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론

1. 베드로와 요한의 사명의 차이점(요21:15-25)
2. 재림에 대한 징조와 확실한 예언(벧후1:15-25)
3. 주 재림시까지 머물게 한 사명(요21:21-23)
4. 신앙 정로에 대하여
5. 기독교 종말론의 변론을 바로 하는 법에 대하여





베드로와 요한의 사명 차이점  
- 요 21:15~25 -
 
서 론  
하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을 특히 대표적인 자로서 인정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시인하는 바이다. 그러나 대표적인 두 사도의 사명의 차이점을 분명히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은 두 사도에 관한 문제가 아니고 기독교 종말의 시대에 관한 문제가 결부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제 사명의 차이점을 말하자면 다음과 같이 사명을 구별하여 말할 수 있는 것이다.  

1. 베드로의 맡은 사명 (15~19)  
주님께서 당신을 부인하던 베드로에게 세 번까지 반복하여 물어 본 것은 이 사람들보다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는 문제인 것이다. 이것은 주님이 베드로의 심정을 몰라서가 아니라 베드로의 겸손을 요구하는 말씀이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에 모든 제자는 다 부인할지언정 자기만은 주를 위해 죽겠다고 장담한 사실이 있었기 때문이다. 큰 사명을 가진 종이 가룟 유다 외에 더 큰 실수를 한 자는 베드로였다. 그러나 베드로가 끝까지 주님을 따라 갔기 때문에 이런 실수도 있었던 것이다.

베드로가 미리 도망했던들 이런 과오는 없었을 것이로되 끝까지 죽어도 같이 죽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따라 갔던 것이다. 그러므로 실수가 있어도 제일 열심히 있다고 인정되는 것이다. 주님은 “네가 얼마만큼 나를 사랑하는 중심이 있어서 애썼다는 것을 내가 아는 것이니 너는 낙심 말고 내 양을 먹이라”고 하신 것은 은혜 시대의 양떼에게 양식을 나누어줄 복음의 총 책임자로 너를 세운다는 약속인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들어서 높이 썼던 것이다.

이방 땅에 복음을 나가 전하는 일에 문을 연 자도 베드로요, 예루살렘 교회에 큰 부흥을 일으킨 자도 베드로요, 기독교 역사에 제일 큰 이적을 먼저 행한 자도 베드로요, 심지어 옥에 갇혔어도 천사가 그를 옥에서 해방해 준 일도 그의 사명이 컸기 때문에 천사까지도 동원했던 것이다. 주님은 사명을 맡긴 후에도 사명을 감당하도록 역사해 주겠다고 말할 적에 네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음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을 말했던 것이다. 주님은 사명자에게 그 사명을 감당하도록 해주는 것이 주님의 책임이라는 것을 말했던 것이다.  

2. 요한 사도의 사명 (20~23)  
베드로는 요한 사도의 사명을 주님께 물었던 것이다.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는 질문이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다시 올 때까지 머물러 두신다”고 하셨다. 이것은 요한의 사명을 말한 것이다. 요한의 사명은 주님이 다시 올 때에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이것은 사도 요한이 사명적으로 받은 계시록은 당신이 재림할 때에 이루어질 사명이라는 것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베드로를 들어서 크게 역사했다는 일은 있으나 요한을 들어서 크게 역사했다는 일은 없는 것이다.

인간의 생각으로 본다면 베드로보다도 요한이 더 크게 쓰여져야 할 믿음이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이 제일 사랑하는 제자요, 십자가 밑까지 실수 없이 따라가 십자가 앞에서 주님 대신에 아들이 된다는 맹세의 부탁을 받은 사도이다. 그러나 사도 요한을 들어서 큰 부흥이나 큰 이적 기사를 나타낸 일은 조금도 없는 것이다. 요한은 장로의 한 사람으로서 성모 마리아를 끝까지 받들어 효성을 다한 제자의 한 사람이었다.

그가 제일 깊은 주님의 교훈을 직접 받아서 쓴 일은 있으나 큰 놀라운 역사는 없었고 모든 제자가 다 순교를 당했지만은 그는 구십 노령으로 밧모섬에 가서 말세의 영원한 복음이 되는 안식에 들어갈 남은 종과 남은 백성이 읽고 듣고 지켜야 될 계시록을 받아서 기록하여 세상에 전한 것이다. 그러나 이 계시록은 이 날까지 봉한 책으로서 전하지 않고 머물러 있었던 것뿐이다.   

