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례 (1972년 4월호)

 

설  교  편

 1. 열매를 먹고 바로 일할 사명 (창1:27~29, 2:15~19)

 2. 여호와께서 일어나야 할 때 (사33:7~16) 

 3. 기운이 진한 야곱과 새 힘을 받은 야곱 (창49:33, 사40:27~31)

 4. 무너진 곳을 다시 세울 인격 (사58:10~12)

 5. 형벌의 날이 올 때에 남을 자의 인격 (미7:4~10)

 6. 안식일과 즐거움 (사58:13~14)

 7. 승리의 기도 (마26:36~46) 

 8.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일 (요15:1~8) 

 9.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나신 예수 (요일3:4~12)  

10. 참된 말씀만 증거한 종의 열매 (요10:40~42) 

11. 성령으로 한 몸 된 교회 (고전12:12~27) 

12. 난국을 당한 선지의 깨달음 (합1:12, 3:17~19) 

13. 원수를 갚는 주님 앞에 합당한 생활 (롬12:14~21)

14.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는 역사 (딛3:4~8)

 

장년 공과편 - 인간 종말의 교회 통일의 역사

제1과  척량의 역사로 하나가 됨 (계10:5~11:2)

제2과  권세 역사로 하나가 됨 (계11:3~6)

제3과  기호가 서므로 하나를 이루게 됨 (사11:10~16) 

제4과  중앙 제단으로 하나가 됨 (사19:19~25) 

제5과  동방 역사로 하나가 됨 (사59:18~60:3) 

 

어린이 공과편 - 요한계시록 공부

제5과  안팎으로 가득히 기록한 책을 예수님이 받으심 (계5:1~7) 

제6과  네 생물과 24 장로들이 새 노래를 부름 (계5:8~10) 

제7과  흰 말 탄 자의 승리 (계6:1~2)  

제8과  붉은 말 탄 자가 화평을 제함 (계6:3~4)

제9과  검은 말 탄 자가 저울을 가짐 (계6:5~6)

 

논 설 편

1. 금할 것을 금하지 못하는 나라의 부패성

2. 강한 자 같으나 약한 자 

3. 인위적인 평화는 인위적으로 끝나고 만다. 

 

신 앙 문 답

1. 어느 교파나 하나같이 새일 수도원을 합당치 못한 것으로 말하고 있는데, 그 원인이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특    집

1. 4월을 맞이하는 사명자의 기도

 ※ 성가 (동방의 영광) 

 

 

 

 

 

 

 

 설 교 편

 

열매를 먹고 바로 일할 사명

- 창 1:27~29, 2:15~19 -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열매를 맺는 나무를 만드시고, 그 열매를 먹고 일을 하라는 사명을 당신의 형상대로 지은 사람에게 맡기셨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사람이 바로 행하므로 당신의 뜻을 이루는 동시에 당신의 가장 기뻐하는 소원을 이루려고 하신 것이다. 조물주 하나님의 소원이라는 것은 당신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이 길이길이 복을 누리는 것이며, 당신과 동거 동락하는 사람들을 많이 나게 하여서 그들을 통하여 영광을 받기도 하시며, 당신의 영광을 그들에게 주기도 하시는 것이다.

  이제 열매를 먹고 바로 일할 사명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나라를 이루어야 함 (1:27~29)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이상적인 나라와 사회를 이루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이 마땅히 행하여야 할 직분이며, 큰 축복을 받을 일이 된다. 인류 역사상 많은 나라가 있었지만 이상적인 국가와 사회를 이루지 못한 것은 열매를 먹으면서도 사람들이 자기가 해야할 사명을 바로 하지 못한 원인이다.

  모든 식물은 사람에게 먹을 수 있는 양식을 공급하고 있건마는 오늘날 사람들은 그 열매를 먹고 자기의 사명을 하지 못하고 또 그 열매를 먹기 위하여 땀을 흘리는 일밖에는 할 줄 모르고 있다. 그러므로 열매를 먹고 바로 일할 사람이 열매를 먹기 위하여 노력하다가 죽고 만다는 것은 열매를 먹고 바로 일할 사람이 되지 못한 수치를 드러내는 것뿐이다.

  하나님께서 열매를 먹게 한 사람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정복하라, 다스리라고 하신 것은 이상적인 사회와 나라를 이루라는 것을 말한다. 사명이라는 것은 그 사람 자체가 먼저 완전한 인격을 가지게 되면 그 인격적인 열매로써 이상적인 나라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첫째아담이 범죄하였으므로 죄의 세상이 이루어졌고 둘째아담 그리스도가 의를 행하셨으므로 거룩한 세상이 이루어지게 된다.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지만 그 형상대로 열매를 맺지 못하였기 때문에 첫 열매로 가인을 낳게 되어 하나님을 대적하고 의인을 죽이는 일이 있었다. 그러므로 그 씨가 땅에 편만하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는 홍수 심판으로 그들을 전멸시키고 말았던 것이다. 아담이 자기가 해야할 사명을 하지 못하였으므로 그 열매는 심판의 대상자가 되는 악한 세상을 이루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물로 세상을 심판하셨지만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그 질적 타락으로 말미암아 또 다시 불로 살라 없애 버리는 심판을 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 바벨론 세상이다.

  이것을 본다면 한 사람이 사명을 바로 감당하지 못한 죄로 전 세계가 멸망을 받게 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 한 분이 사명을 바로 감당하신 의로 영원히 복을 누리는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 사명이라는 것을 열매를 먹고, 또 그 열매를 먹기 위하여 수고하는 것이 아니요, 열매를 먹은 사람으로서 거룩한 나라를 이루는 일과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을 많이 생육하는 일이라고 본다.

  거룩한 사람이 될 때에 거룩한 사람이 열매로 나타나고, 지혜로운 사람이 될 때에 지혜로운 사람이 열매로 나타나고, 사랑의 사람이 될 때에 사랑의 사람이 열매로 나타나는 것이 원칙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이루어진 인격을 가지고 그 형상대로 이루어진 사람을 생육하고 충만케 하며 이 땅을 거룩한 사람으로 정복케 하고 다스리게 하는 것은 열매를 먹고사는 사람이 해야할 사명이라는 것이다.

  만일 어떤 지도자가 사람들을 지도할 때에 바로 가르치지 못하고 억지로 자기 주권을 내세우면서 사람을 노예화 시킨다면 이것은 악한 행동이라고 본다. 어떤 목사가 강단에 서서 설교할 때에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다 마음이 깨끗해지고, 평화로워지고, 사랑의 불이 타게 된다면 열매를 먹고 사명을 바로 할 수 있는 인격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어떤 목사가 강단에 서서 설교를 할 때에 오히려 그 곳에 모인 사람들의 마음이 복잡해지고, 말씀이 혼선되고, 사랑이 식어지고 만다면 이 설교자는 열매를 먹고 또 그 열매를 먹기 위하여 일하는 삯꾼에 불과한 사람이라고 본다.

 

  2.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가정을 이루어야 함 (2:15~19)

  하나님께서는 사명자에게 돕는 사람이 있는 것을 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홀로 있는 것을 원치 않으시고, 홀로 일하는 것을 원치 않으시고, 당신과 의합된 사람을 택해서 쓰시므로 당신도 영광을 받으시고, 의합된 사람에게 영광을 주기도 하시는 것이다. 이와같이 사명을 맡은 자에게도 돕는 짝을 주어서 사명자가 영광을 누리는 동시에 돕는 자도 같이 영광을 누리게 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당신과 사명자가 일체가 되는 것 같이, 사명자와 일체가 되는 사람이 있어서 한 단체를 이루는 것을 기뻐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사람을 지을 때에 아담이 홀로 있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돕는 배필을 지어 함께 살게 하셨다. 이것은 부부에 관한 것만을 뜻한 것이 아니요, 거룩한 나라를 이루기 위한 사명자에게 대한 것을 뜻한 것이다.  

  지금 이 세상의 부부라는 것은 거룩한 씨를 내는 것보다도 악한 씨를 많이 내고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아담 하와가 질적 타락이 되었으므로 그 피를 받은 부부는 타락한 사람을 생육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가정의 부부 생활도 예수님은 신랑이요, 우리는 신부가 된 것처럼 되어야 한다는 것을 역설했던 것이다.

  지금 아무리 큰 사명을 가진 자라도 그를 돕는 사람이 없다면 그 사명을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왕권 반열이 이루어지는 것은 큰 사명을 맡은 자와 그 사명을 돕던 자로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사명자의 결합으로 왕권의 영광을 누리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이다.  

  가정이라는 것은 사명을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라는 것은 사명을 위한 가정과 같이 되어야 한다. 아담이 “정녕 죽으리라” 하는 법을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하와가 죽을까 하노라 하는 말을 했다는 것은 돕는 사명자의 탈선된 말이라고 본다. 그리고 “정녕 죽으리라” 하는 법을 받은 사명자를 돕는 자가 죽지 않는다는 말을 따라갔다는 것은 사명자를 돕는 일이 아니요, 오히려 대적이 되는 일이므로 세상을 망치는 가정을 이루었던 것이다.

  우리가 열매를 먹고 사명을 바로 하는 사람이 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대표적인 종을 돕기 위해서 그가 받은 말씀의 법을 엄중히 알고, 그 말씀대로 싸워야 할 것이다. 대표적인 종이 받은 말씀의 법대로 싸우는 일에 돕는 사람이 되어야만 사명을 바로 할 수 있는 종이 되며, 가정적인 단체를 이룰 수 있다.

 

  결    론

  하나님께서 이 땅 위에 자동적으로 열매를 맺는 나무를 만드시고 그 열매를 마음대로 먹을 수 있도록 사람에게 허락하셨다. 이 열매를 먹는 사람으로서 사명을 바로 할 때에 생명과를 먹고, 생명수를 마시고, 영생할 몸이 되어 세세 왕권을 받아 가지고 영광을 길이길이 누리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인 것이다.

 

 

여호와께서 일어나야 할 때

- 사 33:7~16 -

 

  하나님께서 잠잠히 계실 때도 있고, 일어나실 때도 있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위하여 보내심을 받아 죄인을 위해서 화목 제물이 되시고,  죄인을 위해서 대제사장이 되어 항상 하나님 앞에 대언 기도하시는 것을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당신과 인간사이에 화평을 누리는 것을 원하신다. 그러므로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도 기뻐하시는 것이다. 죄인이 회개하는 것을 기다리시는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 아무리 악한 자들의 박해가 있다 하여도 그들이 잘못을 깨닫고 돌아오기를 원하시므로 잠잠히 계신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일어나야 할 때는 어떠한 때라는 것을 본문을 들어서 증거한다.

 

  1. 하나님의 대적이 조약을 파하는 때이다 (7~9)

  하나님께서 대적을 들어 환란이 오게 하시면서, 친히 일어나 당신의 백성을 위하여 싸워 주셨다는 것이 이스라엘 왕국의 역사가 된다. 그러나 아무리 당신의 자녀라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치 않는 자는 대적에게 맡겨서 죽게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자는 아무리 대적이 강하여도 하나님의 보호가 같이 해서 그 대적의 손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승리하게 하시면서 인간 종말에도 그렇게 하실 것을 약속하신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본문을 보면 인간 종말에 가서 얼마 동안 세계 평화를 위한 조약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일어나실 때는 하나님의 대적을 들어서 그 조약을 파하게 하시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대적과 평화 조약을 맺던 사람들은 다 비참한 가운데 떨어질 것을 가르쳤다. 용사가 부르짖으며, 사신들이 곡하는 것은 대적이 조약을 파하고, 성읍을 멸시하고, 사람을 생각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였으며, 이 땅이 완전히 황폐화되는 일이 있을 것을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인위적인 평화를 위하여 대적에게 협상을 요구한다는 것은 오히려 슬퍼할 일이 되고 말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일어나실 때에 그 앞에서 책망을 받지 않을 일을 해야 된다. 만일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대적인 공산당과 평화를 하기 위하여 그 사상을 용납한다면 도둑에게 자기가 갖고 있는 보물을 보여주면서 내 것은 훔쳐 가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하는 사람이나 같다.

  지금 하나님의 대적은 소위 평화 조약이라는 것을 이용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대적이 평화 조약을 깨쳐 버리고 나오는 것을 무서워할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일어나시는 것을 더 큰 일로 알고 사상을 지켜야 할 것이다. 오늘날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대적과 평화를 해야만 된다고 하는 것은 섶을 지고 불에 뛰어 들어가는 사람과 같다.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로 폐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현실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평화라는 것은 멸망을 자취하는 행동이 될 것이다.

 

  2. 호흡이 불이 되는 때이다 (10~12)

  인류 종말에 비참한 일은 호흡이 불이 되어 세계를 삼키는 일이라고 하였다. 오늘에 와서 세상이 되어지는 일을 본다면 이 본문의 말씀이 분명히 응할 때가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날까지 글자 그대로 이루어졌다면, 이 말씀도 글자 그대로 이루어지게 될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공기가 불이 되는 전쟁이 무서워서 대적과 평화를 하자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행동이다.

  호흡이 불이 되어서 세계 인류를 삼키는 환란이 올 때에 하나님께서 일어나시는 것은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다. 오늘날 어리석은 인간들이 원자의 불은 무서워하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에 사름을 당하게 될 멸망의 자식들이 하는 행동이라고 본다.  이러한 시국을 만나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할 일은 무엇이냐는 것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첫째 : 의롭게 행할 것

  둘째 : 정직히 말할 것

  셋째 : 불의한 재물을 가증히 볼 것

  넷째 : 뇌물을 받지 않을 것

  다섯째 : 악한 말을 듣지 말 것

  여섯째 : 악한 일을 보지도 말 것

 

  3. 물과 양식을 공급해야 될 때이다 (16)

  하나님께서 이날까지는 죄인을 부르기 위하여 의로운 사람이 악인에게 압박을 당해도 잠잠히 계셨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일어나실 때에는 악한 사람은 버리고, 의로운 사람만 보호하여 물과 양식을 공급해 주시기 위하여 역사하신다.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는 여호와께서 물과 양식을 공급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당신의 백성을 환란과 재앙 가운데서 구원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보호가 있어야 하는 동시에 물과 양식을 공급해야만 되는 것이다. 과거 예언적인 이스라엘 왕국을 이루기 위해서도 40년 동안이나 물과 양식을 공급해 준 일이 있었다면, 새 시대를 이루기 위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택한 백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물과 양식을 공급해 주시는 것은 원칙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대로 세상이 불에 사름을 당할 시기가 왔다면,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실 것을 믿고, 조금이라도 대적을 무서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생활에서 특별 보호를 받을 인격이 이루어지는 일에 전력을 두어야 할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대적이 두려워서 협상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진노를 받을 행위이다.

 

  결    론

  우리는 이 때를 말씀에서 바로 알아야 하며, 우리가 해야 할 일도 말씀에서 바로 알아야 하며, 우리가 가져야 될 인격도 말씀에서 바로 찾아야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일어나실 때가 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 기독교가 나가야 할 방향은 조금이라도 하나님의 대적을 무서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중심 사상에서 나가야 할 것이다.

 

 

기운이 진한 야곱과 새 힘을 받은 야곱

- 창 49:33, 사 40:27~31 -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세울 때에 네 씨로 말미암아 모든 족속이 복을 받으리라고 하셨다. 그리고 시련 끝에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주셨던 것이다. 이삭이 에서와 야곱을 낳게 되었는데, 하나님께서 모태로부터 에서는 택하지 않고 야곱을 택하셨다. 그러므로 야곱이 이스라엘 왕국을 이루어 거기서부터 참된 하나님의 말씀이 나타났는데, 이것이 세계를 구원하는 복음이 된 것이다.

  모태로부터 택함 받은 야곱이 이스라엘 왕국을 이룬 것은 앞으로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들로 말미암아 지상 왕국이 이루어질 것을 뜻했다. 그러므로 오바댜 선지가 인간 종말에 심판을 받을 자는 에서요, 구원을 받을 자는 야곱이라는 것으로 묵시를 보았던 것이다. 아무리 아브라함의 씨지만 택하지 않은 자는 버림을 당하게 되고, 택함을 입은 자만으로 영원한 왕국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증거로 보여준 것이다.

  이제 기운이 진한 야곱과 새 힘을 받은 야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기운이 진한 야곱 (창49:33)

  야곱은 모태로부터 택함을 입었으므로 하나님의 축복을 위하여 싸우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것은 어떠한 도덕과 의식을 따라서 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을 초월해서 싸운 것이다.

  야곱이 자기 형인 에서에게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기업을 사겠다는 것은 인간 도덕으로는 너무나 어긋난 일이다. 왜냐하면 도덕적으로는 용납할 수가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배고픈 형을 앞에 놓고 장자의 기업을 팔면 팥죽을 준다는 것은 사람이 볼 때에 너무나 부도덕한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떠한 명예심보다도 장자의 축복을 갈망하는 마음에서 나온 말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는다고 하신 말씀을 생각할 때에 야곱은 장자가 아니므로 그 사명을 못한다는 것을 항상 분하게 여겼던 것이다. 에서는 자기로 말미암아 천하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게 된다는 것을 경홀히 생각을 했고, 야곱은 그것이 가장 큰 축복이며 가장 큰 일로 생각했다. 그러므로 야곱은 인간이 볼 때에 도덕을 떠난 말을 하였지만 가장 불타는 신앙심을 가졌다고 본다.

  그리고 형이 받을 축복을 자기가 받겠다고 염소의 가죽을 몸에 두르고 눈이 어두운 이삭 앞에 갔다는 것은 아버지를 속이는 행동이다.  자기 형인 에서가 털이 많으므로, 털이 없는 자기 몸에 염소의 가죽을 둘러 아버지를 속였던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볼 때에 못된 자식의 행동 같지만, 에서가 장자의 기업을 야곱에게 판다고 약속을 했기 때문에 아버지를 속인 것이 아니요, 축복을 받기 위하여 비밀을 지킨 것이다.

  한 번 하나님 앞에 약속한 것은 비밀을 지켜서라도 그 일을 진행해야만 된다. 야곱이 하나님 앞에 한 번 약속한 말을 그대로 진행할 때에 형에게 쫓겨나서 도망을 가게 되었지만,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찌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다(창28:14). 에서는 인간 앞에는 야곱보다도 이해가 많고 활발스러운 것 같지만 하나님 앞에는 큰 과오를 범하게 되었다.

  첫째는 장자의 기업을 야곱에게 판다고 맹세한 일이요,

  둘째는 그 맹세대로 진행을 하는 야곱을 죽이고자 한 일이다.

  하나님의 종이 되려면 하나님 앞에 한 번 맹세한 일은 그대로 진행해야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야곱은 축복을 받기 위해서 혼혈을 하지 않으려고 14년 동안이나 라반의 집에서 봉사한 일이 있었다. 아내를 얻기 위하여 14년간 아무런 삯을 받지 않고 일해 준다는 것은 인간이 볼 때에 너무나 무가치한 생활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볼 때에 이것이 인정을 받게 되는 생활이 된 것은 축복을 받기 위해서 수고한 일이 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헛수고 같으나 축복을 받으면 된다는 것이 야곱의 마음이다. 그러므로 열 두 지파의 조상이 야곱의 몸에서 탄생되었다. 이것은 예언적인 역사가 된다. 왜냐하면 야곱의 몸에서 난 씨가 이스라엘 왕국을 이루었지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완전 승리를 하시고, 부활 승천하신 후에, 성신이 강림할 때에는 이스라엘 사람이나 이방 사람이나 꼭 같이 임하였기 때문이다.

  이스라엘과 이방과의 차별이 없이 성신이 역사한 것은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말씀대로 모든 족속이 복을 받게 하기 위한 것이다. 성신이 오신 목적은 이스라엘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요, 세계 사람들 중에서 참된 영적 이스라엘을 이루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야곱은 열 두 아들에게 축복의 말을 하고는 기운이 진하여 지면서 세상을 떠나고, 그 몸은 흙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는 흙으로 돌아가는 야곱이 될 때가 아니다. 흙으로 돌아가지 않는 야곱이 되어야만 야곱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상 왕국을 이루게 될 것이다.

