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례 (1972년 3월호)

설  교  편

 1. 예언을 지켜야 복 받을 때 (계1:3) 

 2. 난국을 돌파할 기도의 힘 (눅21:36, 계8:3~5)

 3. 하나님의 구원의 확실성 (사45:18~25)

 4. 순종의 걸음을 걸어가신 예수 (요18:1~11)

 5. 그리스도 안에서 남녀의 차이점 (딤전2:8~15)

 6. 인간 종말의 큰 환란과 회개 운동 (슥12:1~14)

 7. 택한 자를 위한 천사의 역사 (마18:10) 

 8. 제단의 응답과 역사 (눅1:8~17)

 9. 택한 자의 산 믿음 (요10:22~29) 

10. 의인이 믿음으로 살게 될 때 (합2:4~14)

11. 주 재림을 맞이할 자의 생활 방침 (눅17:22~37) 

12. 재림을 증거하는 예수의 고난 (마26:57~68)  

13. 제일로 영광스러운 일 (요12:27~33)

14. 인류 종말에 악의 역사는 무엇인가 (계9:6~11) 

 

장년 공과편 - 인간 종말의 큰 미혹을 벗어날 길

제1과  끝까지 참는 길 (마24:10~14) 

제2과  옳은 스승을 따라가게 되는 길 (사30:18~29)

제3과  목숨을 아끼지 않고 나가는 길 (계12:7~11)

제4과  양육 받는 길 (계12:13~16, 13:11~18) 

 

어린이 공과편 - 요한계시록 공부 

제1과  속히 될 일을 보여준 천사들 (계1:1, 22:6~9) 

제2과  밧모 섬에 있는 요한 (계1:9~12)

제3과  만왕의 왕으로 나타나신 예수를 본 요한 (계1:12~20)

제4과  하늘 보좌의 광경을 본 요한 (계4:1~4)

 

논 설 편

1. 삶을 바라면서도 죽음의 길을 가는 생활

2.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면서도 더러워지는 생활

3. 약한 것을 깨닫게 될수록 강한 인격 

4. 사랑이 좋으나 죽는 사랑

5. 작은 일 바로 하는 것은 큰 일을 할 원동력

 

신 앙 문 답

1.지금 새일수도원에서는 약 7년이 지나도록 40일 금식이 계속되어 금식한 사람이 450명이나 된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것은 무슨 이유로 되는 일입니까?

2.아름다운 소식의 월간지를 이뢰자 목사님이 수도 학과를 가르치면서 독단적으로 발행한다고 하셨는데, 이것이 도대체 어떻게 되는 일인지 알고 싶습니다 

3. 지금 많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새일수도원에 가서 무장을 해야 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무장이라는 것은 무엇을 뜻한 것입니까? 

4.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어떤 노선이라야 종말을 바로 맺을 수 있다는데 대하여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특    집

1. 3월 1일을 맞이하는 사명자의 말 

2. 3월을 맞이하는 사명자의 기도 

3. 3월에 부르짖는 민족의 소리 

※알리는 말씀 

 

 

 

 

 

 

 

 

 설 교 편

 

예언을 지켜야 복 받을 때

- 계 1:3 -

 

  기독교는 때를 따라 비밀을 증거하고, 때를 따라 그 비밀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하는 것이 사명이다. 오늘날 우리가 깊이 알아야 할 것은 지금이 예언을 지켜야 복 받을 때라는 것이다. 만일 어떤 종이 예언을 지켜야 복 받을 때가 왔다는 것을 모른다면 모든 것이 다 허공을 치는 생활이 되고 말 것이다.

  이제 예언을 지켜야 복 받게 되는 것은 어느 때이냐 하는 것을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1. 붉은 세력이 허락을 받고 나오게 되는 때이다 (계6:3~4)

  하나님께서 오늘날 붉은 세력을 허락하신 것은 누가 예언을 지키나, 못 지키나 시험해 보는 때이기 때문이다. 에덴 동산에서 간교한 옛 뱀을 허락하여 말씀을 지키나, 지키지 않나 시험을 해 보았던 것과 같이 지금도 붉은 세력을 허락해 화평을 제하고 서로 죽이게 하는 것은 누가 예언의 말씀을 지키나, 지키지 않나 시험을 해보기 위한 방법이다. 다시 말하면 이것이 즉 심판하기 위한 하나님의 모략이다.

  그러므로 금년부터 붉은 말과 협상하는 일이 세계적으로 시작되는 것은 심판기가 온 징조이다. 검은 말이 아무 것도 모르고 나왔다가 오히려 얼룩말에게 먹힘을 당하는 시기가 온 것은 잠시 후에 심판기라는 것을 계시록 6장이 증거하고 있다. 잠깐이라는 이 기간은 시험을 해보는 때이니 누구든지 이 땅에서 재앙을 면코 복을 받으려면 계시록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을 지켜서 붉은 말과 협상을 하지 않아야만 된다.

  우리가 금년부터는 예언의 말씀을 지켜서 복 받게 하는 일에 전력을 두어야 할 것이다. 먼저 우리 나라가 국민들까지도 예언의 말씀을 지켜서 붉은 말과 싸우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 만일 이때 붉은 짐승 세력과 싸우는 일을 버리고 협상을 하게 된다면 하나님의 심판은 반드시 협상하는 자들에게 오게 될 것이다.

 

  2. 흑암이 온 땅을 덮게 되는 때이다 (계9:1~3, 사60:1~3)

  하나님께서 흑암을 개방시킨 것은 예언의 말씀을 바로 증거하는 종을 남은 자가 되게 할 목적이다. 이사야 60장에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라. 보라, 어두움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우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열방은 네 빛으로 열왕은 비취는 네 광명으로 나오리라”고 한 것은 사59:18~21을 보아서 동방 사람의 입에 말씀이 임하는데 이 말씀으로만 어두움을 물리칠 것을 뜻한 것이다.

  계9:1이하에도 무저갱에서 올라온 연기가 해와 공기를 어둡게 하는데 그 가운데서 황충이가 나올 때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마에 하나님의 인을 맞지 아니한 사람만 해하라고 한 것은 예언의 말씀으로 무장한 종이라야 피해를 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친 것이다.

  지금은 마귀 미혹의 흑암이 온 땅을 덮은 때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눈이 어두운 사람은 이때가 흑암시대라는 것을 모를 것이로되 눈이 밝은 사람은 마귀 미혹의 흑암이 온 땅을 덮고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러므로 이 흑암이라는 것은 예언의 봉홧불을 들지 않고는 절대로 물러가지 않는다.

  이날까지 기독교의 역사는 자범죄로 말미암아 흑암에 빠져 있는 영들을 빛의 나라로 옮겨 놓는 일에 목적을 두었던 것이다(골1:12~14). 그러나 지금은 빛의 나라로 옮겨진 하나님의 자녀를 마귀 흑암으로 한번 미혹을 해보는 때이다. 그러므로 이사야 60장이나 계시록 9장의 흑암은 하나님의 자녀를 미혹해 보는 흑암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지금 이 흑암 세력은 마지막 시험인데 예언을 지키면 흑암을 이기는 것이요 지키지 않으면 흑암에 빠지는 것이다.

  그러면 어떠한 사람이 전하는 말을 따라가야 흑암을 물리칠 수 있느냐 하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된다. 지금 많은 사람이 종말관을 들고 나왔지만 그 증거하는 바가 하나님 말씀에 맞지 않으면 자체가 흑암에 빠지는 것이다(사8:20~22).

 

  3.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이다 (계22:6~7)

  지금이 주 재림기라는 것은 다음과 같이 성서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첫째 : 북방 세력을 인력으로 막을 수 없으므로 주 재림기로 본다.

  단11:40~12:3을 보면 북방 세력이 회리바람 같이, 물이 넘침같이 중동으로 내려올 때는 주님 오실 때라는 것을 가르쳤다. 어느 선지나 하나같이 북방 세력을 인력으로는 도저히 막을 수 없을 때에 주님께서 재림하실 것을 말했다.

  둘째 : 거짓 선지가 많이 일어나 미혹하므로 주 재림기로 본다(마24:11~13).

  지금 거짓 선지가 교권을 쥐고 참된 종들을 탄압하며 교회에 침투하여 양떼들을 협상주의로 끌고 들어가는 일이 있으므로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라고 본다.

  셋째 : 다시 예언하는 일이 나타났으므로 주 재림기로 본다(계10:11).

  지금은 이사야서나 모든 소선지서를 본문 그대로 읽어서 증거할 때가 왔고 계시록을 그대로 읽어서 증거할 때가 바로 이때이다. 이러한 때가 왔으므로 성경을 다 알게 되었고, 모든 성경을 증거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사람이 1958년 3월 19일에 요한 계시록의 해석을 받아 기록한 후 15년간 성경을 읽어본 결과 계시록과 선지서는 주석이 필요 없고 본문 그대로 읽어서 이 시대를 말할 수 있고 얼마든지 앞으로 환란 가운데서 구원받는 진리를 증거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이때는 분명히 주 재림기라는 것을 증거하게 된다.

  이제 우리가 거짓 선지의 미혹을 이기려면 성경 본문을 조금도 가감없이 그대로 읽어서 변론하면 되는 것이다. 이 사람에게 1964년 9월 24일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와 나를 덮고 불 가운데서 “뢰자” 라는 이름을 주시면서 새일수도원을 짓고 변화성도를 일으키는 일을 하라고 하시면서 이 수도원에 다시 예언의 서책이 올 것을 말씀하셨는데, 그 때부터 7년이 되는 오늘에 얼마든지 이 사람의 입술로 다시 예언의 말씀을 증거할 수 있는 문서 운동이 본격적으로 나오게 된 것은 주 재림기가 임박한 증거라고 본다.

  계22:17이하를 보면 성령과 신부가 말할 때에는 듣고 가하여도 감하여도 재앙을 받는다고 한 것은 재앙이 올 때에는 신부 자격을 가진 자에게 성령의 말씀이 입에 임하여 증거할 것을 말씀한 것이다. 이것을 보면 성경이라는 것은 사람이 알 수 없고 성신이 알게 해주므로만 바로 증거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사람이 지금 얼마든지 입으로 불러서 책자를 내는 것은 성령의 말씀이라고 확신하는 바이다.

 

  결    론

  지금은 예언의 말씀을 지켜야 복 받을 때가 분명하다. 그러므로 모든 종들은 금년부터 하나같이 예언의 봉홧불을 높이 들고 나서야만 될 것이다. 양떼를 살리려면 예언을 밝히 증거하라! 그러면 증거하는 자도 복을 받고 듣고 지키는 자도 복을 받게 될 것이다.

 

 

난국을 돌파할 기도의 힘

- 눅 21:36, 계 8:3~5 -

 

  우리는 난국을 당한 성도로서 어떻게 하여야 이 난국을 돌파하느냐 하는 것이 자나깨나 잊지 못할 문제가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난국을 돌파할 힘은 기도에 있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기도하고 있지만 어떠한 기도라야 난국을 돌파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을 모른다면 기도하다가 낙심하는 사람이 되고 말 것이다. 이제 난국을 돌파할 기도의 힘에 대하여 성경을 들어서 다음과 같이 증거한다.

 

  1.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는 힘이다 (눅21:36)

  교회에 다니는 사람 중에서 처음에는 열심히 기도하다가 어려움이 오게 되면 기도를 하지 못하고 쓰러지고 마는 사람이 많이 있다. 오늘날 교회에 다니는 신자들이 사랑이 식어졌지만 이 사람들도 과거에는 열심히 기도하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끝까지 기도하는 힘을 가지고 깨어 있는 자가 아니고는 모든 난국을 돌파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택한 자들에게 난국을 당하게 하는 것은 세세 왕권의 영광을 주기 위한 목적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어려움이 온다 하여도 거기서 기도의 힘을 더 얻고 각성을 하는 자라야 난국을 돌파할 기도의 힘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이라는 것은 무조건 준다는 것이 아니요, 끝까지 참고 나가는 자에게 왕권의 영광을 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참으로 믿는 자라면 어려움이 올 때에 보통 때보다도 더 기도에 힘쓰며 각성을 하게 된다. 예를 든다면 큰 광산을 하는 사람이 어느 장소에 광석이 있다는 것이 확실히 발견될 때에는 밤낮 쉬지 않고 뚫고 들어가는 일을 하게 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예수를 믿으므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보다 좀더 들어가서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종이 되려고 한다면 어려움이 온다 하여도 참고 기도하면서 그 인격을 이루려고 노력할 것은 사실이다. 왜냐 하면 어려움이 와도 왕권 받을 일을 한 자라야 주 앞에 설 수 있기 때문이다.

  세세 왕권을 바라보는 사람이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는 것은 소망이 넘치는 기쁨에서 되는 것이다. 오늘날 하나님의 종들이 기도에 힘을 잃어버리고 잠자는 상태에 있게 된 원인은 주 앞에 설 때에 상 받을 일을 중심 하지 않고 사람 앞에 보이려는 것을 목적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다시 말하면 사람을 중심해서 일하는 사람은 자기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을 적에 힘이 빠지고 낙심하는 일이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 앞에 바로 보이려고 일하던 사람은 난국이 올 때에 더 각성을 하게 되는데 이것은 소망의 확실성을 가졌기 때문이다.

  오늘날 어려운 난국을 당하였지만 재림의 주를 사모하는 자는 기도의 힘을 더 얻게 될 것이요 각성을 하게 될 것이다. 만일 지금 각성을 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오는 난국을 돌파할 수 없고 주 앞에 설 수 없다는 것을 심각히 생각하고 깨닫게 될 때에 자동적으로 강한 기도를 하게 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우리 사람이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는 것 외에 다른 것은 할 수도 없고 해야 할 책임도 아니다. 왜냐 하면 기도라는 것은 내가 할 수 없는 문제를 놓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 합해지는 기도의 힘이다 (계8:3~5)

  기도라는 것은 합해져야 큰 일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왜냐 하면 세계 통일에 평화왕국이라는 것은 한 사람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요 왕권 받을 종들이 합해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에 모든 선지와 사도와 성도들의 기도와 우리 기도가 합해지므로만 종말의 난국을 돌파할 수 있는 것이다.

  종말의 난국이라는 것은 붉은 용과 짐승의 정권과 거짓 선지의 세력을 사람의 힘으로 막을 수 없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계시록 13장을 보면 인간 종말에 어떠한 난국이 온다는 것을 보여줄 때에 용은 짐승에게 큰 권세를 주고 짐승은 거짓 선지에게 권세를 주어서 세계를 다 자기의 세력 앞에 굴복하게 한다고 하였다. 이것이 기독교 종말에 환란이다.

  그런데 계시록 8장을 보면 일곱 천사가 일곱 나팔을 불 때에 다른 천사가 제단 곁에 서서 금 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는데 이것은 모든 성도들의 기도와 합하여 보좌 앞 금단에 드리려고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 앞으로 상달됨에 따라 땅에는 무서운 뇌성과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난다고 한 것은 마귀 세력을 없이하는 심판을 뜻한 것인데 성도들의 원한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우리의 난국 돌파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원수를 갚아 주므로만 해결된다. 이날까지 원수에게 핍박을 받고 그 가운데서도 죽기까지 싸웠던 자들의 기도와 현재 원수에게 압박을 받고 해방을 받고 핍박을 받는 종들의 기도가 합해서 진노의 심판이 오므로 이 땅에 성도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이 일곱째 나팔을 불 때라고 하였다. 모든 난제 해결은 여호와께서 해주시겠다고 미리 언약을 세우셨으니 우리는 기도할 것 뿐이다.

  성도가 기도할 호소 성가가 이 미약한 사람을 통하여 20장이나 온 것은 하나님께서 기도에 큰 힘을 주시는 동시에 그 기도대로 모든 난제를 해결시켜 주실 것이 확실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난국이 올 때에 두려워할 것도 없고 원망할 것도 없고 낙심할 것도 없이 언약의 말씀대로 행하시는 하나님 앞에 부르짖는 호소를 올릴 것 뿐이다.

  새일 성가라는 것은 난제 해결의 기도문이며 승리의 노래이다. 지금 우리가 난국을 돌파하려면 합심하여 호소 기도 성가를 우렁차게 올려야만 될 것이다. 왜냐 하면 너무나 마귀 세력이 강하게 일어나므로 개인의 기도로는 어찌할 수 없고 합심 단결하여 호소하는 것이 있어야만 난국을 돌파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    론

  가장 강한 것은 인간의 어떤 무력이나 정권이 아니요 성도의 기도라고 본다. 우리가 7년간 금식기도를 하면서 호소한 일은 천하를 정복할 위력이 될 것이다. 왜냐 하면 새일수도원에서 420명의 40일 금식자가 이미 기도했고 현재도 30명이 40일을 금식을 하면서 합심하여 호소하고 있는 것은 난국을 돌파할 위력이 될 것은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확실성

- 사 45:18~25 -

 

  하나님께서는 택한 자를 구원하시되 확실성이 있는 말씀을 세우시고 말씀에 따라서 하시는 것이다. 구원에는 영적 구원도 있고 몸의 구원도 있는데, 완전한 구원이라는 것은 영, 육이 아울러 받는 것을 가르쳤다.

  이제 구원의 확실성에 대하여 본문을 들어서 증거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의를 말하고 정직을 고하심 (19)

  하나님의 의라는 것은 인간을 구원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자면 힘이 있는 사람이 힘이 없어 쓰러져 죽게 된 사람을 보고도 그대로 지나간다면 그 힘이 있는 것이 오히려 불의한 것이 될 것이다. 힘이 없어서 구원하지를 못했다는 것을 불의라고 할 수 없지만 힘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남을 구원해 주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불의가 된다. 그러나 그 힘을 가지고 쓰러져 죽게 된 사람을 구원해 준다면 이것은 의가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무소불능의 역사를 가지셨으므로 택한 자를 구원하시되 자기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환란에서 하나님만 바라보면 구원해 주겠다고 말씀하신 것이 의를 말한 것이다. 그리고 정직을 고한다는 것은 조금도 거짓이 없는 하나님께서 당신이 행하실 것을 말씀한 것이다.

  그러므로 과거에 바벨론에게 먹힘을 당한 예루살렘을 고레스를 통하여 복구하도록 하신 것과 같이 인류 종말에도 자기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난국을 당한 백성들을 동방 사람을 들어서 구원해 주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구약 때에는 말씀대로 동방 사람을 들어서 예루살렘을 복구했고, 인간 종말에도 동방 사람을 들어서 당신의 백성을 환란에서 구원해 줄 것을 말씀한 것이 정직을 고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의와 정직을 고한 것이 즉 언약의 말씀이다.

 

  2.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심 (21)

  하나님께서는 공의를 먼저 말씀하시고 다음에 사랑을 말씀하셨다. 공의를 사람이 행할 수 없으나 하나님께서 행하시므로 구원해 준다는 것이 구원의 확실성이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공의를 말씀했다 하여도 친히 행하시는 일이 없다면 공의를 행할 수 없는 인간에게 하등 필요가 없다.

  예를 든다면 어떤 사람이 구렁텅이에 떨어진 사람보고 빨리 올라오라고 말만 해 놓고 도와주지 않는다면 이 사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물에 빠진 사람에게 네가 정신을 차려서 밖으로 나오라고 했다는 것도 아무런 필요가 없는 말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 앞에 범죄한 인간들이 죄의 구렁텅이에 떨어졌고, 죄악의 물결에 빠져서 도저히 벗어날 수가 없는데 하나님께서 죄를 짓지 말라고 하는 말씀만 하시고 죄를 사해 주는 일을 하시지 않는다면 죄에 빠진 사람들에게는 그 말씀이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의 힘으로 벗어날 수가 없는 어려운 환란이 왔는데 네 힘으로 이겨 보라고 하는 말은 하등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환란 가운데서라도 구원해 주시겠다는 말씀을 하시고, 그대로 구원해 주는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영이나 육이나 다 인생 자력에서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공의를 행하시므로만 구원을 얻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이 행하겠다고 친히 말씀해 놓은 것이 즉 언약의 말씀이니, 우리는 그것을 믿고 순종할 것 뿐이다.

  인간의 죄악을 걸머지시고 친히 죽음을 맛보신 예수님께서 공의를 완성하셨으므로 모든 영들이 구원을 받게 되었고, 재림의 주가 오실 때에는 인간의 힘으로 벗어날 수가 없는 환란에서 당신의 백성을 구원해 주시는 것이다.

