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앙 논 설

         

   [1 ~ 33] [34 ~ 63] [64 ~ 96] [97 ~ 126]

(1970년 7월호)

1. 70년부터 기독교의 나아가야 할 방향

2. 기독교 통일의 전망을 말한다

3. 시국 난제 해결은 무엇으로 될 것인가에 대하여

4. 공산 청년과 기독 청년에 대하여

5. 촛대 교회 목회자에 대하여

6. 촛대 교회 주일학교 선생에 대하여

7. 한국 교회의 사명에 대하여

8. 변화 성도가 일어날 때는 왔다

 

(1970년 8월호)

9. 주일 예배에 대하여

10. 평화주의에 대하여

11. 기독교 부흥 운동에 관하여

12. 시대적인 설교에 대하여

13. 자녀 교육에 대하여

※ 변화성도의 교리신조

 

(1970년 9월호)

14. 인심 악화와 가정 문제

15. 불가피한 환란에 대하여

16. 거짓 많은 세상에 양심 바른 사람

17. 숨은 종의 기도

18. 생활 난제 해결에 대하여

 

(1970년 10월호)

19. 영계 혼란을 벗어난 말씀의 종

20. 영계 혼란을 수습할 길은 무엇인가

21. 반공 투쟁과 종교인

22. 과학 발전과 기독교의 사명

23. 근심 많은 성도의 가정

 

(1970년 11월호)

24. 인생과 종교에 대하여

25. 인생의 두 가지 노선에 대하여

26. 탈선된 종교 사상은 무엇인가

27. 갈팡질팡 하는 사람이 많은 세상

28. 종교가 부패되는 원인에 대하여

 

(1970년 12월호)

29. 가련한 양떼를 살리는 길에 대하여

30. 전쟁이냐 평화이냐에 대하여

31. 신앙의 정로는 하나 뿐이다

32. 어려운 일과 쉬운 일에 대하여

33. 인생 중에 제일 높은 사람

 

 

1. 70년부터 기독교의 나아가야 할 방향

 

  우리는 20세기 반기가 지난 60년부터 70년까지 시대적인 큰 변동을 가져오는데는 이 날까지의 과학 발전은 인류의 생활에 큰 발전을 가져오는 과학이었지마는 60년부터 70년까지의 과학 발전은 세계 인류를 큰 공포에 떨어뜨릴 불안을 가져오는 사회를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이 날까지의 전쟁은 기름진 땅덩어리를 점령해보려는 야욕을 가진 전쟁이어서 잃는 자는 슬퍼해도 점령하는 자는 세계에 영웅적인 기세를 날리며 강대국이라는 세력 아래서 그 나라 국민은 어디를 가나 모든 나라 사람에게 문화인이라 또는 강대한 국민이라는 이름 아래서 그때 그때에 세상의 향락을 누린 일도 없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금일에 와서 전쟁은 이러한 정치적인 소망은 없어지고 어떠하든지 싸우지 말고 나가 보자는 소위 평화 공존이라는 간판 밑에서 악질적인 야욕을 가진 공산 사상은 자기 때를 만난 듯이 세계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무대를 갖되 양피(羊皮) 낭심(狼心)의 위선자의 탈을 쓰고 거룩한 이름을 빌려 가지고 교회에까지 침투하는 위기를 만난 기독교는, 소위 평화공존이라는 것을 가지고 십자가의 사랑이라고 하는 껍데기를 쓰고, 세계 교회를 음녀화시키는 행동을 하고 나오는 거짓 선지들이 소위 통합이라는 문제를 걸고 진리 통합보다도 큰 교파가 자기의 교권 아래 하나가 되는 데는 성경은 십자가를 믿음으로 다 이루었으니 이제는 성경만 가지고는 기독교는 시대적인 사명을 다할 수 없다는 소리를 하면서 성경을 전부 과거로 돌리는 학설을 뻔뻔스럽게 쓰고 있다.

  그러나 참된 크리스천의 오메가의 역사는 세상 나라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는데는 계10:7, 11:15과 같이 된다는 것을 성경 본문주의로 들어가서 선지서의 목적을 바로 나가서 증거할 때가 왔다. 모든 선지는 다윗 왕국의 부패로 북방 앗수르와 바벨론에게 밟힐 때 그들은 눈물 흘려 경고의 나팔을 나가서 불게 될 때에 거짓 선지와 부패한 정권과 악화된 사회 사람은 참된 선지를 미친 사람으로 취급하고 가장 그 시대에 보조를 맞추어 나가는 거짓 선지라야 옳다고 인정하는 때에 참된 선지는 축출을 받고 멸시를 받고 심지어 죽이는 일까지 있었다.  

  그때 그들은 사람에게는 버림을 당했으나 하나님과 완전히 교통할 수 있는 영계에 들어가서 직접 하나님께로 오는 말씀을 받아서 기록할 때 목적이 원수를 갚아주고 너희를 통하여 새로운 왕국이 올 것을 묵시로 받아 기록할 때 그 왕국에 평화의 왕은 그리스도라는 것을 말할 때에 그리스도의 탄생과 십자가 부활, 승천, 성신 강림이 있되 이 역사는 세계적이라는 것을 말하고, 다음에 가서 구약 말기와 같이 종교 부패, 정치 부패, 인심 악화, 경제 혼란이 오는 동시에 북방으로부터 부패한 이스라엘을 짓밟는 환란이 올 것을 말하고, 북방에서 나오는 세력을 없애버리는 역사는 해 돋는 동방 땅 끝에서 나올 것을 말할 때에, 구약 종말에 바벨론을 친 고레스의 사실을 예를 들어서 말씀했던 것이다.

  이 때에 예루살렘이 복구된 사실을 들어서 성도의 나라가 영원히 이 땅에 이루어진다고 가르친 것이 성경에 기록한 인류 종말에 예언이 보였다.

  그러면 70년부터 우리 기독교는 과거의 케케묵은 정통 신학설 보다도 좀 더 진보적으로 나가는 심판의 다림줄의 변론이 있어야 될 것이며 은사에 날뛰던 사람들이 심(心)든 사람과 같이 침착해지는 동시에 성경의 완전 지식을 배워야 할 것이며 소위 통합이라는 간판을 가지고 들어온 거짓 선지의 변론을 때려 부수는 완전 변론이 충분히 나타나서 말씀 권세의 역사로 교회를 개혁시키는 촛대교회 운동이 일어나지 않고는 도저히 기독교는 이제부터 큰 위기를 만났다고 보게 된다.

  그러므로 각 교파에 있는 참된 크리스천은 하나같이 각성을 받고 시대적인 변론에 바로 서서 봉홧불을 높이 드는 일이 있어야만 될 때가 70년이라고 보며, 이 해에 일어나야만 교회는 산다고 확실히 깨닫는 마음으로 간곡한 부탁을 하는 바이다.

 

 

2. 기독교 통일의 전망을 말한다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기독교는 통일될 것이냐 할 것은 어느 교파를 막론하고 하나같이 관심을 두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교파가 독자적인 세계 통일의 전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망상에 불과한 교만일 것이다.

  기독교라는 것은 교파를 위한 기독교가 아니고 진리를 위하여 피 흘려 싸운 것이 역사인 동시에 미래가 될 것이다. 그러면 우리 기독교는 마지막 싸움을 어떠한 진리로 싸워야 할 것이냐 하는 것을 깊이 깨닫지 못한다면 진리가 아닌 미로에서 허덕이다가 한 일 없이 끝을 맺게 된다면 주의 날에 설 적에 주님은 그들을 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이 다시 올 때에 그날은 용서의 날이 아니요 진노의 날이기 때문이다. 진노의 날에 기독교는 어떻게 통일이 될 것이냐 하는 것은 성서를 통하여서 분명히 알 수가 있다.

  진노라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라도 그날에 관한 법칙이 되는 말씀을 안 지키면 아무리 사랑하는 자라도 용서할 수가 없다는 것이 하나님의 법이기 때문이다. 죄를 모르는 에덴 동산에서도 말씀을 지키지 않을 때에 용서 없이 쫓아내서 죽게 했거든 소위 하나님의 교회라 하는 간판을 가지고 말씀을 밝히지도 않고 지키려고 힘쓰지도 않고 덮어놓고 믿으면 된다는 망설을 하고 있는 형편을 우리가 보게 된다. 덮어놓고 믿음으로만 된다는 미명하에서는 얼마든지 사단은 교회를 침투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왜냐 할 때에 진노의 날이라는 것은 마귀 흑암을 개방시키어 누구든지 말씀을 가하고 감하는 자가 있다면 다 유혹을 주라는 것이 진노의 날이 오는 때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마귀를 들어 쓰되 진리로 하나되게 하기 위한 목적에서 하나님은 마귀를 들어 쓴다고 봐야 한다. 이제 붉은 용과 붉은 짐승과 거짓 선지의 세력을 극도로 강하게 들어서 교회의 통일을 자동적으로 되도록 이루어 놓을 것이다.

  왜냐하면 알곡을 한데 모으기 위해서는 무서운 마귀 세력을 들어서 쭉정이를 다 골라내는 환란의 바람이 오게 하므로 남은 자만이 새 시대를 들어가는데는 남은 교회가 나오게 된다. 이것은 종말의 진리를 바로 알아서 바로 증거하고 지키는 자에게만 하나님은 역사하고 그 밖의 사람은 다 버리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말씀 중심에서 남은 종이 나오고 남은 교회가 나오고 남은 자를 들어서 역사 하는 종말의 역사가 크게 일어나고 주님은 다시 오실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통일을 위하여 사람의 어떤 방침이라는 것은 하등에 필요가 없고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분명히 바로 알아서 말씀 하나에서 종된 인격을 찾아내고 교회를 이루어 놓고 나갈 때에 이 사람들로 말미암아 남은 자가 되게 하는데는 이것만은 하나님께서 책임을 지고 싸워줄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를 바로 증거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역사하므로 만이 바로 알 수도 있고 증거할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나”라는 자체를 없애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생활에서만 그날 그날에 바로 움직인다면 하나님은 그 사람을 통하여 바른 진리를 증거하도록 하는 것도 하나님이요, 이런 사람을 들어서 승리하게 하는 것도 하나님이니 인간의 힘과 능은 하등에 필요가 없는 진노의 날에 기독교 통일을 이루게 되므로 기독교로 말미암아 새로운 시대를 이루게 될 것이다.

 

 

3. 시국 난제 해결은 무엇으로 될 것인가에 대하여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그 시대 사람에게 새로운 일을 나타낼 때는 인력으로 막을 수 없는 난국을 당하게 하고 사람으로서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가는 자가 있을 적에 그 사람을 들어서 난국을 돌파함으로써 시대 변천의 새로운 역사를 하게 하는 것이 인류역사의 뚜렷한 사실인 동시에 미래가 될 것이다.

  양심 시대가 언약 신앙 시대로 바뀌어지는 때에 양심을 지켜야 할 셋의 후손이 양심을 떠난 가인의 후손과 혼혈이 되어 나날이 양심을 떠난 사람이 양심을 지켜야 할 사람을 삼켜 버리는 난국을 당할 때에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난국을 해결할 수 없이 되었다. 그 때에 하나님이 노아에게 나타나서 물로 심판할 것을 명하고 방주 준비의 예언을 전하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끝까지 부패에 떨어져서 순종치 않을 때에 다 전멸을 당하고 8명만이 남은 사람으로 영원한 언약이 성립되는 시대를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언약 신앙 시대가 율법 시대로 들어갈 때에 언약을 받은 야곱의 12지파는 인력으로써 어찌할 수 없는 난국을 당하게 된 것은 할례 받지 못한 이방 민족이 할례를 받은 민족을 학살시키되 아들을 낳으면 죽이는 일까지 있었던 것이다. 이때에 인력으로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난국에서 여호와 불꽃 가운데 나타나 모세를 들어서 그 난국을 해결하고 홍해를 육지같이 건너서 메마른 사막에서 하늘로서 내리는 만나를 먹고 반석에서 터지는 생수를 먹고 나가서 율법 시대에 관한 법률을 하나님께로 받아서 율법적인 교회가 완전히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성전이 어려운 난국을 당하게 된 것은 성전의 권리를 거짓 선지들이 잡게 되고 참된 양심 있는 자들은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난국에 처한 것이 메시야 탄생이라는 것이다. 예루살렘 거리에 왕래하는 바리새교인은 다 양의 옷을 입고 이리의 마음을 품은 독사의 자식이라는 책망을 받게 될 때에 예루살렘 성전 안에 있는 무리들은 세상 죄를 걸머지고 온 메시야와 큰 원수가 되고 그 나라 정권 잡은 정객들이나 교권을 잡은 바리새인들이 다 메시야의 원수가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셔서 죽기까지 싸워야 될 일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이 부패된 종교를 신약에 성신 역사하는 신령한 교회로 이루는 은혜 시대가 올 때에 하나님은 큰 혁명을 일으키는 일을 할 때에 예루살렘 성전에는 저주를 내리고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는 불같은 성령을 부어 주게 되므로 율법적인 유대교가 복음적인 기독교와 큰 원수가 되는 대립이 되어 기독교는 세계적인 확장을 보게 되고 예루살렘 성전은 돌 한 개도 돌 위에 첩 놓이지 않고 무너지고 말았던 것이다.

  기독교는 세계 대 확장을 보게 된 금일에 기독교의 난국은 무엇이냐 할 때에 적 그리스도의 정권이 세계를 짓밟게 된 일, 거짓 선지자의 교권이 교회를 몽땅 삼키게 된 일, 세계 평화를 꿈꾸던 자들이 불가피 불바다가 되더라도 전쟁을 안 할 수 없게 된 일, 기독교 강단이 부패되어 가련한 양들이 다 피곤에 떨어지게 된 현실에 이 난국을 어떻게 돌파하느냐 하는 것이 제일 큰 문제인데 전무후무한 환란과 재앙이 있게 될 때에 전무후무한 역사는 기독교에 있을 것은 사실이다.

  그러면 기독교는 전무후무한 역사는 무엇이냐 하는 것을 우리는 성경에서 바로 알아야 되는 동시에 그 역사를 하나님께로 받아서 난국을 돌파하고 나가는 종이되어야만 될 것이니 이러한 종이되는 데에는 다음과 같은 요소가 있다.

 

  1. 모든 난제 해결은 말씀이 이루어지는데 있다는 것을 알고 조금도 말씀에 가감 없는 완전무장을 받아 완전변론 역사로 마귀 흑암을 물리치는 일일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말씀을 바로 읽고 듣고 지키느냐 하는 것을 시험해 보기 위하여 마귀 흑암을 개방시킨 것이니 말씀 권세의 종이될 때에 흑암 중에서 남은 종이될 것이다.

  2. 모든 난제는 하나님의 보호로 해결될 것이니 어떠한 교회가 남은 교회가 된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서 단체적으로 하나님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교회를 이루어 놓는 일이다. 하나님께서 앞으로 무서운 환란이 북방에서 오게 하는 것은 참된 교회만을 남겨 놓기 위한 방법이니 촛대 교회가 될 때에 그 교회는 절대 피해를 당하지 않도록 보호하는 것이 예언이 이루어지는 역사라는 것이다.

  3. 어떠한 방법으로 하나님은 보호한다는 진리를 믿고 순종하는 것밖에는 없다. 그러므로 노아의 가정이 순종할 때에 난국을 돌파한 것같이 말세에 예언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만이 가정적으로 자손만대에 축복을 받게 되는 지상 왕국이 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가 이 난국을 돌파하는 것은 계시록과 선지서를 통하여서만이 완전 승리의 길을 가게 되는 동시에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신약의 4복음서와 편지서는 씨를 뿌리는데 필요한 복음이라면 계시록과 선지서의 전체는 종말에 난국을 돌파하고 새 시대에 들어가는데 필요한 복음이 되는 것이다.

 

 

4. 공산 청년과 기독 청년에 대하여

 

  우리는 청년이 없이 사회나 교회나 새로운 발전을 가져올 수 없다는 것은 일반이 아는 상식이다. 그러나 청년을 바로 지도하고 못하는 데에 따라서 사회의 흥망과 교회의 흥망이 좌우될 것이다. 지금 소위 세계 공산화를 꿈꾸는 공산국가는 청년을 기를 때에 공산사상을 넣어서 일종의 자기 한 도구로 삼는 수법을 쓰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허위 선전이 청년을 기르는데 교재가 된다.

  이것은 청년을 양심을 길러주고 그의 인격을 길러준다는 것보다도 짐승을 기르는 사람이 짐승을 길들여 부리듯이 사람을 자기의 도구로 쓰기 위한 목적에서 마비적인 상태에서 날뛰게 만드는 폐단을 보게 된다. 사람이라는 것은 거짓이 없는 진리를 받아서 진정한 자유에서 자유로운 활동을 할 수 있는 세계를 이루는 것이 인생의 가치를 발휘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자유를 악용시켜 한 정당 아래 국한된 자유로 공산 청년을 기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둘도 모르고 공산당 하나만 아는 좁은 범위하에서 망령된 행동을 하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아무 것도 모르고 세계를 공산화시킨다는 그 욕망을 길러 놓고 아무 것도 모르는 허위 선전의 변론이 그들의 한 표제가 되게 만들어서 내세우는 것인데 이 청년들은 죽음을 피할 수 없이 나가야 된다.

  다시 말하면 그들의 죽음이라는 것은 위에서 죽인다는 공포 속에 떨면서 나가야 된다. 마치 짐승을 때릴 때에 짐승이 뛰는 것이 자기 스스로가 아니고 무조건 아파서 뛰듯이 공산 청년은 아무런 소망 없이 소위 최고인민위원회라는 그 기관에 복종해야만 되는 한 무리가 되고 마는 것이다. 이들이 강해지는 것은 완전한 인격에서가 아니고 악화된 사상에서 마귀 도구가 되는 것뿐이다.

  그러나 기독 청년이라는 것은 어떻게 하여야 되느냐에 대하여 말한다. 지금 기독교 안에 청년들이 아무런 뚜렷한 진리를 못 가지고 기독교를 한 오락적인 취미에 드나들고 있는 무리도 있고 또는 한 수양적인 문화라는 정신에서 자기의 어떤 명예를 내세우는 자는 야욕적인 허영에서 날뛰는 자도 있고 또는 신비를 체험한 청년으로 신비의 세계에서 청년의 인격을 상실하고 공연히 쓸데없는 시간을 보내면서 광적인 신앙 노선을 걷는 자도 있다. 또는 정통이라는 관념을 신학적으로 받아 가지고 자기 외에는 정통이 없다는 좁은 길에서 바짝 마른 나무같이 자기가 배운 범위하에서 고집만 부리는 폐단도 있다.

  우리는 이제 기독 청년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우리는 이 시기를 역사적인 신앙 체계에서 미래를 바로 알고 이 시대에 적합한 기독 청년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 시대 청년들에게 그 시대의 비밀을 바로 알게 하여서 진리의 도구로 쓰시는 하나님이니 우리가 이 시국에 대한 진리를 성서에서 바로 찾아 진리가 사상 정신이 되어 진리 안에서 새로운 역사를 인격적으로 받아 이 시대에 해야 할 일을 해야 된다고 본다.

 

  2. 기독 청년은 공산 청년과 같이 도구가 되면 이것은 아무런 가치 없는 일이 될 것이니 각자 각자가 하나님께로부터 지혜를 받고 총명을 받아 바로 보고, 바로 듣고, 바로 말할 수 있는 명철한 사람이 되되 인간 과학을 초월한 하나님의 지혜와 총명의 신을 받아 시대에 따라 움직여 할 일이 무엇인 것을 스스로 분별할 수 있는 영적 발전을 소유하여 영의 사람으로 움직이는 활동이 있어야 될 것이다.

 

  3. 지금은 천당을 목적한 청년들이 아니고 우리가 난국을 돌파하고 넘으면 어떠한 시대가 온다는 것을 계시록과 선지서를 통하여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의 대적인 공산 청년은 성서에 입각하여 어떠한 노선에서 허덕이고 있다는 것을 바로 알아 그 청년들의 결말이 성서적으로 무엇이라는 것을 아는 지식의 사람이 되어야 된다.

  왜냐 할 때에 공산당이라는 것은 심판기에 한 마귀의 도구로 쓰여지는 것뿐이고 아무리 그들이 강하다 하여도 기독 청년 앞에 전멸된다는 진리를 성서에서 바로 알아 나의 승리는 여호와께 있다는 진리를 완전히 믿는 동시에 진리대로 오는 역사를 받아야 될 것이다.

 

  4. 하나님의 모략이 무엇인 것을 알아서 하나님의 모략적인 방법에서 아무리 난관이 와도 난관은 오히려 여호와의 영광을 보게 되는 기회라는 것을 분명히 믿고 과거에 하나님의 사람들이 역사적으로 내려온 일은 우리에게 될 표적이라는 것을 알고 강하게 나가야만 될 것이다.

 

  5. 가장 행복한 자는 기독 청년인 것을 알고 하나님의 축복을 목적하고 싸우는 야곱적인 청년이 되어야 될 것이다.

 

 

5. 촛대교회 목회자에 대하여

 

  촛대교회라는 것은 흑암이 온 땅을 덮을 때에 빛의 등대가 되는 교회를 가르친 것이니, 촛대교회의 강단은 마귀의 흑암을 뚫고 나가는 교회를 말한다. 이날까지 교회는 원죄와 자범죄로 흑암의 권세 잡은 마귀 지배를 받던 영들을 중생시켜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을 목적 둔 것이요, 촛대교회는 마귀가 죄가 없는 자라도 흑암으로 덮고 나올 수 있는 권리를 받고 나오는 때이다. 이것이 마지막 인간 종말의 영계라는 것이다.

