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 인봉개시

by 새일 posted Jul 21,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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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목차
강의
백마의 2차 승리와 천년시대(1-2,19:11-16,20:1-3)
평화를 보존할 수 없는 일과 심판(1-4,19:11-16)
큰 진노의 날이 올 때에 있을 징조(1-8)
수가 차기를 기다리는 주님의 심정(9-11)
순교자의 호소와 수가 차는 일(9-11)



6 장 인봉 개시

  강  의

6:1 내가 보매 어린 양이 일곱 인 중에 하나를 떼시는 그 때에 내가 들으니 네 생물 중에 하나가 우뢰 소리 같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5장과 같이 봉한 책을 맡으신 주께서 인을 떼기 시작할 때 네 생물 중 하나가 우뢰소리와 같이 위엄 있게 명령을 내렸다. 이것은 어린양이 인을 떼는 역사는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움직인다는 뜻이다(1).


6:2 내가 이에 보니 흰 말이 있는데 그 탄 자가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


 인은 주권의 뜻이니 세상만사가 다 그리스도의 장중에서 움직인다는 뜻을 볼 적에 먼저 백마 탄 자가 나타났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인을 떼는 목적은 세계 인류를 구원하여 새로운 시대를 이루기 위한 것이 목적이니 백마가 나온 것은 계19장 11절 이하와 같이 최후의 악의 세력인 짐승과 거짓 선지를 때려 부수고 완전 승리의 결전을 이루는 사실을 보아서 분명히 왕국건설의 복음 운동을 가르쳤다.
 이 운동이라는 것은 악마를 대적하는 전쟁이니 활을 가지고 나타난 것은 슥9:13에 유다로 당긴 활을 삼아서 이방의 세력을 친다고 말했고 렘50:28~29을 보면 시온을 위하여 원수를 갚는 데는 활 쏘는 자를 모아서 행한 대로 갚는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활을 가진 백마 탄 자는 심판권을 가진 자를 가르쳤다. 면류관을 받은 것은 완전 승리의 왕권을 받고 나가서 승리하는데 두 번 이겨야 한다는 것은 기독교 복음 운동은 두 번 일어날 것을 말했다.
 첫째는 잃었던 백성을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을 시키는 은혜의 시대 역사요, 두 번째 승리라는 것은 마귀 세력을 완전히 이 땅에서 없애 버리는 역사를 가르쳤다. 그러므로 봉한 책의 인을 뗄 때부터는 심판기가 온다는 뜻이 나타난다. 이 날까지 사망의 법에서 성신의 법으로 옮겨 놓는 역사는 만민에게 성령을 부어 주는 역사이니 예루살렘 다락방에 떨어진 불길은 전 세계 인류에게 하나 같이 그 세례를 받도록 역사하는 것이 20세기 반기에 도착했다. 그러나 두 번째 이기려 한다는 것은 붉은 용의 세력을 없애버려야 할 최후의 결전을 가르쳤다(2).


6:3 둘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둘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더니
6:4 이에 붉은 다른 말이 나오더라 그 탄 자가 허락을 받아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리며 서로 죽이게 하고 또 큰 칼을 받았더라


 둘째 인을 뗄 때에 붉은 다른 말이 나왔다. 이 탄 자가 허락을 받고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리며 서로 죽이게 하고 또 큰칼을 받았더라 했으니 이것은 백마 탄 자가 두 번째 이겨야 할 심판기에 하나님께서 붉은 용의 앞잡이 붉은 정권의 세력이 북방 넓은 땅을 다 점령하게 되는 것을 가르쳤다.
 이 계시는 아시아 사람에게 나타나니 만큼 아시아를 중심해서 보여준 것이니 금일에 아시아 주를 중심하여 붉은 세력이 허락을 받고 나가서 아시아의 극동 난제가 닥쳐오므로 세계 평화를 보존할 수 없는 유수 불합의 난관에 봉착된 현실이다.
 이러한 때에 셈의 민족인 장막에서 서로 죽이는 민족 골육상쟁이 벌어지는 것은 심판기에 될 징조의 하나가 된다(참고성구 마24:7~10, 사19:2~3, 미7:5~6). 하나님은 왜 이렇게 하느냐에 대하여는 심판하기 위한 하나님의 모략적인 방법이니 심판의 대지가 붉은 짐승의 표를 받으면 죽고 안 받으면 산다는 것이 심판의 총 예언의 법이 된다(참고 성구 계14:9~11).
 심판이라는 것은 먼저 악의 세력을 들어서 친 다음에 오기 때문이다(3~4).


6:5 셋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셋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내가 보니 검은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가 손에 저울을 가졌더라


 셋째 인을 뗄 적에 검은 말이 나왔다. 그 탄 자가 손에 저울을 가졌다. 이것은 붉은 세력이 혁명적으로 아시아를 덮어 나올 때 슥6:6과 같이 남방 세력인 자본주의의 경제권의 세력이 적색 사상의 정권을 대항하고 나올 것을 가르쳤다. 만일 경제권의 세력이 아시아를 막아 주지 않으면 도저히 붉은 세력을 감당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하시는 것은 아직까지 심판기가 아니니 심판기가 올 때까지 잠깐 동안 들어 쓰는 것이다(5).