 

  3. 맹세를 세우시고 행하심 (22~25)

  하나님께서 누구를 두고 맹세할 수가 없으므로 자기를 두고 맹세를 하시고 그대로 행하시는 것이다. 아무리 맹세를 했다 하여도 행할 능력이 없다면 그것은 무효가 되고 만다. 만일 하나님께서 맹세를 세우시고 그대로 행하시지를 않는다면 그 말씀은 전부가 거짓이 되므로 아무런 권리를 행하실 수 없을 것이다. 왜냐 하면 맹세대로 행하면 권세가 있는 것이고 맹세대로 행하지 못하면 권세가 상실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맹세하시고 그대로 행하시는 권세 아래서 여호와를 자랑하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어떤 아버지가 맹세를 세우고 그대로 행하지를 못한다면 그 자녀들 앞에서 주권이 상실되므로 권세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맹세대로 행하시는 무소불능의 역사를 가지신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그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고 자랑하게 되는 것이다.

 

  결    론

  세상에 확실한 것이 많이 있다 하여도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과 같은 확실성은 없을 것이다. 왜냐 하면 이 구원은 조물주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대 자연을 창조하실 때에 무엇이나 사람들이 스스로 행할 수 있게끔 하신 것이 아니요, 전부가 다 당신이 행하므로만 되게 하시고 사람은 그 역사에 따라서 순종하므로만 모든 일을 완성하도록 하신 것이다.

 

 

순종의 걸음을 걸어가신 예수

- 요 18:1~11 -

 

  첫째아담이 순종치 않았으므로 모든 인류가 타락하였고, 둘째아담 예수가 순종하시므로 모든 인류를 구원하게 되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셔서 걸어가신 길에 대하여 깊이 알아야 할 것을 본문으로 증거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숨기지 않고 자원하신 길 (1~5)

  예수님께서는 원수들이 당신을 죽이기 위하여 잡으려고 왔을 때에 조금도 숨기지 아니하시고 “내가 너희들이 찾는 나사렛 예수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만일 주님께서 어디에 숨어 있다가 원수들에게 잡혀갔다면 그 때부터 만민을 대속하는 제사가 될 수 없다. 왜냐 하면 억지로 진 십자가이니 죽었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제사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가 나사렛 예수이니 나를 잡아가라”고 하는 자원심을 가지고 나섰으므로 이 때부터 사상적으로나 중심적으로 마귀를 이기는 시간이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 일이 올 때에 담대히 나가지 못하고 변명을 한다든지 도망을 간다든지 한다면 그 시간부터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평안하다고 자원하고 괴롭다고 원치 않는 것은 순종하는 종의 생활이라고 할 수 없다. 괴로운 일이라도 주의 뜻이라면 자원하는 마음 있어야 되고, 아무리 평안하더라도 주의 뜻이 아니라면 원치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하나님 앞에 왕권을 받을 사상과 중심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중심에 주를 위하여 괴로움을 받는 것을 싫어한다면 주님의 십자가와 방향이 다르기 때문에 아무리 기도한다 하여도 응답을 받을 수 없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에 주님을 위하여 수고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구하여야만 일할 수 있는 능력이 오게 되는 것이다.

  만일 어떤 종이 원수를 피해서 숨어 있다가 잡혀 죽었다면 왕권 받을 만한 사상과 정신이 아니므로 이것은 순교라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계6:9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억지로 죽은 사람들이 아니고 불타는 마음으로 말씀을 증거하다가 죽은 자들을 가리켰다.

  괴로움이 우리 앞에 닥쳐올 때에 이것을 피하려고 하지 말고 이기고 나가려고 하는 사람이라면 더 큰 환란이 온다 해도 승리할 수 있는 강한 힘을 주님께서 주실 것이다. 주님께서 자원해서 고난을 받으셨으므로 주의 능력은 괴로움을 자원하는 자에게 오게 될 것은 사실이다.

 

  2. 괴로움을 홀로 받으려 하신 길 (6~9)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나가는 것은 자기 홀로 가야 할 길인 것을 아시고 절대로 함께 있는 제자들에게 괴로움을 주지 않으려고 하셨다. 만일 주님께서 괴로움을 함께 받기를 원하는 마음에서 도망가는 제자들에게 불평을 두었다면 그 십자가는 인류를 대속할 만한 제물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 하면 자기가 해야 될 일을 괴롭다고 해서 남에게 짐을 지우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기 때문이다.

  만민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를 걸머지신 만왕의 왕의 인격이라는 것은 여기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제자가 죽어도 주님을 따라간다고 할 때에 오히려 이것을 원치 않으시고 이 사람들은 다 흩어져 가는 것을 용납하라고 하셨던 것이다. 왜냐 하면 당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서 부활 승천하여 성령을 부어주므로만 일할 수 있는 제자들이니, 그 전에는 감히 골고다를 갈 수가 없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의 종들이 자기가 받을 괴로움을 남에게 지우려고 한다면 이것은 그리스도의 정신이라고 할 수 없다. 무엇이 잘 되면 자기가 맡아서 하려고 하고, 잘되지 않고 괴로움이 오면 그 책임을 남에게 지워 보려고 한다는 것은 왕권 받을 인격이 아니다. 교회의 지도자가 어려운 일을 감당할 수 있는 힘조차 없는 어린 양떼들에게 자기가 할 사명을 같이 하자고 걸머지운다는 것은 그 교인들에게 많은 타격만 줄뿐이지 아무런 유익은 없을 것이다.

  어떤 목사가 교회의 양떼들이 자기와 같지 못하다고 불평을 두면서 억지로 일을 하라고 명령을 한다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그러므로 자기가 할 일은 자기 홀로 걸머지고 양떼들에게 무거운 짐이 될까봐 염려하는 마음이 있어야만 왕권 받을 목회자라고 볼 수 있다. 길러서 쓸 사람을 기르지도 않고 일부터 하라고 강단에서 명령을 한다는 것은 연한 순에 무거운 돌을 달아매는 것과 같다.

 

  3. 악을 악으로 대하지 않으신 길 (10~11)

  시몬 베드로가 검을 뽑아서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그의 귀를 베어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떨어진 귀를 붙여 주시면서 말씀하시기를 “검을 쓰는 자는 검으로 망한다”고 하셨다(마26:52).

  우리가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여기서 세 가지로 배워야 한다.

  첫째 : 하나님께서 불쌍히 보시고 용서하시니 우리도 용서해야 된다.

  둘째 : 하나님께서 억울함을 당하라고 하시니 불평 없이 순종해야 된다.

  셋째 : 왕권을 받는 것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아야 된다.

  왜냐 하면 왕권을 받기 전에 원수를 갚으려고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에 대한 순종의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심판 날까지는 악을 악으로 갚는 일을 하지 않아야만 하나님의 참된 종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 하면 하나님이 악한 사람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데 종이 악을 악으로 갚는다는 것은 불법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악한 자들에게 억울함을 당한다 하여도 악으로 대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악을 이기는 길이라고 본다.

 

  결    론

  세상에도 순종하는 길이 많이 있지만 예수님같이 순종하는 길은 역사상 없었던 일이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순종하신 그 길을 따라가려면 세상과는 달라야 할 것이다.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하면서 예수를 따라 간다는 것은 아무런 열매가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순종하신 것과 같이 따라가는 자가 되어야만 많은 열매가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남녀의 차이점

- 딤전 2:8~15 -

 

  하나님께서 남녀를 들어서 쓰시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남녀에 있어서 사명의 차이점이 있는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남녀의 차이점을 본문으로 다음과 같이 증거한다.

 

 1. 손을 들어 기도할 특권이 남자에게 있음 (8)

  하나님 앞에 손을 들어 기도할 특권은 남자에게만 있다. 왜냐 하면 하나님 앞에 대표적인 사람이 될 수 있는 자격을 남자가 받았기 때문이다.

  남종은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할 수 있는 자격을 하나님께 받아야 한다. 오늘의 교회에서 남종들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할 수 있는 자격을 상실한 것은 인간성이 남아서 서로 노하는 일, 다투는 일이 있으므로 그 손에 축복이 임하지를 않기 때문이다.

  거룩한 손을 들어 축복할 수 있는 자격은 자아라는 것이 완전히 죽어지고 조금이라도 감정이나 육적 정욕에 끌림이 없이 항상 거룩한 생활을 하는 자라야 하나님께로부터 받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모세가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사람이었지만 분노를 참지 못하고 반석을 두 번 쳤다는 조건으로 사명이 옮겨간 사실을 알 수 있다. 종된 자가 억울한 일이 있다고 해서 분노를 참지 못하고 과격한 행동을 해서 손으로 실수를 하게 된다면 그 손을 들어 기도할 자격을 상실했다고 본다. 남을 책망하되 사람의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깨닫도록 하는 종이라면 지도자가 될 만한 자격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모든 순교자들은 억울함을 당하여도 하나님께 손을 들어 기도하고, 원수들이 죽이는데도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세상을 떠난 자들이므로 왕권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억울하다고 해서 참지를 못하고 남을 때린다든지 합당치 못한 일을 감정으로 했다든지 하면 이 사람은 거룩한 종이라고 볼 수 없고, 하나님 앞에 손을 들어 기도할 자격도 없다. 우리 사명자의 오른 손은 하나님의 도구로만 쓰여지는 손이 되어야만 거룩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2. 일절 순종할 책임이 여자에게 있음 (9~11)

  여종은 대표적인 사명을 가질 수 없고, 대표적인 사람이 하는 일에 일절 순종하여 받들어 나가는데 전력을 두어야 할 사명을 가졌다. 그러므로 고전11:7에 보면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남자는 하나님의 영광이요,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라고 하였다.

  남자라는 것은 대표적인 사람이 된다 하여도 여자의 순종이 없다면 아무런 영광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어떤 남종이 아무리 일을 바로 하려고 해도 사모되는 여종이 순종치 않고 반대하고 나선다면 대표적인 사명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육적 부부가 아니라도 사명적으로 여종들의 받드는 것이 없다면 대표적인 사명자라도 아무런 일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일하실 때에도 많은 여종들의 받드는 것이 있음으로서 그 사명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여자는 염치나 정절로 단장한 인격이 아니고는 필요가 없는 사람이 되고 마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남자를 섬기는 사명을 가진 여자가 염치없이 대접받기를 좋아한다는 것이나 정절을 지켜야 할 여자가 마음이 변해 버린다면 깨어진 뚝배기와 같이 아무런 곳에도 필요가 없게 된다.

  그러므로 여자는 의복을 단장해도 섬기는 인격으로 아담하게 해야 하며 염치와 정절로 단장을 해야 된다. 받드는 사명을 가진 여자가 너무 값진 보석이나 의복으로 꾸민다는 것은 양심이 마비된 행동이므로 무엇이나 절약해서 간단한 것으로 몸을 단장하고 주의 사업에 전력을 두어 받드는 것이 있어야만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본다.

 

  3. 남녀의 주권에는 차이점이 있음 (12~14)

  남자의 주권이 여자를 지배할 수는 있으나 여자의 주권이 남자를 지배하지는 못한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창조를 받을 때에 남자가 먼저 창조되고 돕는 배필로 여자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둘째 : 뱀에게 꾀임을 받은 자가 여자이기 때문이다. 남자와 여자의 범죄에는 차이가 있다. 여자가 꾀임을 먼저 받아가지고 남자까지 망쳤다는 것이 큰 죄이다.

  하나님께서 언제나 남자의 주권아래서 여자가 그것을 무시하지 않고 도와서 일하는 것을 기뻐하시고 축복하시는 것은 남자는 하나님의 영광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자가 남자를 무시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무시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남녀의 차이점을 바로 가지게 됨으로써 복된 가정과 교회를 이룰 수가 있는 것이다. 가정과 교회라는 것은 남녀의 결합이 있음으로만 있을 수 있고, 발전을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사명자는 자기가 맡은 일을 하되 남녀의 차별을 바로 두어야 할 것이다.

 

  결    론

  오늘에 와서 남녀 동등권이라는 것은 국가를 발전시키고, 교회를 부흥시키고, 가정을 잘 움직이기 위하여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남녀 동등권을 악용할 때에 가정을 망치고, 교회를 망치고, 국가를 망칠 수도 있는 것이다. 동등권이라는 것은 남녀 차별이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남자는 남자 입장에서 권리를 찾고, 여자는 여자 입장에서 권리를 찾으라는 것을 말한다고 본다.

 

 

인간 종말의 큰 환란과 회개 운동

- 슥 12:1~14 -

 

  인간 종말에 천하 사람이 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상으로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교회를 없이 하려고 하는 환란이 일어날 때에 하나님의 사람을 신과 같이 쓰되 큰 회개 운동이 있을 것을 가르친 것이 본문에 기록된 말씀이다.

  이제 인간 종말에 있을 큰 환란과 회개 운동에 대하여 증거하자면 다음과 같다.

 

  1. 큰 환란 (1~5)

  환란이라는 것은 악의 세력을 통하여 일어나게 된다. 그러므로 의의 세력이 악의 세력을 도저히 막을 수 없는 때를 환란시대라고 한다. 어느 선지나 하나같이 인간 종말에는 의의 세력은 극도로 약한 가운데 있고, 악의 세력은 극도로 강하게 될 것을 말했다.

  환란이라는 것은 마귀 세력을 강하게 들어서 역사하도록 하는 것이요 심판이라는 것은 마귀의 세력을 없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력으로 벗어날 수 없는 환란이 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타날 때가 온 증거이다.

  과거의 역사를 보아도 환란이 일어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어찌할 수 없는 자리에 있을 때에 하나님의 역사가 그들에게 나타나므로 돌파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앞으로 올 환란에서 구원받을 주의 백성들에게 큰 힘을 주기 위하여 나타난 표적이다. 본문을 보면 인간 종말에 천하 만국이 전부 일어나서 예루살렘을 치게 된다고 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참된 교회를 없이하고자 하는 환란을 가르쳤다. 그러므로 계시록에 말하기를 생명책에 기록된 자 외에는 다 짐승에게 경배한다는 것은 만왕의 왕을 대적하고 나오는 적 그리스도의 정권 아래 하나가 되고 말 것을 가르친 것이다.

  인간 종말에 하나님께서 마귀에게 심판하기 위한 목적으로 얼마든지 사람을 악화시킬 수 있는 권세를 주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리를 대적하는 세력이 극도로 강하게 일어나게 되어 환란시대가 오는 것이다.

 

  2. 택한 종으로 승리 (6~8)

  하나님께서 택한 종을 승리하도록 역사하실 때에는 원수의 세력을 얼마든지 강하게 일어나도록 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택한 종으로 하여금 그 원수를 이기게 하므로써 오히려 영광이 되게 하기 위한 방법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대적을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 모세 때에 말씀대로 바로를 강퍅케 하고 말씀대로 모세를 승리케 하셨던 것과 같이 인간 종말에도 말씀대로 천하 사람을 강퍅하게 하고 말씀대로 당신의 종을 신과 같이 역사하도록 하시어 큰 구원을 받도록 역사하시는 것이다.

  과거 역사를 본다해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을 구원하는 역사를 하실 때에는 인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환란이 있게 하고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종을 신과 같이 들어 쓰셨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인간 종말에도 당신의 종을 신과 같이 쓰실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3. 큰 회개 운동 (10~14)

  회개 운동이라는 것은 은혜시대에 개인 개인이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구원받는 역사도 있고, 인간 종말에 어느 나라나 어느 민족이나 할 것 없이 택한 사람이라면 전부 다 회개를 하게 되는 역사도 있다. 인간 종말에 회개 운동이 일어날 때에 회개치 않는 사람은 영원히 기회가 없는 것이다. 왜냐 하면 인간 종말에 누구든지 회개할 수 있는 큰 회개 운동이 있고는 악인을 없애버리는 심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큰 회개운동이 있으므로써 새 시대에 들어갈 사람이 완전히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 때에는 아무리 예수를 부인하는 적 그리스도의 나라에서도 회개 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지금 공산 진영 안에서는 30세 청년들까지는 예수가 누구인지 알지도 못할 뿐 아니라 예수를 믿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자들이니 이 사람들을 그냥 두고 심판한다는 것은 공평한 하나님이라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무신론 공산 정치 안에서도 택한 자에게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다. 심지어 이때에는 유대교에 있는 사람들까지라도 회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 종말에 택한 자라면 다 회개하게 되는 것을 큰 회개 운동이라고 하는 것이다.

 

  결    론

  불가피에 우리 앞에는 큰 환란이 오게 된다. 그러나 이 환란은 무서워서 두려워할 것이 아니고 자신이 완전히 회개를 하느냐 회개를 하지 못하느냐와 무장을 갖추느냐, 무장을 못 갖추느냐 하는 것으로써 모든 문제는 끝을 맺게 될 것이다.

 

 

택한 자를 위한 천사의 역사

- 마 18:10 -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비록 소자라도 택한 자라면 저희 천사가 하늘에서 하나님 앞에 역사하고 있다고 하셨다. 하나님의 택한 사람은 세상에서 사는 생활의 전체를 하늘에서 천사가 맡아서 도와 주기도 하고, 그의 되어지는 모든 일을 간섭하되 상 받을 일이나 책망 받을 일을 보살피고 있는 것이다. 택한 사람이 세상에서 살면서 일한 모든 것은 다 하나님 앞에 가서 쌓여지는데 이것을 위하여 천사는 쉬지 않고 역사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세상에서 인간들이 볼 때에는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택한 자녀라면 하늘에서는 그를 위하여 천사들이 역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정부가 아무리 세밀하게 국민들을 다스린다고 하여도 하늘 보좌 앞에서 택한 자를 위하여 다스리는 것처럼 세밀하지는 못하다고 본다. 아무리 강한 나라의 정부라도 시민 한 사람에 경찰 하나씩 두고 살피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택한 자 한 사람에 천사를 하나씩 세워서 보살피게 하신다.

  이제 택한 자를 위하여 천사가 역사하는 일은 다음과 같다.

 

  1. 진리의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하여 역사함 (행10:3~6)

  택한 자를 위하여 역사하는 천사는 시대가 변천됨에 따라 그 시대의 진리를 따라가도록 지시하고 인도한다. 구약시대에 한 민족적인 종교를 세계적인 종교로 확장시키고자 했을 때에 몽매한 인간들은 주님의 명령을 받고도 세계적인 복음 운동을 못하고 유대인에게만 복음을 전했었다. 그러므로 하늘의 천사는 이방 민족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문을 열어주기 위하여 역사했던 것이다. 만일 천사의 역사가 없었다면 이방의 전도문이 열리지 않았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천사가 고넬료의 가정에 나타나서 욥바로 사람을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여 생명의 말씀을 받으라고 지시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고넬료가 베드로를 청하여 복음을 받게 되고 그 때부터 이방 땅에 전도의 문이 열려 오늘날 세계 열방에 복음이 확장되었다. 그리고 사도요한에게 시대적인 비밀을 알려주기 위하여 천사가 지시한 일도 있다(계1:1, 22:6).

 

  2. 말씀 전하는 종을 도와주기 위하여 역사함 (행5:19)

  하늘의 천사들은 각각 자기가 맡아 보호하고 있는 종이 있는데, 그 종이 위험한 일을 당할 때에는 와서 도와주고 사명을 감당하도록 역사해 주는 것이다. 소위 대제사장들이 사도들을 복음을 전하지 못하도록 옥에 가두었을 때에 천사가 와서 옥문을 열고 이끌어 내어 성전에 가서 생명의 말씀을 백성에게 전하라고 하면서 도와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천사는 하늘에서 마귀와 싸우는 일도 하고 있다(계12:7).

  마귀는 종들이 일하지 못하도록 방해할 권리를 가졌고, 천사는 일하는 종들을 도와줄 권리를 가졌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목숨을 아끼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자라면 주의 천사가 도와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누구든지 천사의 보호가 없이는 마귀와 싸우면서 복음을 전할 수가 없다.

 

  3. 영혼을 잘 받들어 주기 위하여 역사함 (눅16:22)

  천사는 택한 자가 죽지 않도록 보호할 책임도 있고, 죽을 때에 그 영혼을 하나님 앞으로 받들어 갈 책임도 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택한 자는 세상을 떠날 때에 그의 천사가 와서 그 영혼을 잘 받들어 낙원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그 사람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천사에게 달렸다고 본다. 천사가 보호하면 위험한 곳에서라도 죽지 않는 것이요, 천사가 그 영혼을 데리고 가면 어디서든지 죽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대로 죽고 사는 것을 문제시 할 필요가 없고 날마다 맡은 사명에 충성을 다할 것 뿐이다. 왜냐 하면 천사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택한 자를 지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4. 행하는 일을 하늘에 쌓아두기 위하여 역사함 (마18:10)

  우리 사람이라는 것은 과거에 자기가 했던 일을 다 잊어버리고 만다. 그러나 택한 자를 맡은 천사는 그 사람이 세상에서 하는 일을 모두 간섭하며, 그 상을 하나도 잃지 않도록 하늘에 쌓아두는 역사를 하고 있다. 택한 사람이 날마다 하는 일이 자기 이름이 있는 생명 책에 기록되는 것은 택한 자를 맡은 천사의 활동이 있으므로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택한 자가 매일같이 사는 생활의 전부는 하늘에 상급으로 쌓여지게 된다. 그리고 천사는 자기가 맡은 사람의 계급이 올라가면 갈수록 더욱 기뻐하는 것이다.