  에덴 동산의 아담 하와가 죄가 없어도 마귀로 미혹을 시켜 본 일은 그 미혹을 이기면 네 몸이 영생을 하고 이기지 못하면 네 몸이 죽는다는 법을 놓고 시험해 본 것이다. 그와 같이 살아서 새 시대에 가는 에덴 축복 받을 하나님의 자녀는 다시 한번 마귀 흑암으로 미혹을 시켜 보는 시기를 인류 종말의 세계를 덮는 흑암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촛대교회 목회자는 말씀이 완전히 밝아서 강단에서 예배를 인도할 때 한마디 말도 혼선이 없는 변론으로 증거하되 흑암의 세력이 물러가도록 하는 말씀 권세가 있어야만 된다. 말씀 권세라는 것은 하나님 말씀의 비밀을 정확히 증거할 때 하나님의 권세 역사가 그 말씀을 통하여 같이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촛대교회는 속죄 구령의 진리를 중심한 것이 아니고 그 몸이 살아서 새 시대를 정복하는 목적을 두고 움직이는 진리 운동이니 만큼 이 진리에 조금도 혼선이 없는 자가되어야만 하나님은 그 교회에 역사를 내리므로 재앙이 들어오지 못하는 교회가 된다. 다음은 자신이 변화성도의 인격을 하나님께로 받으므로 변화 성결이라는 체험을 가지는 동시에 아무런 일이라도 거기에 압력을 받지 않는 인격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은 은사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권세 새 힘으로 이루어지는 인격이니 변화성도의 인격을 말한다. 누구든지 사단의 압력을 받는 인격이라면 도저히 촛대 교회의 목회를 못할 것은 흑암 중에 남은 교회를 일으킬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은혜시대에는 중생을 받은 자라면 죽은 영들이 살아나는 은혜 역사를 할 수 있되 은혜를 받은 교회를 흑암으로 까불어보는 때이니 만큼 자신이 흑암을 뚫고 나가는 자격을 받는 자가돼야만 주님 올 때까지 흑암 중에서 교회를 지켜 나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촛대교회 목회자는 언제나 쉬지 않고 노력할 수 있는 영력을 받아야만 된다. 왜냐하면 전쟁이 나는 그 때에 군대가 쉴 수 없이 맘을 놓지 못하고 싸울 수 있는 인내력이 있어야만 자격이 있는 것과 같이 마지막 환란 때 싸움에 승리하는 용사적인 영계에 들어간 자라야 남은 촛대교회의 종이될 수가 있다.

  그러므로 계시록에 촛대교회 사자는 믿음으로 된다는 말이 없이 이겨야만 된다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영혼 구원은 믿음에 있고 환란 가운데 남은 자가되는 것은 이기는 자만이 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촛대교회 사자에게 준 말씀대로 읽고 듣고 지킬 말씀은 계시록의 다림줄의 진리요 선지서일 것이다. 만일 이러한 일이 없다면 아무런 열매 없는 나무가 되므로 찍힘을 당하는 나무가 될 것이다.

 

 

6. 촛대교회 주일학교 선생에 대하여

 

  촛대교회 주일 학교라는 것은 그 어린이들을 새 시대의 종족으로 되게 하는 목적을 두고 움직이는 기관이다. 그러므로 선생이 언제나 어린이들에게 압력이 되는 죽음이라는 말을 무서워하지 않도록 절대 원수를 무서워하지 않도록 강한 정신을 넣어주는데 목적을 두어야 한다. 철두철미한 사상이 박히도록 훈련을 주되 너희는 절대로 재앙이 와도 죽지 않는다는 신앙심을 길러주는데서 그들이 말씀을 들을 때 씩씩한 용기가 생기도록 활발성이 있게 인도해야 된다.

  쓸데없는 동화를 엄금한다. 언제나 시국을 잘 말해주면서 공산당의 나쁜 점이 무엇이라는 것과 이것은 마귀의 도구라는 것과 이 앞에 조금이라도 굴복하면 하나님이 학생들을 미워하고 절대로 보호하지 않는다는 것을 철저히 말할 때에 언제나 소망이 있는 예언서의 간단한 성경 절수를 거듭 읽어가면서 그 예언의 말씀이 어린이들에게 마음 판에 박히도록 가르치는데 전력을 두어야 한다.

  이렇게 하므로 학생들이 학교에 가서 배우는 과학보다도 하나님 말씀이 귀하다는 생각이 나도록 할 때에 과학적 전쟁으로 사람이 죽게 되는 일을 말하면서 성경과 맞추어서 말할 때에 과학은 이렇게 사람을 죽이지만 우리 주일 학교에서 배우는 진리는 하나님 말씀인데 이러한 가운데서도 학생들을 살려주는 말씀이 얼마나 가치가 있고 귀하냐 하는 정신을 넣어주어서 학생들이 과학을 배우는 것보다도 하나님 말씀을 배우는 일이 더 귀하다고 생각이 나서 주일학교를 세상 학교보다도 더 훌륭하게 생각이 나도록 정신을 넣어주어야 한다.

  그리고 선생은 언제나 학생들을 가르칠 때에 묻고 대답을 시켜 가면서 그들에게 만족을 주도록 진리를 넣어 주어야 한다. 언제나 학생들에게 새 노래를 부르게 할 때 그 마디마디 가사를 가지고 설교를 중심하여 뜻을 말할 때는 반드시 그 축복을 받는 강한 호소를 시키면서 인도해야만 된다.

  주일학교에 오는 학생들이 재미있게 이야기를 듣는 데나 중점을 두지 않고 그 말씀대로 그 시간 시간 축복을 받고 간다는 생각이 불타도록 만들어서 학생들의 힘을 강하게 길러주어야 할 것이다. 학생들에게 사단의 행동이 강하게 올 것이니 주일 학교 선생은 학생들을 끼고 들어오는 마귀 압력에 눌려서는 아니 된다.

  그러므로 선생님이 권세를 받는 자가되어야 학생을 끼고 들어오는 마귀 흑암이 벗어질 때 그들은 체험을 받는 일이 각각 있게 되므로 무신론 사상이 학생에게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는 일이 있어야 한다.

 

 

7. 한국 교회의 사명에 대하여

 

  우리는 셈의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한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왜냐하면 금일에 셈의 장막은 다 교회가 황폐되고 남한 반도를 내놓은 것은 여호와의 영광이 이 땅에 나타날 징조라고 보게 된다. 왜냐할 때에 셈의 하나님은 셈의 장막에 올 환란과 또는 동방 땅 끝에서 일어날 역사를 중심하여 하나같이 묵시를 보인 것이다.

  오늘에 셈의 장막에 억울한 피가 호소하는 그 응답은 야벳의 장막으로 올 것이 아니고 무너지다 남은 우리 남한 교회에 나릴 것이니 이제부터 한국 교회는 교파를 초월한 진리 통합에 목적을 두고 남한 교회에 보내신 심판의 다림줄을 굳게 잡고 나서야 할 것이다.

  우리가 오는 복을 받아야 할 것이니 어찌하여 이 나라에 임한 진리를 자세히 알아도 보지 않고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너무나 경솔하고 망령된 일이 아닐 수 없다. 한국의 정통 신학자들이 심지어 천년 왕국이 없다고 주장해도 이것은 정통 신학이라고 하면서 천년 왕국에 들어갈 참된 진리가 한국 교단에 나타난 것은 어찌 조금인들 경홀히 볼 수가 있는가.

  만일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뜻을 이루기 위하여 역사하는 데도 불구하고 대적한다는 것은 큰 막대기를 맞을 우려가 있는 것이니 하나님의 징계가 다시 올까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눈물 흘리며 종들이 기도할 일이요 남의 말에 동요 받는 경솔한 자 되지 말고 좀 더 무겁게 생각하고 이 나라에 나타난 말세 비밀의 진리를 완전히 상고해 볼 필요가 노회와 총회의 회원들까지도 있다고 본다.

  한국 교회가 W.C.C.에 정식 가입을 했다는 것은 한국 교회의 사명이 아니다. 우리는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할 남한 교회가 협상적인 노선에 발을 들여놓는다면 셈의 장막에서 피 흘린 종들의 피 값을 어찌할 것인가? 쓸데없는 일에 시간 보내지 말고 해야 할 일을 시간을 아껴가며 하는 한국 교회가 되기를 바란다.

  우리는 심령 부흥회로 끝을 맺는 사명이 아니요, 세계를 깨우치는 다시 예언의 말씀으로 나서야 할 사명이 한국 교회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8. 변화성도가 일어날 때는 왔다.

 

  기독교는 변화성도가 단결하여서 일어나야 할 때는 오늘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모든 선지는 하나같이 묵시를 볼 때에 전 세계 인류에게 복음이 전파된 다음에 북방으로부터 앗수르와 바벨론적인 세력이 중동을 중심하여 남침하는 환란이 올 때에 인력으로 막을 수가 없으나 변화성도가 일어남으로 각 나라의 남은 자로 말미암아 북방이 망하게 되고 새로운 시대가 온다고 하나같이 묵시를 보았다.

  극동 난제가 해결될 일은 변화 승천할 종들이 엘리야 모세같이 역사하는 일이 있으므로 동방 난제가 해결될 것을 계시록과 선지서에 가르쳤으니 우리 기독교는 천당을 목적하고 싸울 때가 아니고 북방 세력이 무너지고 새 시대가 올 것을 목적하고 싸워야 될 것이다.

  변화성도가 전할 말씀은 계시록과 선지서이니 이것을 전하지 않고는 멸공 운동을 할 수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진리 없는 멸공이라는 것은 힘줄 없는 지체 같아서 아무런 열매가 없을 것이다.

  멸공이라는 것은 자본주의적인 정책으로 이긴다고 성경은 가르치지 않았고 종말에 진리 운동이 일어나서 진리로써 북방을 대적할 때에 하나님은 진리대로 북방을 때려 부수고 진리대로 보호하고 진리대로 새 시대가 올 것을 가르쳤다. 그러므로 공산당의 허위 선전에 속지 않게 하는 것은 변화성도가 완전 변론의 진리를 가지고 공산당의 정책과 사상과 또는 멸망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성경에서 찾아 들고 나서야 할 때이다.

  오늘에 북방 세력이 강해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변화성도에게 권세를 주어서 북방을 치게 하고 하나님이 누구 신지를 세상이 알게 하는 동시에 큰 회개 운동이 일어남으로 많은 백성이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새로운 시대에 들어가는데는 북방 세력을 없애는 동시에 그를 용납하던 자 까지도 없앤다는 것이 기독교 성경의 종말론이니 이 진리는 변화성도가 싸워야 할 사명이며 받아야 될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9. 주일 예배에 대하여

 

  1. 우리는 주일날을 맞이할 때 율법적인 안식의 날로 지킨다는 것은 합당하지 않는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율법적인 법에 의해서 주일 날 역사하는 것이 아니고 성신의 법에 의하여 역사하는 때에 주일을 지키는 자가 율법에 의하여 그 날을 지킨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폐단이 있다.

  1) 억지라는 것이 들어가는 폐단이 있다. 언제나 예배하는 자는 성령의 은총 속에 잠겨야만 되는 것인데 율법을 따라서 그 날을 지킬 때에 하나님은 역사하지 않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억지라는 것이 들어간다.

  2) 하루를 쉬겠다는 정신에서 아무런 힘을 내지 않고 육의 평안을 목적 두고 나갈 때에 영적에 대한 간절한 마음조차 식어지고 마는 폐단이 있다. 그렇게 되면 주일을 지키되 자기 육체의 안식을 위하여 쉬는 날이 되고 만다면 하나님께 희생의 제물이 되는 제사가 되지 않고 예배는 형식에 따라서 잠깐만 드리는 날이 될 것이다.

  3) 주의 날을 하루 쉬는 날로만 생각이 들어가면 오락으로 흐르는 폐단이 있게 된다. 사업에 피곤하던 사람들이 한번 오락을 할 때에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목적하고 주일날을 하루 재미있게 쉬는 날이 되면 교회는 주일이 오락화되고 예배는 신령한 기분을 잃어버리게 된다.

 

  2. 성신의 법으로 지키는 날이 되어야 한다. 성신의 법으로 지킬 때에 신령한 안식의 축복의 날이 되는데는 다음과 같이 해야 한다.

  1) 모든 사업을 중지하는 것은 율법을 따라 하지 않고 성신의 법에 의하여 그날을 충만한 은혜를 받는데 전력을 두는 날로 삼아야 된다. 왜냐하면 모든 교인들이 직장이나 농장에 나가서 신령한 것을 접촉하는 시간이 없고 육의 일만 접촉할 때에 그 영들이 곤핍을 느끼고 그 몸도 육의 활동만 했으므로 신령한 은혜 속에 잠겨질 적에 영도 새로워지고 몸도 성령의 은총 속에서 피곤이 없어지는 자리에 들어가야만 신령하게 지키는 안식이 될 것이다. 이렇게 하려면 교인들이 세상의 일을 잊으리 만큼 새로운 감화를 받고 말씀을 받아야만 된다.

  2) 성심 성의를 다해야 된다. 아침부터 모든 교인들은 신령한 은혜를 갈망하는 마음에서 교회에 출석할 때에 예배 시간 전 한시간 정도나 30분전에 도착해서 합심하여 부르짖는 기도를 하고 호소하는 성가를 불러서 하나님과 나 사이에 완전한 교통이 되는 세계에 들어가도록 노력한 다음에 정식 대 예배를 드려야만 될 것이다.

  예배라는 것은 준비가 없이 예배가 될 수 없으니 언제나 교역자는 적어도 한시간이나 30분전에 강단에 나가서 교인들을 영적으로 움직이는 성가를 인도하고 합심 호소를 하도록 인도하는 일이 있은 다음에 대 예배를 인도하여야 될 것이다. 교인들이 예배 시간을 기다리고 집에 있다든지 오락을 하고 있다면 벌써 죄를 짓고 들어온 것이니 예배가 될 수 없다. 시간이 오기를 기다리고 앉아 있다는 것은 시간이나 지키자는 습관의 예배가 된다.

  그러므로 예배 시간을 기다리고 공연히 세상 말을 하고 앉은 시간에 벌써 예배에 성심이 없는 사람이 되니 아무런 신령한 은혜가 올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 시간 전에 모여서 부르짖는 안타까운 심령을 가지고 몸부림치며 애쓰는 마음이 있어서 간절히 호소하는 일이 있은 다음에 예배를 드리도록 하여야 될 것이다.

  3) 예배는 의식에 매이지 말고 의식을 초월하여 성신의 인도에서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교인들은 예배 시간을 지키는데서 머무르지 말고 은혜를 흡족히 받는데 맛을 얻도록 할 때에 예배하는 자들은 그 은혜를 갈망해서 교회를 그리워하며 미리 모여드는 일이 있어야 된다.

  4) 새로운 말씀이 영적으로 내려야 한다. 강단에 선 사람이 새로이 위에서 오는 말을 하지 않고 냉냉하게 자기가 스스로 깊이 연구했던 것을 말하는 정도는 생명의 꼴이 되지 못하고 마른 꼴이 될 것이다. 언제나 강단은 하늘 보좌와 직접으로 교통을 받는 강단이 되어 그날 그날에 모인 사람에게 만족을 주는 말씀이 내려야 될 것이다.

  이렇게 되려면 설교자는 설교를 준비하는데 목적을 두지 말고 자신이 완전히 설교자의 인격을 하나님께 찾고 성령에 이끌려서 말할 수 있는 데에 들어가 하나님의 대행자가 되는 것을 목적하고 항상 깊은 기도가 있어야 될 것이다. 설교가 하나님께서 말하게 하는 설교가 되기 위해서 자신이 완전히 성령님께 사로잡히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이 있어야 될 것이다. 이렇게 되므로 주일예배는 교인들이 1주일간 직장에 나가서 승리할 수 있는 새로움을 주는 거룩한 시간이 될 것이다.

 

 

10. 평화주의에 대하여  

 

  평화라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는 평화도 있고 기뻐하지 않는 평화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금일에 평화주의라는 간판 밑에서 마귀는 다음과 같은 일을 하고 있다.

  1. 기독교를 망치자는 목적을 두고 들어오는 평화가 있으니 금일에 사상전을 앞에 놓고 모든 난제는 사상 문제에서 좌우되는 것이다. 반 기독적인 사상이라는 것은 마귀의 쑥물이요 기독교의 사상은 하나님의 생수인데 쑥물과 생수가 합할 때에 자동적으로 생수는 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상전에 있어서 공산주의 사상과 기독교 사상이 서로 이해하고 합의를 본다는 것은 백전백패하는 일이 기독교에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진실이라는 것이 없다면 즉시에 망하는 것이다.

  공산당은 레닌주의의 원 사상은 기만적인 정책을 쓰라는 것인데 기만적인 정책을 쓰는 사상과 조금도 거짓이 없는 진실을 가져야 될 기독교 사상과에 서로 합의를 본다는 것은 언제나 기만 정책의 이용물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금일에 평화주의라는 간판 밑에서 공산당의 사상을 회개시키는 것이 없이 그 사상을 용납하고 서로 합의를 본다는 것은 거짓 선지의 미혹이 된다.

 

  2. 소위 남을 살린다는 간판 밑에서 평화를 말하는 것이니 이것은 불의한 세력을 세상에서 없애 버리는 것이 하나님의 심판인데 불의한 세력과 싸우지 않고 평화를 보자는 것은 음녀적인 행동이니 심판 날에 망할 바벨론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싸움이라는 것은 한 주권 쟁탈이나 또는 생존 경쟁을 위하여 싸운다는 것보다도 하나님께서 마귀 세력을 때려 부수는 종말의 심판을 믿을진대는 하나님의 심판의 다림줄에 의하여 외칠 말은 다음과 같다.

  마귀 세력이 성할 때는 심판기라는 것이 기독교 종말관이니 모든 선지는 하나같이 새로운 시대가 올 때는 북방의 악자 세력이 극도로 강해져서 인력으로 당할 수 없을 때에 하나님께서 일어나 북방을 치고 새로운 시대를 이루는 데는 북방 악의 세력과 타협하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싸워 나가던 자에게 새 땅 축복이 오고 그밖에 북방 세력과 타협하던 무리는 전부 심판의 재앙으로 없애 버린다는 것이 모든 선지가 본 묵시인 동시에 계시록이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확실히 믿는 기독 신앙 양심에서 그 말씀을 따라 순종할 때에 조금도 악의 세력을 그냥 두고 평화를 보존한다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니 술취한 자의 행동이 되고 말 것이다.

 

  3. 어리석은 자의 행동은 현실주의이다. 왜냐하면 사람이라는 것은 현실을 위해 사는 하루살이가 아니고 현실에서 미래를 내다보는 것이 인생의 참된 가치라는 것이다. 기독교의 진리는 현실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고 현실을 바로 분별하도록 가르친 동시에 현실 다음 미래는 무엇이라는 것을 가르친 것이 기독교의 진리라는 것이다. 우리는 선지서나 계시록을 읽어 볼 때에 금일의 현실을 분명히 파악할 수 있고 미래에 관한 소망을 햇빛같이 내다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소위 세속화 신학이라는 것이 나온다는 것은 기독교의 수치가 아닐 수 없다. 금일에 과학 문명이 최고도로 발달한 이때에 기독교가 과학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고 과학 문명이 성경을 바로 알게 하는 시대적인 증거가 된다. 왜냐하면 모든 선지는 인류 종말에 과학 문명이 어디까지 발전할 것을 미리 말했던 것이다. 인간의 지혜와 지식이 별세계까지 침범할 때는 심판기라는 것을 오바댜 선지는 묵시로 보았던 것이다.

  금일에 세계 인류가 30분만에 전멸을 당하는 과학적인 무기가 나온 것은 성경에 인류 종말에 악자의 세력이 없어지는 일이 이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말했고 다음에는 새 시대가 온다고 말했으니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신앙 양심이라면 금일에 인위적인 방법으로 공산당과 평화를 누려보자는 것은 죽어도 허락할 수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진노의 날에 망할 자는 붉은 짐승이요, 그의 표를 받은 자라고 가르친 계시록을 보아서 조금도 기독교 사상을 가진 자라면 붉은 짐승의 세력을 무서워 할 것도 없고 그와 타협할 것도 없고 우리는 하나님이 보호 하사 우리 나라 만세라는 진리 안에서 그날 그날에 올바른 정신과 사상 양심으로 충성을 다할 것뿐이다.

  참된 평화라는 것은 붉은 용, 짐승, 거짓 선지의 세력이 완전히 없어지므로 만이 온다는 것을 계시록은 가르쳤다. 우리는 오늘에 붉은 세력이 강하게 올라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세력을 잠깐 동안 높여서 참된 사상을 끝까지 지키는 자에게 참된 평화 왕국을 주기 위한 모략적인 방법이라고 보게 된다.

 

 

11. 기독교 부흥 운동에 관하여

 

  기독교는 큰 부흥을 일으키지 않으면 안될 때가 왔다고 본다. 만일 현실 상태로 나간다면 그야말로 진노의 막대기를 맞을 수밖에 없는 현실에 처하였다고 본다. 금일에 기독교가 위기에 처한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처음 사랑을 버렸다

  처음 사랑이라는 것은 인간으로 오는 사랑이 아니고 하늘로부터 오는 사랑인데 예루살렘 다락방 교회에 성령의 사랑의 불길이 내릴 적에 아무리 핍박이 오고 환란이 와도 조금도 꺼지지 않고 그 불은 맹렬히 붙었던 것이다. 오늘의 기독교가 주의 종들이 눈물을 흘려서 부르짖고 외치는 일은 인간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위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사랑의 불을 받아야만 될 것이다.

  어찌하여 이렇게 식었느냐에 대하여는 성서의 예언이 응하는 과정이라고 보게 된다. 마24:12을 보면 불법적인 교권이 강단을 좌우하고 교회를 움직일 적에 자연적으로 성령의 역사가 내리지를 않으니 사랑은 다 식어지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처음 사랑을 찾으려면 교회는 큰 혁신이 와야 할 것이다. 소위 불법적인 교권이 무너지는 역사가 와야 할 것이니 이것은 새로운 역사가 나와야 한다.

  새로운 역사라는 것은 현재에 진리의 잘못된 해석을 하는 지도자들이 하나같이 진리를 바로 해석할 수 있는 영계로 들어가서 종말관의 진리를 하나같이 들고 나서는 역사가 나타나므로 만이 하나님의 강한 역사가 7배 영감으로 오게 될 것이다.