6:6 내가 네 생물 사이로서 나는듯하는 음성을 들으니 가로되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로다 또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 말라 하더라


 그러나 생물 중에서 한 음성이 나서 가로되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보리 석되라고 하면서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은 극동 아시아의 경제 혼란이 올 것을 가르쳤다. 한 데나리온은 마20:2을 보면 하루 노동의 정당한 인건비다. 그러면 하루의 인건비로 도저히 생활 대책을 할 수 없다는 뜻으로 나타났다.
 사41:17절과 같이 동방 땅 끝에 오는 경제 혼란이다. 그러나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지 말라는 것은 동방 아시아에서 기독교 본질이 변치 않고 기름과 등을 준비하고 나오는 말세 역사가 있을 것이니 절대적으로 하나님이 보호한다는 뜻이다. 아무리 붉은 세력이 북방에서 침투하고 아무리 자본주의에 경제권 아래 경제 혼란이 와도 말세에 일어나는 참 감람나무 기름과 극상 포도주와 같은 진리 역사는 해칠 자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6).


6:7 넷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넷째 생물의 음성을 들으니 가로되 오라 하기로
6:8 내가 보매 청황색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음부가 그 뒤를 따르더라 저희가 땅 사분 일의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으로써 죽이더라


 넷째 인을 뗄 때 청황색 말이 나왔다는 것은 기독교 종말에 큰 미혹을 뜻한 것이다.
 왜냐 할 때 하나님께서 4대 병마를 보인 것은 흰말은 기독교 복음주의요, 붉은 말과 검은 말은 정치적인 대립이요, 청황색 말은 마귀의 세력이 극도로 강한 역사를 하되 택한자라도 미혹할 수만 있으면 미혹할 만한 세력을 가진 것이다. 이 빛은 도저히 분별하기가 어려운 빛이니 마귀의 미혹은 분별할 수가 없는 궤휼적인 방법으로 나오는 것이니 그 이름은 사망이라 했다. 음부가 그 뒤를 따른다는 것은 지옥에 떨어뜨리는 마귀 역사라는 것이다.
 최후 말단에 하나님께서 심판하기 위하여 마귀 세력을 개방시켜 땅 1/4의 권세를 얻게 했다는 것은 4대 거두의 하나가 되어서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으로 죽인다고 했다. 이것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역사하는 것이니 첫째는 학살이요, 둘째는 자유 박탈이요, 셋째는 죄악의 세력을 고조하는 동시에 유물적인 사상으로 그 영들을 죽이는 것이다(7~8).


6:9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6:10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6:11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이때는 다섯째 인을 뗄 때이니 모든 순교자의 영들이 심판을 독촉한다. 이것은 이 날까지 억울한 성도들의 피 값을 갚아 줄 심판이 가까웠다는 것인데 주님께서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준다는 것은 그 영들에게 신부 자격을 인정하는 것이며 잠시 동안만 기다려서 순교자의 뒤를 따를 자들의 수가 차기를 기다리는 것은 종말의 역사를 뜻한 것이니 심판의 다림줄을 쥐고 청황색 말의 세력과 싸워야 할 용사들의 그 수가 차는 일이다. 여기에 주님께서 죽음을 받으라고 말한 것은 순교적인 생활을 가르친 것이다. 누구든지 종말에 순교적인 생활이 없이 진리를 바로 증거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한 것이다(9~11).


6:12 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총담 같이 검어지고 온 달이 피 같이 되며
6:13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선 과실이 떨어지는 것 같이 땅에 떨어지며
6:14 하늘은 종이 축이 말리는 것 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기우매
6:15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가 굴과 산 바위 틈에 숨어
6:16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6:17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하나님께서 택한자의 원한을 풀어 주는 진노의 날은 큰 지진 같은 변사가 일어나고 해가 총담 같이 검게 되는 일은 캄캄한 흑암의 시대가 온다는 것인데 달이 피 빛같이 되는 것은 도저히 이 땅에 빛을 받아서 비취는 달과 같은 성도의 역할이 없게 되며 별들이 떨어지는 것은 옳은 지도자가 권리를 박탈당하는 일이요, 하늘이 종이 축같이 말려 들어가는 것은 이 땅에 은혜로운 일은 다 걷어 가고 진노가 오는 날인데 각 산과 섬이 제자리를 떠난다는 것은 인간의 모든 계급이 없어지는 혼돈 시기가 오고 보니 인간의 정권을 잡은 자들이나 경제의 세력을 잡은 자나 강한 자나 약한 자나 다 공포 속에서 떨면서 어찌할 줄을 모르는 진노의 날이다.
 수치를 당하고 후회 막심한 자리에서 도저히 그 날에 설 수 없이 다 망할 것을 가르쳤다(12~17).