  슥3:1~5에 하나님의 종에게 사단의 피해가 있었지만 정한 관을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사자가 같이 했다는 것은 어려운 시험을 통과한 종에게는 천사가 항상 받들어 섬길 책임이 있다는 것을 뜻한 말이다. 예수님도 광야에서 마귀 시험을 이긴 다음에 가서야 천사가 수종들었다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아들이라도 시험을 통과해야만 천사가 같이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마4:11).

  사람이 세상에 나서 사는데 있어서 택한 사람에게는 천사의 역사가 항상 같이하므로 바른 길을 가게 되고, 원수를 이기게 되고, 완전한 왕권을 받는 데까지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결    론

  하늘의 천사라는 것은 하나님의 택한 자를 위하여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완전한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 택한 자를 꾀어보는 마귀도 허락하고 도와주는 천사도 허락하셨다. 그러므로 택한 자를 꾀어보는 일도 하시고, 인도하고 보호하는 일도 있게 하셔서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자는 마귀가 시험하는 것도 다 상급을 받는 조건이 되게 하며, 천사가 수종드는 일을 하게 해서 영광을 받게 하시는 것이다.

 

 

제단의 응답과 역사

- 눅 1:8~17 -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제단의 응답이 있으므로 새로운 역사가 일어나게 하시는 것이다. 아무리 예루살렘 성전에 부패한 자들이 많이 있다 하여도 그 제단에 응답이 있으므로써 은혜시대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다. 소위 제사장이라는 사람들이 너무 부패했지만 그 성전 제단에 응답이 내리므로써 예수님을 위하여 앞서 길을 예비할 세례 요한을 낳게 되었다. 그러므로 참된 제사장 사가랴에게 응답이 오는 거기서부터 메시야를 영접할 준비를 가지게 된 것이다.

  이제 제단 응답과 역사에 대하여 본문으로 증거하자면 다음과 같다.

 

  1. 간구한 기도가 있으므로 응답이 오게 됨 (8~13)

  응답이라는 것은 사람 편에서 간구가 없이는 있을 수 없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아들이 없으므로 무조건 아들을 구했지만 그 기도가 상달됨에 따라 메시야를 영접할 마지막 선지를 그들에게 주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은 몽매한 인간들이 구하지 못한 것이라도 응답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뜻이 이루어지도록 응답하실 때에 의심할 정도로 주시게 된다. 사가랴는 이미 자기가 간구한 바가 이루어진다고 하여도 너무나 놀라운 일이므로 의심했다는 조건에서 10개월간 벙어리가 되었던 것이다.

  언제나 하나님께서는 제단에 응답을 내리시되 징계를 하면서라도 역사하시는 것이다. 왜냐 하면 사람은 너무 부족하므로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다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제사장 사가랴에게 마지막 선지가 나게 되어 메시야를 영접할 줄은 사람으로써 알지 못했으나 하나님께서는 징계를 하면서라도 알게 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루살렘 성전이 아무리 황폐화 될 앞을 놓고라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제단에 응답을 내려 새로운 역사를 개척하셨다.

  구약 때 예루살렘 성전의 제단과 예수님과에 연결성은 어떠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과거에 율법적인 성전은 메시야를 기다리는 성전이었으므로 그 제단의 응답으로 잉태된 요한은 메시야를 위하여 모든 사람에게 길을 예비시키는 것으로 끝을 맺게 되었다. 왜냐 하면 구약 시대라는 것은 완전한 역사가 아니요, 완전 역사가 올 것을 위하여 예비에 불과한 성전이기 때문이다.

 

  2. 많은 사람이 기뻐할 일이 됨 (14)

  하나님의 응답이라는 것은 언제나 택한 자에게 기뻐할 일로 오게 되는 것이다. 메시야를 기다리고 사모하던 이스라엘에게 메시야를 영접할 준비를 갖추기 위하여 세례 요한이 온다는 것은 너무나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예를 든다면 귀한 손님이 올 때에 어떤 사람이 앞서 와서 저기에 기뻐할 사람이 오고 있다고 알려 준다면 그 소식을 들은 사람은 집에 가만히 앉아 있지를 않고 일어나 마중을 나가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다는 소식을 전할 사람이 나게 된다는 것은 인간들의 큰 기쁨이 된다. 예수님을 영접할 준비를 할 사람은 외식하는 제사장의 가정에서 나게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상달되는 기도를 드리는 참된 제사장의 가정에 응답이 있으므로 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재림의 주가 오실 때에도 많은 사람이 강단에서 말씀을 증거하고,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참된 기도를 상달시키는 종의 가정에서라야 그 소식을 나가 알려줄 사명자가 나오게 될 것이다. 아무리 같은 교회 안에 있다 하여도 기도가 상달되는 집도 있고 상달되지 않는 집도 있다. 그러므로 제단의 응답이라는 것은 참된 종의 상달되는 기도를 통하여서만 내리게 되는 것이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성전에서 기도를 하고 있지만 누구든지 다 응답이 오는 것이 아니고 기도가 상달되는 자라야 기뻐할 응답이 오게 된다.

 

  3. 많은 열매가 있게 됨 (15~17)

  신약 시대를 완전히 이루는 모든 사도들은 다 세례 요한의 열매라고 본다. 왜냐 하면 세례 요한의 전도를 받고 예수를 따라 왔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열두 사도가 나온 것은 제단 응답이 있으므로써 나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기도라는 것은 한 사람만을 위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대중을 위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니 한 사람의 기도가 상달되므로 대중을 살리는 응답이 오되 제단을 통하여 오게 된다. 재림의 주가 오실 때에도 대중을 살리는 응답이 제단을 통하여 올 것을 사19:19에 말씀했다.

  아무리 예루살렘 성전에서 부패한 교권주의자들이 세례 요한을 반대하고 예수를 반대하고 사도들을 반대하지만 이미 하나님의 응답은 그들에게 내렸던 것이다. 오늘날 한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자 중에서도 재림의 주를 영접할 응답을 받는 자도 있고 오히려 모르고 반대하는 자도 있다.

 

  결    론

  아무리 사람들이 부패했다 하여도 하나님께서는 적은 소수에게 응답을 내려 새로운 비밀을 알게도 하시고 새로운 역사를 하게도 하시는 것이다. 많은 제사장들이 성전에 왕래하고 있었지만 오직 사가랴가 분향을 올릴 때에 주의 천사가 나타나서 새로운 역사의 비밀을 알려 주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지금도 시대적인 비밀을 바로 알고 역사할 자는 다수가 아니요 적은 소수일 것은 분명하다.

 

 

택한 자의 산 믿음

- 요 10:22~29 -

 

  참된 종교의 신앙이라는 것은 어떤 의식이나 법도나 사람의 기도에 따라서 있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의 산 믿음이라는 것은 오직 택한 자라야 믿어지는 것을 말한다. 사람이 하나님을 찾는 것이 산 믿음이 될 수 없고, 하나님께서 택한 자에게 선물을 주는 믿음이 산 믿음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 안에 다니실 때에 소위 하나님을 공경한다는 유대인들이 말하기를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케 하려 하나이까? 그리스도 여든 밝히 말하시오”라고 하였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믿지 않는 것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들을 보고 내 양이 아니라고 하신 것을 보면 믿음이라는 것은 주님의 택한 사람이라야만 있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은 누구든지 다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요, 택한 사람만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산 믿음으로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아무리 역사적인 예루살렘이라도 택한 사람이 심히 적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수많은 유대인들이 성전에 왕래하면서 하나님을 공경하였지만 지극히 적은 소수가 예수를 믿고, 그밖에 많은 사람들이 다 예수를 믿지 않고 훼방하다가 망한 것을 본다면 택한 양은 유대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어느 나라의 사람이든지 모태로부터 택한 자가 있는데 이 자를 찾기 위하여 역사할 때에 택한 자에게 믿어지도록 하는 일을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다.

  이제 택한 자의 산 믿음에 대하여 본문으로 증거한다.

 

  1. 깨달아 듣는 일이 있다 (27상반절)

  세례 요한이 유대 광야에서 외칠 때에는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지만 나사렛 예수를 가리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을 보라고 할 때에 예수님을 따라가는 자는 심히 적었다. 그러나 택함을 받은 사람은 어린양을 보라고 할 때에 벌써 메시야인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이와 같이 산 믿음이라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는 일을 듣고 깨닫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예를 든다면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양이라도 자기 목자의 음성은 잘 알아듣는 것이다. 이와 같이 택한 자가 참된 진리를 듣고 깨닫는 것은 자기 스스로가 아니요, 벌써 하나님께 속한 자이므로 그 심령이 깨달아지게 된다. 이것은 어떤 사람의 방법에서 되는 것이 아니고 무조건 믿어지는 것이 있게 되는 것이다.

  믿음이라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아무리 들어도 모르는 것을 택한 자가 깨달아 듣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깨달아 들리는 것은 그를 택한 하나님의 신이 역사하시는 증거이다(마13:23).

 

  2. 따라 가는 일이 있다 (27하반절)

  인생이라는 것은 따라가는데 의하여 죽느냐, 사느냐에 놓이게 되고 망하느냐, 흥하느냐 하는 문제가 결부된다. 산 믿음이라는 것은 아무리 고생스러워도, 핍박이 있어도 예수님을 따라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도덕을 초월한 영적 행동이라고 본다.

  인생이라는 것은 누구를 따라가든지 그 따라가는 것이 바로 그의 생활이 된다. 방랑생활을 하는 것도 그 마음에 무엇인지 모르게 금할 수 없이 역사하는 것이 있으므로 하게 되는 것이고 의로운 정로를 따라가는 것도 그 마음에 무엇이 역사하므로 되는 것인데 여기에는 사상이 따르게 되는 것이다.

  동물이 먹을 음식을 볼 때에 덮어놓고 먹겠다는 식욕에 끌려서 따라가는 것 뿐이요, 거기에 어떠한 목적이 있어서 따라가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먹기 위해서 따라 간다는 것은 가치가 없는 동물의 생활이요, 목적을 두고 따라가는 것은 동물계를 초월한 생활이라고 본다. 그리고 목적을 두고 따라가는 중에서도 핍박이 많고, 시험이 많은 험한 길을 가신 예수님을 따라간다는 것은 택함 받은 사람이 아니고는 도저히 갈 수가 없는 길이다.

  그러므로 천하에 제일 적은 무리는 예수님을 따라가는 산 믿음을 가진 자라고 본다. 주님께서 “내가 다시 올 때에 믿는 자를 보겠느냐”고 말씀하신 것은 택한 자로서 산 믿음을 가진 자가 적다는 것을 가르친 말씀이다. 이스라엘 60만 대중이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나섰지만 끝까지 산 믿음을 가지고 싸워 나간 사람은 여호수아와 갈렙 뿐이었다.

  오늘에 세계적으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 같지만 산 믿음으로 끝까지 싸워 이기고 주님의 재림을 맞이할 자는 14만 4천인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3. 붙들려 사는 일이다 (28~29)

  이 세상 사람들은 다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무엇에 붙들려서 사는 생활을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않는 자도 무엇에 붙들려서 살기 때문이요, 죽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자도 무엇에 붙들려서 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장 복 있는 생활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손에 붙들려서 사는 것이다. 우리 자체에 아무런 활동을 할 힘과 능이 없다고 해도 하나님과 예수님의 손에 붙들리게 된다면 그 생활이야말로 과학을 초월한 생활이 된다. 왜냐 하면 무소불능의 역사에 끌려서 사는 생활이기 때문이다.

  오늘에 세상이 소위 문명이라는 것을 자랑하지만 이것은 과학적인 기계에 붙들린 것이다. 오늘날 세계적인 전쟁이라는 것도 과학적 원자무기가 무서워서 떠는 전쟁이므로 기계에 붙들린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택한 자의 산 믿음이라는 것은 대자연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것이다. 그러므로 기계에 붙들린 과학 문명으로는 이상적인 국가를 이룰 수가 없겠지만, 조물주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자는 눈물, 전쟁, 죽음, 고통이 없는 평화의 왕국을 이루고야 말 것이다.

 

  결    론

  하나님께서 택한 자에게 산 믿음을 주어서 그 믿음으로 순종하게 하고 믿는 대로 역사해 주시므로 영광을 받기도 하시고 세세 영광을 주기도 하시는 것이다.

 

 

의인이 믿음으로 살게 될 때

- 합 2:4~14 -

 

  이날까지는 믿음이 없는 자도 화려하게 살 수 있고, 세력을 쥐고 살 수 있는 세상이었다. 그러나 의인이 믿음으로만 살게 되고 그 밖의 사람은 살 수가 없게 되는 날이 오는데 이것을 인간 종말이라고 한다.

  이제 의인이 믿음으로 살게 되는 날은 어떠한 때라는 것을 본문으로 증거한다.

 

  1. 북방 세력이 극도로 교만할 때이다 (4)

  하박국은 인간 종말에 대한 묵시를 볼 때에 하나님께서 북방 세력을 독수리같이 올라가도록 하시므로 모든 사람들이 혼란에 빠져 주권자 없는 곤충떼 같이 될 때에 북방은 교만해져서 자기 힘을 하나님같이 알게 된다고 하였다. 이것은 심판기에 될 징조이다.

  지금 무신론자의 세력은 세상이 다 자기의 것이 된 것처럼 하나님이 없다고 하며 하나님이 죽었다고 하는 어리석은 소리를 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때에는 의로운 사람이 믿음으로 살 때이다.

  오늘날 교파를 막론하고 의로운 일을 행하는 종들은 그 믿음이 담대해지고, 올라가고, 거룩하게 살고 있다. 이날까지는 의로운 사람이 억울하게 죽었지만 지금은 의로운 사람이 죽지 않고 살아서 주님을 맞이할 때이다. 이 본문에 의인이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영혼 구원을 목적한 것이 아니고 영, 육이 아울러 살아서 새 시대의 영광을 볼 때가 오는 것을 가르친 것이다.

  합1:12에 “우리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리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심판하기 위하여 그를 두셨나이다” 한 것은 북방 세력이 교만하게 올라갈 때에 의로운 사람은 죽음을 맛보지 않고 왕권의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을 뜻했다.

  언제나 어려운 난국을 당할 때에는 의인은 그것을 믿음으로 돌파하고 나가게 되는 것이다.

 

  2. 북방 세력이 만국을 모을 때이다 (5~8)

  하나님을 모르는 인간들이 북방의 강한 세력 앞에 머리를 숙이는 일이 있게 될 때를 인간 종말로 말하였다. 그러나 각 나라에서 각성을 받고 일어나는 종들로 말미암아 북방이 완전히 망하게 되므로 새 시대가 올 것을 가르쳤다.

  언제나 하나님께서 의로운 사람을 들어 쓰실 때에는 악의 세력을 먼저 강하게 일어나도록 하셨다. 그리고 악의 세력이 교만하게 올라가서 의로운 사람으로서 어찌할 수 없이 될 때에 강한 믿음을 주시는 동시에 하나님께서 친히 그를 위하여 싸워 주시므로 의로운 사람이 이겼다는 것은 예언적인 역사가 된다.

  어느 선지나 하나같이 인간 종말에 북방의 궤휼적인 침략 정책이 의로운 사람 앞에서 반드시 망하는 일이 있을 것을 가르쳤다. 만일 인간 종말에 궤휼적인 침략자가 승리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다 거짓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적으로 이루어진 현실에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의인이 믿음으로 사는 역사이다.

 

  3.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게 되는 때이다 (9~14)

  지금 사람들은 과학적인 발전은 인정하면서도 여호와의 영광을 말한다면 부인하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때를 암흑시대라고 본다. 그러나 본문에 북방의 세력이 망하게 되는 날에는 세상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게 될 것을 말했다. 과거 사마리아 아합 왕 시대에도 바알 신을 섬기는 무리들이 엘리야를 해코자 하였지만 엘리야 제단에 불의 응답이 내릴 때에는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지금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나타낼 때가 온 증거를 보여주기 위하여 북방의 궤휼적인 무신론 정치를 강하게 만들어서 세계를 노리고 나오게 하셨다. 그러므로 북방 세력 앞에 세상이 떨 수밖에  없는 시기가 온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의인으로서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할 때가 온 것을 알리고 있는 것이다. 누구든지 지금 이때에 하나님 앞에 의인이라고 인정을 받은 사람이라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할 때가 온 것을 분명히 알고 그 영광을 바라보고 용기있게 나갈 것이다.

  지금은 악당들이 의로운 사람을 멸시하고, 핍박하는 일도 있지만, 이 세상이 완전히 없어지는 환란이 올 때는 누구든지 다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할 자는 없다. 그러나 이때에 후회라는 것은 아무런 필요가 없으며, 이미 의롭다함을 받고 믿음으로 살아 나간 사람들이 여호와의 영광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의인이라는 것은 시련이 올 때에 믿음이 더 강하여지고 원수를 갚는 날이 올 때에 여호와의 영광을 누리게 된다. 그러므로 원수를 갚는 날이 시련 가운데 있던 의인에게 영광이 되는 것은 그 소원을 이루어 주는 날이기 때문이다.

 

  결    론

  주님께서 천국 복음을 전하실 때에 나는 의인을 부르러 이 세상에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온 것이라고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를 세계 만방에 전파하라고 명령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진노의 날이 올 때는 악인의 세력은 이 땅에서 완전히 망하게 되고, 의인만 믿음으로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의인이 믿음으로 살게 될 때에는 악의 세력이 북방에 자리잡고 세계를 침투해 나오다가 망할 것을 말씀했다.

  의인이라는 것은 세상이 악할 때에 더 빛을 나타내게 되고 환란이 올 때에 여호와를 자랑하게 되고, 온 세계가 멸망을 당할 때에 남은 자가 되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주 재림을 맞이할 자의 생활 방침

- 눅 17:22~37 -

 

  누구든지 주님의 재림을 맞이할 사람이라면 합법적인 생활을 하여야 된다. 왜냐 하면 재림의 주가 오시는 것은 말씀대로 판단하려고 오시기 때문이다. 초림의 주는 용서하러 오시는 주님이시니 아무리 죄인의 생활을 하던 자라도 영접할 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형제를 용서하되 회개하는 자는 얼마든지 너그러이 용서해 주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재림의 주를 맞이할 자가 되려면 어떠한 생활이 있어야 된다는 것을 본문으로 증거한다.

 

  1. 말씀에 굳게 서는 생활이 있어야 된다 (22~24)

  신앙 생활이라는 것은 말씀대로 오신 예수를 믿으므로 죄사함을 받아서 말씀대로 오실 예수를 기다리되 조금이라도 말씀에 가감된 일에는 치우치지 않고 말씀에 굳게 서서 나가는 생활이 있어야 한다. 아무리 큰 이적이 일어나며, 기사가 일어나고, 만민이 놀랄 일이 일어난다 하여도 거기에 따라갈 필요가 없고 말씀에 굳게 서야할 것이다. 왜냐 하면 다시 오시는 주님은 번개같이 오시되 온 세계가 다 영접할 수 있도록 오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 중에서 이미 이루어진 말씀도 세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목적이며, 재림의 주가 오시는 것도 세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목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지방에 놀랄 만한 일이 생겼다고 해서 그것을 중심하여 따라갈 필요도 없고 그리스도의 재림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는 것에도 따라갈 필요가 없고 오직 그 날에 설 수 있는 인격을 갖추는 일에 전력을 두어야 할 것이다.

  주 재림이 온다는 것을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우리는 주님이 오시기 전에 해야할 일을 충실히 하는데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므로 필요 없는 일에 공연히 따라갈 필요도 없고 생각할 필요도 없고 다만 재림의 주를 맞이하는 준비가 있어야 그날에 설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 신자들이 인격적인 무장을 갖추는 일에는 전력을 두지 않고, 어떤 신비적인 일이 있다고 해서 거기에 끌려간다는 것은 재림의 주를 맞이할 자의 생활에 완전히 섰다고 볼 수 없다. 신앙 생활을 어떤 흥분이나 감정이나 신비에 기준할 것이 아니고 자신이 말씀의 법에 굳게 서서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인격과 생활과 사업에 체험적인 생활이 있어야 할 것이다. 왜냐 하면 주님 다시 오실 때에는 인격, 생활, 사업에 의하여 보응을 받기 때문이다.