 

  2. 말씀에 맛을 잃어버린 교회가 되었다

  계시록8장을 보면 셋째 천사가 나팔 불 때에 단물이 쑥물이 된다 했으니 이것은 기독교가 단물 같은 하나님 말씀을 잃어버리고 쑥물을 먹게 되는 위기를 보여 주었다.

  그러므로 말씀을 가지고 그 심령에 만족을 주게 하는 진리 운동이 일어나는 데는 이 시대에 여러 가지 난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진리 운동을 해야 할 것이다. 오늘에 아시아를 중심하여 적 그리스도적인 북방 세력이 큰 위협을 주고 음녀적인 협상주의가 교권을 쥐고 압력을 주며 인류 전멸이라는 무서운 전쟁이 공포를 주고 인심 악화로 오는 시련이 피곤을 주는 이때에 이들의 심령에 만족을 주는 진리는 무엇이냐는 것을 알아야 한다.

  죽어 천당이라는 목적을 둔 진리 운동을 전할 때는 지났다고 보아야 한다. 이때는 계시록과 선지서의 전체의 비밀을 가지고 이 시국을 바로 말해주며 앞으로 난제를 어떻게 해결한다는 하나님의 비밀이 있는 것을 햇빛같이 드러내 주는 진리 운동의 대 부흥단이 나와야 한다.

  다시 말하자면 은사로써 대 부흥단이 될 수 없고 시대적인 진리의 말씀으로 각성을 주는 데는 말씀 권세의 부흥단이 나와야 될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종말의 부흥은 환란과 재앙을 면코 새 시대에 들어가는 역사를 통하여 재림의 주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3. 교파심을 가진 것이 기독교의 큰 병적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지체가 똑같이 혈맥이 통하여야 되겠는데 이것이 막힌다면 몸은 병신이 될 것이다. 오늘의 기독교가 교파의 담을 막고 자기 교파만을 내세우는 야욕적 행동은 바리새교인에 불과한 행동이 될 것이다.

  한 때에 씨를 뿌리기 위하여 교파적인 행동을 한 일도 하나님의 한 방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교파를 이루기 위한 목적은 교파를 위한 교파가 아니고 그들이 십자가의 복음을 철저히 전해 보자는 마음이 불이 타서 전할 때에 특별한 역사가 있는 사람들이 나타나게 되니 부패한 자들이 그 종을 대적하려고 일어나매 자동적으로 갈라서는 일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교파라는 것은 루터 종교개혁부터 시작한 것이다. 루터 종교개혁이라는 것은 루터가 교파를 만드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고 로마교의 진리의 탈선된 모순을 고쳐야 된다는 진리를 가진 것 뿐이다. 그런데 교황이 루터를 축출하므로 자동적으로 신교가 교파를 구성하게 되었다. 그 후에 긴 시일이 흘러갈 때에 신교에서 신령한 사람이 많이 나오니 그때 그때에 신교 안에서 신령한 세계의 체험이 없는 사람들이 교권을 쥐고 신령한 은혜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배척할 때에 쫓겨남을 받은 자가 교파를 이루게 된 것이 금일에 와서 여러 가지 교파가 생겼는데 금일에 와서 교파심이란 것은 있을 수 없다.

  이제 부흥은 교파를 초월하여 통합으로 일어날 것인데 소위 합동이니 통합이니 하는 이것이 종말의 부흥 운동이 아니고 이제 최고의 영계를 가진 사람들이 나타나서 시국 난제를 해결할 진리를 들고 하늘 권세와 땅의 권세를 아울러 받고 나가는 일이 있으므로 만이 교파를 초월한 진리 통합의 촛대교회가 나오므로 계11:3 이하와 같이 될 것이다.

  이제 기독교 부흥이라는 것은 완전히 승리의 용사로 남은 종이 되어 북방 세력을 무찌르고 북진하기까지 강하게 역사하므로 철의 장막 속에 있는 양떼를 구출시키는 일이 있으므로 재림의 주를 맞이할 수 있는 큰 각성을 주게 될 것이다.

  교파라는 것은 어지러운 환란이 나올 때에는 자동적으로 무너질 것이로되 환란을 이기고 나가는 권세의 종들을 통하여 새로운 촛대교회가 나오므로 환란에서 시작되었던 기독교는 환란에서 끝을 맺을 것이다. 이렇게 되므로 이 교회로 말미암아 새로운 시대를 이룰 것이다. 왜냐하면 환란 가운데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남은 종, 남은 백성이 나오기 때문이다.

 

 

12. 시대적인 설교에 대하여

 

  금일에 많은 사람들이 시대적인 진리를 요구하고 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떠한 설교를 하여야 시대적인 설교가 될 것이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이 시대 사람의 심리를 맞추어 설교하는 것보다도 각성하고 일어나도록 해야 한다. 만일 어떤 종이 강단에 서서 과학적으로써 이 시대 사람을 끌어보려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왜냐하면 과학적인 시대에서 공포심을 갖고 피곤을 느끼고 불만을 가진 사람에게 과학을 초월한 데서 과학자가 깨닫고 돌아오는 설교가 있어야 된다. 과학을 초월한 지혜와 지식 능력과 권세를 가지고 말하는 설교가 있어야 된다.

  만일 금일에 설교자가 과학적 지혜와 지식에 국한된 설교를 하는 것은 과학자에게 아무런 감화를 줄 수 없고 과학자가 깨닫고 돌아 올 수 있는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으로 말해야 된다. 또는 과학의 힘에 국한된 활동을 하지 말고 과학의 힘을 초월한 권세와 능력으로 외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만일 금일에 기독교가 이러한 설교자가 없다면 아무런 열매 없는 교회가 되고 말 것이다.

 

  2. 금일에 사회 발전을 위하여 교회가 일하는 것보다도 교회가 현실에서 난관을 돌파할 수 있는 교회로 발전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만일 교회가 현실 상태에서 사회 발전을 위하여 일한다는 것은 교회가 교회 구실을 못하고 이 사회에 물들어서 신령한 교회가 망하게 되는 위기에 도착했다고 본다. 기독교는 공산당에게 끌리는 것이 교회가 아니고 공산당이 벌벌 떨면서 교회를 따라 들어오게 하는 것이 교회가 할 일이다. 모든 선지가 하나같이 예언하기를 종말에는 이방적인 세력이 떨면서 회개하고 들어오는 일이 있는 것이 종말의 역사라고 모든 선지는 하나 같이 묵시를 본 것이다.

  이렇게 되려면 교회는 전하는 말씀이 이 시대 사람에게 각성을 줄 경고의 나팔을 불어야 하고 소망이 되는 새 시대에 들어갈 진리를 햇빛같이 밝게 증거해 주는 촛대역사를 일으켜야 된다. 지금 설교자는 간증이나 예화를 할 때가 아니고 선지서의 본문대로 읽어서 이 시대 사람을 깨닫게 하고 확실한 소망을 넣어 주는 설교자가 되어야 한다.

 

  3. 인위적인 방법으로 하나가 되게 하는 것보다도 신의 완전 역사를 하나님께로 받아서 인간의 힘을 초월한 하나님의 역사로만이 하나가 될 것을 믿고 설교자는 자기의 지식이나 어떤 방법을 포기하고 신께서 기뻐하는 일에 순종하기 위하여 자신이 그 신 앞에 완전히 연합되어 모든 전부를 여호와의 신으로만 행하는 높은 영계로 들어가는데 전력을 두어야 한다.

  주님 재림할 때까지 남은 종으로 설교하려면 설교자 자체가 그 몸이 변화 승천할 수 있는 인격이 이루어진 자라야 재림 시까지 촛대교회를 지키는 자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설교하는 것만을 목적 두지 말고 자기 자신이 날마다 영계가 높은 수준에 올라가는 것을 목적하고 해산의 수고를 다해야 될 것이다. 금일에 교회가 잠자는 상태에 놓인 것은 설교자가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4. 죽어 천당가는 준비를 시키는 것보다도 환란과 재앙이 오더라도 남을 수 있는 사람을 만드는 일에 전력을 두어야 한다. 왜냐하면 현 시국은 무엇으로 보든지 심판기로 본다. 이 심판이라는 것은 지상 평화 왕국을 이루기 위한 심판이니 만큼 새 시대에 들어갈 수 있는 신앙 지식을 성경에서 가르치며 그 인격을 새 힘 역사에서 받도록 운동을 해야 된다. 은사로써는 환란 가운데 남을 자의 인격을 이룰 수 없고 권세 새 힘으로써 변화성도의 인격이 이루어질 것이니 자신이 권세 새 힘을 받고 강단에 서도록 하여야 될 것이다.

 

 

13. 자녀 교육에 대하여

 

  우리는 시대가 악하니 만큼 성도의 가정에 자녀 교육 문제가 극히 어려운 때가 왔다고 보게 된다. 성서의 말씀대로 어린아이가 어른을 대적하고 자녀가 부모를 대적한다는 말씀대로 오늘의 학생들은 극히 방탕에 떨어지는 부패한 사회를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자녀를 어떻게 교육할 것이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성서로 이 시대를 알게 하는 교훈이 있어야 된다

  왜냐하면 금일에 무신론 정책이 극도로 강하여짐에 따라서 학생들은 하나님이 있다는 사상보다도 없다는 사상에 기울어지는 때가 왔다. 그러므로 금일에 무신론 정책이 발전하여 올라가는 것을 성경을 들어 가지고 교훈하는 것이 있을 때에 학생들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므로 그 사상이 들어오지 않고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생기게 될 것이니 학생들에게 무신론 사상을 가진 북방 세력은 망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교훈이 철저히 있어야 될 것이다.

  왜냐하면 공산당은 어린 학생들에게 그 사상을 넣어 주는 일에 전력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을 기를 때에 어려서부터 사상을 바로 넣어 주는 것은 인격을 완성하는 요소가 되는 것이다.

 

  2. 자녀에게 실천으로 감화를 주는 일이 있어야 된다

  자녀의 마음 가운데 분명히 하나님은 우리 부모와 같이 한다는 생각이 있게 되어야 된다. 만일 하나님의 신의 증거가 그 학생들에게 없게 된다면 학생들은 부모의 말을 순종하지를 않는다. 그러므로 언제나 가정에서 가정 기도회가 있는 동시에 어린 자녀도 신의 감화를 받도록 노력해야 된다. 만일 부모가 자녀에게 신의 감화로써 교훈하는 일이 없이는 자녀에게 사단은 더 역사 한다.

  그러므로 부모는 항상 자녀를 영적으로 움직이는 일에 전력을 두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되려면 자신이 신령한 세계에서 사는 생활이 있어야 될 것이다.

 

  3. 부모는 책임을 완수해야 된다

  가정에서 자녀에게 책임을 못하고 만다면 자녀에게 그 권리를 상실한다. 그러므로 항상 자녀에게 대하여 부모가 할 의무교육이 있어야 될 것이다.

  어떤 부모가 가정에 앞으로 자녀에게 좋지 못한 영향을 줄 것이 보이는데도 여기에 대한 관심을 두지 않고 방심적인 태도로써 그 일이 잘못된 뒤에 자녀에 대하여 말해 보았던들 아무런 효과를 주지 못할 것이다. 또는 자녀에 대한 관심을 하나님보다 더 둔다는 것은 탈선된 일이지만 자녀에 대한 문제를 하나님께 부탁하고 하나님의 축복 속에서 바로 될 것을 믿고 모든 일을 진행할 때에 하나님은 축복하실 것이다.

 

  4. 자녀를 섬기는 자도 되지 말고 억압하는 자도 되지 말고 자녀에게 소망을 주는 부모가 되어야 한다

  자녀가 언제나 부모를 볼 때에 힘이 나도록 되어야 된다. 이것은 부모가 하는 것을 보니 나도 될 수 있다는 확신이 생기기 때문이다. 부모가 성심 성의로 무엇을 하는 것을 볼 때에 자녀 마음에도 무엇이나 열심으로 할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학생이라는 것은 언제나 보는 것을 따라가려는 마음이 강하니 만큼 부모의 하는 일을 보고 따라가는 것이다. 언제나 부모에게서 되어지는 일이 자녀에게 열매가 되는 것이니 이 땅에서 축복 받을 일을 하게 될 때에 자녀도 새 시대의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변화성도의 교리신조

 

  1. 우리는 삼위 일체의 완전성을 믿는 동시에 하나님의 예정하신 섭리는 모든 선지의 예언이 성취된 성신의 잉태로 탄생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믿으며 십자가의 영원한 속죄와 승리의 부활로 말미암아 오는 중생과 성신의 법으로 해방된 성도의 생활에서 맺어지는 성신의 열매의 역사를 믿는 것이다.

  2. 우리는 아브라함에게 세운 언약이 이루어지는 말세의 모든 족속이 하나같이 복을 누리는 안식의 축복을 믿으며, 이 안식에 들어가는 것은 영만이 아니요, 영, 육이 아울러 들어가는 것을 믿되  왕권으로 들어갈 자도 있고 종족인 백성으로 들어갈 자도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3. 우리는 십자가의 보혈을 믿는 신앙에서 아브라함의 자손 된 것을 믿는 동시에 모든 선지의 예언은 전부 우리에게 약속하신 언약의 말씀인 것을 믿되 계시록을 중점으로 하는 성경 전체의 말씀을 조금도 가감 없이 이루어지는 것을 믿는 것이다.

  4. 우리는 말세 비밀인 계시록의 진리는 모든 선지의 예언이 이루어지는 것을 말세 재앙의 날의 성도로서의 조금도 혼선이 없는 정확한 다림줄의 진리를 굳게 잡고 싸우는 것을 목적으로 하되 우리의 싸움의 대상자는 적마의 3세력이니 이것을 심판하여 없이 하는 것은 증인 권세의 역사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는 바이다.

  5. 우리의 동방역사는 어떤 교파를 중심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종말적인 예언의 말씀을 정확히 증거하는 자들을 통하여 이루어지되 세계적인 역사가 된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6. 우리는 모든 민족을 환란 재앙 속에서 구출시키는 복음은 말세 비밀이라는 것을 믿는 동시에 이 복음을 통하여서만이 하나님은 종말의 역사를 일으키심으로 모든 교파는 자동적으로 진리 안에 하나가 될 것을 믿는 것이다.

  7. 우리는 통합을 목적으로 하되 진리 통합을 위한 부흥단을 적극 활동하되 누구나 협상주의를 반대하는 자면 다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을 믿으며 이것을 중점으로 부흥단을 적극 활동하여야만 된다고 믿되 이 역사는 재앙으로 땅을 치는 권세로 북진할 것을 믿는다.

  8. 우리는 공중재림을 영접하는 자는 순교자와 또는 남은 종으로서 예언의 말씀을 증거하는 종들이며 죽은 자의 부활과 생존성도의 변화 승천을 믿는다.

  9. 우리는 택민 보호를 믿되 예비처의 양육을 받는 일과 만왕의 왕 그리스도의 지상강림을 영접하는 자는 말세 비밀의 예언을 믿고 거짓선지의 미혹을 받지 않고 옷을 더럽히지 않은 자라야 바벨론이 망할 때에 남은 백성이 된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10. 우리는 천년왕국이 지상에서 이루어지되 종족이 번성하는 것과 왕권 가진 성도의 통치를 믿는 것이다.

  11. 우리는 무궁세계를 신천신지의 영원한 새 도성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믿되 세세의 왕권과 시민권을 믿는 것이다.

  12. 우리는 처음 하늘과 땅은 천년왕국의 종말로 끝을 맺고 새 예루살렘은 현세에 국한되지 않고 영체의 사람으로서 필요한 만물과 화려한 도성이 있되 행위의 심판에 따라서 차별이 있는 보상을 믿는 것이다.

 

 

 

14. 인심 악화와 가정 문제

 

  사회와 가정은 떠날 수 없는 일이다. 사회가 없이 가정이 없고 가정이 없이 사회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지금 사회가 도덕 부패 인심 악화를 따라서 가정에 큰 영향을 주는 때를 만났다고 본다. 그러면 사회가 도덕이 부패하고 인심이 악화되었다고 해서 가정이 거기에 물이 들고 지배를 받게 된다면 그 가정은 성도의 가정이라고 할 수가 없고 성도가 사회가 이렇게 되었다고 사회를 떠난다는 것도 있을 수가 없고 가정을 돌아보지 않고 개인 신앙을 지킨다는 것도 성도의 일이 아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야 가정에 대한 문제가 이 사회 부패와의 관계를 바로 해 나갈 것이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가정이 이 시대를 잠깐의 시련기가 왔다는 것을 알고 이 시국을 어떻게 하든지 돌파하고 나가려면 좀더 가정에서부터 정신을 차리고 모든 일에 합심해서 무슨 일이든지 사단의 세력이 침투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각성이 있되 위치를 택하여야 될 것이다. 땅에 사는 성도의 가정 생활에서 위치를 잘못 택하면 앞으로 크게 문제되는 점은 하나님의 재앙을 피할 길을 찾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선지는 성도의 안정처를 말했던 것이다.

  우리의 위치라는 것은 롯과 같이 소돔 고모라의 물질이 풍성하다고 찾아가는 그런 생활을 하지 말고 아브라함 같이 여호와께서 기뻐하는 것을 따라서 위치를 택해야 한다. 우리는 이 땅에 위치를 정할 때에 불탈 물질을 따라가는 것도 실패요 또는 임시적인 편리를 따라간다는 것도 잘못이요 잠깐의 어떤 쾌락이 있다고 그 쾌락을 따른다는 것도 잘못이다.

  우리는 위치를 택할 때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위치냐 아니냐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고, 또는 그곳에 있으므로 내 가정의 신앙 상태가 어떻게 될 것이냐는 것도 생각하고 과연 그곳에 모든 사람들이 복을 받을 사람들이냐 하는 것도 알아볼 필요가 있다.

  앞으로 우리의 살길은 개인적인 영혼 문제로 끝을 맺는 것이 아니고 단체적으로 보호를 받고 단체적으로 싸워 나가는 것이 없다면 도저히 난국을 돌파할 수 없는 시기가 올 것이니 언제나 알곡은 알곡끼리 모이듯이 하나님은 역사할 것이니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서 나가는 것을 목적하고 현실을 보지 말고 미래의 것을 깊이 생각하는 점이 있어야 될 것이다.

 

  2. 예언의 말씀을 온 가정이 다 따라서 움직이되 우리의 갈 길은 어떻게 하여야 새 시대를 볼 수 있느냐 하는 것을 온 가정이 마음에 두고 아무리 세상의 여러 가지 복잡한 일이 와도 거기서 압력을 받지 않고 더 정신을 차려 분명히 새 시대가 가까운 때라는 것을 알고 더 힘을 얻는 가정이 되기 전에는 시대가 변천되는 세속주의에 끌리게 될 것이다.

  왜냐할 때에 날마다 사는 생활이 이 세상에 과학적인 문명을 무시할 수 없고 또는 그 문명을 따라서 나날이 변천되는 인심의 변동을 상대하지 않을 수 없는 이때에 객관적인 하나님 편에서 오는 새로운 힘을 받는 것이 없이 한 주관적인 자아를 중심하여 인본주의적인 사상에서 움직이게 된다는 것은 자연적으로 세상의 세속주의 문명을 벗어날 수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시대적인 조류를 인간의 몸으로서는 거스려 나가기가 어렵지만 이 시대가 변천되는 징조를 성서에 의하여 심판기의 징조로 알고 진노의 날에 설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각성이 있다면 어려운 풍조가 부딪칠수록 더 힘을 말씀에서 가지고 나가는 동시에 하나님께로부터 초자연적인 역사가 오게 될 것이다.

 

  3. 모든 일이 잠깐이라는 생각에서 새로운 시대를 내다보고 잠깐인 고난도 영화도 다 이것으로 우리의 사명이 아니요 우리의 사명은 이것을 초월해서 새 시대를 목적한 것이니 잠깐인 고난을 참아야 되는 동시에 잠깐의 바벨론의 영화를 따라갈 필요도 없다는 것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축복은 오직 남은 가정이 되는 것만이 축복 인줄 알고 가정의 모든 일을 믿음으로 움직일 때에 하나님의 신비가 같이 하므로 모든 일이 초인간적인 것으로 이루어지는 일을 체험케 될 것이다.

  인간이 볼 때에 실패같이 보이나 실지는 실패가 아닌 것이 나타나고 인간이 볼 때 확신 있는 것 같으나 가고 보면 허사가 되는 것을 체험할 때 지금 이때에 성도의 가정은 모든 일을 영적이나 육적이나 그 생활을 하나님이 친히 간섭하신다는 것을 더욱 알게 될 것이다.

  인간이 자기 계획과 방법을 취한다는 것은 변화성도에게는 있을 수가 없다. 왜냐할 때에 모든 일이 하나님의 보호 없이는 생계를 보존할 수 없는 재앙이 오는 때이니 만큼 모든 일을 인간의 힘을 초월한 하나님의 간섭이 같이 한다는 것을 믿어야 될 것이다.

 

  4. 일상생활을 하나님의 축복 속에서 이루어질 것을 믿고 악한 자들의 피해를 두려워하지도 말고 또는 그런 자에게 도움을 얻어 보려고 타협하지도 말고 조금도 불의와 동참치 않는 성별된 생활에서 나가야만 될 것이다.

  만일 인간의 방법으로 재앙 받을 악인들에게 무엇을 의탁하고 나간다는 것은 불의와 동참하는 일이 될 것이니 어떻게 하든지 악자와의 관계를 가지지 않도록끔 방법을 취해서 악한 자의 주권이 내게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을 취해 나가야 될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까지도 성별된 교회가 있어야 될 것이고, 사업도 성별된 사업이 있어야 될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하나님을 상대하는 예배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 성별이 있어야 하고, 사업에는 신비적인 새로운 축복을 받기 위해서 사업에 성별이 있어야 될 것이다.