이 계시록의 비밀은 주 강림시 재앙의 날에 전해야 될 사명자가 다시 꿀같이 하나님께 받아먹고 쓴 것이 있지마는 세계 만방에 다시 예언한다는 것을 사도요한은 계시로써 받은 것뿐이다(계10:8~10). 사명적인 이름까지도 베드로는 사명적인 이름을 불렀으나 요한은 우뢰의 아들(보아너게)이란 이름을 받았지만 숨겨 두고 만 것은 그 뢰자(雷子)라는 이름은 심판이 나릴 시기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재림시에 전할 복음을 왜 요한에게 미리 계시를 주었느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는 것이다. 성경을 완전한 책으로 이루어 놓음으로써 그 책을 만방에 전할 것이기 때문에 신약전서를 완전히 구성하기 위한 것뿐이었다. 그러므로 종말의 증인은 다시 해석해서 증거함으로써 다시 예언자라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만일 금일에 와서 어떤 사람이 계시록을 맡아 가지고서 성경이 다시 나온다고 하면 이것은 혼선 중에 혼선이 될 것이며 기독교는 완전한 진리가 구비된 것이라고 말할 수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예지와 예정이 계신 동시에 어떻게 종말에 가서 세상에 환난, 재앙, 심판을 나리며 어떻게 종을 들어서 쓰며 교회를 어떻게 보호해서 남은 종과 남은 교회로써의 새 시대를 이룬다는 것을 분명히 가르친 것이 사도 요한이 받은 종말의 복음이다.  

결 론  
베드로는 교회의 기초를 놓아 터를 닦은 복음의 역사라면 요한의 사명은 기독교가 끝을 맺는 즉, 알곡을 모아 곡간에 들이는 추수기에 사명이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믿음으로 말미암아 중생을 받고 성령을 받는 것이 베드로를 통해 받은 복음이라면 예언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켜서 재앙의 날에 재앙을 받지 않고 구원받는 복음은 기독교 종말에 끝을 맺는 역사가 될 것이다. 세밀히 말하면 은혜 시대 역사의 대표적인 사도는 베드로요, 환난 시대의 대표적인 사도는 요한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재림에 대한 징조와 확실한 예언  
- 벧후 1:12~21 -  
 
서 론  
우리는 주 재림을 믿는 신앙에 대하여도 확실한 징조도 있고 확실한 예언도 있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우리에게 완전한 신앙을 주고 있는 것이다. 만일 징조만 있고 확실한 예언이 없어도 불완전이요, 예언만 있고 징조가 없어도 완전한 것은 아니다. 징조가 확실하고 예언도 확실하니 이것은 합법적인 진리라고 보게 되는 것이다.  

이제 징조와 확실한 예언을 성경으로 다음과 같이 찾아본다.  

1. 재림에 대한 징조를 봄 (16~18)  
이 날까지 기독교에서 재림에 대한 확실한 징조는 보여진 것으로 알고 있으나 확실한 예언은 모르고 있는 것이다. 베드로 자체도 징조는 내가 보았으나 확실한 예언을 분명히 모른다고 말했다. 베드로가 재림의 징조를 보았다는 것은 베드로, 요한, 야고보가 변화산에 올라가서 직접 눈으로 그 영광도 보았고 주님의 자체를 보았고 똑똑히 음성도 들은 것이다. 이것을 보아서 확실히 주님은 강림한다는 것을 말했던 것이다. 또는 주님이 승천할 때 천사가 말했다(행1:11).

그러나 다시 온다는 징조는 친히 눈으로 보았으나 다시 올 때 예언은 계시록을 통해 똑똑히 알게 될 것이다. 주님은 어찌하여 재림의 징조는 있게 했으나 이 때까지 예언의 확실한 것은 알려주지 않는 이유도 있는 것이다. 이미 죽은 성도에게는 주님 다시 온다는 것만 알아도 만족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다. 십자가, 부활, 승천, 재림을 믿는 것이 신앙이다. 이 신앙은 주님이 분명히 오신다는 것만 믿으면 된다.

