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목차
강의
처음 사랑과 촛대 문제(1-7)
실상은 부요한 자가 되자(8-11)
끝까지 주의 일을 지키는 자의 권세(23-25)
믿는 자의 받는 권세와 지키는 자의 받는 권세(26-28, 요1:7-18)


2 장  강 의

 주님께서 촛대교회 사자에게 보낸 편지는 재림의 주를 맞이할 하나님의 종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의무를 가르쳤다.
 
 1. 에베소 교회 (1~7)

2:1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2:2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에베소 교회는 서 아시아의 중심 서울이 되는 도시에 있는 교회로서 서 아시아의 모 교회가 될 만한 교회였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그 교회에 수고와 인내와 철저한 교회 치리를 칭찬했다(1~2).


2:3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2: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또는 그들이 가장 열심이 있어서 큰 교회로 움직여 내려 왔지만 처음 사랑을 버린 것을 책망하게 됐다(3~4).


2: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그러므로 어디서 처음 사랑이 떠났는지를 깊이 신앙 양심에서 생각하면서 회개를 하라는 경고이다. 만일 이것을 회개치 않을 적에 아무리 다 잘했다지만 내가 다시 올 때 촛대교회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처음 사랑이라는 것은 하나님께로 온 사랑이니 기독교로서 사랑이 변할 적에 개포도가 될 것이니 사랑의 본질은 무엇이냐 하는 것을 생각해야 된다.

 ① 하나님은 완전한 인간을 위하여 준 사랑이 아니고 인간이 너무 큰 죄로 죽을 것을 볼 때에 살려 주고자 하는 불타는 사랑의 본질이다. 그러므로 살려 보려는 불타는 마음이 없다면 기독교의 사랑의 본질은 변한 것이다.

 ② 진실한 사랑이니 조금도 하나님은 외모를 보지 않고 중심을 보는 것이니 아무리 유형적인 교회가 잘 되었다 하더라도 조금이라도 외식이 있다면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이 아니다.

 ③ 끝까지 참는 사랑이니 아무리 처음에 시작을 바로 했다 하여도 끝까지 난관을 돌파하고 참는 것이 없는 사랑이라면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이 아니다. 그러므로 촛대교회는 사랑의 본질을 잃지 않아야만 재림의 주를 영접할 수 있다는 것이다(5).


2:6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주님께서 가장 미워하는 것은 니골라 당이니 이것을 미워한 것만은 바로 했다는 것이다(6).


2: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성령이 역사하는 목적은 재림의 주를 맞이할 때까지 역사하는 것이니 끝까지 싸워서 승리하는 교회가 되어야만 재림의 주를 맞이하고 생명나무 과실을 먹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아무리 교회가 바로 섰다 하여도 종말에 허락을 받고 나오는 마귀의 세력을 이기지 못하면 진노의 날에 남은 교회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7).
 



 2. 서머나 교회 (8-11)

2:8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2:9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서머나 교회는 비록 모 교회가 될 만한 교회는 못 되고 인간이 볼 때 극도로 환란 궁핍이 많은 교회다. 이것은 자칭 유대인들에게 억울한 훼방을 받고 있으니 사탄의 회가 되는 교권에게 압력을 받고 표면적인 큰 활동은 못하고 있으나 주님이 볼 때 영적 방면이 부요한 교회다(8~9).


2:10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훼방만이 아니라 무서운 박해로 옥에 갇히는 일까지 있게 된 것은 그만한 독실한 신앙과 용사적인 투쟁이 있기 때문이다. 이 투쟁은 죽도록 충성을 다하는데서 생명의 면류관을 얻는 승리가 된다(10).


2:11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이 교회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을 승리의 용사가 모인 교회다(11).
 



 3. 버가모 교회 (12-17)

2:12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2:13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버가모 교회는 극도로 사탄의 세력이 강한 위치에 있다. 그러므로 피 흘린 순교가 있음으로써 완전히 세워진 교회이다(12~13).


2:14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그러나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가 있었다는 것은 아무리 근본이 바로 선 교회라도 불의의 삯을 용납하는 일이 있다면 큰 책망을 받을 일이다. 왜냐하면 신앙이라는 것은 거룩한 믿음이니 조금도 불의의 요구를 들어준다는 것은 음녀적인 행동이 되기 때문이다(14).