 하나님께서 6장을 보여 준 목적은 진노의 날이 임박한 때를 알려준 경고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진노의 날은 사대 병마가 대립되는 날이라는 것을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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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의 이차 승리와 천년 시대
  ( 계 6 : 1 - 2, 19 : 11 - 16, 20 : 1 - 3 )
 
  서  론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은 싸움이 없는 역사가 아니고 싸움이 있으며 승리가 있으므로 안식의 시대가 온다는 것이 성서의 원리가 되는 것이다. 인류 역사는 인류 타락이 있고 싸움이라는 것은 가인과 아벨에서부터 시작이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어찌하여 싸움이 있게 했는가 하는 진리부터 알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싸움이 있음으로서 왕권을 가질 자격을 이루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싸움이 없는 승리가 있을 수 없고 승리 없는 왕국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비극을 가져오는 현실을 이룬 것은 의의 세력이 승리를 보지 못하고 악의 세력이 승리로 이루어지는 열매이다.

  다시 말하자면 아담이 싸움에 지므로 써 이루어진 사망은 금일에 전 세계를 흑암으로 떨어뜨리고 비참을 가져오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 싸움에 승리를 볼 자는 백마를 탄 자라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계시록은 봉함한 책을 열어 놓을 때부터 세상의 될 일을 보여준 것이 계시록이다. 인류 역사의 시대 시대에 되어진 일도 안팎에 가득히 기록한 책의 뜻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계시록은 목적한 것이다.

  둘째아담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승리를 이루게 되는 것은 신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와서 승리한 것이다. 이것은 흰말을 탈 수 있는 군대를 이루는 공로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요 16장 33에 말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첫째아담이 마귀와의 싸움에 지므로 사망이 왕노릇했고 둘째아담 예수가 십자가에서 승리하므로 의의 왕국을 이루게 되었다. 여기에 백마 탄 자라는 것은 십자가의 피로 성결을 이룬 성도의 무리를 가르친 것이다. 이제 백마 탄 자가 어떻게 되어서 두 번째 승리하게 되느냐 하는 것을 본 성경에서 말한다.
 
  1. 승리 (계 6:1-2)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승리는 잃었던 백성을 찾는 일에 승리를 보게 된다(계5:9). 하나님은 인간을 왜 잃었느냐 하는 것은 죄 값이다. 죄 값은 사망이니 사망이 왕노릇하는 권세 아래 인류를 빼앗긴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도가 세계를 정복하는 일이 첫째 승리가 되는 것이다.

  누구든지 십자가의 피를 믿으면 무조건 죄악의 권세에서 해방을 준다는 싸움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역사의 수많은 종들이 이 해방의 운동을 위하여 피를 흘리며 싸웠던 것이다. 즉 우상적인 마귀의 종교가 지배하고 있는 정권과 교권을 때려부수며 들어간 싸움이 기독교의 자유를 부르짖는 해방 운동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흑암에서 빛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 놓은 역사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승리의 부활을 이룬 몸으로서 승천하여 역사하는 활동이다. 아무리 기독교를 반대하던 사람도 회개시키어 복음을 위하여 싸우도록 만드는 혁명적인 큰 역사는 기독교를 통하여 세계를 침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하늘과 땅의 권세를 받았으므로 승리를 이룬 것이다(마28:18-20). 승천하신 주께서는 권세를 받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라는 말씀이 필연코 이루어진 승리를 본 것이 금일의 세계적인 기독교 문명이라는 것이다.
 
  2. 두 번째 승리 (계 19:11-16)
  첫째 인을 뗄 때 두 번째 이기려고 한다 하는 말이 시작되었고 계19:11 이하를 보면 완전히 이기었다는 것이 있고, 계20:1 이하를 보면 천년왕국이 온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차 승리는 어떻게 되어서 승리하게 되느냐를 알려면 계시록을 똑똑히 보아야 할 것이다. 금일까지는 계시록이 하등 필요가 없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즉 이것은 해방 운동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계시록은 승리해야만 된다는 무서운 전쟁이 다시 일어날 것을 말했다. 일차에는 그리스도가 승리한 십자가의 피로서 해방적인 운동이었으나 2차에는 해방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싸워서 이겨야 할 무서운 환난이 온다는 것이다.

  금일까지는 하나님의 자녀를 마귀의 권세에서 해방하여 등록시키는 일이 있으나 계시록은 이미 등록된 자녀들이 싸워야 된다는 것이다(계5:10). 이 때는 붉은 말이 허락을 받고 나온다. 이차 승리는 붉은 말과 싸워서 이겨야 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그러므로 계19장 19절을 보면 백마 탄 군대가 붉은 짐승의 군대와 싸움을 마치는 광경이 보여졌다.

  짐승의 군대는 분명히 용에게 권세를 받았다고 계13장 4절에 가르쳤고 거짓 선지는 붉은 짐승에게 권세를 받았다고 12절에 말했다. 그러면 백마 탄 군대의 대적은 붉은 용과 짐승의 군대와 거짓 선지 이것이 싸움의 대상자가 된다.

  그리스도는 십자가 상에서 혼자 승리를 이루므로 세계적인 해방을 일으키는 열매를 가져왔으나 두 번째 싸움은 백마 탄 자의 입에서 예리한 칼이 나오는데 이것으로서 싸운다고 말했다(계19:21). 이 검이라는 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했다.