 

  2. 예비하는 생활이 있어야 된다 (25~30)

  주님의 재림을 영접할 자는 먼저 그 날이 어떠한 날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26절을 보면 주님께서 재림의 날을 두고 말씀하실 때에 “노아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고 하셨다. 그러므로 주님 다시 오시는 날에는 예비가 없는 자는 감히 설 수가 없다. 노아 홍수 때에도 방주를 예비한 노아의 가정외에는 다 전멸을 당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주님 다시 오실 때에도 예비가 된 자 외에는 다 환란에 빠지게 된다.

  그런데 이 예비하는 생활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요점이 있다.

  첫째 : 말씀을 그대로 믿는 동시에 순종해야 된다.

  둘째 :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하여야 된다.

  셋째 : 합심하는 가정을 이루어야 된다.

  노아의 가정은 합심이 되므로 구원을 받았고, 소돔, 고모라에서 나오는 롯의 가정은 합심이 되지 않았으므로 큰 실패를 가져오는 일이 되었다.

  재림의 주가 오실 때의 구원은 영, 육이 아울러 받는 것이니, 이것은 반드시 예비가 있는 자라야 받게 될 것은 사실이다. 노아는 물이 샐 틈이 없이 방주를 지었으므로 구원을 받았고 우리는 말씀에 조금도 가감 없이 무장이 되어야 흑암을 뚫고 나가서 주님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예비가 있는 생활은 무엇보다도 해산의 수고를 다하는 것이 있어야만 된다.

 

  3. 순교적인 생활이 있어야 된다 (31~35)

  주님의 재림을 영접할 자는 조금이라도 세상을 생각하지 말고 돌진의 걸음을 걸어야 한다. 그러므로 원수를 두려워하지도 않고, 겁내지도 않고, 용기있게 나가는 생활이 있는 자라면 주님을 맞이할 인격이 갖추어진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 하면 주님 재림의 날은 무서운 시험이 닥쳐오는 날이니 조금이라도 세상의 것을 생각하는 자는 남을 자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집안에 있는 것이나 모든 물건을 가지려 하는 생각을 버리고 재림의 주를 맞이할 준비를 갖추는 일에 전력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33절에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고 한 것은 자기 목숨을 하나님께 바치고 강하게 나가는 사람이라면 재림의 날에 설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친 말씀이다.

  다시 말하면 재림의 날은 순교의 사상을 가지고 진리를 바로 증거하던 종들만 설 수 있다는 것이다. 재림의 주를 맞이할 자는 순교자의 인격을 가져야 된다. 이날까지 순교를 당한 종들과 주님 재림할 때까지 순교적인 생활을 한 종들이 주님께서 올라 오라 하실 때에 들림을 받게 된다. 이것은 왕권을 받을 수 있는 사람만 재림의 주를 영접하기 때문이다.

 

  결    론

  주의 날에 설 자는 중생을 받은 자가 아니요, 중생 받은 사람 중에서 재림의 주를 맞이할 수 있는 생활을 한 자이다. 그러므로 순교적인 사상을 가지고 일한 사람은 왕권 반열에 들게 되어 세세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재림의 주를 맞이할 자에 대하여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에 함부로 따라가지도 말고 깨어서 예비를 하되 노아 때와 같이 될 것을 알고 철저하게 실천하는 생활이 있어야 된다고 하셨다.

 

 

재림을 증거하는 예수의 고난

- 마 26:57~68 -

 

  하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메시야를 고대하는 정통신앙을 가졌다는 소위 대제사장, 제사장, 유사, 장로들에게 비소와 조롱과 무시를 당하신 이유는 이후에 내가 권능의 우편에 앉으며, 하늘 구름을 타고 세상에 온다고 증거하셨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님을 죽이려는 최후 발악적인 행동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메시야를 믿는다는 간판 아래서 메시야의 사상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하고 있던 자들이었으므로 예수님께서 증거하시는 말씀이 자기들의 사상과 대립이 된다는 조건에서 이단이라, 바알세불이라 하는 말로 정죄를 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메시야를 믿는 자라도 그 사상과 정신과 마음이 메시야의 사상과 정신과 마음에 합치가 되어야만 그가 하신 일을 따라하게 될 것이다. 이제 재림을 증거하는 예수님에 대해서 우리가 본받을 점을 다음과 같이 본문에서 말한다.

 

  1. 잠잠할 일에 잠잠하심 (57~63)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사흘만에 짓겠다고 말씀하신 일이 있었다. 이것은 당신이 십자가에 죽어서 무덤에 장사 된지 사흘만에 부활하므로 예언적인 성전은 폐지가 되고 신령한 교회가 열매로 세상에 세워질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나 이 비밀을 모르는 그들은 이것을 큰 문제 거리로 알고 예수를 귀신 들린 사람으로 취급했으며, 미친 사람으로 여겼던 것이다. 분별할 줄 모르는 어리석은 인간들은 이말 한 마디를 근거로 해서 예수님을 책잡아 보려고 했다.

  성경에 기록된 비밀은 이 육적 이스라엘 그대로 왕국을 이루는 것이 아니고 이것은 완전히 폐지시키고, 십자가 부활로 말미암아 완전한 교회가 서게 되므로 메시야 왕국이 이루어 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비밀을 모르는 교만한 인간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것을 가지고 책을 잡아 이단이라고 정죄했던 것이다.

  오늘에도 분별할 줄 모르는 교만한 인간들이 성경의 비밀을 알고 증거하는 사람을 마귀라, 이단이라 하고 정죄하는 일이 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성금을 가지고 생활하는 대제사장과 제사장의 무리들이 그 성전이 그대로 있어 메시야 왕국이 올 줄로 알았다는 것은 흑암 중에서도 흑암이라고 본다.

  이와 같이 지금 교회가 이대로 있어 메시야 왕국이 이루어질 줄 안다는 것도 흑암이다. 그러므로 소위 신앙자들이 자기의 부족을 모르고 자기만 정통이라고 생각하는 잘못된 점에서 이와 같이 망령된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가장 큰 죄는 하나님의 성전을 받든다 하면서 자기의 권리나 안락이나 명예를 탐하는 일인데 지금도 이러한 자들이 구름타고 오실 예수님을 괴롭히게 된다.

  그러므로 과거 예루살렘 성전에서도 이러한 악당들에게는 예수님께서 입을 열지 않으시고 잠잠히 계셨던 것이다. 지금도 주님의 말씀을 증거할 때에 그것을 듣고 대적하는 자에게는 주님께서 아무런 답도 없이 잠잠히 계신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아무리 증거해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더 말할 필요가 없이 잠잠히 있는 것이 참된 증인의 인격이라고 본다. 왜냐 하면 거룩한 것을 개에게 줄 필요가 없으며, 진주를 돼지에게 던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2. 증거할 일에 증거하심 (64)

  예수님께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고 하는 대제사장에게는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고 증거하셨다. 이것은 마땅히 증거해야 할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헐고 사흘만에 지을 수 있다고 했느냐고 묻는 대제사장에게는 입을 열지 않으시고 잠잠히 계셨고,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고 하는 일에는 담대히 사실대로 증거하셨던 것이다.

  만일 예수님께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할 때에 아무런 말도 못하고 잠잠히 계셨다면 참된 증인이라고 할 수 없다. 이것은 듣든지 말든지 증거하셔야만 될 일이다. 왜냐 하면 그들은 믿지를 않았지만 우리는 확실히 이 말씀을 믿기 때문이다.

  소위 하나님을 공경한다는 대 제사장이라는 사람이 구름 타고 온다는 말을 듣고 무슨 뜻인지 몰라 발악적인 행동을 했다는 것은 말만 대제사장이지 사단의 자식이라는 것이 드러나게 된다.

  예수님께서 이런 배척을 받으면서도 그때 사람이 믿지 못할 말씀을 증거하신 것은 그 시대의 사람들만 위하여 증거하신 것이 아니요 우리를 위하여 증거하신 것이라고 본다. 왜냐 하면 그때 사람이나 우리나 다 구름을 타고 오실 예수님을 영접할 예비를 갖춰야 되기 때문이다.

 

  3.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심 (65~68)

  예수님께서 자기가 하늘 구름을 타고 온다는 것을 증거했을 때에 하나님의 아들인 그 몸에 사형이 해당된다는 처벌을 받고 얼굴에는 침을 뱉기우고, 매를 맞고, 비소를 받았던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볼 때에 너무나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구름 타고 온다는 말을 하지 않으면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할 말을 못하는 인격을 주님께서 가졌다면 완전한 인격을 가졌다고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부끄러움을 당하는 일을 부끄럽게 생각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에게 이러한 일이 있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시면서 담대히 원수들 앞에서 증거하셨던 것이다.

  만일 우리가 말씀을 증거하면서 악당들이나 인간들에게 부끄러움을 당할까봐 주저하고, 악한 행동이 있을까봐 겁을 낸다는 것은 벌써 그 악당들에게 영적으로 눌림을 받은 인격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어디를 가든지 악령의 역사에게 조금이라도 마음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지배를 받는 일이 없이 나가야만 승리하게 될 것이다.

  악한 사람들이 때리려고 한다고 해서 두려워한다든지, 더러운 말을 한다고 해서 부끄러워한다든지 하면 그것은 완전한 인격이라고 볼 수 없고 악령에게 이끌리는 인격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우리가 구름을 타고 오실 예수님을 맞이하려면 고난을 고난으로 생각지 말고 오히려 영광으로 아는 인격을 가져야만 될 것이다. 모든 순교자들도 주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하는 인격을 가졌으므로 승리의 길을 걸어 간 것이다.

 

  결    론

  구름 타고 다시 오실 예수님이 이것을 증거하시고 고난 받으신 것을 생각하고 우리는 완전한 승리를 이루기 위해서 우리에게 오는 고난을 영광으로 아는 인격을 가져야만 왕권 반열에 들 수 있는 것이다.

 

 

제일로 영광스러운 일

- 요 12:27~33 -

 

  우리는 세상에서 제일로 영광스러운 일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알아야 될 것이다. 이 세상 사람들은 많은 사람을 자기 앞으로 굴복시키므로 자기 권세를 꺾을 자가 없이 되면 그것을 영광스러운 일로 알고 있다. 이것은 인간들의 본질이다. 자기가 다른 사람에게 지면 부끄러워하고, 이기면 영광스럽게 알고 남보다 낮아지면 부끄럽게 알고, 높아지면 영광스럽게 아는 것이 인간이다.

  그러나 세상에서 제일로 영광스러운 일이 무엇이냐 하는 것은 본문을 보아서 알 수 있다.

 

  1.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신 일이다 (27~28)

  사람이 자기 집안에 가만히 앉아서 있다는 것은 아무런 영광스러운 일이 있을 수 없고, 집을 떠나 활동을 하는 것이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본다. 사람에게 제일로 수치스러운 일은 옥에 갇혀서 있는 일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 보좌에서만 영원히 있다는 것은 아무런 영광스러운 일이 있을 수 없고, 그 영광의 자리를 떠나서 세상에 오셨다는 것이 가장 영광스러운 일이다. 만일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일이 없이 하나님 앞에만 있었다면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누구인지를 알 자가 하나도 없으므로 아무런 영광도 나타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천군 천사들이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때에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찬송을 불렀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면서 베들레헴 말구유에 누워 있다는 것은 인간들이 보기에는 부끄러운 일 같지만,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될 일이라는 것이다. 왜냐 하면 지극히 높으신 자가 지극히 낮은 자리를 찾아 왔다는 것이 지극히 영광스럽게 될 시작이기 때문이다.

  사람이라는 것은 지극히 낮은 자리에서부터 점점 더 올라가는 것이 영광스러운 일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말구유에 누워 있을 때부터 억울하게 환란을 만나는 일이 있게 되었지만 이것은 영광을 나타내기 시작하는 싸움이었다. 그리고 헤롯왕이 어린 아기인 예수를 죽이려고 군사를 동원시켰지만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 되셨고, 헤롯왕은 그 몸이 벌레에게 먹혀 죽었다. 언제나 영광스러운 일은 침략하는 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침략을 당한 사람에게 있게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침략을 당한 자에게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사람이 남을 해코자 하는 일을 한다는 것은 부끄러움을 나타내는 일이요, 남을 살리고자 하는 일을 한다는 것은 영광스럽게 되는 일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보내심을 받아 왔다는 것이 예수님께도 영광스러운 일이 되었고, 하나님께도 영광스러운 일이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영광스러운 보좌 위에 계신다 하여도 인간 세상에 아들을 보내신 일이 없었다면 세상에서는 영광을 받으실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왜냐 하면 하나님의 창조를 받은 인간들이 하나님보다도 마귀를 섬기는 일이 더 많은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가는 일이 있다면 이것은 영광스러운 일이 된다. 왜냐 하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을 위하여 보낸다는 것은 하나님의 대행자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을 찾아 오셔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심과 같이 내가 너희를 보내노라고 하시고 네가 뉘 죄든지 정하면 하늘에서도 정하여 지고, 사하면 하늘에서도 사하여지리라고 하신 것이 사람으로서는 영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고기를 낚던 어부인 베드로가 이렇게 된다는 것은 너무나 영광스러운 일이다(요20:21~23).

 

  2. 마귀를 이기게 된 일이다 (29~31)

  첫째아담 하나가 마귀에게 지므로 인간에게 수치수러운 일이 시작된 것이요, 둘째아담 예수님 한 분이 마귀를 이기시므로 인간들에게 영광스러운 일이 시작된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승리하신 일이 없었다면 하나님께서는 마귀를 이길 수 없는 세상을 어찌할 수 없이 되었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한 분이 십자가에 죽으시므로써 마귀를 이기는 심판 권세가 이루어진다는 것은 참으로 영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하늘에서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겠다고 하는 음성이 들려온 것이다. 이것은 첫째:하나님의 아들이 도성인신하여 세상에 온 것이 영광스러운 일이라는 것이요, 둘째:십자가에 죽어서 마귀를 이기게 된 것이 영광스러운 일이라는 것이다.

  사람 한 몸이 죽어서 영광스럽게 되는 일은 예수님 밖에는 이런 일을 할 자격을 가진 사람이 없다. 세상 사람이 아무리 높다 하여도 자기가 죽어서 마귀를 이길 자가 없고, 사람이 마귀에게 졌기 때문에 죽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죽음은 부끄러운 죽음이요, 그리스도의 죽음은 영광스러운 죽음이다.

 

  3. 많은 사람을 이끄는 일이다 (32~33)

  세상에 많은 영웅들이 일시적으로 사람을 이끄는 일이 있었지만 이것은 아무런 열매 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자기가 죽어서 마귀를 이기고 많은 사람을 이끄는 것은 영원한 천국을 이루되 세세왕국을 이루는 일이니 이것이 제일로 영광스러운 일이다.

  소위 강대국이라는 나라들이 일시는 영토를 넓히고, 영광스러운 일같이 자랑했었지만 그 결말은 남을 죽인 것 같이 자기도 원수에게 쓰러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죽어서 세계 통일의 왕국을 이루는 것은 다시는 누가 침략할 수 없으므로 영원히 영광스러운 일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이 네가 나를 따라 오면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고 하셨다. 이와 같이 고기를 낚아 먹던 베드로가 한번 설교할 때에 3천명이 회개하게 되는 일에서부터 세계 사람을 천국으로 이끌어 들이는 열쇠를 받은 사람이 되었다.

  말세에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 중에서 종말의 진리를 바로 증거하여 환란과 재앙 가운데서 많은 사람을 이끌어 내어 새 시대로 인도하는 일도 영광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사49:21~23).

 

  결    론

  사람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영광스럽게 되어 보겠다는 것이 바라는 소망일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되어야 영광스럽게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꿈을 꾸는 사람같이 허무한 생활을 하다가 후회 막심이라는 비극을 이루고 만다.

  그러므로 우리는 제일로 영광스럽게 되는 일이 무엇인 것을 바로 알아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인류 종말에 악의 역사는 무엇인가

- 계 9:6~11 -

 

  인류 종말이라는 것은 악의 세력이 극도로 강해지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이 계시를 볼 때에 인류 종말에 악의 세력을 황충이로 보았던 것이다. 우리는 황충이의 모양에서 일곱 가지로 보여진 뜻을 바로 알아 지금 사단의 역사가 무엇인지를 분별해야 된다. 왜냐 하면 무엇이 사단의 역사인지 이것을 잘 분별하지 못한다면 황충이의 피해를 당할 위험성이 많기 때문이다. 이제 인간 종말에 악의 역사는 어떻다는 것을 본문에서 다음과 같이 증거 한다.

 

  1. 모양은 전쟁을 위하여 예비한 말 같음 (7상반절)

  사단의 역사라는 것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분노를 발하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전쟁을 위하여 예비한 말들이 닥치는 대로 입으로 물어뜯고 발로 차듯이 공연히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고 남의 잘못한 점을 드러내어 공격하기를 좋아하는 것은 사단의 역사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앞에 어떤 사람이 와서 공연히 남을 물고 뜯는 말을 한다든지 남을 쳐서 말하기를 좋아한다면 사단의 자식인줄 알고 가까이 하지 말아야 될 것이다.

 

  2. 머리에 금 면류관 비슷한 것을 썼음 (7중반절)

  오늘날 명예를 탐하고 인간 방법으로 남을 이겨 보려고 일을 하는 것은 사단의 역사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에게 멸시를 받고 압박을 받는 일이 있다 하여도 주님께서 주시는 면류관을 생각하고 나가는 것이 있어야만 된다.

  사람에게 명예를 얻고 권리를 잡아 보려고 하는 것은 사단의 자식이 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 방법으로 자기 권리를 내세우고자 하는 사람과는 가까이 하지 말아야 될 것이다.

 

  3. 얼굴은 사람의 얼굴 같음 (7하반절)

  우리 인생이라는 것은 즉 양심인데 이 양심을 떠나서 겉모양만 내어보려고 하는 태도를 취한다는 것은 사단의 역사가 분명하다.     기독교라는 것은 청결한 양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사명이다. 그런데 사람에게 정당성을 보이려고 겉모양을 내고 있다는 것은 사단의 자식이 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양심을 떠나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행동을 취하는 자를 가까이하지 말아야 될 것이다.

 

  4. 머리털은 여자의 머리털 같음 (8상반절)

  사람이 아름다운 모양을 내어보려고 애쓴다는 것은 벌써 사단의 역사가 온 증거이다. 참된 성신의 역사를 받은 자는 아름다운 모양을 내려는 마음이 없어지게 되는 것이요, 사단의 역사를 받은 자는 사람 앞에 아름답게 보여서 그 사람을 자기 앞으로 이끌어 보려는 마음이 강하게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로 사람을 인도하지 않고 사람의 마음을 자기에게로 이끌어 가는 일을 하는 사람은 사단의 자식인줄 알고 가까이하지 않아야 된다. 어리석은 인간들은 자기 마음을 이끄는 대로 따라 가다가 결국에는 망하게 되는 것이다.

 

  5. 이는 사자의 이 같음 (8하반절)

  기독교인이 조금이라도 남을 용서하지 않으면 마음이 괴롭게 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신앙 양심이다. 그러나 사단의 역사가 따르는 사람은 남의 허물을 잡아서 그 사람을 자기 앞에 굴복시켜 이용하려고 일을 하게 된다.

  사자가 무엇이나 물어뜯어 먹기가 목적인 것 같이 남의 권리를 박탈하고 무자비한 투쟁을 해서라도 자기의 것을 삼아 보려고 하는 것은 사단의 역사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일을 하는 사람은 사단의 자식인 줄 알고 가까이 하지 말아야 될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 같이 형제를 용서하는 것 외에는 다 성신의 역사가 아닌 것으로 보아야 한다. 왜냐 하면 성신은 완전한 사람을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요 완전치 못한 사람을 완전하게 하려고 오셨기 때문이다.

 

  6. 흉갑은 철흉갑 같음 (9상반절)

  진리가 아닌 일에 단결이 된다는 것은 사단의 역사라고 본다. 사람이라는 것은 진리가 아닌 일에는 단결하기가 쉬워도 참된 진리 안에는 단결하기가 대단히 어렵다고 볼 수 있다.

  사단의 역사라는 것은 진리를 대적하는 일에 철흉갑같이 뭉쳐지는 것인데 이것이 악당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리가 아닌 일에 뭉쳐진 단체에는 들어갈 필요도 없다. 오늘날 사람들이 공연히 필요도 없는 일에 단결해서 충동을 받게 되는 것은 사단의 역사라고 본다.

 

  7. 날개들의 소리는 병마와 많은 말들이 전장으로 달려들어가는 소리 같음 (9하반절)

  성신의 역사라는 것은 위협을 주는 일이 없고 항상 평화롭고도 자유로운 활동이 있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위협을 주고 자유가 없이하는 일은 사단의 역사가 분명하다.

