에 안듯이 항상 안아 주시고 보호하는 역사를 하십니다. 학생들이 동무를 때리고 욕하고 하는 사람이 될 때는 마귀가 와서 학생들을 안게 될 것이요, 남을 사랑하고 도와주려는 사람이 될 때는 예수님이 거룩한 성신으로 학생들을 안아 주고 보호하므로 무슨 일을 당하든지 완전히 승리하는 열매를 맺게 됩니다.

  학생들은 앞으로 피난처가 있어야 합니다. 피난처는 어떤가 하면 예수님 품안에서 보호를 받고 자라나는데 있습니다. 앞으로 무서운 환란이 오는 것도 예수님의 허락이 있어야 오는 것이요, 또는 우리가 살아서 새 시대에 가는 것도 예수님의 보호가 있어야 합니다.

 

  3대지 :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7~8)

  기도라는 것은 하나님이 말씀한 대로 꼭 믿고 구하면 그대로 이루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의심하는 자는 기도해도 주지를 않고 그 말씀대로 꼭 믿는 자라야 주시기 때문입니다. 학생들은 이렇게 기도하면 됩니다. 다 같이 따라 하세요. 하나님이여 나는 하나님을 조금도 거짓이 없는 진실하신 하나님인줄 믿사오니 그 말씀대로 나를 새 시대로 인도해 주실 줄 믿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무서운 불이 세상을 태워도 하나님 말씀을 믿는 사람은 그 불의 피해를 당치 않게 해서 새 시대로 보내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묻 는  말

 1. 학생들 나무 가지가 열매를 맺는 것은 누구 힘입니까?

 2. 학생들을 열매 맺게 하시는 이는 누구십니까?

 3. 열매를 맺지 않는 사람은 종말이 어떻게 될까요?

 

 

제21과  성신을 보내시는 예수님

- 요 16:5~13,  요절:13 -

 

  서    론

  학생들, 한가지 물어 보겠습니다. 제일 훌륭한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하여야 되겠습니까? 세상에서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은 훌륭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내는 성신을 받으면 세상 학교에서 배우려고 하여야 배울 수 없는 진리를 다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제일 훌륭한 사람은 예수님이 보낸 성신을 받는 사람이라고 봅니다. 아무리 무식한 사람도 성신을 받으면 유식한 학사, 박사가 모르는 이치를 다 알게 됩니다.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도 예수믿고 성신을 받으면 아주 거룩하고 훌륭한 사람이 됩니다. 이제 성신을 보내시는 예수님에 대하여 왜 성신을 보내느냐 하는 것을 공부하고자 합니다.

 

  1대지 : 우리에게 유익을 주기 위하여 보냅니다 (6~7)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을 보았고 예수님을 보았다 하여도 성신을 보내주지 않는다면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학생들, 어떤 훌륭한 사람이 재간이 많고 지혜가 많다 하여도 그 사람이 우리에게 그것을 줄 수가 없다면 우리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하나님이 능력이 많으시고 지혜가 많다 하시어도 우리에게 성신을 보내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세상에 와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성신을 보내십니다. 이것은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 거저 주는 것입니다.

  아무리 무식한 베드로라도 성신을 받을 때에 세계에 제일 훌륭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학생들도 성신을 받으면 앞으로 세계의 제일 훌륭한 사람이 되어서 새로운 시대에 가게 되므로 영원히 영광을 누립니다. 이것이 얼마나 유익한 일이겠습니까?

 

  2대지 : 세상을 책망하려고 보냅니다 (8~11)

  성신의 역사가 없이는 사람들이 자기 죄를 회개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이라도 성신이 마음에 와서 책망할 때에 눈물 흘리며 회개하게 됩니다. 아무리 마귀가 접했던 사람이라도 성신의 역사가 임할 적에 마귀가 쫓겨 나가고 성신이 바로 그 사람을 세워서 훌륭한 사람이 되게 하는 일도 있습니다. 경찰이 문초를 하여도 회개치 않던 사람이 성신의 책망이 들어가면 눈물 흘리며 회개하게 됩니다. 아무리 악한 사상을 가진 사람이라도 성신이 책망할 때에 그 사상을 버리고 옳은 사상을 가진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어디를 가나 교회가 서는 것은 예수를 못 믿게 핍박하는 사람도 성신의 책망이 올 때에 회개하고 훌륭한 하나님의 종이 되기도 합니다. 성신의 역사가 있으므로 거룩한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3대지 : 모든 진리 가운데로 사람을 인도하려고 보냅니다 (12~13)

  아무리 사람이 옳은 진리를 연구하고 애써도 성신의 인도가 없이는 그 진리를 모릅니다. 과학을 초월한 진리를 알려면 성신의 인도가 없이는 한 사람도 알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진리가 가장 귀하다는 것은 성신의 인도가 없이는 그 진리를 바로 알 자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 과학의 이치는 하나님이 창조한 물질을 바로 사용하는 법을 아는 것이요, 성신이 알게 하는 진리는 세상이 앞으로 어떻게 된다는 것을 다 알게 되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학생들은 성신을 꼭 받아야 합니다. 우리 다 같이 호소하겠습니다(47장으로 성신 부어 줍소서).

 

  묻 는  말

 1. 성신은 누가 보내십니까?

 2. 세상에 제일 훌륭한 사람은 무엇을 받아야 합니까?

 3. 사람에게 제일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논 설 편

 

1. 경고를 싫어하는 비극

  인간이라는 것은 완전한 사람이 있어서 모든 일이 바로 되는 것이 아니고 경고를 달게 받아서 바로 깨닫고 나갈 때에 아무리 재앙이 내리던 땅이라도 다시 축복이 내리고 인심이 악화된 사회라도 다시 평화로워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경고를 싫어하는 자가 될 적에 축복이 내리던 땅에 재앙이 나리기도하고 평화로운 자리에서 기뻐하던 땅에 무서운 환란이 오기도 한다.

  이제 경고를 싫어하는 자의 비극이라는데 대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이 알아야 한다.

 

  1. 경고를 싫어하던 예루살렘의 비극 (왕하25:1~21)

  아무리 하나님의 성전이 화려하게 건축되었고 거룩한 도성이라 하지만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의 경고를 싫어하던 예루살렘이 만난 비극은

  첫째 : 기근이 왔고

  둘째 : 왕의 두 눈을 뽑은 일과 아들들을 목전에서 죽인 일이다. 소위 하나님을 공경하던 왕이 경고를 싫어하므로 가족 전멸을 당하는 비참을 볼 때에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셋째 : 모든 귀인들의 집을 불살라 버린 일과 모든 성벽을 헐어버린 일을 보면 하나님의 성민이요 성직자라는 귀인들이 몽땅 원수에게 망하여 그 화려한 예루살렘이 황폐화되었다는 것은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넷째 : 하나님의 성전이 다 헐리고 모든 거룩한 기명을 다 원수가 가져가고 다시 예배를 드릴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은 그 얼마나 예루살렘의 슬픔일 것인가.

  그러므로 모든 선지는 하나같이 예루살렘의 멸망을 면케 해 보려고 눈물을 흘려 경고를 하였지만 선지의 경고를 싫어하고 심지어 참된 선지를 박해했던 것이다. 이것이 예루살렘의 비극을 가져오는 죄가 되었던 것이다.

 

  2. 경고를 싫어하는 인류의 비극 (계18:17~24)

  지금 인간들은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보다도 하나님이 없다는 말을 하고 죽었다는 말을 하는 세상이 되었다. 과거 예루살렘은 하나님을 공경하면서 부패하였으므로 경고를 싫어하다가 망하였고 인간 종말에는 싫어하는 것보다도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상과 대적하는 정치를 하다가 멸망을 하는데는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는 자를 죽이는 환란이 있을 것을 말씀했다.

  지금 공산주의를 이기는 일은 선지의 경고의 묵시를 달게 받고 순종하면 큰 축복이 오고 순종치 않을 때에 큰 화가 온다는 것이 기독교 종말의 경고가 된다. 모든 선지서는 그 때의 선지들이 경고를 말로 나가서 증거할 때에 예루살렘 거민이 순종치 않으니 선지들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눈물 흘려 기도하며 하나님께 자기의 사정을 호소할 때에 인간 종말에 대한 경고의 묵시를 받아서 기록한 것이 선지서라는 것이다.

  금일에 계10:7과 같이 경고할 때가 왔다. 우리 나라에 모든 선지의 경고의 묵시가 다시 예언할 수 있는 말씀으로 나타나는 새일수도원은 이 시대의 경고를 할 사명자를 양성하는 기관이라고 보게 된다. 지금 새일수도원에 나타난 말씀을 듣기 싫어한다는 것은 큰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만일 한국 교회가 이 진리 운동을 계속 반대한다면 큰 수치를 당할 일이 있을 것이니 이 책을 자세히 읽어보고 무엇이 성경의 탈선인 것을 발견해 주기를 바란다. 무조건 경솔하게 풍설을 듣고 이 진리를 대적한다는 것은 멸망을 자취하는 비극이 될 것이다.