왜냐하면 확실한 예언이란 주 재림을 살아서 환난 가운데 남은 종으로서 맞이할 자에게 해당되기 때문이다. 만일 죽어서 부활할 성도에게 예언을 지키라고 하면 이것은 이단설이 될 것이다. 이것은 때가 되기 전에는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 날까지 예언을 들고 활동하던 사람이 실패한 것은 그리스도만을 바로 믿기만 하면 될 시기에 월권적인 행동을 했던 것이다.  

2. 확실한 예언 (19)  
사도들은 확실한 예언이 있다는 것을 말했으나 해석은 하지 못했던 것이다. 예언이란 인간의 사사로운 생각으로는 풀 수가 없다는 것이다(20). 예언을 읽고 듣고 지켜야 할 때 하나님이 바로 해석하도록 해 준다는 것을 베드로가 그 때 사사로이 예언을 풀었던들 그는 사도의 자격을 잃게 되었을 것이다. 사도의 직분은 그리스도 한 분을 바로 증거해서 믿게 하는 사명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확실한 예언을 증거하는 총 대지는 계10:7일 것이다.

세상 나라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는 시기는 일곱째 나팔을 불 때니 하나님의 비밀이 그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이루리라 한 말씀이다. 다시 말하자면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비밀이 옛날 선지의 전한 복음과 같이 성령으로 잉태되고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고 승천하고 성신이 강림했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한 사명이다. 그러나 심판기의 사명자는 세상이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는 것이 선지의 예언대로 된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 심판기의 종들이 전할 사명이다.

그러면 심판기에 남은 종들은 모든 환난과 재앙과 또는 남은 종과 남은 백성이 선지의 예언의 말씀대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의 다림줄을 바로 쥐고 나가서 다시 예언하는 역사이다. 다시 말하면 미분명한 해석을 분명히 해석해 준다는 뜻이다. 만일 환난과 재앙이 올 때 확실한 예언을 증거 못한다면 기독교는 흑암에 빠지고 말 것이다.

예언은 등불이라 할 것이다. 등불은 어두움이 오는 밤에 필요한 뜻을 가르친 것이다. 이미 태양빛 같은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바로 믿게 하는 시대가 빛의 시대라면 신랑이 밤에 온다는 말과 같이 주님 올 때는 빛의 시대가 아니고 흑암 시대다. 흑암 시대가 올 때까지 예언의 등불을 들지 못한다면 주님을 맞이할 수가 없을 것이다. 만일 기독교가 확실한 예언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촛대교회를 일으킬 수 없다. 촛대란 밤에 쓰는 등불이다.

우리는 사명적인 겸손이 있어야 한다. 베드로와 같은 심정이 있어야 할 것이다. 만일 어떤 종이 확실한 예언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믿으면 된다 하여 예언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면 이것도 교만이요, 자기 사명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마음대로 예언을 해석 한데도 교만이 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종이니 하나님께서 확실한 예언을 나가 하도록 해줄 때 순종하는 마음으로 목숨을 걸고 나가 증거할 것뿐이다(계12:11).  

결 론  
하나님의 역사란 징조가 먼저 똑똑하고 예언은 글자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구약 때 양으로 제사 드린 것은 그리스도의 피의 징조를 보여준 것뿐이다. 십자가의 속죄를 완성할 때 징조는 폐지된 것이다. 그와 같이 재림의 징조만을 믿던 신앙을 완전한 예언이 나올 때 징조만을 말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만일 어떤 종이 확실한 예언이 나타났는데도 불구하고 주님 다시 온다는 징조도 다 있는데 믿으면 되지 무슨 예언이 필요 있느냐 할 때 이것은 시대를 모르는 어리석은 종이 될 것이다.  







주 재림시까지 머물게 한 사명
- 요 21:21~23 -
 
  금일에 기독교는 이 날까지 머물게 했던 사명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시대를 따라 종을 들어 쓸 적에 성경이 없이 들어 쓴 종도 있고, 성경을 기록하기 위하여 들어 쓴 종도 있고, 기록한 성경을 바로 가르치기 위하여 들어 쓴 종도 있다. 먼저 성경이 없이 들어 쓴 종은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시대라고 볼 수 있다. 성경을 기록하기 위하여 들어 쓴 종은 첫째 모세니 이 사람은 몽학적인 율법을 받아 기록한 종이다.

  그 때에는 율법을 가르치기 위하여 모든 종을 들어 쓰되 모세가 기록한 율법을 가르치는 시대가 있었다. 또는 언약의 말씀인 예언서를 기록한 종들이 있으니 이것을 선지 시대라는 것이다.