2:15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2:16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하나님의 교회는 교훈을 중심한 것이니 조금이라도 옳은 사상에서 탈선된 교훈을 받는다면 주님의 대적이 된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것은 말씀대로 심판하러 오시기 때문이다(15~16).


2:1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성령이 요구하는 것은 발람적인 미혹의 세력을 이기는 자가 되어야만 감추었던 만나가 되는 진리를 바로 먹게 되고 흰 돌과 같은 왕권의 새로운 이름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17).
 



 4. 두아디라 교회 (18-29)

2:18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가라사대
2:19 내가 네게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두아디라 교회는 가장 유형적인 발전이 풍부한 교회이다. 열매도 많이 있는 교회다(18~19).


2:20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2:21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아니하는도다
2:22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


 그러나 이세벨적인 사상을 용납했으니 이것을 회개치 않으면 영적 흑암에 떨어지고 큰 환란에 빠지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진리를 대적하는 그 세력을 용납한다는 것은 예를 들면 전쟁을 하는 군대가 적군이 침투하는 것을 보고도 막지 않고 있는 것과 같은 화가 올 것이다(20~22).


2:23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주리라


 하나님께서 진노의 날에는 아무리 주의 교회지만 뜻과 마음을 살피어서 사상, 양심을 검토하는 것이니 여기에 의하여 보응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23).


2:24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단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이 없노라
2:25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사단의 깊은 비밀이 있는 교훈을 받지 않고 주님 올 때까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 즉, 말씀의 다림줄을 쥐고 굳게 싸워서 주님 올 때까지 나가야만 된다는 것이다(24~25).


2:26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2:27 그가 철장을 가지고 저희를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누구든지 승리를 이루어 끝까지 주의 일을 지킨 자라면 철장권세를 받아 세계를 다스릴 것이니 그리스도와 같은 권세이다(26~27).


2:28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
2:29 귀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빛나는 샛별 같은 세세 왕권의 영광을 받게 될 것이니 성령님의 하신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자가 받을 것이다(2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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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사랑과 촛대 문제
  ( 계 2 : 1 - 7 )

  서  론
  인간은 사랑이란 것을 원하고 또는 사랑을 남에게 주고 싶어하는 것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기독교는 덮어놓고 사랑을 받고 덮어놓고 준다는 것으로써 촛대교회가 이루어진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알파가 되는 처음 사랑을 잃어 버렸다면 오메가인 촛대교회를 이룰 수는 전혀 없을 것이다.

  교회는 사랑의 시초가 인간에게서 온 것이 아니고 완전한 사랑을 가지신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진 처음 열매가 되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타난 것이 인간이 처음으로 맛보는 사랑이었던 것이다. 그리스도가 가지고 온 실천의 사랑은 인간 도덕, 수양, 어떠한 교제적인 인간의 사랑을 초월한 처음 되는 사랑의 열매가 이루어진 것이 십자가의 피라는 것이다.

  이제 처음 사랑과 촛대 역사 문제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게 된다. 기독교는 완전한 사랑으로 섰으니 그것으로 끝을 맺어야 된다는 것이다. 만일 어떠한 교회가 완전한 사랑의 본질인 그 정신, 사랑, 중심을 잃었다면 이것은 참포도를 심었지마는 맛이 변한 들포도가 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인생의 완전이라는 것은 완전한 사랑을 받은 데서부터 싹이 튼 것이니 기독교가 세계적으로 이방에 전파된 것도 완전한 사랑을 받은 사람이 그대로 남에게 주기 위해서 피를 쏟은 것이 순교적인 선교의 역사였던 것이다.

  요한 복음 15:13, 요-서4:11에 온전한 사랑이라는 것은 목숨을 바쳐서 남을 살리겠다는 것이 온전한 사랑의 불길이 되는 것이다. 만일 기독교에 이것이 없다면 기독교는 세계를 정복할 수는 도저히 없었을 것이다.
 
  1. 진리의 사랑으로 시작되었으니 진리의 사랑으로 마쳐야 될 것이다

  만일 어떤 신자가 사랑을 주장해도 진리의 사랑이 아니라면 이것은 마귀를 초대하는 방법이 될 것이다. 우리는 진리 때문에 사랑하고 진리 때문에 서로 교제가 된다는 것은 기독교 처음 사랑의 본질이 되는 것이다(요한二서1-3).