  계시록에 내가 다시 올 때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계22장 6절에 말씀하셨으니 말씀으로 승리한 자라야 다시 오시는 주님을 살아서 맞이한다는 것이다. 세밀히 말하자면 죽음을 맛보지 않고 들림 받은 종은 붉은 세력과 싸워서 이겨야만 들림 받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말씀대로 역사하실 것이니 말씀을 바로 믿고 지키는 자는 이기도록 하나님께서 권세를 준다는 것이다(계2:26,11:3). 이 권세는 그리스도와 동등한 권세다. 주님은 이 권세를 왜 맡기느냐 하면 붉은 세력을 때려 승리하라는 허락을 맡기는 것이다. 재앙으로 이를 칠 수 있는 권세를 맡기고 붉은 군대를 쳐서 없이할 권세를 맡기는 것이다(슥9:13-15).

  누구든지 계시록의 진리를 바로 나아가서 전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권세를 줌으로써 이기는 것이니 이 권세를 받는 자 외에는 다 붉은 세력에 먹힘을 당한다는 것이다 이 권세라는 것은 말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권세이니 그리스도께서 말하는 대로 되는 권세를 하나님께 받았고 그리스도는 종말의 백마 탄 군대에게 이 권세를 맡기는 것과 같다.

  예를 들면 대장이 싸우는 군대에게 마음대로 쳐죽이라는 권세를 동등하게 맡기는 것과 같다. 그러면 이 권세는 만 왕의 왕의 권세니 당할 자가 없다. 즉 이 때는 살인죄가 성립되지 않는다. 죄인을 부르는 시대의 종들은 원수에게 죽으면서도 불평이 없어야 했지만 계시록의 예언의 말씀을 가지고 싸우는 종들은 죽이라는 권세를 받았기 때문에 재앙으로 땅을 칠 수가 있다.

  모세에게도 엘리야에게도 죽이는 권세를 맡겼던 것이다. 이렇게 되므로 교회는 양대 진영으로 갈라지게 된다. 권세 받은 종은 승리하게 되고 짐승의 권세를 의지하고 타협하던 종은 용서 없이 백마 탄 군대에게 죽게 된다(계19:20).
 
  결  론
  천년왕국이란 마귀가 없고 죄악이 없고 재앙이 없고 싸움이 없고 사망과 질병과 고통이 없는 평화왕국이 온다. 왜냐하면 마귀를 없애고 그 앞잡이 짐승의 군대와 거짓 선지를 다 없애고 보니 필연적인 평화왕국이 온다. 다시 말하면 첫 번 역사는 원수를 사랑해서 원수라도 회개하기를 기다리는 역사요 두 번째 역사는 원수를 갚는 역사이다.

  이 날까지 억울하게 원수에게 박해를 받고 피 흘리던 기독교의 원통한 사정을 종말에 권세 받은 종들이 원한을 풀어 주는 것으로 끝을 맺는 것이다. 그러므로 환난 가운데 이길 수 있는 권세 받은 종은 왕권을 받고 환난가운데 권세 받은 종이 전하던 예언의 말씀을 믿고 피난한 자는 백성이 된다.
 



 
 
  평화를 보존할 수 없는 일과 심판
  ( 계 6 : 1 - 4, 19 : 11 - 16 )
 
  하나님께서 인간 종말에 평화를 보존할 수 없는 난제가 올 때에 심판을 내리시고 새 시대를 이루신다는 것을 목적을 두고 과거 선지들에게 묵시로 말씀하셨고 사도 요한에게는 계시로 보여 주셨다. 이 날까지의 전쟁이라는 것은 평화를 보존할 수 없어서 싸운 것보다도 영토를 침략하는 침략 국가의 행동으로 전쟁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세계 대전의 일차 이차는 침략 국가를 없애기 위하여 일어났지만 인류 종말의 전쟁은 도저히 평화를 보존할 수가 없는 난제가 올 것을 6장에 보여 주었다. 이사야 선지는 북방 앗수르의 세력을 사람의 힘으로 막을 수 없게 될 때에 임마누엘이 나타나서 임마누엘의 세력이 세계를 정복함으로 새 시대가 온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가르쳤고 모든 소 선지자들은 이사야에 기록된 묵시의 말씀과 같이 북방 세력을 인력으로 막을 수 없이 될 때에 재림의 주가 올 것을 목적하고 가르쳤다.

  모든 선지의 예언은 구약 시대의 북방 세력을 예루살렘의 성도의 힘으로 막을 수 없이 될 때에 하나님의 역사가 북방 앗수르와 바벨론의 세력 안에서 예루살렘을 망하게도 하시기도 하고 다시 북방 세력을 없애고 예루살렘을 동방 고레스로 복구하시면서 그와 같이 인간 종말에 될 것을 가르쳤다.

  선지 예언서는 예언적인 역사로 구약 말기에 이루어지는 동시에 종말에 다시 이루어질 것으로 되어 있고 계시록은 구약 선지 예언서에 묵시를 종합적으로 완전 조직을 이루어 보여줄 적에 다음과 같이 보여 주었다.
 