  우리는 위협을 주면서 강압적으로 하는 일에는 절대로 동참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만일 기독교가 어떤 사람에게 위협을 주고 강압적으로 하는 일이 있다면 이것은 영원한 권세라고 볼 수 없다. 언제나 하나님께서는 자유로운 활동에서 승리하도록 완전역사를 하시는 것이다.

 

  결    론

  인간 종말의 악의 세력은 어떠한 방법으로 역사한다는 것을 일곱 가지 모양으로 보여 주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역사를 하는 자들에게 전갈과 같이 사람을 괴롭히는 권세를 준 것은 완전 무장을 갖춘 자가 아니고는 역사를 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방법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남은 종이 되려면 일곱 가지로 들어오는 악의 세력을 주의해서 여기에 동참하지 않아야만 될 것이다.

 

 

 

 장년 공과편 - 인간 종말의 큰 미혹을 벗어날 길

 

  총    론

  하나님께서 인간 종말에는 큰 미혹을 주되 그 미혹을 받은 자는 없이 하고, 미혹을 받지 않고 끝까지 이긴 자만으로 새 시대를 이루시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했다는 조건에서 말씀대로 축복을 누리도록 하는 것을 지상에 이루어지는 성도의 나라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큰 축복이라는 것은 아무런 사람에게나 줄 수가 없고, 옛 뱀인 붉은 용을 들어서 미혹을 시켜 보고 여기에서 이긴 자에게만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미혹을 시키던 붉은 용과 그 미혹을 받은 사람들을 이 땅에서 완전히 없애 버리는 것을 인간 종말에 인종 전멸의 심판이라고 한다.

  이제 큰 미혹을 벗어날 길은 어떠한 길이냐 하는 것을 공부하기로 한다.

 

제1과  끝까지 참는 길

- 마 24:10~14,  요절:13 -

 

  서    론

  인간 종말의 큰 미혹은 기독교 안에 거짓 선지자가 권리를 쥐므로 사랑이 식어지는 교회가 되는 일이다. 초대 교회에도 거짓 선지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인간 종말에는 참된 종을 만나기가 어려울 정도로 많아질 것을 주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가운데서 큰 미혹을 벗어나려면 끝까지 참는 길을 가야 할 것이다. 왜냐 하면 도저히 참기가 어려운 난국이 오기 때문이다.

 

  1대지 :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지게 되므로 (10)

  교회라는 것은 서로 돕고, 서로 사랑해도 마귀의 미혹이 들어올 때에는 이기기가 어려운데,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는 상태에 들어간다면 이것이 큰 문제가 되는 것이다. 교회 밖의 시험보다도 교회 안에서 믿는 형제끼리 이렇게 된다면 그 가운데서 참고 나간다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환경 속에서라도 끝까지 참고 나가는 자라야 주님의 보호를 받게 될 것이다.

 

  2대지 : 거짓 선지가 많이 일어나므로 (11)

  하나님의 교회에 거짓 선지가 많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은 큰 일이 아닐 수 없다. 왜냐 하면 지도자들이 옳게 인도하여도 인간 종말의 큰 미혹을 이기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서 많은 사람을 미혹하는 때가 올 때에 이리저리 치우치지 않고 나가는 자라야 끝까지 참는 자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아무리 억울함을 당하고 쫓겨남을 받는다 하여도 끝까지 참는 자는 큰 미혹을 벗어나게 될 것이다.

 

  3대지 : 사랑이 식으므로 (12)

  교회라는 것은 불법의 세력이 성하게 되면 모든 일을 사랑으로 해 나갈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때에 끝까지 참는 자라야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교회라는 것은 항상 하나님의 은총이 내리게 되어야만 사랑의 불이 붙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모든 일을 바로 해 나가지 못할 때에 하나님의 은혜가 내리지 않게 되니 누구든지 다 사랑이 식어지게 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이때에 순교적인 생활을 각오하고 나가는 자가 되어야만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참고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주 재림시기에 끝까지 참아야만 될 환경을 만들어 놓는 것은 주님의 재림을 영접할 사람은 왕권을 받을 자이기 때문에 이 시험을 이겨야만 된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내가 다시 올 때에 믿음을 보겠냐고 하신 것은 재림의 주를 맞이할 만한 믿음을 가진 자가 심히 적다는 것을 가르친 말씀이다.

  가장 복 있는 자는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끝까지 참고 남은 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큰 축복을 받을 자에게 어려운 시험을 통과시키는 것이다. 큰 시험과 미혹도, 큰 축복과 영광도 인간 종말에 있게 되는데, 끝까지 참고 나가는 자라야 이 큰 시험을 이길 수 있고 큰 축복을 받을 수도 있다.

 

  결    론

  하나님께서 기독교 안에 무서운 미혹을 들어오게 하시는 것은 교회가 너무나 부패하였으므로 그 안에서 쭉정과 알곡을 가르기 위한 방법이다. 참된 성도라는 것은 아무리 큰 미혹이 온다 하여도 끝까지 참고 나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큰 역사는 끝까지 참고 나가는 자에게 오되 그 몸이 살아서 변화 승천하는 역사로 오게 된다.

  모든 선지는 하나같이 말하기를 재림의 주가 오실 때에 남을 자는 쫓겨나는 자요, 수욕을 받는 자요, 가련하고 빈핍한 자요, 유리하는 자라고 하였다. 앞으로 이 교계 안에서 남을 수 있는 자가 되려면 조금이라도 두려워하지 않고, 불의와 동참하지 않고 강하고 담대하게 나가는 자가 되어야만 할 것이다. 이렇게 되므로 끝까지 참는 자가 큰 역사를 하게 되고 큰 축복을 받게 되는 동시에 큰 영광을 받게 된다. 이러한 것을 두고 주님께서 내가 다시 올 때까지 깨어 있는 자는 복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제2과  옳은 스승을 따라가게 되는 길

- 사 30:18~29,  요절:21 -

 

  서    론

  하나님께서 인류 종말에는 택한 자에게 옳은 스승을 만나게 해서 새 시대로 인도하시되 멸하는 키로 열방을 까부르며 미혹되게 하는 자갈을 여러 민족의 입에 먹이신다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참된 종을 따르는 자만 새로운 시대로 인도하기 위한 방법이다.

  이제 옳은 스승을 따라가는 자가 되려면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본문으로 증거한다.

 

  1대지 : 기다리고 사모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18~19)

  어느 나라나 어느 민족이나 할 것 없이 어떠한 시련이 온다 해도 마음이 변치 않고 끝까지 기다리며 참된 신앙의 노선을 걸어가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응답을 내리시되 옳은 스승을 만나도록 역사하시므로 새 시대의 축복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날까지는 무조건 죄인을 불렀지만 열방을 멸하는 키로 까불어 보고 미혹의 자갈로 여러 민족을 미혹시켜 볼 때는 끝까지 기다리고 사모하는 자만을 뽑아 내어 새 시대로 인도하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지금은 여러 가지 시련을 놓고 기다리고 사모하는 사람에게 역사하시는 때이다.

  은혜시대에는 기독교를 반대하던 자라도 회개할 기회를 주었지만, 인간 종말에는 기다리고 사모하는 자에게만 하나님께서 새 시대로 인도하는 역사를 따라가도록 하시는 것이다.

 

  2대지 : 환란과 고생이 있어도 정로를 가는 자가 되어야 한다 (20~26)

  하나님께서 심판기에는 택한 자에게 환란과 고생을 당하게 하시면서 옳은 스승을 따라 가도록끔 인도하시는 것이다. 이렇게 하시는 것은 세상의 불탈 것을 위하여 수고하지 말고 옳은 스승을 따라서 같이 받들어 일하도록 하기 위한 방법이다. 그러므로 환란, 재앙 가운데서도 남을 자가 될 종에게는 남보다 더 많은 시련을 주어서 겸손한 마음으로 순종하도록 하는 것이다.

  누구든지 새 땅 축복을 받게 될 사람은 옳은 스승을 따라가도록끔 하나님께서 징계하시는 일이 있으므로 자연히 하나가 된다. 예를 든다면 양을 치는 목자가 가시밭과 돌작밭을 지나서 있는 푸른 초장과 시냇가로 양떼들을 인도하기 위해서는 지팡이로 때리면서라도 한 곳으로 몰아넣는 일이 있다.

  이와 같이 새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축복으로 받는 세계로 인도하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택한 자에게 여러 가지 환란과 고생을 주시면서 옳은 스승을 따라가도록 한 곳으로 모으시는 것이다.

 

  3대지 : 여호와의 산을 향하여 나아가는 자이다 (27~29)

  아무리 진노가 빽빽한 연기같이 일어나고, 환란이 하수같이 온다 하여도 여호와의 산을 향하여 나아가는 자는 유월절과 같은 기쁨이 올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 가지 미혹이 오는 것은 여호와의 산으로 사람을 모으기 위한 목적이니, 누구든지 여호와의 산을 바라보고 용기 있게 나아가는 자는 승리하게 될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예를 든다면 어떤 사람이 누구를 인도할 때에 여러 가지 고난을 무릅쓰고라도 그 목적지에 도착하도록 방침을 쓰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택한 자에게 여호와의 산을 향하여 가도록 하시되 흑암의 세력과 여러 가지 환란으로 시련시켜서 인도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아무리 미혹이 강하다 하여도 여호와의 산을 향하여 용기 있게 나아가는 자가 되어야 한다. 아무런 미혹도 없고, 환란도 없는 평탄한 길로 가는 것이 여호와의 산을 향하여 가는 길이 아니요, 여러 가지 어려운 시험이 오며 견디기가 어려운 환경이 부딪친다 하여도 용기있게 나아가는 길이 여호와의 산을 향하여 가는 길이다.

  에덴 동산에서 사람을 미혹시켜 보던 그 법은 여호와의 산을 향하여 나아가는 자에게도 반드시 있다는 것을 알고 담대히 나가는 자라면 새 시대의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결    론

  하나님께서 천국으로 사람을 인도하실 때에는 죽는 즉시에 회개하여도 지옥을 면하게 되었다. 그러나 새 시대로 인도하실 때에는 여호와 기다리시면서 모든 사람을 향하여 여러 가지 시련을 통과시키는 것은 합당한 자에게만 축복을 주기 위한 선한 방법이다.

 

 

제3과  목숨을 아끼지 않고 나가는 길

- 계 12:7~11,  요절:9 -

 

  서    론

  하나님께서 인간 종말에는 붉은 용으로 천하 사람을 꾀어보도록 하신 후에 이 꾀임을 받지 않고 이긴 자의 수가 완전히 찰 때에 용을 하늘에서 내려 쫓는 것이다. 그리고 땅에서 용의 세력을 없이하는 심판이 있게 되므로 이 땅은 미혹이 없는 완전한 새 시대가 이루어지게 된다. 이렇게 하시는 것은 목숨을 아끼지 않고 말씀을 증거하는 종들로 완전한 그리스도의 나라를 이루기 위한 방법이다.

 

  1대지 : 미가엘이 용과 싸우는 일 (7~9)

  미가엘이 용과 더불어 싸우는 것은 목숨을 아끼지 않고 말씀을 전하는 종을 돕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붉은 용에게 얼마든지 참소할 수 있는 권리를 주어서 택한 종을 꾀이도록 하시고, 천사를 동원시켜 증거의 말씀을 인하여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우는 종을 도와주게 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천사들에게 용과 싸우게 하신 것은 그리스도의 나라를 위하여 목숨 바친 종을 도와서 싸워 주게 하신 것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워 나가는 자라면 하나님께서 천사를 동원시켜 주시므로 승리하게 될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자기 목숨을 아끼는 사람은 아무리 천사가 동원했다 하여도 싸워 줄 수가 없다.

  붉은 용을 들어서 꾀이는 것은 목숨을 아끼는 종은 떨어지게 하고 목숨을 아끼지 않고 증거하는 종을 승리하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다. 그러므로 왕권의 수가 완전히 차게 될 때에는 붉은 용은 완전히 패전하게 되므로 공중의 권세를 가지지 못하고 땅으로 쫓겨 내리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인류 종말에 이 땅에 화가 있게 되는 때이다. 이날까지는 아무리 세상이 악해도 화가 있지 않았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참된 종들을 시련 시켜서 그 인격이 왕권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하는 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때에는 악자들이 세상에서 마음대로 세력을 잡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왕국이 이루어질 때는 이 세상에 큰 화가 오되 마귀를 통하여 오게 된다.

 

  2대지 :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 하는 일 (10)

  참소라는 것은 두 가지가 있다.

  첫째 : 택한 사람이 죄를 지을 때마다 죄를 짓게 하는 마귀는 하나님 앞에 참소를 올리게 된다. 이것은 아무리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라도 죄가 있을 때에는 마귀의 지배를 받게 되므로 그 사람을 마음대로 주관할 권리를 가지고자 마귀가 참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죄가 있는 사람에게 용서없이 징계를 해서라도 회개하게 하시는 것이다. 왜냐 하면 아무리 죄를 지은 사람이라도 회개만 하게 되면 십자가의 공로로 용서받게 되는 동시에 마귀 참소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

  둘째 : 택한 종이 말씀의 증거가 잘못될 때마다 말씀을 혼선시키는 마귀는 하나님 앞에 참소를 올리게 된다. 그러므로 말씀을 증거하는 종이 진리에 탈선될 때에는 마귀에게 침투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말씀 증거가 바르지 못한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응답을 나릴 수가 없고, 진리에 바로 설 때까지는 버려 둘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자기의 말씀 증거가 진리에서 탈선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고 바로 서게 될 때에는 말씀대로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 마귀 참소를 없이해 주시므로 날마다 새로운 역사를 받게 되는 것이다.

  언제나 마귀 참소는 피와 증거의 말씀으로만 이길 수 있다. 마귀 역사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람이 왕권을 완전히 받기까지만 들어 쓰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귀는 절대로 자행자지하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허락이 있어야만 하나님의 자녀에게 와서 꾀어 볼 수도 있고 시험할 수도 있다.

  마귀 참소라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에게만 있다. 그러므로 이 참소에 걸리게 되면 영계가 정지 상태에 있게 되고, 이기면 영계가 독수리 같이 올라가게 되는데, 이것이 마귀를 들어 쓰시는 하나님의 법이다.

 

  3대지 : 피와 증거 하는 말씀을 인하여 이기는 일 (11)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미 마귀를 이긴 십자가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피는 얼마든지 마귀참소를 이길 수 있는 권세가 있는 것이다. 아무리 마귀가 참소를 강하게 한다 하여도 십자가의 보혈을 참으로 믿고 회개하는 자를 지배할 권리는 없다.

  그리고 증거의 말씀을 통하여 마귀를 이기는 것은 말씀대로 백성들을 구원하시고 말씀대로 세상의 마귀를 없앨 수도 있는 예수님께서 권리를 가지고 계신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십자가의 피를 바로 믿고 회개한다면 주님께서 용서할 책임이 있고, 인간 종말에 증거의 말씀을 바로 전하는 종이라면 주님께서 말씀대로 마귀가 참소 하지 못하도록 보호할 책임도 있다. 그리고 이 종에게는 천사를 동원시켜 싸워 주게 할 책임도 주님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귀 미혹을 이기는 종이 되려면 십자가의 보혈을 확실히 믿으므로 산 체험이 있고, 증거의 말씀을 통하여 받는 권세 새 힘의 역사를 완전히 체험해서 담대히 나가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를 통하여 오는 체험을 인격적으로 받지 못하고 증거의 말씀을 통하여 오는 체험을 생활에서 받지 못했다면 그 사람은 마귀 참소를 이길 만한 자격이 없다.

 

  결    론

  하나님께서 마귀 참소를 들어 쓰시는 것은 영혼을 구원시키자는 목적이 아니요, 그리스도의 왕국에 들어갈 종들에게 왕권을 주기 위한 목적이다. 이것을 본다면 마귀의 꾀임이라는 것은 택한 자에게 구원을 빼앗을 수는 없고, 왕권을 받지 못하도록 방해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왕권을 받으려면 목숨을 아끼지 않고 나가는 자라야 된다는 것이다.

 

 

제4과  양육 받는 길

- 계 12:13~16, 13:11~18,  요절12:14 -

 

  서    론

  하나님께서 인간 종말에는 붉은 용을 허락해서 두 가지로 미혹을 시켜 본다.

  첫째 : 참소권을 가지고 종들을 미혹시켜 본다. 그리고 이 마귀 참소를 이긴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왕권을 받게 하신다.

  둘째 : 목숨을 아끼지 않고 맡은 사명에 충성을 다하는 자들의 수가 완전히 차게 될 때에 용이 땅으로 쫓겨 내려와서 모든 백성들을 미혹시켜 본다. 그러므로 이때에는 하나님의 택한 교회를 예비처에 양육하는 일이 있다. 마지막 큰 미혹의 환란이 올 때에 신령한 교회를 예비처에 양육하는 일이 있고, 그 후에 만왕의 왕이 지상 강림하여 세상을 심판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짐승의 표를 받고 그 앞에 절한 자는 완전히 없이하고, 짐승의 표를 받지 않고 그 앞에 절하지 않은 사람만 구원해 주는 심판이 올 때에는 신령한 교회를 예비처에서 다음과 같이 양육을 하게 된다.

 

  1대지 : 용기를 얻는 교회 (12:13~14)

  교회라는 것은 어려운 일이 올 때에 더 큰 힘을 얻는 것이 있어야만 한다. 죽어서 천당을 가는 교회보다도 큰 미혹이 올 때에 그 미혹을 받지 않고 환란에서 양육을 받아 새 시대에 들어갈 교회는 하나님께서 해산의 수고를 다하는 힘을 주시는 동시에 큰 독수리가 날개를 힘있게 날듯이 솟구쳐 나가도록 하시는 것이다.

  몸이 죽고 영혼이 구원받는 교회는 사망의 권세에게 피해를 당했지만 말세에 예언의 말씀을 믿고 나가는 교회는 조금이라도 피해를 당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되 예언의 말씀대로 힘을 주시고, 양육을 하시고, 보호하시는 것이다.

 

  2대지 : 피해를 받지 않는 교회 (15~16)

  마귀 참소를 이긴 종들에게는 말씀을 전하는 일에 힘을 주시는 동시에 피해를 받지 않도록 하셨고, 이 종을 따라가는 교회는 믿고 순종하는 일에 용기를 주어 피해를 당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양육하신다. 이와 같이 믿고 순종하므로 양육을 받는 자는 남은 백성이 되어 새 시대의 지상 축복을 받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남을 살리기 위하여 복음을 전하는 일에 충성을 다하던 자는 공중에 나타나시는 신랑 주를 맞이하여 구름을 타고 올라가게 되고(계11:12), 예언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일에 용기를 내는 자는 붉은 용의 피해를 당치 않도록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게 된다.

  그러므로 왕권을 받을 종은 강하게 역사하도록 권세 새 힘을 주는 것이요, 양육을 받는 교회는 원수를 무서워하지 않고 말씀에 순종하도록 역사해서 천년시대의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시되 그 인격을 양육하시는 것이다.

 

  3대지 : 양육해야 될 이유 (13:11~18)

  거짓 선지가 짐승 앞에 경배하지 않으면 누구든지 다 죽이는 일을 하며, 표를 받지 않는 자는 매매를 하지 못하게 하는 환란이 있게 된다. 이것이 후3년 반이라는 환란기이다. 이때는 누구든지 다 미혹을 받아 짐승의 표를 받게 되는 흑암시대이다. 그러나 이 환란이 있은 후에 심판이 올 때에는 누구든지 짐승 앞에 절하고, 표를 받은 자는 밤낮 괴로움을 받는 재앙이 내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새 시대라는 것은 짐승 앞에 절하지 않고,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만 남게 되어 축복을 받는 곳이므로 거짓 선지의 피해를 당치 않도록 예비처에서 보호 양육하는 일이 있어야만 되는 것이다.

  계시록 13장의 머리가 상했다 나은 짐승은 붉은 용의 큰 권세를 받은 짐승이므로 그 권세를 당할 자는 전혀 없다. 오직 하나님의 큰 권세를 받고 나오는 말세의 증인으로만 붉은 용의 권세를 이길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용의 큰 권세를 이긴 자는 들림을 받게 되고, 용의 큰 권세를 이기고 나가는 종의 전하는 말을 순종하는 교회는 미혹에 들지 않도록 하며, 피해를 당치 않도록 예비처에 양육하게 된다. 이와 같은 양육이 없다면 붉은 용의 박해를 이길 자가 전혀 없다.