 

  2. 새 힘을 받은 야곱 (사40:27~31)

  기독교의 이날까지 역사는 야곱과 같이 기운이 진하여지면서 몸은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하늘 나라에 가는 것이다(마8:11). 오늘날 온 세계 만방에 교회가 확장된 것은 주님께서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함께 천국에 앉으리라” 하는 말씀이 이루어지는 천국 복음 운동이다. 이것은 이방의 빛이 되는 역사이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는 이방 사람은 천국에 갈 수가 없었는데, 십자가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누구든지 예수만 믿으면 천국에 가게 된 것은 온 천하의 민족들에게 생명의 빛이 되는 역사라고 본다.

  그러나 야곱에게 세운 언약대로 모든 민족이 복을 받게 된다는 것은 이스라엘 왕국에서 선지들이 묵시를 받은 말씀대로 각 나라의 남은 자가 새 시대에 들어온다는 것과 같은 말씀이다. 다시 말하면 야곱의 왕국이 지상에 이루어지는 것은 모든 족속이 하나같이 이 땅에서 축복을 받을 것을 가르친 것이다. 사람이 기운이 진하여지면서 그 몸이 흙으로 돌아가는 죽음을 가지게 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못한 죄 값으로 온 것이다.

  그러나 새 힘을 받은 야곱이라는 것은 아무리 원통하고 딱한 사정을 만났다 하더라도 하나님만 바라보고 나가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인정을 하시고 새 힘을 주셨다. 그러므로 새 힘을 받는 야곱은 기운이 진하여 흙으로 돌아가는 몸이 되지 않고, 피곤이 없고, 쓰러지지 않는 몸으로 완전 승리를 이루어 지상 왕국을 이루는 열매를 맺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기독교는 새 힘을 받는 야곱이 되는 인격으로 들어가야만 할 때가 왔다고 본다. 나는 여기에서 부득불 간증을 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새 힘이라는 것은 체험한 자 외에는 무엇인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나도 과거에는 새 힘이라는 것을 열심이 나는 정도로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4년 전에 하나님께로부터 새 힘을 받으라는 명령이 내리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어떻게 하여야 새 힘을 받게 되느냐 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너는 아무리 원통한 일을 당하고 딱한 사정을 만난다 해도 천지를 창조한 여호와만 바라 보라, 그러면 새 힘을 받으리라” 하시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조물주 하나님만 바라보는 묵상을 하기 시작하였다.

  1967년 8월 15일 오후 3시에 새 힘이 나리는 것을 체험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새 힘이 몸에 부딪히는 대로 변화가 생기는 것이었다. 4년 동안이나 계속해서 새 힘을 받고 볼 때에 몸이 완전히 변해진 증거가 확실하며, 밤낮으로 쉬지 않고 일하여도 힘들지 않고, 영양이 많이 있는 음식을 먹지 않아도 점점 더 강건해지는 것을 현저히 체험하고 있다. 심지어 육류나 생선이나 우유나 계란까지도 사용치 않고, 밥 한 숟갈 정도와 채소와 과일을 먹을 때에 몸은 명랑해지고 상쾌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매일 10시간씩 강단에 서게 되고, 남은 시간은 아름다운 소식의 월간지를 쓰고, 주일은 서울 새일 중앙 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매달 마지막 일 주일은 집회를 나가고 있는데도 조금이라도 피곤을 모르고 있다. 이와 같은 것을 체험하게 된 나는 새 힘이 무엇이라는 것을 확실히 증거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새 힘이라는 것은 기독교 종말의 오메가 역사라고 본다. 이 새 힘을 받기까지 나가는 과정은 다음과 같다.

  첫째 : 중심 성결이 되는 일이요,

  둘째 : 말씀이 완전히 밝아지는 일이다.

  아무리 억울한 일을 당해도 하나님을 바라보게 될 때에 새 힘을 받는 단계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변화성도의 인격이라는 것은 새 힘을 받으므로만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이 사실이다. 기운이 진해진 야곱은 그 몸이 흙으로 돌아갔고, 새 힘을 받은 야곱은 지상에서 야곱의 왕국을 이루는 일에 완전한 승리를 보게 될 것이다.

 

  결    론

  하나님께서 예언적인 역사에는 증거만 보여 주셨고, 그 예언이 이루어지는 역사에는 열매를 완전히 맺게 하시되 영적이 아니요, 지상에 완전한 열매로 나타나게 하시는 것이다. 기운이 진하여진 야곱은 예언적인 이스라엘 왕국을 이루었고, 새 힘을 받은 야곱은 하나님의 비밀이 그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이루어지는 다시 예언의 역사를 하다가 죽음을 맛보지 않고 새 시대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다(계10:7, 11:15).

 

 

무너진 곳을 다시 세울 인격

- 사 58:10~12 -

 

  하나님께서 가장 귀하게 쓰시는 사람은 무너진 곳을 다시 세우는 종이라는 것을 본문에 가르쳤다. 이날까지에 우리 기독교는 몽학적 교훈의 역사를 했다고 말할 수 있다. 구약 시대에도 몽학적 교훈을 하는 때가 있었고, 경고의 나팔을 부는 선지 시대가 있었다.

  구약 때에 몽학적 교훈은 모세 오경이니, 없던 성전을 세웠고 없던 이스라엘 왕국을 세우게 된 것이다. 그 때에는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그대로 그 법을 가르치는 일을 하였다. 그러므로 죄가 무엇이라는 것을 가르친 동시에 제사하는 법을 가르쳤고, 성전 짓는 법을 가르쳐서 그 말씀대로 나라 헌법이 되었고, 그 말씀대로 성전이 이루어졌고, 그 말씀대로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 족이 생긴 것이다.

  그러나 이 시대가 지나서 선지 예언 시대라는 것은 무너진 곳을 다시 세운다는 것을 목적으로 두고 예언한 때를 말한다. 부패한 정부와 부패한 선지와 부패한 성전의 모든 것은 다 황폐화되고 말 것을 가르쳤으며, 거기에서 새로운 순의 종이 나와 예루살렘이 다시 복구될 것을 가르친 것이 선지 예언이다.  

  이와 같이 신약 시대에도 새로운 사람들이 중생을 받아 뭉쳐지는 단체를 교회 단체라는 것이다. 이것은 구약 때에 몽학적 교훈이 되는 모세 오경에 가르친 말씀대로 이루어진 교회이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은 몽학적 교훈이 완성된 일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이날까지 기독교는 이스라엘 왕국의 몽학적 교훈이 신약 교회에 완전한 열매가 되는 교회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구약 시대에 경고의 예언의 말씀이 구약 말기에 증거가 나타난 것은 신약 종말에 완전한 열매가 될 것을 가르친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무너진 곳을 다시 세울 종의 인격은 어떠한 것이냐는 것을 다음과 같이 증거한다.

 

  1. 괴로워하는 자의 마음을 만족케 하는 인격 (10)

  오늘날 참된 종이라는 것은 마음이 괴로워하는 자를 만족케 해 줄 수 있는 인격을 가진 사람이다. 마음이 괴로워하는 자에게는 몽학적 교훈이 필요치 않고, 완전 변론의 역사가 있어야만 될 것이다. 은혜 시대의 역사는 젖을 주는 것이라면, 괴로워하는 마음에 만족을 주는 교훈은 감추었던 만나가 될 것이다.  

  이 시국에는 사상과 양심이 바른 성도들에게 괴로움이 되는 일만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북방을 바라보아도 마음이 괴롭고, 남방을 바라보아도 마음이 괴롭고, 동.서방을 바라보아도 마음이 괴로운 형편에 있는 것이 이 때이다. 몰라서 죄를 짓는 것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대적이 되는 사상으로, 정치로, 교회로, 가정으로 변해진다는 것은 극상 포도를 심은 농부가 들 포도가 된 것을 보고 괴로워하는 것과 같이 사상, 양심이 바른 참된 하나님의 종이 괴롭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러한 종들에게는 천국 복음을 말해서 마음에 만족을 주는 것이 아니요, 심판과 새 시대에 대한 진리를 완전 변론으로 증거해서 괴로워하던 종의 마음에 의문을 풀어줄 때에 자동적으로 만족을 가지게 된다. 피곤한 그 마음이 각성을 받고, 분명히 이 때는 우리가 살아서 주님을 맞이할 때라는 것을 알게 될 때에 괴롭던 모든 문제는 사람의 힘으로 해결 될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다시 오시므로 해결될 것을 확신하게 되므로 마음에 만족을 갖게 되는 것이다.

  초림의 주가 오실 때에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이 그 죄를 사함 받으므로 기뻐하게 되었다. 지금은 시국의 여러 가지 문제가 마음에 괴로움이 된 사람에게 완전 변론의 말씀을 증거하게 되면 모든 어려운 난제가 자동적으로 해결된다. 이것은 말씀대로 시국이 이렇게 되었으니 말씀대로 어떠한 노선을 가야만 된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될 때에 마음이 괴롭던 자들이 만족함을 갖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죽었던 영들이 이루어진 십자가 부활을 증거하는 종들을 통하여 중생을 받았다면, 죽을 수밖에 없는 환란과 재앙을 만난 사람들이 이루어질 예언의 말씀을 확실히 깨닫게 될 때에 마음에 만족을 얻게 되는 것이다.

 

  2. 어디서든지 항상 만족을 누리는 인격 (11)

  무너진 곳을 다시 세우는 인격이 되려면 아무리 메마르고 적막한 자리에 간다 하여도 항상 만족한 것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다시 말하면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나 조금도 피곤이 없는 인격을 가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나 괴로운 것이 남아 있다면 자신부터 고쳐야 될 것이 있는 인격이니, 무너진 것을 다시 세우는 일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기독교 종말에 역사를 일으킬 종은 은혜 시대보다도 더 만족한 것을 누리도록 하시는 것이다. 은혜시대의 종인 바울은 겉 사람은 날마다 후패 하나 속 사람은 새롭다고 하였지만, 인간 종말에 남을 종이 될 사람은 영이 소성함같이 몸도 아울러 소성함을 받는 역사가 있으므로 그 몸이 죽음을 맛보지 않고, 무너진 곳을 다시 세우는 자가 되어 새 시대를 이루게 될 것이다.

 

  3. 많은 열매를 맺는 인격 (12)

  이 땅에서 가장 열매가 많은 인격을 가진 자는 새 시대로 많은 사람을 인도하는 사명자라고 본다. 천국으로 인도하는 사명을 가진 자는 대중적인 구원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고 개인적인 영혼 구원을 목적했다. 그러나 인간 종말에 새 시대를 이루는 종은 순식간에 새로운 왕국이 이루어지는 역사를 하게 된다(사66:7~9). 천국은 단체적으로 죽어서 가는 것이 아니고, 개인이 죽어서 그 영혼이 가는 것이다. 그러나 무너진 곳을 다시 세우는 역사는 전 세계 인류가 전멸을 당하는 날에 단체적으로 보호를 받고 새 시대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네게서 날 자들이 오래 황폐된 곳들을 다시 세울 것이며, 너는 역대의 파괴된 기초를 쌓으리니 너를 일컬어 무너진 데를 수보하는 자라 할 것이며,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라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가장 복 있는 자는 무너진 데를 다시 세우는 일을 하는 종이라고 보게 된다.

 

  결    론

  사람이 무너뜨리는 일은 하기 쉬워도, 무너진 곳을 다시 세우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며 귀한 일이라고 본다. 오늘날 심령 부흥회가 각 곳에서 열리고 있지만 이것은 완전한 역사라고 볼 수 없다. 우리는 진노의 날에 남은 자가 되어 새 시대를 이루는 것이 가장 큰 역사라고 본다.

 

 

형벌의 날이 올 때에 남을 자의 인격

- 미 7:4~10 -

 

  인류 역사를 비추어 볼 때에 극도로 정치자들이 부패되고 종교 지도자들이 부패되었을 때는 형벌이 왔던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부패한 지도자들을 없애지 않고는 참된 하나님의 백성들이 도저히 살 수가 없는 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아끼기 위하여 부패한 지도자들을 없앴던 것이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인류 종말에 지도자들이 극도로 부패되어 하나같이 서로 뭉쳐지므로, 옳은 양심을 가진 사람이 그 아래에서 도저히 살 수가 없게 될 때에 형벌의 날이 오게 되며, 이 때에 어떠한 자가 남아서 승리하게 된다는 것을 가르쳤다.

  이제 형벌의 날이 올 때에 남을 자의 인격을 본문을 들어서 증거한다.

 

  1. 가까운 사람이라고 무조건 믿지 않아야 된다 (5상반절)

  앞으로 우리가 완전한 인격을 보존해 나가기 위해서는 아무리 가까운 친척이요, 친구라 하여도 무조건 믿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우리 앞에는 너무나 악한 시대가 닥쳐오기 때문이다. 참으로 믿을 수 있는 이는 하나님 한 분밖에는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마음으로 모든 사람을 대할 때에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 하여도 함부로 무엇을 맡겨서는 안될 것이다. 사람을 분별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며, 우리는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도 그 인격을 검열해 보고 모든 일을 해 나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친척과 친구를 바른 길로 지도를 할지언정 그들을 믿고 의지한다는 것은 완전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라고 볼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과 하나님의 역사를 받은 양심으로써 친척이나 친구를 바로 이끌어 나가는 인격이 있어야만 형벌의 날에 남을 자격이 갖추어졌다고 볼 수 있다.

 

  2. 입을 지켜야 된다 (5하반절)

  형벌의 날이 올 때에 남을 자가 되려면 어떤 사람에게든지 입을 지키는 인격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사상적인 싸움을 하게 되는 종말의 환란이 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입을 지키지 못한 일로 말미암아 악한 사람들에게 억울한 누명을 쓸 수도 있다. 기생 라합은 여리고 성이 망할 때에 입을 지키는 사람이 되므로 자기 가족을 구원했던 것이다.

  앞으로 무서운 환란은 무력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가장 간교한 악당들이 사람을 해하고자 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이 때에는 입을 지키지 못하면 억울한 피해를 당할 수도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종이 진리를 증거하기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것은 큰 상급이 된다. 그러나 입을 지키지 못하고 실수하게 되므로 핍박을 받는 것은 아무런 가치도 없는 고생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필요 없는 일에 간섭하지도 말고 항상 입을 지켜야만 형벌의 날이 올 때에 남을 자가 될 수 있다.

 

  3.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된다 (6~7)

  어려운 난관이 올 때에 하나님만 바라볼 수 있는 인격이라는 것은 누구든지 다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장부의 신앙을 가진 자에게만 있다. 모세가 60만 대중을 이끌고 나갈 때에 어렵고 두려운 일들이 많이 닥쳐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을 당할 때마다 모세가 용기있게 하나님만 바라보게 되므로 홍해를 육지같이 건너게 되었고, 사막을 통과할 때에도 만나와 생수가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은 어떠한 난관이 와도 당신만 바라보고 나가는 자에게 응답으로 내리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완전한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니고, 낙심치 않고 당신만 바라보는 자에게 무조건 응답을 내리시는 것이다.

 

  4. 실패가 있어도 용기있게 나가야 된다 (8~10)

  사람이 실패를 당할 때에 쓰러지고 마는 것은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실패를 당해서 넘어지는 일이 있고, 흑암에 빠지는 일이 있다 하여도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이길 수 있도록끔 역사해 주시는 것이다.  

  앞으로 형벌의 날이 올 때에 남을 사람이 되려면 실패가 있어도 하나님께서 불쌍히 보는 자라야 한다.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잠자는 자는 형벌의 날에 망할 것이로되 아무리 넘어지고 실수가 있다 하여도 용기있게 하나님만 바라보고 싸워 나가는 자는 하나님의 돕는 은혜가 같이 하므로 완전한 승리를 이루게 될 것이다.

  인간이 볼 때는 흠을 잡을 만한 일이 있다 하여도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불쌍히 여길 사람이 있다. 그리고 인간이 볼 때에는 흠을 잡을만한 일이 없다 하여도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불쌍히 여길 수 없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형벌의 날이 올 때에 남을 자가 되려면 하나님께서 불쌍히 보시고 도와주실 수 있는 인격이 되어야 한다.

 

  결    론

  우리는 형벌의 날이 올 수밖에 없는 시기를 만났다고 본다. 무서운 재앙이 올 수밖에 없는 위기에 우리가 처해 있지만 자아의 인격 하나를 바로 세워 나갈 때에 완전 승리를 이루는 열매가 있게 될 것이다.

 

 

안식일과 즐거움

- 사 58:13~14 -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즐거운 일을 다 마치시고 안식하신 날이다. 하나님께서 천지 창조를 하실 때에 즐거워하신 것은 없었던 것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만일 천지 창조가 없었다면 하나님께 영광이 될 일이 있을 수 없다. 세상에서 어떤 부부가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자식도 없이 가만히 있다면 즐거움이라는 것은 조금이라도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천지 창조를 하시지 않으시고 영원히 홀로 계신다면 아무런 영광을 누릴 수가 없다. 그러므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실 때마다 크게 즐거워하신 것이다.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대 사업을 마치시고 축복하신 날이다. 그러나 인간이 범죄하므로 하나님께서 즐거워하시는 축복을 받지 못하고 슬퍼하시는 저주를 받게 되었다. 그런데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신 것은 아무리 타락한 인생이라도 다시 그 축복을 주시고자 하는 거룩하신 뜻이다. 다시 말하면 안식일을 지키는 자에게 거룩한 뜻을 알게도 하시고, 그 복을 받게도 하시는 것이다.  

  율법시대와 신약시대의 안식일에 대해서 그 차이점은 다음과 같다. 율법시대의 안식일은 몽학적이라면 신약시대의 안식일은 완전히 이루어지는 열매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언적인 성전에서 지켰던 안식일은 열매가 될 교회가 누릴 안식을 보여 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신약 시대의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따라 행하시는 날이 아니요, 그리스도의 은혜를 따라 행하시는 날이다. 그리스도께서 완전 승리의 열매를 이루신 이레 중 첫날이 되는 그날에 부활하신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예배를 받기도 하시고, 은혜를 나리기도 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은혜의 법에 의한 안식이므로 주일을 안식일로 지키는 것이 원칙이라고 본다.  

  이제 안식일과 즐거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본문으로 증거한다.

 

  1. 즐겁고 존귀한 날 (13상반절)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즐거운 날은 땅의 것을 위하여 사는 날이 아니요, 하늘의 것을 위하여 사는 날이다. 어떤 교회가 안식일에 하늘의 것을 받는 체험이 없다면 자동적으로 그 날은 외식이 되고 말 것이다. 엿새 동안에 마음이 상처를 받고, 피곤해지고, 복잡해졌다 하더라도 안식일에 교회로 와서 대제사장 그리스도를 통하여 내리는 새로운 역사를 받게 될 때에 극도로 즐거워진다.  

  그리고 가장 존귀한 날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공경할 수 있는 일을 하는 날이다. 그러므로 이 날에는 내 사업보다 하나님을 존귀하게 아는 사람이 일을 중지하고 하나님만 바라볼 때에 가장 존귀한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것이다.  

  오늘날 신자들이 안식일에 즐거워하는 마음이 자동적으로 생기도록 은혜를 받지 못한다면 그 생활은 아무런 열매가 없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공경하는 일에 있어서 자동적으로 외식이 되기 때문이다. 안식의 축복을 받을 하나님의 자녀들은 안식일에 모여서 우렁차게 호소 성가를 올려야 할 것이다. 집에서 기도의 힘을 잃었던 사람도 성전에 나와서 호소 성가를 올리게 될 때에 새로 나리는 역사를 받게 되므로 메마른 땅에서 시들은 풀이 단비를 맞고 소성하듯이 소성함을 받게 된다.

  지금 하나님께서 새 시대를 목적한 진리를 중심하여 새일 성가를 내려보내신 것은 그 기도 호소문을 통하여 안식일마다 무한한 축복을 내리기 위한 방법이다. 우리 새일수도원에서는 새일 성가를 부를 때마다 이슬과 단비 같이 역사가 나리므로 누구든지 믿음으로만 부르게 되면 산 체험을 가지게 된다. 아무리 피곤하던 사람이라도 이 성가를 부르게 될 때에 분명히 소성함을 받게 되는 모양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안식일에 이 성가를 통하여 나리는 흡족한 은혜를 항상 받고 있는 것이다.  