  1. 백마의 일차 승리가 있은 후 심판기가 올 것을 보여줌 (6:1-2)
  모든 선지서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세계에 전파된 후에 구약 말기와 같이 북방 환난이 올 것을 말했고 계시록에는 백마를 탄 자가 이기고, 또 이기려 한다는 것으로 보여졌다. 그런데 이기고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승리로 말미암아 세계 인류를 사망의 법에서 성신의 법으로 해방시키는 역사로 천국 복음이 전파된 것을 뜻한 것이요 두 번째 이기려 한다는 것은 심판을 뜻한 것이다.

  우리는 기독교가 일차 승리를 완전히 이룬 것을 보아서 이차 승리의 심판이 올 때가 임박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심판기로 들어가는 시기가 왔다는 것은 계6장만 보아도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다. 누구든지 인류 종말인 심판기에 대한 비밀을 분명히 알려면 계시록을 보면 된다.

  오늘 날 기독교가 심판기에 관한 것을 분명히 알아서 심판기에 남은 종 남은 교회를 일으키는 일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성서를 보아서 알 수 있다. 기독교의 역사는 십자가의 승리로 이루어지는 역사도 있고 심판의 승리로 이루어지는 역사도 있으니 심판의 승리라는 것은 성도로서 마귀 세력을 이기는 것을 말한다.

  이 날까지 기독교의 역사는 죽은 영을 살려서 구원해 주는 일에 승리를 이루었다면 세계적인 인류 전멸이라는 재앙 심판에서 남은자가 받을 축복에 관한 진리를 전할 때는 바로 지금이다.
 
  2. 붉은 말이 세계 평화를 깨쳐 버리는 환난이 있은 후에 심판기가 올 것을 보여줌 (3-4)
  붉은 말이라는 것은 백마의 대적을 가르쳤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붉은 말을 허락해서 세계 평화를 깨쳐 버리고 서로 죽이게 하는 일을 하게 하신 것은 심판하기 위한 방법이다. 그러므로 붉은 말과 끝까지 싸우는 자는 심판권을 받게 되고 타협하는 자는 멸망을 받을 음녀가 된다.

  하나님께서는 붉은 말을 들어서 알곡과 쭉정이를 가르는 역사를 한 것이다. 오늘날 붉은 세력을 인력으로 막을 수 없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심판할 때가 온 증거이니 하나님의 심판의 역사를 믿고 절개를 지키는 자는 백마를 타는 자가 될 것이고 절개를 지키지 않고 타협하는 자는 얼룩말이 되어서 붉은 말과 같이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순교적인 사상을 가진 자는 진실한 자로 인정하게 되고 진실치 못한 자들은 붉은 용, 붉은 짐승의 세력이 망할 때에 같이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이 심판의 대지가 된다. 오늘날 붉은 말의 세력이 평화를 깨쳐 버린다고 해서 이것이 두려운 일이 아니요 붉은 세력을 심판할 때에 같이 심판을 받을까 봐 두려워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오늘날 백마 탄 자의 심판을 무서워하지 않고 붉은 말 탄 자의 환난을 무서워한다는 것은 검은 말이라고 본다. 이날까지는 검은 말이 붉은 말을 대항하고 있었지만 붉은 말의 세력이 세계 평화를 깨쳐 버리는 위기가 올 때에 검은 말은 아무런 싸울 사상이 없으므로 얼룩말에게 먹힘을 당하고 마는 것이 심판기라는 것이다.

  오늘의 자본주의가 협상으로 흐른다는 것은 아무런 사상이 없는 증거이다. 사상 심판이라는 것은 붉은 짐승의 표를 받으면 죽는 다는 것이요 행위 심판이라는 것은 책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년왕국은 사상 심판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요 영원한 무궁세계는 행위 심판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3. 백마 탄 자가 심판할 것을 보여줌 (계 19:11-16)
  백마 탄 자의 심판이라는 것은 마지막 전쟁을 뜻한다. 이 땅에서 붉은 짐승의 군대를 완전히 없애는 전쟁을 백마 탄 자의 심판이라는 것이다. 붉은 세력을 없애는 것은 인간의 병력으로 없앨 수 없고 백마를 탄 군대가 짐승의 군대를 없앤다.

  백마 탄 군대라는 것은 인간의 몸을 가진 군대가 아니고 완전히 변화체를 가지고 승천하였다가 지상강림한 변화성도인데 이 군대가 붉은 군대를 이 땅에서 없이하는 것을 사상 심판이라는 것이다. 이 땅의 전쟁이라는 것은 인간 무력적으로는 완전한 평화를 이룰 수가 없으며 붉은 세력 앞에 머리를 숙이느냐 끝까지 사상적으로 싸우느냐 하는 싸움으로 큰 문제가 되는 바벨론 사상이 된다.

  그러므로 백마 탄 자의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 없이 그대로 믿고 지키는 자라야 변화성도가 되어 완전 승리를 이룬다는 것이다.
 
  결  론
  인간 종말에 평화라는 것은 사상 통일로 이루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아무리 영토를 많이 가졌다 하여도 영토적 전쟁으로 승리할 수 없고 하나님께서 심판을 나릴 때에 심판 받을 사상이냐 심판을 할 사상이냐 하는 것으로서 끝을 맺게 되는 것이다.
 