  만일 기독교가 종말의 예언의 말씀을 떠나서 사랑으로써 뭉쳐지자는 통합 운동이 된다면 예언의 말씀을 가해도 감해도 재앙이라는 그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는 사람이 자동적으로 될 것이니 이러한 사랑을 가진 기독교는 촛대 역사를 일으킬 수가 없을 것이다.
 
  2. 기독교 사랑은 겸손한 사랑이다
  만일 남이 나를 유익하게 한다면 사랑을 하고 유익이 안되면 배척을 한다는 것은 거짓선지의 사랑일 것이다(미3:5-6).

  하나님의 아들이 말구유에 탄생을 했다는 것이 기독교 사랑의 시발점이다. 겸손한 자리에서부터 걸어간 일이 사랑을 가지고 온 그리스도의 길이다.

  겸손한 출생, 겸손한 노동, 겸손한 전도, 겸손한 죽음, 겸손한 부활, 겸손한 승천의 주로서 지금도 죄인을 향하여 울면서 약한 자에게 능력을, 어리석은 자에게 지혜를, 범죄한 자에게 속죄의 은총을 주기 위해서 겸손히 인간을 대해 주고 계신 사랑이 아니라면 기독교는 효과를 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겸손한 사랑이 하늘 본부에서 행하는 역사라면 겸손이 없는 사랑은 촛대 역사를 일으킬 수 없을 것이다.
 
  결  론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는 것은 세계 인류에게 전한 표어가 된다. 아무리 서 아시아의 모교회지만 촛대를 거두시겠다고 말씀한 것은 전 세계 기독교의 지침이 되는 말씀이라고 생각된다. 아무리 사명적인 모교회지만 처음 사랑을 잃고 보니 아무런 사명도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완전한 자를 위한 것이 아니고 종말의 사랑은 좀더 강권적인 사랑이 있어서 소경 귀머거리 절뚝발이 같은 영계를 가진 자라도 끌어다가 내 집을 채우리라는 것이 기독교 종말적인 오메가의 역사라고 하는 것이다.

  처음 사랑보다는 좀더 강권으로 사랑을 베풀려는 것이 기독교 종말의 역사이니 처음 사랑을 잃었다면 종말의 역사와는 하등 관계가 없을 것이다.
 



 
  실상은 부요한 자가 되자
  ( 계 2 : 8 - 11 )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은 도덕과 의식과 교리를 초월한 생활에서 실상은 부요하다는 주의 은총을 받은 생활이 있어야만 된다. 금일에 교회가 외형적인 발전은 가져 왔다고 볼 수 있으되 실상은 빈곤에 빠진 영적 부패를 볼 때에 오히려 주님은 슬퍼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재림의 주를 맞이하는 종이 되려면 실상은 부요한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본문을 통하여 알 수가 있다.
 
  1. 환난과 궁핍이 있으므로 (9)
  기독교의 완전 역사라는 것은 환난 궁핍이 없이는 있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종 된 자의 생활은 완전을 이룬 것이 아니고 완전을 목적하고 싸우는 생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종 된 생활은 환난, 궁핍이 오는 것이 불행이 아니요, 부요한 것을 주기 위한 하나님의 선한 방법이다.

  이제 환난, 궁핍이 올 때에 부요해지는 종의 생활의 세 가지 요소를 말한다.

  첫째 : 환난, 궁핍이 오는 원인은 종이란 생활은 마귀에게 포로 된 자를 해방시키라는 것이 사명이니 마귀 편이 먼저 환난과 궁핍을 우리에게 주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마귀에게 포로 된 주의 백성을 해방시키기 위하여 싸울 때에 마귀 편이 하나님의 종을 대항을 하는 조건에서 오는 것을 뜻한 것이다.

  앞서간 모든 종들이 환난과 궁핍을 만난 것은 자기의 구원 문제를 위해서가 아니고 남을 구원코자 해서 담대히 나설 때에 환난과 궁핍이 왔던 것이다. 그러나 환난, 궁핍이 있으므로 하나님의 종은 많은 열매를 맺는 초인간적인 역사를 하게 될 때에 그 종에게 실상은 부요한 축복이 옴으로써 많은 교회를 일으키는 열매를 보게 되었다.

  둘째 : 진리를 사수할 때에 오는 것이니 언제나 마귀의 권세는 허락을 받을 때에 하나님의 종이 진리를 사수하나 못하나 보기 위한 목적에서 마귀를 들어서 쓰는 일이 있기 때문에 마귀는 얼마든지 하나님의 종을 대항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잠깐의 환난, 궁핍이 와도 진리를 사수하는 자에게 뜻밖에 홀연히 실상은 부요한 축복을 받게 된다.