  금년부터 우리 나라는 동방에 나타난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정치인으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전부 받아들일 적에 이 나라에 큰 축복이 임할 것이다. 만일 이 백성이 이 나라에 임한 경고의 말씀을 듣기 싫어한다면 비극이 있을 것이로되 멸공 진리 운동이 가장 옳다고 하는 국민이 된다면 새 시대를 이루는 동방의 이스라엘이 될 것이다. 세계가 다 화를 받는다 하여도 우리 나라만은 애국가대로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 나라 만세라는 노래를 축복 속에서 부르게 될 것이다.

  경고의 나팔을 불어야 할 때가 왔고 그 경고를 달게 받고 순종하면 죽음을 맛보지 않고 새 시대 영광을 누릴 때가 왔다고 본다.

 

 

2. 천하가 다 슬퍼해도 기뻐할 일을 하는 사람이 되자

  가장 복 있는 사람은 천하가 다 슬퍼한다 하여도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보게 된다(계18:19~20). 천지 만물을 창조한 후에 가인에게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아벨 때부터 온 천하가 슬퍼하여도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을 하나님은 만들기 위하여 지금까지 역사하시었다고 본다. 왜냐 하면 아담이 범죄하므로 이 세상은 불가피에 죽음이라는 비극을 가져 왔지만 이러한 세상에서 천하가 슬퍼하여도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이 역사했다. 인간이 볼 때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지만 이것이 천하의 모든 사람이 슬퍼해도 기뻐할 수 있는 인격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계18:19~20을 보면 온 천하가 한 시간에 멸망할 때에 모든 사람은 슬퍼해도 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아 그를 인하여 즐거워하라 하나님이 너희를 신원하시는 심판을 그에게 하셨음이라고 하셨다. 이날이 올 때까지 하나님은 이와 같이 역사했다.

 

  1. 사랑하는 자를 항상 징계하는 일을 하셨다 (암3:1~8)

  이것은 의합된 사람을 찾기 때문이다. 타락한 인생을 구원코자 하는 하나님께서는 의합된 사람이 없이는 일할 수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사랑하는 자를 의합되기까지 징계를 하시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시대적인 경고를 하게 하여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했던 것이다. 징계를 받고 즐거이 순종하는 사람을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인정했던 것이다(미6:9).

  이러한 일이 없이는 하나님은 어리석은 인간을 들어 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왜냐 하면 사람은 징계가 와야만 깨닫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징계를 많이 받고 일한 사람은 천하 사람이 슬퍼하는 날에 기뻐하는 인격을 갖게 된다.

 

  2. 사랑하는 자에게 억울한 죽음을 주었던 것이다

  어느 종이나 다 같이 임종을 억울하게 죽도록 하신 것은 심판 날에 기뻐하는 반열에 들게 하는 목적이었다. 인간이 볼 때는 평안히 죽는 것을 행복으로 보지만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를 다 험악한 길에서 싸우다가 죽게 하신 것은 축복 중에 큰 축복이라고 보게 된다.

 

  3. 마귀 참소를 많이 받게 하신다

  이렇게 하는 것은 그 참소를 이기므로만이 진노의 날에 남은 자가 되어서 영광을 누리기 때문이다. 가장 복된 일은 마귀 참소가 있을 때에 그 참소를 이기고 나간 자라고 본다. 모든 천하 사람이 슬퍼하는 날은 사랑하던 자를 참소하던 마귀를 없애는 날이므로 참소를 받던 자는 즐거워하게 되고 마귀 도구가 되어 택한 종을 참소하던 자는 크게 슬퍼하게 된다.

 

  4. 하나님은 예언의 말씀을 지키도록 역사한다

  가장 진노의 날에 기뻐할 자는 예언을 지키던 사람이라고 본다. 사람이라는 것은 이미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으면 그 영이 중생을 받아 새로워지는 것이요 이루어질 예언을 바로 깨달아 지킬 때에 특별 보호가 같이 하므로 슬퍼하는 세상에서도 기뻐하게 된다.

  하나님은 언제나 예언의 말씀을 증거하게 하고 그 말씀을 지키는 자로 하여금 기뻐하게 하되 예언을 순종치 않던 자를 승리하게 하는 것은 예언을 지키는 자의 힘으로가 아니요 예언대로 하나님이 역사하기 때문에 예언을 지키지 않던 자는 자동적으로 망하게 되고 예언을 지키던 자들로 예언대로 이루어지는 새 시대 영광을 누리게 하는 것을 하나님의 공의라 하는 것이다.

 

 

3. 진리 없는 생활은 허무

  진리라는 것은 동물에게는 있을 수 없고 동물은 진리를 알 수도  믿을 수도 없는 것이 동물이다. 식물은 진액이 없으면 살 수 없고 동물은 피가 없이 살 수 없고 사람은 영이 없이 살수 없는 동시에 진리 없는 영은 아무런 일도 할 수 없다. 진액을 받는 식물이 열매를 맺어 동물의 피를 공급하고 동물이 움직이는 것은 사람의 생활을 위하여 희생하고 있다.

  그러나 식물과 동물은 그것으로써 본분을 하고 있지만 사람은 진리가 없으면 그야말로 전부 허무한 일이 되는 것은 식물과 동물보다도 더 불행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왜냐 하면 사람이 진리가 잘못되면 죄가 되고 죄의 값은 사람에게 영원한 형벌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리 없는 생활은 허무한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진리가 없는 생활은 흑암이다.

  인생이라는 것은 창조를 받을 적에 빛의 생활을 하도록 한 것이니 빛이라는 것은 앞길을 분명히 바로 아는 것을 빛이라고 하고 앞길을 바로 알지 못하는 것을 흑암이라는 것이다.

  식물과 동물은 앞길을 위하여 싸우고 있는 인생에게 도움을 주기 위한 만물이다. 그러므로 앞길을 모르고 사는 생활은 눈먼 소경이 길을 가는 생활이니 무엇이나 다 허무한 것으로 끝을 맺게 될 것이다. 예를 든다면 자동차를 몰고 가는 운전수가 앞길을 모르고 간다는 것은 큰 위험을 만나게 되는 동시에 모든 수고가 오히려 불행한 일이 될 것이다.

 

  2. 진리가 없는 생활은 악이다.

  금일에 소위 유물론 공산당은 사람은 아무런 것도 없는 것이라고 한다. 그 날에 먹다 죽으면 그것으로써 인생의 끝이니 어떻게 하든지 기만적인 정책을 써서라도 자기가 할 일을 해서 마음껏 하고픈 일을 하다가 죽는 것이 인생의 자유라 하는 것이다. 이 사상은 최고의 악이라고 볼 수 있다. 사람이 만일 이러한 사상을 가진다면 그야말로 동물에 가까운 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진리라는 것은 인간 자체가 알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고 행할 수도 없는 것이 진리이다. 진리는 조물주 하나님께서 피조물된 인생을 향하여 어떻게 행하므로써 창조의 목적을 달성하겠다는 것이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당신이 직접 행하시는 것이 아니고 사람을 들어서 그 진리를 알게 하고 믿게 하고 행하게 하겠다는 것이 진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를 알 수 있는 지식을 하나님께 받고 진리를 믿을 수 있는 믿음을 하나님께로 받는 동시에 하나님이 역사하는 진리대로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받으므로 사람은 인생된 본분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진리를 떠나서는 사람은 악마의 격동을 받게 되므로 악하게 되는 것이다.

 

  3. 진리 없는 생활은 비극이다.

  인생이라는 것은 진리 없는 생활은 아무리 정치적으로 영웅이라도 종말은 비극이었고 아무리 문학을 자랑하던 지식인도 종말은 비극이요 아무리 황금을 자랑하던 자본가도 종말은 비극이다. 그러므로 정치나 문학이나 경제가 필요없는 것은 아니로되 진리가 없다면 종말은 비극이다. 정치나 문학이나 경제를 진리대로 움직일 적에 그야말로 많은 열매를 이루는 요소가 될 것이다.

  인생이라는 것은 진리를 하나 바로 알므로 모든 문제는 해결될 것이니 진리 하나가 바로 선 사람에게는 흑암도 죄악도 비극도 있을 수 없고 참 빛을 따라 생활하는 동시에 참된 의를 이루게 되고 참된 의를 이루는 동시에 영원한 기쁨을 누리는 세세 왕권의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다.

 

 

4. 미혹 많은 세상에 진리의 사람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고 사람을 낼 때에 하나님과 사람과는 진리에 의하여 교통하며 진리에 의하여 향상하도록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간교한 뱀으로 미혹을 해 볼 수 있게 창조한 것은 진리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한 목적이다.

  진리의 사람이라는 것은 아무리 미혹이 있어도 진리로 미혹을 이기고 나가는 것을 말한다. 진리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라 하는 것인데 진리는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에게 더 완전하고 영원한 것을 주고자 해서 언약하신 말씀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미혹을 받아서 하나님의 법을 범했다 해도 그 사람을 다시 깨우쳐서 진리의 하나님께 복을 받도록 한다는 것이 타락한 인생에게 하나님이 가르친 진리라는 것이다. 이미 아담의 범죄로 타락한 인생을 그 죄에서 구원해 주는 것이 십자가의 도의 진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진리가 자범죄로 흑암에 빠진 백성을 다시 구원해 주는 역사가 회개, 중생, 천국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미혹이 많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십자가의 도를 믿고 중생 받은 사람은 천국으로써 끝을 맺는 것이 아니고 지상왕국인 새 시대가 이루어지는 것으로 십자가 도의 끝을 맺는 것이므로 새 시대를 이루는 것은 회개하고 중생을 받은 사람들을 마귀에게 권세를 주어서 큰 미혹이 있는 어지러운 흑암을 거쳐서 미혹 받지 않고 말씀을 지킨 자들로 남은 종이 되게 하고 남은 백성이 되게 하는 것을 기독교 종말의 끝을 맺는 역사가 된다.