 



  큰 진노의 날이 올 때에 있을 징조
  ( 계 6 : 1 - 8 )
 
  하나님께서 4대 병마를 보여주신 것은 큰 진노의 날이 올 때에 있을 징조이다. 우리가 진노의 날이 올 때의 징조를 모른다면 노아 때와 같이 후회 막심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큰 진노의 날이 올 때에 남을 종이 될 사람들에게 이러한 징조를 보고 정신을 차려 무장을 갖추라는 경고로서 미리 계시를 보여 주셨다.
  이제 큰 진노의 날이올 징조에 대하여 본문으로 증거한다.
 
  1. 흰말의 징조 (1-2)
  큰 진노의 날이라는 것은 백마의 일차 승리가 완전히 끝을 맺게 될 때에 오는 것이다. 일차 승리라는 것은 택한자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을 시키는 역사이다. 만일 택한자를 죄에서 해방시키는 역사를 하지 않고 진노의 날이 오게 된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완전 역사라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진노라는 것은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세계 인류에게 베풀어 준 다음에 그 사랑의 법을 순종치 않는 자에게 오게 되어야 완전한 사랑이요 공의의 심판이라고 볼 수 있다. 구약 말기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이스라엘이 부패되었을 때에 진노의 날이 왔던 것은 인간 종말에 될 것을 예언적으로 보여준 역사이다.

  유월절 양의 피로 애굽에서 해방을 시켜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사랑을 배척하고 이방 신을 섬기는 이스라엘이 될 때에 용서 없는 진노의 날이 왔던 것이다. 이와 같이 유월절 어린양의 제물로 독생자의 몸이 영원한 속죄를 완성하시어 그를 믿는 자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켜 나라와 제사장을 삼았건만 그들이 이방과 타협할 때에는 심판을 내린다는 것이 인간 종말에 큰 진노의 날이라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모든 족속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는 일을 하시기 위하여 세계적인 복음 운동을 하게 하셨다.
 
  2. 붉은 말의 징조 (3-4)
  하나님의 대적인 세력을 인력으로 막을 수 없게 되는 것이 큰 진노의 날이 올 징조라고 본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세상을 의지하는 사람을 벌하기 위한 진노의 막대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택한 사람이 이러한 징조를 볼 때에 정신을 차려 진노의 날을 피하도록 준비하라는 경고인 것이다.

  오늘날 붉은 세력이 인력으로 막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하게 일어난 것은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의 날이 가까운 증거라고 본다. 모든 선지는 하나같이 인간 종말에 북방 세력을 인간의 힘으로 막을 수 없게 되는 것은 무서운 진노의 날이 올 징조라고 묵시를 보았던 것이다.

  과거 이스라엘이 극도로 부패했을 때에 진노의 막대기로 씌워진 것이 북방 세력이었다. 이와 같이 인간 종말에도 기독교가 부패하므로 진노의 막대기가 나오게 되는데 이것이 붉은 말이라고 본다.
 
  3. 검은 말의 징조 (5-6)
  하나님의 진노라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들이 하나님보다도 물질을 더 사랑하게 될 때에 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보다도 물질을 더 사랑하는 자본주의의 세력이 검은 말로 나타났다. 사람이라는 것은 자본을 따라가는 마음이 강하게 될 때에 빛되시는 하나님과 멀어지고 흑암에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자본주의의 정치라는 것은 물질 문명에 극도로 도취가 되어서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고 본다. 그러므로 저울을 가지고 나타난 것은 물질에 치우친 마음에서 자기도 모르게 경제권의 지배를 받게 되는 것을 가르친 것이다.

  다시 말하면 검은 말이라는 것은 물건을 달아보기 위해 사람이 오르고 내리는 저울추에만 정신을 쓰듯이 아무런 것도 생각지 못하고 물질에만 마음과 생각을 두는 자본주의를 말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크게 진노할 징조는 검은 말 탄 자의 행동이라고 본다.
 
  4. 청황색 말의 징조 (7-8)
  오늘날 모든 사람들이 미혹을 받을 수밖에 없는 난국이 닥쳐왔다. 왜냐하면 붉은 말의 세력을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검은 말의 세력 안에서 부익부와 빈익빈의 차이가 너무 많게 된다. 그러므로 가난한 사람들이 이렇게 되어서는 도저히 살 수가 없다는 불평이 생겨서 붉은 말에게 미혹을 받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이라는 것은 공포심이 생길 때도 미혹을 받게 되고 불평이 강할 때도 미혹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미혹하는 마귀의 세력은 평화와 공평하게 해준다는 미명을 가지고 나오지만 실지는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는 것이다. 청황이라는 것은 푸른색과 누른 색을 가르친 것인데, 분별하기가 어려운 빛이다.