 

 

15. 불가피한 환란에 대하여

 

  이날까지의 인류 역사는 때를 따라 어지러운 환란이 없은 것은 아니로되 우리 앞에 오는 환란이라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 되는 동시에 이 환란을 어떻게 극복할 것이냐에 대하여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날까지의 모든 문제는 한 사람이 정권을 쥐고 권력을 내세우려고 할 때에 그 사람이 거꾸러지면 그 환란은 끝을 맺고 만 것이다.

  그러나 이제 오는 환란은 한 사람이 주권을 쥐고 침략적으로 들어오는 환란이 아니고 세계 인류가 사상적 대립인 동시에 무력적으로도 도저히 인력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난제가 봉착했으니 여기에는 피차에 승부를 해결하기 어려운 난제가 태산같이 가로 막혀 있다. 세밀히 말하자면 사상적인 대립은 사람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고 무력적인 대립은 세계 인류의 생명이나 만물까지라도 다 살라져 버리고 마는 위협을 주고 있는 현실에서 환란이 오지 않게 한다는 것도 한 공상에 불과한 일이고 또 어떤 정권이나 사상이 자기가 통일한다고 꿈꾸는 것도 한 공상에 불과하다.

  그러면 인생이라는 것은 동물보다도 특이한 점은 여러 가지 생각하는 두뇌를 가졌고 그 밖에 장래일을 알 수 있는 영계를 가진 것이니 앞으로 오는 환란에 대하여 두뇌로만 생각한다면 협상이라는 것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오늘에 와서 정치가도 협상할 생각을 하고 싸움을 싸우는 용사들도 협상할 생각이고 오늘의 종교인까지도 다 협상할 생각이다. 협상 시대를 이루는 시대는 우연한 일이 아니고 사람의 정신 작용 안에서 생각한 필연적인 결과라고 본다.

  이제 영계적으로 깊이 생각한다면 환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볼 수 있다.

 

  1. 영은 하나님을 상대하여 활동한다. 그러므로 하나님 편에 대한 일을 영적으로 알게 될 때에 하나님은 진노할 수밖에 없는 때임을 알 수 있게 된다.

  과거 구약 말기에 북방에서는 배도적 세력인 앗수르와 바벨론이 일어나고 예루살렘 거리에는 거짓 선지만이 왕래하고 소위 다윗 왕국이라는 국내에는 위정자가 가득하고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사회는 극도로 악화된 사회가 되었고 하나님을 공경한다는 가정들이 가정에서부터 불의한 재물과 자녀의 악화와 경제적인 혼란이 올 때에 하나님은 크게 진노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루살렘도 망하고 그 민족도 망하고 정객, 정치가, 종교가가 다 망하고 나중에는 앗수르와 바벨론이 망할 때에 하나님은 동방의 고레스를 들어서 강권 역사하여 예루살렘을 복구했던 것이다.

  오늘의 20세기 말기에 중공, 소련의 북방 정책도 하나님이 진노할 일이요, 자본주의 정치 부패도 또는 기독교의 부패도 인심 악화도, 또는 빈부의 차이가 심해서 부자는 극도로 호화롭고 가난한 자는 도저히 살 수가 없는 때가 오는 것도 성서를 볼 때에 지금이 영적 방면으로 보아서 하나님의 진노의 날이 왔다는 것을 맑은 영감을 가진 자는 다 알게 된다.

 

  2. 성경은 완전한 지식으로 볼 때에 과거나 현재나 미래가 너무나 똑똑한 사실인데 성경을 아는 지식으로 미래를 내다 볼 때 우리에게 완전한 소망을 주는 길이 있다. 사람이 앞일을 아는 것이 아니고 앞일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지금으로부터 2천 6, 7백년 전 선지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묵시로 말씀한 일을 지식으로 분명히 알 수 있다.

  성경은 완전한 지식이다. 세상의 과학은 사람의 두뇌 속에서 물체를 사용하는 지식이 현 과학 문명을 좌우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의 지식은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어떻게 행하시겠다는 것을 분명히 아는 지식인데 그것을 바로 안다면 조물주 하나님의 지식이다. 다시 말하면 과학은 인간의 지식이요, 성경은 하나님의 지식이다.

  이 지식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예지와 예정 안에서 앞으로 어떻게 행하시겠다는 일이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한 것이니 하나님은 이 말씀대로 행하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경륜이다. 보통 세상 사람은 천시(天示)라, 천명(天命)이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뭐냐할 때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모든 자연계까지도 움직인다는 것이다.

  사람이라는 것은 아무리 애써 보았던들 지나고 보면 하나님께서 말씀대로 움직이는 역사에서 나기도 하고 세상에서 움직이는 것인데 그것이 전부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는 활동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아무리 오늘의 무신론자가 하나님이 없다고 야단을 치나 성경을 보면 이러한 일이 말세에 가서 그 세력이 북방에서 자리잡고 한 때에 전 세계를 악화시키는 사회가 되도록 할 것을 가르쳤다.

  오늘의 아무리 인본주의적인 신학자가 새로운 논설을 쓰고 있지만 그것도 성경에 미리 나온다는 것을 말한 대로 이루어지는 것 뿐이고 과학 문명으로 달나라에 가고 모든 교통이 번개같이 빨라도 이것도 모든 선지가 말한 대로 이루어진 것 뿐이요, 아무리 인간 기술이 화려한 사회를 만든다고 야단쳐도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과정인 것을 분명히 알게 된다.

  이제 전쟁이 난다면 세계 인류가 불에 사름을 당하고 무서운 일이 닥쳐오지만 이것도 성경이 이루어지는 사실인데 이러한 일이 있고서 세상에는 새로운 시대가 올 것을 말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앞일을 어떻게 할 것이냐 할 때에 이미 성경대로 이루어진 사실이 그리스도 탄생에서부터 금일까지의 이루어진 일이 역사적으로 너무나 똑똑한 사실이니 이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될 것도 똑똑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은 환란이 불가피하게 온다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이요 환란 가운데서 어떻게 되므로 살길이 있다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이니 환란이 무서워 그럴 필요도 없고 또는 환란이 오지 않는다고 방심하는 것도 위험한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 지혜로운 생활이라는 것은 이 때에 필요한 것이니 이 지혜라는 것은 인간 과학을 초월한 데서 미래를 바로 아는 생활이 될 때에 그 사람의 생각하는 것이나 움직이는 것이 공상에 머무를 것이 아니고 완전한 열매를 이루는 사상, 정신이 움직이는 생활이 될 것이다.

 

  3. 투쟁하는 일이다.

  투쟁이라는 것은 동물같이 먹기 위해서 싸우는 투쟁도 있고 옳은 진리를 바로 아는 사람으로서 그 진리대로 따라 살기 위해서 싸우는 투쟁도 있으니 오늘의 공산당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공산주의 학설대로 될 것을 확신하고 그들은 투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유 진영의 자본주의라는 것은 어떤 획선을 가진 것이 없이 한 자본을 옹호한다는 것은 투쟁력이 흙과 같이 무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히 아는 지식에서 진리로써 반공 투쟁을 할 때에 공산당의 사상을 무너뜨릴 수 있는 진리 투쟁이 될 것이다. 아무리 공산 사상을 가진 자라도 인류 종말에 완전한 지식이 되는 계시록과 선지서를 안다면 자동적으로 그 사상은 불 앞의 초가 녹아지듯이 없어지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분명히 알지 못했던 사람이 바로 알게 될 때에 자동적으로 잘못 알았던 것은 포기하듯이 오늘의 공산당이 선전하고 있는 그것은 한 공상에 불과한 것이니 이러한 것은 진리 안에서 알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므로 공산 사상은 자연적으로 밟힘을 당하는 동시에 결국은 옳은 진리로 투쟁하는 용사들 앞에 자동적으로 없어지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이 투쟁이라는 것은 사상과 정신이 그 진리 안에서 움직이는 것으로만이 근본이 되는 것이다.

  이제 불가피하게 오는 환란을 앞에 놓은 이때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세상에서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사상을 가지고 투쟁할 때에 필연코 승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 없이 믿고 움직이는 사상에 있을 것이다.

 

 

16. 거짓 많은 세상에 양심 바른 사람

 

  거짓의 근본은 마귀요 양심의 근본은 하나님께로 온 것이다. 하나님께서 거짓된 마귀와 양심의 사람과 대립을 시킨 것이니 거짓이 있으므로 양심의 사람을 인정하고 양심의 사람이 있으므로 거짓된 세력을 없애고 양심의 사람만이 사는 시대를 새 시대라 하는 것이다. 이제 어찌하여 세상에는 거짓이 많게 되었느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1. 거짓이 세력을 잡게 됨

 이것은 거짓된 마귀의 말을 참되신 하나님 말씀보다도 더 따라가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에덴 동산에 아담 하와가 간교한 뱀의 말을 하나님 말씀보다도 더 믿었다는 것이 인생 타락의 시발점이니 타락한 사람이라는 것은 누구나 마귀의 말을 더 믿게 되는 것은 하나님은 공의를 말하고 마귀는 거짓으로써 사람의 마음을 미혹하는 말을 하므로 어리석은 인간들은 그때 그때에 자기에게 만족을 주는 것을 따르기 때문이다.

  사람이라는 것은 내일 일을 모르는 것이 인간이니 하나님은 사람에게 장래를 행복된 길로 인도하기 위하여 말씀한 것이요 마귀는 흑암을 넣어 주어서 그때에 그날 그날 되어지는 일만을 생각하는 마음을 가지게 하는 감화를 주고 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인간들은 참되신 하나님의 장차 될 일을 말한 것을 믿지 않는 것은 인간들의 마음이 어두워진 까닭이다.

  2. 거짓된 마귀가 기회 있는 자에게 역사하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죄를 지을 때에 참되신 하나님의 신이 떠나고 거짓된 마귀가 지배하는 영이 된다. 그러므로 죄의 근본은 정욕이요 정욕의 근본은 마귀가 되는 것이니 인간들이 정욕이란 들보가 마음에 있을 적에 자동적으로 거짓말을 해서 자기들의 유익을 보려는 것이 자동적인 행동이 되는 것이다.

  흑암이라는 것은 거짓이요 거짓이라는 것은 마귀의 것이니 누구든지 죄가 있는 자는 자동적으로 거짓된 마귀 감화를 받게 되는 것은 피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거짓을 행하는 자는 양심을 떠난 마귀의 도구가 되는 것이다. 이 세상의 사람들이 거짓을 오히려 자기 도구로 쓰는 것은 그 자체가 마귀의 도구가 된 인격이니 거짓이란 자체는 인간을 망치는 악의 근본이다.

  3. 거짓으로 교제하는 세상

 사람은 양심적인 교제를 하는 것보다도 일시 그 사람의 마음을 얻기 위한 교제는 자기의 욕망을 채우려는 교제이니 이것으로 말미암아 세상은 믿을 수가 없는 세상이 되는 것이다. 저 사람이 나를 좋게 대한다 해도 이것이 오히려 나를 해치기 위한 일이 되는 것을 미혹이 많은 세상이라는 것이다.

  참된 교제라는 것은 조금도 자기의 이문을 위한 것보다도 남을 살려 보겠다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교제가 아니고는 다 거짓을 가져오는 일이 있게 된다. 도덕적으로 사람이 볼 때에는 옳은 것 같으나 참되신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을 볼 때에 바리새 교인들이 아무리 남을 구제한다 하여도 주님은 독사의 자식이라고 책망했던 것이다.

  거짓 선지가 아무리 여러 가지 방법으로 사람의 마음을 끌어서 자기의 앞으로 사람을 모은다해도 이것은 참된 교제가 아니요 자기의 목적을 달성할 야심에서 남을 이용하는 교제가 된다. 사람이 무조건 자기를 좋게 한다고 해서 마음을 두는 일도 속는 일이요 자기를 일시 괴롭힌다고 해서 원망한다는 것도 어리석은 행동이 될 것이다.

  이제 참된 양심의 사람에 대하여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양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사람의 양심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양심도 있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으면서도 사람을 대하는 양심도 있고 또는 사람을 대하는데 있어서 그 사람에게 무엇을 얻어보려는 데서 신용을 보이는 양심도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양심 외에는 온전한 것을 소유할 수 없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양심에는 조금도 자기라는 것이 없이 하나님을 중심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말씀을 믿는 양심에서 아무리 인간이 나를 존경하고 이롭게 한다해도 진리에 합당하지 않다면 그것을 끊어 버리는 것이 신앙 양심이다. 이 양심으로만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이러한 자를 찾으신다. 이러한 자에게 초자연적인 신의 세계를 체험하는데서 하나님을 바로 알게 된다.

  또는 양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야 앞으로 될 미래의 비밀을 분명히 알게 된다. 하나님은 언제나 양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나타나서 묵시로써 앞으로 될 일을 모두 기록하도록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보아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양심이 있는 자라야 성경을 바로 깨닫게 되는 것이다. 바리새 교인들이 아무리 성경을 많이 읽었지만 양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기 때문에 성경을 바로 알지 못하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역사를 반대하는 대적이 되었던 것이다.

  2) 양심으로 남을 사랑하는 자

  하나님은 언제나 양심으로 남을 사랑하는 자에게 일할 수 있는 것으로 주시는 것이다. 아무리 양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한다 하여도 사명맡은 불타는 양심에서 남을 살려 보려는 행동이 없다면 큰 역사가 일어나지를 않는다.

  양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되 보수적도 있고 진보적도 있는 것이다. 보수적이라는 것은 과거의 것을 지키자는 것이라면 진보적이라는 것은 그때 그때에 아무런 난관이 부딪혀도 그 시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는 새로운 역사를 일으켜야 된다는 것을 목적하고 싸우는 사명자의 양심이다. 아무리 바리새인들이 보수를 지켰지만 남을 살린다는 양심의 불이 없는 자이다. 에베소 교회가 보수적인 사상을 가졌지만 사랑의 불이 꺼졌던 것이다.

  우리는 남을 살린다는 양심에서 불이 붙는 것이 있어야 새로운 열매가 나타나는 사람이 될 것이다. 지금 아무리 거짓된 세상에서라도 이 시대를 바로 알고 환란과 재앙 속에서 남을 살려 보려는 불타는 마음을 가지고 나서는 자라야 권리 행사의 새로운 역사를 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정한 일이 있다 하여도 불타는 사랑, 양심적인 사람이 아니고는 아무런 역사를 할 수가 없으므로 언제나 악한 사회에도 사랑의 불이 붙는 자를 들어서 그 시대 사람을 깨우치고 새로운 변천을 가져왔던 것이다. 아무리 붉은 용의 앞잡이 거짓선지의 미혹이 세계를 덮는다 하여도 참된 사랑의 양심에서 순교자의 뒤를 따르는 자를 통하여 촛대교회가 이루어지는 동시에 새로운 시대를 이루는 한 새로운 단체를 이루게 될 것이다.

 

 

17. 숨은 종의 기도

 

  할렐루야 영광 돌리려는 날은 필연코 가까운 줄 믿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시련이 길 때에 인간은 아브라함 같이 실수할 수밖에 없는 인간입니다. 아브라함이 사라의 몸에 잉태될 소망이 없게 될 때 하갈의 몸에 동침을 하니 기독교의 원수가 되는 이스마엘이 나온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나의 믿음 이날까지 참고 왔사오나 저 산 넘을 용기조차 잃어버린 맥 떨어진 지렁이가 되었나이다. 무소불능하신 하나님 바라보는 마음 하나 가졌사오나 어느 날 그 능력으로 날 끌어 세우시겠나이까. 숨은 기도 통하여서 잠잠히 내리는 은총 속에 내 신앙 자라고 있으나 어느 날에 완전한 열매를 맺사오리까.

  주님만 알게 숨은 봉사 해온 일도 있지만 너무나 부패된 종들을 볼 때에 상처를 받았나이다. 이 상처는 주님만이 아물게 할 줄을 믿나이다.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이 되는 마음도 없지는 않지만 사람은 약하므로 홀로는 일할 수 없나이다.

  주여! 누구를 만나게 해주시겠나이까. 저 산을 같이 넘을 수 있는 동지를 만나게 해 주옵소서. 살아서 주님 맞이할 시대 징조 확실하오나 나는 준비가 못되었사오니 어찌 하오리까. 완전 준비 나 어찌 스스로 가질 수 있으리요. 주님께서 강권으로 주시기 전에 주 앞에 설 자는 하나도 없으리라고 깨닫는 것 뿐입니다.

  우렁찬 승리의 개가 소리 숨은 종을 통하여 올 것을 믿사오나 도저히 자신이 없는 맥 떨어진 걸음을 걷게 되나이다. 눈물없이 갈 수 없고 피땀없이 갈 수 없는 길인줄 알았사오나 너무나 시련이 클 때에 기도의 힘조차 잃어버리고 몸부림치는 내 모양 주님만이 알겠사오니 7배나 강한 힘을 내려 주시옵소서. 남을 살려보겠다고 기도했지만 나 자체에는 형제를 살릴 능력이 없사오니 능력을 내려 주시옵소서.

  약한 자에게 능력을 주실 줄 믿사오니 약할 대로 약해진 이 모양, 주님만이 나를 붙들어 주실 줄 믿나이다. 혈혈단신 외로운 걸음 이날까지 걸었사오나 나 홀로 도저히 싸울 수 없나이다. 강권으로 싸울 수 있는 단체를 이루어 주시옵소서.

 

 

18. 생활 난제 해결에 대하여

 

  인생이라는 것은 먹어야 산다는 것도 또는 믿어야 산다는 것도 다 없을 수 없는 일이라고 보게 된다. 먹는 것도 인생의 난제요, 믿는 것도 인생의 난제라고 본다. 무조건 먹자는 것도 탈선의 길이요, 무조건 믿자는 것도 탈선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생활 난제라는 것은 무엇이냐는 것을 먼저 아는데서 해결될 것이다. 이제 생활 난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다.

 

  1. 먹고사는 생활

  사람이라는 것은 먹고사는 것이 난제라고 들어갈 때에 그것은 양심을 떠난 행동을 하게 되는 제 일보가 될 것이다. 인생이라는 것은 먹을 것을 따라가는 것이 인생이 아니고, 동물만은 먹을 것을 따라서 움직이는 것이 그 자격의 적합한 일이라고 본다. 동물은 먹는 것 외에는 더 생각할 무엇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사람은 먹는 것 이상의 것을 생각할만한 자격을 하나님께로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인생이 먹고사는 것을 따라갈 때에 퇴보요, 어떻게 되므로써 사람이 먹고사는 것은 별 문제가 없다는 것을 깨달아 들어갈 때에 이것을 진보적인 생활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먹는 생활이 왜 있느냐에 대하여 아는 것은 인격을 바로 찾는 지식의 근본이 되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자동차의 휘발유와 물이 불과 더불어 움직이는 것은 목적이 무엇이냐는 것을 바로 알아서 움직이는 것이 운전수의 할 일이라면 사람이 먹고 활동하는 목적이 무엇이라는 것을 그 심령 자체가 바로 알아야 할 것이다.

  만일 사람이 먹고 배부르는 것만을 목적하고, 영적으로 먹고사는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인격을 바로 찾지 못할 때 금수보다도 더 악한 행동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금일에 인간들이 유물적 사상이라는 것은 사람을 고등 동물이라는 것은 짐승보다도 더 악한 행동을 하게 되는 생활을 하므로 결국은 악한 사회를 이룰 것이다.

  우리가 먹고사는 생활은 목적이 무엇이냐는 것을 바로 아는 것은 반드시 물질에 국한된 과학으로써 해결할 수 없고 과학을 초월한 힘이 어디서부터 온다는 것을 알 때에 먹어야 산다는 생활에서 한 계단 더 올라가는 것을 가지게 된다.

  금일에 자본주의가 자본이 많이 있으므로써 생활난이 해결된다는 것도 현실이 증명된다고 볼 수 있으나 자본으로만이 식생활의 해결을 본다고 보면 자본을 위한 인격이 될 것이다.

  사람이라는 것은 자본에서 생활난이 해결될 줄만 안다면 아무런 사상이든 기계가 될 수 있는 것이니 돈에 따라가는 기계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자본을 주관하는 것은 사람의 노력에만 있지 않고 자연을 지배하는 조물주께 있다는 것을 신앙하는 신앙 양심에서 그 자본을 먹기 위해 움직이는데 국한시키지 말고 인생의 최고의 향상을 가져오는 초자연적인 발전에 도달하는데 그 물질을 사용할 때에 그 물질은 영원한 것을 이루는 열매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고 했던 것이다.

  금일에 과학 문명을 자랑하는 현실에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깊이 알아볼 때에 잘 먹고 잘 산다는 간판 밑에서 하나는 이렇게 하고 하나는 저렇게 하는 방향인데 이것만으로는 생활 난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먹고사는 문제 하나를 문제시하되 무서운 재앙이 올 때에 어떠한 자가 그 재앙을 피하고 새 시대의 축복을 받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려면 조물주 하나님의 오메가 역사라는 진리를 분명히 알고 대자연을 지배하는 하나님과 의합하는 사람이 될 때에 육적 생활 난제가 완전히 해결되는 새 땅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날이 가면 갈수록 모든 인간들은 먹어야 산다는 문제가 닥쳐올 것인데 여기에 국한된 인간들은 내일 일을 모르고 식충이 생활을 하다가 하루아침에 하루살이 같이 없어지는 것이 인간의 종말이라고 모든 선지는 예언한 것이다. 이날에 남을 자는 누구냐 하는 것을 분명히 가르친 것이 기독교 종말론이다.

 

  2. 믿어야 사는 생활

  믿음이라는 것은 동물은 가질 수 없는 것이로되 사람은 반드시 양심의 작용으로 없을 수 없는 일이다. 무신론 공산당도 종교 신앙을 반대하지만 그들도 무엇을 믿어야만 살 것은 분명하다. 인생관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각자가 다른 것인데 그 중에서 조물주 하나님이 기뻐하는 인생관이 있으니 이 신앙 노선만이 생활 난제를 해결하는 지침이 될 것이다.

