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례 (1970년 9월호)

설  교  편

1.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의 승리 (미7:4~13)

2. 권세를 주어 예언할 일 (계11:3)

3. 감람나무 촛대교회 (계11:4~5)

4. 재앙으로 땅을 치며 증거할 일 (계11:6~8)

5. 올라 오라 할 때에 들림 받을 자 (계11:9~12)

6.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자 (롬7:1~6)

7. 성령의 증거와 종의 증거 (요15:25~27)

8.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약4:1~10)

9.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 (요1:29~42)

10.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 (요3:16~21)

11.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강 (미5:2~8) 

12. 능하게 하신 예수께 감사할 일 (딤전1:12~17)

13. 연습과 유익 (딤전4:6~16) 

14. 담대함을 얻은 자의 기도 (요일3:13~24)

 

장년 공과편 - 재림의 주를 맞이할 인격

제1과  소금과 빛이 된 자 (마5:10~16) 

제2과  마음에 죄가 없는 자 (마5:17~32) 

제3과  참 사랑이 있는 자 (마5:38~48) 

제4과  상 받을 일을 하는 자 (마6:1~21) 

 

논  설  편

1. 인심 악화와 가정 문제 

2. 불가피한 환란에 대하여 

3. 거짓 많은 세상에 양심 바른 사람 

4. 숨은 종의 기도

5. 생활 난제 해결에 대하여

 

신 앙 문 답

1.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마리아 몸에 잉태 된데 대하여 정확한 신앙의 확실성을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2. 그리스도의 영원한 속죄에 대하여 구체적인 설명을 듣고자 합니다

3. 성신의 은사에 대하여 구체적인 설명을 듣고자 합니다 

4. 안식일과 주일 문제에 대하여 구체적인 말씀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5. 참된 교회라는 것은 무엇인지 구체적인 설명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6. 성경을 분명히 바로 알 수 있는데 대하여 분명한 말씀이 있기를 바랍니다 

 

특    집

1. 그리스도인의 애원

2. 9월 소식 (여호와새일교단 제4회 총회)

3.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종님들에게 축복을 빕니다

4. 부탁의 말씀 

5. 알리는 말씀

 

 

설 교 편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의 승리

- 미 7:4~13 -

 

  서    론

  무소불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어찌할 수 없는 난관을 당하게 하고 거기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용기를 낼 때에 응답을 나리어 승리하게 한다는 것을 목적 두고 미가 7장에 묵시를 보여준 것이다.

 

  1.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의 환경 (4~6)

  사람이라는 것은 환경의 지배를 받는 것이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고 환경을 초월해서 나가는 것을 용사적인 신앙이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 환경을 따라서 흔들리고 있다면 이 사람은 흔들리는 시간에 영적으로 마귀에게 정복을 당하는 것이니 도저히 승리를 이룰 신앙을 이루지 못한 자라고 보게 될 것이다. 신앙이라는 것은 어떠한 사람이 감히 지배할 수 없는 것을 가르쳐서 산 믿음이라는 것이다.  

  언제나 하나님은 믿음이 강한 자를 내세우기 위해서는 극도로 부패한 사회를 이루어 놓고 악화된 환경을 당하게 한 다음에 그 환경 속에서도 당신의 사람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다. 엘리야 때에도 엘리야 한 사람만 내놓고 다 바알신 앞에 정복을 당했고 그 밖의 사람들은 숨어 있는 상태에서 떨고 있었던 것이다. 모세 때에도 하나님을 찾는 자가 많이 있었지만 다 환경의 지배를 받고 원망할 때에 모세가 용기있게 하나님을 바라보고 나갈 때에 대승리를 이루는 역사는 홀연히 나타났던 것이다.  

  우리가 지금 당한 환경은 미7:1~6의 환경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러한 환경을 당한 우리들은 이 본문을 가지고 큰 힘을 얻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미가 선지를 위하여 기록된 묵시가 아니고 말세에 남은 종이 될 변화성도에 대하여 보여준 묵시라고 보게 된다. 그러므로 믿을 사람이 없게 될 때에 하나님 당신만을 바라보고 나가라는 것인 줄 알고 용기있게 나가야 할 것이다.

 

  2. 부족한 자라도 승리하도록 역사하신다 (7~10)

  우리의 승리라는 것은 우리가 완전하므로 승리하는 것이 아니고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응답하는 목적은 약해서 넘어져도 일으켜 주는 응답이요 아무리 흑암이 와도 빛을 비춰주는 동시에 실수가 있어도 깨닫도록 책망을 하면서 인도해 주시는 역사이다. 왜냐하면 택한자의 원한을 풀어주는 것이 응답이니, 하나님은 완전치 못한 인간의 본질을 아시기 때문에 응답을 나리시되 미리 아시고 본문에 묵시로 보여준 말씀이니 베드로가 아무리 장담을 해도 실수할 것을 먼저 아시고 또 그를 향하여 위로의 말을 하셨던 것이다.  

  오늘 본문도 말세의 환란 날에 약한 우리들에게 위로의 말로 미리 말씀한 것이니 우리들은 조금도 낙심하지 말고 용기있게 나가야 할 것이다. 예를 든다면 전쟁에 나갈 군대가 엎어지고 쓰러진 부상자가 있다해도 그 사람을 속히 고쳐줄 책임이 상부의 책임인 것 같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들을 내세워서 싸울 때에 부상을 당하는 일이 있다하여도 필연코 승리하도록 해주겠다는 약속의 말씀이다.

  어떤 사람이 넘어질 때에 낙심을 하고 만다는 것도 이 진리를 믿지 않는 죄요 캄캄한 흑암이 올 때에 겁을 내고 나서지 못한다는 것도 이 진리를 믿지 않는 죄가 될 것이다. 우리는 이 진리를 담대히 믿고 나갈 때에 하나님은 책임지고 역사해서 승리하도록 할 것이다.

 

  3. 세계적인 대 승리를 보게 된다 (11~13)

   모든 사람들이 다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때에 속화된 세상에서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그 신앙을 의로 보시는 하나님께서 세계 통일의 새 시대를 그 사람에게 주시겠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의 종에게 자기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자리에 떨어뜨려 놓는 것은 새 시대에 들어갈 인격을 찾기 위한 방법이다.

  무서운 환란이 올 때에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낙심한다는 것도 죄가 될 것이고 또는 인간 방법으로써 사람을 포섭하고 교섭해서 그 사람의 덕을 보려는 것도 죄가 될 것이고 또는 자기는 자신이 없다고 숨어서 자기 개인의 안락을 찾아보려는 것도 큰 죄가 된다.

  그러므로 넘어져도 뛰는 자가 있고 어두움이 와도 뚫고 나가는 자가 되고 실수가 있다해도 즉시 고쳐 바로 서는 자가 될 때에 하나님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새 시대를 완전히 이루는 역사를 하시겠다는 것이다. 언제나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여 인간의 힘으로 감당 못할 환경을 이루어 놓는 것이니 우리는 언제나 어찌할 수 없는 난관이 올 때에 하나님이 나타나는 때가 온 것을 알고 용기있게 나가는 자라면 누구든지 다 새 시대를 승리의 왕권으로 받게 될 것이다.

 

  결   론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 시대로 인도하는데는 여러 가지 모략이 있으니 가정으로 오는 시험, 이웃으로 오는 시험, 정치인을 통하여 오는 시험, 가장 가까운 친구를 통하여 오는 시험 등 여러 가지 어려운 시험이 많이 닥쳐올 때에 하나님만 바라보고 나가는 자는 반드시 승리하도록 해서 새 시대를 이루겠다고 말씀한 것이니 우리는 조금도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않고 돌진의 걸음을 걸어야 될 것이다.

 

 

권세를 주어 예언할 일

- 계 11:3 -

 

  금일에 큰 난제라는 것은 인류 종말이 어떻게 되며 교회의 종말이 어떻게 될 것이냐에 대하여 누구나 심각히 생각지 않을 수 없는 문제다.

  그러므로 인간의 수학적인 계산과 과학적인 논설로 한다면 자동적으로 공산주의 변론이 나오는 동시에 이것으로 세계 통일을 꿈꾸는 소위 유물적 정책이라는 것이 전 세계 인류의 마음을 흔들리게 하는 현실이요, 그와 반면에 종교 지도자들은 협상적인 노선을 심각히 생각지 않을 수 없는 문제가 닥쳐왔고,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맹목적으로 사상 없는 허수아비 같은 반공 간판을 붙이고 실지는 반공보다도 방랑적인 자유에서 오히려 공산당의 정치를 대항해서 싸울 용기조차 잃어버리고 내일 죽으리라는 낙망에서 양심을 떠난 행동을 하는 무리가 많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말세 증인에게 권세를 주어서 예언하여야 할 문제는 다음과 같다고 본다.

 

  1. 지체하지 않고 진노의 날이 온다는 경고의 예언을 하게 된다 (계10:5~7)

  모든 성경을 대조해 보면 어느 선지나 하나같이 아시아를 중심 하여 북방으로부터 무신론적인 정치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고 백성의 자유를 박탈하고 세계 통일의 꿈을 꾸고 나올 때에 하나님은 당신의 사람에게 권세를 주어서 북방과 싸워 승리하므로 새로운 시대가 이루어진다고 하나같이 선지들이 묵시를 보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새 시대를 이루는 심판의 대상자는 북방 세력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북방 세력이 강하게 내려 올 앞을 놓고 하나님의 종들이 권세를 받고 나가서 예언할 문제는 주님의 재림이 임박했다는 것과 주의 날에 남을 자는 예언의 말씀을 지켜야 된다는 경고의 나팔을 불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선지가 묵시로 받은 말씀이 전부 살아서 주님을 맞이할 종들이 권세를 받고 증거할 복음이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선지에게 심판과 새 시대를 목적하고 보여준 계시니 이것은 과거가 아니고 인류 종말에 나가 외쳐야 할 말씀이 된다.

 

  2. 정한 때의 예언은 마지막 끝을 맺는 예언이다 (계22:17~19)

  모든 선지가 하나같이 성신 감동으로 묵시를 보고 기록한 글은 인류 종말에 정한 때의 마지막 예언이 된다. 그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묵시를 받아 글을 썼지만 마지막에 신랑을 맞이할 신부 자격을 가진 종들은 성령으로 들림 받을 시기를 앞에 놓고 예언할 때에 성령으로 말하게 되는 것인데 이것은 성경대로 북방으로 환란이 오고 성경대로 피난처에 보호가 있고 성경대로 인류 전멸의 무서운 재앙이 내리고 성경대로 새로운 시대가 이루어질 것을 증거하게 된다.

  이때는 이 예언의 말씀을 듣고서 가해도 감해도 재앙을 받게 되는 진노의 날이다. 이 재앙이라는 것은 행위 심판이 아니고 말씀대로 인종 전멸의 재앙이 오고 다시는 성경이 이 민족들에게 이루어질 시기가 없이 다 이루어지고 마는 시기를 말한다.

 

  3. 권세를 받아서 예언하게 된다 (11:3)

  이 권세라는 것은 완전히 지상왕국을 이루는 역사를 가르친 것이다. 이 종의 예언의 말씀을 통하여 지상에 새로운 시대가 이루어지는데는 누구든지 그 예언을 지키지 않으면 재앙의 날에 죽을 것이고 그 예언을 지키면 죽지 않고 살아서 새 시대에 들어가 인류 종말의 지상 통치권을 가지게 된다. 이 통치라는 것은 그 종에게 권세를 맡긴 것이니 그 종을 해칠 자는 전혀 없다.

  그러므로 대 승리를 이루는 것은 하늘과 땅의 권세를 받게 된 까닭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행할 일을 그 종에게 알게 해서 맡길 때에 권세를 맡겼기 때문이다. 지금 큰 문제는 기독교 종말에 진리가 혼선된 것은 하나님의 종들이 각각 자기가 옳다는 생각에서 자기 주관을 내세우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권세를 받는 종은 자기 주관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예언하는 종이니 하나님께서 조금도 거짓이 없이 선지에게 예언한 말씀대로 될 것을 믿고 목숨을 바쳐 싸우는 용기를 가지고 나서기 때문에 그 종에게 하나님은 권세를 맡긴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종들이 자기 주관을 세워도 그것을 인정한다면 하나님은 심판자의 권리를 가질 수 없게 될 것이다. 사람도 한번 말한 다음에 그것을 변경할 수 없다는 것이 없다면 그 사람은 자기 인격을 상실한 허수아비라고 볼 수 있다.

 

  결    론

  기독교는 이미 이루어진 십자가, 부활, 승천, 성신 강림으로써 세계를 통일했고 이제 예언의 말씀이 이루어질 북방환란과 권세역사와 택민 보호와 재앙 심판과 새 시대로서 끝을 맺는 것이니 이러한 것이 없다면 완전히 생명의 종교가 될 수 없고 세계 통일의 완전 승리를 이루는 종교가 될 수 없으며 또는 세계 인류를 완전히 구원해 주는 종교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권세를 주어서 예언하는 목적은 하나님께서 모든 선지를 통하여 말씀한 예언이 모두 이루어지게 하는 역사를 하기 위하여 심판의 대상자가 되게 하는 자들이나 구원받을 자나 하나같이 듣게 하는 세계적인 각성을 주도록 종들에게 큰 권세를 주어서 역사하게 하는 것이다.