  이제 마귀 미혹이 오는 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붉은 용의 큰 권세를 받은 짐승으로 오는 미혹 (계13:1~4)

  오늘의 모든 사람들은 무신론 사상을 가진 붉은 짐승의 정권이 강하게 될 때에 모든 사람들은 그 앞에 머리를 숙이고 누가 능히 이 짐승과 같으뇨 누가 능히 더불어 싸우리요 하리만큼 공포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이것이 심판기에 오는 큰 미혹의 세력이라는 것이다. 오늘의 공산주의가 들고 나오는 레닌 맑스 주의는 마귀의 미혹의 흑암이라고 보게 된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이 없다는 사상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환경에 놓여 있는 현실이라고 보게 된다.

  동양에 도덕은 순천자는 흥하고 역천자는 망한다고 하던 교훈도 지금 보면 다 쓸데없는 것으로 알게 되었고 성경에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라야 축복을 받고 하나님께 순종치 않는 사람들은 망한다는 말이 다 쓸데없는 말과 같이 되어진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어느 종교나 다 과거보다는 다 세속화되는 경향에 들어가게 된다. 이것은 미혹의 흑암에 들어가게 되는 일이라고 보게 된다. 왜냐 하면 오늘에 무신론 공산당의 정권이 점점 강하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때에는 종교인이라도 이 시대를 바로 아는 진리의 사람이 아니고는 다 잠자는 상태로 들어가는 때이다.

 

  2. 협상주의의 거짓 선지 교권이 세계를 좌우하게 되는 일이다  (계13:11~18)

  기독교는 큰 위기를 만났다고 본다. 왜냐 하면 현 교계의 영적 상태와 진리의 지식수준으로는 도저히 거짓 선지의 미혹을 막을 수 없다고 보게 된다. 왜냐 하면 지도자들이 영계에 대한 것은 아무런 체험이 없다보니 진리조차 분명히 가르칠 수 없는 단계에 놓였기 때문이다.

  에덴 동산의 아담, 하와가 하나님을 떠난 것은 아니로되 너무나 영계가 어리고 지식이 박약하기 때문에 그 미혹을 이기지 못했던 것이다. 하물며 큰 붉은 용의 권세를 이겨야 될 현실에 와서 현 교계가 이런 미약한 영계를 가지고 또는 무식한 신앙에 있어 가지고 도저히 흑암을 뚫고 나갈 수 없다고 본다.

  지금 교계에서 소위 통합이라는 간판을 붙였지만 이것은 얼마든지 현 교계가 거짓 선지의 미혹을 받을 단계에 들어간다고 보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계적으로나 진리적으로 좀 더 새로운 역사가 일어나되 칠 배 영감으로 들어가야만 될 것이다.

  이제 이러한 미혹을 개방시킨 것은 은혜 시대의 영계대로 종들을 쓰려는 것이 아니고 좀 더 영계를 몇 갑절 올라가게 하고 진리의 지식도 완전한 지식에 올려서 종말의 역사를 일으킬 경륜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계7:2 이하를 보면 성신의 인을 받은 종들에게 하나님의 인을 더 친다고 한 것은 성신의 은사적인 영계에서 하나님의 권세의 영감으로 올라갈 것을 가르친 것이다. 마귀에게도 권세를 허락하니 만큼 하나님의 종들에게도 권세를 주어야만 하겠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지금 이때에 권세 역사를 주지 않는다면 도저히 기독교는 난국을 돌파하고 나갈 수가 없는 위기가 온 것은 하나님의 진리의 사람을 세워서 권세 있게 역사할 때가 온 증거라고 보게 된다.

 

  3. 미혹을 해보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 생령된 아담, 하와는 뱀으로 미혹을 하게 한 것은 미혹을 받지 않고 이긴 자라야 생명과를 먹고 영생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왜냐 하면 흙에서 난 몸이 썩지 않는 몸이 된다는 것은 아무런 시험 없이 무조건 줄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 중생 받은 하나님의 자녀를 마귀로 미혹해 보는 것은 그 몸이 죽음을 맛보지 않고 영생하는 축복을 주어서 그 자손이 지상 축복을 받게 하는 일이다. 첫째아담은 마귀 미혹을 이기지 못하므로 지상 축복을 빼앗겼지만 변화성도는 마귀 미혹을 이기므로써 지상 축복을 다시 찾게 되는 것이다(계20:4).

  셋째 : 새 시대에서 번창한 백성을 꾀어 보는 것은 그 많은 대중을 아무런 시험도 없이 무조건 천국으로 보내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천년 시대 말기에도 미혹을 시켜 보고 미혹을 받지 않아야 신천 신지의 영원한 왕국에 들어가게 된다.

 

 

5. 화가 있는 세상에서 받을 축복

  이날까지 인류역사의 모든 사람들이 지상에서 큰 축복을 받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자는 없을 것이다. 아무리 죽어 천당을 목적한 신앙가라도 이 땅에서 받는 축복을 바라지 않는 자는 없을 것이다.

  어떤 신자에게 누가 말하기를 당신은 오늘밤 세상을 떠나기를 바랍니다 하면 참말로 감사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낼 때에 죽어서 천당을 가라고 낸 것이 아니고 그 몸이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면서 영원히 복을 누리라고 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이제 화가 올 때에 받는 축복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첫째 화가 올 때에 복 있는 자

  요한 계시록을 보면 인류 종말에 화, 화, 화가 온다고 하였다. 이 화라는 것은 택한 자에게 큰 축복을 주기 위한 시기를 말한다. 왜냐 하면 영혼 구원을 목적할 때는 이 땅에서 택자나 불택자나 동등하게 취급했지만 화가 올 때에는 택한 자의 원한이 이루어는 때이기 때문이다.

  이제 화가 올 때 복 있는 자를 말하자면 첫째화는 큰 흑암이 와서 온 세계를 어둡게 할 때에 그 흑암을 뚫고 나가는 사람은 왕권을 받는 동시에 죽음을 맛보지 않고 변화 승천하는 축복이 온다. 계9:1이하에 첫째 화는 흑암이 해와 공기를 어둡게 하는데 황충떼 같은 악당이 전갈의 권세와 같은 권세를 받고 나와서 사람을 해치는 데는 이마에 하나님의 인을 맞지 않은 사람만 해하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 화가 올 때에는 인 맞은 종은 하나님의 인을 맞은 종으로서 죽음을 맛보지 않고 남은 종으로 큰 축복을 받게 되는 데는 계시록11장과 같이 큰 역사가 일어나게 된다. 이 종들은 기독교 종말에 완전 역사를 하는 종들로 지상에서 가정적으로 큰 축복을 받을 영적 이스라엘이다. 모든 선지들은 하나같이 이 축복을 바라본 것이다. 첫째아담은 마귀 흑암을 말씀으로 물리치지 못하므로 만물이 저주를 받게 되었고 하나님의 인을 맞은 종들은 마귀 미혹을 이기므로 이 땅에 에덴 축복을 다시 받게 된 것이다.

  사59:18~60장까지를 보면 종말에 원수를 갚는 날에 여호와의 영광이 해 돋는 편에 나타나는데는 여호와의 신을 받고 입에 말씀이 임한 종이 흑암을 물리치고 빛의 역사를 하므로 그 빛을 따라 세계의 열방의 성도들이 동방으로 모여들어 큰 축복을 받는데는 완전한 평화 왕국이 이 땅에 이루어질 것을 가르쳤다.

  계시록에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의 역사가 해 돋는 편에서 나오므로 첫째 화를 피하는 역사가 된다는 것을 계시록9장에 말했고, 그 인의 역사를 받은 14만 4천이 세계를 통치하는 왕권을 누리게 될 것을 계14:1이하에 가르쳤다.

  인간 종말의 완전 역사는 하나님의 인을 맞은 종의 역사가 있으므로 완전한 성도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첫째 화가 오는 것은 하나님의 종들에게 왕권의 축복을 주기 위한 목적이다.

 

  2. 둘째 화가 올 때에 복 있는 자 (계12:13~16)

  지금은 하나님의 교회가 죄악의 세상에서 시련을 받고 있지만 둘째화가 오는 대 환란에서는 예비처에서 양육을 받는 축복이 있다.

  모든 선지들은 하나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기록할 적에 기독교 인류 종말에 복 받을 백성은 피난처의 보호가 있다는 것을 하나같이 말했다. 이날까지는 악자나 선자나 다같이 물과 양식을 주었지만 대 환란이 올 때는 첫째 화를 피하고 증거하던 종들이 가르치던 교회는 하나같이 말씀대로 보호를 받게 된다.

  그러므로 은혜 시대에는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라 네 영혼이 살리라 하는 전도요 변화성도가 전하는 복음은 회개하고 예수를 믿는 사람은 환란 가운데서 하나님의 보호와 양육이 단체적으로 예비처에 있을 것과 온 세계가 불타는 날에 영, 육이 아울러 구원받는 진리를 예언으로 증거하는 것이다. 이 증거를 믿고 따라가는 자는 대 환란이 올 때에 예언대로 예비처에서 양육을 받게 된다. 이것은 단체적으로 보호를 받게 된다(계7:9~17).