  금일에 이방 종교를 제외하고 기독교 신앙 노선에서 서로 자기 노선이 바르다고 생각하는 것이 기독교의 혼란을 가져오는 미혹의 시대라고 볼 수 있다. 기독교가 이렇게 신앙의 혼선을 가져오게 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

  신앙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있다고 믿는 것보다도 하나님의 뜻을 믿는 것인데 성경을 손에 들고도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라는 것을 바로 알지 못하고 자기 멋대로 말하는 것이 마귀의 미혹이라는 것이다. 에덴 동산에서 하와를 찾아와서 말하던 마귀는 오늘도 우리를 찾아오고 있다.

  신앙은 법을 떠난 신앙이라면 오히려 불행을 가져오는 것이니 법이라는 것은 입법자이신 하나님밖에는 바로 행할 자가 없는 것이다. 신앙이라는 것은 내가 행할 것을 믿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법대로 행할 것을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법대로 행하시는 그 뜻을 바로 믿는 자를 통해서 법대로 역사하는 것이 과거나 현재나 미래가 꼭 동일한 것이다.

  법대로 믿어 순종하는 자를 들어서 법대로 행할 것을 기록한 것이 예언의 말씀이요 법대로 신앙하는 자가 그때 그때에 그 예언의 비밀의 뜻을 바로 알아서 증거하는 것을 시대적인 증인의 역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말하기를 이스라엘이 열심히 있지만 지식을 따르지 않으므로 그 열심은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열심이 되었다고 롬10:2~3에 말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법을 순종하는 자와의 친밀한 교통을 하는 신이요 그 밖의 사람에게는 오히려 자체를 감추시고 시대적인 비밀을 깨닫지 못하도록 미혹의 영을 부어 주시는 신이시다(사29:10~12).

  이제 신앙 생활 난제를 해결하는 것은 장차 될 일이 아니고 현재에 나의 신앙이 하나님과 의합되느냐에 따라서 즉각적인 난제 해결을 체험하는 것을 갖게 되는 것이다. 만일 기독교가 이러한 체험을 받지 못한다면 미신적인 종교에 불과할 것이로되 합법적인 신앙 노선에서 도덕이나 수양이나 의식으로 얻어 볼 수 없는 산 체험을 받게 되는 것을 기독교의 신앙 생명의 역사라는 것이다(롬7:6).

  신앙은 인격적인 난제를 체험으로 해결할 때에 생활 난제가 해결되고 생활 난제가 해결될 때에 시대적인 난제도 해결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천국은 내 마음에 있다고 했던 것이다. 겨자씨 한 알이 큰 나무를 이루는 것은 그 속에 생명이 있는 원인이요 아무리 큰 배라도 물결을 따라가게 되는 것은 그 속에는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생명이라는 것은 신앙을 따라가는 생명이라야 완전한 인격을 이루는 열매가 있고 그 열매가 있는 인격이라면 모든 난제가 해결되는 것은 인간 자력에 있는 것이 아니고 대 자연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있는 것이니 주님께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이것을 가르친 것이다(마6:31~33).

 

 

19. 영계 혼란을 벗어난 말씀의 종

  하나님께서 앞으로 영계 혼란으로 큰 미혹이 올 것을 미리 통과시켜 주신 것을 감사하는 바입니다. 내가 이런 영계 혼란을 거쳐 나온 것은 오히려 말씀의 종이 되는 영적 신학의 한 과정으로 봅니다.

  우리의 신학이라는 것은 학설로써 끝을 맺지 못하고 직접 혼란을 가져오는 마귀의 세력과 체험적인 생활에서 마귀의 흑암은 사랑하는 종에게 무엇을 통하여 온다는 것을 쓴 잔의 시련을 통과하는 생활에서 알게 될 때에 말씀을 바로 변론할 수 있는 인격을 하나님께로 받게 된 것을 감사합니다. 이제 사랑하는 종에게 마귀의 흑암이 어떤 방법으로 온다는 것을 체험에 의하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1. 교파심이라는 것은 마음에 마귀의 흑암을 가져오는 문이 됩니다. 내가 과거에 장로교 외에는 다 이단이라는 교파심을 가지고 나가다가 큰 흑암을 받았던 일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장로 교파는 정통이라는 마음이 철저하던 사람이 되어 19세 때에 마귀의 흑암을 받게 된 것은 어린 집사로 목사님과 장로님들의 과오를 볼 때에 반박하는 마음이 생겨서 흑암을 받은 일이 있습니다. 그 후에 깨달은 바는 하나님의 종들도 사람이니 만큼 마귀의 시험을 이기지 못할 적에 실수한다는 것을 깨닫고 실수하는 종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이 될 때에 지금은 그런 압력을 받지 않습니다.

  2. 소위 순 복음주의라는 사상에 흑암을 받아 보았습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은 받았으니 그 밖에는 감사한 것 뿐이고 무엇을 철저히 해 나갈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서 큰 흑암을 받아 방랑적인 생활을 해 본 적이 있습니다. 이것이 큰 잘못인 줄 알고 철저히 회개하고 목숨을 바치고 싸워 나가면서 말씀을 위하여 순교적인 생활을 한다는 결심에서 나설 때에 그 흑암은 물러가고 새로운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3. 순교할 자신이 있다고 장담하면서 나섰다가 순교를 못하게 될 때 탕개가 끊어진 창애같이 아무런 힘이 없이 안락을 따라 살아보려는 마음을 가질 때에 흑암을 받아 보았습니다. 그러나 다시 소성한 것은 육이 죽는 순교보다도 내 마음에 있는 인간성을 죽여 보려고 해산의 수고를 다 하다가 중심에 뜨거움을 받게 될 때에 다시 큰 힘을 얻고 나가게 되었습니다.

  4. 중심에 성결을 체험하고 나는 신같이 된 것으로 알고 아무런 시험이 없으리라고 생각했다가 마귀의 잘못된 지시가 올 적에 흑암을 받아 본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으로 깊이 들어가 보려고 애를 쓸 적에 말씀이 밝아지는 동시에 믿을 것은 말씀밖에 없다는데서 큰 힘을 얻었습니다.

  5. 말씀을 밝히 알아 남을 가르치는 자가 되었으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이 오히려 나를 해치려고 모략을 할 때 흑암을 받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위하여 눈물 흘리며 기도하다가 큰 새 힘을 받고 나올 때에 다시는 흑암의 세력이 침투하지 않고 모든 것을 분별할 수 있는 영감을 받게 되어 진리를 변론할 수 있는 세계에서 이제 깨닫는 바는 영계 혼란을 거치므로만이 신앙은 향상되고 인격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흑암이 없으므로 향상이 아니고 흑암이 덮여도 거기서 깨닫고 나갈 때에 흑암을 통하여 일층 더 새로운 영계로 올라간다는 것을 확실히 알았습니다. 이제 내가 이런 과정을 거친 것은 실천 신학의 한 과정이라고 깨닫게 됩니다. 지금 이때는 어느 종이나 종말에 관한 진리의 말씀이 완전히 통달되기 전에는 세계적으로 오는 마귀의 큰 흑암을 뚫고 나갈 수 없다고 봅니다.

  영계라는 것은 혼란이 없이 나간다는 것도 알지 못하는 말입니다. 혼란이 있을 때에 영계적으로 나가던 자가 후퇴하고 이지적인 학적이라는 논설만 가지고 나간다는 것도 퇴보라고 봅니다. 영계는 반드시 혼란을 뚫고 나가므로만이 다시 그 혼란이 오지 못하는 세계가 있다는 것을 체험한 나로서 간단한 간증의 글을 쓴 것입니다.

 

 

20. 영계 혼란을 수습할 길은 무엇인가

  금일에 기독교 영계 혼란에 대하여 먼저 알아야 할 일은 혼란이 무엇 때문에 오느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알아야 할 것이다.

 

  1. 하나님께서 마귀 흑암의 권세를 개방시킨 일이 있기 때문이다(계9:1~4).

  왜 이렇게 하느냐에 대하여 말하자면 이날까지의 기독교 영계 활동은 이미 허물과 죄로 죽었던 영을 살리기 위하여 역사하는 때이니 만큼 하나님께서 마귀 흑암을 가두어서 기독교에 영계를 침투해 들어오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이것은 이미 마귀 권세 아래서 죽은 영들을 살리는 운동이니 만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승리를 통하여 마귀가 물러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만 믿으면 예수님의 권세가 그 영을 죄에서 해방시킬 때에 자녀가 되는 권세를 무조건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게 되었던 것이다(요1:11~12). 그러나 지금에 와서 마귀의 권세를 개방시킨 것은 변화성도를 일으키기 위한 목적이다. 변화성도라는 것은 중생 받은 자로서 아무리 마귀 미혹이 와도 그 미혹을 받지 않고 말씀으로 승리하고 이긴 자라야 남은 종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마귀 권세를 허락해서 성도를 대항하도록 하기 때문에 영계의 혼란기가 오는 것이다.

 

  2. 영계의 활동법이 바뀌는 때이므로 오는 것이다.

  이날까지는 종들이 종말관을 바로 증거 못해도 십자가 부활을 바로만 증거한다면 중생의 역사가 일어나므로 교회를 세웠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종말의 진리를 바로 증거 하는 종을 통하여 환란 가운데 남은 교회가 되므로 새 시대를 이루는 예언의 말씀이 아니고는 도저히 마귀 흑암이 물러가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증인 권세로 종말의 예언의 말씀을 바로 증거하는 종을 통하여 새로운 시대를 이루는 기간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변화성도를 모아서 한 단체를 이루어 마귀의 앞잡이 거짓 선지자와 싸우는 때이므로 하나님의 종들에게 완전 무장을 주기 위하여 마귀의 흑암을 개방시켰으니 완전 무장이 못된 자는 얼마든지 혼란에 빠지게 되는 시기가 있으므로 극도로 영계가 혼란해지는 것이다.

 

  3. 종들을 시험해 보는 때이므로 극도로 혼란해지는 것은 아무리 영계가 밝은 종이라도 시험을 해 보고야 새로운 역사를 주기 때문에 과거의 은사만 가지고는 도저히 혼란을 수습할 수가 없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들을 새로운 역사로 들어 쓰기 위한 방법이다. 예를 든다면 무슨 단체든지 그 단체의 법을 변동시키려면 여러 가지 복잡한 일이 있는 것이니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종들을 들어 쓰는 방법이 달라질 적에 종들의 영계 상태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이때에 대표적인 사람을 세워서 혼란한 영계를 하나되게 하는 일이 있는데 이것을 말세의 증인 권세 역사라 하는 것이다.

  영계 혼란을 수습하는 길은 다음과 같다.

 

  1. 완전 개조를 받는 자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은혜시대에는 그 영이 중생 받으면 천국에 들어가는 때이므로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면 나가서 십자가를 증거할 수 있는 때이지만 마귀 권세가 개방을 받을 때는 중생 받은 영으로서 그 몸까지 완전 개조를 받아 변화 승천할 수 있는 인격을 받아야 된다. 중생은 영이 사는 역사요 개조를 받는 것은 몸이 성결하게 되므로 피곤이 없는 동시에 죄의 몸이 영생의 몸으로 바꿔지는 역사를 말한다. 이것은 새 힘으로 되는 일이다(사40:30~31). 이 새 힘을 주는 목적은 원수의 피해를 당하지 않고 환란에서 역사하는 종의 인격을 이루어 주는 것이다(사41:25).

 

  2. 말씀 변론이 밝아야 한다

  이것은 마귀의 세력을 들어서 말씀을 바로 증거하는 종만을 남은 종이 되게 하기 위한 방침이니 어느 종이나 말씀 증거가 바르지 못하면 사8:20 이하와 같이 흑암에 빠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은사의 종이라도 말씀이 혼선되면 마귀 흑암에 떨어져서 혼란하게 되는 것이다. 말씀 권세 역사로만이 역사하는 때니 촛대교회 사자가 되려면 말씀에 가감이 없는 증인이 되어야만 될 것이다(계11:3~4).

 

  3. 순교자 동무로 인정을 받아야 된다

  마귀 권세를 개방시킨 것은 누구든지 순교자의 뒤를 따르는 생활이 아니고는 신앙 영계를 보존하기가 어려운 혼란이 오게 된다. 이것은 순교자의 원한이 이루어지는 진노의 날이니 만큼 하나님께서 극도로 괴로운 시련이 있게 해서 순교자의 동무가 되는 자라야 하늘에서 인정을 하고 순교자들의 기도가 그들에게로 강한 응답이 내리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말세에 남은 종으로써 피 값을 갚는 싸움을 싸우게 하는 것이니 누구든지 순교자의 동무로 인정을 받는 자라면 강한 영감이 위로부터 올 때에 사자같이 강한 용사가 되는 것이다(미5:7~9). 기독교는 이제부터 앞으로의 영계 혼란을 수습하는 길이 무엇이냐는 것을 분명히 바로 찾아 나가지 못한다면 남은 종과 남은 교회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새로운 역사가 어떠한 종을 통하여 어떤 방침으로 온다는 것을 분명히 알려면 계시록의 다른 천사의 역사를 세밀히 대조하여 볼 때에 7:2에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을 들고 나온다고 했고, 8:3~5에는 이미 담겨있는 향과 성도의 기도가 합한다고 했고, 10장에는 작은 책을 들고 크게 외친다고 했고, 14:6 이하에는 영원한 복음을 들고 바벨론이 망하되 누구든지 짐승과 우상에게 경배하고 표를 받은 자는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는다고 한 것을 보면, 이것은 영계 혼란이 올 때에 새로운 역사가 해 돋는 동방에서 나와서 그 역사로 말미암아 원수의 세력이 완전히 망하고 지상에 새로운 성도의 나라가 올 것을 가르친 것이다.

 

 

21. 반공 투쟁과 종교인

 

  금일에 반공이라는 간판 밑에 모든 국민은 시선을 그곳에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반공이라는 자체의 목적을 어느 곳에다 두느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알아야 한다.

 

  1. 자본주의적 반공 투쟁

  이것은 개인의 자본을 국유화시키는 정치를 반대하는 것이다. 소위 공산국가 건설이라는 간판 밑에서 사회주의가 있으니 사회주의는 개인의 자본을 국유화시켜 국체를 부강케 하기 위하여 전국민의 노력이나 물질이나 언론이나 모든 활동을 자유를 주지 않고 사회주의 노동당의 정권 아래 무조건 굴복하라는 것이 그들의 정책이다. 그러므로 자유를 위한 국민으로서 자유가 없다는 것은 한 공산국가를 이루기 위한 사회주의 노동당의 한 도구가 되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농장에서 농사를 하는 사람이 소를 부릴 때에 무조건 주인에게 복종해야만 되는 것과 같고 품을 파는 사람이 품을 사서 부리는 주인에게 하루 시키는 대로 순종하는 거와 같이 사회주의 국가 안에 있는 국민의 생활은 생명 없는 기계같이 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라는 것은 얼마든지 자기가 활동하면 자본을 가질 수 있고 자본이 있는 자가 권리를 가지고 자기 마음껏 호화롭게 생활할 수도 있고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인데 이것을 목적한 자본주의 정치는 반공이라는 간판을 붙이고 반공 운동을 하는 데는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가 결부된다.

  소위 자본주의라는 정치 아래서 자본을 가진 자는 권리가 있고 자본이 없는 사람은 권리 앞에 머리를 숙인다는 사회가 될 적에 자본을 많이 가진 자는 소수요, 가지지 못한 자가 다수인 환경 속에 반공이라는 사상이 자본에게만 있다는 사상은 흙같이 무른 무력한 사회의 국민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본이 없는 자가 반공 사상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을 가질 수도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반공이라는 사회가 단결이 못되는데서 자동적인 혼란을 가져올 우려가 없지 않다.

 

  2. 종교적 반공 투쟁

  종교라는 것은 정치와 종교가 분리가 되므로 종교인은 정치의 간섭을 받지 않고 어떠하든지 모든 국민의 사상을 좋은 길로 이끌어 주자는 목적에서 인생의 큰 복리를 가져올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공산주의는 종교라는 것을 공산주의의 방해물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무신론 정책이기 때문이다.

  이 정책은 신의 존재가 객관적으로 있다고 보지 않고 자연의 물체를 신과 같이 여기는 동시에 물체가 움직이는 활동을 과학으로써 하게 될 때에 얼마든지 과학 발전으로써 새로운 시대를 이룰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정책을 쓰는 데는 신을 숭배하고 예배를 드리는 일은 하등의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인으로서는 공산주의를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 종교 반공 투쟁이라는 것이다.

 

  3. 기독교인의 반공 투쟁에 특수한 점은 기독교인은 하나님 말씀을 믿는 신앙의 정로라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 말씀은 그리스도가 세상에 탄생하기 전에 모든 선지를 통하여 장래를 예언할 때에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잉태하여 어린아이로 날 것을 말했고 그가 복음을 전파할 것과 십자가에 죽을 것과 부활 승천할 것을 말했고 성신이 강림할 것을 말한 동시에 이 역사가 세계 인류적으로 전파될 것을 가르쳤다.

  이 선지들의 예언은 주님께서 세상에 오시기 700여년 전 시기에 예언한 말씀인데, 서기 1970년 되는 금일에 시대의 조류를 선지 예언과 맞추어 보면 일점일획도 희미하지 않고 햇빛같이 밝게 나타나는 진리를 파악할 수 있다.

  금일까지 기독교는 죄를 사하고 그 영혼이 천당 간다는 것이 목적이었는데 말세 비밀이란 진리를 계시록과 선지서를 통하여 대조해 보면 인류 종말에 새로운 시대가 올 때는 무신론적 정책이 북방에 자리 잡고 백성의 경제 자유를 박탈하고 모든 사람을 압박하는 정치를 하는데는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나오다가 그리스도가 그때에 재림하므로 북방 세력이 다 망하고 이 세상은 그리스도의 통치 왕국이 온다고 가르쳤다.

  그러면 이것을 믿는 기독 신자가 반공 운동을 하는 것은 자본주의와 같이 개인의 자본을 옹호하자는 목적보다도 모든 종교인들이 종교 신앙 자유를 찾자는 목적보다도 좀더 들어가서 공산당은 북에 자리잡고 기독교를 짓밟고 진리를 대적하고 나오는 것은 분명히 심판의 대상자라고 보는 것이다.

  이 세력이 망하는 것은 자연을 초월한 신의 역사가 주 재림기에 나타나서 북방을 무찌르고 짓밟고 나간다는 말씀과 북방 세력이 다 심판을 받고 새 시대가 올 때에, 북방의 정치와 타협을 한 자는 누구든지 다같이 심판 받을 것을 분명히 말씀했으니, 우리 기독교인의 반공 투쟁은 경제 자유나, 언론 자유를 목적한 것보다도 공산 국가는 반드시 망하고 그리스도의 왕국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성경에서 믿기 때문에, 아무리 공산당이 강하게 일어난다 해도 조금도 타협하지 않고 끝까지 싸울 것을 말씀에서 무장하여 주님 다시 올 때까지 싸워 나간다는 것이 기독교인의 반공 투쟁의 특수한 점이라는 것이다.

 

 

22. 과학 발전과 기독교의 사명

 

  과학과 기독교는 서로 대적이 될 수도 없고 서로 떠날 수도 없고 과학과 기독교가 그 위치를 바로 움직일 때에 완전한 인격도, 완전한 사회도, 완전한 국가도 이룰 수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할 때에 과학 발전을 할 수 있는 정신 작용의 기능도 주셨고 또는 얼마든지 종교도 발전하여 새로운 시대를 이룰 수 있게 하신 것이다. 이제 과학 발전과 기독교의 사명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과학이 발전되므로 기독교는 완전한 진리를 증거할 때가 왔다.

  이날까지 기독교는 영혼이 천당 간다는 진리를 전하는 것만은 완전한 진리 운동이 아니다. 우리는 어떻게 되므로 이 땅에 완전한 그리스도의 왕국이 온다는 것을 증거하려면 오늘의 과학 발전이 되므로만이 모든 선지의 예언과 계시록을 증거할 수 있다.

  그러면 과학 발전이라는 것은 그것으로만 완전이 아니고 과학이 발전되므로 새로운 시대를 이룰 수 있는 시대적인 증거가 되는 동시에 이루어지는 역사가 된다. 과학이 발전되므로만이 기독교의 종말의 세계적인 복음 운동을 할 수도 있고 세계 인류의 전멸이라는 환란과 재앙도 있게 된다는 것이 성서의 종말론이다.

  모든 선지는 종말론을 말할 때에 하나님께로 묵시를 보았는데 교통이 극도로 빨라질 것을 보았다(단12:4, 나2:4). 세계 인류가 전멸되는 환란은 공기가 불이 되고 사람이 횟돌같이 되는 환란이라고 사33:10~12에 말했고, 심판기에는 인간 지혜와 지식이 별세계까지 간다고 옵1:4에 말했고, 인간의 지식이 발달되므로써 극도로 사치한 세상이 될 것을 계18:5이하에 말했다.

  또는 사람들이 극도로 인간 지혜와 지식에 미혹되어 자기밖에 없다고 한다고 사47:10에 말했고, 온 세계 인류는 한 시간에 불사름을 당한다고 계18:9~10에 말했다. 그밖에 모든 성경은 다 하나같이 북방 세력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나올 때는 세계 인류는 다 하나님의 완전성을 부인하고 자기 중심에서 극도로 방탕한 사회가 될 것을 말했으니 우리는 이때에 기독교가 일할 사명이 무엇이냐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한다.

 

  2. 기독교가 이때에 일을 해야 할 사명은 새로운 그리스도의 왕국이 이루어질 것을 목적하고 활동하여야 된다.

  우리가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한다는 것도 필요 없는 말이요 세계를 불태우는 전쟁이 오지 않도록 함으로만이 기독교의 사명을 한다는 것도 필요 없는 말이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믿을진대는 이러한 때에 살길이 무엇이냐는 것을 성서에서 분명히 가르칠 수 있다. 만일 기독교가 이 진리를 분명히 가르치지 못한다면 다시 오시는 주님을 영접할 수가 없을 것이다.