  이 종들로 기록한 글은 몽학적인 교훈이 아니요, 여호와께서 앞으로 말세에 행하실 일을 묵시로 나타나 말함으로 기록한 자들이다. 그 시대에는 선지서를 가르치는 때는 아니었다. 오히려 율법을 가르친다는 성전에서 참된 선지들이 묵시로 받은 책을 반대하고 심지어 불살라 버리는 일까지 있었다. 그 때 사람이 이 글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이단시하고 배척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탄생할 때부터 재림시까지는 율법을 가르치는 시대가 아니고 선지서를 가르치는 시대라고 볼 수 있다.

  이제 선지서를 가르치는 사명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선지서를 가르치는 사도들을 박해하는 때가 있었다.

  이 때는 소위 율법주의라는 자들이 율법을 가르치면서 선지서를 가르치는 일을 반대했던 것이다(행3:24~26, 4:1~3). 아무리 율법주의자들이 반대해도 담대히 선지서를 들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때가 사도 시대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서 성경을 해석해 주었던 것이다(눅24:25~27, 44~47). 이렇게 성경을 깨닫도록 가르친 것은 사도들이 성경을 해석할 범위를 말씀하되 십자가 부활을 증거하기 위한 성경을 가르친 것이다.
  선지서를 깨달은 사도들은 4복음을 기록할 때에 선지서를 가지고 해석하면서 예수 행적을 기록한 것이다. 이것이 은혜 시대의 종들이 성경을 가르치는 지식의 한계가 되었던 것이다(벧후1:19~21). 어느 사도나 다 하나 같이 예언서를 들고 예수를 증거하는 것이 초대 교회 교훈이었던 것이다. 그 때는 신약 전서가 있은 것이 아니요, 성경을 가지고 증거할 때에 사도들은 율법을 가르치는데 목적을 둔 것이 아니고 선지서를 가지고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을 증거하는 동시에 예수 행적을 말하게 되었던 것이다(행13:27~30).

  그 때를 지나 모든 사람이 복음서를 기록할 때에 그들이 전하는 말에 의하여 그대로 저술한 것이 복음서이다(눅1:1~3). 그 때는 성경을 새로 기록한다는 목적이 아니고 성경대로 이루어 졌다는 것을 전하기 위하여 예수 행적을 썼던 것이다. 또는 사도행전을 기록하는 자는 성신이 오셔서 역사할 때에 선지서의 예언대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기록했던 것이다.

  편지서를 쓸 때에도 선지서를 증거하되 예언대로 은혜 시대가 왔으니 우리는 이루어진 십자가를 믿고 이루어진 성신의 역사를 받았으니 이리 저리 치우치지 말고 신앙생활을 바로 해 나가라는데 대하여 권면을 했던 것이다.

  그 후에 사도들이 기록한 책을 그대로 전하기 위하여 싸워 온 것이 기독교 역사라는 것이다. 기독교는 이 날까지에 머물러 있는 사명은 사도가 쓴 성경해석 외에 해석을 더할 자는 도저히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날까지에 정통학설은 사도들이 해석하여 놓은 해석에 의하여 좀 더 변론을 세밀히 말한 것이 정통 신학의 학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성신이 충만치 못한 사람들이 학설을 쓰게 될 때에 금일에 영들을 죽이는 쑥물이 된 것이다.
  이 날까지 하나님께서 머물러 둔 사명은 이제 무엇이냐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할 것이다.

  2.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에게 전한 복음을 전하는 일이다

  복음도 예수님이 전한 천국 복음이 있고(마24:14), 하나님께서 선지들에게 전한 복음이 있으니 이것은 천국을 목적한 복음이 아니요, 지상 왕국을 목적 한 복음이다(계11:15). 천국 복음은 베드로에게 맡긴 사명이요, 지상왕국이 오는 영원한 복음은 요한에게 계시로 보여준 복음이다. 바벨론이 망하고 성도의 나라가 온다는 것이다(계14:6~7, 20:1~3).

  기독교에 머물러 있던 사명은 붉은 짐승의 표를 받으면 죽고, 안 받으면 이 세상이 불타는 날에 남은 백성이 되어 새 시대 간다는 복음이다. 이 복음은 선지서에 기록된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죽어 천당을 목적한 말씀이 아니요, 몸에 사망이 온 땅에 사망이 없는 시대를 이룬다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다(사25:7~8). 인간에 사망이 온 것은 죄로 말미암아 온 것이니 죄를 없이 하고 사망을 없이 하는 세상을 이루어서 하나님의 종들로 큰 축복을 받도록 하자는 것이 여호와의 말씀에 목적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주의 재림이 임하는 날에 남은 종이 전하는 복음이다.