  안식일에 오락을 한다는 것은 은혜가 내리지 않는 교회에서 하는 행동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락보다도 하늘로부터 오는 즐거움을 가지고 그날을 지켜야 할 것이다.

 

  2. 사적을 떠난 공적의 날 (13하반절)

  안식일에는 단체적인 행동을 해야 된다. 사사로운 행동이나 말을 하지말고 공적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과 대중을 복 받게 하는 일을 중심해야 할 것이다. 만일 어떤 교인이 교회를 나가지 않고 집에서 혼자 예배한다는 것은 벌써 공적 교회를 무시하는 일이니, 죄를 범하고 있는 행동이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사적 생활에 대한 일이나 말을 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의 품안에서 한 단체를 이루어 하나님의 영광을 목적한 교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나” 하나를 위한 것보다도 대중을 위해서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전력을 둘 때에 자동적으로 거룩한 단체가 되어 하늘 보좌를 움직이는 예배를 드리게 되며,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하는 예배를 드리게 된다.

  강단에 서는 종은 하나님께서 그날에 하실 말씀을 하는 입술이 되어야 하고,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제사를 제물로 올리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우렁찬 호소를 올려야 한다. 제물은 이미 그리스도의 몸으로 제사를 완성한 것이니, 우리는 이 몸을 바쳐 예배할 때에 지성소에 있는 대제사장 그리스도를 통하여 응답이 내리는 것이다.

  강단에 선 종이 하나님의 대행자로서 입을 열어 설교할 때에 그 말을 통하여 대중이 만족함을 받는 일이 있게 되므로 교회는 날마다 신령한 은총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예배를 인도하는 종이 하나님의 대행자가 되지 못하고 강단에 선다면 모든 사람의 마음은 자동적으로 세상으로 흩어지게 되는 일이 있으므로 그 교회는 속화되고 말 것이다.

 

  3.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는 날 (14)

  우리는 안식일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즐거움을 얻는 일이 있어야 할 것이다. 어떤 교회가 안식일에 극장을 가고, 야외 소풍을 가고, 운동회를 하고, 오락회를 열고, 파티를 연다면 벌써 여호와 안에서 떠난 행동이다.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는 교회가 될 때에 세상 오락이라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통하여 교회 전체에게 새로운 즐거움을 주시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구원을 받는다는 것보다도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게 되는 것이다.

 

  결    론

  가장 귀하고도 즐거운 날은 예배를 드리는 날이다. 세상에서 제일 존귀한 날은 하나님을 즐겁게 해 드리는 예배의 날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우리는 안식일에 복을 받는 자가 되어야만 새 시대의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다.

 

 

승리의 기도

- 마 26:36~46 -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사랑하는 독생자라도 기도로 승리하도록끔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승리하는 일에 있어서 반드시 기도가 있어야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만민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의 승리를 이루기 위하여 기도하신 일은 세계 인류의 대표적인 기도가 되는 동시에 기도의 표본이 된다. 기도라는 것은 조금이라도 타협이 있을 때는 필요가 없고, 완전 승리를 이루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다.  

  이제 승리의 기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본문으로 증거한다.

 

  1. 마음에 고민이 심한 중에 하는 기도 (36~38)

  승리의 기도라는 것은 아무런 고민이 없이는 있을 수 없다. 만일 어떤 사람이 큰 문제를 앞에 놓고도 마음에 고민하는 것이 없고 오히려 태만하게 있다면 이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양심이라고 볼 수 없다. 예수님께서 인간 죄악을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기 전에 마음에 큰 고민이 온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인간 죄악의 고통을 느끼는 마음이다.

죄값으로 수많은 영들이 죽는 것을 생각할 때에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는 마음에서 고민을 가지게 된 것이다. 수많은 양떼가 쓰러져 죽게 되는 것을 보고도 마음에 고민이 없는 목자라면 참으로 양을 사랑하는 목자라고 볼 수 없다. 남이 망하는 것을 볼 때에 마음에 고민이 없이 오히려 비웃는 사람이라면 사랑을 떠난 마음을 가진 것이다.

  둘째는 인간 죄악 고통을 짊어지는 마음이다.

어떤 사람이 잘못된 일을 행하였을 때에 책임을 그 사람에게만 지게 한다면 마음에 아무런 고민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잘못된 일을 자기가 책임을 져야 할 형편이라면 마음에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셋째는 공의를 생각하는 마음이다.

공의의 법이라는 것은 조금이라도 용서가 없는 것이다. 어떠한 잘못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대로 묵인해 버린다면 이것은 공의라고 할 수 없고 그 법을 파괴시키는 일이 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고민하는 마음을 가지게 된 것은 인간의 모든 잘못을 짊어지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참된 기도라는 것은 잘못된 일을 바로 잡기 위하여 애원하는 것이다. 자기 잘못을 고치기 위하여 애원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해야할 기도이다. 그러나 전 세계 인류의 잘못된 것을 바로 잡기 위하여 심히 안타깝게 부르짖는 것은 그리스도의 마음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마음을 받은 자가 다른 사람이 망하는 일을 보고 고민하는 마음이 생겨 눈물 흘려 기도하게 될 때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응답이 내려오는 것이다. 누구든지 남을 살리기 위하여 애쓰는 종은 남보다도 마음에 고민하는 것이 많게 되므로 건전한 기도를 하게 된다.

 

  2. 아버지의 소원을 이루기 위한 기도 (39)

  기도라는 것은 자기 소원을 이루기 위하여 하는 것 보다도 내 소원을 없이 하고 아버지의 소원만 이루어 달라고 구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말씀은 순종치 않고 자기의 소원만 이루어달라고 한다면 오히려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대적이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은 없이 하고 자기의 뜻을 내세우려고 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소원을 이루기 위하여 괴로워도, 수치스러워도, 죽어도 순종한다는 것이 참된 충성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 뜻을 버리고 아버지의 뜻에만 순종한다는 것을 목적하고 아무리 쓴 것이 내게 와도 오히려 이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할 때에 승리의 기도가 된다.

  우리의 승리 기도라는 것은 먼저 “나”라는 자체가 없어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에게 인간의 죄악을 짊어지게 해서 죽게 하시고 그 의로운 행실로 말미암아 세계 인류가 다 하나가 되는 나라를 이루자는 것이 소원이다. 제일 높은 영광도 독생자에게 있게 하시고 제일 높은 의도 독생자에게 있게 하셔서 우리에게 그 안에서 세세 영광을 누리도록 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이다.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죽어 만민의 죄를 대속하는 일이 없었다면 하나님의 의도, 독생자의 의도 이룰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아버지의 의와 아들의 의가 세상에 나타나는 일이다. 세상에서 의로운 일을 행하는 사람이 있다 하여도 그것은 도덕적 의는 될지언정 세계 인류를 살리는 의는 될 수 없다. 세계인류를 살리는 의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다. 이것이 세계 통치권을 가질 수 있는 만왕의 왕이 되는 일이다.

  그러므로 승리의 기도라는 것은 십자가의 의를 완성하는 것을 목적해야 한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십자가 의를 이루기 위한 것만을 목적하면 승리의 기도가 될 것이다.

 

  3. 남을 동정하는 기도 (40~46)

  주님께서 밤새도록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은 그 옆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그 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신 것은 제자들에 대하여 동정하는 마음이다.  

  언제나 승리의 기도를 하는 사람은 약해서 쓰러지는 사람을 동정하는 마음이 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가 많은 기도를 한다고 해서 약한 사람을 업신여기고 동정하지 않는다면 승리의 기도를 할만한 자리에 들어간 자라고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지금도 예수님은 항상 대언 기도하시면서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해서 쓰러지는 사람을 동정하여 쓰러지지 않도록끔 해 주시는 응답을 내리신다.

  언제나 양떼를 인도하는 종이 되려면 마음에는 원이로되 실천을 못하는 사람들을 아끼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라고 한 것이다(롬7:24~25).

 

  결    론

  기도 생활이라는 것은 위와 같은 세 가지가 항상 있어야 한다. 자기를 위한 기도가 승리할 수는 없고, 남을 살리기 위한 하나님의 법을 순종하는 제물이 된 기도라야 승리 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역사를 하시되 참된 기도를 통하여 승리하도록 하시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일

- 요 15:1~8 -

 

  우리 인생은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일을 하게 되는 것이 최고의 인격이며, 가치 있는 생활이라고 본다. 아버지께서는 홀로 영광을 받을 수 없고 오직 아들을 통하여서만 받으시는 것이다. 아무리 능력이 많고 풍부한 것이 있다 하여도 아버지 홀로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아무런 영광이 될 수 없다. 세상에서 어떤 아버지가 훌륭한 보화를 품에 안고서 아들에게 주기가 아까워 만지고 있다가 끝을 맺고 만다면 아무런 영광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보화를 아들에게 주어서 사회에 유익이 되는 일을 하도록 했다면 이것은 아버지께 큰 영광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비유로 말씀하실 때에 아버지는 농부요, 자기는 포도나무 그루터기요, 사명을 맡은 종은 가지라고 하셨고, 어떻게 되므로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을 가르치셨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부터 충만하게 열매를 맺게 하자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런데 열매를 많이 맺게 되는 일에 있어서는 오직 독생자 예수로 말미암아 되게 하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예정이다. 열매가 없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수도 없고 영광을 받을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광을 받기 위한 목적에서 역사하는 그 일은 다음과 같다.

 

  1. 열매를 맺게 하려고 깨끗케 하시는 역사 (1~3)

  인간이라는 것은 질적으로 타락된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처음 열매로 가인이라는 악한 살인자를 낳게 되었다. 그리고 둘째 열매로 의로운 아벨을 낳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악의 열매가 의로운 제사를 드리지 못하도록 아벨을 죽인 것이 아담의 가정에 있었던 비극이다. 그 때부터 좋은 열매를 맺고자 하는 자는 언제나 악한 열매를 맺는 사람에게 피해를 당하는 세상이 되었다.

  언제나 악의 세력이 의의 열매를 없이 하려고 하는 인류 역사가 아담의 가정에서부터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인생을 그대로 두고는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일을 세상에서 할 수 없게 된 것이 말세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세에 아들을 보내어 십자가에서 죽게 하신 것은 더러운 인간들을 깨끗하게 만드는 법을 세우기 위한 희생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거룩한 신이라고 해서 더러운 인간들을 버릴 수가 없다. 그리고 더러운 인간들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깨끗케 만드는 법을 세운 것이 속죄제를 받으시고 응답을 내리는 역사가 된다. 누구든지 깨끗해지기를 원하는 자라면 하나님께서 무조건 깨끗케 만들어서 열매를 맺게 하시되 가장 깨끗한 진액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받도록 하는 것을 기독교의 은혜 역사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스스로 깨끗하게 살 수 있도록 낸 것은 아니라고 본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깨끗해진 자라야 마귀를 이길 수 있으며, 자기가 스스로 깨끗해지려고 결심했다는 것은 외식에 불과한 행동이 되고 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 자체에는 타락한 본질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깨끗해지는 것이 사람에게 있지 않고 조물주 하나님의 역사로 깨끗해지는 열매가 있는 것을 생명의 종교라는 것이다. 아무리 교회가 모든 일을 잘해 나간다 하여도 깨끗케 하는 역사를 받지 못했다면 아무런 열매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하여 깨끗케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받는 일에 목적을 둔 것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일이 되는 것이다.

 

  2. 그리스도 안에서만 열매를 맺게 하시는 역사 (4~6)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게 된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살게 하는 법을 세운 것을 하나님께서 영광으로 삼으신다. 왜냐하면 아담 안에서 천국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것보다도 그리스도 안에서 천국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버지의 소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인격으로 창조했다고 볼 수 있다.

  아담이 너무나 미약한 존재라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아담과 같이 미약한 존재라면 기독교를 유지해 나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은 오직 속죄제를 드리므로만 구원을 받은 것이다. 아담으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 안에서만 열매를 맺었다고 볼 수 있다. 구약 때에 양을 잡아 드렸던 제사는 오실 메시야를 믿고 드린 것이며, 지금 우리가 드리고 있는 제사는 오신 메시야의 영원한 속죄제에 의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만 역사 하시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 그리스도의 의의 역사가 아니고는 아무런 것도 받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둘째 : 그리스도의 의의 역사는 그리스도 안에 들어와야만 있다는 것이다.

  셋째 : 인간의 어떤 행위로는 성신을 받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신의 역사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로운 역사로만 우리에게 오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무한한 성신을 아버지께 받으시고, 거룩한 피로써 우리를 사서 당신의 지체로 삼으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지체가 된 우리에게 그리스도께 있는 성신의 역사가 오는 것은 자동적으로 되는 일이다. 예를 든다면 포도나무 그루터기에 있는 진액이 가지로 오는 것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요, 자동적으로 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우리가 열매를 맺는 것은 자동적으로 그리스도의 역사가 오므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열매를 맺는 것은 독생자의 역사이므로 아버지께 영광이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자기가 행함으로써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겠다고 하면서 그리스도를 의지하지 않는다면 그 마음 자체가 악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독생자 그리스도의 대적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역사를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을 의라고 본다.

 

  3. 열매를 맺게 하려고 응답하시는 역사 (7~8)

  오늘에 많은 사람이 기도하고 있지만 열매를 맺지 못하는 원인은 무엇이냐는 것을 알아야 한다. 기도는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일에 있어서 사람이 해야 할 의무이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말씀이 있다 하여도 구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줄 수가 없는 것이요, 구한다 하여도 그 말씀이 마음에 없는 자라면 받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구하므로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뜻을 돌이키는 것이 기독교의 역사가 아니요, 하나님께서 먼저 역사를 하시고자 하여 언약을 세우신 말씀을 의심없이 믿고 구할 때에 그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기도 응답이라고 한다.

  오늘의 기독교가 말씀을 혼선시키는 일이 있다면 가증한 예배가 되고, 하나님의 마음을 노엽게 하는 기도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말씀을 혼선시키는 예배와 기도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동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가 순종하지 않고 자기 말에 하나님이 순종해 달라는 것과 같다. 이러한 사람의 행동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겠다는 마음보다도 자기를 영화롭게 하려는 마음에서 하나님을 자기에게 속해 있는 한 부분으로 여기는 일이 된다. 자기의 할 일을 다하고 하나님의 일을 한다든지, 자기 할 것을 다하고 그 남은 것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키는 일이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도 하나님께서 나를 더 사랑하시고, 내가 나를 위하여 일하는 것보다도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역사하시는 것이 더 크다는 것을 믿는 것이 우리의 신앙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나’ 라는 것을 완전히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만 순종할 때에 응답의 열매는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일이 되는 것이다.

 

  결    론

  열매가 있으므로 아버지께 영광이요, 열매가 없으므로 아버지께 슬픔이 된다. 이것은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되 많은 열매를 맺어서 복을 받으라는 것이 소원이기 때문이다.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나신 예수

- 요일 3:4~12 -

 

  처음부터 죄를 범한 자는 마귀요,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나신 자는 예수님이시다. 마귀가 없었으면 죄가 없을 것인데, 하나님께서 어찌하여 마귀를 창조했느냐고 물어 보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마귀는 하나님이 낸 것이 아니요 하나님과 같이 마귀도 스스로 있었다는 이원론을 말하는 자도 있다. 또는 천사가 타락해서 마귀가 되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이 있다. 그러나 성경은 조금도 가감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마귀를 창조하신 것은 근본이 가장 간교한 뱀이다. 가장 간교하다는 자체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마귀에게 이러한 기능을 준 것은 아무리 꾀이는 일이 있어도 가장 간교한 뱀의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참인줄 믿는 자에게 완전한 것을 주기 위한 목적이다.  

  그러므로 죄라는 것은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남을 범죄하도록 꾀이는 죄도 있고, 꾀임을 받아 범하는 죄도 있는 것이다. 남을 꾀어서 범죄하게 하는 것은 마귀의 행동이요, 꾀임을 받아 범죄하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의 행동이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사람이 꾀임을 받아 범죄할 때에 깨닫도록 해주는 일이 있으며, 그 죄를 용서해 주는 법을 세운 것이 속죄제라는 것이다. 그리고 죄를 짓게 꾀는 것이 옛 뱀인 용의 역사이다(계12:9, 20:3).

  이제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나신 예수님의 역사에 대하여 본문으로 증거한다.

 

  1. 죄를 없이 하려고 세상에 나타나신 역사 (4~5)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나타나신 것은 세계 인류 가운데 택함을 입은 사람의 죄를 없이하는 일을 하시려고 오신 것이다. 기독교의 역사라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아무 것도 모르고 흑암 속에 거하는 사람을 찾아 오셔서 행하신 일이다. 만일 사람이 연구할 수 있다든지, 찾아 볼 수 있는 역사라면 인간의 죄를 없이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거룩한 나라에 계시던 예수님이 죄를 진 인간들을 찾아 오셔서 그 죄를 없이 할 수 있는 법을 세우신 것이니, 이것이 만민의 죄를 대속한 십자가이다.

  죄라는 것은 죄를 지은 사람이 없이할 수 없고, 죄를 범한 자를 벌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자라야 없이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죄를 벌할 권리가 있는 자라고 해서 법을 무효로 한다면 이것은 법을 낸 자를 멸시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범죄자의 죄를 없이 할 수 있는 조건이 되며, 법을 세운 자에게도 법대로 벌을 주지 못하도록 할 수 있는 것이 십자가이다. 하나님께서 죄를 없애는 일을 하기 위하여는 독생자를 죄인을 대신해서 죽게 하시고 다시 살리셔서 역사하는 것밖에 다른 법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를 없이 하기 위하여 아들을 세상에 보내서 예수는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도록 하기 위하여 3년간 이적을 행하게 하셨고, 아들이 십자가에 죽을 때에도 많은 사람이 왕래하는 골고다에 높이 달아 왕래하는 사람들까지라도 알게 하셨고, 아들이 완전 승리로 부활한 후에도 부활을 의심하는 자들에게까지 나타나 만져보라고 하셨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증거로 나타냈고, 십자가에 죽는 것은 세상이 알도록 하시었고, 부활하신 것은 친히 나타나셔서 보여 주셨던 것이다. 누구든지 나타난 예수를 의심없이 믿는 자는 그 죄를 없이하는 속죄의 은총을 주시는 동시에 다시 기억지도 않으신다.  

  인간의 죄 하나를 없애기 위하여 역사하신 일은 천지 만물을 창조한 일보다 더 큰 일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천지가 없어진다 하여도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죄를 없이 한 사람은 영원히 영생하기 때문이다.

 

  2.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는 죄를 범치 않게 하시는 역사 (6)

  주님께서는 인간이 과거에 지었던 죄를 없이하는 것으로써 끝을 맺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사람은 범죄치 않도록 성신으로 다스리는 것이 주님의 역사이다. 하나님의 성신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역사하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벗어나게 될 때에 죄를 범하는 것이요,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될 때에 결코 범죄함이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것을 말한다. 사랑의 계명을 지키려고 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게 되는  행동이요, 사랑의 계명을 지키려고 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 안을 벗어나는 행동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 하면서 죄를 범한다면 미혹을 받은 자라고 볼 수 있다. 오늘의 기독교 신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살지 않고, 한 교회 안에서 사는 것을 신앙 생활로 본다는 것은 아무런 산 체험이 없는 사람들의 하는 일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 안에 있고 주님은 우리 안에 있어서 당신이 하실 일을 우리를 통하여 하시고, 당신이 받은 왕권의 영광을 우리에게도 주고자 하시는 것이 죄를 없이 하기 위하여 나타나신 그리스도의 역사라는 것이다.

  죄 때문에 죽으신 예수님이 조금이라도 죄를 용납할 수 없는 것이요, 죄를 회개하는 자에게 죄를 그냥 둘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신이 죄가 없는 동시에 죄를 없이하는 일을 하시고, 죄 없이 함을 받은 자를 들어 쓰시되 하나의 나라를 이루는 것을 목적하고 역사하시는 것이다.