  주님 다시올 때는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 있다고 말한 것은 영혼 구원만을 목적한 것이 아니고 영'육이 아울러 구원받는 진리를 가르친 것이니, 성경을 비추어 볼 때에 사람이 극도로 빠른 교통을 하게 된 것도 주 재림기에 될 일이라고 했고, 세계 인류와 공기가 불이 되는 전쟁이 나온 것도 주 재림기에 될 일이라고 말했고, 인간 지식이 별세계까지 가는 것도 주 재림기에 될 일이라고 말씀했으니 우리는 재림의 주를 맞이할 성도들이 당할 환란과 활동할 역사와 받을 축복이 무엇인 것을 과학 발전을 이룬 금일에 와서야 분명히 증거할 수 있게 되었다.

  기독교의 종말론은 과학 발전이 지금같이 되는 일이 없다면 증거할 수가 없는 것이로되 과학이 극도로 발달된 현실에 와서 이 시대 사람에게 증거할 수 있는 말씀이 계시록이요 선지서라고 보게 된다. 지금 이때는 특별한 주석이 필요 없고 성경 본문 그대로 읽어서 이 시대 사람에게 가르칠 수 있는 것이 하나님 말씀이라고 본다.

 

 

23. 근심많은 성도의 가정

 

  인생의 근심은 왜 있느냐에 대하여 먼저 알아야 할 것이다. 근심이란 자체는 범죄한 인생에게 있는 것이다. 그러나 범죄한 인생이라도 두 가지 근심이 있다고 본다. 소망이 없는 근심은 죽은 영의 근심이요, 소망이 있는 근심은 산 영의 근심이다. 오늘의 산 믿음을 가진 성도의 가정에 근심이 많을 수밖에 없는 시대를 만났다고 보게 된다. 어찌하여 참된 성도의 가정에는 근심이 있을 것이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시대를 근심한다

  이 시대라는 것은 성도에게 큰 시험이 오는 때이므로 이 시험에 이기지 못하면 다시는 성도가 시기가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든다면 어려운 문제를 앞에 놓은 사람이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에 대하여 근심하는 것은 그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야만 될 사명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어려운 문제가 닥쳐와도 아무런 근심을 하지 않고 평안히 먹고 마시고 있다면 이 사람은 그 사명을 감당할 소망조차 끊어진 상태라고 본다.

  이와 같이 금일에 어떤 신자가 아무 것도 생각지 않고 세속으로 흐른다는 것은 자기 사명을 할 수 있는 기능을 상실한 자인 동시에 아무런 소망조차 똑똑하지 못한 신자라고 본다. 누구든지 산 믿음을 가진 신자라면 이때에 이 시대를 알고 근심치 않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 시대에 되는 일은 전부가 성도의 신앙에 대적이 되는 것만 왕성해가기 때문이다.

  오늘의 과학 문명의 눈부신 발전은 참된 산 믿음을 가진 자에게는 기쁨을 주는 것보다도 오히려 근심을 주는 일이 많이 있게 된다. 이것을 통하여 모든 사람이 참된 신앙의 사상을 지키기가 어려운 난제가 닥쳐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참된 산 믿음을 가진 성도는 이 시대를 근심하면서 왜 이러한 시대가 오느냐에 대하여 다시 한번 성경을 읽어볼 필요가 있고 그 성경에서 시대를 분별할 수 있는 새로운 지식을 얻고 지식을 발견하는 동시에 이 시대에는 어떠한 노선으로 나가야 된다는 것을 바로 깨닫기 전에는 모든 것은 다 수포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때가 왔기 때문이다.

  율법 시대가 끝이 나고 은혜시대로 바꿔질 때도 외식하는 바리새교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악평하면서 자기가 큰 승리를 보았다는 듯이 날뛰고 있었지만 참된 신자들은 크게 근심하게 된 것은 예루살렘이 앞으로 망하게 될 것을 근심했던 것이다(롬9:1). 근심하던 사도들은 오히려 영계가 새로운 역사를 하는 자가 되었지만 사도를 악평하고 자기네 권세를 내세우려고 하던 유대교는 다 망하고 만 것이다.  

  오늘의 이 시대는 분명히 은혜시대에서 환란 시대로 바뀌는 시대라는 것을 분명히 안 성도들은 금식하며 밤을 새워 눈물 흘려 기도할 수밖에 없는 때라고 본다. 이제 다시 전쟁이 난다면 미리 금식하고 하나님 앞에 부르짖고 해산의 수고를 다하던 자들이 남은 자가 되고 아무런 근심없이 세상 향락에 도취가 되어 음녀적인 행동을 하던 자는 분명히 망할 때가 왔다고 본다. 인류 역사상 이같이 무서운 환란이 있는 시대는 다시 없다는 것을 성서에서 알아야 한다.

 

  2. 시온 대회를 위하여 근심한다 (습3:18)

  지금 이때에 성도로서 근심하는 일은 기독교에 관한 일이다. 과거에는 교회의 상부가 양떼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고 싸워주는 일이 있으므로 따라가는 양떼들이 진리의 바른 노선을 찾아서 교회를 세웠지만 금일에 와서 오히려 양떼가 강단에 선 종을 근심하고 심지어 은혜를 받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상태에 들어갔다.

  과거에는 성령을 충만히 받은 종이 양떼가 성신 받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이 사도의 활동이지만 지금은 오히려 성신 받은 교인들이 성신 받지 못한 자가 강단에 서는 것을 눈물겹게 생각하고 오히려 금식하고 강단에 서는 종이 은혜를 받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광경은 가련하기 짝이 없다. 쓴 것을 달다고 하고 단 것을 쓰다고 하는 상부의 결정이라는 것은 오히려 참 종을 몰아내는 사단의 회가 되었으니 교회를 사랑하는 성도가 어찌 근심치 않으리요.

  양떼들은 피 흘리기까지 싸우려고 결심하는데 앞장을 서야 할 종들이 오히려 협상주의 노선을 걸어가며 순교적인 사상을 가진 사람을 협상주의 노선의 길로 끌어 보려는 수단을 가지고 있으니 어찌 될 것이냐는 교회 장래를 근심하게 된다. 하늘 높이 솟아오른 독수리 같이 올라가야 될 종들이 땅만 바라보고 기어다니는 유물적 정책과 보조를 맞출 수 없다. 하늘의 것을 사랑하는 사상과 짐승같이 땅의 것만 사랑하는 사상과 어찌 한자리에 앉아서 합의를 볼 수 있으랴.

  그러므로 계13:15에 다른 짐승이라고 한 것은 소위 종교 지도자로서 짐승의 표를 받게 하는 거짓 선지를 가르친 것이다. 슬프다 아리엘이여,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다 아리엘을 대적하니 아리엘은 약할대로 약해지는 자리에서 음성조차 낮아진다(사29: 1~4). 하나님은 참된 성도의 근심에 잠기어서 부르짖는 그 눈물을 받으시고 원수를 갚는 진노의 날이 임박했다. 남은 좋은 때가 왔다고 날뛰는데 오히려 근심하는 성도의 가정, 이 시대의 숨은 비밀 알고 보니 근심 중에 새 힘을 받도다.

 

  3. 생활 염려의 근심 (눅21:34, 사41:17)

  거짓 많은 세상에 양심대로 살아보려는 성도의 가정, 억울하게 사기를 당하고 보니 사업조차 실패하고 아들 딸 앞에 놓고 탄식하는 그 소리 가련하도다. 내 마음같이 믿고 도와주었건만 보람없이 되고 보니 오히려 미움 받고 쫓겨나는 그 광경 가련하도다.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가 천신만고 다하여서 자녀를 길렀건만 할일 없는 실업자 되고 보니 오히려 괴로움을 주는 쓴잔이 되었도다. 주일 성수 하려고 하다보니 취직할 길 없어 방황하며 신앙을 자라게 하는 교회를 찾아갔다가 소방대같이 은혜의 불을 끄는 교회에 가 상처를 받고 이것 저것 할 일 없어 방황하다가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기지개 켜며 잠자는 그 모양 가련하도다.

  슬프도다 잠자는 자여, 낙심 말고 일어나라. 가련한 자 복 받는 심판의 다림줄 동방에 나타났다. 화려한 생활 부러워 말고 심판주를 맞이할 준비 갖추어 새 시대 보자. 잠깐동안 근심 중에 밤을 새워 부르짖던 성도의 기도 응답이 내리므로 주의 천사 보호하여 승리의 길을 가게 되리. 사람이 무엇을 주고 성도의 믿음 빼앗을 수 있을까.

  산 믿음 가진 성도, 근심은 많지만 은혜도 많도다. 화려한 교회 찾아가 상처를 받았지만 천막 교회 찾아갔다가 새로운 힘을 받고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는 성도들이 많도다. 근심 중에 절개있게 일하는 자들아 신랑 주를 맞이할 그 날에 세세 영광 누리는 큰 기쁨 받으리로다. 근심도 할 때가 있고, 위로도 받을 때가 있으니 택한 자를 까불어보는 시련 속에 낙심 말고 나간다면 끝까지 기다렸다는 그 생활, 새 시대 가는 열매가 되리(사25:9).

 

 

24. 인생과 종교에 대하여

 

  현대 과학 문명이 최고로 발달되는 일에 따라서 사람의 마음에 종교심이 박약해지고 점점 물질 향락에 도취가 되어 그날 그날에 육적 만족을 누리는 일에 도취가 되어 영적 방면은 생각할 여지조차 없이 되는 현실이라고 보게 된다.

  소위 자본주의 정치 아래서는 황금만능의 시대라는 것을 생각하리만큼 금전만 있으면 얼마든지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이요, 소위 공산주의 정치 산하에 있는 백성들은 공산주의가 세계 통일한다는 허위 선전 하에서 미칠듯이 날뛰고 있는 사람들은 먹지도 입지도 않고 전쟁 준비에 전력을 두며 침략적인 사상에 충동을 받아 목숨을 아끼지 않고 침투하는 현실에 있는 철의 장막 속에서는 자기의 힘을 하나님같이 믿고 하나님이 보호 하사 우리 나라 만세라는 것은 정신이 빠진 사람의 잠꼬대 같은 소리라고 하고 있다.

  소위 협상주의라는 간판 밑에서 세계 평화를 꿈꾸는 인본주의적인 문화인들은 어떻게 하든지 전쟁을 하지 않도록 협상을 해야만 산다고 최선의 노력을 다해서라도 평화를 보존해야만 된다고 하고 있다. 심지어 기독교의 목사라는 인물들 중에서도 이일을 적극 찬동하며 어떻게 하든지 우리 사명은 협상주의를 적극 협력해 주는 교회가 되어야만 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참된 종교의 가치라는 것은 무엇이냐는 것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종교인의 특징

  종교라는 것은 세상을 비관한다든지 또는 원수시한다든지 하는 것은 산 종교가 아니요 우상적인 종교가 될 것이다. 종교는 세상을 떠난다는 것보다도 세상이 어떻게 되어서 인간다운 가치를 발휘하는 새로운 시대가 온다는 것을 정확히 가르친 것이 없다면 그 종교는 이 시대에 아무런 효과를 발휘할 수가 없을 것이다.

  오늘의 기독교가 죽어 천당만을 말하는 교회라면 이 시대에는 빛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현세에 큰 위기를 만난 백성들에게 이 난국을 돌파할 진리 운동이 없다면 이 시대 사람에게 아무런 변화를 줄 수가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의 진리는 이 시대 사람에게 가르쳐 주어야 할 말씀이 성경 전체에 8할을 점령하고 있는 것인데 죽어 천당이라는 진리는 대강 기록한 바울의 서신이요, 완전한 것이 올 때는 지상 왕국이 이루어지는 것이니 이것은 사도들이 해석한 것밖에 성경은 다 이 시대의 사람에게 가르칠 말씀이다. 세밀히 말하자면 기독교에서 이날까지 모르던 성경은 전체가 현 시대 사람에게 해당되는 진리라고 보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 종교인은 자본주의나 공산주의나 협상주의를 따라서 움직일 것이 아니고 자본주의, 공산주의, 협상주의에 따라가는 자들로 그 종말이 어떻게 된다는 것을 성경을 들어 가르쳐 주고 우리의 살길은 그 삼대 주의를 초월하여 진리에 명랑한 빛의 사람이 되어 이 시대에 모든 인간들의 앞길을 삶의 길로 인도해 주는 것이 있어야만 될 것이다.

 

  2. 종교인의 특권

  현 사회 사람이 다같이 찾고 있는 것은 자기의 주권을 바로 찾아보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혹은 경제권, 혹은 정권, 혹은 교권, 혹은 자기의 주관을 내세워서 자기 인권을 목적둔 자도 있다. 그러나 종교인의 특권이라는 것은 물권, 정권, 교권, 인권을 초월하여 있는 특권이 있다. 이것은 모든 권세를 지배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인생이라는 것은 물권에 매이면 물질의 종이 되고 정권에 매이면 정권의 종이 되고 교권에 매이면 교권의 종이 되고 인권에 매이면 사람의 종이다. 그러므로 종교인은 조물주 하나님의 특권 아래에서 활동하는 것이 있어야 완전한 종교인이라고 보게 된다.

  그러면 하나님의 특권이라는 것은 그 시대에 숨어있는 진리를 따라 신앙자에게 오는 것이니 우리가 이 시대에 종교인의 특권을 가지려면 이 시대에 숨은 비밀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바로 알아야 될 것이다.

  노아는 양심 시대 종말의 비밀을 바로 알므로 특권을 가졌고, 아브라함은 언약 시대의 비밀을 바로 알므로 특권을 가졌고, 율법 시대에는 모세가 그 비밀을 알므로 특권을 가졌고, 은혜시대에는 사도들이 그 비밀을 알므로 특권을 가졌고, 지금 환란의 시기를 놓고 이 시대의 비밀을 바로 아는 자라야 특권이 있을 것이다.

  이 시대의 비밀을 바로 알려면 누구든지 새일수도원에 가서 1개월간 그 학과를 공부하면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다. 앞으로 우리 나라의 특권은 이 시대 비밀을 바로 알고 진리 멸공 운동에 선지 국가가 되어야 할 것이다.

 

  3. 종교인의 특색

  이 시대 사람들은 시대적인 풍속과 사치를 따르는데 심히 바쁘게 따라가고 있다. 이것이 무가치한 생활이라고 보는 자를 종교인의 특색이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모양을 내려는 것이 종교인이 아니요, 종교인으로서 특색은 다른 사람에게 새로운 감화를 주는 것이 있어야 할 것이다.

  소위 현실주의란 것은 알맹이 없는 겨 같은 인격이라고 보게 된다. 종교인으로서는 언제나 초인간적인 특색이 있어야 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신앙하는 자로 하여금 그 시대 사람에게 특색이 있게 하여 그 시대 사람이 감화를 받고 그 시대의 조류를 거스려 나가게 했다는 것이 그 시대에 빛이라는 것이다. 언제나 인간들은 종기속(세속) 종기풍(풍속)이라는데 흘러가는 것이 생명의 진리가 없는 인간의 생활이다.

  만일 현 사회에 종교인이 공산주의 변론을 때려부술 만한 변론이 없다면 어찌 종교 지도자가 될 수 있으며, 과학의 힘을 초월한 힘을 받은 것이 없다면 어찌 과학자를 이끌 수 있으며, 현 문학을 초월한 지혜와 지식을 하나님께 받지 못했다면 어찌 문학자를 이끌 수 있으며, 현대의 물질 문명의 쾌락보다도 더 완전한 쾌락을 받지 못했다면 현실 방랑주의에 떨어진 사람을 이끌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 종교인으로서는 특징, 특권, 특색이 있어야만 현 사회의 모든 사람을 바로 가르칠 종교인이 될 것이다.

 

 

25. 인생의 두 가지 노선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할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여 하나님의 법도를 순종하면 얼마든지 인생의 가치를 가지고 생명과를 따먹고 영생하며 영원히 하나님과 동거동락 하자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인생에게 두 가지 노선이 생긴 것은 다음과 같다.

 

  1. 선악과를 먹은 죄에서부터

  사람의 몸에 선악과라는 나무의 과실이 들어갈 때 아담이 그 몸에서 가인과 아벨을 낳게 되었다. 이것은 아담의 영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령에 잡힌 바는 아니요,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이었지만 그 몸에 선악과의 질이 들어올 때 그 몸은 악한 자도 선한 자도 출생하는 열매가 나타났다.

  언제나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이라도 그 몸에서 두 가지 길을 걸어가는 자식을 낳게 되었다. 노아의 몸에서도 셈과 함이 나게 되고, 아브라함의 몸에서도 이스마엘과 이삭이 나게 되고, 이삭의 몸에서도 에서와 야곱이 나게 되고, 야곱의 몸에서도 악한 형들과 의로운 요셉을 낳게 되었다.

  이것을 본다면 아무리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의 몸에서도 두 가지 길을 가는 사람을 낳게 되었으니 이것은 질적 타락이 된 몸이기 때문이다. 자기 한 몸을 가지고도 의를 행하는 때도 있고 악을 행할 때도 있는 것이니 타락한 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 때에 아무리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하지만 항상 그 나라안에는 하나가 되지 못하고 두 길을 걸어갔던 것이다.

  그리스도가 세상에 올 때도 이스라엘 가운데 그리스도를 믿는 자와 대적하는 자가 대립된 것이 예루살렘의 비극이요, 또는 아무리 오순절 교회가 성신의 역사로 섰지만 그 가운데도 두 가지 길이 생겼던 것이다. 이렇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가 잘못이 아니요, 그 역사는 완전한 인격을 이루기 위한 역사이니 반드시 마귀의 역사가 대립되기 때문에 알곡과 쭉정이로 갈라지는 것이다.

 

  2. 중생 받은 자에게 미혹이 오므로

  이날까지는 중생을 받고 받지 못하는데 따라서 두 길이 있었다. 구약 때도 죽은 영과 생령으로 두 길이 있었고 신약 때는 세계 인류적으로 중생을 받은 자는 천국이요 받지 못한 자는 지옥이라는 두 길로 갈라진 것이다. 그러나 환란기에는 중생 받은 자를 미혹해 보는 흑암을 개방시킬 때에 아무리 하나님의 자녀라도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미혹을 이기게 될 것이고 지키지 않는 자는 미혹을 받으므로 재앙을 받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두 가지 노선이 된다.

  이 두 가지 노선은 주님 오실 때까지 계속 될 것이다. 만일 이것이 없다면 참된 그리스도의 왕국을 이룰 수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미혹을 이긴 자를 진실한 자로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계시록에 기독교 종말의 두 가지 노선은 붉은 짐승의 표를 받고, 받지 않는 것으로 갈라지는 것을 기독교 종말의 역사라고 말했다. 지금 여러 가지 교파가 생기고 복잡한 문제가 많이 있지만 결국은 두 가지 노선으로 끝을 맺고 마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용공, 반공 두 가지가 대립되는 것이 인류 종말에 끝을 맺는 싸움인데 이 싸움은 교회 안에서 끝을 맺게 될 것이다.

  지금 붉은 세력을 강하게 쓰는 것은 심판하기 위한 모략적인 방법이니 에덴 동산에 있는 아담, 하와를 꾀던 옛 뱀을 다시 한번 들어 쓰는 것이 기독교 종말의 큰 미혹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완전한 것을 주기 위해서는 붉은 용을 들어서 미혹해 보고 마지막 결전을 이루는 전쟁을 하게 한다. 붉은 용의 세력을 대항해서 말씀대로 싸우는 자에게 하늘 권세를 주고 붉은 용의 세력을  따라 가는 자에게 마귀 권세를 주어서 인류 종말의 끝을 맺는 전쟁을 하게 되는 것을 인류 역사의 끝을 맺는 아마겟돈 전쟁이 된다.

  지금 불가피 세계 인류는 두 가지 노선으로 갈라지고 마는 것이 심판기에 이루어질 일이다. 그러므로 새 시대를 이루는 심판은 붉은 용의 세력을 이겼느냐, 타협을 했느냐에 의하여 끝을 맺는 심판이 온다. 이 심판이 있으므로 다시 전쟁이 없는 평화 왕국이 이루어진다.

 

 

26. 탈선된 종교 사상은 무엇인가

 

  종교라는 것은 사람이 어떤 욕망을 가지고 연구나 또는 요구한다는 것보다도 조물주께서 피조물 된 인생을 더 완전한 곳으로 이끌어 주기 위한 사랑의 법칙을 세운 것이 완전한 종교의 진리라는 것이다. 그런데 종교의 탈선된 사상은 무엇이냐는 것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인본주의적 사상

  인본주의적인 사상이라는 것은 자기의 인격을 존중시하는 동시에 그 인격을 위하여 종교를 이용하는 것을 말한다.

  종교라는 것은 자아를 희생하는 것이 참된 종교의 본질인데 자아를 위하여 종교를 이용한다는 것은 아무런 생명 없는 종교가 되고 말 것이다. 종교란 자체는 자아를 초월한 신의 완전성을 믿으므로 자아의 부족을 그 신 앞에 깨닫고 그 신의 역사에서 자아라는 것이 완전히 개조되는 체험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 종교는 내게 아무런 효과를 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인본주의적인 사상이라는 것은 실지에 있어서는 참되신 신과는 대적이 되는 사상이라고 본다.

 

  2. 다신 숭배의 사상

  종교라는 것은 신 중에도 가장 위대하고도 참되신 여호와의 신을 공경하는 것 외에 여러 가지 신을 숭배한다는 것은 오히려 그 종교는 죄가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신은 여러 가지 마귀를 숭배하라고 낸 것이 아니고 그 마귀들이 아무리 방해해도 내 말만 믿고 순종하는 자라야 진실한 사람으로 인정하고 그 사람에게 복을 주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법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여러 가지 신을 섬긴다는 것은 오히려 그 종교를 통하여 자신을 망치는 일이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여호와 한 분만을 섬기는 종교로만이 완전이라는 것을 소유할 수 있는 것이다. 금일에 우리 나라에 종교가 많지만 다신 숭배의 종교 사상으로 말미암아 흑암에 떨어진 민족이 되었던 것이다.