 

 

감람나무 촛대교회

- 계 11:4~5 -

 

  서    론

  하나님께서 다윗 왕국을 통하여 세계 통일의 지상왕국이 올 것을 모든 선지를 통하여 예언했다. 다윗 왕국에서 된 일은 전부가 지상왕국이 이루어질 영자적인 교훈이 되는 동시에 그 나라에 무서운 멸망을 앞에 놓고 모든 선지는 하나같이 슬픈 경고를 했던 것이다.

  이 경고라는 것은 아무리 다윗 왕국을 이루기 위한 목적으로 사명을 맡겼지만 사명에 충성을 다하지 않을 때에 하나님은 용서 없이 쳐 없애고 다윗같이 충성을 다하는 자로써 지상왕국을 이룰 것을 뜻하여 그 나라의 선지를 통하여 모든 예언을 하나님께로 받아 기록하게 할 때에 아무리 원수가 강하다 해도 필연코 다윗 왕국이 승리한다고 한 것은 구약 때 이스라엘을 가르친 것이 아니고 만 왕의 왕 그리스도를 통하여 지상왕국이 이루어질 것을 목적하고 말씀한 예언이다.

  이제 감람나무 촛대교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감람나무 역사

  이 감람나무라는 것은 다윗 왕이 기름 부음을 받고 대 승리를 볼 때에 이것을 시기하는 사울 왕은 이유 없이 다윗을 죽이려고 할 때에 다윗은 악으로 대하지 않고 완전 승리의 왕권이라는 것은 사람의 수단 방법인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불쌍히 보고 같이 싸워 주는 것이 있으므로만이 승리한다는 것을 믿고 시52:8에 “오직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영히 의지하리로다” 라고 말하면서 비겁한 마음을 가지지 않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담대히 나갈 때에 다윗의 왕권이 완전히 승리하고 선지국가를 이루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말세에도 하나님의 종으로서 승리의 용사적인 생활을 할 때에 그를 대적하는 거짓 선지와 악당들이 많이 있겠지만 그 종은 인간의 어떤 방법을 쓰지 않고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 속에서 승리할 것을 믿고 나가는 사람이 감람나무의 진액이 되는 왕권의 역사를 받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보복의 하나님이시니 언제나 왕권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수를 갚아 줄 조건이 있는 사람에게 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계20:4을 보면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종들과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년 동안 왕 노릇 하리라고 하였다. 이 감람나무라는 것은 다윗의 뿌리가 되시는 그리스도의 왕권의 축복을 받은 종들의 역사를 말한 것이다. 종이라는 것은 반드시 왕권에 도달한 것이 없다면 승리의 용사가 될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도 잃은 양을 찾기 위하여 십자가상에서 끝까지 참고 승리했으므로 만왕의 왕이 되었으니 그 가지가 되고 순이 되려면 그 길을 걸어가며 싸우는 자에게 완전히 푸른 나무가 이루어지는 역사가 될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은 언제나 사람을 통하여서 역사하는 것이니 하나님께서 맡겨 준 사명을 위하여 끝까지 싸우는 자가 아니고는 하나님은 왕국을 이룰 수가 없다. 이제 본문의 감람나무는 재림의 주를 맞이할 변화성도 전체를 가르친 것이다.

 

  2. 촛대교회

  이 촛대교회는 주의 재림을 맞이할 때까지 남아 있는 교회를 말한 것이다. 주 재림 시기는 재앙의 날이니 만큼 재앙의 날에 남은 자가 되어서 새 시대 가는 예언의 말씀으로 완전히 뭉쳐진 단체를 가르쳤다. 지금은 많은 교파가 있지만 재앙의 날에 남은 교회는 교파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말씀 하나를 중심 하여 목숨을 바쳐 싸우는 용사들이 집결한 단체를 가르친 것인데 이 교회는 새 시대를 이루는 교회이다.

  왜냐하면 새 시대를 목적하고 예언을 증거할 시기에 그 진리가 옳다고 깨닫는 자들이 진리 하나를 굳게 잡고 아무런 풍랑이 와도 흔들리지 않고 나가기 때문에 이 교회에서 들림 받을 변화성도가 나오는 동시에 새 시대에 들어갈 백성도 열매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세밀히 말하자면 촛대교회에서 역사하는 종들은 변화성도요 그 역사를 믿고 회개하고 들어오는 양떼들은 12장과 같이 예비처에 보호를 받고 13장과 같은 환란이 올 때에 남은 교회가 되어서 14장 이하와 같이 심판이 올 때에 구원함을 받는 교회가 된다.

  교회라는 것은 완전한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 교회가 아니고 택한 자를 한곳에 모아서 완전케 되도록 역사하는 것이 교회이니 환란과 재앙 가운데서 남은 교회가 되려면 들림 받는 신부 자격을 가진 종의 인도를 따르던 교회가 예언대로 나리는 재앙 속에서 예언대로 보호를 받고 새로운 시대를 이루게 될 것이다.

 

  3. 아무도 피해를 못 준다

  은혜시대 교회는 피해를 당해서 원수에게 죽는 일이 있는 것은 천당을 목적한 교회이니 만큼 사랑하는 자들을 죽일 때에 원수에게 죽도록 했던 것이다. 이것은 순교자의 반열을 이루기 위한 목적이다. 그러나 촛대교회는 천만인이 쓰러지는 환란에서 남은 자가 되기 위하여 그들로 새 시대를 이루기 위한 목적이니 만큼 절대에 원수의 피해를 당치 않도록 하나님은 역사해 주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때를 따라 역사하는 것이니 예언대로 새 시대를 이루기 위한 환란의 날에 남은 교회이기 때문이다.

 

  결    론

  교회라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모여서 마귀와 싸우는 단체를 가르쳤다. 교회가 설 때는 마귀의 권세 아래서 죽은 영들을 살리는 목적에서 싸웠으므로 영혼이 구원받는 것으로 열매가 되었고 촛대교회는 세계적인 환란이 올 때에 환란을 일으키는 권세를 받은 마귀 앞잡이 정권과 교권을 더불어 싸우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마귀 권세를 능히 이기고 나갈 수 있도록 보호하고 역사해 주시는 것이다.

 

 

재앙으로 땅을 치며 증거할 일

- 계 11:6~8 -

 

  서    론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을 들어 쓸 때에 그때 그때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들어 쓰는 것이니 기독교 종말에 끝을 맺는 역사는 재앙으로 땅을 치며 증거하여야 될 예언은 다음과 같다.

 

  1. 원수의 나라를 회개시키기 위하여 (6상반절)

  하나님은 아무리 반 기독적인 정책을 하는 나라라도 택한 백성을 찾기 위해서는 모세를 들어서 재앙으로 애굽을 치면서 택한 백성을 그 악한 정권 아래서 구출시켰고 엘리야를 들어서 역사할 때도 이세벨의 악한 정치 아래서 백성을 건지기 위하여 역사했다. 만일 금일에 이러한 역사가 없이는 택한 백성을 찾아낼 수가 없는 철의 장막 속에 있는 양떼를 구출시키기 위하여 마지막 때에 종을 들어서 모세같이 쓰시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지금 철의 장막 속에 있는 양떼를 건져내지 않고 심판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지금 공산 진영 아래 있는 백성들은 30세 이하 사람은 복음을 듣지도 못하고 캄캄한 흑암에 잠겨 있는 현실인데 그 속에 있는 백성을 찾기 위해서는 말세의 종을 들어 쓸 때에 모세같이 들어서 쓰되 7배나 더 강한 역사를 일으키는 것이다. 전 3년 반이란 기간은 인간이 알 수 없는 비밀인데 먼저 기독교 세계에 잠자는 종들을 깨우치는 일에 증인권세로 역사하되 아무리 기독교가 많다 하여도 종말의 진리를 바로 증거하는 종을 통하여서만 소낙비 같이 은혜가 쏟아지게 하신다.

  말세 역사라는 것은 예언의 말씀을 통하여 새 시대에 들어갈 택한 자에게 은혜가 내리되 이슬같이, 단비같이(미5:7) 나리어 인생을 기다리지 않게 하고 그 밖에는 은혜가 나리지 않게 되는 일은 새 시대에 들어갈 자들을 완전히 무장을 갖춰주기 위하여 역사를 강하게 내리는 것을 가르쳤다. 자유 진영의 기독교를 향해서는 비를 내리고, 내리지 않는 권세로써 모든 종들이 하나같이 단비같이 내리는 역사를 받게 된다.

 

  2.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땅을 친다 (6하반절)

  이것은 말세에 대표적인 사람에게 주는 특권이니 이 권세를 주는 이유는 진노의 날에 강권으로 들어 쓰는 종이니 만큼 여호와의 대행자로 쓰여지는 종이므로 하나님께서 증거를 보여주기 위하여 강하게 역사하는 것이다. 모세 때의 역사는 새 시대를 이루는 역사가 아니요, 예언적인 선지국가를 이루기 위한 역사이었으나 말세증인의 역사는 완전히 새 시대를 이루는 역사이니 만큼 대표적인 종에게 전권대사의 특권을 맡겨 원수를 굴복시키며 진리를 증거하여 그 안에 있는 백성을 구출시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역사하는 것은 강권으로 택한 백성을 찾아내는 역사의 마지막 법이다.

 

  3. 짐승과 전쟁을 하게 된다 (7)

  이 전쟁이라는 것은 짐승의 정권 아래서 양떼를 찾기 위하여 싸우는 전쟁이니 그 증거를 마칠 때에 하나님은 역사를 거두시는 동시에 원수 앞에서 쓰러지게 한다는 것은 세 가지 뜻이 있다.

  ① 악한 자의 손에 그 몸이 피해를 당치않게 하기 위하여 쓰러지게 하는 것이요.

  ② 예수같이 한 길을 가게 하기 위하여 3일반 동안 쓰러져 있게 하는 것이다.

  ③ 완전한 변화 승천을 그 몸에 주기 위하여 죽은 사람같이 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영혼이 세상을 떠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모략적인 방법으로 죽은 사람같이 보이도록 한 것뿐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변화성도를 아주 무덤에 장사하게 한다면 안되겠으므로 인간이 볼 때에 죽은 사람같이 보였으나 실지는 죽은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사26:19에도 죽은 자는 살아나고 우리 시체는 일어나리라 했던 것이다. 여호와의 영광은 말세 증인을 통하여 나타나되 마지막 증거로써 택한 백성을 환란에서 구출시키는 일을 하는데는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찾아내기 위해서 역사했으나 이때는 인간을 버리는 때이므로 역사를 거두시고 남은 자로 새 시대를 이루는 것이다.

 

  결    론

  하나님께서 기독교 종말의 역사를 재앙으로 땅을 치게 하는 것으로 마지막 경고를 하고는 누구든지 믿고 순종치 않는 자는 환란에 떨어져 죽도록 버려둔다. 왜냐하면 말세 증인의 역사 이상에는 더할 수 없는 때이니 만큼 하나님은 어떻게 하든지 택한 자를 강권으로 찾기 위해서 가장 모략적인 방법으로 택한 종을 들어 쓰는 것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일이요 만민을 깨우치는 역사일 것이다.

 

 

올라 오라 할 때에 들림 받을 자

- 계 11:9~12 -

 

  인간의 최고 역사는 구름을 타고 올라가는 역사라고 본다. 오늘의 과학자들은 아폴로를 타고 달나라에 가는 것을 자랑하고 있지만 이것은 인간에게 효과를 주는 행복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올라오라는 주님이 나타날 때에 구름을 타고 올라가는 사람이 된다면 가장 복 있는 자라고 보게 된다.

  만왕의 왕 그리스도께서 유대 땅 베들레헴 말구유에 나셔서 빈곤한 목수의 생활을 거쳐 3년간 쉬지 못하고 죄인을 찾아가고 병을 고쳐 주고 복음을 전하시고 겟세마네 고통의 기도와 골고다 언덕에 십자가를 지고 올라간 그 고난, 죽기까지 쓰라린 십자가의 쓴잔을 달게 받으시고 죽은지 사흘만에 부활해서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나타나서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부탁을 하시고 구름 타고 올라가실 때에 올라간 대로 다시 오리라고 하신 예수님께서 사도 요한에게 다시 나타나 인류 종말에 무서운 환란과 미혹과 또는 기독교의 큰 역사를 보여준 동시에 당신이 공중 재림할 것을 본 장에 보여준 것이다.

  이제 올라 오라 할 때에 들림 받을 자의 형편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들림 받을 시기 (7~8, 9:15)

  계시록에 나팔 부는 천사가 나타난 것은 들림 받을 종들이 역사할 때에 일어날 환란을 순서 있게 보여줬다. 8장과 9장의 나팔의 순서는 이 땅 3분지 1이 피해를 당하는 환란이 일어나서 이것으로 말미암아 전세계적인 화가 올 때에 계9:4과 같이 인 맞은 종만이 남게 된다고 하였고 14절과 15절에 년 월 일 시에 사람 3분지 1이 죽을 것을 보여줬으니 그 년 월 일 시라는 것은 주 재림기를 가르쳤다.