  오늘날 평화를 보존하기 위하여 공산 국가와 협상을 하자는 것도 분별하기가 어려운 일이다. 앞으로 이것을 통하여 궤휼적인 정책을 쓰는 자와 궤휼적인 이론을 가지고 나오는 거짓 선지들이 얼마든지 활동할 수 있는 기회가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교통을 하는 자 외에는 청황색 말에게 미혹을 받게 되는 시국이 오는 것이 큰 진노의 날이 올 징조인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징조를 볼 때에 큰 진노의 날이 가까이 온 것을 깨닫고 하나님을 경외하여야 한다.
 
  결  론
  가장 큰 일은 큰 진노의 날이 임박한 징조가 보이는 오늘에 그 진노의 날을 면하고 새 시대 영광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러한 징조가 보이는 시기에는 인격으로 무장을 갖추되 하나님의 진노와 하등 관계가 없는 사람이 되는데 전력을 두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큰 진노의 날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를 벌하기 위하여 오기 때문이다.
 



 
  수가 차기를 기다리는 주님의 심정
  ( 계 6 : 9 - 11 )
 
  일찍이 죽음을 당하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만 왕의 왕이 되시었다. 그러나 홀로 세계를 통치할 수가 없으므로 만국을 통치할 자들의 수가 차기까지 기다리시면서 기도하시는 주님의 심정은 무엇이냐는 것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참된 제자가 생기기를 원하시는 심정 (마 16:21-28)
  우리는 주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사람이 누구냐 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주님께서는 아무리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라도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할 때에 사단이라고 책망을 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을 것을 목적하고 주님께서 오셨는데 그 일을 방해하는 자는 아무리 사랑하던 제자라도 절대로 용납할 수가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마음이다.

  인간적으로 볼 때에는 십자가에 죽겠다는 예수님께 그러한 일이 없기를 바란다는 것이 제자된 도리이므로 옳은 일 같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보실 때에는 베드로가 이 일이 결코 주님께 있지 않도록 해 달라는 것은 합당치 못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대적이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목숨을 아끼지 않고 나아가는 자가 나오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목숨을 아끼지 않고 그 뜻에 순종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을 한다면서 목숨을 아끼는 자는 주님께서 함께 일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무한한 능력과 권세를 가지고 계시지만 목숨을 아끼는 자에게는 줄 수가 없고 목숨을 아끼지 않는 자에게만 주시되 부족이 있다 하여도 대언 기도하시면서 승리하도록 역사를 하신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볼 때에 부족한 점이 많이 있다 하여도 목숨을 아끼지 않고 주님을 따라가는 사람은 합당한 자로 보시는 것이요 인간이 볼 때에 아무리 완전하여도 목숨을 아끼는 사람은 합당치 못한 자로 보시는 것이다.

  온 천하를 다스릴 수 있는 권리를 가졌다 하여도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자가 아니라면 그 권세는 아무런 필요가 없다.
 
  2. 참된 사랑을 가진 자를 기뻐하시는 심정 (마 18:35, 계 2:4-5)
  주님께서는 인간의 죄를 용서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므로 중심으로 형제의 죄를 용서해 주는 마음과 중심으로 형제를 살리고자 하는 마음이 불타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기도한다 하여도 응답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않는 동시에 택한 사람을 살려주기 위한 마음이 불타서 말씀을 전하다가 죽은 자를 가르쳐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라고 하셨다(계6:9). 아무리 원수에게 죽었다 하여도 중심에 남을 살리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순교자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말씀을 인해서 죽은 것이 아니고 원수를 피하지 못해서 죽은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원수가 당신을 잡으려 왔을 때에 피하지 않으시고 내가 너희들이 찾는 예수라 하시면서 “내 아버지께서 주시는 잔을 어찌 받지 않으리요” 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님의 마음에 합당한 자가 되려면 중심으로 형제를 살리고자 하는 마음이 불타야 하며 중심으로 형제의 죄를 용서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에베소 교회가 모든 일을 다 잘 했다 하여도 중심에 남을 살리고자 하는 불타는 마음이 없으므로 촛대를 옮겨가겠다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3. 참고 기다리시는 심정 (계 6:10-11)

  주님께서 참고 기다리시는 심정은 세 가지라고 본다.
  첫째 :사랑하는 제자들이 억울함을 당하는 것을 보고 기도하는 심정.
  둘째 :사랑하는 자들이 실수가 있다 하여도 참고 용서하는 심정.
  셋째 :왕권의 수가 차기를 기다리는 심정.

  주님께서는 사랑하는 종들을 말씀대로 순종하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 것을 보기 위하여 마귀의 세력을 허락해서 괴롭힐 때에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들이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기도하는 심정을 가지셨다. 주님께서 참고 기다리는 일이 없다면 왕권 반열에 들 자는 이 세상에서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주님께서 참고 기다리시는 일이 있으므로 완전한 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주님과 같이 참고 기다리는 심정이 있어야 한다(사30:18).
 