 

  3. 방랑적 자유의 사상

  이것은 소위 신앙 자유라는 것을 악용하여 오히려 육체의 소욕을 따르는 자들이다. 성신의 역사로 육체의 소욕을 죽인다는 것을 목적하지 않고 육체의 쾌락을 목적하여 흥분 감정 오락적으로 흐르는 것으로써 하나님의 진리를 위하여 순교한다는 정신이 없이 그때 그때에 현실주의로 흐르는 자들이다. 소위 신 신학이니 세속화 신학이니 위기 신학이니 하는 명칭을 가지고 그 시대에 보조를 맞추자는 것이다. 이런 사상은 오히려 종교를 이용하여 육체의 만족을 찾는 음녀적인 신앙이라고 볼 수 있다.

 

  4. 봉건적인 사상이다

  이 사상은 과거에 자기 교파만이 정통으로 내려 왔다는 것을 고집하면서 새로운 발전을 오히려 무시하고 심지어 신비적인 역사가 있을 수 없다는 신학설을 주장하며 이적은 폐지라 하는 말까지 하게 되니 이러한 사상은 마른나무같이 되어 아무런 열매가 없게 될 것이다. 이러한 사상을 가진 자들은 자기가 정통이라는 것만을 세우기 위해서 인간의 수단 방법까지 부리면서도 자기의 신앙 노선만이 정통이란 것을 고집하는 자들이다.

  신앙은 시대를 따른다는 것도 탈선이요, 시대적인 변동을 가져오는데도 불구하고 그 시대에 전할 말을 오히려 무시하고 과거 시대에 전하던 그 말대로 전해야만 보수라는 것은 망령된 일이 아닐 수 없다.

  인력거를 끌고 가던 사람들이 아폴로를 타고 달나라에 가며, 나무 끝에 쇠를 맞춰 가지고 서로 찌르면서 싸우던 전쟁이 한번 던지면 세계 인류는 삽시간에 횟돌같이 되고 말 원자 전쟁이 나온 데도 불구하고 자기의 교파가 시작할 때 세운 교리와 해석만이 정통이라고 따지면서 이 시대의 비밀을 들고 나오는 새 일의 역사를 부인하며 심지어 새 시대가 없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터무니없는 정통주의라고 본다. 우리는 이 시대의 종교로써 할 일이 무엇이며 전할 말씀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될 것이다.

 

  5. 신비주의적 사상

  신비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는 신비가 아니고 성경 말씀을 오히려 혼선시키는 신비라는 것은 마귀의 미혹이라고 보게 된다. 그러므로 신비주의를 잘못된 사상으로 보는 것은 완전 계약의 말씀이 모든 선지를 통하여 빠짐 없이 기록된 후에 메시야 탄생에서부터 재림 시까지 기독교 역사라는 것은 약속을 세우신 하나님께서 그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 기독교의 신비적인 역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비주의적인 사상은 용납할 수 없다. 왜냐하면 자기가 어떤 환상, 입신, 영음을 듣는 일을 기준하여 나간다는 것은 오히려 교만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미 말씀한 대로 행하시는 신이신데 그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은 목적하지 않고 자기 신비적인 체험만을 중심할 때에 자동적으로 성경을 대적하는 적 그리스도의 영이 올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동정녀 잉태로부터 그리스도의 강림시까지 역사라는 것은 완전한 인격을 이루는 동시에 완전한 교회를 이루어 남은 종과 남은 백성으로서 이 땅에 새 시대를 이루는 것 외에 그 밖의 것은 아무런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신비를 인격 완성과 완전 승리의 역사로 중심되어 나갈 때에 빌라델비아 교회 같이 항상 열린 문이 있게 될 것이다.

 

 

27. 갈팡질팡하는 사람이 많은 세상

 

  인류 역사상 어지러운 세상이라고 하는 말은 이미 있어 왔지만 지금같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갈팡질팡할 수밖에 없는 난제가 부딪친 일은 처음일 것이다. 왜냐하면 전부가 인류 역사상 없던 일이 닥쳐왔기 때문이다.

  1. 소위 사상 문제란 것이다. 이날까지는 사상 문제 때문에 자기 민족끼리 가슴에 총을 대고 싸우는 전쟁은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우리 백의 민족은 동방의 예의지국이라는 미명을 가지고 삼강 오륜이라는 뚜렷한 도덕의 강령을 지켜오던 나라다. 그런데 남의 나라보다도 더 악착같이 싸우는 민족이 되었으니 이것이 어떻게 될 것이냐는 것을 생각할 때 백의 민족의 사명을 모르는 사람은 갈팡질팡할 수밖에 없는 난국을 당했다고 보게 된다.

  우리 나라는 지리적으로 볼 때 남북 통일이 되지 않고는 도저히 민생을 보존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크나큰 대륙을 북방에 지고, 동해 서해 남해로 아름다운 금수강산, 공기 좋고 물 좋은 곳, 천하에 제일 명산인 금강산을 중심하여 북방에는 지하 자원이 풍부하고 남방에는 미곡 창고라고 하는 말도 있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 나라가 금강산을 경계로 하고 북으로 남으로 갈라지고 보니 북방도 남방도 아무런 발전을 볼 수 없는 강토가 되었다.

  그러는 중 북방은 넓은 대륙을 공산당이 점령했으므로 남한 반도에 사는 우리에게 큰 압력을 주는 원수의 나라가 되고 보니 이 민족의 살 길이 아득한 것 뿐이다. 그러나 성경을 깊이 알고 보면 동방 땅끝 남한에서 반드시 세계를 통일할 진리 운동이 일어나므로 북방을 정복하고 새로운 시대가 온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갈팡질팡하는 이 민족에게 무엇을 주어야 할 것이냐 하는 것을 바로 알아서 바로 가르치는 사람이 나서야 할 것이다.

 

  2. 소위 W.C.C.라는 운동이 서양에서 시작되어 한국에까지 들어오는 이때에 교회 양떼들은 이것이 좋은지 나쁜지, 죽는지 사는지를 모르고 무조건 도와준다면 좋다고 한다는 것은 참된 그리스도인의 행동이 아니다.

  공산당은 무력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을 때에 기독교에 가장을 시킨 공산당을 만들어서 자유 진영의 심장이 되는 대 종교인 기독교를 통하여 사상을 침투하자는 것인데, 이때에 이 미혹을 막을 만한 진리 운동이 아니고는 갈팡질팡하는 기독교를 바로 잡을 수 없다. 그러므로 지금 큰 난제는 정치적으로는 극동 난제요, 종교적으로는 아메리카 교회를 향하여 큰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극동 난제와 아메리카의 종교 부패의 난제를 어떻게 해야 해결한다는 것은 기독교 종말론의 진리를 바로 증거하는 일이 동방에서 시작되어 서방을 깨우칠 적에 서방 교회가 각성을 받고 자기들을 깨우친 그 은혜를 감사해서 각성 받은 성도들이 동방 땅끝의 나라를 돕기 위하여 이사야 60장과 같이 이루어지므로 동방에서 역사가 일어나 북진을 하게 될 때에 극동 난제와 아메리카의 종교 부패를 바로잡게 된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작정이란 것이다. 이 비밀을 바로 아는 지식을 가진 자라야 이 시대의 새벽 별이 될 수 있다.

 

 

28. 종교가 부패되는 원인에 대하여

 

  종교라는 것은 언제나 부패를 가져오는 것은 말단에서부터가 아니고 지도층에서부터라는 것을 구약 말기를 보아 알 수 있다. 지도자 부패가 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의의가 있다.

 

  1. 작은 일에서부터 온다

  다윗 왕국이 북방 사마리아가 생긴 것은 솔로몬왕이 너무나 영화로운 생활에서 이방 여인을 사랑하는 데서부터 시작되어 예루살렘 앞산에 그모스라는 모압의 신을 위하여 산당을 지을 때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본다(왕상11:1, 7). 이것이 근본 되어 이스라엘을 망치는 부패의 쓴 뿌리가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종교 부패는 지도자가 마귀편과 싸우지 않고 타협하는 시간부터 오는 것이다. 왜냐하면 종교는 의식이나 도덕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영적의 생명을 위한 종교이니 영적으로 타협이 있을 적에 그 시간부터 영적 생명은 빛을 내지 못하고 어두워지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종교는 예배를 드린다 하여도 하나님께서 받지를 않으시면 그 시간부터 죽는 것이다. 그러므로 강단에 서는 종이 영적으로 마귀를 이기지 못하고 타협하는 시간부터 그 강단은 마귀가 정복하기 때문에 그 아래에 있는 양떼들에게 영적 소성이 없고 피곤이 오기 시작될 때에 교회는 식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한 시간, 두 시간 계속으로 은혜가 내리지 않을 때 자연적으로 예배에 성의가 없어지게 된다.

  종교라는 것은 불완전한 인간이 예배를 드리므로 예배의 대상자이신 하나님께로부터 새로운 것을 받으므로 만이 인생은 영적 생활을 보존함으로써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강단에 지도자가 하나님과 의합이 되지 못하면 하나님은 그 종을 통하여 아무런 것도 허락치를 않으므로 교회는 시일이 갈수록 식어지는 동시에 결국은 우상적인 종교가 되고 말 것이다. 우상은 기독교 안에도 형식적 예배가 될 적에 하나님은 우상과 같이 취급하는 것이다(사66:3).

  그러므로 금일에 종교 부패는 강단에서부터 시작되되 사람이 보이지 않는 영계에서 되는 일이므로 교회에 의식과 정치와 도덕과 모든 사업이 있다 해도 그것이 다 부패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단지 교회는 그 제사를 하나님이 받으시므로 만이 신령이요, 받지 않으실 때에 그 시부터 보이지 않는 영계의 부패는 시작되는 것이다. 종교는 지도자가 하나님과 의합이 되는 것으로만이 나날이 영적 발전을 가져오는 동시에 모든 열매가 좋아질 것이다.

 

  2. 경솔한 것이다 (습3:4)

  아무리 기도의 용사로 앗수르 군대를 물리친 히스기야도 경솔하게 하나님 앞에 물어 보지도 않고 바벨론 사신에게 거룩한 성전의 모든 것을 보여준 일로 그 성전이 바벨론에게 다 무너진 사실을 볼 때에 경솔이라는 것이 얼마나 교회를 망치는 지도자의 죄라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종들이 깊은 기도도 없이 하나님의 일을 한다 하면서 경솔하게 일을 저지르게 되므로 도리어 일을 하지 않은 것보다도 못하게 된다. 경솔하게 일하는 자는 언제나 결말은 부패를 가져온다. 왜냐하면 시작은 하나님의 일이라고 시작했지만 하나님께서 역사하지 않을 때에 사람이 애써 본다 하여도 그 수고는 인위적인 방법이 되므로 부패를 이룰 것이다. 함부로 경솔하게 남을 이단이라고 판단하면 그 시간부터 그 입은 실수한 입이므로 그 입에 여호와의 말씀이 떠나게 된다.

  그러므로 종교 지도자는 듣는 대로 보는 대로 판단하지 않는 자가 되어야 한다(사11:3).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을 쓸 적에 시련을 시켜 보는 것은 심지가 견고해서 흔들리지 않는 자에게 평강으로 지켜주는 것이니(사26:3) 언제나 경솔하지 않는 자라야 여호와의 사자가 될 것이다. 모세가 경솔하게 반석을 두 번 치므로 가나안 복지를 들어가지 못하고 모세를 따라가던 60만 대중이 경솔하게 원망하다가 다 광야에서 쓰러지고 여호수아와 갈렙만 남았던 것이다.

  언제나 종교 지도자는 경솔을 주의하고 항상 하나님께 부탁하고 하나님의 역사로만이 될 줄 믿고 아무리 어려운 시험이 와도 움직이지 않고 담대히 나갈 때에 모든 일은 다 좋은 열매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금일에 주의 종들이 경솔하게 움직일 때에 교회는 자동적으로 분열이 되고 자동적으로 부패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교회 사업이라는 것은 함부로 시작하기도 어렵고 함부로 활동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언제나 떨리는 마음으로 희생적인 기도가 있어서 응답으로 이루어지는 것 외에 그 밖의 것은 결말은 부패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성신으로 역사하는 일로 시작이 되면 그 결말은 신령한 것을 이루게 될 것이니 항상 지도자가 성신에 사로잡혀 있는 생활이 아니라면 사람은 다 경솔하게 되고 실패하게 되므로 부패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3. 주권을 다투는 일이다 (미3:1~4, 요삼 9)

  교회란 것은 어려운 시험이 없이 선 교회는 없다고 본다. 핍박과 시험이 올 때에 교회를 세우는 자는 순교적인 사람이 아니고는 도저히 복음을 전할 수가 없는 것이므로 지도자가 양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고 나섰던 것이다.

  그러나 교회가 확장되고 환영을 받게 될 때에 자동적으로 그 주권을 쥐고 나갈려는 야욕이 있는 사람이 학적으로나 인격으로나 우수한 것을 보고 따라가는 자가 많게 될 때에 자동적으로 영적 방면으로 신령한 자가 물러나게 되고 인간 육안으로 볼 때에 유명하다는 인물이 주권을 쥐게 되면 그 사람이 자기의 주관에 따라서 교회를 지도하게 되므로 자동적으로 영적 방면보다도 인간 학적으로 흐르는 일이 있게 될 때에 이러한 지도를 받는 일꾼들이 다수를 차지하게 되고 신령한 사람이 소수가 될 때에 교회는 자동적으로 속화되는 것이다.

 

  4. 목자가 삯을 위하여 일하게 될 때 (미3:11)

  강단 생활을 하는 자가 성금으로 생활하는 것은 구약 시대도 십일조의 성금으로 제사장들이 생활하는 것을 법으로 세웠고, 신약 시대에도 초대 교회의 전도자에게 물질로 봉사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이라고 요三 8에 말했고 딤전5:18에 말했다.

  그러나 신령한 은혜로써 약한 교회를 부흥시키고 교회가 없는 곳에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보다도 약한 교회를 버리고 큰 교회를 찾아가려고 노력한다는 것은 목자의 양심이 아닐 것이다. 삯을 위한다는 것보다도 계1:6과 같이 하나님을 위하여 제사장의 일을 바로 하기 위해 충성을 다할 때에 하나님의 은총이 내려 모든 일에 축복을 받게 되는 것이 있어야만 될 것이다.

  교회의 양떼들이 억지라는 것이 있게 될 때에 거기서부터 부패는 시작되는 것이다. 목자가 삯을 위하는 것보다도 그 교인들이 목자를 위하여 노력하고 받드는 것은 하나님이 역사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목자가 자기의 명예나 안락을 위한다는 데서부터 하나님은 그 교회에서 역사하지 않으므로 모든 일은 오히려 죄악으로 이루어지는 일까지 있게 될 것이다.

 

  5. 성경에 잘못된 해석이 있을 때 (사8:20, 사28:7~8)

  하나님은 진리를 바로 가르치기 위하여 교회를 세운 것인데 그 교회의 목자가 성경을 잘못 해석할 때부터 마귀는 그 강단에 역사하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은혜시대 교회는 사도가 전한 말씀 그대로 가르쳐야 사도에게 역사하던 성령은 역사할 것이다(요一2:27). 사도가 해석을 하지 않은 예언서를 억지로 푼다는 것은 오히려 주의할 일이라고 벧후1:19에 말했다. 왜냐하면 이미 이루어진 십자가, 부활, 승천, 성신 강림을 세계 만방에 증거하는 기간은 이루어질 예언을 증거할 필요조차 없는 때이다.

  예언을 증거할 때는 1260일을 증인 권세로 역사할 때이어야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은혜시대는 사도 교훈에 가감 없이 증거할 때에 성령의 은사가 역사하는 것이요 환란기를 앞에 놓고 예언을 증거하는 전 3년반에는 그 예언을 바로 증거해야만 촛대교회가 되는 것이다.

 

 

29. 가련한 양떼를 살리는 길에 대하여

  기독교의 역사상 지금같이 가련한 양떼가 어찌할 줄 모르는 때는 처음 된 일이라고 본다. 무서운 정치적인 박해보다도 어떤 환란이 온다는 것보다도 제일로 기독교에 급한 일은 가련한 양떼를 어떻게 살리느냐에 대하여 급한 문제라고 생각된다.

  가련한 양떼는 누구냐는 것을 먼저 말한다.

 

  ① 교회의 상부를 초대 교회와 같이 알고 덮어놓고 순종하는 양떼들이다.

  과거에 교회의 지도자들은 양떼를 위하여 죽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고 나서는 종들을 통하여 피 흘린 순교에서 교회를 세웠던 것이다. 그때에는 가련한 양들이 참된 사랑의 종들을 통하여 하나님이 누구시며 예수가 누구신지를 모르던 민족들도 다 알 수 있게끔 된 것은 목숨을 내 놓고 이방 땅에 우상이 가득한 나라를 찾아가서 싸워준 열매라고 보게 된다. 또는 굶주린 양떼가 생길까봐 빚진 사람같이 안타까운 마음을 가졌던 종들이었다. 그러므로 가련한 양떼는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가련한 양들이 누구냐 할 때에 무조건 따라가는 양떼들인데 자기 마음같이 목자를 믿고 따라갔더니 오히려 그 심령이 상처를 받게 되고 학설이 무엇인줄 모르고 무조건 옳은 해석인줄 알고 따라가고 보니 받은 은혜를 다 쏟고 빈 껍질만 남는 상태에 떨어진 자들이다.

 

  ② 은혜를 받고 시험이 올 때 이것을 바로 수습을 해주는 사람이 없으므로 무조건 날뛰는 자들이다.

  은혜를 받은 자는 확고한 진리를 받아야 되는데 말씀은 없으나 은혜는 된다고 따라가는 자들이다. 말씀 없는 은혜란 것은 대체로 무엇인가를 모르고 일시에 이상한 체험만 있으면 그것이 은혜인 줄만 안다는 것은 가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은혜를 받은 사람은 말씀으로 시험을 물리치는 일이 없이는 오히려 더 혼란을 가져오게 된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성령을 받고 일할 때는 마귀 시험이 왔던 것이다. 시험이 올 때에 말씀으로 물리친 그리스도는 가련한 양을 위하여 눈물과 피를 흘리는 충성된 증인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은혜를 받은 자는 시험을 말씀으로 물리칠 적에 신앙 정로를 걷는 생활이 있게 되는 것이다.

 

  ③ 덮어놓고 축복이라는 말이 믿어져서 있는 재산을 다 바치고 결말은 처자를 한데(방밖에) 내 놓고 할 일 없는 방랑자가 되는 자도 있다.

  축복이라는 것은 진리를 따라 살 때에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참고 나가므로 주 앞에 상급을 받는 것이 원 목적인데 물질을 바치면 물질의 축복이 열 배나 온다는 것에 끌린다는 것은 성경의 진리와 맞지 않는 노선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물질을 바치면 물질의 축복을 받겠다는 목적보다도 하늘 나라에 쌓아둔다는 목적에서 바쳐야만 될 것이다.

  이러한 혼란이 오는 때에 더군다나 큰 일은 영적 흑암이 오는 동시에 물질의 시련까지 닥쳐오게 되는 자리에서 어떻게 하여야 될 것이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첫째 : 자신이 말씀에 완전 무장을 갖춰야 된다

  왜냐하면 지금은 영적 흑암기가 와서 누구든지 중생을 받은 자라면 다 시험을 거쳐서 말씀의 빛으로 흑암을 물리치고 나가는 자라야 재림의 주를 맞이할 때가 왔기 때문이다. 은사를 받기 위하여 역사할 때는 성경을 몰라도 십자가를 믿으므로 은사를 받았지만, 마귀 흑암이 오는 이 때에는 누구나 다 각자가 그 흑암을 물리칠 수 있는 말씀의 무장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때를 당하여 하나님께서 강권으로 말씀 무장 할 수 있는 기관을 세웠으니 이것은 사람의 무엇으로 선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강권으로 불 가운데서 명령하여 새일수도원이 이루어진 것이다.

  새일수도원은 학과가 성경 해석법, 요한一서 강의, 조직신학 강의, 선지서 강의, 계시록 강의인데 이 학과는 간단한 책자이지만 이것을 가지고 25일간만 수도하면 말씀 무장이 어느 성도나 다같이 가지게 된다. 이렇게 되는 원인은 그 책이 사람의 연구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새일수도원 강단에서 설교하는 이 목사에게 책자를 받아쓰라는 명령이 하나님께로 오므로 그 시에 수도를 받던 사람들이 붓을 들어 기록하기 시작하여 계속으로 말씀이 내리어 책자가 이루어졌으니 누구든지 이 책자를 읽으면서 성경을 공부할 때 조금도 혼선이 없는 해석이 나타나서 만족한 해석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는 것은 어느 교회나 교회를 봉사할 제직까지라도 말씀이 무장되어야 될 때가 왔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역사하는 일이라고 보게 된다.

  둘째 : 인격을 무장해야 된다

  지금은 누구나 다 용사 인격을 가지고 나가지 않고는 교회를 유지할 수가 없는 때이니 용사의 인격을 가져오는데는 예배 시간마다 내리는 새 힘을 받아야 될 것이다.

  우리가 반공적인 투쟁을 하는 용사가 되어야 하나님의 보호가 같이 할 것이니 촛대교회가 이루어지려면 교회의 모든 성도들은 용사가 되는 인격으로 갖추어야 될 것이다. 우리는 죽어서 천당을 목적한 것이 아니요, 아무리 어지러운 일이 와도 사상적인 투쟁을 할 수 있는 인격을 하나님께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지금은 새일 성가를 부르는 예배를 드릴 적에 합심 호소하는 시간에 하늘로부터 강한 역사가 막힌 강물이 터져 내리듯이 내려오는 은총을 받아야 된다. 우리는 예배를 볼 때에 의식을 따르는 것과 시간을 지키는 것보다도 시간마다 하늘로 내리는 새 힘을 받는 교회가 되어야 될 것이다. 이렇게 되려면 강단에 선 종이 완전한 무장을 하고 완전한 인격을 가진 종이 서서 예배를 인도할 때에 하나같이 용사가 되는 인격을 이루는 교회가 될 것이다.