  계시록은 각 장의 독립성을 가진 계시가 아니고 8장과 9장은 하나님께서 악자를 들어서 세상을 치는 환란이 올 것을 보여준 동시에 10장과 11장은 8장 9장과 같이 환란이 오는 때에 들림 받을 변화성도가 예언의 말씀을 증거하다가 들림 받을 것을 보여줬으니 주 재림 시기는 이 땅 3분지 1이 피해를 당하고 세계적인 화가 되는 환란이 나오는데는 중동을 중심해서 마지막 환란이 나올 때에 주 재림기라고 계시를 보여준 것이다.

  다니엘 선지는 단11:40이하를 보면 중동을 중심 하여 무서운 환란이 일어나되 북방 세력이 애굽에까지 내려오고 아프리카 사람들이 북방을 시종 드는 일이 있을 적에 주님이 오실 때라고 12:1~4에 말했다. 그러면 오늘에 이 시국은 이 땅 3분지 1이 마귀 앞잡이 공산당에게 피해를 당하고 이제 세계적인 무서운 환란이 오게 된 사실을 보아서 분명히 주 재림기라고 본다. 만일 과거에 주님이 오시길 고대했지만 그때 사람들이 다 자기 사명을 분별치 못하는 자리에서 살아서 주님을 맞이할 것을 생각한 것은 잘못된 생각이라고 본다.

  반드시 변화성도라는 것은 예언하는 선지 사명을 가지고 환란 가운데 살길을 백성들에게 알려주는 예언을 하는데는 계시록을 가지고 변화성도가 증거하다가 계시록대로 이루어지는 역사를 하게 되고, 계시록대로 이루어지는 주 재림을 맞이하게 될 것이니 계시록 11장은 변화성도가 역사할 광경을 보여준 것인데 그 시기는 9장과 같이 될 시기라고 본다.

  9장에 해와 공기가 어두워지는 가운데 황충떼가 나오는 것은 주 재림기에 들림 받을 종들을 대적하고 일어날 것을 보여준 동시에 10장과 11장에는 원수의 피해를 당치않도록 권세를 주어서 역사할 것을 보여주었고 다음에 주님의 공중 재림 때 올라 오라 할 때에 구름 타고 올라갈 것을 말했다. 계시록은 주 재림기에 마귀 편에서 역사할 것과 하나님 편에서 역사할 변화성도의 형편을 보여준 것이다. 그러므로 금일의 이때를 주 재림기라고 보게 된다.

 

  2. 들림 받을 자의 순교적인 역사 (9~10)

  언제나 하나님께서는 진실한 종을 쓸 적에 원수의 세력을 강하게 역사하도록 하면서 당신의 종을 들어 쓰는 것을 순교적인 생활을 하는 자만으로 1차 부활에 참여할 수 있게 하기 위한 방법이다. 하나님께서 사도 시대에는 네로 황제를 들어서 악한 정치를 하게 해서 사도들을 다 순교를 시켰고 말세에는 무저갱에서 올라온 짐승이 전쟁을 일으킨다는 것은 계17:8~13을 보면 분명히 일곱 중에 마지막 머리가 주 재림기에 변화성도와 싸울 큰 나라가 된다. 그렇다면 일곱째 머리는 분명히 소련 공산 정책이라고 본다.

  이제 앞으로 종들은 두 가지로 갈라지게 될 것이다. 순교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다 거짓 선지의 교권 앞에 머리를 숙이게 될 것이요 붉은 짐승의 정권과 협상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순교적인 생활을 하는 종은 목숨을 아끼지 않고 무저갱에서 올라온 짐승과 싸우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순교적인 사상을 가지고 짐승과 싸우는 자에게 재앙으로 땅을 치도록 역사해서 심판의 다림줄이 되는 예언의 말씀을 증거하게 할 것이니 주 재림시까지 말씀을 증거할 자는 들림 받을 자격을 가진 변화성도들이 하나같이 생명을 아끼지 않고 진리를 가지고 큰 싸움을 하게 될 것이다.  

 

  3. 몸이 썩지 않고 변화 승천하는 자이다 (11~12)

  이 본문에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했다고 말한 것은 부활성도가 아니고 변화성도라는 것을 가르쳤다. 부활성도는 무덤 속에서 썩은 몸이 부활하는 것이요 변화성도는 죽은 사람같이 쓰러지기까지 복음을 전하다가 3일반 동안 아무런 역사를 못하고 있게 되었다가 그 몸이 변화하면서 승천 할 것을 보여준 것이다. 누구든지 그 몸이 썩지 않고 들림 받을 사람이 되려면 주 재림기까지 열심으로 예언의 말씀을 증거할 무장을 갖춘 자라야 남은 종이 될 것을 보여준 것이다.

  본문에 두 선지자라는 것은 두 대표적인 사람을 가르쳤으니 변화성도의 전체가 다 포함된 것이다. 왜냐하면 언제나 대표자는 전체를 대표한 사람이니 두 선지자가 구름을 타고 올라간다는 것은 변화성도의 전체를 가르친 것이라고 보게 된다.

 

  결    론

  가장 복되도다. 뱀과 싸우던 전쟁도 말씀을 놓고 싸웠는데 마지막 예언의 말씀으로 승리하고 올라가는 그 모양 얼마나 복되고 아름다운 것인가를 우리는 뜻 깊이 생각해야 된다. 사람의 수한에 대해서 판단하지 못하나 시기를 볼 때에 분명히 이때는 변화성도가 전할 복음을 전할 때요 변화성도가 역사할 역사가 일어날 때다.

  누구든지 이때에 완전 무장을 갖추고 마지막 붉은 짐승과 전쟁을 하다가 들림 받는다는 것은 천하에 가장 복된 자라고 보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 시국을 두려워할 것도 없고 원망할 것도 없고 주님이 나타나서 올라 오라 할 때까지 싸운다는 순교적인 사상을 가지고 뒤를 돌아보지 말고 용기있게 나가야만 할 것이다.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자

- 롬 7:1~6 -

 

  하나님은 열매를 요구하는 신이시다. 그러므로 인생을 향하여 역사하는 목적은 열매를 맺는 사람이 되므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달성하는 동시에 그 열매를 통하여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고 또는 영광을 주기도 하신다. 이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는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되므로 열매를 맺는 자가 될 수 있다.

 

  1. 율법에 대하여 죽는 일이 있으므로 (1~4)

  율법이라는 것은 죄를 지으면 용서없이 죽이는 것이 율법이다. 그러므로 죄라는 것은 죽음으로만이 죄의 권세를 벗어날 수가 있다. 예를 든다면 어떤 사람이 사형 선고를 받은 자라면 반드시 죽기 전에는 그 법을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 인생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은 죄 값은 율법대로 용서 없는 사망이다. 그러므로 죽을 자에게 아무런 권리가 없다. 이제 그리스도의 대신 죽은 공로를 믿을 때에 하나님은 믿는 사람이 죽은 것과 같이 인정을 하기 때문에 죽을 사망의 법을 벗어나게 되므로 하나님은 율법적인 방법으로 그 사람을 다스릴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율법의 죄 대가를 완전히 십자가로 청산했고 또는 죽을 사람을 살렸으므로 이제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한 지체로 하나님은 인정하게 된다. 이것이 십자가의 승리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피조물된 인간이 범죄한 대가를 조물주가 되는 하나님의 아들이 대신 죽었다는 그 조건이 얼마든지 피조물된 인간의 죽을 사망을 면하게 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열매를 맺는 것은 열매를 맺으므로 살아나는 것이 아니고 죄에 대하여는 그 대가를 완전히 십자가에서 청산했으므로 그 죄는 완전히 청산해 진 것이다. 이렇게 되므로 그리스도는 열매를 맺게 할 역사를 그에게 나릴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십자가의 의라는 것이다.

  아직까지 예수를 믿는다 하여도 마귀의 흑암을 벗어나지 못한 자라면 완전히 죽은 단계에 들어간 사람이라고 볼 수 없다. 기독교의 신앙의 산 체험은 죄에 대하여 완전히 죽어지는 체험이 완전한 증거가 되는 일이다. 누구든지 이러한 체험이 없다면 완전히 죽는 자리에 이르기 위하여 십자가를 바라보고 눈물 흘려 간구해야 될 일이다.

  금일에 기독교 교인들이 율법에 대하여 죽어지는 체험이 없이 무조건 믿으면 된다고 말하는 것은 합법적인 신앙 노선에 섰다고 볼 수 없다. 이러한 자는 아무런 열매도 없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예를 든다면 남편이 있는 여자가 남편이 살아 있을 때는 그 남편의 법에 매여 있고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벗어남과 같이 죄에 대하여 죽은 자라야 율법을 벗어 날 수 있다.

  신자가 죄질 마음이 생기는데 억지로 율법이 무서워서 떠는 마음으로 있다면 이 사람은 율법 아래 있는 자요, 죄에 대하여 내가 죽고 죄를 미워하고 죄의 사상이 없어지고 정욕이 죽은 자가 되어서 율법에 얽매이지 않고 자동적으로 의로운 생활을 할 수 있게 된 자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마음에 죄를 지을 때에 죄 아래 있는 자라고 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 자라, 중심으로 죄를 지을 때에 아무리 도덕적인 생활을 한다 해도 하나님은 그것을 선한 열매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2.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는 생활이다 (5~6)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가 된 자에게 항상 영을 새롭게 해서 새로워지는 심령으로 기도하고 찬송하고 예배할 때에 그것을 기꺼이 받으시며 그 사람이 일한 대로 친히 갚아 주는 일을 하시므로 하나님이 요구하는 완전한 그리스도왕국을 이루게 된다. 어떤 신자가 그 영이 새로워지지 못하고 피곤해지는 상태에 있다면 이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일을 한 증거라고 보게 된다. 영이 새로워지는 일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실 뜻으로 나리는 역사이다.

  율법이라는 것은 영을 새롭게 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가 어떤 의식이나 도덕이나 수양을 목적하고 사람에게 보이려고 할 때에는 하나님은 역사하지 않기 때문에 영적 상태가 메말라지는 것이요, 모든 일을 영이 새로워지는 것을 목적하고 이루어지는 일이 될 때에 이 사람은 하나님을 상대해서 교통하는 영계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교통하는 세계가 없다면 자동적으로 외식을 가져오게 된다. 항상 하나님께로 향하는 마음을 가진 자에게 자나깨나 그 영이 새로워지게 하는 것이니 이것은 겸손한 자에게만이 있는 것이다(사57:15).

 

  3. 담대한 자가 되어야 한다 (요일3:21~22)

  기도라는 것은 심령이 새로워진 자로 담대히 원수를 대항하여 싸워 나갈 때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열매가 되는 것보다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것으로 넉넉히 이기게 되는 것이다(롬8:37).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 영이 새로워진다 하여도 자기 사명에 불타는 마음으로 원수를 무서워하지 않고 담대히 나가는 일이 없다면 승리의 열매를 거둘 수가 없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라도 나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믿고 담대히 고난을 극복하고 나갈 때에 많은 열매를 맺는 사도가 되었던 것이다. 언제나 큰 열매가 나타나는 것은 하나님은 마귀세력을 들어서 대항을 시켜보는 것이니 담대한 마음으로 싸울 때에 하나님은 승리하도록 역사해 주시는 것이다.

 

  결    론

  하나님의 요구는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일이 사람을 통하여 있을 때에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무한한 축복을 주고자 하시는 신이시니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는 자가 될 때에 하나님 안에 있는 모든 기업은 전부 열매 있는 자의 것이 된다. 하나님의 사랑은 열매가 없어도 상급을 준다는 사랑이 아니요, 열매를 맺도록 역사해 주시는 동시에 그 열매를 따라서 상급을 주신다는 것이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이라는 것이다.

 

 

성령의 증거와 종의 증거

- 요 15:25~27 -

 

  하나님께서 모든 선지를 통하여 빠짐 없이 말세에 될 일을 말할 때에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 시대가 이루어질 것을 목적 두고 선지들은 하나님께 묵시를 받아 성경을 기록하게 된 것이다. 선지들은 증거하는 사명이 아니고 앞으로 될 일을 기록한 자를 선지라 하는 것이다. 오시리라고 예언한 말은 다시 그 말씀을 증거할 때가 오므로 그 예언이 완전히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선지를 통하여 말세에 될 일을 기록하게 하시고 다시 증거하게 하는 사명자가 없다면 선지 예언은 아무런 효과를 이룰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에 성령의 증거와 사도의 증거를 말씀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의의가 있다.

 

  1. 성령의 증거 (25~26)

  아무리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셔서 말씀대로 죽으시고 말씀대로 부활했다 하여도 오늘에 성령이 증거하는 일이 없다면 우리는 확실한 신앙을 가질 수가 없다. 그러므로 성령이 증거하는 의의는 다음과 같다.

  1) 진리를 깨닫도록 인도해 주신다(요16:13)

  인도라는 것은 이루어지지 아니한 일을 깨닫게 하는 것이 아니고 이루어진 일을 깨닫게 하는 것을 인도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은 그리스도께서 보내서 증거하게 하는 영이니 이 성령이 오므로써 십자가의 도를 분명히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신다(고전2:1~7). 아무리 인간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았고 죽는 모양도 보았고 부활하는 것도 보았다 하여도 성령이 가르쳐 주므로만이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눅24:45).