  백성 중에 가장 복 있는 사람은 둘째 화를 예비처에서 피하는 자라고 보게 된다(사33:20~24). 영혼 구원은 자녀를 데리고 가는 것이 아니고 내 영혼을 받아 주시옵소서 하는 것으로 끝을 맺지만 셋째 화가 올 때에 복을 받는 가정은 온 가정이 하나같이 환란에서 보호를 받게 된다(사49:16~26). 노아 가정보다도 나은 축복이 환란 가운데서 보호를 받는 가정이라고 보게 된다.

 

  3. 셋째 화가 올 때에 복 있는 자 (계15:1~4)

  인류 역사상 많은 화가 있었지만 셋째 화와 같은 전무후무한 화는 없었다. 계시록16장을 보면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에게 악하고 독한 헌데가 몸에 나게되고 물이 변하여 피가 되므로 물을 먹을 수가 없게 되고 햇빛이 뜨거워 사람을 태우게 되고 캄캄한 흑암이 오므로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이 아파서 자기의 혀를 깨물게 되고 애를 쓰는 광경이 보여졌다.

  이때에 주님께서 지상 강림이 있으므로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 있다고 한 것은 들림 받는 종들의 경고를 듣고 갑자기 회개하고 예비처에 들어간 무리들이 양육을 받고 구원을 받는 광경을 보여준 것이다. 이들은 아무런 공로가 없으나 예언의 말씀을 순종해서 보호를 받고 구원을 받는 자들이다. 지상에 에덴 축복을 그들이 받아 천년 시대에 그 자손이 번창하게 된다.

 

 

6. 믿을 수 없는 일과 있는 일

  인생이라는 것은 누구나 무엇을 믿고야 사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이 믿을 수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를 모르는 사람들이 미로에서 헤매게 된다. 믿을 수 있는 것을 믿고 믿을 수 없는 것을 믿지 않는 것이 완전한 종교라는 것이다. 이제 믿을 수 없는 일과 있는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믿을 수 없는 일

  지금 소위 유물론 과학자는 눈에 보이고 만져지는 것 외에는 믿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흑암이라고 본다. 참으로 알고 보면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것이나 만질 수 있는 것만을 믿는다는 것은 오히려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는 일이라고 본다.

  왜냐 하면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물질은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는 초자연적인 역사를 하고 있는 하나님의 피조물인데 이 물체라는 것은 그것을 믿는 것보다도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신의 역사를 따라서 바로 사용하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예를 든다면 사람을 두고 말하자면 사람의 몸이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요 그 몸을 움직이고 있는 영과 혼이 믿을 수 있는 존재가 된다.

  이와 같이 우주계 안에 있는 만물을 볼 때 만물을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요 만물을 움직이고 있는 신의 존재를 믿을 수 있는 일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들이 물질만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허무한 생활이라고 본다.

  언제나 마귀는 사람을 홀릴 때에 현재 보고 만질 수 있는 일을 가지고 사람의 마음을 끌고 사람의 생각을 끌리게 해서 보이지 않는 장래를 망치게 하는 것이 마귀의 미혹이라는 것이다. 완전한 지혜와 지식이라는 것은 무엇을 보고 만질 적에 보고 만질 수 없는 미래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현재는 좋은 것 같으나 장차는 나쁘다는 것과 현재는 나쁜 것 같으나 장차는 좋다는 것을 아는 것이 지혜와 지식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이것을 구하지 말고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면 모든 것이 다 풍족히 이루어질 것을 말씀했다.

  참된 종교의 빛이라는 것은 믿을 수 없는 것을 믿지 않고 믿을 수 있는 것을 믿는 것을 빛이라는 것이다. 참된 진리라는 것은 믿을 수 있는 것을 가르친 것이니 이것을 믿는 자는 모든 일이 헛되지 않고 전부가 열매가 되는 것이다.

 

  2. 믿을 수 있는 일

  믿을 수 있는 일은 참되신 조물주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밖에는 없다는 것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 진리 신앙 체험이라는 것이다.  믿을 수 있는 신앙이라는 것은 겉으로 볼 때 허무한 것 같으나 실지 알고 보면 정확한 진리라는 것이 확실하되 그 진리를 따라 생활하도록 더욱 확고한 믿음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믿을 수 없는 일은 처음에는 될 것 같으나 실지 체험해 본즉 허무하고 아무 것도 아닌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므로 참된 진리라는 것은 쓴 고난이 있을 수록 그 진리를 더 분명히 깨닫게 되고 자기가 실패할 때에도 그 진리를 더 깨닫게 된다. 참된 진리라는 데는 자아만이 있는 것이 아니고 진리를 말씀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는 생활이므로 항상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는 세계에서 오는 힘을 받고 역사할 때에 모든 일이 물질 밖의 신의 역사로 움직여지는 것을 인격적으로 체험하게 되고 생활에서 체험하는 동시에 모든 활동이 다 신비적인 역사를 힘입어 이루어지는 것이다.

  금일에 많은 사람이 성경을 들고 자기의 신앙 노선을 가장 옳은 줄 아는 자가 많이 있지만 그 옳다는 것도 허무한 일이 많다. 성경은 완전한 역사를 하실 하나님께서 완전한 계약을 기록한 문서이다. 그러므로 그 문서가 어떠한 목적으로 썼으며 어떠한 방법으로 하실 것을 기록했다는 것을 바로 믿을 때에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완전한 승리를 이루게 된다.

  이러한 신앙가에게는 전부가 완전이라는 것을 소유하게 된다. 참되신 진리의 신은 완전한 법이 있고 그 법을 따라서 역사하는데는 그 법대로 될 것을 믿는 자에게 그 법대로 역사하므로써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꼭 같이 그 법을 준행하시는 신이시므로 완전한 평화의 왕국을 이루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40년간 신앙 생활에서 참으로 믿을 것이 하나님 말씀인데는 성경 말씀 본문대로 읽어서 만족히 알게 되고 믿게 되는 동시에 본문 그대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더욱 체험하게 될 때에 믿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으로 하나를 이루게 된 것이다. 기독교는 믿을 수 있는 것만을 분명히 믿게 하는 진리의 종교인 것을 담대히 증거하게 된다.

 

 

 신 앙 문 답

 

【문】1. 지금 많은 신자들이 각자가 자기네 영계가 옳다고 생각을 하고 서로 다투고 싸우는 가운데서 앞으로 어떠한 방면으로 영적 활동을 해야 되는지 구체적인 설명을 듣고자 합니다.

【답】영계 활동이라는 것은 어떤 교파 중심이나 또는 신학 중심에서 일어날 것이 아니고 교파와 신학을 초월해서 새로운 역사가 오므로만이 모든 성도를 한 곳으로 모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든다면 장성하지 못한 어린아이들에게 부모가 무엇을 주면 서로 자기 것이 더 좋다는 식입니다.  

  금일에 기독교는 장부의 영계로 올라가야만 될 것입니다. 교파를 초월하여 십자가를 바로 전하는 교회는 하나같이 중생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러나 중생으로 기독교의 영계 활동이 끝이 아니고 중생 받은 사람이 자라나서 장부와 같은 신앙 단계에 들어가서 철장 권세를 받으므로만이 신앙 장성의 초점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철장 권세의 역사를 받는 단계에 들어가기 전에는 여러 가지 영계의 계급이 차이가 있으므로 하나가 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예를 든다면 높은 산에 올라가는 사람들이 그 길에서 서로 보는 관찰이 다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같은 산이라도 상봉에 올라간 자와 산 중턱에 있는 자와 산밑에 있는 자의 관찰이 맞지를 않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철장 권세를 받는 자는 하나같이 산 위에 올라간 자라야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철장 권세를 받은 영계는 다 통일될 것입니다.

  이제 영계 활동에 대하여 어떻게 하여야 된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1. 진리 활동에 대하여

  이미 십자가를 믿으므로 중생 받은 자들에게 십자가의 도리를 말하는 것으로 전부가 아니고 십자가의 도를 믿는 자로서 앞으로의 여러 가지 난국을 어떻게 돌파해 나간다는 진리를 가르쳐 주어야만 될 것입니다. 이날까지는 죽은 영이 살아나는 것으로써 교회를 일으켰지만 이제는 불가피 오는 환란 재앙 속에서 그 몸이 어떻게 살아서 새 시대 간다는 진리를 정확히 증거하는 진리 운동을 해야만 그 진리 안에서 모든 성도들의 신앙 상태는 완전히 올라가는 역사가 있으므로 하나가 될 것입니다.