 

  3. 마귀의 일을 멸하시는 역사 (8)

  예수님께서 먼저는 죄를 없이하는 일을 하여 마귀의 일을 이기는 사람의 수가 차기까지 참으신다. 그리고 마지막에 마귀의 일을 멸하시므로써 죄가 없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평안히 살게 되는 것을 새 시대라는 것이다. 지금 마귀의 일을 없애지 않는 것은 마귀의 일을 이기는 사람에게 왕권을 주기 위한 목적이다.

  하나님께서 마귀의 일을 허락한 것은 당신의 일을 하기 위한 방법인 것이다. 마귀의 일이 없다면 하나님의 일이 필요가 없고, 하나님의 일이 없다면 마귀의 일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언제나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때에 마귀의 일도 일어나도록 허락하신 것은 마귀가 역사한다 하여도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에게 큰 영광을 주기 위한 선한 방법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마귀의 일을 용납한다면 그 시간부터 그리스도의 원수가 되는 것이다.

  아무리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여도 마귀의 일을 없이 하려는 예수님과 하나가 되지 못한다면 아무런 열매 없는 자가 되어 가인과 같이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형제를 사랑치 않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볼 수 없고, 오직 형제를 사랑하는 자라야 하나님의 자녀라고 볼 수 있다.

 

  결    론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나신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는 동시에 죄를 용납할 수 없고, 죄를 용납지 않는 동시에 회개하는 자의 죄를 조금도 남기지 않고 다 없애는 것이다. 누구든지 예수님과 하나가 되려면 죄를 없이 하는 일에 생명을 아끼지 않고 싸우는 생활이 있어야 한다.

 

 

참된 말씀만 증거한 종의 열매

- 요 10:40~42 -

 

  세례 요한은 어떠한 이적을 행한 적은 없었지만 그가 증거하는 말씀을 믿고 따라 간 자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므로 그 열매는 세계적인 복음 운동의 기초가 되었던 것이다. 많은 선지가 과거에 묵시를 보고 기록한 것을 정확히 증거해서 그 증거대로 이루어진 것이 신약 시대이다. 아무리 이적을 많이 행했다 하더라도 말씀의 증거대로 이루어지는 열매가 없다면 그 이적은 아무런 효과를 주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말씀만 증거하는 종이 되어야만 열매가 많게 될 것이다.

 

  1. 요한이 증거한 말씀은 참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됨 (40~42)

  세례 요한이 예수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라고 할 때에 많은 사람이 처음에는 이상히 여겼던 것이다. 나사렛 동네에서 목수 일을 하던 사람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라고 증거하는 것은 너무나 이해치 못할 일이다. 그러나 안드레와 시몬 베드로와 그밖에 많은 제자들은 의심 없이 믿고 따라갔던 것이다(요1:35~45).

  그 때에 많은 사람들은 어부들이 따라 가는 것을 어리석게 보았지만, 알고 보니 요한의 증거가 참이라는 것을 누구나 다 부인할 수 없게 되었다. 요한은 예수를 증거할 때에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신다고 하였다. 그 말씀대로 오늘날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는 역사를 받을 때에 누구나 다 세례 요한의 증거가 참되다고 말하게 된다.

  우리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은 어떤 이적을 보고 하나님은 참되다고 말하는 것보다도 하나님 말씀이 증거한 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볼 때에 그것이 큰 열매가 되는 것이다. 세례 요한의 증거가 참이라는 것을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성신의 역사를 통하여서만 된다. 그러면 세례 요한이 증거한 말씀이 참으로 이루어진 것을 통하여 온 세계 인류가 구원을 받게 된 것은 큰 열매가 되는 일이라고 본다.

 

  2. 요한의 증거를 받고 예수를 따른 자라야 확실한 증인이 됨 (행1:21~22)

  세례 요한의 증거를 인하여 예수를 확실히 증거할 수 있는 것이다. 세례 요한의 증거가 없이 예수님은 스스로 나설 수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순서가 요한의 증거로부터 되었기 때문이다. 만일 세례 요한의 증거가 없이 이루어진 일이라면 성경은 처음부터 그대로 응했다고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사40:3이 응해짐에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히 증거할 수 있는 사도의 역사가 나오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법이다. 법이라는 것은 조금이라도 그대로 실행이 되지 않는다면 그 전체가 무효가 되고 마는 것이다. 요한이 아무런 이적을 행치 못하고 증거를 말씀으로만 했지만, 이 말씀이 사도적인 권위를 세우는 시발점이 되었다. 세례요한의 증거를 받고, 예수님을 참 메시야인줄 알고서 그 때부터 떨어지지 않고 따라간 사람이 확실한 증인의 자격이 있다는 것을 베드로는 말했다.

  그러므로 요한의 증거는 천국 복음 운동의 문을 여는 역사가 되었던 것이다. 요한의 증거는 모든 선지의 예언이 이루어지는 일을 먼저 전한 것이니, 요한의 증거를 바로 깨달아 안 자가 천국 복음 운동의 선구자가 될 수 있다. 요한은 인간이 볼 때에 놀라운 역사도 없이 쓰러지고 말았지만, 그의 증거는 천국 복음 운동의 선구자를 세우는 일에 큰 열매를 나타낸 것이다.

 

  3. 요한의 증거대로 마지막 증인이 나오게 됨 (마3:12, 사40:3~11)

  요한은 알곡을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운다고 증거했다. 그러므로 마지막 증인은 요한의 증거의 계통자라고 볼 수 있다. 이사야 40장에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한 것을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한 것은 대조해 본다면 요한은 메시야를 영접하라는 것을 외칠 때에 회개를 말하였고,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는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다는 것을 말하게 된다. 먼저는 씨를 뿌리러 온 것이라면 마지막은 알곡을 모으러 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사야 40장은 세례 요한의 증거와 마지막 증인의 사명을 연관시킨 것이요, 이사야 42장은 그리스도의 교훈과 하나님의 새 일의 교훈을 연관시킨 것이다. 세례 요한의 증거 아래에서 사도적인 역사가 나오게 되었고, 종말에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변화성도도 나오게 된다.

  이렇게 본다면 세례 요한의 증거는 아무런 이적이 없는 증거이지만, 그 말씀대로 은혜시대의 역사도 심판기의 역사도 다 열매가 되는 것이다. 신앙의 확증이라는 것은 세례 요한의 증거에서부터 가지게 될 때에 알파적인 역사와 오메가적인 역사를 혼선 없이 정확히 알게 된다.

 

  결    론

  세례 요한이 참된 말씀만 증거한 것이 큰 열매가 되었다면 기독교 종말에 끝을 맺는 선지들도 말씀만 증거하므로 열매가 많게 될 것이다. 세례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는 말씀만 증거하는 것으로서 그대로 이루어지는 열매이니 기독교의 완전 승리의 열매를 이루게 될 것은 사실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성경에 기록된 말씀만 증거하지 않고 다른 것을 가입한다면 이것은 불법이므로 이적이 있다 하여도 아무런 열매가 없을 것이다.

 

 

성령으로 한 몸 된 교회

- 고전 12:12~27 -

 

  세상에는 많은 단체가 있다. 그러나 이 단체라는 것은 성령으로 연결된 것이 아니고 사업적, 정치적인 한 단체에 불과한 것이다. 완전한 종교 단체라는 것은 성령으로 한 몸과 같이 연결된 단체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단체를 이루기 위하여 자기 몸을 제물로 바치고, 승리의 부활을 하셔서 성령을 보내는 일에 전력을 두고 계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는 성령으로 한 몸 된 교회를 이루지 못한다면 주님과는 하등에 관계가 없다고 볼 수 있다.

  이제 성령으로 한 몸 된 교회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본문을 통하여 증거하기로 한다.

 

  1. 성령의 세례를 받으므로 한 몸 된 단체 (12~13)

  우리는 성령의 세례를 받아야만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고 인정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성령을 부어 줄 수 있는 생명의 주가 되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신다는 것은 우리가 성령의 세례를 받으므로만 확증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무신론 공산당이 세계를 침투하고 있는 이때에, 성령의 세례를 받는 체험이 우리에게 없다면 대항해서 싸울 용기가 없을 것이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증거한다.

  나의 체험에 의하면 중생을 받고도 성신의 역사가 여러 가지 계단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처음에는 자기 죄를 자복하는 회개가 있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기로 작정하고 영생의 진리를 알아보려고 할 때에 기도 중 어려서부터 지었던 죄가 전부 생각이 나면서 눈물로 고백하는 일이 있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때에 우리 주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는 확신이 생기게 되는 체험을 받았다.

  그때부터 기도가 열려지고, 진리가 열려지며, 기쁨이 넘치는 생활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중심 성결을 지키지 못하고 항상 여러 가지 죄가 마음에 발생하는 것을 억제하는 일이 있게 되었다. 순간적으로 마음이 깨끗할 때도 있고, 죄가 발생할 때도 있는 생활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때에는 내가 마음에까지 죄가 완전히 없어진다는 것을 믿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16년 전에 중심 성결을 얻기 위하여 입산 기도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내 마음과 생각으로 범한 죄를 7일간 회개하고 9일만에 뜨거운 마음을 받아서 이날까지 죄라는 것이 마음에서 발생해 본 일이 없다. 이것은 내 결심이 아니요 마음이 항상 뜨거워 있으므로 자동적으로 되는 일이다. 나는 마음에 뜨거운 불이 항상 충만해 있으므로 마음에 죄가 조금도 발생을 못하는 것을 17년째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전부가 아니었다. 남을 살리기 위하여 3일간 밤을 새워 기도하다가 생수의 역사가 흘러오는 체험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1957년부터 1967년까지 계속해서 생수의 은혜를 입으로 마시고, 온 몸에 충만해진 생활을 할 때에 얼마든지 기도할 수 있는 영계에 들어가게 되었고, 신앙 장성으로 이루어지는 인격적 체험을 가지게 되었다. 이것이 은혜시대의 성령의 역사라고 확신하는 바이다.

  그 후에 여호와를 바라보고 호소하던 중 새 힘을 받으므로 몸의 변화라는 것을 체험하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세밀한 체험을 말할 필요가 없고, 성령의 세례로 역사하는 것을 체험한 바에 의하여 증거하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세례로 인격 완성이 되는 것이다. 성령을 통하여 오는 은혜는 한번만 있고 끝나는 것이 아니요, 항상 새로운 역사가 흘러오는 것이라고 믿는다.  

  오늘의 교회가 성령의 체험이 너무 박약한 가운데서 성령의 역사를 경홀히 생각하는 폐단도 있다. 성신의 역사라는 것은 죽은 영혼을 살리는데서 끝이 아니고, 얼마든지 인격을 향상시켜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는 것이다 (엡4:13).

 

  2. 조금이라도 서로 떠날 수 없는 단체 (14~25)

  성령으로 이루어진 교회는 어떤 도덕이나 의식이나 교권을 중심하는 것보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받은 자기 사명에서 서로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눈이나 입이나 손이나 발이나 그 밖의 모든 지체가 자기 홀로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으므로 서로 떠날 수 없는 것과 같다.  

눈이 아무리 보아도 수족이 없다면 아무런 효과를 발휘할 수 없고, 아무리 수족이 있다 하여도 눈이 없다면 아무런 일을 할 수가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성령으로 한 몸 된 단체라는 것은 성신의 소욕을 이루기 위한 데서 움직이는 것이니, 모든 사람들은 하나같이 성신의 인도를 따라서 자기 사명을 하되 그리스도의 왕국을 이루기 위하여 단체적인 행동을 취하여야만 될 것이다.  

  아무리 큰 사명을 가진 자라도 자기 홀로는 할 수가 없고, 서로 뭉쳐지는 단체가 있으므로만 그 사명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오늘의 교회가 서로 하나가 되지 못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가 없는 증거라고 본다.

 

  3. 고통도 영광도 함께 받는 단체 (26~27)

  기독교는 어떤 사람을 통하여 이루어진 단체가 아니요,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의 교통을 받는 단체이다. 그러므로 고통을 받아도 주님을 위하여 받는 것이요, 영광을 얻어도 주님을 위하여 얻는 것이니, 영원히 동거 동락할 단체이다. 어떤 형제가 괴로움을 받을 때에 감당할 수 없으리만큼 내 마음도 괴롭고, 어떤 형제가 영광을 얻을 때에 감당할 수 없으리만큼 내 마음도 기쁜 것은 성령으로 하나가 된 단체이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종이 자기의 명예를 내세우기 위하여 동역자를 비판한다면 성령으로 역사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성령이 함께 하는 사람은 어떤 형제가 시험을 만날 때에 애를 쓰며 기도하게 되고, 어떤 형제가 역사할 때에 기뻐서 같이 찬송하게 되는데, 이것이 영원히 동거 동락할 단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를 믿는 소자 하나에게 행한 것이 내게 행한 것이라고 하셨고, 누구든지 나를 믿는 소자 하나를 실족케 한다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리라고 하셨다. 우리 기독교 안에서 형제를 내 몸 같이 사랑하게 되는 것은 도덕을 초월한 성신의 열매로 되는 것이다.

 

  결    론

  사람이라는 것은 완전한 단체가 없이는 완전한 일을 할 수가 없고, 완전한 인격적인 행동을 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성신의 역사가 임하는 목적은 단체적인 역사를 하기 위한 것인 줄 알고 은혜를 받은 자들로서 합심 단결하는 일에 전력을 두어야 할 것이다.

 

 

난국을 당한 선지의 깨달음

- 합 1:12, 3:17~19 -

 

  모든 선지는 난국을 당할 때에 먼저 깨닫고 나가 외쳤다. 그러나 그 선지 시대의 난국은 인간 종말의 예언이 되었고, 그 시대의 선지가 깨달은 것은 인류 종말의 사명자에게 주는 교훈이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선지 시대에 말씀만 묵시로 준 것이 아니요, 인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난국을 당한 선지들에게 하나님께서 묵시를 보일 때에 심판과 새 시대에 관한 말씀으로 기록하게 하셨다. 본서는 주 재림 시기의 난국과 이 때에 깨닫고 일어나서 재림의 주를 영접할 종에 대하여 가르친 교훈이다.

  우리가 재림의 주를 맞이할 종으로서 깨달을 바를 본문으로 증거한다.

 

  1. 사망에 이르지 아니할 것을 알아야 함 (1:12상반절)

  주 재림기라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막을 수 없는 환란이 북방으로부터 오게 되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일으키신다고 하였다(1:6~11). 하나님께서 일으키는 환란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참된 종을 해치는 환란이 아니고, 오히려 더 강하게 들어 쓰기 위한 환란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큰 환란이 온다하여도 하나님의 종은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만일 환란이 원수의 마음대로 일어난다면 두려운 일이겠지만, 하나님의 마음대로 일으키는 환란이니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종이라면 절대로 피해를 당치 않을 것이다. 예를 든다면 노한 부모가 아무리 막대기를 들었다 하여도 순종하는 아들을 칠 수가 없는 것과 같다. 순종치 않는 자들을 치기 위한 막대기라면 순종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관계가 없을 것이다.  

  만일 어떤 종들이 마지막 환란이 북방으로부터 올 때에는 죽음을 각오한다고 한다면, 이것은 하나님 앞에 합당한 생각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죽지 않을 것을 생각하는 것이 재림시에 역사할 종의 깨달음이라는 것이다. 죽지 아니하고 남은 자가 된다는 것이 재림의 주를 맞이할 종들이 전할 복음이다.

  그리고 환란과 재앙에서 구원해주는 역사를 바로 깨달아서 증거하는 자라야 그 말씀대로 내리는 역사를 받게 될 것이다. 만일 이 몸이 살아서 구원받는 진리를 믿지 않고, 순종치 않는다면 아무리 사랑하는 종이라도 버림을 당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난국을 당한 사명자로서 사망에 이르지 아니할 것을 말씀에서 확신을 가지고 담대히 증거하여야 할 것이다.

 

  2. 심판기라는 것을 알아야 함 (12중반절)

  모든 선지는 하나같이 인류 종말에 심판기는 북방에서 무신론 사상을 가진 침략자 세력이 궤휼과 강포를 행하면서 교회를 대적하고 나올 때라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인력으로 북방을 막을 수 없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북방을 심판할 때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심판기인데도 불구하고 심판자인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북방의 세력을 무서워하는 자는 북방과 함께 망하게 될 것을 가르쳤다.

  우리는 지금 이때에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는 것보다도 심판기가 왔다는 것을 담대히 전해야 된다. 지금은 심판과 새 시대라는 경고의 나팔을 불어야 할 때이다. 과거에 선지들이 환란이 북방으로부터 오게 될 것을 경고할 때에 부패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반대를 받았지만,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외쳤던 것이다.

  하나님의 종 이사야는 3년 동안 벗은 발과 벗은 몸으로 나서서 눈물의 경고를 했다. 그들은 예언적인 묵시를 받아 기록할 때에 인간 종말에 북방으로부터 환란이 올 때는 심판기라는 것을 말했고, 메시야의 탄생과 이방의 빛이 되는 일이 있을 것을 말했고 심판과 새 시대를 말했다. 그러므로 과거 선지 시대에는 예언적인 북방 환란이 있었지만 인류 종말에는 끝을 맺게 되는 환란이 있게 될 것이다.

 

  3. 경계하는 일을 알아야 함 (12하반절)

  북방으로부터 원수의 세력이 강하게 일어나는 것은 재림의 주를 맞이할 성도들을 경계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징조를 볼 때에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서 합3:2과 같이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하는 간곡한 호소를 올리면서 기름 준비를 해야만 재림의 주를 영접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경계를 주는데도 불구하고 각성을 받지 않는다면 망하겠지만, 경계를 달게 받고 각성을 한다면 주의 날에 설 수 있게 된다. 임박한 환란이 징조로 나타날 때에 세상일에 얽매이지 말고, 맡은 일에 충성을 다해서 주님의 일을 부흥케 하는 열매가 있어야 할 것이다. 왜냐 하면 다시 오시는 주님은 일한대로 갚아 주시러 오시기 때문이다.

 

  4. 낙망 중에 하나님의 구원을 알아야 함 (3:17~19)

  하나님의 완전 구원이라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자리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낙망이 되는 일을 당할 때에 홀연히 나타나는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소망이 없는 자리라고 해서 낙심을 하고 만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볼 수 없는 행동이다. 그리고 아무리 세상적으로 볼 때에 살 길이 없는 난국을 당하여도 구원의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뻐하는 자라면 하나님의 힘을 받게 되므로 오히려 승리를 이루는 역사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도 낙망 중에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보므로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고, 사막에서 만나를 먹었고 생수를 마시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역사를 낙망을 당한 백성들에게 나타낸 것은 재림의 주를 맞이할 우리에게 행하실 역사를 예언적인 증거로 보여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난국을 당한 종이 바로 깨달아서 담대히 나갈 때에 모든 난제가 해결되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로 되어지는 것이다.

 

  결    론

  하나님께서 주 재림기를 맞이하는 종들에게 미리 깨닫게 하기 위하여 주신 말씀이 하박국서라고 본다. 우리는 지금 이 난국을 당한 종으로서 하박국서에 기록한 말씀대로 원수의 세력이 북방에서 일어나게 되는 때를 만났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된다는 말씀을 본서에서 알고, 해야 할 일을 바로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다는 생각을 가지는 동시에 지금은 심판기라는 것을 알아야 되고, 경계의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시국을 보고 깨닫는 동시에 아무리 낙망이 될 일이 온다 하여도 구원의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뻐하는 용사가 되어야만 할 것이다.

 

 

원수를 갚는 주님 앞에 합당한 생활

- 롬 12:14~21 -

 

  주님께서는 용서할 수 있는 공로도 있고, 원수를 갚을 수 있는 권세도 있다. 그러므로 용서하기 위해서 참는 기간도 있고, 원수를 갚기 위해서 진노하는 기간도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한 사람을 위하여 용서하고, 한 사람을 위하여 원수 갚는 것이 아니다. 용서를 하되 모든 나라 사람을 용서하고, 원수를 갚되 모든 나라 사람을 원수 갚는 것이다.