 

  결    론

  하나님께서 변화 승천하는 자에게는 붉은 용으로 참소를 하게 하신다. 그리고 붉은 용의 참소를 이긴 자는 들림을 받게 하고, 남은 교회는 붉은 용의 박해를 받지 않도록 보호해서 지상 왕국의 백성이 되게 하신다. 이와 같은 것을 기독교 종말의 구원이라고 한다.

 

 

 

 어린이 공과편 - 요한계시록 공부

 

  총    론

  학생들, 우리가 지난 주일까지는 과거에 된 일을 공부했습니다. 그러나 이번 주일부터는 앞으로 될 일을 분명히 알 수 있는 계시록을 공부하기로 하겠습니다.  

  이 계시록이라는 것은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인간 종말에 될 일을 인간들이 분명히 알도록끔 천사를 보내서 지시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공부하게 되면, 우리 학생들은 앞으로 어떻게 해야 새 시대에 간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됩니다.

  학생들, 생각해 보세요. 어떤 사람이 길을 걸어갈 때에 이 길을 계속으로 걸어서 가게 되면 어느 곳에 가게 된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와 같이 우리 학생들도 어떠한 길을 가야 새 시대에 간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계시록 1장부터 자세히 배우기로 하겠습니다.

 

제1과  속히 될 일을 보여준 천사들

- 계 1:1, 22:6~9,  요절1:1 -

 

  서    론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앞으로 될 일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천사를 보내서 알려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실 때에도, 성모 마리아에게 천사가 나타나서 네가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앞으로 영원한 왕이 된다고 지시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실 때에도 천사가 양치는 목자들에게 나타나서 말하기를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너희는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어린 아기를 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학생들, 이것 보세요.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서 아들을 낳으리라고 지시한 그대로 성신의 역사가 임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낳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을 때에는 무덤을 찾아 온 여자들에게 천사가 나타나서 말하기를 너희가 찾는 예수는 부활했으니 갈릴리에 가서 만나리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구름을 타고 승천하실 때에도 천사가 나타나서 말하기를 예수님께서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간 그대로 다시 오신다고 했습니다.  

  학생들, 오늘은 천사가 나타나서 앞으로 세상이 어떻게 된다는 것을 보여준 계시록을 공부하겠습니다.

 

  1대지 : 속히 될 일을 보여준 천사 (계1:1, 22:6)

  천사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마음대로 부릴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앞으로 될 일을 알려주기도 하고, 보호하기도 하는 천사들입니다. 학생들, 여러분들이 다니고 있는 학교에서 앞으로 이 세상이 어떻게 된다는 것을 분명히 가르쳐 주는 선생님이 있습니까? 네, 없습니다. 선생님도 내일에 될 일은 모르고 있습니다. 자기가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학생들에게 앞으로 될 일을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학생들을 낳아서 기르는 부모님도 앞으로 될 일은 전혀 모릅니다. 아무리 박사들이 과학을 발전시켜 놓았다 하여도 앞으로 될 일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학생들은 천사가 보여준 계시록을 잘 배우면 세상이 앞으로 어떻게 된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됩니다.

  학생들, 우리가 계시록을 공부하는 것이 필요합니까? 필요하지 않습니까? 우리 학생들 중에서 필요하지 않다고 할 사람은 하나도 없을 줄 압니다. 계시록을 공부해 보면, 천사들이 한 시간에 세상이 불타 버리는 전쟁이 일어날 것도 보여 주었고, 한 시간에 불탈 때에 죽는 사람의 광경도 보여 주었고, 죽지 않고 새 시대에 가는 사람들의 광경도 보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대한 민국이 얼마나 훌륭한 나라가 된다는 것도 보여 주었고, 공산당이 말세에 나왔다가 반드시 망할 것도 보여 주었습니다.

  이 계시록은 모든 사람들이 알지 못하다가 온 세계가 불타는 전쟁이 일어날 때에 비로소 깨닫게 될 것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과학이 발달된 오늘에 와서야 계시록을 분명히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천사에 대한 것만 간단히 공부하겠습니다.

 

  2대지 : 말씀을 지키는 사람을 도와주는 천사 (8~9)

  사도 요한은 계시록을 보여 주는 천사 앞에 절을 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때 천사는 말하기를 나는 이 계시록의 말씀을 지키는 자들과 함께 하는 종이니 절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학생들도 계시록을 잘 공부하고 이 말씀대로 지키면 천사가 같이 해주므로 무서운 환란이 와도 죽지 않고 살아서 새 시대에 가게 되는 것입니다.

  과거 바벨론 나라에 잡혀갔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세 사람이 느부갓네살 왕이 섬기는 우상 앞에 절하지 않는다고 해서 뜨거운 풀무 불 속에 들어간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 사람에게 천사가 같이 하므로 불에 그슬리지도 않고 구원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학생들도 이 계시록을 잘 공부해서 말씀대로 지켜 나가면 천사가 항상 같이 하므로 아무리 세계가 불타는 날이라도 죽지 않고 살아서 새 시대에 들어갈 수 있게 됩니다.

 

  묻 는  말

 1. 학생들이 앞으로 될 일을 알려면 무슨 책을 공부해야 됩니까?

 2. 앞으로 어떠한 사람에게 천사가 같이 합니까?

 3.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왜 풀무 불 속에 들어가게 되었습니까?

 

 

제2과  밧모 섬에 있는 요한

- 계 1:9~12,  요절:9 -

 

  서    론

  예수님에게는 열 두 제자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 나이가 제일 어린 사람은 요한입니다. 그러나 가장 참을성이 많은 사람이 요한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은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자기 앞에 일어난다 하여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에 모든 제자들은 도망을 갔지만 요한은 그 앞에서 울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요한을 내려다보시며 말씀하시기를 너는 나 대신 아들이 되어 성모 마리아를 받들어 섬기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요한은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시고 친  어머니 같이 섬겼던 것입니다(요19:26~27).  

  학생들, 오늘은 요한이 왜 밧모라는 섬에 가서 있게 되었느냐에 대하여 간단히 공부하겠습니다.

 

  1대지 : 환란을 만나 밧모 섬에 있게 됨 (9)

  학생들, 예수님께서 세상에 탄생하실 때에 어느 나라가 제일 강대국인지 아십니까? 로마라는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나신 유대 나라도 로마의 식민지로 되어 있었습니다. 십자가에 예수님을 못박는 것도 로마 나라에서 보낸 빌라도 라는 총독이 허락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성신이 강림할 때에는 유대땅에서부터 로마에까지 전도하게 되었습니다.  

  학생들 로마에까지 전도한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사도 바울입니다. 그러므로 로마 나라에도 많은 교회가 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로마 나라에 네로라는 황제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서기 54년부터 68년까지 정치를 한 가장 악한 왕입니다. 이 네로 황제가 54년 7월 14일부터 8월 19일까지 로마의 서울에 불을 놓아서 10구나 태워 놓고 거짓으로 기독교인이 불을 질렀다고 뒤집어 씌웠습니다. 왜 이렇게 했는지 학생들은 아십니까? 이것은 예수 믿는 사람을 나쁘게 말해서 무조건 다 잡아 죽이기 위한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이때에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기도 하고, 가죽에 싸서 개에게 물리게 해서 죽이기도 하고, 섶에 묶어서 불에 태워 죽이기도 하고, 그 밖에 여러 가지 방법으로 죽였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때에 칼에 목이 잘려 죽었고, 사도 베드로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아무리 죽이려고 해도 죽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네로 황제는 요한을 사람이 살지 않고 먹을 것도 없는 밧모라는 섬으로 보냈던 것입니다. 밧모라는 섬은 지중해 복판에 있는 조그만 섬입니다. 지금 우리 나라의 제주도와 같은 섬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을 죽이려던 사람이 요한을 전도하지 못하도록 사람들이 마음대로 출입 못하는 외딴 섬으로 보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한에게 이러한 일을 만나게 하신 것은 계시록을 받게 하기 위한 방법입니다.

  학생들, 생각해 보세요. 소위 문명 국가라는 로마 나라의 황제가 이렇게 악한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로마는 망하였고 우리 교회는 세계 만방에 전파되었습니다. 지금도 네로 황제와 같이 공산당이 아무리 교회를 핍박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죽이지만, 망할 것은 분명한 일입니다. 이것이 밧모 섬에서 사도 요한이가 본 계시입니다. 요한은 네로 황제와 같은 악한 정치가 인간 종말에 또 다시 나올 것을 보았는데, 이것을 붉은 짐승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짐승은 반드시 망한다고 계시록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2대지 : 주의 날에 큰 계시를 보게 됨 (10~11)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은 지금 우리가 4월마다 지키고 있는 부활절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을 우리가 주일로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날은 거룩히 보내야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밧모 섬에 있는 요한에게 큰 나팔을 부는 소리 같은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요한에게 그 음성이 들리기를 “네가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 아시아에 있는 교회입니다.  

  이 일곱 교회는 그 시대에 있던 교회인데, 그 곳에 써 보낸 말씀이 오늘 우리 학생들이 공부하는 계시록입니다. 그때 사람들은 이 책의 뜻을 하나도 몰랐지만, 우리 나라 부산 영도라는 곳에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집을 지어 주고, 교회를 지어 주고, 밤을 새워 기도하던 이뢰자 목사님에게 계시록 해석의 음성이 하늘로부터 들려왔습니다.

  요한은 밧모 섬에서 계시를 보았지만, 이뢰자 목사님은 해석하는 음성을 세 번 듣고 네 번째 들리는 대로 기록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계시록 공부는 이뢰자 목사님이 해석을 받아 기록한 그대로 배우는 것입니다. 이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생들은 죽지 않고 새 시대에 갈 수 있습니다.

 

  묻 는  말

 1. 계시록을 받은 장소는 어디입니까?

 2. 계시록을 받게 된 날은 어떤 날입니까?

 3. 로마 나라의 어느 황제가 사도를 많이 죽였습니까?

 

 

제3과  만왕의 왕으로 나타나신 예수를 본 요한

- 계 1:12~20,  요절:18 -

 

  서    론

  사도 요한은 3년 동안 예수님과 같이 잠을 자고, 식사를 하고, 항상 다니면서 전도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구름을 타고 승천하신 후에는 예수님을 멀리 떠나 있었을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밧모라는 섬에서 기도하고 있는 요한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만왕의 왕이 된 모양으로 요한을 찾아 오셨던 것입니다.

  학생들, 오늘은 만 왕의 왕인 예수님은 어떠한 분이시라는 것을 요한 사도가 본 그대로 공부하겠습니다.

 

  1대지 : 만왕의 왕인 예수님의 모양 (12~16)

  학생들, 밧모섬에서 요한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은 이 세상에 계실 때의 모양과는 전혀 다르게 나타나셨습니다.

  첫째 : 발에 끌리는 옷을 입었습니다.

  둘째 : 가슴에 금띠를 띠었습니다.

  셋째 :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습니다.

  넷째 : 눈은 불 꽃 같습니다.

  다섯째 :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습니다.

  여섯째 :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습니다.

  일곱째 : 오른 손에 일곱 별이 있습니다.

  여덟째 :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옵니다.

  아홉째 :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습니다.

  학생들,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무서운 모양입니까? 과거에는 보통 인간들과 같은 모양이었으며 같은 옷을 입고 계셨는데 여기에 나타나신 예수님은 화려한 옷을 입고 계시며 훌륭한 모양입니다. 지금은 예수님께서 하늘 보좌 우편에 계셔서 대언 기도하시지만 구름 타고 다시 오실 때에는 위와 같은 모양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훌륭한 왕이라도 예수님 같은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 하면 세상의 왕들은 다 죽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원한 왕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는 예수님을 반대하던 사람이나 공산당은 다 망하고 만왕의 왕인 예수님을 믿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모시고 재미있게 살 수 있는 복을 받게 됩니다.

 

  2대지 : 요한에게 손을 얹으신 예수님의 말씀 (17~18)

  만 왕의 왕으로 나타나신 예수님을 본 요한은 죽은 사람같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머리에 손을 얹고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으로부터 1940년전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밧모 섬에 있는 요한에게 나타나서 말씀하신 것은 지금으로부터 1887년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성신을 부어 주시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마귀 세력을 십자가에서 이기셨으므로 마귀 권세도 예수님께서 지배하고 계십니다. 지금 아무리 공산당이 강하다 하여도 예수님의 지배 아래 있는 것입니다.  

  학생들, 생각해 보세요. 만일 마귀 세력이 교회를 핍박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그 마귀를 어찌 할 수 없어 그냥 둔다면 학생들이 어떻게 마귀를 이기겠습니까? 그러나 마귀도 예수님의 지배 아래 있기 때문에 학생들은 마귀를 얼마든지 이길 수 있습니다.

 

  3대지 :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는 예수님의 명령 (19)

  예수님께서 우리 학생들에게 큰 축복을 주기 위하여 밧모 섬에 있는 요한에게 우리가 배우고 있는 계시록을 기록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만일 그 때에 예수님께서 장차 될 일을 요한에게 기록하도록 하시지 않았다면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해야 살 길이 있는지 알지도 못하고 캄캄한 세상에서 갈팡질팡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장차 될 일을 분명히 기록하도록 요한에게 보여 주셨으므로 지금 이 세상이 어떻게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요한 사도가 기록한 그대로 세상이 되어지고 있으며, 앞으로도 기록된 말씀대로 새 시대가 올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학생들, 세상에 많은 서책이 있다고 하지만 장차 될 일을 기록한 책은 요한 사도가 기록한 계시록 외에는 하나도 없습니다. 앞으로 될 일을 분명히 기록된 책은 요한 사도가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대로 받아쓴 계시록이므로, 이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생이라야 살아서 새 시대에 가게 됩니다.

 

  묻 는  말

 1.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 어떠한 모양으로 나타나셨습니까?

 2.예수님께서 요한에게 나타나신 때는 지금으로부터 몇 해 전입니까?

 3. 학생들이 장차 될 일을 알려면 무슨 책을 공부해야 됩니까?

 

 

제4과  하늘 보좌의 광경을 본 요한

- 계 4:1~4,  요절:2 -

 

  서    론

  학생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에만 사람이 살 수 있는 것이 아니요, 저 시퍼런 하늘밖에도 사람이 살 수 있는 세계가 있다는 것을 요한은 계시로 보았습니다. 학생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는 사람이 영원히 살 곳이 아닙니다. 이 세상은 흙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궁창 밖에는 하나님이 계신 보좌의 세계가 있습니다.

  오늘은 요한 사도가 하늘 보좌의 광경을 본 일에 대하여 공부하겠습니다.

 

  1대지 : 하늘에 열린 문을 봄 (1)

  요한 사도가 밧모 섬에서 기도할 때에 하늘이 시퍼런 그대로 있지 않고 환하게 내다보이는 문 같은 것이 나타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도 하늘이 열려지면서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렸고,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오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원수들에게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을 때에도 하늘이 열려지면서 보좌가 보여졌습니다. 사도 바울도 직접 보좌 세계를 영으로 가본 일이 있었고, 이사야라는 선지도 보좌 세계를 본 일이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사도 요한에게도 보좌 세계가 보여지면서, 큰 음성이 들려오기를 이리로 올라 오라 이 후에 마땅히 될 일을 내가 네게 보여주겠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이상하게 보좌 위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눈이 어두워서 보지를 못하지만 저 궁창 밖에는 하나님의 보좌 세계가 있다는 것을 신령한 사람은 많이 보았습니다.

 

  2대지 : 보좌 위의 광경을 봄 (2~3)

  보좌 위에 계신 하나님의 모양을 요한이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시퍼런 빛이 나는 영광을 보고, 붉은 빛이 나는 영광을 보았습니다. 학생들, 이것은 무슨 뜻일까요? 푸른빛은 하나님께서는 얼마든지 살려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붉은 빛은 하나님께서 악한 세상을 그냥 두지 않으시고 진노의 심판을 내리신다는 뜻입니다.  

  학생들, 요한에게 계시를 보일 때에 이렇게 두 가지 모양으로 보여준 것은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순종하는 자라면 얼마든지 살려주시고, 순종하지 않는 자라면 용서 없이 심판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상하게 무지개가 나타났는데 그 빛깔은 시퍼런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옛날 노아 홍수 심판 때에 물로 세상을 심판하신 하나님께서 다시는 이 세상을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는 약속으로 무지개를 구름 사이에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비가 온 뒤에 무지개가 나타나는 것은 옛날과 같이 물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요한 사도가 계시를 볼 때에 무지개가 나타난 것은 우리를 살려주는 일이나 심판하는 일은 변치 않는 언약인데 있어서 하나님의 자녀는 살아서 새 시대에 가도록 말씀하신 그 언약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3대지 : 24 보좌를 봄 (4)

  24 보좌 위에 흰 눈 같은 옷을 입고 머리에는 금 면류관을 쓴 장로님들이 나타났습니다. 이 장로님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행하는 일을 하나도 잊어버리지 않고 갚아주기 위하여 계산하는 분들입니다. 우리 학생들이 어려서 기도하는 것이나 연보 하는 것이나 전도하는 것이나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나 교회에 잘 다니는 것이나 그 밖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은 하나도 빠짐없이 장로님들이 종합해서 기록해 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학생들이 지금 착한 일을 많이 하면 새 시대에 가서 영광을 누리는 일을 축복으로 받게 됩니다.

 

  묻 는  말

 1. 요한 사도가 계시를 볼 때에 저 푸른 하늘밖에는 무슨 세계가 있다고 하였습니까?

 2. 하나님께서 말씀을 순종하는 사람은 어떻게 하시며 말씀을 순종하지 않은 사람은 어떻게 하신다고 하였습니까?

 3. 24 장로님들은 무슨 일을 하고 있다고 하였습니까?

 

 

 

 논 설 편

 

1. 삶을 바라면서도 죽음의 길을 가는 생활

  인생이 삶을 바라는 것은 하나같이 가지고 있는 욕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참으로 삶의 길이 무엇이며, 죽음의 길이 무엇인지 분명히 아는 지식을 가진 자는 심히 적다고 본다. 그러므로 삶을 바라는 그 욕망을 채워보려고 날뛰는 것보다는 삶의 길이 어디에 있는지 바로 아는 지식을 찾는 것이 먼저 할 일이다.

  아무리 유대인들이 유일신 종교의 사상을 가졌고, 세계적인 종교 지도국의 사명을 가졌다 하더라도 그들의 열심이 참된 지식을 따르지 못하고 자기 욕망을 채워보려고 할 때에 오히려 불행을 가져오는 열심이 되었던 것이다(롬10:1~3).

  마귀란 놈은 사람을 꾀일 때에 산다는 말과 완전해 진다는 말을 가지고 꾀였던 것이다. 지금도 삶을 바라고 완전한 것을 바라는 것이 인간의 욕망이다. 마귀 미혹이라는 것은 죽을 일을 하게 하면서도 살게 되는 것처럼 생각이 나게 하고, 실패에 들어가는 일을 하게 하면서도 완전하게 되는 것처럼 생각이 나게 하는 것이다.

  이제 삶을 바라면서도 죽음의 길을 가는 생활은 무엇이냐 하는 것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자기 힘으로 삶의 길을 찾는 생활이다 (사9:8~12)

  하나님께서 대 자연을 창조하시고 인생을 낼 때에 인간의 힘으로 독립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끔 하신 것이 아니다. 사람은 가장 무능하지만 하나님의 역사를 믿고 의지하므로 완전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 에덴 동산에서 가장 간교한 뱀을 창조하여 사람을 꾀어 보았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만 믿고 순종하는데 전력을 두는 사람으로서 완전한 것을 소유 하도록끔 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지 않고 자기 힘으로 살아보려는 것은 삶을 바라나 죽음의 길을 가는 사람의 생활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 하면 생명의 능력의 역사를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당신이 말씀해 놓은 그 법을 순종하는 자에게만 능력으로 역사하신다.