  만일 기독교가 지금 이 시국에 몸의 구원론을 가르치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역사는 나리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 하면 하나님은 진리를 따라 역사하는 것이니 기독교는 이제 모든 신자들에게 새로운 진리로써 새 시대로 인도하는 역사가 없이는 도저히 새로운 발전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2. 새로운 교회 운동에 대하여

  현 교계가 새로운 교회 운동이 없이는 도저히 안될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 신학의 부패성

  둘째 : 교권의 부패성

  셋째 : 사업의 부패성

  이 세 가지 부패는 새로운 교회가 나와서 활동하기 전에는 그 부패 아래서 도저히 진리 운동을 바로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왜냐 하면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이 성경과 대적이 되는 교훈이요 교권자들의 소위 행정이라 하는 일들이 성경과 대적이 되고 소위 교육 사업이니 자선 사업이니 하는 등의 사업은 성경과는 대적이 되는 인물들이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촛대교회가 나오므로만이 영계를 바로 잡고 진리를 혼선이 없이 바로 잡아 가르칠 수 있을 것입니다. 진리를 모르는 자들이 주권을 쥐고 진리를 바로 증거하는 종을 대적하는 교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구약 말기에 참된 예언을 하는 종들을 거짓 선지들이 탄압을 할 때에 하나님은 진노하셔서 앗수르와 바벨론을 들어서 예루살렘을 친 것 같이 종말의 환란도 진리의 종이 거짓 선지에게 압박을 받는 환란이 올 때에 하나님의 진노가 나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노의 날에 남은 교회가 되려면 새로운 촛대교회가 나와야만 합니다.

 

  3. 강권 역사가 있어야만 합니다

  강권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권리 행사의 권세 역사를 가르친 것입니다. 원수를 무찌르고 나가는 역사가 아니고는 악한 시대에 도저히 진리를 바로 증거할 수가 없으므로 하나님께서 종에게 권세를 맡겨 재앙으로 땅을 치며 복음을 전하게 하십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적 그리스도의 정권 아래서 찾기 위한 하나님의 강권 역사라고 봅니다. 진노의 날에 종은 하나님이 권세있게 쓰므로써 완전 승리를 이루게 되는 것이니 이것은 지상왕국을 완전히 이루는 권세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말하자면 지금 기독교는 새로운 역사가 오지 않고는 큰 위기를 모면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문】2. 믿음이라는 것은 어떻게 신앙 생활을 하여야 구하는 대로 응답을 받게 됩니까?

【답】믿음이라는 것은 인생 자체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로 난 믿음이라야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믿음이 될 것입니다. 예를 든다면 차를 타고 가는 사람이 그 차 주인이 발행하는 차표라야 그 차를 타고 가는 것과 같이 천국을 향하여 가는 믿음은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께로 받은 믿음이라야 예수를 바로 믿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난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 말씀이 글자 그대로 믿어지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하나님의 신의 역사로 믿음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신의 감동으로 기록된 말씀이 그대로 믿어지는 것입니다. 억지로 믿는 것이 아니고 그 말씀이 믿어지므로 믿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믿게 하므로 믿고 못 믿게 하므로 믿지 않는 것이 아니고 자동적으로 믿어질 적에 죽어도 믿어지는 것입니다.

  예를 든다면 나무 가지가 진액을 받을 때에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고 자유롭게 순이 나고 열매를 맺듯이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신의 역사로 믿어지도록 깨달아지고, 이기고 나가도록 힘이 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을 가진 자는 무엇을 구하든지 하나님의 뜻을 믿는 믿음에서 그 뜻대로 기도가 나오므로 구하는 대로 응답을 받게 됩니다.

  응답이라는 것은 사람이 자기 뜻대로 구할 때에 하나님이 마음을 돌이켜 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믿어지는 사람이 자기의 뜻은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더 존중히 생각이 나고 그 뜻만이 옳다고 생각이 날 때에 그 뜻을 믿고 기다리는 마음으로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부족이 있다 하여도 응답을 내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거룩한 성도의 기도 응답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는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1. 사랑의 불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자체는 사랑인 동시에 불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마음에 사랑의 불이 없다면 하나님의 신의 역사가 떠난 마음이라고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불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마음이 있으므로 그 마음이 즉 하나님과 합치가 된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구하기 전에 마음에 벌써 이루어져 있다고 봅니다.

 

  2. 항상 부족을 깨닫는 마음이 있어야 됩니다.

  이 부족이라는 것은 도덕적이나 율법에 의하여서가 아니요 하나님의 사랑에 의하여 항상 자기 부족을 깨닫는 마음이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보낸 그 사랑, 우리의 죄를 아들에게 짊어지게 하시고 아들을 제물로 주신 그 사랑, 죽기까지 순종한 주님의 사랑, 그 의를 생각할 때에 인간의 어떤 도덕이나 어떤 희생적 생활이 있다 한들 그 사랑에 비할 수가 없으므로 항상 자기 부족을 깨닫는 마음이 있을 적에 하나님의 사랑은 그 마음에서 완전히 역사하는 일이 있게 됩니다. 성신은 이러한 마음을 가진 자와 같이 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3. 강하고 담대한 마음이 있어야 됩니다.

  왜냐 하면 기도는 항상 마귀와 싸우는 생활에서 기도로 승리하는 것이니 기도하는 사람이 원수를 무서워한다든지 또는 자기의 인격 부족을 생각하고 스스로 약한 마음을 가져서는 안될 것입니다. 왜냐 하면 자기의 약한 것을 생각하고 담대치 못할 때에 이것은 하나님을 의심하는 것의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약할 때에 하나님은 더 강하게 역사할 것을 믿고 담대히 구할 적에 마귀는 물러가고 하나님의 역사는 강하게 내리는 것입니다.

  기도라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소원이 성도의 기도를 통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소원은 완전한 사람을 찾는 것보다도 완전한 것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자를 찾으시는 것입니다.

 

 

【문】3. 아무리 일을 하려고 애써도 무슨 일이나 바로 되지를 않고 점점 막막한 일만 생기는 이유는 무엇인지 설명을 듣고자 합니다.

【답】이러한 과정을 거치게 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습니다.

 

  1. 좀 더 부르짖는 기도가 있어야 할 일이라고 생각을 두어야 합니다. 왜냐 하면 하나님은 당신의 종을 기를 때에 어떻게 들어 쓰려는 목적이 있는데 그 종의 인격으로는 도저히 안될 것을 아시고 하나님은 해산의 수고를 다해서 부르짖도록 하는 것은 그 종에게 일할 수 있는 인격을 주기 위한 방법입니다.  

  사람은 너무나 어리석어서 자기가 어떠한 인격을 가져야 하는지 조차도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예를 든다면 지혜로운 부모가 자식을 기를 때에 그 자식으로 하여금 어떠한 인격을 가져야 할 것을 아는 부모가 그 자식에게 자유를 주지 않고 무엇이나 풍족히 주지 않고 그날 그날에 배우는 데에만 지장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지혜로운 부모의 하는 일이라고 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을 기를 때에 완전한 종이 되기 위해서는 그 종이하는 일을 시련 속에 두어서 자기의 자신은 자신이 없게 만들어서 하나님의 주시는 것이 아니고는 나는 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고 부르짖을 적에 홀연히 모든 문제가 해결되도록 역사를 내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므로 종된 자의 인격을 완전히 가지게 되기도 하고 역사가 일어날 때에 교만하지 않고 더욱 겸손한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2. 시련 속에서 순교자의 동무라는 인정을 받게 되므로 환란 중에 역사할 수 있는 종이 되게 하기 위한 목적이니 하나님의 종은 아무런 일이 닥쳐와도 후퇴하지 않고 나갈 때에 난국을 돌파할 수 있는 역사를 그 종에게 주어서 모든 일에 끝을 바로 맺도록 하는 것입니다. 만일 시련을 통과시키지 않는다면 주의 일을 해 나가다가 앞으로 어려운 일이 닥쳐올 때에 그것을 극복하지 않는다면 도저히 안될 환란이 있으므로 종에게 담대한 인격을 이루어 주기 위한 것입니다.

 

  3. 하나님은 권세의 역사를 종에게 주기 위한 것이니 권세 역사라는 것은 막막한 일을 당할 때에 조금도 자기의 인격이나 생활을 가지고는 할 수 없으므로 하나님께 부르짖고 호소할 때에 홀연히 하나님의 역사가 권리 행사로 나타나게 되므로 환란과 재앙 중에서 남은 종이 되게 하는 것이니 우리는 현재에 역사가 있고 없는 것이 목적이 아니요 앞으로 환란 중에서 남은 종이 되느냐 못되느냐 하는 것이 문제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합1:1이하를 깊이 생각을 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종말의 역사를 일으킬 종은 아무런 역사도 없는 것 같이 되게 하고 앞길이 캄캄한 가운데로 이끌어 주시면서 길러 남은 종이 될 인격을 주는 것이니 이것을 알고 용기 있게 나가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문】4.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보려고 애를 쓰다 보면 영광을 돌리는 것보다도 오히려 수치스러운 일을 당하게 되는 것은 무슨 원인인지를 알고자 합니다.

【답】하나님께서는 중심을 보시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 종이 실천을 못했다 하여도 중심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는 마음이 간절하다면 수치스러운 일을 당한다 하여도 그 일이 오히려 영광이 되도록 하는 일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의 종이 이러한 일을 당할 때에 조금도 낙심하지를 않아야 합니다.