  셋째 : 사상적인 문제이다. 사상이라는 것은 아무리 원수의 세력이 타협을 하자고 하여도 타협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 사상이다. 언제나 마귀라는 놈은 진리를 강압적으로 대적하다가 할 수 없게 될 때에는 타협적인 방법으로 침투하게 되는데 이것을 용납치를 않아야 된다.

  아무리 히스기야가 강하게 환난, 궁핍을 이기고 나갔지만 바벨론 사신에게 타협이 있으므로 바벨론에게 망하고 만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은 싸우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안되고 원수의 세력이 강하다고 후퇴해도 안되고 원수의 세력이 타협을 하자고 해서 거기에 조금도 용납을 한다면 실패에 들어가는 것이다.
 
  2.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 것 (10상반절)
  하나님의 종이 앞으로 올 난제를 조금도 두려워할 것이 없이 그날 그날에 닥쳐오는 일을 실천해 나갈 때에 날마다 더 힘을 얻게 되고, 풍부한 은총이 나릴 때에 앞으로 더 큰 고난이 온다 하여도 아무런 문제없이 능히 돌파해 나갈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일 일을 염려할 것 없이 그날의 괴로움을 만족히 알고 나감으로써 내일이라는 장차 올 일을 극복할 힘을 더욱 받게 되는 것이다.
 
  3. 생명의 면류관을 얻게 됨 (10하반절)
  기독교의 전쟁은 면류관의 왕권을 목적한 것이다. 어떤 종이 자기 개인의 구원 문제 하나를 믿는다 하여도 남을 살리기 위하여 충성을 다하는 일이 없다면 그 종은 왕국 건설에 대하여 오히려 방해를 준 자이므로 그 죄를 회개하는 일이 없이는 주 앞에 설 수가 없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종 된 생활은 죽도록 충성이라는 것이 없이는 열매 없는 가을 나무가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종을 들어 쓰는 방법은 죽도록 충성하라는 방법에서 쓰는 것은 왕국 건설을 위하여 그 종에게 왕권을 주기 위한 사랑의 법이 된다.
 
  결  론
  실상은 부요한 종의 생활이라는 것은 인간을 초월한 세계에서 움직이는 활동이 있어야만 되는 것이니 사람에게 보이려는 것이 없이 주님 중심에서 면류관을 위한 싸움의 생활이 아니고는 항상 부요한 생활을 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부요하시매 당신의 종에게 이것을 주기 위해서는 자칭 유대인이 되는 교권주의 자들에게 동참치 못하게 하고 오히려 훼방을 받게 하므로 인간이 볼 때는 궁핍을 당한 것 같으나 실상은 부요케 해서 그 종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남은 종이 될 촛대교회 사자에게 이루어지는 역사이다.
 
 



  끝까지 주의 일을 지키는 자의 권세
  ( 계 2 : 23 - 25 )
 
  서  론
  주님께서 자기의 일을 종에게 맡긴 것은 권세를 주기 위한 목적인 것이다. 그러나 일을 맡기고 끝까지 지키느냐 하는 것을 보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과정이 있다.
 
  1. 뜻과 마음을 다해야 될 것이다 (23)
  주의 일이라는 것은 조금도 뜻과 마음을 다하지 않는다면 주님 보기에 합당한 자가 될 수가 없다. 주님의 일은 사람을 상대할 일이 아니고 주님을 상대한 일이니 뜻과 마음을 살피는 주님이신 고로 조금도 형식이나 억지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먼저 사랑을 베풀되 은혜를 주시고 사명을 맡기고서 뜻과 마음을 살피고 계신 것이다.
 
  2. 이미 있는 것을 굳게 잡아야 할 것이다 (25)
  이미 있는 것이라 함은 주님께 받은 것을 말한 것이다. 누구든지 받고도 이것을 굳게 잡지 못하고 잃어버린다면 권세의 역사를 받을 수는 전혀 없다. 주님 올 때까지 굳게 잡아야 될 이유는 빼앗으려는 원수가 많기 때문이다.
 