  인간이라는 것은 성령의 증거 없이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도저히 알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는 것이 인간이다. 그러므로 성령이 오신 목적은 택한 자를 진리로 인도하기 위하여 오신 것이다. 누구든지 성신의 인도가 있는 자는 성경을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성경을 읽을 적에 마음이 진리 안으로 깊이 들어가서 그 진리 안에서 확실한 믿음의 지식을 얻도록 해 주시는 것을 성령의 증거라 하는 것이다.

  2) 이적, 기사(행4:29~33)

  이것은 어리석은 인간들이 예수의 부활을 믿지 않고 의심할 때에 예수는 분명히 부활하신 것을 알게 하기 위하여 성령은 이적과 기사를 나타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적 기사가 성신이 온 목적은 아니다. 성신이 자기가 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행하는 한 전도 방침이 된다. 성령은 그리스도께서 참된 메시야라는 것을 만민이 알게 하기 위하여 무조건 이적과 표적을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기사와 이적을 보고도 믿지 않는 사람이 있는 것은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성령을 부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령을 부어 주는 것은 택한 자에게 진리를 바로 믿고 바로 증거하기 위한 목적이니 불택자에게 성령을 주어 역사할 수는 없다. 만일 성신을 누구나 다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진리가 아니고 택한 자에게 성령을 보내서 하나님이 그 사람을 통하여 할 일을 하기 위한 목적이기 때문이다.

  3) 온전한 인격을 이루어 주시는 것이다(엡3:16)

  사람이라는 것은 성령을 받으므로만이 온전한 인격을 이룬다. 아담과 하와가 마귀에게 미혹을 받은 것은 성령을 받지 못했으므로 타락했던 것이다. 성령을 받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승리가 있으므로 말미암아 그를 믿는 자는 승리의 역사가 되는 성령을 받게 된다(계5:5~6).

  성령을 받으므로 인간이 그리스도의 대행자로 일할 수 있는 인격을 소유하게 되는 것을 성신 역사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누구든지 성령을 받게될 때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승리할 수 있는 인격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자기 인격이 아니요, 그리스도의 피로 산 몸이니 주의 것이 되었기 때문에 주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2. 사도의 증거 (27)

  사도들이 4복음을 쓴 것은 성령의 계시를 받아쓴 것이 아니고 친히 목격자 된 자들이 목숨을 내 놓고 열심히 전할 때에 성령은 거기서 믿고 깨닫도록 했던 것이다. 아무리 성령이 역사한다 해도 사도들이 들은 바와 본 바를 강하게 들어 증거할 때에 성령은 크게 역사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종된 자가 성령의 역사만 기다리고 가만히 있다는 것은 탈선된 행위라고 보게 된다. 4복음이 없다면 성령은 조금도 역사하지를 않을 것이다. 종된 자가 할 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성령을 받기 위하여 합심하여 기도 할 일(행1:12~14)

  하나님의 종으로서 자기가 아무리 보고 안다 해도 성신의 역사가 없이는 도저히 그 증거가 아무런 열매가 없다는 것을 알고 성령이 임하기를 목적 두고 기도해야 될 것이다. 만일 어떤 종이 학적으로 배웠다 하여도 성령의 역사가 크게 임하기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는 바가 없다면 그 종은 열매 없는 종이 될 것이다.

  사도들이 아무리 3년간 예수를 따라가며 배웠다 해도 그들이 합심기도가 있으므로 성령을 받고 그들이 합심하여 증거할 때에 모든 사람이 회개하고 돌아온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들이 예수가 부활한 후에 친히 보았고 그 몸을 만져본 바가 있다 하여도 성령이 임하기 전에 아무런 일을 못했던 것이다. 우리는 성령의 역사만 믿고서 종된 자가 가만히 있다는 것도 탈선이요 자기가 배웠다고 성령의 역사를 의지하지 않고 증거한다는 것도 탈선이다. 언제나 성령은 사람이 할 일을 사람이 할 때에 역사하는 영이다.

  2) 강하고 담대해야 된다(행4:17~19)

  아무리 성신을 받았다 하여도 담대히 나가지 않으면 역사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로되 담대히 증거할 때에 역사가 더 크게 일어난다(행4:29~35). 종이라는 사람은 주인이 시키는 일을 할 때에 서슴지 않고 담대히 나갈 의무가 있다. 하나님의 종이라 하면서 원수가 무서워서 말을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정할 수 없는 일이라고 보게 된다. 그러므로 담대히 나갈 때에 하나님은 인정하시고 직접으로 그 종을 보호하고 역사해 주시는 것이다.

  3) 조금도 변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엡6:24)

  우리는 하나님이 맡긴 사명에 충성을 다할 때에 끝까지 변치 않는 자라야 은혜가 떠나지 않는 것이니 아무리 사명을 받았다 하여도 변함이 있을 적에 성령은 오히려 슬퍼하시며 근심하신다. 자기가 분명히 진리를 알았다면 죽어도 변치 않고 증거하는 자라야 순교적인 생활에서 왕권을 받게 될 것이다. 천하에 제일 위대한 인격은 끝까지 변치 않는 인격이라고 보게 된다. 아무리 영웅적인 투쟁을 하던 자라도 종말이 변해질 적에 오히려 조롱거리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자기가 친히 본 부활을 증거하기 위하여 죽기까지 변치 않았던 것이다.

 

  결    론

  하나님의 역사는 성령의 증거와 종된 자의 증거가 합치되므로 큰 영광을 나타내고 창조의 목적을 달성하게 되므로 하나님은 여기에 따라서 조금도 빠짐 없이 상급을 주므로 종된 자가 세세 왕권을 누리게 된다(계22:3~5).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 약 4:1~10 -

 

  하나님께서는 완전한 사람을 찾을 수 없으므로 은혜를 주기 위해서는 겸손한 자를 찾으신다. 하나님은 당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겸손하게 인간을 찾아오기도 하시고 또는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기 위하여 기다리고 사모하기도 하신다. 이제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는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본문을 통해서 말하고자 한다.

 

  1. 정욕으로 하려는 것이 없어야 된다 (1~3)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주시되 그 사람이 이 은혜를 바로 간수할 수 있는 마음을 가졌느냐는 것을 먼저 보신다. 어떤 사람이 은혜를 받아서 자기의 욕망을 채우려는 것은 오히려 기도한다 하여도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일이 된다.

  은혜라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하는 뜻을 이루기 위하여 주시는 것이니 은혜를 악용하지 말고, 은혜를 받아서 자아를 희생하고 순교의 생활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죽기까지 십자가에서 참으셨기 때문에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은혜를 받는 것이니 은혜를 주는 자나 받는 자나 목적이 동등해야 된다. 사도들은 성신을 받아 가지고 그 때부터 피흘리기까지 싸워나갔기 때문에 하나같이 승리하고 왕권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욕심이란 자체는 교만에서 오는 것이니 우리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순종치 않고, 욕심을 따른다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다. 왜냐할 때에 하나님은 택한 자에게 모든 것을 주기로 작정한 것인데 사람이 그 뜻에 순종치 않고, 자기라는 생각을 앞세운다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가 된다.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피조물인 동시에 조물주께서 우리보다 우리 사정을 더 아시고, 인도하시는 그 뜻에 순종하는 것 외에는 전부가 욕심이 될 것이다.

 

  2. 타협이 없어야 된다 (4~5)

  하나님의 심정은 더 큰 은혜를 주고 싶어하는 마음이 간절한 것인데 이 뜻을 따르지 않고 세상의 것을 바라본다면 자동적으로 성신을 대적하는 일이 된다. 우리에게 온 성신은 밤낮으로 우리가 완전해 지기를 사모하는 신이다. 성신이 온 목적은 그 사람을 이 세상의 영광보다도 더 좋은 영광을 세세토록 받게 하자는 목적인데 세상 영광을 바라본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큰 과오라고 보게 된다.

  누구든지 세상의 것을 분토같이 보고 하나님 나라에서 오는 것만을 간절히 사모하는 자에게는 날마다 더 큰 은혜를 주어 이 땅에서도 부족함이 없고, 앞으로 오는 시대에 세세 왕권을 받게 하는 것이다. 은혜라는 것은 그 분량에 따라서 주고 또 주시고자 하는 것이니 더 큰 은혜를 받으려면 성신의 인도를 따라서 행하는 자라야 될 것이다.

 

  3.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6~7)

  순종이라는 것은 은혜를 받은 자로서 아무리 마귀가 대적해도 마귀를 무서워 말고, 마귀를 물리치면서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을 절개라 하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절개 있는 신부가 신랑에게만 순종하기 위하여 다른 사람에게 절대로 마음이 끌리지 않는 것을 정절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아무리 간교한 마귀가 꾀어도 하와같이 끌리지 말고, 담대히 물리치고 나갈 때에 성령은 더 강하게 역사해 주신다.

  성령의 인도라는 것은 마귀 시험이 없게 하는 것보다도 마귀를 대적하도록끔 하기 위하여 마귀 시험을 통과시키는 것이다(마4:1이하). 누구든지 겸손하게 순종하는 자라면 모든 전부는 하나님께서 책임지고, 역사해 주시는 것을 하나님의 진리의 역사라는 것이다. 진리라는 자체는 마귀를 대적해서 이기고 순종해야 된다는 것이 진리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결    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것은 항상 주 앞에서 자기를 낮추는 자를 높이고자 하는 것이다(10). 이것은 하나님께서 겸손한 사람을 찾기 위해서 마귀를 들어 역사하는데 사람들이 이 모략을 모르고, 자기 위신을 높이기 위하여 마귀를 대적하지 않을 때에 마귀는 물러가지 않고, 오히려 우리에게 침투해 들어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수치를 당하고, 멸시를 받고, 쫓겨남을 당한다 할지라도 자기의 이익을 생각지 않고, 싸우는 자라야 자기를 낮추는 자라고 보게 된다. 누구든지 은혜를 받고도 자기가 불리하고, 명예의 손실과 자기 위신이 폭로된다고 해서 회피한다는 것은 더 큰 은혜를 받을 수 없는 자라고 보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절대 부끄러워하지 않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므로 큰 역사가 인류적으로 이루어진 것같이 말세의 종도 원수를 무서워 말고, 하나님의 뜻에만 순종하는 자라야 겸손한 자에게 주는 은혜를 더 강하게 받을 것이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

- 요 1:29~42 -

 

  타락한 인생을 향하여 하나님이 할 일은 오직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의 진리 하나로만이 하나님은 해결할 수 있는 법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죄를 진자는 죄의 대가를 의를 행하는 자는 의의 대가를 주어야 할 책임이 있는 조물주 하나님의 신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신이라는 것은 반드시 법을 따라서 역사하는 신이시니 하나님의 법에 따라 인간을 다스릴 책임이 있는 신을 조물주 하나님이란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찾는 것이 참된 종교가 아니고 하나님이 사람을 찾는 것이 참된 구원의 종교가 된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사람을 찾을 때에 무조건 죄인을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나님께서 죄 된 인간을 아무런 의로운 방법이 없이 무조건 죄인을 불러들인다는 것도 불의가 될 것이고 죄를 지은 사람을 무조건 죽인다는 것도 하나님의 의가 아니다. 그러므로 세상 죄를 아들에게 지워서 세상으로 보내는 것이 하나님이 인간을 찾는 의로운 방법이다.

  이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의 진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알아야 할 것이다.

 

  1. 완전한 공의이다 (요1:29, 35~36, 사40:2)

  죄라는 것은 법을 범한 자에게 배상을 하라고 하는 것이 공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계18:5~6을 보면 아무리 회개할 기회를 주어도 회개하지 않고 죄를 범하는 자에게 갑절이나 재앙으로 갚아 준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배나 갚아 주어야 될 죄를 아들에게 짊어지워서 죄의 대가를 청산하는 것이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완전한 속죄의 법이라는 것이다.

  첫째아담의 범죄로 인간의 육의 사망이 왔고 그 후에 자범죄로 말미암아 영의 사망이 왔다(엡2:1).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을 찾아 올 때에 하나님의 신이 아무리 나타나서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가르쳤고, 모든 선지를 통하여 심판의 경고를 주었다 하더라도 세상 죄를 지고 인간을 찾아오는 일이 없다면 그 공의로운 말씀은 한 지나간 이야기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공의로운 말씀은 세상 죄를 지고 세상에 오는 시간부터 인간에게 큰 효과를 발휘하는 열매가 되기 시작했다. 유대 땅 베들레헴 쓸쓸한 말구유에서부터 갈보리 산상 십자가까지 걸어가서 다 이루었다는 말씀으로 끝을 맺은 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는 문을 열어 놓은 것이다. 이 법이라는 것은 다시없는 유일한 법이다.

 

  2.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한 일 (30~34)

  성령이 요단강에서 어린양 예수에게 임할 때에 몸이 물에 잠겨 올라올 때에 임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의의가 있다. 주님의 몸은 세상 죄를 짊어진 몸이요, 성령으로 물과 피로 임한 몸이니 그 몸은 인간의 죄를 위하여 제물로 온 몸이니 물에 잠겨 올라온 것은 인간의 죄를 다 도말 하고 완전히 새로운 사람을 이루어 놓는 뜻으로 친히 세례를 받으신 것이다.