  사도 요한이 받은 계시는 변화 성도가 전할 복음인 동시에 심판의 다림줄이 되는 것이다. 요한은 계시를 볼 때 인간 종말의 역사는 해 돋는 편에서 일어 날 것을 보았고 자기가 받은 진리는 재앙의 날에 읽고 듣고 지켜야 될 말씀이라고 받았던 것이다.

  이 재앙이라는 것은 인류 전멸의 재앙이다. 금일의 기독교가 머물렀던 사명이 무엇인지 알고 이 사명을 바로 찾아서 역사하는 일이 없다면 극도로 위기를 만난 것이 71년도부터 오는 시기라고 본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요한에게 이 계시를 보이기 전에 베드로가 묻는 말에 대하여 요한은 내가 다시 올 때까지 머물러 두겠다고 하셨던 것이다. 선지서를 전하는 사명에 있어서 사도들은 선지서를 들고 십자가 부활을 증거했지만 재림시에 남아 있는 변화 성도는 선지서를 들고 심판과 새 시대를 말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 때부터 선지서를 그대로 읽어서 전하는 때가 왔으니 이 말 저 말 쓸데없는 학설을 듣지 말고 선지서 전체를 그대로 전하는 자로만이 새로운 역사를 받음으로 완전한 승리의 용사로 새 시대를 정복하게 될 것이다.

  결 론
  선지서를 전하는 종들의 축복은 다음과 같다. 선지서를 들고 십자가 부활을 증거하던 종들은 은혜시대를 이루었고 선지서를 들고, 심판과 새 시대를 증거하는 종들은 새 시대를 이룰 것이다.







[문]신앙 정로에 대하여 구체적인 설명을 하고자 합니다.
【답】신앙 정로라는 것은 타락한 인생을 하나님께서 구원하고자 하여 약속하신 말씀을 믿는 것인데 다음과 같이 말씀할 수 있습니다.
 

  1.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세운 말씀을 믿는 것이 신앙 정로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서 너는 복의 근원이니 천하에 모든 족속이 네 씨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고 약속하신 말씀을 믿는 것인데 아브라함은 이 약속을 믿고 순종의 걸음을 걸어가서 인정을 받을 때는 이삭을 하나님께 바칠 때였습니다. 아브라함이 걸어간 신앙 노선은 아브라함에게 세운 약속대로 복을 받을 사람들의 표준이 되는 일이라고 보게 됩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믿는 것도 또는 복을 주리라고 믿는 것도 다 정로라고 볼 수 없고 그 언약의 말씀대로 될 것을 믿고 아무리 시험이 와도 하나님은 절대로 거짓이 없는 신이신데 약속의 말씀이 조금도 변할 수 없다고 믿고 끝까지 기다리고 참고 순종하는 길을 신앙 정로라는 것입니다.
  이제 신앙 정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구분을 지어서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 : 오실 메시야를 믿는 신앙 정로

  구약 때 아브라함의 육적 혈통의 자손은 오실 메시야를 믿는 신앙에서 양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자기의 부족을 날마다 깨달으며 양을 잡아 제사드리는 자라면 하나님은 그 제사를 향기롭게 받으시고 축복을 내리되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일, 물질의 축복을 받는 일, 하나님의 축복 속에서 승리의 길을 걷는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때는 특별한 성신의 역사나 또는 부흥 운동이 일어나는 일은 없었고 복된 가정이 이루어지고 국가적으로 부흥하는 일이 있고 특별히 앞으로 될 일을 묵시로 받아 기록하는 일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이라는 것은 오실 메시야를 믿는 신앙에서 하나님을 공경한 종들의 역사와 메시야의 왕국이 올 것을 묵시로 받아 기록한 글입니다.