  3. 자기의 것이라는 것을 전혀 포기하지 않고는 안될 것이다
  왜냐면 우리는 주님의 종이니 종은 자기의 것을 조금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불법이 될 것이다. 어떤 종이 주인이 하라는 일을 하지 않고 자기 일을 하는데 시간을 보내고 있다면 주인에게 인정을 받을 수 없는 일이다. 또는 종이 주인의 일을 한다면서 실지는 자기의 어떤 이익을 계획한다면 이것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끝까지 주의 일만 붙드는 자라야 권세를 받을 것이다. 만일 주의 일만 붙들지 않는 종에게 권세를 맡긴다면 도리어 주인을 손해 시킬 우려가 있는 것이다.
 
  결  론
  우리의 최고 축복은 주와 같이 철장 권세를 받고 세세에 왕권을 누리는 일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최고의 행복도 왕권이라면 하늘 나라에 세세의 왕권을 무엇으로 비할 수 있을 것인가 ?



 
 
  믿는 자의 받는 권세와 지키는 자의 받는 권세
  ( 요 1 : 7 - 18, 계 2 : 26 - 28 )
 
  서  론
  하나님께서는 만물에게 권세를 줄 수 없으나 자기 형상대로 지음 받은 자에게 권세를 주는 것은 영광을 받고자 하는 뜻이 있는 것이다. 권세라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에게 주는 권세도 있고 악한 자에게 주는 권세도 있는 것이다.

  악한 자에게 주는 권세는 잠깐동안 허락하는 일이 있는 것이요, 사랑하는 자에게 주는 권세는 영원한 권세가 되는 것이다.
 
  1. 믿는 자에게 주는 권세 (요 1:10-12)
  하나님께서 인생을 향하여 죄가 없을 때에는 에덴동산에서 지키라는 사명을 주었던 것이다. 그 때 지켰다면 그 권세는 믿는 자에게 주는 권세가 아니고 지키는 자에게 주는 권세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키지 못함으로 자녀의 권세까지 잃어버리는 인류 타락의 비참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 잃어버린 권세를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지키라는 법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음으로 믿음으로서 그 권세를 다시 찾도록 한 것을 그리스도의 복음이라 하는 것이다. 메시야로 오신 것은 이 권세를 주기 위하여 오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만으로 이루어지는 법이다.

  영접하고 믿기만 하면 준다는 권세이다. 그리스도께서 이 권세를 택한자에게 찾아 주기 위해서 죽었다가 부활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부활하여 인생을 대할 때에 너희는 평강이 있을 지어다 한 것은 잃어버렸던 권세를 받을 자는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갈 수 있는 권리와 요청할 수 있는 권리와 상속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것이다.

  이 권리를 가진 자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인도와 양육과 보호를 받게 될 것이다. 이 권세는 천국 시민권이다.
 
  2. 지키는 자에게 주는 권세 (계 2:26-28)
  하나님은 자녀 되는 권세를 주는 동시에 너는 이런 일을 하라고 사명을 맡기는 것은 더 큰 철장 권세를 주고픈 사랑에서 맡기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랑하는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어서 사명을 행하라고 명령하신 것은 만국을 다스릴 권세를 주려는 목적이었다.

  이와 같이 우리는 맡긴 사명을 끝까지 지키면 동등한 권세를 주겠다는 것이 하나님이 예수와 같이 사랑하는 한계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을 맏아들이라고 로마서8:29절에 말하였다. 맏아들 되시는 예수님이 끝까지 사명적인 계명을 지킴으로 철장 권세를 받았다면 작은아들 되는 우리도 맡은 일을 죽기까지 지켜야만 될 것이다.

  이것은 첫째아담을 떨어뜨리던 마귀를 쳐서 없애기 위해 주는 권세이다. 다시 말하면 억울한 피 값을 갚기 위한 것이다. 만일 어떤 종이 자기의 맡은 일을 충성치 않고도 다시 오시는 주님을 고대한다면 이것은 철없는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이다. 철장 권세라는 것은 어린아이에게 줄 수는 없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에베소서4:13-14).
 
  결  론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창조하고 사람을 자기 형상대로 낸 목적은 훌륭한 영광의 나라를 이루어 놓자는 목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인생의 타락을 슬퍼하는 하나님은 먼저 자녀의 권세를 주기 위하여 성령을 부어 주는 동시에 다시 왕국을 이루기 위하여 오시는 것이다.

  이 때에 중생을 받은 정도의 신자는 백성이 될 것이요, 철장 권세를 받기까지 사명을 지키는 자는 왕권으로서 새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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