 

  2. 죽음을 두려워하고 삶의 길을 찾는 생활이다 (마16:25)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종을 들어 쓸 때에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워 나가면 항상 같이 하시고, 목숨을 아끼고 싸우지 않으면 함께 하시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목숨을 아끼는 자는 오히려 죽게 되었고,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워 나가는 자는 죽는 길 같았으나 오히려 삶의 길을 가게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종을 들어 쓰시는 목적은 왕국을 이루어서 세세왕권의 영광을 주되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워 나가는 자에게만 준다는 것이 하나님의 법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고 살기를 원한다는 것은 사망의 법에 지배를 받고 있는 증거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워 나간다는 것은 생명의 법에 지배를 받고 있는 증거이다. 왜냐 하면 죽음을 두려워하는 그 마음 자체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없는 증거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 마음 자체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있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가 같이 할 때에 사망의 법을 가진 마귀와는 하등에 관계가 없다. 사람에게 죽음의 공포가 있을 때에 이것은 생명의 활동이 그 마음에 없는 것이다. 사람이라는 것은 죽고 사는 것이 자기의 힘에 있지 않고 어떤 원수의 힘에있는 것도 아니고 조물주 하나님께 있다. 만일 택한 자를 하나님께서 죽이지 않으려고 하시는데 원수들이 해치게 된다면 우리를 택하신 하나님이 원수에게 지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수에게 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순종하는 사람이라면 죽음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3. 남을 해치면서 삶의 길을 찾는 생활이다 (계13:10)

  오늘에 모든 인간들은 자기가 살아 보려고 남을 해치는 것을 승리로 보고, 심지어 사람을 많이 죽이고, 자기 영토를 넓히는 사람을 영웅으로 보게 된다. 그러나 자기가 살기 위하여 남을 해치는 것은 동물과 같은 생활이다. 자기가 살기 위하여 남을 해치는 사람은 자기가 죽게되는 것이요, 남을 살리기 위하여 자기를 희생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같이 하시므로 자기도 살고 남도 살리게 되는 것이다. 남의 나라를 침략해서 자기의 권리를 세우려던 나라는 다 망했지만 만민을 살리기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는 자기가 살기 위하여 남을 해치는 사람을 전부 심판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인생 생활의 가치라는 것은 자기가 살기 위하여 남을 해치는 생활에 있지 않고, 남을 살리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는 생활에 있다. 그러나 이것을 체험한 자는 심히 적은 세상이라고 볼 수 있다. 기독교가 세계를 정복하게 된 것은 남을 살리기 위하여 목숨을 바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이 들어간 사람들이 하나같이 목숨을 바치고 남을 살리기 위하여 복음을 증거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강한 세력이라도 남을 살리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고 나가는 사람 앞에 굴복을 당하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 통일은 자기가 살기 위하여 남을 해치는 자에게 있지 않고, 남을 살리기 위하여 자기를 희생하는 자에게 있게 되므로 바벨론 세상이 불탈 때에 기뻐하게 된다(계18:20).

 

 

2.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면서도 더러워지는 생활

  사람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눈으로 볼 때에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고 그것을 가지고 싶어하는 것이다. 아름다운 집을 볼 때에 자기도 그런 집을 가지고 싶어하는 것이요, 아름다운 옷을 볼 때에 자기도 그런 옷을 입고 싶어하는 것이요, 아름다운 사람을 볼 때에 자기도 그런 모양으로 꾸미고 싶은 것이 인생이다. 그러나 아무리 옛날 보다 아름다운 집을 많이 짓고, 아름다운 옷을 많이 만들어 내고, 아름다운 모양으로 꾸밀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하여도 실지는 점점 더 부패를 가져오고 있는 것이다. 과학적으로 얼마든지 아름다운 것을 만들어 내놓을 수 있지만 사람이 거기에서 이상적인 사회를 이루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우리 나라가 아름다운 집을 옛날 보다 많이 지었고, 아름다운 의복을 많이 만들어 내어 청년 남녀들까지도 아름다운 모양을 가지게 되었지만 과거보다 소망이 없는 민족이 되어가고 있는데, 이 원인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아름다운 모양을 볼 때에 그 모양을 부러워하는 인격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옷을 부러워하는 인격이라는 것은 철모르는 아이들이 고운 옷을 해 주면 좋아하고, 눈으로 볼 때에 겉만 아름다우면 탐하는 것과 같다.

  아름다운 것을 볼 때에 그 속에 어떠한 진리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진리를 떠난 마음에서 부러워한다는 것은 언제나 결말에는 수치스럽게 되는 열매를 가지게 된다. 남의 집이 아름답다고 해서 자기도 빚을 내어 아름다운 집을 지었다가 그 집에서 살지도 못하고 빚 때문에 쫓겨나고 만다면 오히려 아름다운 집을 지은 것이 수치가 되고 말 것이며, 남이 아름다운 옷을 입었다고 해서 자기도 그 모양을 내다가 아무런 활동도 할 수 없게 된다면 오히려 아름다운 옷을 입고 다니던 것이 수치가 되고 말 것이다.

  어떤 사람이 너무나 아름답다고 해서 무조건 따르다가 그 사람에게 미혹을 받아 피해를 당하게 된다면 오히려 자신을 망치는 손해를 보게 된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모양을 보고 부러워하는 인격이라는 것은 가정을 망치고 국가를 망칠 위험성이 많다고 본다.

 

  2. 아름다운 것을 가지고 있을 때에 그것을 자랑하는 인격이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가 남보다 아름다운 집에서 산다든지, 아름다운 옷을 입고 살게 된다면 이것을 큰 자랑거리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이 인격 자체는 아름답게 되지 못했다고 본다. 아무리 아름답지 못한 집에 살며, 아름답지 못한 옷을 입었다 하여도 자랑할 것이 있는 지식이나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아름다운 집에서 살며 아름다운 옷을 입고 만족히 여기는 사람을 얼마든지 바로 지도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 하면 인격적인 감화가 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태도와 아름다운 말과 아름다운 행동과 아름다운 일을 할 수 있는 인격을 가진 자라면 완전한 미를 가진 생활을 하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라는 것은 아름다운 집이나 아름다운 의복보다 인격이 아름답게 되는 것을 목적하기 전에는 아무리 아름다운 것을 바란다 하여도 더러운 생활이 될 것이다.

 

  3. 아름다운 자연을 볼 때에 그 자연을 신과 같이 아는 인격이기 때문이다

  소위 유물론이라는 것은 아름다운 자연계를 볼 때에 그것을 스스로 있는 전능의 힘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 무신론 사상이라는 것이다.

  어떤 공장에서 기술자가 많은 연구 끝에 아름다운 물건을 만들어 내었는데 사용하는 사람들이 만든 기술자보다도 그 물건을 귀하게 안다는 것은 대 자연을 창조하신 하나님보다도 자연을 존중히 보는 사람과 같다. 대자연의 아름다운 것을 보고 그것을 숭배하는 자의 생활이라는 것은 아무런 발전을 볼 수가 없다.

  인생의 미라는 것은 대 자연을 초월해서 오는 역사를 받으므로만 있게 된다. 자연계를 위하여 사는 사람이 되는 것보다도 대 자연을 지배하시는 하나님과 교통하는 사람이 될 때에 자연계를 즐기는 인격이 아니요, 자연계를 지배하는 인격이 되므로 진정한 미의 생활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라는 것은 대 자연계만 좋아하면서 그 자연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은총을 체험치 못한다면 오히려 자아를 비관하는 생활에서 자살하는 일도 있게 된다. 다시 말하면 나 같은 인간이 세상에서 살아 무슨 가치가 있겠느냐는 자격지심을 가지게 되므로 전부 비관하게 되어 자기의 생명까지 끊어 버리는 일까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연을 초월한 하나님과 교통을 하는 자라면 하나님의 세계에서 오는 것을 받게 되므로 자연에 국한된 것이 아니요, 자연을 볼 때마다 진리를 발견하고,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앞으로 소망의 기쁨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소위 유물론이라는 것은 사람을 타락시키는 요소라고 본다.

 

 

3. 약한 것을 깨닫게 될수록 강한 인격

  하나님께서는 인생을 향하여 역사하실 때에 자기 자체는 약한 줄을 깨닫고 당신을 의지하는 자에게 인간 세력의 정권이나 물권이나 병력이 피해를 주지 못하도록 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과거에 나타난 일인 동시에 인간 종말에도 이루어질 예언이 되므로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가 되시는 신이시다.

  이제 약한 것을 깨닫는 자가 강하게 되는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자기의 힘으로 죄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십자가에서 승리하신 예수님께 부르짖을 때에 죄를 이길 수 있는 힘이 강하게 내리는 것이다.

  사람이라는 것은 항상 자기의 미약을 깨닫고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내 마음이 비록 약해서 넘어졌사오니, 주여! 내 마음에 능력의 불을 주시옵소서”하는 기도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사람들이 날마다 죄를 이길 수 있는 강한 능력을 마음에 충만히 받게 되어 완전한 인격이 이루어질 때에 죄의 구렁텅이에 빠진 사람들을 이끌어 내는 위대한 역사를 하게 된다.

  베드로가 비겁한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한 일도 있었지만, 자기가 장담하던 그 교만을 버리고 무릎을 꿇고 권능이 임하기를 기도할 때에 큰 역사를 받게 되므로 한번 외칠 때에 3천명이라는 대중이 마음에 찔림을 받고 “어찌할꼬” 하는 회개 운동이 일어났던 것이다.

  자기 미약을 모르고 나는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마음이 변할 수 없다고 장담할 때에는 약한 사람이 되어서 쓰러졌지만 자기 미약을 깨닫고 성신의 권능을 받고자 할 때에는 가장 담대하고도 강한 사도가 되어 십자가에 거꾸로 못박힘을 당할 때까지 복음을 전한 베드로였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자기 스스로 미약을 깨닫기까지는 그대로 버려 두시고, 자기의 미약한 것을 철저히 깨닫고 당신을 의지할 때 가서야 말씀대로 강하게 들어 쓰시는 것이다.

 

  2. 자기의 힘으로 적군의 세력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에 적군을 이길 수 있는 역사가 강하게 내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택한 자라고 해서 그 사람에게 환란을 없게 하시는 것이 아니요, 남보다 더 큰 환란이 있게 하시는 것이다. 이렇게 하시는 것은 자기의 미약을 깨닫고 당신을 의지하는 자에게 하나님을 자랑할 수 있는 인격을 이루어주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다.

  히스기야 왕이 앗수르 군대가 둘러싸고 항복하라고 위협을 줄 때에 옷을 찢고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하기를 “만군의 여호와여, 주는 천하 만국의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라. 주께서 천지를 조성하였나이다. 여호와여 귀를 기울여 들으시옵소서. 여호와여 눈을 떠 보시옵소서. 산헤립이 사자로 사시는 하나님을 훼방한 모든 말을 들으시옵소서. 여호와여 이제 우리를 그의 손에서 구원하사 천하 만국으로 주만 여호와이신 줄을 알게 하옵소서” 하였던 것이다. 이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천사를 내려보내어 앗수르 군대 18만 5천명을 전멸시키는 일이 있으므로 히스기야는 북방 세력을 승리한 강한 용사가 되었던 것이다.

  지금도 인간이 볼 때는 북방 세력이 강하여 우리를 이길 것같이 보이지만 대통령으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자기 미약을 깨닫고 하나님께 기도한다면 이 나라는 북방을 이길 수 있는 강한 나라가  될 수 있다. 인간이 볼 때에는 지렁이같이 보이지만 자기 미약을 깨닫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라면 새 타작기 같이 강하게 일어나는 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게되므로 약한 자가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할 것이다.

 

  3. 자기의 힘으로 거짓 선지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양떼를 살려 줍소서 하는 호소를 할 때에 거짓 선지의 교권이 아무리 강하다 하여도 그것을 이길 수 있는 힘과 양떼를 바로 인도할 수 있는 인격이 강하게 내리는 것이다.

  모세가 자기 힘으로 민족의 억울한 일을 도와 보려고 하다가 미디안으로 피신 생활을 하게 되었고, 40년간 자기 미약을 깨닫고 있을 때에 여호와 나타나셔서 신과 같이 그를 들어 쓰셨던 것이다. 인간이 볼 때에 아무리 실패를 당한 것 같았지만, 미약을 깨닫고 하나님의 명령을 떨리는 마음으로 순종할 때에 모세 앞에서 바로가 떨게 되고 강한 군대가 전멸을 당하게 되는 일이 있었다.

  오늘날 영적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는 사명자들이 자기의 미약을 깨닫고 하나님께 부르짖는 호소를 하게 된다면 양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이종을 들어서 양떼를 환란에서 구출하는 역사를 하시므로 새로운 시대가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약할 때에 강하다고 한 것은 미약을 깨닫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에 강한 역사가 임한다는 것을 가르친 것이다. 언제나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미약을 깨닫고 대중을 살리기 위하여 하나님의 역사만 믿고 호소하는 자에게 강한 용사의 인격을 주시는 것이다.

 

 

4. 사랑이 좋으나 죽는 사랑

  오늘날 사람들은 정신 작용의 과학이 발전됨에 따라서 옛날보다는 무엇이나 자유롭고 평화롭게 나가야만 된다고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생각으로 따라오는 사랑이라는 것은 성서를 입각하여 볼 때에 죽는 사랑이라는 것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오락적인 사랑

  이것은 사람을 방탕하게 만드는 열매를 가져오게 된다. 과거보다도 화려한 옷을 입게 되고, 맛있는 음식을 먹게 되고, 평안히 살 수 있게 된 자리에서 도취가 되어 거기에 만족을 누리는 사람이 될 때에 하나님의 말씀과는 대적이 되는 사랑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기는 부족함이 없다는 자만심이 생기는 동시에 이 외에는 생각조차 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그 이상 다른 것을 생각하는 사람들을 오히려 어리석게 보는 것이다. 그러나 더러운 피의 작용을 따라서 음란, 사치, 방탕으로 그 소욕을 채워보려는 사람이 될 때에는 하루아침에 멸망을 당하는 죽음을 가져오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가운데서 서로 사랑하고 교제한다는 것은 인간이 보기에는 좋은 것 같으나 죽는 사랑이다. 왜냐 하면 도취된 생활에서 어떤 사상이나 어떤 진리를 가진 것이 없이 그 시간에 오는 만족과 쾌락을 일삼기 때문이다. 인간의 사랑이라는 것은 이러한 생활을 만족히 여기는 사랑이다.

 

  2. 타협적인 사랑

  사람의 정신 작용이 발달됨에 따라서 서로 이해를 해가면서 사랑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이 인간을 대할 때에는 좋은 것 같으나 인간이 하나님을 대할 때에는 타협적인 사랑이므로 대적이 된다. 왜냐 하면 타협적인 사랑의 노선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대적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든다면 어떤 여자가 한 남자와 결혼을 해서 그 남자밖에는 없다고 생각을 하고 괴로워도 즐거워도 평생토록 살아 나가기를 결심했지만 시일이 흘러감에 따라 그 사랑은 식어지고 다른 남자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처음에 만난 남자가 그 여자를 볼 때에 원수가 될 것은 사실이다.

  이와 같이 십자가의 사랑을 받은 양심에서 죽어도 그 사랑밖에는 없다고 싸워 나가던 교회가 그 마음이 식어지고 다른 주의와 사상과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사랑하자는 것은 십자가의 사랑과는 원수가 된다. 왜냐 하면 십자가의 사랑은 죄를 위하여 죽은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사랑을 믿고 죄 사함을 받은 사람이 죄의 사상을 가진 주의를 이해하고 교제한다면 자동적으로 십자가의 원수가 되고 만다.

  오늘날 기독교가 소위 통합이라는 간판을 가지고 십자가 사랑 중심으로 하나를 이루지 못하고 타협적인 사랑으로 흐른다는 것은 사랑 같으나 죽는 사랑이다. 왜냐 하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께서 가장 미워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죄를 위하여 죽으신 예수님께서 죄를 용납한다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다시 말하면 죄를 위하여 대신 죽으신 십자가의 사랑이 죄를 용납하는 사랑으로 변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만일 십자가가 죄를 용납한다면 죄를 위하여 죽은 사랑은 완전히 무효가 되고 만다. 어느 때에는 죄 때문에 죽고 어느 때에는 죄를 용납한다면 죄를 위하여 죽은 십자가의 사랑은 폐지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타협적인 사랑이라는 것은 예수님을 대적하는 것이니 실지는 심판 날에 죽는 사랑이다.

 

  3. 편벽적인 사랑

  하나님께서는 인생을 사랑하시되 아무리 창기며 세리며 강도라도 죄를 회개하고 돌아온다면 꼭 같이 천국으로 인도하는 사랑을 가지셨다. 그런데 이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 형제를 편벽 되게 사랑한다면 이것은 생명을 주는 사랑이 아니요, 오히려 생명을 죽이는 사랑이 될 것이다.

  어떤 목자가 자기를 대접하는 사람은 사랑하고 대접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사랑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자기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사랑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사랑을 가진 자는 양떼를 주님께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요 자기의 이용물로 삼는 것이니, 이용을 하는 자도 죽게되고 이용을 당하는 자도 죽게 된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서 남에게 주는 자라면 조금이라도 편벽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이 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십자가의 사랑을 전해야 될 빚을 졌다고 하면서 아무리 괴로움이 오고 핍박이 와도 기뻐서 복음을 전한 것은 십자가의 사랑을 남에게 전해 준다는 것밖에는 아무런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십자가의 사랑을 그대로 남에게 전해 준다면 그 사람을 통하여 십자가의 능력이 얼마든지 공급되므로 남을 살릴 수 있는 위대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능력의 종이 되려면 편벽이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그대로 남에게 전해주는 일을 하여야만 된다.

 

 

5. 작은 일 바로 하는 것은 큰 일을 할 원동력

  사람이라는 것은 큰 일을 할 수 있는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고 작은 일을 바로 할 수 있는 양심을 받은 것 뿐이다. 그러므로 정결한 양심으로 하나님을 공경하기 위하여 지극히 작은 생각 하나를 조심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중심을 보시고 큰 일을 할 수 있는 인격이 이루어지도록 응답을 내리시는 것이다.

  종교인이 큰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탈선이요, 큰 일을 할 수 없다고 해서 작은 일을 하지 않는 것도 탈선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작은 혀 하나라도 바로 움직일 때에 그 입술의 열매는 조물주 하나님의 응답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 믿음이 겨자씨만큼 있어도 산을 옮길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은 인간이 볼 때에 작은 일 같으나 이것을 믿음으로 할 때에 그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크신 역사가 응답으로 나리신다는 것이다.

  이제 작은 일을 바로 할 수 있는 인격을 가지는데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작은 죄 하나를 마음에서부터 용납지 않는 일이다.

  아무리 큰 일을 한다 하여도 마음 가운데 작은 죄의 생각 하나를 용납하게 된다면 이것은 큰 실패의 근본이 된다. 예를 든다면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작은 세균 하나가 폐를 접촉될 때에 그것으로 말미암아 쓰러지고 마는 병사가 생기는 것과 같다. 작은 죄의 생각 하나를 용납하는 사람이 그것으로 말미암아 큰 일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은혜의 줄을 끊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죄와 싸우는 것이 인간의 제일 큰 일이라면, 작은 죄를 마음에서부터 용납한다는 것은 죄와 싸우는 전쟁에서 큰 실패를 가져오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항상 마음 가운데 죄의 생각 하나를 용납지 않고 의로운 것을 사모하는 생각이 있다면 죄의 강한 세력을 이길 수 있게된다. 죄의 생각을 용납지 않고 싸우는 것은 붉은 용의 세력을 때려부술 철장 권세를 받게 될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2. 진리의 획선에 의하여 조금도 가감이 없이 나가는 일이다.

  진리의 획선에서 조금도 가감이 없이 나갈 때에 진리 전체를 바로 알 수 있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진리의 획선 하나를 탈선되게 나갈 때에 진리 전체를 짓밟는 멸망의 자식이 될 수도 있다.

  진리에도 획선이 있고 사랑에도 획선이 있고, 신앙에도 획선이 있고, 믿음에도 획선이 있고, 구원에도 획선이 있는 것이다. 덮어놓고 사랑하고, 덮어놓고 믿고, 덮어놓고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얼마든지 탈선된 과오를 범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지극히 작은 일이라도 그 획선을 바로 나가는 자리에서 크게 역사하는 원동력이 시작되는 것이다.

  사랑도 믿음도 구원도 법을 떠나서 있는 것은 다 허공을 치는 일이 될 수 있다. 왜냐 하면 하나님은 공의의 신이시니 공의를 떠난 일이라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3. 지극히 작은 소자 하나를 아끼는 일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어린아이를 용납하여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셔서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위하여 먼 길을 걸어가신 일도 있었고, 밤을 새워가면서 교훈하신 일도 있었고, 가던 발걸음을 멈추시고 그 요구를 들어주신 일도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이 지극히 작은 소자 하나를 아끼는 사랑의 불이 붙을 때에 대중을 살릴 수 있는 역사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일한 대로 갚아 주시려 오실 때에는 지극히 작은 소자에게 행한 것을 자기에게 행한 것과 같이 상을 주시며 지극히 작은 소자에게 행치 아니한 것을 자기에게 행치 아니한 것과 같이 벌을 주신다(마25:40, 45). 만일 어떤 사람이 지극히 가난한 사람을 불쌍히 볼 줄 모르고 부요한 사람을 가까이 하기를 좋아한다든지, 지극히 무식한 사람을 무시하고 지식이 많은 사람을 가까이 하기를 좋아한다든지, 지극히 비천한 생활을 하는 사람을 싫어하고 화려한 생활을 하는 사람을 가까이 하기를 좋아한다면 조물주 하나님과는 대적이 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역사할 수가 없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위하여 눈물 흘리며 기도하던 중에서 역사가 나리기 시작하여 계시록의 깊은 뜻을 완전히 알게 된 것이 이 사람이 하고 있는 진리 운동의 시발점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살려 보려는 눈물의 기도가 있는 자에게 대중을 살릴 수 있는 역사를 하도록 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우리는 나가야 할 것이다.