  결  론
  주님께서는 심판기가 임박할 때에 잠간이라는 기간을 두고 택한 종들을 극도로 까불러 보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순교적인 사상을 가진 자라야 주 재림을 맞이할 수 있는 인격이 되기 때문이다. 이 날까지는 영혼 구원을 목적하고 주님께서 역사 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주 재림기에는 환난 가운데서 남을 살리기 위하여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우는 종들을 위해서 역사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순교자의 반열에 드는 자라야 재림의 주를 영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순교자의 호소와 수가 차는 일
  ( 계 6 : 9 - 11 )
 
  서  론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은 사랑하는 종들을 순교하도록 한 것도 비밀이 있고 끝 날에 수를 채우기를 기다리는 비밀도 있다. 인간이 볼 때는 사랑하는 종들이 억울하게 순교 당한 일이 슬픔이 아닐 수 없으나 순교는 사랑하는 종에게 주신 축복이 되는 것이다.

  아무래도 죽었다가 부활할 성도들에게 순교의 죽음을 준다는 것은 그들이 어떤 병마에 걸려서 죽는 것보다는 영광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또는 우리는 그 발자취를 따르는 형제가 되고 동무가 되는 것이 영광이요 큰 축복이 되는 것이다.
 
  1. 순교자의 영혼들이 왜 호소하느냐에 대한 것을 알아야 한다 (9)
  이 날까지 모든 선지와 사도와 성도들은 교회를 개척하고 세우기 위하여 어느 국가 민족 할 것 없이 피를 흘리지 않고는 참된 구원의 복음을 전할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이방 신의 종교가 가득하고 이방적인 풍속에 젖어 있고 이방의 정권이 다스리고 있는 그 나라에 전도를 개척할 때 이방적인 종교나 풍속이나 정치에 대한 일을 대항하는 진리가 되기 때문이다.

  만일 앞서간 종들이 현실적이어서 어느 나라를 들어가든지 피 흘리지 않고 그 나라 종교와 타협을 하고 풍속에 속화되고 그 나라 정치의 압박을 받지 않으려고 무조건 타협하는 종들이 있다면 우리는 참된 구원의 복음을 바로 받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신앙은 세상을 이기는 것이 신앙이라고 요일서 5:4에 말했던 것이다.

  신앙이란 타협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수많은 종들이 피를 흘렸던 것이다. 그런데 심판기가 오는 말기에 교회가 극도로 부패돼서 타협과 세속적으로 흐르는 동시에 참된 종들의 신앙 사상과는 거리가 먼 개포도 같은 자리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속히 피 값을 갚아 주는 역사가 일어나야 된다는 것이다(10:11).
 
  2. 수가 차는 일 (11)
  피 값을 갚아 줄 책임은 주님께 있다. 왜냐하면 당신의 십자가와 부활을 바로 전하기 위해서 흘린 피니 그 피를 무효로 돌린다는 것은 공의가 아니다. 만일 금일의 타협적인 신앙 노선을 그대로 둔다면 그들의 피는 억울한 호소를 아니할 수 없는 일이다.

  지금 교계는 백마에서 시작된 교회가 백마적인 사상에서 청황색 말의 사상으로 변해지는 때가 되기 때문에 이러한 심판이 나리는 때의 역사가 일어나기 전에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환경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잠시만 기다리라는 뜻으로 순교자에게 흰옷을 준 것은 내가 너희를 신부의 자격으로 인정한다는 뜻이다.

  이제 주님께서 앞서간 선지들의 피를 인정하신다면 그 피의 발자취를 따르는 형제와 동무되는 종들의 수가 차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는 하나님께서 말세의 심판권을 새로 받고 나갈 종들의 수를 채우는 기간은 잠깐 동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 죽임을 당한다는 것은 말세의 종들로 자기 사명을 지켜 끝까지 나가는 자는 순교의 반열에 드는 산 순교인 것을 말하고 있다. 주님께서 자기처럼 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주님이 썩지 않고 죽었다가 삼일만에 부활함같이 말세의 남은 종들도 순교의 생활에서 주님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수라는 것은 십 사만 사천 명의 수가 찬다는 것이나 같은 뜻이다. 아직까지 심판의 역사가 나리지 않는 것은 그 수가 차기를 기다리는 잠시라는 기간이다. 이제 시련기를 거쳐서 환난기에 남은 종은 자체를 죽이고 나가는 순교적인 생활이 있어야 된다는 것을 가르친 것이다.

  세밀히 말하자면 앞서간 종들도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하기 위하여 순교했다면 종말에 남은 종은 예언의 말씀을 받고 증거하기 위하여 순교적인 생활에서 승리하여야만 될 것이다.
 
  결  론
  순교자의 호소의 원한이 이루어지는 강권 역사는 말세의 수가 차는 역사로 종말을 짓는 것이니 잠시 동안에 수가 차는 일은 그들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강권 발동의 강권 역사가 내리기 때문이다(계7:3, 11:3). 다시 말하자면 눅14:23에 나가서 강권하여 데려다가 혼인 석을 채우라는 말씀과 동일하다.

  종말의 종들의 수는 자기의 기도가 부족해도 순교자의 원한이 이루어지는 강권 역사에 끌려서 사명자가 되는 일도 있고 하루아침에 자기 인간성이 죽는 강권 역사도 있을 것이다(슥3:9). 하나님은 무소 불능하신 신이신 동시에 사랑의 신이시니 자기가 예정한 수는 어떻게 하든지 채우고야 만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