  그러면 성령이 임하는 것은 완전히 그 세례를 하나님께서 의롭게 인정한다는 증거다. 주님도 이것이 없다면 도저히 역사할 수가 없는 몸이다. 인간의 몸이란 것은 성령을 받으므로만이 완전하게 되는 몸이니 예수님도 성령을 받으므로써 완전 승리에 이르게 된 것이다. 기독교가 인간의 죄를 사하는 일이 있다 해도 성령이 임하는 일이 없다면 완전 승리를 이룰 수가 없을 것이다.

  사람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신을 받을 수 있는 그릇으로 지음 받은 것이 인간의 몸이라는 것이다. 죄가 있는 몸에 성령이 임할 수 없다. 죄의 값은 사망이니 죄가 있는 몸이 성령의 전이 될 수가 없으므로써 우리 주님이 죄 없는 몸으로 만민의 죄를 짊어지고 오셨기 때문에 인간을 대표하여 세례를 받을 때부터 성령은 역사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를 믿고 죄사함 받은 자가 물에 잠겨 올라오므로 해서 성령을 완전히 받게 된 것이다.

  행2:38을 보면 “너희가 회개하고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어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고 베드로는 증거했던 것이다. 예수님께 임한 신의 역사는 은사가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된 몸으로서 권세 역사를 받았던 것이다. 이것은 죄사함 받은 예수가 아니고 남을 위하여 의를 행한 일이 되기 때문에 권세의 신을 받았던 것이다.

  이와 같이 말세에도 남종과 여종에게 신을 부어 준다고 욜2:29에 말씀한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죄사함을 받을 때에 선물로 받는 성령은 은사로 받는 것이요, 의를 행하므로 받는 역사는 권세로 받는 것이다. 주님께서 만민의 죄를 짊어진 몸으로 와서 역사한 일은 아들된 권세를 지상에서 나타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세례요한도 성령이 임하는 것을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한다고 하였다.

 

  3. 따라가는 자는 제자가 된다 (35~42)

  인간이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행위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을 믿었다는 의로 되는 것이다. 세례요한의 증거를 듣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자는 사도가 되었고 모든 권리를 예수님께 받아서 교회를 세우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들은 이미 생령된 이스라엘로 메시야 오기를 고대하고 있던 신앙 있는 자이므로 직접 사도로 택함을 받았다.

  사람이라는 것은 자체가 의로운 사람은 없되 의로우신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받아들이면 의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를 행하시는 이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예수 뿐이요. 그 밖의 사람은 그 의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은 것뿐이다. 아무리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공경하였지만 그 의를 순종치 않을 적에 다 저주를 받게 된 것이다(롬10:1~4).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은 사람이 죄를 지으므로 심판을 한다는 것보다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의를 믿지 않을 때에 정죄를 받게 된다(요3:18).

 

  결    론

  하나님의 완전이라는 것은 세상 죄를 지고 인간을 찾아온 데서 부터가 인간이 하나님을 공경할 수 있는 완전한 의가 성립되었으므로 그리스도를 통하여서만이 완전이라는 것을 하나님도 가지고 인간도 받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남을 살릴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자라도 능력이 있다는 것으로써가 완전이 아니고 그 능력을 발휘하여 남을 살리는 일을 하므로만이 완전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독생자가 세상으로 오시므로 사람들은 참되다고 인을 칠 증거가 되었다(요3:31~33).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

- 요 3:16~21 -

 

  인간의 모든 사람들은 하나같이 사랑을 요구하고 있다. 누구나 다 하나같이 자기의 만족을 얻어 보려는 요구는 자기 자신 속에서 얻으려는 것이 아니고 남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서 만족해 보려는 욕망이 있는 인간들이다. 친구로 혹은 부모로 혹은 선생으로 혹은 정권으로 혹은 물권으로 해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기의 요구를 채워 보려는 것이 있지만 하나님이 독생자를 준 사랑이라는 것은 요구하는 것보다 반대하는 세상이 된 것은 멸망의 도성이라는 것이다. 독생자를 주신 사랑에 의하여 모든 인류의 끝을 맺는 판단이 오게 된다.

  이제 독생자를 주신 사랑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알아야 할 것이다.

 

  1. 제일 높고 큰 사랑이다

  아무리 하나님이 모든 축복을 자녀나 물질로나 몸의 건강을 현재 주신다 하여도 독생자를 주신 사랑이 아니라면 완전한 축복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죄라는 것을 완전히 청산하지 못한 가정에 물질이 많고 자녀가 많고 건강이 좋다 하여도 죄 값으로 오는 심판은 피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독생자를 주신 사랑이 무엇인지를 깊이 알지 못하고 하나님께 대하여 더 큰 것을 구한다면 어리석은 요구라고 본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신 것 외에는 더 큰 것이 없고 높은 것이 없는 것을 알고 그 사랑 안에서 만족함을 얻고 절대적인 순종이 있을 적에 만민의 죄를 짊어지고 오신 예수와 같이 동등하게 될 것이다.

 

  2. 다함이 없는 사랑이다

  이 사랑은 무궁 안식 세계를 이루기 위한 사랑이니 이 사랑으로써 다함이 없는 영생이 있고, 왕권이 있고, 화려한 새 도성이 있는 것이다.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영원한 것을 주자는 목적에서 독생자를 주신 것이니 이 사랑을 받은 자가 잠깐이라는 세상에서 괴로움을 참지 못한다는 것은 그 사랑의 영원한 가치를 아직까지 완전히 믿지 못하는 증거라고 보게 된다.

  영원이라는 것은 두 가지로 되는 것이니 독생자를 주신 그 사랑을 믿으면 영원한 영생의 기업이요, 믿지 않으면 영원한 지옥의 형벌이라는 것이 하나님이 완전한 법으로 심판하는 공의라는 것이다. 공의 중에도 완전한 공의는 십자가의 공의다(사42:3~4).

 

  3. 조금도 변함이 없는 사랑이다 (사54:9~10)

  인간이 물질을 놓고 계약을 세우는 것도 변경을 하면 손해 배상을 내는 것이다. 이것이 계약의 법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둘도 아닌 독생자를 주신 사랑이 어찌 조금인들 변할 수가 있겠는가. 그 피로 산 백성을 하나님은 도저히 잊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것은 완전한 사랑을 줄 수도 없고 사람에게 받을 수도 없기 때문에 언약을 세우고 손해를 보면서라도 해약을 시키는 일이 있겠지만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주신 사랑으로 세워진 언약은 천상 천하의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으므로 그 아들을 소유한 자에게 아무도 해할 수 없는 권세가 성립되었으므로 조금도 원수가 피해를 줄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독생자를 주신 사랑에 의하여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움직일 수 있는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이 힘이라는 것은 천지를 창조할 때에 역사하던 힘만이 아니요, 이 천지 밖에의 영원한 천국을 이루기 위한 힘이니 창조주가 아들을 대신 죽여서 역사하는 일이므로 필연코 완전을 이루고야 마는 것이다.

  완전이라는 것은 인간의 행위에서가 아니고 하나님이 주시는데 있는 것인데 독생자를 주신 것은 피조물 된 인생에게 완전하고 영원한 것을 다 주기 위한 뜻에서 최선의 큰 방법을 세운 것이 십자가란 것이다. 십자가 외에 더 큰 사랑이 없는 것이니 누구든지 독생자를 주신 그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다 안다면 이것을 완전한 지식이라 하며 이 지식을 통하여 새로운 시대가 이루어지는 것이다(사11:9).

 

  결    론

  인생이라는 것은 마귀 미혹을 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독생자를 주신 사랑을 오히려 반대하는 일은 흑암 중에 더 큰 흑암이라고 본다. 알지 못하고 죄를 지었다는 것은 약간의 흑암에 거친 일이라고 볼 수 있으나 하나님의 사랑의 진리 말씀을 듣고도 짐짓 대적하는 것은 흑암에서도 더 흑암으로 떨어지는 악인의 행동이다.

  흑암이라는 것은 잠깐동안 가리는 흑암도 있고 영원히 멸망을 주는 흑암도 있으니 하나님의 사랑의 소식을 알지 못해서 죄를 지은 자와 큰 사랑을 받고도 짐짓 대적하고 죄를 지은 자와의 그 죄의 차이점은 가히 형언할 수 없다. 잠깐의 흑암에 거쳤다 하더라도 그 사랑을 깨닫고 순종한 자라면 영원한 영광의 기업을 누릴 것이로되 짐짓 독생자를 주신 사랑의 복음을 듣고도 반대한 자는 영원한 구렁텅이에 빠지는 것을 멸망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강

- 미 5:2~8 -

 

  인류 역사의 많은 정치인이나 문화인이나 종교인이 하나같이 찾고 있는 것은 참된 평강이라고 볼 수 있다. 오늘에 무엇으로써 인류의 참된 평강을 가져올 것이냐에 대하여 누구를 막론하고 하나같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오늘 본문에 있는 미5:5을 보면 베들레헴에 나신 그리스도는 인류 종말에 북방 환란이 올 때에 평강이 된다는 것을 두고 미가 선지는 묵시를 보았던 것이다. 평강이라는 것은 아무런 환란이나 어려움이 없이 평강이 온다는 것이 아니요, 아무런 무서운 환란이 온다해도 그 중에서 그 일을 통하여 완전한 평강이 있다는 것을 본문에 분명히 가르쳤다.  

  이제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는 평강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성서를 통하여 말한다.

 

  1. 그리스도는 신성과 인성이 있으므로 (2~3)

  지금으로부터 2700여년전 미가 선지는 묵시로 인간 종말을 받아 기록할 적에 아무리 세상이 악해지고 반 기독적인 사회가 온다하여도 반드시 진리의 대적이 되는 원수는 분명히 망할 것을 말할 때에 베들레헴 작은 동네이지만 거기서 참된 치리자인 그리스도가 탄생할 것을 말할 때에 그는 신성을 가진 자라는 것을 분명히 말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근본은 태초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홀로 통치하는 것이 아니요, 세계 통일의 영원한 왕국을 위해서는 자기를 신앙하는 자로 시련을 통과시켜 남은 자로 이룰 것을 말했다.

  그리스도는 신성이 없는 사람이라면 기독교는 도저히 승리를 이룰 수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과는 대적이 되는 진리 운동이기 때문이다. 대적이라는 것은 악한 자의 대적이라는 것이니 악한 자의 세력이 회개하고 돌아오기 전에는 악자를 용납치 않고 없이하므로 완전한 평화 왕국을 이룬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해산의 수고를 다하는 자라야 남은 자가 되게 하고 그밖에 타협적인 노선이나 또는 반 기독적인 사상을 가지고 나가는 자는 절대로 이 땅에서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 그리스도의 역사라는 것이다. 위험을 당치 않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역사가 아니요, 피흘리기 까지 싸워야 된다는 것이 그리스도의 역사이다.

 

  2. 세계 통일의 역사이다 (4)

  참된 평강이라는 것은 사람이 사람을 상대해서는 있을 수가 없고 초인간적인 세력의 힘이 아니고는 악한 세상을 참된 평강의 나라로 이룰 수가 없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자라면 아무런 악의 세력이 대항한다 하여도 안연히 거하게 하는 보호가 있으므로 세계를 통일하게 된다. 사람은 사람을 대할 때에 완전한 세계 통일을 가져올 자는 전혀 없는 것이다. 어느 나라나 한때는 기세를 올리며 세계 통일을 꿈꾸었지만 결국은 실패하고 망했다는 것이 인류 역사가 분명히 알려주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박해하던 강대국은 다 망하지만 그리스도의 나라는 세계 통일을 하고야 말 것이다. 왜냐하면 악자를 들어서 한 때 쓰시는 권세를 가졌기 때문이다. 아무리 한때는 악의 세력이 강한 것 같으나 결국은 그리스도의 왕국을 이루기 위한 한 도구가 되고 말 것이다. 그리스도는 강한 자를 들어서 세상을 치면서 당신의 종을 들어서 강한 자를 치겠다는 것이 말세의 비밀 요지가 된다(5~6).

 

  3.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는 인생을 기다리지 않게 하신다 (7)

  그리스도의 역사라는 것은 사람이 볼 때는 약해 보이나 실지는 강하게 해서 필연코 승리는 당신을 따르는 자에게 있다는 것이다. 앞으로 이 땅에서 남을 자는 이슬과 단비 같이 그리스도께서 역사를 나리므로 그 역사를 받는 자는 수풀 속에 사자같이 강해지는 용사가 되고 대적을 없이 한다고 하였다(8~9). 이제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강에 대하여 구체적인 설명을 하자면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그리스도께서 이날까지는 진실한 자를 찾기 위하여 이방 세력에게 교회가 짓밟혀도 잠잠히 계셨지만 다시 나타날 때에 원수를 갚아주는 역사가 있으므로 참된 평강의 나라를 이루는 것이니 이것은 남은 자로서 강대한 나라를 이루는 것이다. 이 남은 자라는 것은 그리스도만을 따라가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고 나가던 자라고 보게 된다.

  2) 이날까지는 순교자를 나게 했지만 마지막 때에는 당신의 종들을 통하여 북방 세력을 쳐부수는 일을 한다고 분명히 가르쳤으니 금일에 아무리 북방이 강하지만 반드시 사자같이 강한 용사를 들어서 북방을 친다는 것이다. 우리는 정당을 위한 반공이 아니요, 진리를 위한 반공이다.  