  둘째 : 오신 메시야를 믿는 신앙 노선

  이 신앙 노선은 선구자가 있으니 즉 사도들입니다. 이 사도들은 오실 메시야를 믿는 성민의 한 사람으로 주님을 친히 따라가면서 보고 듣고 만진 바를 증거할 때에 오실 메시야를 믿는 선지들이 묵시를 받아 기록한 말씀을 밝히 가르칠 때에 나사렛 예수는 분명히 선지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한 대로 오신 참 메시야라는 것을 증거하는 일에 대하여 하나님께 인정을 받은 자들이므로 그들은 성신의 큰 역사가 항상 같이 했던 것입니다.

  사도들의 역사라는 것은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 부활을 증거할 때 성신의 역사가 일반에게 내린 일, 교회가 불일 듯 일어난 일, 성신 계시를 받아 글을 기록하여 문서 운동을 한 일, 이 세 가지인데 이것을 사도적인 역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날까지 걸어온 신앙 노선은 그들이 증거하던 그 증거를 우리가 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그들은 선구자요 우리는 따라가는 자들로서 그들이 받던 성신의 역사를 우리도 받게 되고 그들이 세우던 교회를 우리도 세우고 그들이 시작한 문서 운동을 우리들이 그대로 할 때에 우리는 그들이 못한 것을 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의 사명을 계대하여 그대로 가감 없이 증거하면서 이날까지 온 것을 정로라는 것입니다.

  셋째 : 재림의 주를 맞이할 때의 신앙 정로

  오신 메시야를 온 세계에 알려 주는 때를 은혜 시기라고 하고 다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때를 환란과 재앙의 날이라고 합니다.

  기독교가 이날까지 오신 메시야를 알리기 위한 목적에서 사도적인 사명을 계승한 것 뿐이요, 재림의 주를 맞이할 날에 대하여는 정확히 가르치는 자가 없었습니다. 사도들도 주님이 다시 온다는 것은 말했으나 오시는 날에 남은 자가 되려면 어떠한 환란이나 역사가 있다는 것을 밝히 증거하지 않은 것은 오신 메시야를 먼저 세계에 알리는 것이 사명이므로 하나님께서 분명히 알려줄 필요가 없기 때문에 주님이 승천하시면서 성신의 권능을 받아 가지고 땅 끝까지 증인이 되라는 부탁만 하시고 가신 것입니다.

  그러나 네로 황제 박해로 교회가 큰 화를 만나고 사도들은 다 순교를 하고 남은 자는 사도 요한 뿐이었는데 요한에게 천사를 보내어 재림의 날에 있을 환란과 큰 역사와 또는 지켜야 될 말씀을 기록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계시록은 주 재림을 살아서 영접할 변화 성도의 신앙 정로를 가르친 글이라고 보게 됩니다. 계22:18~19에 이 책에 기록한 예언에서 가해도 감해도 재앙의 날에 구원을 받을 수가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붉은 짐승의 표를 받으면 절대 구원이 없다고 한 것은 재림의 주를 맞이할 날에 남은 자들이 지켜야 될 말씀이라고 봅니다.

  그러므로 계시록11장에 증인에게 권세를 주어서 예언하는 날에 감람나무 촛대가 나온다는 것은 재앙의 날에 신앙 정로를 가는 종들과 교회를 가르친 것입니다.
 

  2. 순교적인 신앙 정로입니다

  이 순교라는 것은 개인적인 자기의 구원 문제나 생활 문제를 목적 두고 싸우는 것이 아니고 남을 살리기 위하여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워 나가는 것을 순교적인 신앙 정로라는 것입니다. 이 신앙은 용사적인 장부의 신앙을 가진 자들이 가는 길입니다.
  이 순교적인 신앙 노선에서도 세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 : 오실 메시야를 믿는 언약 시대에 이스라엘의 부패가 있을 적에 목숨을 아끼지 않고 나서서 책망하는 선지들입니다. 이들은 메시야 왕국이 이루어지는 것을 내다보고 아무리 다윗 왕국이라도 이방과 타협하면 메시야 왕국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정통 신앙을 잃어 버리지 않는 자라야 메시야 왕국의 축복을 받을 것을 말했습니다.

  이때에 그 선지의 경고를 순종하지 않을 때에 그 왕국을 바벨론을 들어서 없이 하고 남은 자로 다시 예루살렘을 복구할 때에 그들이 받은 묵시는 전부가 심판의 다림줄이 된 것입니다.