  우리가 원수를 갚는 날에 주 앞에 서려면 용서하는 주님의 뜻을 순종해야 된다고 본다. 그러므로 용서하는 기간에 우리는 합당한 생활을 해야 될 것이다.

 

  1. 축복을 비는 기도 생활 (14)

  기도라는 것은 원수를 갚는 날에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이 아니요, 용서하는 날에 기쁘시게 받으시는 것이다. 기도한다는 사람이 항상 축복을 비는 마음이 없다면 용서하시는 주님 앞에 합당한 자라고 볼 수 없으며, 합당한 기도라고 볼 수 없다. 주님께서 용서하시고 복을 주기 위하여 죽기까지 순종했다면, 우리도 축복을 받게 하기 위하여 기도하는 정신이 있어야만 원수를 갚으시는 주님 앞에 받을 것이 있는 종이 될 것이다. 왜냐 하면 남이 축복 받기를 바라는 마음은 주님의 마음과 합치가 된 것이니, 주님과 합치가 된 자라야 주님께서 갚아 줄 수 있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어떤 종이 자기의 마음에 합당치 않는 사람이라고 해서 그 사람을 저주하는 기도를 한다면, 주님 대신에 자기가 심판 주가 되므로 실지는 주의 대적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하실 일을 자기가 했기 때문이다. 오직 원수를 갚아 줄 책임은 주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도 과거에는 주님과 원수가 되었던 사람들인데 십자가의 공로로 용서를 받았으니 지금 사는 생활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주의 것으로써 사는 생활이다. 그러므로 자기 마음에 합당치 않다고 해서 남을 저주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의 심판권을 침범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원수를 갚는 심판권은 주님께만 있으니, 우리는 형제가 나를 괴롭혀도 ‘축복을 주시옵소서’ 하는 마음을 가져야만 주님의 지체가 된 생활이라고 본다.

 

  2. 참된 교제의 생활 (15~16)

  우리는 형제에게 행한 일을 상급이 되도록 갚아 주시는 주님 앞에서 합당한 교제의 생활이 있어야 한다. 무엇을 얻어 보려고 형제를 사귀는 사람이라면 원수를 갚는 주님 앞에 설 수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형제를 돕는 생활을 하지 않았으므로, 주님께서 그 사람의 하는 일을 오히려 적대시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갚아 주실 것을 바라보는 것보다 형제에게 갚음을 받으려고 하는 것은 주님보다도 형제를 더 의지하는 생활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를 위하여 사는 생활보다도 형제를 위하여 사는 생활을 해야 될 것이다. 이와 같이 형제를 돕기 위해서 사는 생활에는 항상 동정하는 마음이 불타야 된다. 형제가 슬퍼하는데 슬프지 않고, 형제가 즐거워하는데 즐겁지 않고, 형제를 높이는 것보다도 자기를 더 높인다면 주님 중심에서 형제를 교제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람은 자기 중심에서 교제하는 사람이므로 자동적으로 위선자가 될 것이다. 우리가 이 땅에서 형제에게 행하는 일을 주님께 하는 일과 같이 생각하는 자라야 진노의 날에 남은 자가 될 수 있다(마25:40).

 

  3. 선한 일을 도모하는 생활 (17)

  오늘날 우리가 할 일은 원수를 갚는 것이 아니요, 선한 일을 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이다. 선한 일이라는 것은 주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일인데, 우리는 그 일을 위하여 쓰여지는 종이다. 사람이 자기 스스로 선한 일을 할 자는 하나도 없다. 왜냐하면 선이라는 것은 죽을 사람을 살려주고, 망할 사람을 흥하게 하고, 화 받을 사람을 복 받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인간의 죄를 위하여 대신 죽으신 주님밖에는 행할 자가 없는 것이다. 주님께서 행하시는 일에 우리는 순종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로 노력할 것뿐이다.

 

  4. 평화를 위한 생활 (18~21)

  평화라는 것은 시대에 따라서 다르다. 은혜시대에는 아무리 형제가 부족이 있다 하여도 용서를 하면서 평화를 이루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화목 제물이 되어 지금도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화평을 이루기 위해서 기도하시고 계시기 때문이다. 만일 예수님께서 죄인과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역사하신 일이 없었다면 세계 평화의 왕국은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이다.

  은혜시대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아들을 보내서 대신 죽게 하시고, 누구든지 그 아들만 믿고 회개하면 하나님을 대적했던 자라도 너그러이 용서하시고, 평화를 이루는 역사이다. 그리고 진노의 날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평화를 이루기 위하여 아무리 회개를 기다려도, 짐짓 당신의 사랑을 대적하는 무리들을 완전히 없애 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평화를 위한 사람들만 남은 자가 되게 하여 평화 왕국을 이루는 것이 진노의 심판과 새 시대이다.

  우리 사명자라는 것은 진노의 날이 오기까지는 원수를 원수로 갚지 않고,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악에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생활을 해야 할 것이다. 악에 진다는 것은 악을 악으로 대하는 일이요, 선으로 악을 이긴다는 것은 아무리 악해도 선으로 대하는 일이다. 그러나 악의 사상을 용납한다면 그 시간부터 악에게 지는 생활이다. 그러므로 악의 사상을 용납치 말고, 악의 세력이 물러가고 의의 세력이 승리하도록 하는 것을 원수를 갚는 주님 앞에 합당한 생활이라고 본다.

 

  결    론

  원수를 갚는 것은 참된 사랑의 열매이다. 원수를 용납한다고 해도 참된 사랑이 아니요, 지금 원수를 갚는다고 해도 참된 사랑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서 원수를 갚아 줄 때까지 주님과 같이 참고, 주님과 같이 사랑해야 될 것이다.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는 역사

- 딛 3:4~8 -

 

  하나님의 완전 역사라는 것은 의롭다 함을 얻게 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역사하시되 의로운 사람이 되도록 역사해 주시는 것을 말한다. 물체에 관한 것을 중심하지 않고, 인격 하나를 완전하게 이루어 놓는 것을 하나님의 완전 역사라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완전히 역사하신 것이 아니고, 타락한 인생이라도 완전하게 만들어 놓는 것을 완전 역사라고 한다. 천지 만물을 창조한 역사보다도 만물을 바로 사용할 수 있는 사람 하나를 완전히 만들어 놓는 것이 하나님의 제일 크고도 완전한 역사이다.

  이제 의롭다 함을 얻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역사는 무엇이냐 하는 것을 본문으로 증거한다.

 

  1. 중생케 하는 역사 (5상반절)

  중생이라는 것은 인간의 자범죄를 용서해 주는 역사이다. 예를 든다면 더러워진 의복을 깨끗하게 씻는 것과 같다. 이것은 인간의 도덕적 의가 필요없이 깨끗해지는 일이 있게 되는 것이다. 도덕적인 의라는 것은 깨끗해지는 일이 아니요, 깨끗하지 못한 마음이 있어도 깨끗하게 살아 보려고 하는 노력이 따르는 것 뿐이다.

  그러나 중생이라는 것은 사람이 더러운 마음을 가지고 깨끗하게 살아 보려는 것이 아니요, 도덕을 초월해서 마음이 깨끗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깨끗하게 살아 보려고 하는 인간의 노력이 필요가 없고, 깨끗해진 사람으로서 자동적으로 생활의 열매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을 중생의 역사라고 한다.

  만일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마음에 깨끗함을 받지 못하고, 깨끗하게 살아 보려는 마음만 있다면, 신령한 예배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깨끗함을 받은 사람끼리 하나가 되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입을 열어 찬송하고 기도할 때에 그 예배를 통하여 깨끗한 사람으로서 일할 수 있는 역사가 하나님께로부터 내리게 된다. 그러므로 십자가 의의 역사라는 것은 행하라고 하는 법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고, 행할 수 있는 사람을 만들어 놓는 것을 목적한 것이다.

  만일 기독교인들이 중심에 성결을 얻고자 하는 마음이 없이 도덕적으로 사람에게 바로 보이려고 하는 것만 있다면, 자동적으로 교회의 모든 일을 외식으로 행하게 되므로 하나님께서 노여워하시게 된다. 이것은 당신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보다도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므로, 이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상대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언제나 우리는 마음이 깨끗해지는 것을 목적하고, 하나님을 향하여야만 된다.

 

  2. 새롭게 하는 역사 (5하반절)

  성신은 항상 새롭게 해 주는 역사를 하신다. 예를 든다면 푸른 나뭇가지에는 항상 새로워지는 일이 있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기독교인이 산 믿음을 가지게 될 때에는 예배를 드리든지 기도를 하든지 항상 하나님을 공경하는 일에 있어서 새로워지는 역사가 있게 되는 것이다. 겨자씨 한 알이 큰 나무를 이루듯이 산 믿음을 가진 자는 성신의 새롭게 해 주는 역사에서 큰 발전을 보게 된다. 생명이 있는 종교라는 것은 성신의 새롭게 해 주는 역사가 있으므로 최후 승리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성신의 새롭게 하는 역사에 있어서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체험이 있게 된다.

  첫째 : 항상 마음이 새로워지는 일이 있게 된다.

  둘째 : 항상 말씀이 새로워지는 일이 있게 된다.

  셋째 : 항상 생활이 새로워지는 일이 있게 된다.

  인간이 볼 때는 뚜렷한 역사가 없다 하여도 마음이 새로워지고, 말씀이 새로워지고, 생활이 새로워지므로 완전 인격과 완전 지식과 완전 생활의 열매를 이루게 된다. 그러므로 복된 가정과 복된 교회와 복된 나라를 이루게 되는 열매는 인간의 힘을 초월한 성신의 새롭게 하는 역사에 있는 것이다.

 

  3. 풍성히 부어 주는 역사 (6~7)

  그리스도께서 풍성한 은혜를 하나님께 받으셨으므로 그로 말미암아 우리도 풍성히 부어 주는 역사를 받게 된다. 모든 사람이 같은 신앙을 가졌다 하더라도 풍성히 부어 주는 역사를 체험한 자는 많지 못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풍성히 부어 주는 역사는 자기 개인적인 신앙 하나를 위하여 노력하는 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남을 살리기 위하여 목숨을 아끼지 않고 나서는 종들에게 그 사명을 감당하도록 하기 위하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은혜의 분량이 각각 다른 것이다.

  강단에 서는 종이 풍성히 부어 주는 역사를 받지 못한다면, 그 교회를 부흥시킬 수가 전혀 없다. 왜냐하면 강단을 통하여 모든 피곤한 영들이 소성을 받기 때문이다. 오늘의 교회가 점점 더 부패되어 가는 것은 강단에 서는 종들이 풍성히 부어 주는 역사를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풍성한 은혜를 받지 못하고, 강단에 서게 될 때에 넘쳐흐르는 역사가 없으므로 은혜를 갈망하던 양떼들이 실망을 하고, 세속으로 치우치는 일이 있게 된다.

  나의 체험으로 말한다면 강단에 서는 종이 위로부터 내려오는 것을 풍성히 받지 못할 때에 설교하는 자의 자신부터 복잡한 마음으로 생활하게 된다고 본다. 그리고 풍성히 부어 주는 역사를 받으면서 강단에 서는 종이 된다면 평강에 평강을 누리는 생활에서 모든 일이 다 자유로운 열매로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라는 것은 풍성히 부어 주는 역사를 받으므로만 해야 할 의무를 완전히 다하게 된다. 누구든지 풍성한 것을 받지 못한다면 자동적으로 의로운 열매를 맺지 못하므로 불행을 가져오는 부패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은혜를 풍성히 받지 못하고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것은 한 직업에 불과한 일이 되고 말 우려성이 많다. 오늘의 교회가 목사의 직업소라고 하는 말을 많이 듣게 되는 것은 풍성히 부어 주는 역사를 받지 못하고 강단에 서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우리는 풍성히 부어 주는 역사를 받으므로만 의롭다 함을 받는 생활에서 의로운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4. 선한 일을 힘쓰게 하는 역사 (8)

  하나님께서는 선한 일을 직접으로 하시는 것이 아니고, 언제나 사람을 들어서 하게 하시되 성신으로 역사하신다. 이것은 사람에게 성신의 격동을 주어서 선한 일을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도록 하는 것이다. 마귀의 역사를 충만히 받은 사람은 정욕이 발생하므로 죄를 짓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는 것이요, 성신의 역사를 풍성히 받은 사람은 사랑의 불이 타므로 선한 일을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자리에 들어가게 된다.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은 항상 의의 격동이 마음에 있으므로 남을 살려 보겠다는 불타는 마음에서 고생을 낙으로 알고 일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선한 일을 하지 않고는 마음이 괴롭고, 선한 일을 항상 해야만 마음이 기쁘도록끔 역사하는 것이 의롭다 함을 얻게 하는 역사이다.

 

  결    론

  의라는 것은 하나님밖에는 가질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가 아니고는 마귀를 이길 수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서 인간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게 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 십자가를 믿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타락한 인생이라도 중생케 하는 동시에 생명으로 새롭게 하시고, 새롭게 하는 동시에 역사를 풍성히 부어 주시고, 풍성히 부어 주시는 동시에 선한 일을 힘쓰도록끔 역사하신다.

 

 

 

장년 공과편 - 인간 종말의 교회 통일의 역사

 

  총    론

  오늘의 교회가 어떻게 하여야 통일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냐 하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교회는 사람이 주관하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주관하는 것이니, 교회가 어떠한 방법으로 통일을 가져온다는 것은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이 날까지 기독교의 역사가 흘러 온 것이 하나님 말씀이 응하는 과정에 이루어진 일이라면, 앞으로 끝을 맺는 것도 말씀이 글자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될 것이다.

  이제 인간 종말에 교회 통일의 역사를 성경을 들어서 공부하기로 한다.

 

제1과  척량의 역사로 하나가 됨

- 계 10:5~11:2,  요절11:1 -

 

  서    론

  주님께서 시몬에게 맡긴 사명은 교회를 세우라는 것이므로 베드로라는 새 이름을 주셨다. 이것은 반석이라는 뜻인데, 교회는 설 적에 바로 서야 된다는 것이다. 교회를 세우는 사명을 맡은 베드로가 죄를 정하면 정하여지고, 사하면 사하여 진다고 하였다. 이것은 어느 민족이나 할 것 없이 베드로가 전하는 복음을 믿으면 죄가 사하여 지고, 믿지 않으면 정죄함을 받는다는 것이다.

  지금 아무리 교파가 많이 생겼지만, 죄를 사함 받고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다 하나이다. 만일 그리스도의 속죄를 참으로 믿지 않는다면 교회라고 할 수 없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 죄 사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어떻게 하여야 되겠느냐 하는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가 닥쳐 온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인간 종말에 교회를 통일시키는 역사는 어떠한 것이냐 하는 것을 계시로 보았던 것이다.

 

  1대지 : 다시 예언할 수 있는 사람이 나와야 하는 일 (10:5~11)

  기독교는 다시 예언하는 역사로 끝을 맺게 된다. 그러므로 기독교 종말에 작은 책을 꿀같이 받아먹어서 쓴 시련이 온다 하여도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들에게 다시 예언하라는 것을 사도 요한은 계시로 보았다. 그러나 계시록의 말씀은 재림의 주를 맞이할 성도들의 전할 복음인 것이다. 사도 요한이 받은 계시록을 꿀같이 먹고 다시 예언할 때가 인간 종말이다.

  인간 종말이라는 것은 붉은 용의 일곱째 머리가 되는 짐승의 세력이 세계를 침투하되 거짓선지를 앞에 놓고 활동할 때라고 하였다. 계17:10을 보면 일곱 왕이라 다섯은 망하였고 하나는 있고 다른 이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으나 이르면 반드시 잠깐 동안 반드시 계속하리라 하였다. “하나는 있고”한 것이 분명히 로마를 가르쳤다면, 기독교를 없애려고 정치를 하던 로마 황제인 네로와 같은 정치가 심판기에 다시 나오게 될 것은 분명한 사실일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기독교를 없애는 반 기독적인 정책을 하고 있는 공산 국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때를 인간 종말로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일곱째 머리가 망하고 새 시대가 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때는 다시 예언하는 종이 나와야 할 것이다. 모든 선지들은 하나같이 인류 종말에 북방으로부터 배도적인 정치가 강하게 나오지만, 다시 예언하는 종의 말대로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므로 반드시 북방 세력이 망하고 새 시대가 올 것을 말했다. 선지서의 목적은 심판과 새 시대이다. 심판이라는 것은 예언의 말씀대로 북방 세력이 망하는 동시에 북방을 하나님보다도 더 두려워하고 타협한 자들도 함께 망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성도의 나라가 오는데 있어서 여호와 친히 북방을 치시는 것을 인류 종말의 심판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선지서를 비롯하여 계시록을 전하게 되는 다시 예언의 역사가 있되 완전한 영감으로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이 없이 전하는 종을 통하여 하나가 될 것을 가르쳤다.

 

  2대지 : 성전과 제단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이 하나같이 척량을 받는 일 (11:1)

  척량이라는 것은 세계 통일의 법이다. 누구든지 교파를 막론하고 하나님 앞에 상달되는 제사를 올리는 자라면 하나님께 인정을 받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대표적인 사람을 들어 쓰시되 인정하는 종들을 하나같이 깨닫게 하시는 것이다. 척량을 할 때에 정확한 것이 드러나듯이 대표적인 종을 통하여 예언의 법의 확실성을 알게 되므로 하나같이 깨닫고 하나가 되는 역사가 일어난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면 정확한 진리가 합법적으로 나타날 때에 신앙 양심에서 하나같이 아멘으로 척량함을 받게 되는 역사가 있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다시 예언의 말씀인 다림줄의 법안에서 사상적으로 뭉쳐지는 단체가 나오므로 하나를 이루게 된다.

 

  3대지 : 이방인들에게 밟힘을 당하는 자들이 있게 되는 일 (2)

  환란이 올 때에 악한 이방 세력에게 먹힘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게 되므로 자동적으로 남은 자가 하나를 이루게 된다. 예를 든다면 타작 마당에서 쭉정이는 버림을 당하고, 알곡만 한 곳에 거두어들이는 것과 같다.

  다시 말하면 예언의 말씀을 믿는 자는 이방의 세력을 이길 수 있는 역사를 받게 되고, 믿지 않는 자는 종말의 역사를 받지 못하므로 원수에게 먹힘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타작 마당에서 알곡은 알곡끼리 모이게 되고 쭉정이는 쭉정이끼리 모이게 되듯이 인간 종말에는 완전히 갈라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방 세력을 들어서 교회를 짓밟게 하시므로, 교회는 이 환란에서 완전히 둘로 갈라지게 된다. 짐승의 표를 받는 교회와 타협하지 않고 이기는 교회로 갈라지게 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결    론

  교회 통일이라는 것은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역사가 나리므로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 종말에는 말씀을 순종하는 자와 순종치 않는 자로 갈라지게 된다. 예언의 말씀의 척량을 받은 자는 승리하는 용사로 한 단체를 이루게 되고, 척량을 받지 못한 자는 이방 세력과 타협을 하게 되므로 밟히게 된다.

 

 

제2과  권세 역사로 하나가 됨

- 계 11:3~6,  요절:3 -

 

  서    론

  기독교가 이 날까지는 죄 사함을 받는 역사로써 어느 곳이나 예수의 피로 산 교회로 선 것이다. 누구든지 속죄 은총을 받으면 하나같이 일반적 구원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이 때를 은사 역사 시대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 종말에 권세 역사라고 하는 것은 환란과 재앙 가운데서 남은 종, 남은 백성으로 지상 평화 왕국을 이루는 역사를 말한다. 이 권세라는 것은 죄를 사하는 역사가 아니고, 허락 받고 나오는 붉은 용의 세력을 이기고 나가는 역사이다. 이것은 허락 받고 나오는 마귀가 얼마든지 미혹을 할 때에 말씀으로 그것을 이기는 자에게 주는 권세 역사인 것이다.