  어느 선지나 하나같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류 종말에 북방 세력을 쳐 없이하고 새 시대를 이룬다고 했으니 금일에 북방의 반 기독적인 공산 정치가 아무리 교회를 짓밟고 나온다고 해도 예언대로 그리스도가 베들레헴에 났고 예언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가 세계를 정복했으니 예언대로 북방 세력이 강하게 일어나는 때에 예언대로 남은 자를 들어서 북방을 때릴 것은 조금도 의심할 수 없는 진리라고 믿어진다.

  3) 말세의 역사는 원수를 없이하는 역사이다. 그러므로 원수를 극도로 강하게 하는 것은 없애버릴 심판기가 된 증거라고 보게 된다. 언제나 하나님은 무소불능의 신이시니 과거에도 원수의 세력을 강하게 하여 인력으로써 당할 수 없게 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종을 들어서 원수를 물리친 것이 선지시대의 역사이다.  

  이것은 종말에 될 일을 묵시로 보여준 동시에 실천적인 증거를 그 시대에 보여준 것이다. 아무리 앗수르가 강했으나 히스기야의 하룻밤 기도에 북방 앗수르가 망하듯이 종말에도 이슬과 단비같이 내리는 역사를 받으면서 부르짖던 자들이 초인간적인 큰 힘을 사자같이 받아 가지고 북방을 짓밟아버릴 것을 가르친 것이다. 참된 평강은 북방 세력이 강하게 일어날 때에 그 원수를 없이하면서 평강의 나라가 온다는 것이다.

 

 

능하게 하신 예수께 감사할 일

- 딤전 1:12~17 -

 

  기독교가 세계를 통일할 역사는 아무리 기독교를 박해하던 사람이라도 그리스도는 버리지 않고, 그 사람을 불러 능하게 만들어서 그리스도의 정병으로 피 흘리기까지 싸우도록 하는 것이 있으므로 아무리 원수가 많은 세상에서도 대 종교를 이룬 것이다. 생명의 종교라는 것은 율법과 도덕을 초월하여 사람을 능하게 만들어서 역사하게 하는 것이니 능하게 되는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본문을 통하여 알 수 있다.

 

  1. 충성되이 보시므로 (12)

  주님은 외모를 보지 않고, 중심을 보시는 것이니 사도 바울이 아무리 기독교를 박해하는 사람의 하나이었으나 주님이 보실 때에 충성된 사람인 것을 아시고 불렀던 것이다. 인생이라는 것은 완전한 사람이 없고 다 죄인이지만 주께서 보실 때에 충성되이 나가려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을 깨닫게 해주시고 깨끗하게 해 주시고 지혜롭게 하시되 모든 일을 능하게 하도록 주님은 역사를 나리어서 쓰시는 것이다.

  그러면 주님 보시기에 충성이라는 것은 조금도 외식이 없고 양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딤후1:3). 바울이 아무리 기독교를 반대하고 나왔지만, 바리새교인 중에도 외식하는 자가 아니요, 정결한 양심으로 하나님을 섬긴 사람이다. 누구든지 양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알지를 못하고 실수하고 넘어진다 하여도 주님은 그 사람을 찾아서 다시는 넘어지지 않도록 능하게 들어 쓰시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향할 때에 짐짓 알고도 자기의 욕망을 채우겠다는 것이 있는 자는 주님께서 절대로 응답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주님을 따라오며 주를 위해서 일해 보겠다는 자라도 중심에 정욕을 따르는 자라면 그 사람은 오히려 주님께서 버릴 것이로되 몰라서 진리를 반대한다 하여도 옳은 양심으로 충성을 다 하려는 마음이 있는 자라면 그 사람에게 주님은 나타나는 것이다.

 

  2. 긍휼함을 입은 자다 (13)

  긍휼이라는 것은 완전한 자에게 오는 것이 아니고, 넘어지고 쓰러지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니 인간이 충성을 다해 보다가 인간으로서 깨닫지를 못하고 쓰러지는 자라면 주님은 불쌍히 보고 그 사람을 깨닫게 해서 너그러이 용서하고 그 죄를 기억도 하지 않으시고 능하게 하셔서 다시는 그 일을 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주의 완전한 사랑이라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율법 자요, 바리새 교인이요, 유대교의 가장 지나친 열심을 가진 자였다(갈1:14). 우리는 주님 앞에 긍휼 함을 받는 것은 열심으로 힘을 다하여 나가던 자에게 있는 것이니 예를 든다면 누워서 잠자는 자보다도 넘어지더라도 열심 있게 나가는 자를 주님은 더 긍휼히 보시는 것이다. 바리새 교인을 보고 독사의 자식이라고 책망하던 주님은 바리새 교인 중에 하나인 바울이 기독교를 없애려는 폭행을 하며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서 주님은 공중에 나타나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하는 음성으로 그를 깨우쳐 주었던 것이다.

  오늘도 택한 종이 열심 있게 일해 나가다가 지나친 열심을 가지고 알지 못하는 도중에 실수가 있더라도 주님은 그를 버리지 않고, 찾아와서 붙들어 주며 깨우쳐 주는 일이 있으므로만이 앞으로 진리 안에서 하나가 되는 일이 있을 것이다. 아무리 사도 바울이 과거에 사도들과 대적이 되어서 성신이 충만한 스데반을 돌로 쳐죽이는 것이 마땅하다 생각하고 나갔지만 강권으로 사도 바울은 사도와 같이 하나가 되게 한 것을 보면 종말에 종들이 하나가 되는 것이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고, 주님께서 직접 택한 자를 긍휼히 보시고 깨우쳐 주므로만이 하나가 될 것이다.

  지금도 진실한 종들이 기독교 종말관을 모르고, 이 진리 운동을 핍박하는 자가 있지만, 그 종들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충성된 자라면 불쌍히 보고 깨닫게 하므로 하나가 되게 하실 것이다. 아름다운 소식이라는 이 월간지를 이 시대에 발행하게 하는 것은 충성된 종들을 하나가 되게 하는 역사라고 본다.

 

  3. 믿음과 사랑이 넘치게 하므로 (14)

  믿음과 사랑이라는 것은 인생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택한 자에게 주시는 선물이다. 누구든지 과거에 자기 부족을 절실히 깨닫고 충성을 다 하려는 자에게는 믿음도 사랑도 주시는 동시에 은혜가 넘치도록 풍성케 해서 그리스도만을 자랑할 수 있는 능력의 종이 되게 하신다. 우리가 넘치도록 받지 못하는 것은 마음에 충성된 마음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도 누구든지 충성된 사람이라면 바울에게 주던 몇 배를 더 넘치도록 부어 주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이 역사할 때보다도 더 악하고도 무서운 환란이 앞에 있으므로 충성된 종들에게 더 강한 역사를 부어 주시는 것이다(욜2:29). 기독교의 역사상 가장 넘치도록 주시는 때는 지금이라고 보게 된다. 아무리 북방 세력이 강하게 일어나지만 당신의 종들에게 이슬과 단비같이 역사를 나리어 수풀 속의 사자같이 강하게 쓸 때가 즉 이 때라고 보게 된다(미5:6~9).

  왜냐하면 주님은 원수 세력이 강할 때는 당신의 종을 더 능하게 해서 들어 쓰기 때문이다(사41:14~16, 25).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이 때는 능하게 쓸 때이니 자다가 마땅히 각성을 받고, 일어날 때다. 사60:1이하를 보라, 우리는 강하게 일어나면 무한한 축복이 올 것이다.

 

  결    론

  가장 기뻐하고도 만족한 생활은 능하게 된 종의 생활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죄인 중에 괴수가 되는 바울이 그 손으로 성경을 14권이나 썼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감히 상상조차 못할 일이다. 오늘에 가장 복된 자는 모든 선지들이 쓰러지며 압박 속에서 묵시를 보던 심판의 다림줄이 우리 동방에 나타나서 가장 무식하고도 못난 지렁이 같은 종의 입을 통하여 얼마든지 진리의 변론을 말하도록 해서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되는 일이다. 전부가 그리스도께서 나를 능하게 하는 일이라고 자랑할 수밖에 없다.

 

 

연습과 유익

- 딤전 4:6~16 -

 

  인생은 피조물이다. 피조물이라는 것은 완전하게 지음을 받은 것이 아니고, 완전에 도달할 수 있는 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생령의 사람으로 창조했지만, 죽은 영이 된 우리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둘째아담 예수님의 십자가의 부활로 우리 죽은 영을 생령이 되게 하고, 생령된 사람으로서가 전부가 아니요,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는데 따라서 나날이 발전할 수 있는 것이 생령의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제 하나님의 자녀로서 연습과 유익에 대해서 본문으로 알 수가 있다.

 

  1. 선한 교훈을 받는 일이다 (6)

  아무리 중생을 받은 자라도 잘못된 교훈을 받으면 오히려 손해를 보는 거요, 좋은 교훈을 받아서 양육을 받을 때에 옳은 진리 가운데서 날마다 마귀와 싸우는 생활이 있으므로 나날이 연습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연습이라는 것은 몸에도 필요하고, 영적으로도 필요 한데 가장 유익이라는 것은 영적 씨름이라고 본다(엡6:12).

  하나님께서 중생 받은 자를 언제나 악령과 싸우는 생활에서 날마다 일취월장하도록 연습적인 생활을 시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중생을 받았다 해도 아무런 연습이 없이 잠자는 상태에 있다면 그 생활은 아무런 유익이 없을 것이다.

 

  2. 수고하고 힘을 다 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 (7~10)

  버릴 것을 버리고, 취할 것을 취하기 위하여 수고하고 힘을 다하여야 할 것이다. 중생 받은 사람은 소망을 하나님께 둔 것이니 소망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소망에 필요 없는 말이나 교훈을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진리의 신이시니 진리라는 것은 우리에게 완전한 것을 주기 위한 하나님의 역사를 가르친 것이니 역사라는 것은 진리를 따라 있고, 진리를 따르는 역사는 목적을 진리에다 두고 수고하며 애써 힘을 다하는 자라야 진리대로 이루어지는 열매를 이룰 것이다. 아무리 하나님 말씀이 우리에게 있다 하여도 가만히 있는 자에게는 아무런 역사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말씀대로 역사하되 수고하고 힘을 다하는 자에게만 역사하는 것이다.

 

  3. 본이 되고자 하여야 한다 (11~15)

  하나님의 종이 되려면 언제나 실천적인 본이 없다면 아무런 열매 없는 나무같이 될 것이다. 진리라는 것은 인격을 이루는 것이니 진리를 가르치는 자가 인격을 상실한다면 생명 없는 허수아비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가르치는 일에 착념하라고 했고, 항상 조심해서 전심전력을 다하며 진보적인 사람이 되라고 눈물겨운 부탁으로 글을 쓰게 되었다.

  청년이라는 것은 진보적인 사람이 되어야 모든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종이 된다고 가르쳤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볼 때에 어떠하든지 모든 일을 바로 해보려고 애써 연습하는 자에게 바로 되도록 해 주는 것이 하나님의 신의 역사라는 것이다. 성령은 완전한 신이지만, 원치 않는 자에게 역사하는 신이 아니요, 간절히 원하는 자에게만 역사하는 것이니 연습과 유익은 사람의 할 일은 성신의 역사가 합하는 데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결    론

  하나님은 사람을 기계화시키는 것은 아니로되 연습하면 얼마든지 발전할 수 있는 것이 사람이다. 몸도 연습에 따라서 유익이 있는 것인데, 몸의 연습에는 성신의 역사가 필요 없고, 영적 진리의 경건을 위하여 연습하는데는 초인간적인 신의 역사가 같이 하므로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는 데까지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딤후3:17).

 

 

담대함을 얻은 자의 기도

- 요일 3:13~24 -

 

  하나님은 거짓이 없는 신이시요, 능력이 무한한 신이신지라 아무리 원수의 세력이 강하다 하여도 담대한 마음을 가지고 기도하는 자에게 역사하는 신이시다. 기도하는 것은 마귀와 싸우는 전쟁에서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이 해줄 줄 믿고 구하는 것이니 누구든지 원수를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심하지 말고 세상일에 끌리지 말고, 담대히 믿고 구하는 자라야 큰 열매가 있다는 것이다.

  이제 어떤 자라야 담대함을 얻을 수 있느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형제를 살리기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 (16~19)

  형제를 해치고자 하는 자는 비겁한 자요, 형제를 살리고자 하는 자는 담대한 자이다. 왜냐할 때에 형제를 해치려는 자는 그 마음이 은혜가 떠나고 극도로 고통이 있고, 불평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니 이것은 그 영이 활동을 못하는 증거다. 영이라는 것은 남을 살리고자 하는 일에만 활동하는 것이요, 해치고자 하는 마음이 있을 적에 이것은 육의 정욕을 따라오는 것이니 영에 따라 움직이는 자는 담대함을 얻어 기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육을 따라 움직이는 자는 기도의 힘을 잃고 극도로 약한 자리에 떨어지는 증거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형제를 살리기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는 마음이 불탈 때에 하늘로부터 오는 큰 힘을 얻게 되고 담대한 마음을 가지고 싸울 적에 구하는 대로 응답이 나리는 것이다.