  둘째 : 오신 메시야를 증거하기 위하여 목숨을 아끼지 않고 증거하는 자들은 목적이 유대나 이방이 차별이 없이 예수를 믿되 유대인은 유대교를 떠나야 된다는 것이요, 이방인은 이방 종교를 떠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때에 그들은 유대 교인들에게도 박해를 받고 이방 종교인에게도 박해를 받게 된 것은 유대교의 할례나 속죄나 모든 의식이 다 필요가 없고 예수를 믿으므로만이 구원을 받는다고 강조했기 때문에 무서운 박해를 당한 것이요, 이방 종교인을 만나서는 이방신을 버리고 우상을 철폐하고 그 모든 의식과 풍속을 버리고 예수만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그들이 나가는 십자가의 신앙 정로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날마다 십자가 외에는 증거하지 않는 증인으로서 피를 흘려 쓰러지면서도 변치 않고 증거하여 세계 만방에 교회를 세우게 된 것입니다.

  셋째 : 재림의 주를 맞이할 때의 증인은 아무리 신자라도 예언의 말씀을 지켜야만 환란에서 보호를 받고 새 시대에 간다고 하는 증거인데 여기는 세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1) 만왕의 왕을 대적하는 붉은 짐승의 정권은 심판의 대상자이니 아무리 하나님의 자녀라도 그 앞에 절을 하거나 표를 받으면 붉은 용과 짐승의 정권을 없이하는 심판이 올 때 함께 다 죽는다는 것이요.

  2) 누구든지 짐승의 세력을 무서워 말고 예언의 말씀을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예비처에 보호하므로 짐승의 박해로 오는 환란을 피하고 짐승의 정권과 거짓 선지의 세력을 없애는 재앙 심판에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증거하려면 권세를 받지 않고는 도저히 이 진리를 증거할 수 없을 것이니 순교적인 사상을 가진 자가 아니고서는 재림의 날까지 증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3) 대표적인 사람이 증거하는 증거를 가해도 감해도 재앙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할 때에 하나님께서 마지막 예언할 권세를 맡겼으니 이 예언이라는 것은 모든 선지가 묵시로 받은 심판의 다림줄의 진리와 계시록을 들어서 다시 예언하는 자인데 하나님께서 그 입술에 말씀을 주어서 조금도 혼선이 없는 완전 변론의 역사를 하게 하므로 그 변론을 통하여 간교한 마귀 흑암이 물러가게 되고 모든 사람이 다 하나같이 깨닫고 진리 안에서 완전한 촛대교회를 이루어 그 교회로 말미암아 지상 평화 왕국이 완전히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선지 예언이 이루어지되 은혜 시대에는 죽은 영을 살리는 것이 목적이요, 환란기에는 죽을 몸을 살려서 새 시대로 인도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문]기독교 종말론의 변론을 바로 하는 법에 대하여 구체적인 설명을 듣고자 합니다.
  [답] 성경은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법으로 쓴 글도 있고 완전한 변론으로 쓴 글도 있습니다. 그런데 법이란 것은 모세5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요, 역사라는 것은 모세5경을 그대로 지키면 복을 받고 지키지 않으면 벌을 받은 역사가 구약 역사입니다. 그 밖의 말씀은 전부가 변론적이라고 보게 됩니다.

  신약 전서에 4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사람을 대하여 말씀한 변론이 기록되어 있고 편지서는 성령을 받은 종들이 성령으로 변론한 것이 기록되어 있고 선지서는 하나님께서 직접으로 심판과 새 시대를 목적하고 변론한 글이라고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종말론이란 것은 4복음과 편지서에 있지 않고 선지서와 계시록에 있는데 계시록은 하나님의 변론을 혼선되지 않게 증거하기 위하여 조직적으로 보여준 글입니다. 계시록은 선지서에 심판의 변론을 열어주는 책입니다 계시록을 바로 알므로 얼마든지 여호와의 책에 세밀한 변론을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종말론은 계시록에서 완전히 조직을 알아 가지고 선지서를 다음과 같이 변론할 수 있습니다.

  계시록은 일곱 교회,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인데 일곱 교회는 재림의 주를 맞이할 변화 성도의 신앙 지침이요, 일곱 인은 재림의 주가 올 시기를 알려준 것이요, 일곱 나팔은 재림 시기에 올 환란의 순서를 보여준 것이요, 일곱 대접은 재림 후 이 땅에 재앙 심판이 올 때 될 일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곱 교회의 종교 부패성을 책망한 것이 선지서 전체의 이스라엘의 종교 부패성을 책망한 변론 전체의 요지가 됩니다. 일곱 인의 시기는 신약 시기에 붉은 말이 허락 받고 나온다는 것은 구약 세계에 앗수르의 세력을 말한 것으로 변론이 되고 검은 말은 경제권의 세력이 빈민을 압박한다는 선지서의 말이 결부가 되고 얼룩말은 선지서에 음녀적인 거짓 선지에 대한 변론이 결부가 됩니다.