  과거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종은 누구든지 인간이 볼 때에 수치스럽고 낙심될 일을 만났지만 거기서 용기 있게 일어날 때에 그를 비소하고 조롱하던 사람들까지라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일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말세의 종은 인간이 볼 때는 지렁이 같이 밟히는 일이 있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가운데서 새 타작기 같이 강하게 일어나게 하므로 새 시대를 이루는 열매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종이 사람에게 칭찬을 받고 대접을 받는 것을 만족으로 아는 것보다는 사람에게 멸시를 받고 박대를 받는다 하여도 중심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참고 나간다면 사람에게 환영과 대접을 받던 자 보다도 더 위대한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현재의 종들이 사람에게 자기의 위신을 세우고 자기의 명예나 영광을 바란다면 이 사람은 앞으로 아무런 역사가 없는 사람이 될 것이로되 아무런 시련이 와도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 중심으로 나가는 자는 하나님께서 그 종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 종을 통하여 끝을 맺는 역사를 하므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 것을 인간이 다 알도록 끝을 맺는 일이 있게 될 때에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외모를 보지 않고 중심을 본다는 것은 중심, 사상이 무엇이냐는 것을 보고 하나님은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문】5. 금일에 너무나 복잡한 일이 많을 때에 교회에 가도 예배가 안되고 도저히 피곤이 오는 것을 감당할 수가 없게 되는데 이 문제를 어떻게 하여야 해결할 수 있습니까?

【답】누구나 그런 환경을 당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나의 체험으로는 복잡한 문제가 닥쳐오는 것을 진리로 해결해야 됩니다. 어찌하여 과거에 없던 문제가 이렇게 닥쳐오는가 하는 것은 선지서나 계시록에서 찾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강단에서 설교하는 사람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변론을 할 때에 말씀 안에서 복잡한 생각이나 마음이 없어지고 말씀의 빛이 마음에 들어올 때에 오히려 감사한 마음이 생기게 되고 새로운 말씀을 통하여 역사가 나릴 적에 예배는 내가 성의가 있으므로 예배를 신령하게 드린다는 것보다도 나는 복잡한 머리를 가지고 교회에 갔는데 그 교회에서 가르치는 말씀을 들을 때에 그 복잡한 문제가 해결되고 은혜를 새로이 받게 될 것입니다.

  신령한 예배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은 나의 힘에 있지 않고 강단에 선 종이 영력이 강하고 말씀이 날카로울 때에 예배를 은혜롭게 드릴 수 있는 힘을 그 종을 통하여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아무 교회나 가서 예배가 되는 것이 아니고 새로운 진리를 바로 가르치고 새로운 역사가 임하는 교회를 찾아가야만 되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마귀가 허락을 받고 나와서 얼마든지 영적 피곤을 주고 있는 때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마귀의 흑암에서 피곤을 느끼는 때입니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시대적인 사명자를 바로 만나야만 영계를 보존하고 새로운 역사를 받으므로 그 종을 통하여 나 자체가 새로워지는 일이 있게 될 것입니다.

  은혜시대에는 개인의 믿음을 지켜나가므로 영계를 보존해 내려오는 일도 있었지만 지금은 단체적으로 호소하고 단체적으로 움직이는 활동이 없이는 앞으로 영계가 올라갈 수가 없고 자동적으로 약해지는 일이 있게 됩니다. 왜냐 하면 변화성도는 단체적으로 들림을 받는 데까지 하나같이 움직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든다면 전쟁이 날 때는 개인적 활동을 취할 수 없는 것 같이 지금은 영적으로 전쟁을 하되 마귀도 최후 발악적인 행동을 하고 나오기 때문에 하나님의 종들도 단체적으로 부르짖는 역사가 있어야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같이 무장을 갖추게 되고 하나같이 역사를 하게 되고 하나같이 승리하므로 하나같이 들림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날까지는 개인적인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은 역사했지만 앞으로는 단체적인 역사를 하기 위하여 역사하므로 교회는 완전한 단체가 이루어진 교회가 되어야 남은 교회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문】6. 현 시국을 위기라 하면서도 실지 생활은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점점 세상으로 치우치게 되는 원인이 무엇입니까?

【답】이것은 믿음이 없다는 것보다도 이 시국에 하나님의 숨은 비밀이 무엇인 것을 분명히 모르기 때문에 그 뜻에 합당하게 살지 못하는 원인이라고 봅니다. 믿음이 식어지는 일이나 생활이 속화되는 것은 그 영적 상태가 올라가지 못하고 정지 상태에 있을 적에 자동적으로 식어집니다. 영적 생활이 새로워지지 못할 때에 자연적 그 생활은 속화를 가져오게 됩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이 시대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움직이지 않은 원인이라고 봅니다.

  이제 이 시국에 대하여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냐는 것을 다음과 같이 알아야 합니다.

 

  1. 조금도 타협이 없어야 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마귀가 얼마든지 참된 종을 침투해 들어올 권리를 가지고 나옵니다. 그러므로 조금이라도 마귀와 타협이 있는 경우에는 그 즉시 영적으로 큰 손해를 보게 되어 도저히 걷잡을 수 없이 영적 상태가 피해를 당하는 동시에 그 생활이라는 것은 자동적으로 세상에 끌리게 되는 것입니다.

  과거에 초대 교회는 영적으로 침투해 들어오는 시험을 위하여 싸운 것이 아니고 이미 마귀 권세 아래서 죽은 영들을 살리기 위하여 복음을 전할 때에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는 자는 그 즉시에 흑암에서 해방을 받고 나오게 되므로 흑암은 물러가고 광명한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서 생활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얼마든지 마귀의 흑암이 우리에게 침투해 들어올 권세를 가지고 나오는 때이므로 조금이라도 타협이 있을 때는 그 영적 상태가 흑암의 침투를 당하여 아무런 빛을 내지 못하고 잠든 상태에 들어가므로 아무런 활동을 못하고 피곤에 빠져 쓰러지게 됩니다.

 

  2. 말씀을 밝히 증거하는 일에 힘써야 됩니다. 왜냐 하면 말씀이 밝지 못하면 자기도 모르게 쑥물을 먹고도 잘못인 줄 모르고 공연히 남을 잘못 판단하는 일도 있게 되고 또는 말씀을 전한다 하여도 남을 잘못 지도할 때에 오히려 죄가 됩니다.

  왜냐 하면 과거는 십자가 하나를 증거하는 것으로만이 그 시대 사명을 다했다고 볼 수 있지만 그 영적 흑암 시대를 만나서 말씀이 무장되지 못한 자는 마귀의 허락 받은 흑암 권세를 물리칠 수가 없으므로 흑암 속에서 자동적으로 영, 육이 피곤해서 아무런 활동을 못하게 되므로 세속으로 흐를 수밖에 없는 타락을 가져오게 됩니다.

 

  3. 각성을 해서 강하게 나서야 됩니다. 예를 든다면 전쟁이 날 때에 군대는 부득불 강하게 나서지 않으면 안되는 것과 같이 지금 이때에 순교적인 사상을 가지고 뒤를 돌아보지도 말고 좌우를 보지도 말고 임박한 진노의 날에 설 수 있는 인격 하나를 찾기 위하여 전심 전력을 다하는 생활이 있어야 될 것입니다.

  하여튼 무엇보다도 자신이 완전 무장을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일과 완전한 촛대교회를 이루기 위하여 노력하는 사람이 될 때에 권세 새 힘을 받게 되므로만이 이 시대에 물들지 않고 나갈 수 있습니다.

 

 

 특  집

 

1. 6월에 대한 성도의 감상

  이 나라 반만년 역사에 가장 비참한 일을 당하게 된 일은 6월 달이 올 때마다 새로운 감상이 떠오릅니다. 난리가 난다는 말은 들었지만 실지에 난리를 당하고 볼 때에 그 전쟁의 비극은 무엇인 것을 직접 체험하게 될 때 앞으로 오는 대 환란이라는 것은 어떠할 것이냐 하는 것은 상상보다도 직접 맛을 보았다고 생각됩니다.

  저는 이북서 6.25동란 전 1년을 앞에 놓고 월남해서 3.8선 4,5십리를 앞에 놓고 개척 전도 사업을 해서 약 1년 동안에 교회를 두곳이나 세우고 아래와 웃 교회를 다 예배를 인도해 주느라고 분주했던 것입니다.

  6.25동란이 나던 날은 일요일이었습니다. 오전에 두 교회를 다 예배 인도를 할 수가 없어서 한 교회는 오전에 보고 한 교회는 오후에 예배를 인도하게 되었습니다. 인제 경찰 소재지에 있는 교회를 오후에 예배를 인도하는 중 그날 새벽에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오후 예배를 드리고 나서니 예배당 앞뒤로 사람이 꽉 찼고 벌판에 빈틈이 없이 사람이 차서 물 밀 듯이 내밉니다.

  이것이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인민군이 지금 내려온다고 하면서 경찰이 민간보다 먼저 도망을 가고 국군까지도 앞서 도망을 가는 일이 있게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경찰을 믿고 치안을 받고 있던 백성들이 경찰들이 앞서 도망을 갈 때에 그 백성들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다 집어 던지고 농장을 버리고 산으로 들로 퍼져서 도망을 해서 살아 보겠다고 남쪽으로 물밀 듯 내려가던 그 모양은 오늘도 눈에 선합니다.

  나도 소위 교역자가 되어 가지고 도망을 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교인들을 데리고 가느라고 하였지만 가다보니 십리 밖에 인민군이 벌써 둘러쌌습니다. 김일성 사진이 벽보에 나붙었습니다. 이북 신문이 돌고 있습니다. 어찌할 수 없이 높은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거기는 산간에 작은 동네가 있는데 거기에 가서 머물게 되었습니다. 밤에 공산당은 벌써 나를 찾아와서 손을 들라는 것입니다. 손을 드니 수족을 꽁꽁 결박을 해 놓는 것입니다.