 

  2. 양심에 가책이 없게 하는 자 (20~21)

  사람이라는 것은 양심이 있는 것이니 누구나 양심에 거리끼는 일을 할 때에 자동적으로 약해지고 겁이 나는 마음이 생기므로 그 사람은 하나님을 상대할 수 없고, 사람 앞에 보이려는 가면을 쓰게 된다. 이렇게 되므로 하나님과는 멀어지고 사람의 눈을 맞추어 일을 해 보려고 할 때에 그 사람은 기도할 수 없는 영이 되어 아무런 활동을 못하게 된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양심에 거리끼는 일을 회개하고, 사람에게 보이려는 것보다도 “하나님이여, 나를 아시나이다” 라는 양심에서 나가는 자라면 그 영은 하나님과 상대되는 심령으로 나날이 소성을 받아 담대함을 얻는 용사가 되어 하나님과 씨름하는 기도의 생활에서 야곱과 같이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가지는 승리의 용사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하나님의 사람에게 양심에 거리끼는 일을 할 때에 용서 없이 징계를 나리는 것은 구하는 대로 주기 위한 목적이니 언제나 양심적인 생활에서 하나님을 상대하는 생활이 있다면 기도의 큰 열매를 가져오는 사람이 될 것이다. 가장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갈 수 있는 인격을 찾지 않고, 사람 앞에 담대히 서려는 수단을 부린다는 것은 큰 과오를 범하는 근본이 된다.

 

  3. 주안에 거하는 생활이 있어야 한다 (22~24)

  인간이라는 것은 주님 품안을 벗어나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다. 왜냐하면 인간 자체는 타락의 본질이요, 사망의 법인 마귀를 벗어날 수 없는 죄의 생활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요15:6보면 사람이 내 안에 있지 않으면 열매 없는 나뭇가지같이 되어 불에 사름을 당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맡긴 사명에 충성을 다하고자 하는 자라야 주는 그 안에 있고, 그는 주안에 있어서 담대한 사람이 되는 동시에 주님 가신 길을 가는 실천이 있고, 주님께서 가르친 말씀을 그대로 믿는 자로서 이루어지는 기도 응답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인생의 최고 인격은 하나님 앞에 담대함을 얻는 것이니 이러한 자라면 무엇이나 구하는 대로 열매를 맺게 된다.

 

  결    론

  기독교는 담대함을 얻어 기도로 승리하는 것이 있으므로 흑암의 권세 아래서 죄인들을 해방시켜 천하의 교회를 확장시켰고, 종말에도 담대함을 얻은 자들이 기도로 승리할 때에 세계를 정복하는 새로운 시대를 이루게 된다. 누구든지 주안에 거하는 자라면 주의 임하시는 날에 담대함을 얻는 동시에 완전한 새 시대를 이루는 것이다(요일2:28).

  언제나 하나님은 원수의 세력을 강하게 하는 것은 담대함을 얻어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으로 승리하게 하기 위한 선한 방법이니 우리들은 이 시대에 담대함을 얻어서 기도로 승리하는 용사가 되어야만 여호와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다.

 

 

 

장년 공과편 - 재림의 주를 맞이할 인격

 

제1과  소금과 빛이 된 자

- 마 5:10~16,  요절:16 -

 

  서    론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그리스도의 왕국을 이루기 위한 목적인데 재림의 주를 맞이할 자의 인격을 먼저 입을 열어 가르치게 되었다(마7:22~23). 아무리 선지요, 이적과 권능이 있다 하여도 불법을 행하는 자는 그날에 설 수가 없다는 것을 결론으로 말씀한 것이 마 5장, 6장, 7장에 가르친 교훈이다. 언제나 사람도 무엇을 할 적에 나는 이러한 목적을 두고서 일한다는 것을 발표하고야 일을 개시하는 것이다. 그와 같이 주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첫 번 입을 열어 말씀할 때에 주님께서 가장 요구하는 사람은 이러한 사람이라는 것을 가르친 것이 산상보훈이라는 교훈이다.

  이제 소금과 빛이 되는 일에 대하여 성경을 공부한다.

 

  1대지 :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다 (10~12)

  언제나 소금이라는 것은 자기를 희생하여 큰 변동을 일으키는 것을 소금이라는 것이다. 소금의 변동이 없이는 이 사회는 다 부패를 가져올 것이다. 아무리 세상이 부패했지만 그 시대 시대의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던 참된 종들이 나타나서 참된 역할이 나타나므로 참된 진리가 세상에서 보존되어 내려온 것이다. 언제나 악자에게 진리의 사람이 훼방을 받고 핍박을 받은 것은 과거나 현재나 미래가 똑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핍박을 받는 종을 들어서 당신의 생명의 말씀을 바로 전하게 해서 그 시대의 부패를 책망하고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도록 역사한 것이니 우리는 소금과 같이 되려면 핍박을 무서워 말고 희생적인 정신으로 나가야만 주의 나라를 이룰 수가 있을 것이다. 만일 어떤 종이 핍박이 있다고 해서 주의 진리를 증거하지 못하고 만다면 소금같이 된 진리의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진리가 없이 세상은 아무런 생명도 없고 아무런 맛도 없는 세상이다. 그러므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고 나서는 종이라야 부패가 없고 참된 맛으로 이루어지는 아름다운 시대를 이룰 것이다.

 

  2대지 : 깊은 진리의 맛을 잃지 않아야 된다 (13)

  기독교는 이 세상 밖에서 오는 것을 맛보는 체험이 없다면 맛을 잃은 소금이 된다. 예배할 때나 기도할 때나 찬송을 할 때나 전도할 때나 하나님께로 오는 역사가 없다면 아무 필요 없는 일이 되고 만다. 세상에 제일 맹랑한 것은 성신의 역사가 없는 교회라고 본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소금이 맛을 잃으면 아무 쓸데없는 것으로 버림을 당해서 사람에게 밟힘을 당한다고 했다.

  기독교의 참된 진리 운동이라는 것은 조금도 형식이 필요가 없고 언제나 체험적인 산 종교가 되어야 된다. 나무가 아무리 커도 새로이 오는 진액이 없다면 그 나무는 말라서 필요가 없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교회에 종들이 하나님께로 오는 산 체험이 없는 종이라면 맛을 잃은 소금 같아서 아무런 역사가 없고 아무런 변동을 가져오는 열매가 있을 수 없다.

 

  3대지 : 어두움을 밝히는 등불이 되어야 한다 (14~16)

  마귀의 흑암을 뚫고 나가는 자가 아니면 도저히 재림의 주를 맞이할 수가 없을 것이다. 은혜시대 종들은 죽은 영을 살리기 위하여 마귀 흑암에서 그 영들을 구출시키기 위하여 흑암을 뚫고 이방 민족에게 매를 맞고 피 흘리기까지 그들을 위하여 길이 참고 복음을 전했던 것이다. 아무리 억울함을 당해도 일언반구의 불평 없이 “이 무리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요”라는 진리를 가지고 세계를 덮은 것이 이날까지 내려온 그리스도의 정병 되는 종들의 역사였다.

  그러므로 죽기까지 양떼를 사랑하여 피 흘리기까지 싸운 자가 재림의 주를 맞이할 것이요, 주님 재림할 때까지 남은 종도 환란의 흑암이 와도 흑암을 뚫고 나가면서 양떼를 위하여 눈물 흘려 말씀을 전한 자는 재림의 주를 맞이할 것이다. 재림의 주를 맞이할 자는 빛을 사람 앞에 비추어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는 자들이다.

  아무리 억울함을 당했고 죽음을 당했다 하더라도 그들의 죽음을 통하여 오늘 우리가 이 빛을 힘입어 구원을 받은 것을 생각할 때 어찌 할렐루야 영광을 돌리지 않을 수 있으랴!. 우리가 빚을 진 심정을 가지고 말씀으로써 남을 살려준다는 목적에서 싸우는 자에게는 재림의 주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결    론

  그리스도께서 사람을 택하여 세운 것은 세상이 너무나 악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람을 세워서 한 마리의 양이라도 찾겠다는 목적이니 우리는 듣든지 말든지 복음을 전해야 할 것이고 우리를 대접하든지 말든지 우리 할 일은 해야 될 것이니 소금과 빛도 자기를 위하여 있는 소금도 아니고 자기를 위하여 있는 빛도 아니다. 만일 소금이 소금끼리만 있다면 무슨 필요가 있으리요, 등불이 등불끼리만 있다면 무슨 필요가 있으리요, 이와 같이 소금은 썩는 물건을 찾아가야만 될 것이고 빛은 어두운 곳을 찾아가야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재림의 주를 맞이하려면 조금도 남을 무시하지 말고 자기의 위신을 생각지 말고 소금이 썩는 물건을 찾아가서 자기 자체를 희생할 때에 거기에 큰 변동을 가져올 것이고 빛이 어두운 곳을 찾아갈 때에 즉시로 변동을 가져올 것이다. 이와 같이 재림의 주를 맞이하려면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할 것이다.

 

 

제2과  마음에 죄가 없는 자

- 마 5:17~32,  요절:17 -

 

  서    론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려 온 것이 아니고 완전한 것을 이루려고 오신 것이다. 율법은 마음에 성결을 줄 수가 없고 선지의 예언도 완전한 것을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진 것이니 그리스도께서 역사한 것은 사람의 마음을 성결케 해서 죄의 근성을 없이하므로써 그리스도와 동등한 영광을 누리게 하자는 것이 주님이 오신 목적이다. 이제 마음에 죄가 없는 자라는 것은 어떠한 자라야 된다는 것을 분명히 가르쳤다.

 

  1대지 : 마음에 죄가 없이 남을 가르치는 자가 될 것 (19~20)

  바리새교인과 서기관들은 외형으로는 율법을 행하는 자 같으나 마음으로 죄를 짓고 다니는 동시에 교만한 자들이다. 그러므로 의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보다 못하면 안 된다고 했던 것이다. 마음에 죄가 없이 성결한 생활을 하면서 남을 가르친 자라야 천국에서 큰 자가 된다.

  참으로 진리를 가르치는 자가 되려면 진리는 거룩한 진리니 마음이 거룩한 자가 가르쳐야 하나님은 인정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일은 도덕이 아니요, 의식이 아니요, 영적 문제이니 하나님이 보실 때에 영적으로 하나님과 연합한 자가 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역사 아래서 가르친 자라야 천국에서 큰 자로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에 성령을 부어 주어서 마음에 충만함을 가지고 말씀을 증거하는 자가 되게 하시는 것이다.

 

  2대지 : 형제와 화목한 자 (21~26)

  하나님은 형제와 화목이 있는 자라야 그 제사를 받으시는 것이니 아무리 예물을 바친다 하여도 형제를 원망시키고 중심에 형제를 미워한다든지 무시하는 자라면 하나님은 그 사람의 기도를 받을 수 없는 것은 그 형제를 사랑하는 하나님이니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를 미워하고 멸시하는 자를 받아 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언제나 믿는 형제에게 화목을 위하여 조금도 형제의 마음을 낙심하게 한다는 것과 내 마음에 형제에 대하여 좋지 못한 마음이 있으면 이러한 자는 마귀의 참소에 걸리기 때문이다.

  하늘에서 정한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데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합심하여 하나가 되는 일이 없이는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가 없는 것이니 재림의 주를 맞이할 자는 조금도 형제 사이에 잘못된 것이 없이 하나를 이루어야 될 것이다.

 

  3대지 : 남녀간의 중심 성결이 있어야 한다 (27~32)

  남녀라는 것은 성결이 없다면 마귀의 도구가 될 것이니 음욕이란 자체는 사단의 마음이니 하나님의 신이 있는 자라면 음욕이 있을 수 없고 성결하게 남녀의 합심 단결이 있어야 된다. 남녀라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하여 하나를 이루게 한 것이니 남자가 여자를 통하여 사명의 도움을 받고 여자는 남자의 받는 영광을 성결한 가운데 같이 이루기 위하여 창조를 받은 것이니 지체가 같은 한 몸의 관계를 사명적으로 갖고 있다.

  그러므로 남녀 관계가 거룩치 못하면 수족 같은 인연이 있는 자라도 끊어 버리는 회개가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남녀가 성결치 못한 경우에는 오히려 끊어 버리고 나가는 것이 아니라면 죄의 도구가 되는 생활이 될 것이니 남녀의 관계는 행동에서도 성결해야 되겠지만 중심까지 성결을 지키는 생활이 있어야만 될 것이니 이것은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완전역사로 말미암아 남녀의 성결한 생활이 있어야 재림의 주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만일 남녀관계에 중심성결이 없는 자라면 재림의 주를 맞이할 인격을 이루지 못한 자라고 볼 수 있다.

 

  결    론

  재림의 주를 맞이할 인격이라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이룰 수 없고 그리스도의 완전역사로 이루어질 것이니 주님께서 이 말씀을 가르친 것은 주님의 역사의 목적이 사람으로서 완전한 인격을 이루어서 재림의 주를 맞이할 수 있도록 하실 것을 목적하고 가르친 교훈이다.

  언제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역사하는 것이 없다면 이것은 진리적인 역사가 아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오셔서 역사하는 것은 성결한 사람을 만들기 위한 목적인 것을 확신하고 이 목적을 위하여 기도에 전력을 두고 나갈 때에 주님의 역사로서 완전 성결을 소유할 수 있다.