  그러므로 4대 병마는 구약 선지서에 심판기에 올 적그리스도에 대하여 북방 세력이 강하게 올 것을 붉은 말로, 극도로 부패한 정치를 검은 말로, 극도로 미혹을 시키는 거짓선지를 얼룩말로 하며 계시록의 내용이 전부 결부되고 구약 선지서도 전부의 내용이 4대 병마에 결부됩니다. 인간 종말에 불가피한 진노의 심판이 오는 것은 이 세 가지가 심판의 대상자가 됩니다.

  언제나 변론이란 것은 알파와 오메가를 바로 말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시작했던 일을 폐하지 않고 그대로 끝을 맺습니다. 만일 스스로 계신 하나님이 시작을 했다가 누가 방해한다고 그대로 끝을 못 맺는다면 그대로 끝을 못 맺게 하는 자가 하나님보다 높은 자가 될 것이니 하나님은 시작을 하면 아무리 방해자가 있어도 그 법에 의해서 끝을 맺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구원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시작한 그 목적을 달성하는 것입니다. 천지 만물을 창조할 때에 얼마든지 아름답고 평화롭고 거룩한 영광의 나라를 목적을 둔 것인데 이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아무런 법이 없이 이루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말씀의 법을 세워서 그 법을 순종하면 목적을 둔 왕국에 들어가는 것이요, 순종치 않으면 못 들어간다는 것이 하나님의 법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간교한 뱀에게 미혹을 받아서 떨어졌다 하여도 그 목적을 달성해 준다는 것이 하나님의 법입니다.

  둘째아담 예수님이 탄생하신 것은 아담을 창조할 때의 목적이었던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첫째아담에게 주었던 그 에덴 동산을 다시 둘째아담으로 이루어 준다는 것이 목적이니 그 둘째아담 예수의 보혈은 사람으로 하여금 근본적인 생령의 사람으로 다시 만들어 놓는 것을 중생이라는 것이요, 중생 받은 사람에게 성령을 부어 주는 것은 첫째아담은 성령을 받지 못함으로써 이기지 못한 것을 아시고 둘째아담 예수가 성령으로 잉태되어 성령으로 충만을 받아 성령으로 역사하다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성령으로 다시 부활해서 승천하시어 성령을 부어 주므로 마귀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여 승리하는 자로 평화 왕국을 이루어 놓는 것이니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타락하는 것을 원하는 것은 아니로되 타락할 것도 아시고 타락하면 이런 법으로 근본 창조의 목적을 달성한다고 말씀한 것이 여호와의 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약을 믿는 것은 구약에 행하겠다는 방침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행해 주신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종말에 심판이라는 것은 인종 전멸의 심판인데 이날까지 꾀어보기 위하여 사용한 마귀를 없애는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않고 마귀를 순종하던 자를 마귀와 같이 없애 버리는 것을 인종 전멸의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마귀 역사를 들어서 당신의 자녀를 괴롭히면서 괴로운 가운데서도 이기는 자에게 묵시를 주기를 지금 너를 괴롭히는 마귀를 내가 없애는데는 아무리 하나님의 자녀라도 마귀 편에 서서 너를 대적하던 무리는 마귀를 없앨 적에 다 없애고 너같이 내 말만 순종하는 자로 지상 왕국을 이루겠다고 말씀한 것이 선지서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마귀 세력을 없애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없고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서 십자가에 죽게 하고 만민을 그 피로 구원하는 동시에 끝까지 순종치 않는 자를 마귀와 함께 없애 버리고 너와 같이 순종하던 사람들로 남은 자가 되게 하며 새 시대를 이루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묵시를 받은 사람이 받던 고난이 심판 날에 환란이 되고 묵시를 받던 종들이 받은 왕권이 종말에 환란 가운데 남은 종들에게 같이 오므로 그 날에 가서 묵시를 받은 자나 그 말씀대로 싸운 자나 같이 영광을 누리게 하는 것이 오메가 역사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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