  이 때는 나는 세상에 더 있을 소망은 없었습니다. 왜냐 하면 1년 전에 이북서 공산당을 없앨 계획으로 비밀 단체를 조직했던 일이 발각되어 야간 도주하여 하나님의 보호로 3?8선을 무사히 넘게 된 것인데 다시 1년만에 공산당의 정치를 받게 되었으니 나는 앞길이 캄캄한 것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주여, 내 영혼을 받아 주시옵소서 하는 기도밖에는 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상하게도 공산당은 나를 가까이 와서 조용히 말하기를 우리 마음이 이상하게 당신을 끌고 갈 마음이 도저히 없으니 우리가 이 산에서 풀어놓아 줄테니 마음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그 동네에 노인 한 분이 와서 하는 말이 공산당이 하는 말이 당신은 어디 가든지 죽을 사람인데 이 사람을 어디로 가나 잘 보아 달라고 했다고 하면서 그 노인은 다른 곳으로 가지 말고 자기네 집에 방 한 칸을 줄테니 어디로 가지 말고 자기네 집에 함께 있으면 자기네 친척이라고 해서 보호를 받도록 해주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곳에서 무서운 동란을 피하게 되고 보니 하나님의 보호라는 것은 원수의 마음도 주님이 주관하고 불신자의 마음도 주님이 주관한다고 깨달았습니다.  

  이 나라가 되어지는 일은 성경에 비추어 보면 6.25 동란으로 지금까지 시대가 변천되는 단계로 들어왔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왜냐 하면 전쟁 상태도 그 후에 세계 인류 전멸이라는 위기로 떨어졌고 정치 난제도 협상 정치를 쓰지 않고는 안될 단계로 들어왔고 사상 문제도 도저히 승부를 보기 어려운 단계로 들어왔고 종교 문제도 그 혼란을 걷잡을 수 없게 되었고 경제에 대한 빈부의 차이점도 도저히 사람으로 수습할 수가 없는 단계로 들어왔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동란이라는 것은 한 번 지나가고 만 것이 아니고 그 동란을 비롯하여 모든 문제가 악화되는 단계로 들어왔다고 봅니다.  우리 나라 사람이 이러한 동란을 겪은 후에 좀더 각성을 못하고 오히려 부패해진다는 것은 6.25동란보다도 더 비참한 일이 있을까 두렵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라도 좀더 심각히 생각을 할 일은 어찌해서 동란 후에 이 세상은 이렇게 모든 일이 변천되어 나가느냐 하는 것을 성서에 입각해서 밝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못하게 될 때는 이 민족의 장래는 더 큰 화근이 올 우려가 없지 않습니다. 이제 6월 달을 당할 때마다 항상 새로운 마음을 가다듬고 6.25를 회상하면서 민족의 장래와 국가의 장래를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

 

 

2. 6.25의 억울한 피와 이 나라에 나타날 역사

  인류 역사의 가장 억울한 피를 많이 흘린 일은 기독교가 세상에 나타나서 발전할 때부터라고 봅니다. 구약 선지 시대에도 억울한 피가 이 땅을 적시는 역사가 없은 것은 아니지만 신약 시대에 와서 네로 황제 박해 때에 흐른 피는 구약 시대에 없던 일이라고 봅니다. 그 후에 쏘련 혁명에서 흐른 피는 네로 황제 박해에 비할 수 없는 피가 흘렀다고 봅니다.

  우리 나라가 반만년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6.25의 억울한 피와 같은 비참한 일은 없었다고 봅니다. 과거의 전쟁이라는 것은 군인이 군인 상대로 싸웠지만 6.25동란은 민간인이 민간인을 죽인 일만 해도 99만 5천명이 초과했습니다. 세계적인 대전이 1차 2차로 일어났지만 피를 많이 흘린 것은 6.25동란이 더 비참했다고 봅니다. 자기 민족이 자기 민족을 죽이고 아직까지 계속한다는 것은 이 민족의 축복이라고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한 중 하나님의 종들이 순교한 피는 동란까지의 끝을 맺은 일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이제에 다시 전쟁이 일어난다면 성서를 비춰볼 때에 억울한 피가 흐를 때가 아니고 억울한 피값을 갚는 주 재림기라고 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에 공산당에게 또 다시 순교를 당하는 때가 아니고 완전 무장을 한 종들이 재앙으로 땅을 치고 나가는 역사가 있게 합니다.

  모든 선지는 하나같이 묵시를 볼 때에 심판기에 북방 세력이 강하게 내려오지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종들을 사자같이 강하게 들어서 쓰므로 북방 세력이 떨며 도망을 갈 것을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전쟁이 난다면 이것은 세계 인류가 큰 재앙을 받는 단계로 들어가는 시기라고 봅니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는 이제 공산당과 협상적인 노선을 걷는다면 재림의 주를 맞이할 수 없고 짐승의 세력과 싸우던 자라야 재림의 주를 맞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때에 6?25 동란 때보다도 더 큰 환란이 온다 해도 담대히 말씀을 증거할 수 있는 권세의 사람이 되는 것을 목적하고 해산의 수고를 다하는 일이 있어야만 될 것입니다. 계7:1~3과 같은 단계에 놓여 있는 우리들입니다.

  우리 사명자들은 6.25동란 때 환란을 겪은 것은 재림의 주를 맞이할 때에 사명 국가로 세우기 위한 하나님의 징계라고 봅니다. 징계를 받은 한국 교회는 6.25동란과 우리 사명이 무엇인지를 알아야만 될 것입니다. 만일 이것을 모르고 잠자는 자리에 있다면 큰 화를 면치 못할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계시록 8장과 9장을 보면 8장이 6.25동란부터 내려온 일을 보여 주었고 이제부터 9장과 같이 화가 오는데는 우리는 어떠한 사명이 있다는 것을 알고 종들 자체가 완전한 무장에 들어가야만 할 때라고 봅니다.

  우리 나라는 6.25동란의 억울한 피를 흘렸지만 이 나라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아시아를 통일하는 역사가 있고서 주님이 강림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단11:40이하를 보면 북방 세력이 중동을 침투해 아프리카와 연결이 될 때에 동북의 소문을 듣고 북방 세력이 번민케 되어 발악적인 행동을 하다가 망하게 될 것을 말했고, 12장에 그때에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때라는 것을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경을 대조해 볼 적에 우리 나라는 분명히 선지 국가의 사명이 이제부터 있다는 것을 사41:8이하나 계시록 10장과 11장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3. 6월 달을 당하여 지도자되는 우리는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심각히 생각을 해야 될 문제를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는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지도자로서 큰 난국을 만났다고 봅니다. 바로 하면 이 나라에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축복이 올 것이고 바로 못하면 큰 채찍이 올 수밖에 없는 것이 난제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들어서 우리나라의 장래를 말하자면 우리나라는 정치인이나 종교인이나 지도자들이 새로운 출발을 가지지 않으면 안될 때가 온 것이 6월 달부터라고 봅니다. 왜냐 하면 5월 달의 선거는 끝났고 이제 새로운 정치를 해 나가야 될 과정의 달에서 다음과 같은 일이 지도자들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1. 이 나라의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알아서 움직이는 방향으로 옮겨져야 할 것입니다.

  왜냐 하면 이 나라는 이제부터 하나님이 새로운 출발을 가지도록 역사할 때가 왔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사람이 애써도 하나님의 새로운 섭리가 나타날 때는 그 뜻에 지도자들이 순종하면 혼란이 없지만 순종치 않을 때는 큰 혼란이 있다는 것이 과거에도 있은 일이지만 이제 오는 일이 더 큰 일이라고 봅니다. 과거에 되는 일은 예언적이라면 우리 나라에서 이루어진 일은 완전히 열매를 맺는 과정에 들어오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성경을 비춰볼 때에 분명히 동방 땅 끝에 자리잡은 이 나라는 지도자들이 새로운 출발을 하지 않고는 안될 때가 왔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나갈 방향은 한 나라를 중심한 것이 아니고 인류적인 문제를 두고 진리 운동을 할 사명이 있으므로 우리 지도자들이 진리를 중심하지 않을 때는 진리를 중심해서 일할 때까지 모든 일은 다 실패로 돌아갈 것입니다.

  남의 나라보다도 우리 나라의 지도자는 역사적인 한 페이지에 기록될 사명이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이 볼 때는 작은 일 같이 보이지만 우리 나라의 지도자들이 멸공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고 단결할 때에 세계를 지도할 큰 위력이 나타날 것입니다.

 

  2. 우리나라의 지도자들은 강하게 사상적으로 단결해져야만 될 것입니다.

왜냐 하면 대적을 짓밟고 나가는 역사가 우리나라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조금도 협상적인 노선에 타협한다면 우리 나라는 큰 재앙이 나리게 될 것입니다. 다른 나라보다도 사명 국가는 조금이라도 협상으로 흐를 때는 하나님은 용서없이 재앙을 나렸다는 것이 이스라엘 선지 국가라면 그 사명의 끝을 맺을 나라가 우리 대한 민국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스라엘의 끝을 맺는 사명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3. 강권적인 역사가 무엇인지를 알고 그 역사를 따라서 움직여야 할 것입니다.