  영혼 구원은 십자가의 보혈을 믿으므로 죽은 영이 죄에서 벗어나 중생 받는 역사이다. 그리고 이 몸이 죽지 않고 새 시대에 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붉은 용의 권세를 개방시켜 미혹해 볼 때에 말씀으로 그것을 이긴 자의 증인권세 역사인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동등 가는 권세를 말한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말씀을 바로 증거하는 종에게 주는 권세이다. 그런데 이 권세로 말미암아 완전 승리를 이루게 되므로 남은 교회가 자동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다.

 

  1대지 : 권세 역사로 단체를 이루는 일 (3~4)

  단체라는 것은 여러 가지로 볼 수 있다. 세상에는 정치 단체도 있고, 사회 단체도 있고, 종교 단체도 있고, 교육 단체도 있고, 그 밖에도 여러 가지 단체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권세 역사로 뭉쳐진 단체라는 것은 대표적인 종이 권세를 받고 나와서 예언할 때에 그 역사 아래서 말씀을 하나같이 깨닫는 동시에 말씀대로 오는 권세를 받아 순수한 말씀 중심에서 나가는 사상 단체이다. 이것은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영계가 올라가는 한계에서 통일된 단체이다. 이 단체라는 것은 성경을 아는 지식이나 영계를 분별하는 영감이나 모든 행동이 다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4절에 “이는 이 땅의 주 앞에 섰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한 것은 다윗 왕권의 역사를 가르쳤다. 스가랴 4장을 보면 다윗 왕국이 황폐화 되었다가 복구될 때의 역사를 감람나무 촛대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그 때의 다윗 왕국만을 가르친 것이 아니고 다윗 왕국이 완전히 지상 왕국을 이룰 것을 가르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모든 선지에게 전한 복음은 이방 세력이 없어지고 다윗 왕국이 세계 통일의 왕국을 이룬다는 것을 가르친 말씀이다. 선지서에 가르친 세계 통일의 다윗 왕국은 인간 종말에 이루어질 예언의 말씀인 것이다. 앞으로 교회는 권세 역사가 예언의 말씀대로 나타나게 되므로 지상 왕국 건설의 한 단체를 이루게 된다.

 

  2대지 : 권세 역사로 원수를 소멸시키는 일 (5)

  인간 종말의 권세 역사는 심판의 다림줄의 말씀 권세이다. 이 말씀으로 인해서 마귀를 완전히 없이하는 심판을 내리는 것이므로 이 말씀을 전하는 권세를 받은 종을 사단이 절대로 피해를 줄 수가 없는 것이다. 그 종이 말씀을 증거할 때에 말씀이 불이 되어 원수인 사단을 소멸시키는 일이 있게 된다. 그러므로 마귀 시험을 이기는 일은 말씀 권세이니, 마귀 세력을 이기는 교회가 되려면 증인 권세 역사 아래 하나를 이루어야 되는 것이다.

  마귀는 얼마든지 참된 증인을 해할 수 있는 권세를 가졌지만, 말씀의 권세가 마귀 권세를 이기는 역사이므로 해코자 하는 마귀 권세는 말씀 권세의 역사 앞에서 소멸을 받고 마는 것이다. 만일 권세의 종을 마귀가 해친다면 마귀 권세가 하나님 권세보다도 강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권세를 받은 종이 해코자 하는 마귀 권세를 이기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요, 필연적인 열매로 이루어지는 것이 권세 역사의 승리라고 하는 것이다.

 

  3대지 : 자유로운 권세 역사로 세계를 통일하는 일 (6)

  증인 권세라는 것은 하늘 권세, 땅의 권세를 아울러 받게 되는 것이다. 하늘에서 역사를 나리는 것은 증인의 전하는 말씀대로 되는 것이며, 땅에서 자연을 지배하는 것도 증인의 전하는 말씀대로 되는 것이라고 본다. 누구든지 단비같이 나리는 역사를 받으려면 증인의 전하는 말씀대로 순종하여야만 된다. 이 땅에서 원수의 나라를 굴복시키고, 택한 백성을 찾아내는 일도 증인 권세로 되는 것이다. 이 증인 권세라는 것은 세상에서 원수를 이기는 것이니 만큼 아무리 강한 세력이라도 그 앞에서 굴복을 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므로 거짓선지의 교권이나 적그리스도의 정권이 많은 양떼를 사로잡고 있지만 택한 자를 새 시대로 인도하기 위하여 한데 모으는 역사가 있으므로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이다. 만일 이러한 역사가 없다면 악한 짐승의 정권 아래서 택한 백성을 구원해 낼 수 없고, 거짓선지 교권 아래서 택한 양떼를 구원해 줄 수가 없다. 우리가 하나님의 양떼를 찾는 일을 권세 역사로 하지 않는다면 안될 때가 왔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역사는 증인 권세 역사로써 교회의 통일을 가져오게 될 것이다.

 

  결    론

  잃었던 백성을 찾는 일은 그리스도의 권세 아래서 이루어졌고, 어려운 난국에서 택한 교회를 하나가 되게 하는 역사는 증인 권세 역사로 이루어지는 동시에 재림의 주를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제3과  기호가 서므로 하나를 이루게 됨

- 사 11:10~16,  요절:12 -

 

  서    론

  기독교가 이 날까지는 정치와 종교는 분리라고 말해 왔다. 그러나 인간 종말에는 세계 통일의 기호가 서게 되므로 남은 자가 그 아래에 모여들어 하나가 될 것을 말했다. 그러므로 본문에는 그 기호 아래에 남은 자가 모여들어서 하나가 되므로 지상 통치 평화의 나라가 올 것을 가르쳤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이 땅에 통일된 나라를 이루기 위한 목적이다. 첫째아담의 범죄로 죄악이 충만해진 세상에서 둘째아담 그리스도의 의로 평화 왕국이 완전히 이루어지는 것은 다음과 같이 성경을 들어서 알 수 있다.

 

  1대지 : 십자가의 기호로 세계를 통일하는 일 (10)

  세계적인 복음 전파가 된 후에 십자가를 믿는 성도들이 하나가 되므로 거룩한 나라가 이루어지는데 있어서는 성도들의 기호는 십자가가 될 것이다.

  나는 이 기호에 대하여 서슴지 않고 간증을 한다. 지금으로부터 7년 전인 1965년 5월 15일 성산의 기호를 세우게 되었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므로 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이 수도원 정문 앞에 있는 큰 반석에 기호를 꽂을 자리를 준비해 두었으니, 그 곳을 찾아 기호를 꽂되 푸른 깃발에 은빛 십자가를 새겨서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반석 위에 올라가서 하나님께서 알려 주신대로 기호를 꽂을 만한 자리가 있는 곳을 찾아보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네모가 난 좁은 구멍이 약 석자 정도 뚫려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구멍의 흙을 파내기 위하여 쇠를 두드려서 긁어 낼 수 있도록 만들었다. 흙을 파낸 후에 쇠로 만든 깃대를 튼튼히 꽂아 세우게 되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알려 주시기를 “이 깃발 아래에서 역사가 일어나므로 열방을 깨우치리라”하시는 것이었다.

  그 때에는 이것이 무엇인가 하고 이해를 못했는데, 7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 보니 분명히 세계 통일의 기호인 것이다. 왜냐하면 현재 되어지는 일이 분명히 세계로 진출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말하는 것에 의하면 새일수도원에서 나타난 말씀은 옳은데 기호가 이단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어리석은 사람들이 하는 말이다. 반드시 세계 통일의 기호가 서게 되므로 기독교 통일의 역사가 온다는 것은 본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2대지 : 각 나라의 남은 백성을 돌아오게 하는 일 (11)

  이것은 사10:21과 같이 하나님의 백성 중에서 남은 자이다. 이 사람들은 깃발 아래에서 나타난 역사를 따라 온 자들이다. 모든 사람들이 다 거짓선지에게 미혹을 받고, 쑥물을 먹어도 이 백성들은 완전한 여호와의 지식을 받아 미혹을 받지 않고, 기호 아래 나타난 진리를 믿고, 새 시대를 향하여 용기 있게 걸어 나가게 된다. 아무리 이스라엘이라 하여도 야곱의 길을 걸어가는 자라야만 남은 백성이 될 것이다(사2:3).

 

  3대지 : 쫓겨난 자를 모으시는 일 (12)

  앞으로 기호의 진리를 믿고, 새 시대를 향하여 가는 자들은 쫓겨남을 받게 된다. 이것은 너무나 부패한 교계에서 망할 백성들에게 미움을 받게 되므로 쫓겨남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것은 택한 자들을 한데 모으기 위한 모략적인 방법이다.

  에서가 야곱을 쫓아내었던 것도 하나님 말씀이 응하는 과정이었고, 열두 형제가 요셉을 쫓아내었던 것도 하나님 말씀이 응하는 과정이었다. 그러므로 음녀적인 사상을 가진 자들은 다 이방 세력에게 먹힘을 당할 것이로되, 쫓겨난다 하여도 사상을 지키는 자들은 남은 자가 되어 한 단체를 이루어 새 시대의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다.

 

  4대지 : 원수들이 없어지므로 하나가 되는 일 (13~16)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기호로 세계를 통일할 때는 하나님의 백성을 공연히 괴롭히던 세력들은 완전히 없어지고, 괴로움이 있다 하여도 끝까지 참고 기다리던 자들에게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와 같은 역사가 있으므로 완전 승리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하나를 이루게 하실 때에는 원수를 들어서 괴롭히는 일을 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끝까지 참는 자로서 하나를 이루는 동시에 홀연히 역사를 하시므로 승리를 이루게 하시는 것이다.

 

  결    론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의 신이시다. 그러므로 육적 이스라엘에게 여러 가지 증거를 보여 주신 것은 종말에 택한 백성에게 행하실 예언적인 일에 불과한 것이다. 이사야 9장과 같이 이방의 빛이 되는 역사가 갈릴리에서 나오게 되는 일과 원수를 갚는 일이 있으므로 여호와의 열심으로 이루어지는 다윗 왕국은 영원한 것이라는 것을 말했다.

  그러므로 이사야 10장에는 북방 앗수르를 막대기로 쓰고, 그 북방을 없애는 동시에 아무리 이스라엘이라도 부패된 자들은 다 망하게 되고 새 시대가 오는데 있어서는 11장과 같이 기호 아래에 남은 자가 모여든다고 하였다.

 

 

제4과  중앙 제단으로 하나가 됨

- 사 19:19~25,  요절:25 -

 

  서    론

  지금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지고 여러 가지 교파가 많이 있지만, 주 재림시에는 제단 중심으로 역사가 일어나서 새 시대가 올 것을 성경에 미리 말씀하셨다. 주 재림기에는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되 천국 복음 운동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요, 심판과 새 시대에 대한 진리 운동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여호와를 위하여 애굽 중앙에 제단이 있다고 했는데, 이 애굽이라는 것은 주 재림기에 재앙을 받는 땅을 가르쳤다.

  재앙이 임할 때에 여호와의 제단이 있게 되어 역사가 일어나는 것은 다음과 같다.

 

  1대지 : 기둥 같은 종들을 통하여 역사가 일어나는 일 (19~20)

  주 재림기에 기둥같이 서서 역사할 종들은 제단을 통하여 일어나되 마지막 증거를 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 종들을 중심하여 주의 재림이 임하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초림의 주는 죄인을 부르러 오셨지만, 재림의 주는 어떠한 압박이 있다 하여도 조금이라도 흔들리지 않고 부르짖던 종들을 구원하시려고 오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변화성도는 제단을 중심하여 일어나되 여호와의 제단에 여호와를 위하여 끝까지 참고 역사하는 종들이다.

 

  2대지 : 고쳐 주는 역사가 일어나는 일 (21~22)

  하나님께서 강권으로 고쳐 주는 일이 일어나는 것은 새 시대를 이루기 위한 완전 역사이다. 이날까지는 하나님께서 잠잠히 계셨지만, 이 세상이 다 알도록 여호와 일어나셔서 역사하실 때에는 완전히 개혁을 받는 일이 있게 되는 것이다. 사람으로서 어찌할 수 없는 난국을 만나게 될 때에 여호와 친히 일어나시므로 모든 백성이 회개하고 돌아오게 되어 새로운 교회가 이루어지는 동시에 새로운 시대를 이루게 된다.

 

  3대지 : 세계 통일의 역사가 일어나는 일 (23~25)

  하나님께서는 어느 나라에 있든지 당신의 택한 백성을 한 곳에 모으기 위하여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복 받을 백성들은 자동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다. 아무리 원수의 나라 사람이라도 택한 자는 하나가 되므로 새로운 시대가 이 땅에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결    론

  하나님께서 교계가 부패하고, 인심이 악화된 세상에서 택한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여호와를 위하여 한 제단이 있게 하신다. 그러므로 그 제단을 통하여 하나님의 응답이 내리게 되어 주의 영광을 나타내게 되는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7년 전인 1964년 9월 5일에 하나님의 음성이 공중에서 들려 올 때에 사19:19과 같은 제단을 세울 장소가 계룡산에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음성을 똑똑히 듣고 새일수도원 자리를 얻게 되었는데 여기에서 종말의 진리가 햇빛같이 나타나서 세계로 전파되기 시작한 것은 성경이 응하는 사실이라고 본다.

 

 

제5과  동방 역사로 하나가 됨

- 사 59:18~60:3,  요절59:19 -

 

  서    론

  하나님께서 인간 종말에 큰 영광은 해 돋는 편에 나타날 것을 말씀하셨다. 주께서 강림하실 때에는 동방에서 나타나는 역사로 말미암아 열방이 다 각성을 받고 하나가 되어 새 시대가 이루어질 것을 본문에서 알 수 있다.

 

  1대지 : 급히 흐르는 하수같이 역사가 임하는 일 (59:18~19)

  심판기가 올 때에 하나님께서 나리는 역사는 극도로 강하다는 것을 급히 흐르는 하수같이 임한다고 하였다. 주 재림기에 아무런 역사도 없이 오시는 것이 아니요, 모든 교회가 각성을 받고 하나가 되게 하는 역사가 내리되 동방을 중심하여 일어날 것을 말씀하셨다(사24:14, 41:2이하, 계7:2~3). 그 밖에도 모든 성경을 보면 인간 종말에 하나가 되게 하는 역사는 동방에서 일어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2대지 : 신과 말씀이 임하는 일 (20~21)

  재림의 주를 맞이할 때에는 동방 사람에게 여호와의 신이 임하고, 입에 말씀이 임함으로써 하나가 되는 역사가 일어날 것을 말씀하셨다. 기독교가 너무나 영계가 혼란하고 말씀이 혼선된 이 때에 완전한 영감의 역사가 임하여야 하며, 완전한 변론의 말씀이 임하여야만 될 것은 사실일 것이다. 만일 이러한 역사가 없다면 재림의 주를 맞이할 수가 없으므로 하나님은 강권으로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신의 역사와 말씀의 역사를 보내시는 것이다.

 

  3대지 : 동방에 나타난 영광으로 세계를 통일하는 일 (60:1~3)

  주 재림기에는 흑암이 온 땅을 덮는 미혹이 온다. 이 미혹을 물리치는 일은 동방에 나타난 말씀의 빛으로 되는 것이다. 각 나라의 택한 사람들은 다 그 말씀의 빛을 따라 나오게 되므로 자동적으로 하나를 이루게 된다. 흑암을 물리치는 일은 동방에서 나타난 말씀의 빛이 아니고는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세계 통일의 역사가 된다.

 

  결    론

  하나님의 완전 역사라는 것은 동방에서 일어나는 역사라고 본다. 천국 복음 운동이 완전 역사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고, 동방 사람에게 새로운 역사가 말씀으로 임하므로 그 말씀을 중심하여 완전한 새 시대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계10:7과 같이 하나님의 비밀이 그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이루어지므로 지상에 그리스도의 왕국이 이루어지게 된다.

 

 

 

 어린이 공과편 - 요한계시록 공부

 

제5과  안팎으로 가득히 기록한 책을 예수님이 받으심

- 계 5:1~7,  요절:5 -

 

  서    론

  학생들, 세상이 앞으로 어떻게 된다는 것을 분명히 기록한 책은 세상 학교에서는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교회에 나와야만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 주위에 교회가 많이 있지만 세상이 앞으로 어떻게 된다는 것을 분명히 배울 수 있는 곳은 새일 교회입니다.

  오늘은 하나님께서 안팎으로 가득히 기록한 책을 예수님께 맡기신 일에 대하여 공부하겠습니다. 어째서 세상에 훌륭한 선생님도 많이 있고, 하늘에 훌륭한 천사들도 많이 있는데, 예수님께서 홀로 그 책을 맡으셨을까요? 학생들은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됩니다.

 

  1대지 : 예수님 밖에는 이 책을 받을 이가 없음 (1~5)

  사도 요한은 하늘의 보좌와 그 위에 계신 하나님이 안팎으로 가득히 기록한 책을 들고 계시는 모양을 보았습니다. 그때에 힘이 있는 천사 하나가 나타나서 말하기를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할 이가 없다고 했습니다. 이 책은 일곱 인으로 봉한 책인데 무슨 뜻인지 알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장로님 중에 하나가 나타나서 하는 말이 이 책은 십자가에서 완전히 승리하신 예수님 밖에는 뗄 자가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학생들 천하에서 제일 훌륭한 사람은 누구십니까?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인간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었다가 부활 승천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이 앞으로 어떻게 된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옛날 여러 선지들에게 빠짐없이 기록하게 하실 때에 예수님이 성신으로 잉태되어 처녀 몸에 나실 것도 말씀했고, 만국 만민의 죄를 대신하여 죽을 것도 말씀했고, 부활 승천해서 온 천하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어 줄 것도 말씀했고, 온 천하 사람이 다 죽게 되는 환란이 올 때에 예수 믿는 사람을 구원해 주려고 다시 올 것도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안팎으로 가득히 기록한 책은 세상이 어떻게 되므로 불에 타서 망하게 된다는 것과 온 천하 사람이 불에 타서 죽게 되는 심판이 올 때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되므로 죽지 않고 살아서 새 시대에 간다는 말씀이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죽어서 천당 가는 사람들에게 가르친 책이 아니고, 우리 학생들이 앞으로 세계가 다 불타 버리는 심판에서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새 시대에 간다는 진리를 가르친 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공부하고 있는 것은 계시록의 비밀입니다.

 

  2대지 : 온 땅에 성신을 보내신 예수님이 이 책을 받으심 (6~7)

  학생들, 지금으로부터 1900년 전 무렵에 사도 요한은 밧모 섬에서 예수님이 온 땅에 성신을 보내실 것을 계시로 보았던 것입니다.  이 말씀대로 예수님께서 어느 나라든지 성신을 보내 주시므로 지금은 교회가 없는 곳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 나라도 80년 전부터 성신이 와서 역사하는 일이 있게 되었습니다. 성신의 역사가 제일 늦게 내린 나라가 우리 나라입니다. 요한 사도가 계시를 본 그대로 온 땅에 성신을 보내시는 일이 있게 된 것을 보면, 안팎으로 가득히 기록한 책대로 세상이 될 것은 틀림없는 사실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신을 온 땅에 보내신 다음에 가서 안팎으로 기록한 책대로 역사를 하시게 됩니다. 이날까지는 이 책의 뜻이 무엇인지 몰랐지만 지금은 분명히 알 때가 되었습니다. 학생들, 이 책에 기록된 말씀을 분명히 알고 싶습니까? 반드시 공부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쪼록 이 책을 공부할 때에 한 사람도 빠짐없이 열심히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학생들이 앞으로 공부할 것은 안팎으로 기록한 책의 비밀입니다.

 

  묻 는  말

 1. 안팎으로 기록한 책을 누가 받게 되었습니까?

 2. 온 땅에 성신을 보내신 분은 누구입니까?

 3. 우리가 반드시 공부해야만 될 것은 무슨 책입니까?

 

 

제6과  네 생물과 24장로들이 새 노래를 부름

- 계 5:8~10,  요절:10 -

 

  서    론

  학생들, 세상이 이 후에 어떻게 된다는 것을 알려면 어느 책을 공부해야만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금년에는 안팎으로 가득히 기록한 책의 비밀을 공부하겠습니다. 이 책을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맡길 때에 네 생물과 24 장로들이 너무 기뻐서 새 노래를 부르게 되는 광경을 사도 요한은 계시로 보았습니다.  