 

 

 

 신 앙 문 답  

 

【문】1. 지금 새일수도원에서는 약 7년이 지나도록 40일 금식이 계속되어 금식한 사람이 450명이나 된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것은 무슨 이유로 되는 일입니까?

【답】금식이라는 것은 세 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째 : 자기의 인격이 개조되기 위하여 금식을 하게 됩니다.  

  둘째 : 앞으로 오는 난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금식을 하게 됩니다.

  셋째 : 주의 큰 역사가 응답으로 나리는데 있어서는 금식 기도가 있어야만 되기 때문에 금식을 하게 됩니다.

  지금 새일수도원에서 하고 있는 40일 금식이라는 것은 배고픈 줄을 모르고 하는 것은 물론이요, 별로 몸이 약해지지도 않고 수도 공부를 해 가면서 되는 일입니다. 금식하는 사람들이 하루 10시간씩 앉아서 공부하는데 지장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하루 과일 한 개 정도는 허락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계속적으로 찬 마루 바닥에 앉아 정신을 쓰면서 공부하는 일에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서 사용하는 것뿐입니다.

  우리 수도원에서 40일 금식을 세 번 한 사람이 여러 사람 됩니다. 이 금식은 대부분이 멸공 진리 운동을 위하여 하는 것인데, 청년 남녀들이 많이 하고 있습니다. 이 금식 운동은 1965년 1월에 하늘로부터 이상한 징조가 있은 후부터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일곱 별이 나타나서 새일수도원 위로 그 빛이 내려온 후부터 금식이 시작되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 종말의 완전 역사를 뜻했다고 봅니다. 일곱이라는 것은 완전 수를 가르쳤는데 종말의 완전 역사는 일곱 영의 역사인 것입니다.

  완전 역사라는 것은 환란과 재앙의 날에 죽음을 맛보지 않고 새 시대에 들어가는 역사를 말합니다. 이 몸이 완전한 변화체가 되어 재림의 주를 맞이하게 되는데 있어서 완전 영감, 완전 개조, 완전 변론의 역사를 받아야만 된다는 것입니다.  

  요엘 선지도 말하기를 거룩한 금식일을 정하고, 성회를 선고하고, 여호와께 긍휼을 구하므로 북방의 세력을 치는 응답이 내려오므로 새로운 시대가 온다고 하였습니다.

  금식이라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어려운 환란이 올 때에 하게 되는 것인데 이것이 가장 강한 기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40일 금식을 해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것을 하므로써 완전한 영계적인 변동이 온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누구든지 40일 금식 기도를 해야 된다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우리 수도원에서 40일 금식을 남종보다도 여종들이 많이 하게 되는 것은 간곡한 기도로써 받들 사명이 여종님들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여자라는 것은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나 받드는 사명이 있으므로 금식을 하는 일이 가장 합당하다고 봅니다.

 

 

【문】2. 아름다운 소식의 월간지를 이뢰자 목사님이 수도 학과를 가르치면서 독단적으로 발행한다고 하셨는데, 이것이 도대체 어떻게 되는 일인지 알고 싶습니다.

【답】과학적으로 본다면 강단에 매일 10시간씩 서서 말하면서 건강을 보존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리고 한 사람이 매달 70페이지의 월간지를 발행하되 아무런 피곤이 없이 진행해 나가는 것은 사람으로서 이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매일 10시간씩 강의를 하면서 남은 시간에는 월간지를 쓰고, 토요일마다 서울 새 일 중앙 교회에 가서 목회를 하고, 월요일 아침에 또다시 수도원으로 와서 수도를 계속하게 됩니다. 그리고 매달 마지막 한 주일은 부흥 집회를 나가면서 아무런 피곤이 없이 건강이 더 좋아지는 것을 현저히 보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영양을 많이 섭취하는 것도 아닙니다. 육식은 물론이요, 심지어 달걀, 우유, 생선까지도 일체 사용하지 않습니다. 채소만 먹되 밥은 크게 떠서 한 술 정도입니다. 그러나 나의 몸은 점점 더 명랑해지기만 합니다. 60세 가까운 몸이 점점 명랑해진다는 것은 이해가 잘 되지 않으므로 의심할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대중들이 날마다 보고 있는 사실입니다. 조금이라도 피곤을 느낀다든지 힘없는 모양을 보인 일은 없고, 언제나 자연스러운 태도로 강단에 서게 됩니다. 이것은 이상하게 볼 일이 아니요, 다같이 감사할 일입니다.

  그리고 이 종을 통하여 매달 100여명의 용사가 무장을 받고 멸공 진리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아름다운 소식의 월간지를 통하여 한국은 물론이요, 미국, 일본까지라도 각성을 받고 일어나는 종들이 많습니다. 앞으로 이 진리 운동으로 말미암아 교계나 국가에 큰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 각 교파에서는 교권을 가지고 새일수도원을 대항하고 있지만 필연코 승리는 교권에 있지 않고, 쉬지 못하고 일하는 종이 선 제단에 있게 될 것입니다. 아무런 것도 알지 못하고 무조건 남을 악평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신앙 양심을 떠난 자의 행동이라고 보게 됩니다. 아무리 새일수도원에 대하여 악평을 해 보았던들 자기 인격이 부족하다는 것을 스스로 드러내는 수치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 하면 남을 악평하는 사람들은 아무런 열매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말씀하실 때에 열매를 보아 나무를 알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문】3. 지금 많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새일수도원에 가서 무장을 해야 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무장이라는 것은 무엇을 뜻한 것입니까?

【답】무장이라는 것은 앞으로 큰 미혹이 올 때에 그것을 막기 위한 목적에서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내가 다시 올 때에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부탁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남을 함부로 이단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 자체가 벌써 미혹의 영을 받았다고 봅니다. 예를 든다면 어떤 사람이 남에게 함부로 욕을 하게 된다면 정신 이상자나 술 취한 자로 취급받게 될 것입니다. 지금 함부로 남을 이단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정신이 이상하게 되었다는 것보다도 영적 흑암에 들어갔다고 봅니다.

  무장이라는 것은 사람이 시킬 수 없고, 하나님께로부터 오게 되는 것입니다. 새일수도원에서는 매달 25일내에 인간론, 성경해석법, 변화 성도의 교리, 요한一서 강의, 조직신학 강의, 선지서 강의, 계시록 강의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무장이라는 것은 어떠한 미혹이 온다 하여도 말씀으로 물리칠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강단에 서서 말씀을 얼마든지 밝히 증거할 수 있게 되는 것이 무장이며, 인격으로는 중심 성결을 목적한 동시에 그 몸까지도 피곤을 모르게 되고, 정상적인 사람으로 피동적인 감정에 끌리지 않으며, 세속에 물들지 않고, 사상적인 투쟁과 양심적인 신앙 생활에서 그날 그날 모든 일을 질서있게 진행해 나갈 수 있게 되는 것이 무장입니다.

  그러므로 무장이라는 것은 어떠한 어려운 일이 부딪혀도 용기있게 일해 나가자는 것을 목적한 것이며, 아무리 어려운 일이 온다 하여도 더 강하게 싸워 나가므로 주 재림의 날에 설 수 있는 종의 인격을 이루자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새일수도원에 와서 공부하게 되면 무장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인간이 볼 때에 작은 일 같지만 새일수도원에서 무장하는 이 일은 분명히 새 시대를 이룰 종말의 역사라고 믿습니다. 이것은 새일수도원에 와서 무장을 해 본 자라야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일입니다.

  지금은 무엇보다도 완전 무장을 목적하고 해산의 수고를 다해야 될 때입니다. 지금 공산당이 많은 사람들을 공산 사상으로 무장시키는 일에 전력을 두고 있다면 우리 기독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상으로 무장시키는 일에 해산의 수고를 다해야 할 것입니다.

  새일수도원에서 배우는 학과는 전부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쓰라는 명령이 있어서 이 목사의 입을 통하여 나리는 말씀을 대중이 기록하여 출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완전 무장을 주는 학과가 될 것은 분명하다고 봅니다.

  누구든지 새일수도원에 와서 공부하게 될 때에 이날까지 알지 못했던 성경이 햇빛같이 밝아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새일수도원에 와서 수도를 받아 본 자라야 인정할 일이라고 봅니다. 이 목사 입술을 통하여 나타난 호소 성가를 같이 부를 때에 이슬과 단비같이 하늘로부터 역사가 나린다는 것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누구든지 완전 무장을 하기 위해서는 새일수도원을 거쳐야만 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 무장이 없이는 앞으로 아무런 역사도 할 수 없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문】4.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어떠한 노선이라야 종말을 바로 맺을 수 있다는데 대하여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답】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은 알파와 오메가의 역사를 믿는 것입니다. 알파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역사를 시작하는 일이요, 오메가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역사를 끝을 맺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역사는 시작될 때부터 끝을 어떻게 맺는다는 예정 아래서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를 시작하시기 전에 미리 예언적인 증거로 보여주면서 말씀을 빠짐없이 기록하도록 한 것이 구약 시대 선지 국가에 나타난 일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유월절 양의 피로 말미암아 사망의 구렁텅이와 같은 애굽에서 해방을 받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유월절 양의 피로 해방 받은 이스라엘은 선지 국가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방 세력과 타협한 무리는 이방에게 망하고 끝까지 이스라엘 사상을 지켜 나가는 사람들을 통하여 황폐화 되었던 예루살렘이 복구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신약 교회의 알파와 오메가가 되는 일이라고 봅니다. 유월절 양으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의 피로 사망의 구렁텅이에서 해방을 받아 신령한 교회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에 와서 예루살렘 성전이 이방과 타협이 있으므로 부패했듯이 신령하게 섰던 교회가 세상과 타협하게 되어 바벨화 되었고, 신령한 교회는 찾아 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세속화된 교회 안에서도 신령한 교회의 본부가 되는 하늘의 지성소로부터 연락을 받고 있는 성도들은 하나같이 하나님의 비밀이 그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이루어지는 역사를 순종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조금도 가감이 없이 그대로 믿고 순종하는 자들로 말미암아 새로운 촛대교회가 나타나게 되며, 그 교회가 새 시대를 이루는 열매가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기 위하여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운 자들이 남은 자가 되어 새로운 시대를 이루게 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예수님과 교통을 받고 있는 자라면 하나같이 하나님의 비밀이 그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종말에 이루어진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심판과 새 시대에 대한 말씀을 순종하는 자들로 말미암아 한 단체가 이루어지게 되고, 하나님의 특별 보호가 같이 하므로 기독교 종말의 역사를 일으키는 변화 성도로써 새 시대의 영광을 왕권으로 받게 될 것입니다.

 

 

 

 특  집  

 

1. 3월 1일을 맞이하는 사명자의 말

  사명이라는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요, 남을 위하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명자들은 3월 1일을 맞이할 때에 자동적으로 새로운 결심을 가지게 됩니다. 왜냐 하면 3월 1일은 우리 민족으로써 잊을 수 없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1919년 3월 1일에 큰 성공을 했다는 것 보다도 올바른 사상을 가졌다는 것이 더 귀한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이라도 남을 살려 보자는 사상으로 뭉쳐지는 일이 있다면 이것이 가장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1972년 3월 1일을 맞이할 때에 사명자들은 이 민족을 살려 보겠다는 마음이 더욱 불타야 할 것입니다. 53년이 지난 이날까지 아무런 일도 성공하지 못하고 억울한 일만 이 민족이 당했다는 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소위 양반이라는 관념하에서 삼천리 금수강산을 어린아이가 손에 들고 있던 떡을 빼앗기듯이 아무런 말 한마디 못하고 일본에게 빼앗겼던 것입니다.

  어리석은 민족, 간사한 일본에게 속은 것이 분해서 아우성 쳐 보았던들 억울한 것 뿐입니다. 왜정 말년에 대동아 전쟁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한국 교회를 집어삼키고 시국을 인식하라고 하면서 신사 참배를 국가 의식이라고 꾸며 국민된 의무로써 동방 요배를 하라고 이 민족들에게 강조했습니다. 침략 국가 일본이 신사 참배, 동방 요배 외에 여러 가지로 침투할 때에 한국 교회는 자동적으로 두 패가 되었던 것입니다.

  신사 참배를 할 수 없다, 동방 요배도 할 수 없다고 할 때에 무지한 악당들에게 괴로움을 받은 그 억울한 피를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해방이라는 기쁜 소식을 받고도 공산당 악정 아래서 또 다시 두 패로 갈라졌습니다. 공산 기독교 연맹을 반대하는 사람들과 공산 기독교 연맹에 가입된 사람들이 대립된 것입니다.

  해방 전에는 일본 기독교 연맹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참된 종들을 괴롭히던 무리들이 해방 후에는 공산 기독교 연맹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참된 종들을 괴롭혔습니다. 북한에서 싸우다가 월남한 종들이 또다시 동란을 만나 무서운 시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에 와서 또 다시 협상이라는 문제를 가지고 나오는 무리들이 참된 종들을 괴롭힐 때가 오고 보니, 참된 사상을 가진 사람으로서는 몸부림쳐 하나님께 호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친일파가 애국자를 해치려고 했던 일과 일본 기독교 연맹이 참된 종들을 해치려고 했던 일과 공산 기독교 연맹이 참된 종들을 해치려고 했던 일과 같이 협상주의적인 사람들이 참된 종들을 해치려고 하는 것이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에서 순교적인 사상을 가진 사람들의 쓰라린 고통이라는 것은 53년을 계속 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오늘의 큰 문제는 과거보다도 더 어려운 문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이제 와서 협상 주의로 흐르고 만다면 다시 기회가 없는 함정과 올무에 걸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과거는 어떻게 되었든지 이제라도 끝까지 싸워야 되겠다는 마음이 간절하게 생깁니다.  

  이 사람은 58년이라는 세월을 세상에서 살았지만 성공적으로 해본 일은 하나도 없었고 전부가 실패한 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제부터 나를 실패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실 것을 확신하는 바입니다. 왜냐 하면 하나님께로 분명히 나를 시련 가운데서 떨어지지 않고 자라나도록 길러 주셨기 때문입니다. 어떤 농부가 애써서 곡식을 길러 놓고 열매도 맺기 전에 베어 버린다는 것은 정신이 없는 행동일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완전한 신이시니 나를 길러 주시고 열매 없이 찍어 버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승리할 것을 확실히 믿고 3월 1일부터 싸워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2. 3월을 맞이하는 사명자의 기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나를 아끼시는 줄로 믿나이다. 작년 3월 1일부터 호소 성가를 보내 주시고 1년간 부르짖게 하신 아버지여! 이달부터 응답의 역사를 강하게 나려야만 하겠나이다. 어제가 옛날이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는 난국이 닥쳐왔나이다.  

  나는 이제 어떻게 하오리까. 이제는 호소를 올리는 자리에서 싸우는 자리로 들어가야만 하겠나이다. 내가 싸우지 않고는 양떼들이 살 수 없고, 북방 세력을 막을 수 없나이다. 나 홀로 싸워서 무슨 열매가 있사오리까. 그러나 주님께서 주신 호소 성가를 부를 때에 강한 역사가 임하므로 승리할 것을 믿나이다. 완전 영감과 변론을 내게 주신지도 어언간 3년이 지났나이다. 이제는 대중적으로 변론의 입을 열어 주시옵소서. 한 사람이 받았다고 해서 열매가 되는 것이 아니옵고, 대중적으로 받아야만 열매가 되지 않겠나이까.

  선지 국가가 이루어지는 것도 여호와 응답에 있는 줄로 믿나이다.  7년간 부르짖던 호소는 완전히 이 나라를 살릴 수 있는 일로 응답하옵소서. 말씀만 보내시고 역사를 나리시지 않으신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나이까. 대중이 각성 받고 일어나서 동방과 서방이 결합되는 역사되게 하옵소서.

 

 

3. 3월에 부르짖는 민족의 소리

  가련하다. 백의 민족! 혀가 마를 딱한 사정 누가 알아주랴. 이날까지 억울한 피만 흘린 민족, 피 흘리는 것으로 끝을 맺을 수는 없으리.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말씀대로 천하의 모든 민족이 복을 받을 때는 왔도다. 지상 축복 받는 비밀, 백의 민족에게 나타난 것은 새 시대를 이루는 선구자를 삼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이로다. 일어나라! 백의민족,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다. 천하의 모든 민족보다도 억울함을 많이 당한 백의 민족. 이제부터 형통하리.

  사람 앞에 모든 것은 실패를 당한 것 같으나 백의 민족을 위하여 부르짖는 호소 기도 상달되어 종말의 영광이 민족 위에 나타나리. 남을 압박하던 민족은 망할 것이요, 압박 받던 민족은 살리로다. 간절히 민족 앞에 호소할 말 다음과 같다.

  속지말라! 우리는 멸공 진리 사상에 굳게 뭉치자.

  낙심말라! 이 민족 위에 여호와 나타나셨으니 하나님께 돌아 오라.

  과거 이스라엘은 예언적인 선지 국가라면 우리 나라는 새 시대가 이루어지는 역사의 선지 국가로다. 가련과 빈핍 닥쳐왔어도 하나님의 축복 우리게 온다. 물질 문명 자랑하는 강대국을 무서워 말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백의 민족 승리하리.  

  경제 혼란 온다고 낙심 말고 진리의 봉홧불 높이 들자!

  열방 재물 들어 올 때 영원한 축복 되리로다!

  어느 민족보다도 하나님을 찾는 일에 열심이 있는 민족, 크신 응답 내려오므로 참 신이 누구인지 시련 가운데 기도하던 종들을 통하여 나타나리로다. 물질에 눈이 어두워서 내일의 멸망을 모르는 것보다는 가난한 생활에서 영계가 밝아 시대 분별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우리 민족의 자랑거리로다. 백의 동포, 마음조차 깨끗해질 때에 새 시대 이루어지는 역사의 본부가 되리로다.

 

  참된 친구를 사모함

  눈앞에 보이는 사람은 너무 많아 헤아릴 수 없으나 참된 친구는 만나기가 어렵도다.  친구 없이는 낙이 없고 힘도 없건마는 참된 친구를 만나지 못한 사상의 사람이 슬퍼하며 피곤하게 되었도다.

  가장 그리운 친구! 구름 타고 함께 올라갈 친구! 영원히 누릴 세세 왕권 함께 받을 친구! 이제부터 우리의 소원 참된 친구 만나므로 참된 기쁨, 영원한 기쁨. 참된 힘, 영원한 영체의 사람이 가질 힘! 받는 자 일어나리.

 

  성경 읽는 재미

  세상이 나를 괴롭혀도 성경을 읽는 재미는 더 크도다. 세상이 악해 갈수록, 위험해 갈수록, 인심이 악해 갈수록 점점 성경은 더 밝아지네. 읽을 수록 참되구나. 알고 보니 전부가 성경을 해석하는 것 뿐이도다. 이것을 모르고 있는 인간들은 현실을 따라가고 있지만 나는 성경만 읽고 재미있게 주님만 따라가리. 인간의 최고 미라는 것은 지금 성경을 읽고 바로 깨닫는 데서 성경대로 이루어지는 체험을 받는데 있도다.

 

 알리는 말씀

  이날까지 성산에 불을 밝히지 못하여 여러 가지로 지장이 많든 중 백암동까지 전기 공사가 완전히 됨에 따라 수도원에도 전기 공사를 해야만 될 형편입니다. 공사비 예산은 70여만원 이라고 하는데 아무런 준비가 없이 공사를 시작 할 수가 없든 중 2월 수도생들 중에서 충남 예산 삽교 성결교회 장로님 한 분이 이렇게 공부를 많이 하는 수도원에 전기 공사를 해야만 된다고 역설을 하면서 연보를 시작하여 지금 자진으로 진행 중에 있습니다.

  우리 전국에 널려 있는 수도생들은 다 합심해서 성의를 다하여 전기 공사에 완전히 준공하도록 힘써 주셔야만 하겠습니다. 기도로 도와주시기 바라오며 성금에 대하여 다소를 막론하고 합심 협력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본 아름다운 소식 월간지는 정가가 50원인데 50권 이하를 가져가는 분들은 50원이며 50권 이상은 40원으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가급적이면 책 대금에 대하여는 속히 보내 주셔야 문서운동에 지장이 없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