  셋째 : 완전한 단체를 이루어야 한다

  영혼 구원은 개인 문제이지만 환란 가운데 남은 교회가 되려면 완전한 사상으로, 진리로, 인격으로 구성된 단체가 되어야 된다. 앞으로 우리의 살 길은 개인 영혼 문제가 아니고 단체적인 교회 문제가 결부된다.

  이 단체란 것은 완전한 새 시대에 들어가는 단체이므로 철두철미한 무장을 갖춘 종들로 이루어진 단체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축복은 완전한 복을 받을 수 있는 교회의 단체가 이루어져야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될 것이다.

 

 

30. 전쟁이냐 평화냐에 대하여

  인간의 완전한 지식은 전쟁과 평화에 대한 진리를 분명히 아는 것이 20세기 말단에 처한 인생들에게 가장 필요한 일이라고 본다. 인간은 지식을 위하여 발전하고 있는 것이 인간의 미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낼 때에 지식에서 발전하고 지식에서 복을 받도록끔 한 것이 인간의 인격이며 향상의 생활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전쟁과 평화에 대하여 알파와 오메가의 진리를 알아야 된다. 전쟁은 어디서 시작되었으며 어디서 끝을 맺을 것이냐 하는 것을 먼저 알아야 된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할 때 사람을 위하여 창조했고 또는 이것을 바로 다스리느냐에 문제를 놓고 하나님은 시험해 보는 것이 사람에게 향상을 주기 위한 선한 방법이었다. 그러므로 시험을 하는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어야 한다.

  첫째 : 시험의 제목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둘째 : 그 말씀을 가지고 시험을 해보는 자를 냈으니 이것이 가장 간교한 뱀이란 것이다.

  하나님은 가장 간교하게 낼 수 있고 가장 진실하게도 낼 수 있는 것이 조물주 하나님의 창조력이라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토기장이가 진흙을 가지고 마음대로 얼마든지 그릇을 만들 수 있는 권리가 있는 것같이 창조주의 권리는 모든 것을 자유롭게 창조하되 만물을 다스리는 사명을 맡은 사람에게 가장 간교한 뱀을 내어서 시험해 볼 권리가 있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선생은 학생에게 시험을 쳐 볼 권리가 있고 또는 정치인은 백성들을 다스릴 때에 백성들에게 법을 따라서 벌할 권리와 또는 얼마든지 보장할 권리도 있다.

  이와 같이 조물주 하나님은 피조물된 만물을 사람에게 주는 동시에 사람을 기계화시키지 않고 더 향상을 시켜서 하나님과 동등가는 권리를 주기 위해서는 가장 간교한 뱀을 창조해서 사람과 싸움을 하게 하여 그 간교한 뱀을 이기면 하나님과 동등한 권리를 가지는 것이요, 이기지 못하면 이긴 자에게 지배를 받는다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로운 방법이었다.

  그러므로 옛 뱀이요 붉은 용이요 마귀요 사단인 세력이 지금 북방에 자리잡고 세계를 침투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선한 모략의 방법이 있다.

 

  1. 에덴 동산에서 세웠던 법을 다시 끝을 맺는 것이니

  에덴 동산에서 가장 사랑하는 아담, 하와를 간교한 뱀으로 시험을 해 본 것은 이기면 왕권을 주기로 작정한 것인데 사람이 이기지 못하므로 간교한 뱀이 용이 되고 사단이 되는 발전을 가져오게 되어 사망으로 왕 노릇하는 권세 아래서 세계 인류는 다스림을 받게 되었다.

  그러므로 둘째아담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낸 것은 만왕의 왕으로 세우기 위한 목적이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완전히 승리하시므로 만왕의 왕이 되었고 그리스도의 권세로 마귀 권세 아래서 죽은 영들을 해방시키는 역사가 즉 기독교 십자가 복음 운동인데 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중생 받은 사람들에게 지상 왕국을 주기 위하여 다시 옛 뱀 붉은 용의 세력을 개방시키어 전 세계 인류를 꾀도록 한 것이다(계12:7~9).

  이것이 마지막 미혹이다. 이 미혹을 받지 않고 예언의 말씀대로 붉은 용의 세력이 망하고 새 시대가 온다는 것을 참인 줄 믿고 붉은 용의 표를 받지 않는 자라야 지상 왕국인 에덴 축복을 다시 받게 한다는 것이 기독교 종말론이다.

  그러므로 지금 전쟁은 무력전보다도 사상전이다. 이 사상이라는 것은 붉은 세력이 세계를 통일하느냐, 그리스도의 기독 사상이 세계를 통일하느냐에 대하여 사상전이 대립된다. 그러므로 공산당의 사상은, 봉건주의 사회가 자본주의로, 자본주의 사회가 공산주의로 이루어지는 합법적인 변론을 하고 있다. 이 변론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요 간교한 옛 뱀의 말이라고 계13:2, 11에 말했다.

  다시 말하자면 자본주의 사회와 사회주의 사회가 대립된 현실에 자본주의는 개인의 자본을 옹호하자는 주의요, 사회주의는 개인의 자본을 국유화시켜서 사회주의 노동당 정권의 자본이 되게 하여 이 자본을 노동당 정권이 지배하여 세계를 공산화시키는 목적을 두고 움직이되 사회주의 사회의 사람들은 전부 노력을 해서 사회주의 정권의 발전을 위하여 순종할 것 뿐이요, 전 국민은 다 목적을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하는데 총 궐기하자는 것이 소위 공산주의를 위한 사회주의 정치라는 것이다.

  이렇게 되는데는 자본주의 정치라는 것은 사회주의 정치 앞에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다는 이론을 세우는 것이다. 그 이론은 무신론자의 마음을 끌고 있다. 왜냐하면 개인의 자본을 위하여 종이 되지 말고 세계를 공산화시키는 이 운동에 손길을 맞잡아 준다면 너희는 얼마든지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사회가 온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과학적인 발전을 가져올 때 농장이나 공장이나 모든 전부를 과학적 기계로 움직일 때 사람의 손이 필요 없이 평안히 먹고 살 수 있는 사회가 올 것이니 그 농장과 공장을 개인에게 주지 말고 국가가 움직이는 사회가 되므로 국민은 차별이 없이 공평하게 사는 것을 공산주의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을 가지고 나오는 현실에 공산주의와 싸울 필요가 없다는 반전 데모가 미국에서 본격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의 성경을 비추어 보면 계시록에 만 왕의 왕이 지상 왕국을 이룰 때는 붉은 세력을 내보내서 전 세계 사람을 인간 육.육.육의 세력으로 미혹해 본다고 했으니 육이라는 것은 인간 과학적인 최고 발달을 가르친 것이다.

  그러므로 과학적으로서 기계화되는 공장과 농장으로 전 국민이 하나같이 잘 살 수 있게 한다는 공산주의는 하나님의 말씀을 볼 때 분명히 붉은 용의 앞잡이 짐승과 거짓 선지를 통하여 오는 미혹이라고 성경은 가르쳤다.

  그러므로 소위 협상주의라는 간판 아래 W.C.C라는 것은 성서로 볼 때 심판의 대상자가 되는 음녀적인 행동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사상을 대적하는 공산당을 용납한다는 것은 영적과 사상적으로 음녀라고 본다.

  우리는 사상전을 하는 것이 성서적이요, 또는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양심의 행동이라고 본다. 종교를 아편으로 보는 공산 사상은 참된 진리의 종교가 되는 기독교로서 사상전을 하는 것이 마땅히 할 의무라고 본다. 그러므로 우리의 전쟁은 영토를 위한 전쟁도 아니요, 정권을 위한 전쟁도 아니요, 진리를 위한 전쟁이다.

  진리를 대적하는 붉은 용의 세력을 이기는 방법은 진리 하나를 바로 변론할 때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진리대로 이루어지는 권세 역사를 주어서 마귀 권세를 이기도록 역사를 내리시므로 마귀 권세가 거꾸러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진리대로 끝까지 싸우는 사람을 내세우기 위한 모략적인 방법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리를 사상적으로 바로 변론해서 싸우는 사람이면 하나님은 붉은 용의 세력을 없이하고, 그 사람에게 지상 통치권을 맡기겠다고 예언을 했기 때문에 우리는 전쟁은 필연코 참된 하나님의 진리가 승리한다는 것을 믿을 때에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 나라 만세를 부르게 된다.

 

  2. 완전 평화의 왕국

  우리는 무신론자가 아니요, 신의 존재를 합법적으로 믿는 동시에 그 하나님과 교통하는 산 체험의 종교를 믿는 자로서 공산주의를 용납하는 평화라는 것은 한 미혹에 떨어지는 마귀의 술법이요, 공산주의를 없이하므로 이 세상은 참된 평화가 오는데는 사람의 무력으로써가 아니고 하나님의 심판이 붉은 용, 붉은 짐승, 붉은 여자인 바벨론에 온다고 하였으니 오늘에 성경대로 붉은 세력이 세계를 침투하는 것을 볼 때 성경대로 심판이 올 것은 틀림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세 비밀을 말하는 것은 우리가 망한다는 것이 아니고 붉은 세력이 망하고 평화로운 시대가 오는 것을 평화 왕국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죽어 천당을 목적한 것이 아니고 지상 평화 왕국은 붉은 세력이 망하는 것으로 온다는 것을 믿고 싸우는 것이 기독교 종말의 말세 비밀 진리 사상이라는 것이다.

  지금 이때에 기독교가 누구든지 믿으면 다 천당을 간다는 진리만 가지고 공산당도 믿으면 천당 간다는 것은 시대를 모르는 사람들의 잠꼬대와 같은 소리로 본다. 공산주의가 예수 믿고 천당 간다는 것으로 성경을 들고 교회를 들어오는 그 행동은 성경을 볼 때에 거짓 선지라고 본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말씀대로 승리가 오고 말씀대로 평화가 올 것을 믿는 것이 기독교인의 완전한 신앙 사상이라는 것이다.

 

 

31. 신앙의 정로는 하나 뿐이다

  신앙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세워 주신 언약을 믿는 것이니 언약이 이루어진 것을 믿음으로 영혼이 살고 이루어질 것을 믿음으로 완전한 새로운 시대를 이루는 데까지 들어가는 것이다. 이루어진 일도 하나님이 행하신 것이요, 이루어질 일도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이니 하나님은 언제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는 여러 가지 방침으로 변경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요, 어떻게 행하시겠다는 방침을 세우신 그 예정을 행하시는 데는 이미 말씀한 언약의 책대로 행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제 신앙의 곁길은 무엇이냐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할 것이다.

  1) 그리스도의 완전성을 부인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앙 대상자의 완전성을 그대로 믿지 않을 때에 완전성을 가진 주께서 역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완전성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행하시는 것으로써 완전성을 이루시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것은 초림의 주로서 할 사명을 다 행했다는 것이다.

  십자가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통하여 완전 속죄, 완전 구원을 완성한 것이니 구원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완전성을 통하여 믿는 자에게 거저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완전성을 그대로 믿지 않으면 구원을 받는 산 체험을 가질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타락한 인생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가 완전해지므로 만이 행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완전성을 그대로 믿지 않으면 자동적으로 곁길이 되는 것이다.

  2) 성신의 완전 역사를 믿지 않는 것이다

  아무리 예수를 믿는다 하여도 성신의 완전 역사를 그대로 받지 않는 사람은 아무런 열매를 맺을 수 없고 그 신앙이 마른나무같이 되고 마는 것이다. 성령은 영혼 구원만을 목적한 성령이 아니요, 사람으로서 완전한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져서 동등 가는 왕권에 이르기까지 목적 둔 성신인데 성신의 완전성을 그대로 믿지 않을 때에 그 신앙은 장성할 수가 없는 곁길이 되는 것이다.

  3) 성경을 가감하는 일이다

  이미 이루어진 일을 가감해도 탈선이요 이루어질 일을 가감해도 탈선이 되는 것이니 오메가의 역사로 기독교는 끝을 맺는 것이다. 아무리 은혜를 받는 자라도 종말의 진리가 탈선될 때에  그 사람은 자동적으로 흑암에 빠져 헤매게 되는 것이다.

  다음에 신앙 정로는 하나라는데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정로라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그 일을 그대로 믿는데는 우리가 주님의 손을 붙든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우리를 붙들어 인도하기 때문에 정로를 가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이루어진 일은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이니 행하신 일은 우리를 위하여 행하셨기 때문에 그대로 믿을 때에 행하신 일의 열매가 우리에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누구든지 예수께서 날 위해 죽으신 것을 확실히 믿을 때에 내가 완전히 속죄의 은총을 받는 체험이 있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살아 계셔서 나를 인도하실 줄 믿을 때에 주께서 성령으로 항상 인도하여 주시는 것이요, 주께서 나를 위하여 기도하시는 것은 나를 완전케 하기 위한 목적인 것을 믿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완전하게 되도록 역사해 주시는 것이다.

  이렇게 되므로 신앙은 체험의 종교가 되는 것은, 진리가 완전하지 못한 것을 체험으로 말미암아 믿음이 완전해지는 것이 아니고 진리가 완전한 것을 완전히 행하시는 역사가 주의 역사이므로 그 진리를 완전히 믿을 때에 우리에게 진리대로 이루어지는 체험을 기독교의 완전한 신앙 정로의 체험이라는 것이다.

  2. 행하실 것을 믿는 일에 있어서 정로를 찾아야 한다. 금일에 기독교가 행하실 일을 바로 믿지 못한다면 이 사람은 변화성도의 자격을 이룰 수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부활성도는 이미 행하신 일을 믿음으로 자기가 그 증거를 체험하고 피 흘리기까지 싸우면서 증거한 자들이요.

  변화성도는 이루어질 것을 증거할 때 완전한 무장을 말씀에서 하고 말씀대로 싸워서 승리하는 자들이다.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신 것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천국에 들어가는 거요, 이루어질 말씀을 그대로 믿고 싸우는 데서 승리한 자들이 새 시대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루어진 일을 믿는 것도 대표적인 사람의 증거를 받아 믿음으로 하나같이 체험을 받고 한 길을 가게 된 것이요, 앞으로 인류 종말에 이루어질 일도 대표적인 사람이 증거하는 대로 하나같이 믿고 따라갈 때에 그 정로를 바로 찾아 나가므로 하나같이 승리하고 남은 종으로 역사하다가 들림을 받는 동시에 들림 받는 종의 뒤를 따르던 양떼는 하나같이 복을 받고 지상 왕국의 축복을 백성된 자격으로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루어진 것을 믿는 신앙의 정로는 사도의 교훈에 있고 이루어질 일의 신앙 정로는 계시록과 선지서에 있는데 이 진리를 증거하는데는 반드시 대표자가 있으므로 하나님이 그 대표자를 통하여 한 정로를 가도록끔 역사하는 것이다(계11:1이하).

 

 

32. 어려운 일과 쉬운 일에 대하여

  조물주 하나님은 사람을 낼 때에 일하기 위해서 낸 것이다. 신께서 사람을 통하지 않고는 아무런 일도 할 필요가 없고 또는 일을 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뼈와 살이 있는 몸이 없이는 신만이 존재해 가지고는 아무런 열매를 나타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열매라는 것은 식물이 맺는 열매도 있고 사람이 맺는 열매도 있으니 식물이 맺는 열매는 사람이 하는 일을 돕기 위한 열매이며 식물의 열매를 사용하여 사람이 일하므로 열매를 맺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열매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다(요15:8).

  이제 어려운 일이 무엇이냐는 것을 알아야 한다.

  1. 마음이 끌리는 일이다.

  사람이라는 것은 자기 마음이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고 합당치 않는 일로 끌려지는 것인데 이것을 마음의 고통이라는 것이다. 마음이 고통을 받게 되는 것은 합당치 않은 일에 마음이 끌려지는 때에 오는 것이다. 에덴 동산에 있는 사람이 간교한 뱀의 말을 들을 적에 마음이 뱀의 말에 끌리게 될 때 죄를 범하는 일이 생겼던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이 괴로워지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지 않을 때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하여 일하는 자인데 그 말씀을 의심할 때부터 감당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이 마음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2. 부끄러운 일이다.

  부끄러움이라는 것은 인격을 상실하는 자에게 있게 되는 것이니 부끄러운 일을 당할 때에 심지어 자기 목숨을 끊는 데까지 이르게 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부끄러움을 모르던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범할 때부터 시작된 것인데 끝까지 말씀을 순종하지 않던 사람이 큰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3. 두려운 일이다.

  사람이라는 것은 하나님 다음가는 지위를 가졌으므로 얼마든지 두려움이 없이 살 수 있는 것이 인생인데 두려운 일이 생기는 것도 하나님 말씀을 순종치 않는 자에게 오는 것이다(사66:4).

  두려움이라는 것이 사람에게 올 때에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는 존재가 된다. 이것은 죽음이라는 것이 따라오는 증거다.

 

  4. 피곤한 일이다.

  사람에게 피곤이 따르는 것은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세상의 것을 바라볼 때 오는 것인데 하나님의 역사가 함께 하지 않는 때에 사람은 피곤해지는 것이다. 인생 자체에는 일할 만한 힘이 있지를 못하므로 하나님은 얼마든지 사람에게 새로운 힘을 주고자 하시는 것인데 그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을 때에 영과 육이 아울러 아무런 열매 없는 가운데로 떨어지고 마는 피곤이 오는 것이다.

 

  이제 쉬운 일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1.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쉬운 일을 인생에게 주기 위한 목적이다(마11:28~30)

  하나님께서 사람을 낼 때에 어려운 일이 없도록끔 냈던 것이다. 얼마든지 평화롭고 자유롭고 아름답고 즐거운 생활을 하게 하신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순종하지 않을 때부터 마음에 탐심과 몸에 부끄러움과 영적에 두려움과 생활에 피곤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마음에 자유와 인격에 담대함과 심령의 평안함과 생활의 상쾌하고 새로움을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인간에 와서 행하신 일은 인간이 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을 없이하고 쉬운 일을 할 수 있는 일을 이루어 놓기 위하여 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고 하시었다.

  2. 주님께서 시키시는 일은 다 쉬운 일이다

  왜냐하면 무엇이나 초인간적이 되기 때문이다. 만일 기독교의 복음이 사람에게 쉬운 일을 주는 복음이 아니라면 이것은 필요가 없는 복음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사람에게 어려운 일을 주는 예수님이라면 그 교훈은 복음이 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세우신 것은 어려운 일을 당한 인생에게 쉬운 일을 주시겠다는 약속이다.

  이제 쉬운 일에 대하여 세밀히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회개할 때에 즉시 그 영혼이 구원을 받는 일(눅23:42~43), 증거하는 말씀을 들을 적에 은혜를 받는 일(행10:44~46), 한번 설교할 때 대중이 중생을 받는 일(행2:37~40), 한번 말할 때에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일(행3:6~7), 옥중에서 나오게 된 일(행12:8~12), 그 밖에도 모든 일은 다 쉬운 일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승리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열매이다.

  기독교는 사람이 행하는 종교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당신이 행하겠다는 언약이 복음이라는 것이다. 이 복음을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그대로 행하시는 것을 기독교의 역사라는 것인데 제일 어려운 일은 하나님께서 맏아들 예수님을 통하여 행하게 하시고 그 밖의 믿는 자들에게는 전부가 쉬운 일로 역사하도록 하시는 것을 은혜라 하는 것이다.

 

 

33. 인생 중에 제일 높은 사람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낼 때에 제일 높은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제일 낮은 사람이 될 수도 있게 낸 것이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첫째아담은 제일 높은 사람도 아니요 제일 낮은 사람도 아니고 높아질 수도 있고 낮아질 수도 있는 인격으로 지음을 받은 사람이다.

  그러나 사람이 높아지지 못하고 낮아지기 시작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한 데서부터 그 말씀을 듣지도 않고 반대하는 데까지 떨어진 것이 이 세상이라는 것이다. 금일에 공산당은 하나님도 없고 사람에게 영혼도 없고 심판도 없고 천국도 없고 사람은 고등 동물이라고 하는 데까지 떨어진 것이 짐승의 사상이라는 것이다.

  이제 사람이 제일 높은 사람이 되는 과정을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사람의 향상이라는 것은 과학 발전에 있는 것이 아니고 신학적 발전에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과학이 발전된 현실에 인심이 더 악화되고 더욱 부패한 사회가 되며 더 무서운 전쟁이 있게 될 것을 인간들이 무서워 떠는 공포 속에 들어간 현실에 있어서 소위 신학이라는 것을 연구한다는 자들이 신학적 발전을 못 가져오고 점점 퇴보하는 소위 신 신학이라는 것이나 세속화 신학이라는 것까지 나왔다는 것은 기독교에 큰 화를 가져올 징조라고 보게 된다.

  이제 신학 발전에 의하여 가장 제일 높은 인격을 얻으려면 다음과 같이 볼 수 있다.

 

  1. 중생을 받은 자가 중생의 도리를 바로 성경에서 가르치므로 중생을 받는 사람들이 열매로 나타나고, 성신의 은사를 완전히 받은 사람이 은사를 증거할 때에 모든 사람이 은사를 받게 되고, 중심 성결을 받은 사람이 증거할 때 성결함을 받는 열매가 나타나므로 많은 열매를 맺는 종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가 중생이나, 은사나, 성결이나 이것을 받지 못한 사람이 신학을 연구한다는 것은 인격조차 없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금일까지에 기독교는 이 역사로써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대종교를 이루었다.

 

  2. 이제 와서 우리는 죽음을 맛보지 않고 변화 승천하는 인격을 가지려면 완전한 변화의 인격을 새 힘으로 받고 완전한 성경 지식을 지혜와 총명의 신, 모략과 재능의 신,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을 받아서 여호와를 경외하므로 즐거움을 삼고 보는 대로 듣는 대로 판단하지 않고 입에 권세를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조물주 하나님의 언약을 완전히 통달하는 지식을 가지고 많은 사람을 환란에서 구출시키는 지도자가 되는데는 완전 성결을 마음에 받고, 완전 개조를 몸에 받고, 완전 영감을 머리에 받고, 완전 변론을 입에 받고, 철장 권세를 손에 받고, 완전한 승리를 이루는 돌진 용사의 걸음을 걷는 자가 되어야 인류 종말에 세계를 통일하는 인격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