강권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위급한 일을 당할 때에 당신의 사람을 들어서 신과 같이 써서 인간 악의 세력이 그 앞에서 떨게 하는 동시에 순종하는 자에게 특별한 역사가 임하여서 초자연적인 신의 역사도 조속한 시일내에 이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악한 자가 강권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선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의를 이루기 위하여 강권으로 하는 것이니 누구든지 여호와를 바라보는 자라면 하나님의 강권 역사가 그를 다스리게 될 때에 하나님의 의가 완전히 세상에 나타나게 되므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 있게 됩니다. 이제부터 우리 나라는 강권 역사가 나타나므로만이 인생의 모든 문제도 영, 육간 해결될 것입니다.

 

 

4. 71년 6월을 맞이하는 사명자의 기도

  택한 자의 원한을 풀어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여, 6월을 맞이하여 나의 부르짖는 기도를 들으시고 성도의 피의 호소의 원한을 이루어 주실 줄 믿고 감사하나이다. 하나님 앞에 우리 나라가 무서운 징계를 6.25 동란으로 받은 지도 25년을 지나고 71년을 맞이하는 6월의 눈물겨운 심정 금할 수 없나이다.

  불법적으로 남쪽을 향하여 아무런 이유없이 모든 사람을 죽이며 남침을 하던 북방의 적 그리스도의 세력은 이전보다도 더 강해졌나이다. 어찌하여 우리 사명자들은 이렇게도 피곤하고 약해지고 하나가 되지를 못하고 오히려 대적을 물리치는 것보다도 대적 앞에 머리를 숙이고 협상을 할 단계로 들어가게 되나이까. 이날까지 하나님만 아시게 눈물 흘리며 기도는 하였지만 어찌하여 점점 더 지렁이같이 밟히고 신접한 자 같이 인정을 받게 하시나이까. 아무리 생각을 해 보아도 인간 머리 속에는 복잡한 일을 면할 수가 없나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 25년간 되어진 일은 전부가 아버지께서 모든 선지에게 인간 종말에 될 일을 묵시로 기록하게 하신 그 말씀대로 이루어졌나이다. 북방 세력을 인력으로 막을 수 없게 된 것도 아버지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요, 교회의 부패를 인력으로 막을 수 없게 된 것도 아버지 말씀이 이루어진 현실이오며 인심 악화, 경제 혼란이 닥쳐온 것도 아버지 말씀이 이루어진 증거입니다.

  이때를 당하여 동방 땅 끝의 작은 사람 하나에게 입에 말씀이 임하므로 그 진리 운동이 다시 예언을 하는 일이 되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를 세계가 알게 되는 빛의 역사가 동방 바다 옆에서부터 크게 외치게 된다는 말씀도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을 믿사오며 동방 땅 끝의 한 민족이 종말의 이스라엘이 되어 세계 통치의 왕국이 이루어진다는 말씀도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나이다. 아버지께서는 진리의 신이오니 진리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이 날에 내가 당하는 난국인줄 믿나이다.

  아버지여, 진리를 분명히 내 입을 통하여 말하게 할진대는 이달부터 육.육.육의 세력을 완전히 이길 수 있는 일곱 영의 완전 역사를 나리시옵소서. 악마의 세력이 일어나는 것도 아버지의 말씀대로 되는 일일진대는 동방 땅 끝 이 나라에서 악의 세력을 짓밟고 나가는 일도 어찌해서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겠나이까.

  지금 미친 짐승같이 북방 세력은 재침을 꿈꾸고 있지만 아버지 말씀대로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나라에 나타나므로 북진하게 될 것을 믿나이다. 하나님이여, 이 나라의 정권도 하나님의 장중에 있사오니 정치인들에게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도록 역사를 나리사 이 나라 민족들이 깨닫도록 강한 역사를 나타내시옵소서. 이날까지는 잠잠히 시대의 비밀을 제게 알려 주셨지만 전 국민이 다 각성하도록 역사를 나타내시옵소서.

  복 받을 사람은 깨닫게 하시며 원수의 세력은 떨도록 역사할 줄 믿나이다. 하나님 아버지여, 진리를 보내신 아버지여, 진리대로 이 민족 위에 역사하시며 축복을 나리소서.

 

 

5. 새일수도원의 기쁜 소식

  1964년 9월 24일 오전 3시에 홀연히 하늘로 강한 벼락불이 쏟아져 계룡산을 덮고 불 속에서 음성이 들려오기를 새일수도원을 오늘부터 시작하라는 명령을 받은 지도 7년이 되었습니다. 계룡산에 기도하러 갔던 사람이 갑자기 단돈 2천원을 가지고 수도원을 그날부터 떨리는 마음으로 시작을 할 때에 너무나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나 물질로나 애로가 많이 있어서 약한 이 사람이 수도원을 건축했지만 천장과 위의 지붕이 완전히 못 되어서 그 동안에 다시 수리하지 않으면 안될 형편에 있게 되었습니다.

  나무를 적게 들인 천정과 지붕은 무너질 형편에 있었지만 일전에 공사비를 준비치 못하고 있던 중 어떤 종님들의 기도 중에 홀연히 천장과 지붕을 수리하게 되었습니다. 약 30만원의 돈을 들여 천정은 완전 고급 천정을 하게 되고 지붕도 완전히 다시 수리되므로 새일 수도원 건물은 완전한 수리를 하므로 수도하는 종님들에게 괴로움을 주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5.15를 기하여 인간의 종말이라는 책자를 하나님께로 받아 기록하라는 명령을 순종하여 원고를 작성 중에 있습니다. 이 책은 외국어로 번역하여 보낼 예정입니다. 누구든지 이 책을 읽어보면 인간의 종말이 어떻게 된다는 것을 세밀히 알게 되었습니다. 이 책 출판에 대하여 사명 동지 여러분들은 기도 많이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또는 새일 성가집을 다시 출판하되 곡보 성가를 내고자 합니다. 그 동안에 새로 성가가 온 것이 호소 성가, 애족가, 3.1용사가, 멸공용사가가 나왔으므로 6, 7장이 더 부가되게 되었습니다. 부득불 출판을 하려면 여기도 여러 사명자의 돕는 기도가 있어야만 되겠습니다. 특히 호소 성가가 5월 20일 아침까지 왔는데 이 성가는 누구든지 속히 기도 호소문으로 사용하여야 될 성가이므로 조속한 시일 내에 새일 곡조 성가가 재판될 예정입니다.

 

    사명자 호소문 (57장)

  1. 사랑이 식은 우리 맘에 불을 줍소서

     사랑의 불길 줘야 합니다.

     눈물 흘려 외칠 힘 주소

     주셔야 됩니다. 오늘에 주옵소서

 

     < 후렴 >

     여호와여 들으소서 우리의 호소를 들으시고

     권세의 새 힘을 우리에게 주옵소서

     주셔야 합니다. 나리소서

 

  2. 포로가 되어 갇힌 자를 놓아 줍소서

     저들은 울고 있습니다.

     철장권세 우리게 주어

     해방을 시키게 하시어 주옵소서

 

  3. 쑥물을 먹고 죽은 양떼 살려줍소서

     저들은 몰라 흑암에 빠져

     갈팡 질팡 하고 있어요

     말씀의 권세를 우리게 주옵소서

 

  4. 피곤에 잠겨 쓰러진 자 새힘을 나려

     사슴과 같이 뛰게 합소서

     용기있게 저산을 넘어

     다함께 왕권을 받게 해 주옵소서

 

    사명자 호소문 (51장)

  1. 천지 만물 지은 여호와 우리 위에 나타나서

     여호와만이 참 신인줄 알게하시사

     우리의 자랑 되게 하시어 주옵소서

 

     < 후 렴 >

     여호와여 일어나사

     우리 나갈 길을 인도하시어 주셔요

     그 큰 권세를 행하시어

     할렐루야 영광 하나님께 돌려 줍소서

 

  2. 무소 불능 하신 여호와 우리들을 도우시어

     완전 승리로 온 세계를 정복케 하여

     다윗의 왕국 평화의 왕국 이루소서

 

  3. 사랑 자체되신 여호와 우리들을 안으 시사

     길러주셔요 푸른 새순 아껴주셔요  

     순의 역사를 열매 맺게 해 주옵소서

 

  4. 진실 무위하신 여호와 말씀대로 우리들을

     살려 줍소서 진실하신 여호와여

     진리 안에서 완전 승리를 주옵소서

 

    시대적인 사명자의 호소문 (53장)
                        (71년 5월 20일 5시 30분)

  1. 나는 할 수 없어요 능력 줍소서

     천지를 창조한 여호와여 능력 줍소서

     안 주시면 이길 수 없소

 

     < 후렴 >

     천하를 정복할 권세능력 내게 줍소서

     주셔야 왕국이 이루겠나이다

     강한 마귀 내 앞길 막고 있어도

     승리할 줄 믿습니다

 

  2. 나는 지혜없어요 지혜 줍소서

     천지를 창조한 여호와여 지혜 줍소서

     안 주시면 미혹받아요

 

  3. 나는 권세 없어요 권세 줍소서

     천지를 창조한 여호와여 권세줍소서

     안 주시면 쓰러집니다

 

  4. 나는 가난합니다 축복 줍소서

     천지를 창조한 여호와여 축복 줍소서

     안 주시면 살 수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