  이 새 노래를 무슨 뜻으로 불렀다는 것을 오늘은 공부하겠습니다. 세상에도 많은 노래가 있지만 제일 좋은 노래는 새 노래라고 봅니다. 새 노래라는 것은 이 땅에서  학생들이 재미있게 사는 새 시대가 온다는 것입니다.  

  학생들, 우리 다 같이 새 노래를 하나 부르고 공부하기로 하겠습니다(성가 43장입니다).

 

  1대지 :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짐 (8)

  학생들, 이상한 일을 사도 요한이 보았습니다. 24 장로가 금 대접을 가졌는데, 향이 가득한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향은 성도들의 기도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기도하면 전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금 대접에 담겨 있되 향이 담긴 것과 같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죄를 회개하기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그 즉시에 죄를 용서해 주는 응답을 내리시며, 남을 복 받게 하기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는 것은 그 즉시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한데 담기어 있습니다. 옛날 예수님 때부터 천하 사람이 다 복을 받고 새 시대가 오기를 기다리면서 올린 기도는 벌써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지금 우리 학생들에게 이루어지게 됩니다.

  학생들,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우리 학생들이 과거에 예수님을 잘 믿던 목사님이나 전도사님 같이 믿으면 그분들의 기도가 우리에게 응답으로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잘 믿지를 못하는 학생들에게는 앞서 간 종님들의 기도가 응답으로 내릴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아버지, 어머니께서 기도를 많이 하셨다 하더라도 학생들이 부모님의 말씀을 순종치 않고 나쁜 친구들과 같이 다닌다면 그 기도는 전부 다른 학생들에게 가고 맙니다. 우리들이 교회에 나올 때마다 합심해서 기도 성가를 불러야만 앞서 간 종님들의 기도가 기도와 합해서 응답이 내리는 것입니다.

 

  2대지 : 모든 나라 사람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림 (9)

  우리 학생들은 부모님 때부터 죄를 짓고 낳았으므로 죄를 짓는 사람입니다. 우리 학생들 가운데서 조금도 죄를 짓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오른 손을 들어보세요. 한 사람도 없을 거예요. 그러므로 학생들의 죄를 예수님의 피로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지금 학생들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학생들의 죄를 용서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에 다니면서 거짓말을 하고, 친구를 때리고, 남의 손에 있는 것을 빼앗아 가지는 학생들은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과거에 아무리 못된 행동을 했다 하여도 예수 믿고, 죄를 하나님께 고백한 학생들은 하나님께서 친 백성으로 삼아 주시므로 절대적인 보호를 받게 됩니다.

 

  3대지 : 땅에서 왕 노릇함 (10)

  지금은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정권을 잡고 있기 때문에 악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하나님께서 예수 믿는 사람만 남겨 놓고 그 밖의 사람은 다 없이해 버리는 재앙 심판을 내리므로 살기 좋은 새 시대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때에는 예수를 아주 잘 믿은 사람이 왕 노릇하게 됩니다. 새 노래라는 것은 천당 가는 것을 목적한 것이 아니고, 새 시대가 오는 것을 가르쳐 부르는 것입니다. 다음 주일에는 우리 학생들이 세상에서 재미있게 사는 일에 대하여 공부하겠습니다. 학생들은 공부할 말씀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묻 는  말

 1. 남을 복 받게 하기 위하여 간절히 기도한 것은 어떻게 됩니까?

 2. 학생들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만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까?

 3. 앞으로 세상에는 어떠한 사람만 남아서 살게 됩니까?

 

 

제7과  흰 말 탄 자의 승리

- 계 6:1~2,  요절:2 -

 

  서    론

  학생들, 안팎으로 가득히 기록한 책에 대한 비밀을 안 사람은 이날까지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 제일 불쌍한 빈민굴에서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기도하던 이뢰자 목사님에게 분명히 알도록 하나님께서 알려 주셨습니다.  

  우리가 지금 공부할 것은 이 세상에서 누가 완전히 이기느냐 하는 것입니다. 지금 세상이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보면 악한 사람들이 이길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흰 말 탄 사람이 이긴다고 하셨습니다. 흰 말 탄 사람은 분명히 예수님이요, 우리들이라고 계19:11이하에 가르쳤습니다. 희다는 것은 마음이 깨끗하고 화평스럽다는 뜻입니다. 누구든지 마음이 깨끗하고 화평스러운 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깨끗하고 화평스러운 사람이라면 아무리 소수라도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는 일이 있으므로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흰 말 탄 자가  이기는 일에 대해서 공부하겠습니다.

 

  1대지 : 활을 가짐 (2상반절)

  활이라는 것은 나쁜 사람이 남의 것을 빼앗는 것을 뜻한 것이 아니고, 나쁜 사람을 없이 하는 싸움을 뜻했습니다. 슥9:13을 보아도 거룩한 사람들이 활을 가지고 원수를 이긴다고 하였습니다. 학생들, 활이라는 것을 보셨습니까? 활이라는 것은 아무리 먼 곳에 있는 사람이라도 겨누어서 쏘면 맞게 됩니다. 지금은 총과 대포가 있지만 옛날에는 칼과 활을 가지고 싸웠던 것입니다. 칼이라는 것은 사람에게 가까이 가서 목을 자르고 가슴을 찌르고 하지만, 활이라는 것은 먼 곳에 있는 사람이라도 겨누어 쏘면 화살이 공중으로 날아가 맞게 됩니다. 이것은 팔로 힘껏 당겼다 놓으면 멀리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전쟁이라는 것은 사람을 사정없이 죽이는 것이 아니고, 원수들이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막는 일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해치려고 하는 악한 마귀들을 오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옳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고 악하고 거짓된 사람을 없이 하기 위한 싸움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는 일이 있으므로 언제나 이기게 됩니다.

 

  2대지 : 면류관을 받음 (2중반절)

  면류관이라는 것은 의로운 왕이 쓰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옳은 일을 하기 위하여 악한 마귀와 싸우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면류관을 씌워 주십니다.  학생들도 악한 마귀를 이기게 되면 영광을 누릴 수 있는 면류관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악한 사람들이 알지를 못해서 욕을 하고, 때리고, 십자가에 못박는 일까지 했으므로 “이 무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하는 기도를 하셨습니다.

  학생들,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죄를 짊어지시고, 악인에게 억울하게 매를 맞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얼마나 비참한 일입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인간을 불쌍히 보시고 끝까지 참고 이기셨으므로 면류관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과거에 많은 종님들이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억울하게 매를 맞고, 고생을 한다 하여도 원망치 않고 예수님과 같이 기도하면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종님들도 다 면류관을 받게 되었습니다.

  학생들도 아무리 악한 사람들이 핍박을 하고, 욕을 하고, 때린다 하여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대히 나갈 때에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시므로 승리하게 됩니다. 인간이 볼 때에는 남을 때리고 욕하는 사람이 무서운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도와주지 않으시므로 필경은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3대지 :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함 (2하반절)

  과거에 예수님을 욕하고, 때리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로마도 망했고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던 사람도 다 망했습니다. 그러나 핍박을 받으면서도 남을 살리기 위하여 기도하시던 예수님과 모든 성도들은 온 세계 사람을 구원해 주는 승리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학생들,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께서 악한 사람들에게 욕을 먹고, 매를 맞고, 십자가에 못 박힐 때에 누가 이 예수로 말미암아 온 천하 사람이 구원을 받게 될 줄을 알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나는 십자가에 죽었다가 부활하므로 온 천하 사람을 구원해 주는 일을 한다고 말씀하실 때에 모든 사람들은 미친 사람이라고 흉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대로 온 천하 사람들이 그를 믿고 구원을 받게 되었으니, 예수님께서 이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에게 세상 끝에 될 일을 계시로 보일 때에 흰 말 탄 자가 반드시 이기고 두 번째 이기게 되면 세상은 예수 믿는 사람만 살게 되는 나라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첫 번째 이기고 라는 것이 분명히 이루어졌다면, 악한 사람을 다 없이 하고 예수 믿는 사람만 사는 세상이 온다는 것도 분명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 학생들이 완전히 이기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도우시므로 됩니다.

 

  묻 는  말

 1. 흰 말 탄 자는 누구를 가르친 것입니까?

 2. 하나님께서 어떠한 사람에게 면류관을 주십니까?

 3. 누가 이기게 된다고 하였습니까?

 

 

제8과  붉은 말 탄 자가 화평을 제함

- 계 6:3~4,  요절:4 -

 

  서    론

  학생들, 오늘은 인간 종말에 큰 싸움이 일어날 일에 대하여 계시로 보여준 것을 공부하겠습니다. 이 싸움에서 흰 말 탄 자가 이겨야만 학생들이 살기 좋은 새 시대가 옵니다. 세상 끝에 가서 붉은 말 탄 자가 나와 무서운 전쟁이 있게 될 때에 사람들이 비참하게 죽는 일이 있을 것을 사도 요한은 계시로 보았습니다.  

  이제 붉은 말 탄 자가 화평을 제하는 일에 대해서 공부하기로 하겠습니다.

 

  1대지 : 허락을 받음 (4상반절)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고 새 시대가 올 때는 붉은 세력을 허락한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힘으로 막을 수 없을 정도로 붉은 세력을 허락한 것은 백마 탄 예수님께서 붉은 세력을 심판하기 위한 방법입니다. 붉은 세력을 허락해서 누구든지 그 앞에 머리를 숙이고 절을 하는 자는 예수님께서 다 없이 하시며, 그 표를 받는 자도 없애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끝까지 붉은 세력과 싸우는 자는 예수님께서 진실한 사람이라고 인정을 하시고 구원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붉은 세력을 허락한 것은 그 앞에 절하고 표 받는 자는 다 없이하고, 끝까지 그 세력과 싸우는 자만을 보호하기 위한 방법입니다.

  학생들, 깊이 생각해 보세요. 지금 이 말씀대로 붉은 세력이 동해 바다에서 서해 바다까지 북방의 넓은 땅을 다 점령하고, 우리 삼천리 금수강산도 남한만 남겨 놓고는 차지하고 있습니다.

  우리 학생들은 자유롭게 살고 있지만, 붉은 세력이 통치하고 있는 철의 장막 속에서는 다른 것은 모르게 하고 공산당만 좋다고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으므로 하나님도 모르고, 예수님도 모르고, 자유 진영에 좋은 나라가 있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학생들, 철의 장막 속에서 살고 있는 학생들은 얼마나 불쌍합니까? 지금 세상이 이렇게 된 것은 심판이 올 징조입니다.

 

  2대지 : 서로 죽이게 함 (4중반절)

  이날까지 많은 전쟁이 있었지만 그것은 땅 하나를 놓고 다투는 싸움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전쟁은 자기 민족끼리 서로 죽이는 싸움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민족끼리 서로 싸우는 6.25 동란이 있으므로 수많은 백성이 억울하게 죽었습니다. 저 중국에서도 자기 민족끼리 싸우게 되어 많은 국민이 죽었습니다.

  월남에서도 월맹군과 월남 군이 서로 싸워서 지금도 수많은 사람이 죽고 있습니다. 소련이라는 나라에 공산당이 일어나므로 평민을 내어 놓고 지도 계급에 있는 사람들만 2천만 명이나 죽었습니다. 지금도 계속해서 민족끼리 싸우고 있습니다.

  지금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중공을 방문한다고 해서 완전 평화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보호할 자를 보호하고 벌할 자를 벌하므로만 완전 평화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3대지 : 큰 칼을 받음 (4하반절)

  학생들, 큰 칼을 들고 사람을 죽이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것은 너무나 악한 사람입니다. 지금 붉은 공산당은 자기 사상을 따라 오지 않는다면 무조건 죽이는 것입니다. 학생들, 얼마나 악한 일입니까? 하나님께서 지금으로부터 1900년 전 무렵에 사도 요한에게 계시를 보일 때에 세상 끝에는 붉은 세력이 나와서 세계 평화를 없이하고, 서로 죽이게 하고 큰 칼을 들고 나온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대로 지금 세상이 되어졌습니다.

  학생들, 남을 칼로 죽이는 사람은 자기도 칼로 망한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붉은 세력이 일어났다면 우리가 앞으로 이기겠습니까? 붉은 세력이 앞으로 이기겠습니까?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우리들이 이기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학생들은 공산당인 붉은 세력을 무서워하지 말고, 담대히 예수님만 따라가야 할 것입니다. 학생들이 끝까지 붉은 공산당에게 미혹을 받지 않고 나간다면 하나님께서 보호하시므로 죽음을 맛보지 않고 새 시대의 축복을 받게 됩니다.

 

  묻 는  말

 1. 붉은 말을 누가 허락했다고 공부했습니까?

 2. 세계 평화를 누가 제한다고 했습니까?

 3. 서로 죽이는 일을 누가 한다고 했습니까?

 

 

제9과  검은 말 탄 자가 저울을 가짐

- 계 6:5~6,  요절:6하반절 -

 

  서    론

  학생들, 지난 주일에 무슨 말 탄 자를 공부했습니까? 붉은 말 탄 자를 배웠습니다. 붉은 말은 나쁜 것입니까? 좋은 것입니까? 이것은 나쁜 사람을 가르친 것입니다. 남을 살리는 것이 좋은 일입니까? 죽이는 것이 좋은 일입니까? 붉은 말을 탄 자는 남을 죽이는 일을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검은 말이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이 검은 말을 탄 자는 손에 저울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학생들, 저울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저울을 모르는 학생들은 별로 없을 거예요. 저울이라는 것은 어떠한 물건을 살 때에 달아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울을 가진 검은 말은 인간 종말에 은과 금을 마음대로 가지고 활동하는 자본주의를 가르쳤습니다. 공산주의의 백성이라는 것은 은과 금을 마음대로 가지지 못하고, 죽는 것이 무서워서 벌벌 떨며 순종하는 것 뿐입니다.

  검은 말 탄 자가 저울을 가졌다는 것은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누구든지 은 금을 가질 수 있으며, 자본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은과 금이 많은 나라는 어디입니까? 학생들, 미국은 모든 것이 풍부한 나라입니다. 지금 우리 나라는 미국에서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면 유지해 나갈 수 없는 형편입니다. 이제 여기에 대해서 공부하겠습니다.

 

  1대지 : 손에 저울을 가짐 (5)

  학생들, 지금 우리 나라에서 돈이 많아야 좋습니까? 없어야 좋습니까? 돈이 없는 자는 학교에 가서 공부도 할 수 없습니다. 어디에 가서 취직도 할 수 없습니다. 정치 운동을 하여도 돈이 필요합니다. 돈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인격이 높다 하여도 아무런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학생들, 이것이 좋다고 생각하십니까? 나쁜 것입니다. 이것은 좋은 일이 못됩니다. 그러므로 검은 말이라고 했습니다.

  학생들, 돈만 있으면 된다고 하는 것은 마음이 시커멓게 되는 일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돈이 없는 가난한 사람이라도 마음이 깨끗하다면, 돈이 많고 마음이 검은 사람보다 더 귀하게 여기십니다. 아무리 가난해도 마음이 깨끗한 사람을 들어서 새 시대를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 학생들은 돈만 많으면 된다는 마음을 가지지 말고, 돈이 없다고 해서 낙심할 필요도 없고, 흰 말 탄 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2대지 : 은전 한 푼을 가지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 (6상반절)

  학생들, 옛날에는 은전 한 푼만 있으면 그날, 그날에 살 수 있는 것을 무엇이든지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한 개의 은전을 가지고는 아무런 것도 살수가 없습니다. 지금으로부터 30년 전만 해도 학생들이 은전 한 푼을 가지면 엿도 사서 먹고, 떡도 사 먹고, 과자도 사서 먹을 수 있고, 그밖에도 많은 것을 사서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은전 한 푼을 가지면 무엇을 사 먹을 수 있습니까? 그러면 본문의 말씀이 꼭 맞았습니다. 옛날에는 천 원만 있으면 부자라고 했는데, 지금은 손님을 한번 대접하려고 해도 천 원은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날 그날에 품팔이해서 사는 사람은 도저히 생활할 수가 없는 때가 지금입니다. 그리고 돈이 있는 사람은 아주 살기가 좋은 때가 지금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새 시대가 올 때에는 가난한 사람이 살 수가 없는 어려운 시기가 온다고 하셨습니다.

 

  3대지 :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지 못함 (6하반절)

  학생들 앞으로 피해를 당치 않는 사람이 되려면  참 감람나무 기름 같은 성신의 은혜를 받고, 극상 포도주와 같은 말세 비밀의 진리를 잘 공부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학생들은 선생님이 기도 성가를 부르라고 할 때에 열심으로 같이 해야 기름 같은 성신의 은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시록 공부를 할 때에는 어느 학생이든지 다 공과 책을 가지고 와서 열심히 읽으며, 정신을 차려서 들어야 합니다. 이 말씀을 잘 듣고 깨닫는 학생이 되면 하나님께서 천군 천사로 보호하시므로 아무도 학생들에게 피해를 주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학생들은 새 시대의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학생들은 절대로 붉은 공산당을 무서워하지 말고 돈 많은 사람을 부러워하지도 말고, 은혜를 받으면서 진리를 잘 배워야만 합니다. 이렇게 되므로 공산당이 망하고, 돈 많은 사람이 망할 때에 학생들은 새 시대에 가게 되는 것입니다.

 

  묻 는  말

 1. 저울은 무엇에 필요합니까?

 2. 누가 저울을 가졌다고 했습니까?

 3. 앞으로 학생들이 살아서 새 시대에 가려면 무엇을 받아야만 합니까?

 

 

 

 논 설 편

 

1. 금할 것을 금하지 못하는 나라의 부패성

  오늘의 많은 나라들은 과학 만능을 믿는 정치로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어 보겠다는 꿈을 꾸고 있다. 그러나 금할 것을 금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앞에 종이 되는 생활을 정치인 자체가 하고 있으니 이것은 형식적인 정치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금할 것을 금할 수 있는 인격이 있어야 완전한 나라를 이룰 수 있는 지도자라고 보게 된다.

  정치에는 신정도 있고 인정도 있고, 선정도 있고 악정도 있다. 그런데 신정이라는 것은 금할 것을 금할 수 있는 정치를 말하는 것이다. 이제 금할 것을 금하지 못하는 나라에 대하여 그 부패성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금할 것을 금하지 못하는 지도자로 말미암아 오는 부패성

  어느 사람이든지 처음에는 올바른 지도자가 되어 보려고 노력을 하게 된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서 올라오는 죄의 세력을 금하지 못하는 인격이므로 갈수록 남을 지도할 용기를 잃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죄의 종이 된 인격에서 억지로 그 법대로 남을 지도할 때에 권리가 없는 지도자가 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입을 열어 남을 지도하는 말을 한다 하여도 자기 자신이 그 말을 할 수 있는 인격을 가지지 못했다면 아무런 열매도 있을 수 없다.

  말할 권리를 가지고도 그 말을 할만한 자격을 상실한 자는 아무리 많은 말을 한다 하여도 거기에 생명이 없으므로 지도를 받는 사람들이 순종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불만을 가지게 된다. 지도자가 존경을 받지 못하고 무시를 당하게 된다는 것은 지도하는 사람 자체에 부패성을 가졌다는 증거이다. 그러므로 그 지도를 받는 사람들도 영향을 받게 되므로 부패를 가져올 수 있는 위험성이 많은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의로운 사람에게 지도권을 주시기를 기뻐하신다. 그러므로 자신에 있는 모든 죄악을 금하는 자라야 대중의 잘못을 금할 지도권을 하나님께로부터 받게 되는 것이다.

  오늘의 공산당이라는 것은 최고의 궤휼적 정책을 노골화시키고 해 나가므로 자기 사명인 특권을 마귀에게 받은 세력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그 세력은 백성을 얼마든지 괴롭히고 망하게 하는 말세의 진노의 막대기로 쓰여지는 권세가 있다는 것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다. 이 북방 세력을 이길 자는 자신의 죄악을 금하는 거룩한 자라야 된다고 모든 선지는 하나같이 묵시로 보았던 것이다.

  아무리 반공이라 하여도 자신이 죄악을 금하지 못하는 지도자는 벌써 마귀에게 정복을 당한 인격이니 마귀의 최고의 권세를 가진 공산 세력을 막을 수 없다. 

 

  2. 금할 것을 금하지 못하는 단체의 부패성

  단체라는 것은 어떠한 목적을 두고 뭉쳐진 것을 말한다. 공산당이라는 것은 목적이 죄가 없다는 사상에서 의를 대적하고, 하나님이 없다는 사상에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나오는 단체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아무리 죄를 범해도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더 강하게 뭉쳐지는 단체가 된다.

  그러나 우리는 의와 하나님을 위하여 그 뜻을 이루자는 것이 목적인 단체다.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 나라 만세라는 애국가가 즉 이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하나님의 보호를 받을만한 단체가 되기 전에는 아무런 권리가 없는 것이다.

  오늘에 소위 기독교라 하는 단체에서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을만한 일을 하지 못한다면 오히려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은 사실이다. 오늘날 기독교 종교국의 지도자가 기독교를 말살시키는 공산당 정치와 협상을 해서 평화를 이루자는 것은 벌써 악한 단체에게 먹힘을 당하는 일이라고 본다. 그리고 자유진영이라는 측에서 자유를 방랑적으로 사용한다면 그 자유진영이라는 자체가 참된 자유로 단체를 이룬 것이 아니므로 혼란에 빠지게 되어 자유를 박탈하는 공산당에게 오히려 멸시를 받고 눌리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한 마음에서 하나님의 진리의 사상으로 뭉쳐진 단체가 되기 전에는 도저히 금할 것을 금할 수 없는 사회 혼란을 가져 올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경에 14만 4천명인 단체로서만 짐승의 나라를 이기게 될 것을 말씀하셨다. 비록 적은 수이지만 하늘의 권세를 받은 단체이므로 완전 승리를 이루게 되는 동시에 새 시대를 이루게 된다는 것을 성경은 가르치고 있다.

  이 단체라는 것은 흠이 없는 사람들이 합하여 죄악의 세력을 완전히 때려부수는 승리의 열매를 이루게 된다. 그러므로 붉은 용, 붉은 짐승, 거짓선지의 세력이 완전히 이 땅에서 없어지는 것을 아마겟돈 전쟁이라고 하는 것이다.

 

 

2. 강한 것 같으나 약한 자

  어리석은 인간들은 무신론 공산주의를 강한 자로 보고 있다. 그러나 실지는 가장 약한 자라고 본다. 왜냐하면 무신론이라는 것은 아무 것도 믿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든다면 말을 탄 사람이 채찍으로 말을 때릴 때에 그 말은 아무 것도 모르고 무조건 강하게 뛰지만, 그 강한 것은 오래 가지를 못하고 차츰 약해지는 것과 같다.

  공산주의라는 것은 사람을 짐승 다루듯이 하는 정책이다. 그러므로 지도자 하나가 굴복을 당한다면 그 힘이라는 것은 하루아침에 없어지고 마는 것이다. 이제 공산주의의 약점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생산력이 약하다.

  생산이라는 것은 각자가 소망이 넘치는 가운데서 잠을 자지 않고 노력하는데 따라 증가할 수가 있다. 그리고 축복의 대상자인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생산을 내는 자라야 축복 속에서 생산이 증가되는 것이다. 소위 농장을 경영하는 사람이 억지로 노동을 한다면, 이것은 농작물에 대하여 애착심이 없는 것이므로 생산은 자동적으로 약해진다.

  사람이라는 것은 자기 소욕을 위하여 힘드는 줄을 모르고 일하게 된다. 그런데 그 소욕이 없게 되면 힘이라는 것은 자동적으로 약해져서 생산이 줄어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산을 많이 내려면 다음과 같이 해야 된다.

  자본주의 정치에도 하나님의 축복을 믿는데서 생산을 각자가 내어야할 것이다. 그런데 욕심 많은 사람이 빈민을 탄압하고, 자기의 소욕만을 채우려는 생각으로 치우친다는 것은 생산이 자동적으로 약해지고 만다. 그러므로 각자 각자가 소망이 넘치는 기쁨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라야 생산력을 올리게 되는 것이다.

  소위 자본주의 정치가 대 자본가만을 중심한다는 것은 완전한 민주주의적이라고 볼 수 없다. 완전한 민주적인 정치를 하려면 국민 전체가 소망이 넘치는 생활을 할 수 있게 하는 정치가 있어야 하는 동시에 생산력이 올라가는 정치가 있어야 된다. 이것은 약자나 빈자까지도 다 살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정치이다.

  참된 민주주의라는 것은 국민에게 사상과 소망이 넘치도록 하는 정치가 있는 것을 말한다. 아무리 공산주의가 강하게 정치를 하는 것 같지만 실지는 가장 약한 것이다.

  첫째는 하나님의 축복이 있을 수 없고,

  둘째는 국민의 인격을 완전히 이룰 수가 없고,

  셋째는 이상적인 단체를 이룰 수가 없으므로 결국에는 아무런 열매도 없이 되고 만다.

 

  2. 사상적으로 약하다.

  사상이라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 강한 것이 아니고, 있다는 것이 강하다. 공산주의 유물론 사상이라는 것은 하나님도 없고, 영혼도 없고, 죄도 없고, 심판도 없고, 천국도 없고, 사람은 고등동물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강한 사상을 넣어줄 수가 없고 오히려 타락을 주게된다.

  세계를 정복할 강한 사상을 가진 자는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확실히 체험적으로 받은 자이며, 영적 생활에 큰 발전을 가진 자이며, 마음에 천국을 소유한 자이며, 완전히 죄를 이기는 변화 성결을 받은 자이며, 확실한 진리의 소망에서 사상이 강하게 된 자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람은 자립적 정신에서 시간을 다투어 가며 싸우는 사상적인 생활이 있게 되어 백전백승하게 되는 것이다.

  가장 미약한 사상은 공산주의 유물론 사상이요, 가장 강한 사상은 그리스도 십자가의 순교적 사상이다. 오늘에 소위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양대 세력이 세계를 좌우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생명이 없는 우상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약한 것 같으나 강하게 되는 순교적 사상이라야 세계를 통일하게 될 것이다.

 

  3. 인격적으로 약하다.

  공산주의 인격이라는 것은 전부 속여서 사람을 기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속았다는 것을 깨닫게만 되면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돌아설 인격인 것이다.

 참된 진리의 말씀으로 이루어진 인격은 무슨 일을 당하든지 참되다 하는 깨달음이 있으므로 날마다 강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참된 진리의 말씀이 없이 이루어진 인격은 무슨 일을 당하든지 허무하다 하는 것이 있으므로 바람 앞에 겨와 같이 날아가고 만다.

  지금 공산주의는 기독교가 자본주의 국가의 한 도구라고 가르치고 있고, 종교를 아편이라고 말하고 있고, 자본주의 정치 아래서는 사람들이 마음대로 먹지 못해서 굶주리는 상태에 있다고 선전하고 있다. 그러나 참된 하나님의 사람이 나타나게 될 때에 공산주의 인격을 가진 자들은 자기들의 생활이 너무나 허무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서 북진하게 될 때에 하나님이 없다는 것도 거짓말이요, 기독교는 자본주의 앞잡이라는 것도 거짓말이요,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다 못산다는 것도 거짓말이요, 제일 악질이 기독교인이라는 것도 거짓말이요, 그 밖에 모든 것이 다 허위 선전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속아서 떠들던 무리들은 하루 아침에 깨닫고 자동적으로 돌아오게 된다.

  억지로 뭉쳐진 단체라는 것은 바람 앞에 겨와 같이 흩어지고 말것이요,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를 받은 사람 앞에 다 굴복을 당하고 만다. 왜냐하면 노예에 불과한 인격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서를 통하여 공산주의가 아무리 강한 것 같으나 약하다는 것을 증거할 수 있다.

 

 

3. 인위적인 평화는 인위적으로 끝나고 만다

  우리는 평화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믿는다. 어찌하여 하나님께서 평화를 위하여 아들을 죽게 하시고, 아들은 죽기까지 순종하셨는가 하는 진리를 바로 아는 데서부터 참된 평화의 역사가 무엇인지를 체험하게 된다. 개인의 마음속 평화도 인위적으로 이룰 수가 없는데, 세계적인 평화를 인위적으로 이룬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가장 간교한 뱀을 내어 사람을 꾀이도록 하여 원수가 생기도록 하셨던 것이다. 이것은 원수와 타협하므로써 평화를 이루라는 것이 목적이 아니요, 그 원수를 이기므로써 평화를 이루라는 것이 목적이다. 이렇게 되므로 이루어진 것을 참된 평화의 왕국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의 종이 된 생활에서 평화를 얻을 수 없는 인생들에게 참된 평화를 주기 위해서 하나님은 역사하셨던 것이다.

  인간의 죄와 원수를 없이하는 방법을 세우기 전에는 완전한 평화가 있을 수 없으므로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십자가에 죽게 하시고, 승리의 부활을 하게 하시므로써 심령 중생의 평화를 얻게 하셨다. 그러므로 중생의 평화라는 것은 중생의 체험을 받는 자에게만 있게되는 것이다.

  기독교 신자라면 누구든지 다 숨은 보화 같이 마음의 평화를 보존하고 있을 것을 믿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은 개인적인 중심평화로 끝을 맺는 것이 아니고, 중심 평화가 시작이 되면 세계 평화로 끝을 맺는 것이다. 중심 평화는 인위적인 도덕이나 수양이나 어떤 인간의 화려한 생활로써 이룰 수 없고, 오직 독생자의 승리의 역사로만 이루어진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세계평화를 일으킬 이도 예수님 밖에는 없을 것이다.

  오늘날 인위적인 평화를 위하여 영웅적인 행동을 한 것 같이 보이는 일도 있지만, 하나님편에서 보실 때에는 오히려 어리석은 음녀와 같은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붉은 용, 붉은 짐승의 세력을 완전히 없애므로 평화 왕국이 올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붉은 짐승과 통상이니, 협상이니, 평화 공존이니 해 보았던들 이것은 인위적인 평화이므로 인위적으로 끝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 신자는 인위적인 평화에 끌려서 사상을 빼앗기지 말고, 그리스도의 심판과 평화 왕국을 목적한 다림줄의 진리를 굳게 잡고, 그 진리를 통하여 오는 초인간적인 지혜와 지식과 능력과 권세를 받아야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루어지는 평화왕국에 들어갈 수 있는 완전한 인격을 이루는 일과 완전한 단체를 이루는 일에 목적을 두고 해산의 수고를 다하여 부르짖는 일이 이제부터 더 강하게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인위적인 평화가 성립된다고 해서 마음을 놓고 방심적인 태도에서 헛 꿈을 꾸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된다.  인본주의적인 인격은 인위적인 평화를 목적하는 것이 원칙이겠지만,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그리스도인이 인위적인 평화를 목적한다는 것은 그 인격 자체를 상실하고 마는 일이 된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그리스도인의 인격으로서 그리스도의 평화왕국을 목적하고 싸워 나가야만 할 것이다. 아무리 붉은 짐승의 세력이 강하게 일어난다 하여도 우리는 이것을 두려워 할 것이 아니요, 오히려 하나님을 바라볼 일이 된다. 왜냐하면 성경에 평화왕국이 이루어지는 심판 날에는 붉은 짐승을 들어서 환란이 오게 하고, 환란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천사로 보호하고, 붉은 짐승이 두려워서 그 앞에 절을 하고 표를 받는 자는 붉은 짐승과 같이 없애 버린다고 말씀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끝까지 하나님을 경외하고, 붉은 짐승과 타협하지 않는 사람으로서 세계 평화의 왕국을 이룬다는 것이 성경 전체의 종말관이다. 인위적인 평화가 잠깐동안 있다는 것이 성서적이요, 인위적인 평화를 꿈꾸던 사람들이 슬퍼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사33:7~12).

 

 

 

 신 앙 문 답  

 

【문】1. 어느 교파나 하나같이 새일수도원을 합당치 못한 것으로 말하고 있는데, 그 원인이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답】나는 신앙 양심으로 그것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새일 수도원에서 강조하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 십자가를 믿는 신앙 양심을 가진 자로서 조금이라도 말씀을 가하든지 감하든지 한다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양떼를 죽이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둘째 : 십자가를 믿는 신앙 양심을 가진 자로서 조금이라도 공산 사상과 타협한다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본능을 상실하는 음녀적인 행동이 되기 때문입니다.

  셋째 : 십자가를 믿는 신앙 양심을 가진 자로서 오늘에 할 일은 영혼 구원만을 목적하고 나갈 것이 아니요, 이 시국의 난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되 난국을 돌파하고 나갈 수 있는 신앙 사상을 계시록과 선지서를 중심하여 가르쳐야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떠한 난관이 온다 하여도 강하고 담대히 이겨 나갈 수 있는 인격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현 교회를 무시하거나 구원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요, 여기에서 좀 더 진보하자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과거에 없었던 난제가 우리 앞에 닥쳐왔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지도자 되는 사람으로서 무관심하게 있을 일이 아니라고 봅니다. 지도자에게는 성서를 가르치되 이 시국을 바로 알려 줄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성서를 들어서 앞으로 어떠한 일이 올 것과 어떠한 역사가 있을 것과 어떠한 미혹이 올 것과 어떠한 신앙 노선을 걸어야 된다는 것을 바로 가르치지 않는다면 우리 기독교는 큰 위기를 만났다고 봅니다.

  그런데 내가 지금으로부터 15년 전에 깊은 기도로 들어가게 되어 10개월 동안이나 조금의 피곤도 없이 밤을 새워 묵상을 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때에 나는 계시록을 해석하는 영음을 듣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음성을 3차까지는 듣기만 했고, 4차에 들리는 음성을 그대로 기록한 것이 말세 비밀이라는 책입니다.

  계룡산에서 새일수도원이 시작된 동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계룡산에서 기도를 하고 있을 때에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 산을 덮었으므로 나는 불 가운데 앉아 있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불 속에서 너는 이름을 우레 뢰, 아들 자로 해서 “뢰자”라고 고치고, 성전을 지으라는 명령이 들려왔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어찌할 수 없이 순종했던 것입니다.

  그때에 모든 동역자들은 내가 계룡산에서 기도하다가 계룡산 마귀에게 미혹을 당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장로는 말하기를 자기가 기도하다가 환상을 보았는데 이 목사가 수도원을 짓다가 이방 종교인들에게 쫓겨가더라는 것입니다. 나는 수도원을 지으면 여기에서 역사가 일어나게 되므로 네 민족이 살게 되고 세계를 깨우치게 된다는 명령을 받고 시작했는데, 그 장로는 수도원을 자기에게 맡기면 내가 망하지 않고, 맡기지 않으면 반드시 망한다고 위협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 장로에게 신앙 양심을 바로 가지라고 하면서 책망했습니다. 그때에 그 장로는 자기가 잘못 되었다고 자복하면서도 누구의 지시가 옳은지 두고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7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 우리 수도원은 세계로 진출할 문서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내 입술에 말씀이 임하여 많은 서책이 나왔으며, 지금도 계속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장로는 그때부터 나를 악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사람은 내가 버림의 사람이며, 마귀에게 사로 잡혔다고 하는 말을 7년간 여러 부흥사들을 끼고 선전하는데 전력을 두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장로의 악평하는 말을 듣고 우리 새일 수도원을 이단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남의 말을 듣고 이단이라 할 것이 아니라, 친히 알아 볼 필요가 있다고 해서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수도원을 알아보려고 온 사람들은 하나같이 참된 하나님의 역사라고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첫째 : 말씀이 햇빛같이 밝아지는 것을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 마음이 성결해지는 것을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셋째 : 몸에 피곤이 없이 깊은 진리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악평하는 자의 말만 듣고 움직이는 사람들은 가장 불쌍하고도 어리석다고 봅니다. 그러나 앞으로 몰라서 참된 종을 이단시하던 사람들은 깨닫고 돌아올 것입니다. 마귀의 자식이라면 모르겠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양심이 있는 사람들은 다 하나로 뭉쳐질 것을 믿습니다.

 

 

 

 특  집  

 

1. 4월을 맞이하는 사명자의 기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우리 머리 위에 강한 역사를 나리시옵소서. 택한 백성을 불쌍히 보시옵소서. 모든 초목은 서릿바람에 시달리다가 봄비를 맞고 새로운 기운을 머금고 있나이다.  

  우리에게 새로운 순과 같이 가장 깨끗하고 아름다운 인격을 만들어 주시옵소서. 아무리 애쓴다 하여도 우리 힘으로는 북방에서 내려오는 찬바람을 막을 수 없나이다. 우리를 불이 되게 하시고, 새로운 순이 되게 하옵소서. 원수를 이기는 일에 있어서는 불이 되게 하시고, 남을 살리기 위한 일에는 새로운 순과 같이 새로워지게 하셔서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시옵소서.

  바로의 악정을 벗어나서 홍해를 육지같이 건너갔던 일이 4월에 있었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쓰라린 십자가를 홀로 지시고, 사망의 고통을 맛보시고, 무덤을 뚫고 승리의 부활을 하셨던 것이 이 달이 아닙니까. 그 승리! 내게도 열매가 될 줄로 믿습니다.  

  주의 부활을 의심하고 원수가 무서워서 골방 속에 숨어 있던 제자들에게 부활을 증거하게 하시기 위하여 찾아 오셔서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며 만져보라고 하신 예수님이여 우리는 우리가 주님의 못자국을 만져 본 것과 같이 믿고 감사함을 드립니다.

  주님의 부활의 생명이 넘쳐흘러 내 영혼을 살렸사오니, 주님께로부터 이 시간도 무한한 능력이 흘러 내려오므로 나의 맡은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될 줄을 확실히 믿나이다.

  주여, 이 달에는 완전 승리의 열매를 거두는 일이 있게 하옵소서. 주의 부활을 반대하고, 부활절에 하나님의 성전을 파괴시켰던 공산당은 점점 더 강하게 일어나고 있나이다. 그런데 어찌해서 주의 부활을 믿는 교회가 이렇게도 잠자는 상태에 있나이까? 주여, 원하옵나니 우리로 주의 부활을 증거하게 하시는 동시에 멸공 진리의 말씀을 용기있게 증거할 새로운 인격을 주시옵소서.

  앞서간 종들은 주의 부활을 증거하지 못하도록 옥에 가두든지, 돌로 때린다 하여도 담대히 전하였나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찌하여 이 사랑을 잃었나이까. 우리에게도 그들이 가졌던 사랑의 불길을 주시옵소서. 그때보다도 칠 배나 강한 능력을 주셔야만 되겠나이다. 만일 안 주신다면 우리는 쓰러질 수밖에 없습니다. 동.서.남.북을 바라보아도 이 땅에서 우리를 도울 자는 없나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강한 역사를 나리시옵소서. 강한 새 힘을 받아야만 용기있게 돌진하겠나이다. 풍성히 부어 주시옵소서.

 

 

75장  동방의 영광

(1972년 3월 1일 4시 45분)

 

   1.  순교응답 내려온다 우리게 내려온다

       낙심말고 일어나라 권리 행사로다

       눈물흘려 기도하던 성도의 소원 이루어진다            

 

       < 후렴 >

       영광이라 동방의영광 세계를 밝히는 말씀의 영광

       이 빛을 따라 오는자 살리로다 열방의 재물

       동방에 오니 가련한 민족 하나님 자랑하리

 

   2.  북방세력 무너진다 우리의 승리로다

       북진하자 용사들아 완전 승리로다

       억울하게 짓밟히던 가련한 양떼 구원해주자

 

   3.  증인권세 승리하리 위에서 오는역사

       인간들이 못당하리 짐승 사상망해

       후회막심 하리로다 헛꿈을 꾸던 원수들이라

 

   4.  아름답다 금수강산 억울한 피가 묻어

       슬픈 소리 있었더니 승리의 노래를

       길이길이 부르리라 승리의 용사 함께 부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