 

 

제3과  참 사랑이 있는 자

- 마 5:38~48,  요절:44 -

 

  서    론

  참 사랑이라는 것은 하나님께만 있는 것이니 성자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하나님의 참사랑의 법을 행하기 위하여 오신 것이다. 사랑의 법이란 것은 조물주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생을 구원코자 하는 것 외에는 참사랑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가르칠 때에 율법을 초월한 참사랑의 법을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1대지 : 악자를 불쌍히 여기는 사랑 (38~42)

  사람의 근본이 하나님 형상인데 악마에게 사로잡혀서 도구가 되어 공연히 선한 자를 대적하는 것은 자기의 양심이 아니요, 그 사람도 자기 마음대로 못하고 마귀에게 사로잡혀서 그와 같이 된다는 것을 생각할 때에 공연히 나를 때리는 일이 있다 해도 그 생명을 불쌍히 보고 구원코자 하는 마음을 가져야 된다는 것이다. 또는 다른 사람을 억지로 돕지 말고 필요한 일이라면 절대로 단 마음으로 남을 돕는 자가 되어야 참사랑을 가진 자라고 보게 된다. 남이 나를 악하게 대하면 나도 같이 그렇게 한다는 것은 참사랑의 종이 아니요, 다른 사람이 도움을 구할 때에 억지로 마지못해 돕는다는 것도 참 사랑이 아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할 때에 하나님을 순종치 않아도 나를 불쌍히 보고 깨닫게 해주신 것을 생각하고 그 사랑 속에서 언제나 남을 너그러이 대해 줄 때에 하나님은 강하게 역사하는 것이다. 십자가의 정신은 사람이 구하므로써 하나님이 응답하는 것이 아니고, 알지 못하고 인간이 예수를 대적해도 하나님은 불쌍히 보고 인간을 향하여 아들을 대신 죽게 한 것이 십자가의 사랑이니 누구든지 그 사랑의 정신을 가진 자라면 무엇이나 마음에 불평을 두고 남을 대할 수 없고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 안에서 남을 대하게 될 것이다.

 

  2대지 : 참된 사랑의 기도 (43~44)

  사랑이라는 것은 나 자체가 완전히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알지 못하고 반대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 외에는 참사랑이 될 수 없다. 아무리 남에게 모든 것을 다 주었다 하여도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는 마음이 없다면 이것은 참사랑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보실 때에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는 사랑 외에는 하나님은 인정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자기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을 받은 것이 영원한 속죄제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의롭게 보는 자는 핍박을 받을 때에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는 자를 의로운 사람이라고 하나님은 인정한다. 기독교의 참된 사랑이라는 정신과 사상은 이것이 근본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상에서 죄인을 위해 죽으면서 알지 못하고 반대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시고 지금도 기도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의 법을 행하시는 예수님의 역사이다.

 

  3대지 : 온전함을 이루는 것이다 (45~48)

  온전이라는 것은 하나님께만 있는 것이니 하나님께서 인생이 아무리 타락했지만 타락한 인생을 온전케 할 수가 없는 하나님이라면 우리 인생 자체에는 아무런 열매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악한 자나 선한 자나 의로운 자나 불의한 자를 똑같이 햇빛도 주시고 비도 주시는 것은 악한 자를 그냥 두고 복을 주는 것보다도 악한 자라도 온전하게 되는 것을 기다리는 하나님께서 주님 다시 올 때까지 기다릴 것이니 누구든지 그 사랑을 따라서 행하는 자라면 그 자신이 온전함을 이룰 수가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 사랑에서 역사하기 때문이다. 역사라는 것은 완전한 사람을 완전케 하는 것이 아니고 완전치 못한 인간을 완전케 하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이 사랑을 본받아서 그 사랑의 법을 순종하는 자라면 그 사랑의 역사를 통하여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있다.

 

  결    론

  참사랑은 하나님께만 있고 하나님을 순종하는 자에게 있는 동시에 그 사랑을 통해서 완전한 나라가 이루어 질 것이니 그 사랑의 법을 따라가는 자라면, 아버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이 있으므로 하나님은 그 사람을 신과 같이 알고 완전하게 들어 쓰는 것을 목적 두고 가르친 말씀이니 누구든지 이것을 무겁게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를 통하여야만이 내게도 이루어질 것을 믿고 나가야 할 것이다.

 

 

제4과  상 받을 일을 하는 자

- 마 6:1~21,  요절:20 -

 

  서    론

  하나님은 공의와 사랑이 계신 동시에 무엇이나 갚아 주는 신이시다. 벌을 주시는 것도 상을 주시는 것도 일 점도 가감 없이 갚아 주시되 갑절이나 주시는 것이니 사람이 세상에 나서 상 받을 일을 많이 하는 것이 가장 복 있는 자인데 재림의 주를 영접하려면 상 받을 일을 많이 한 자라야 맞이하게 된다. 아무리 그 영이 구원을 받았다 하여도 상급으로 갚아 줄 것이 없는 자라면 재림의 주를 영접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종된 자에게 어떠한 자라야 갚아 준다는 진리를 가르친 것이 이 본문이다.

 

  1대지 : 주의할 일 (1~5)

  아무리 구제를 하고 기도를 많이 한다 해도 사람에게 보이려는 것이 있다면 그 구제와 기도는 아무런 열매가 없다는 것이다. 언제나 물질로 하는 일이나 영적으로 하는 일에 하나님께서 갚아 줄 것을 믿는 마음에서 은밀한 가운데 보시는 하나님께 양심적인 행동이 되어야 할 것이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생각을 살피는 자이시니 나는 조금도 하나님께서 원치 않는 것은 마음조차 가질 수 없다는 양심활동이 있다면 이 사람은 언제나 심령 소성을 받고 모든 일은 다 상급이 될 것이로되 이것이 없다면 모든 일이 다 허사가 되고 마는 것이다. 허사라는 것은 아버지께서 인정치 않는 일은 다 허사가 된다는 것이다.

  세상의 물질이나 모든 일이 사람이 하는데 따라서 허사가 되고 안 되는 것이 좌우되는 것이니 사람이 이 땅 생활에서 조금도 헛된 일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 중심에서 하나님의 갚아 줄 것을 믿는 불타는 신앙이 있는 것이 아니고는 교회의 모든 일은 다 허사가 되고 말 것이다.

 

  2대지 : 하나님이 받으시는 기도 (6~13)

  기도라는 것은 의식이나 말에 있는 것이 아니고, 마음과 양심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양심에서 하나님이 받으시는 마음이 될 때에 그 시간에서부터 생각도 기도가 되고, 생활도 기도가 되고, 한 마디 마디의 말이 다 기도의 향이 되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방송을 들으려면 어디나 똑같은 장치가 되어 있듯이 하나님께로부터 교통을 하려면 누구든지 양심 속에 똑같은 장치가 있어야 될 것이다.

  1) 하나님이 먼저 아시는 것을 믿고 구할 것(6~8).

  기도할 때에 내가 구하므로 하나님이 아신다는 마음을 가지지 말고 하나님이 먼저 아시는 일인데 내가 구하는 대로 주고자 하시는 하나님인 것을 믿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기도해야 된다.

  2) 주기도문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한다는 생각이 마음에 간절해야 된다(9).

  세상을 분토 같이 보고 하늘나라의 것이 와야만 된다고 사모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하늘에서 이루어지고 난 뒤에 땅위에 이루어진다고 믿을 때에 위의 것을 더 생각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10).

  날마다 먹고사는 것은 내 힘에 있지 않고 하나님이 주시는 데서만이 생활한다는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조금도 정욕적으로 흐르지 않아야 된다(11).

  항상 남의 죄를 용서하는 마음으로 나의 부족을 깨닫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12).

  매일같이 마귀와 싸우는 생활에서 시험을 무서워 말고 하나님께서 건져 주실 것을 믿고 의지하는 마음이 강한 동시에 모든 전부는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믿고 용기있게 싸워야 될 것이다(13).

  이와 같이 하는 기도는 언제나 열매가 되는 것이다.

 

  3대지 : 물심양면으로 받드는 자 (16~21)

  언제나 참된 봉사를 하는 자는 어려운 일을 놓고 남을 살리기 위하여 금식을 할 때에 하나님만 알게 금식하는 기도는 하나님이 산 제사로 받으시는 것이요, 물질로써 주의 일을 받들 때에 전부가 하늘의 보화가 되는 것이니 심은 대로 거두는 상급이 있다. 사람이라는 것은 물질을 바치거나 몸을 바치거나 다 희생의 제사가 되는 것이니 희생이라는 것은 자기의 힘과 물질을 소비하는 것을 희생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희생이 없는 자에게 아무 것도 줄 수가 없다는 것이니 금식은 자기의 피를 바치는 희생이요, 물질은 하늘의 보화를 쌓아 두는 희생이다. 자기가 쓰지 않고 바친다는 것도 하나님은 희생으로 보는 것이니 몸을 바치든지 물질을 바치든지 다 갚아 주시는 것이다. 상급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이루기 위하여 희생한 대로 갚아 주는 것인데 물질을 바쳐서 이루어지는 일로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게 된다면 얼마나 이것이 큰 열매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세상 사람이 물질을 죄 되게 쓰므로 금전은 일만 악이 되는 근본이 되기도 하고 물질을 쌓아 두는 봉사가 있으므로 만민을 살리는 열매가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물질 자체가 죄가 되는 것이 아니고 물질을 잘못 쓰면 죄가 되는 것이다.

 

  결    론

  가장 복된 자는 상 받을 일을 많이 한 자이니 사도 바울은 이 진리를 알 때에 세상 영광을 분토같이 보고 왕권의 상급 하나만을 목적하고 매일같이 달음박질했던 것이다(빌3:13~15). 모든 종들은 다 이것을 위하여 싸우는 생활에서 완전함을 이루는 것이다. 그러므로 재림의 주를 맞이할 자는 상 받을 일을 위하여 죽기까지 충성을 다한 자이다.

 

 

 

논 설 편  

 

1. 인심 악화와 가정 문제

 

  사회와 가정은 떠날 수 없는 일이다. 사회가 없이 가정이 없고 가정이 없이 사회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지금 사회가 도덕 부패 인심 악화를 따라서 가정에 큰 영향을 주는 때를 만났다고 본다. 그러면 사회가 도덕이 부패하고 인심이 악화되었다고 해서 가정이 거기에 물이 들고 지배를 받게 된다면 그 가정은 성도의 가정이라고 할 수가 없고 성도가 사회가 이렇게 되었다고 사회를 떠난다는 것도 있을 수가 없고 가정을 돌아보지 않고 개인 신앙을 지킨다는 것도 성도의 일이 아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야 가정에 대한 문제가 이 사회 부패와의 관계를 바로 해 나갈 것이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가정이 이 시대를 잠깐의 시련기가 왔다는 것을 알고 이 시국을 어떻게 하든지 돌파하고 나가려면 좀더 가정에서부터 정신을 차리고 모든 일에 합심해서 무슨 일이든지 사단의 세력이 침투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각성이 있되 위치를 택하여야 될 것이다. 땅에 사는 성도의 가정 생활에서 위치를 잘못 택하면 앞으로 크게 문제되는 점은 하나님의 재앙을 피할 길을 찾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선지는 성도의 안정처를 말했던 것이다.

  우리의 위치라는 것은 롯과 같이 소돔 고모라의 물질이 풍성하다고 찾아가는 그런 생활을 하지 말고 아브라함 같이 여호와께서 기뻐하는 것을 따라서 위치를 택해야 한다. 우리는 이 땅에 위치를 정할 때에 불탈 물질을 따라가는 것도 실패요 또는 임시적인 편리를 따라간다는 것도 잘못이요 잠깐의 어떤 쾌락이 있다고 그 쾌락을 따른다는 것도 잘못이다.

  우리는 위치를 택할 때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위치냐 아니냐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고, 또는 그곳에 있으므로 내 가정의 신앙 상태가 어떻게 될 것이냐는 것도 생각하고 과연 그곳에 모든 사람들이 복을 받을 사람들이냐 하는 것도 알아볼 필요가 있다.

  앞으로 우리의 살길은 개인적인 영혼 문제로 끝을 맺는 것이 아니고 단체적으로 보호를 받고 단체적으로 싸워 나가는 것이 없다면 도저히 난국을 돌파할 수 없는 시기가 올 것이니 언제나 알곡은 알곡끼리 모이듯이 하나님은 역사할 것이니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서 나가는 것을 목적하고 현실을 보지 말고 미래의 것을 깊이 생각하는 점이 있어야 될 것이다.

 

  2. 예언의 말씀을 온 가정이 다 따라서 움직이되 우리의 갈 길은 어떻게 하여야 새 시대를 볼 수 있느냐 하는 것을 온 가정이 마음에 두고 아무리 세상의 여러 가지 복잡한 일이 와도 거기서 압력을 받지 않고 더 정신을 차려 분명히 새 시대가 가까운 때라는 것을 알고 더 힘을 얻는 가정이 되기 전에는 시대가 변천되는 세속주의에 끌리게 될 것이다.

  왜냐할 때에 날마다 사는 생활이 이 세상에 과학적인 문명을 무시할 수 없고 또는 그 문명을 따라서 나날이 변천되는 인심의 변동을 상대하지 않을 수 없는 이때에 객관적인 하나님 편에서 오는 새로운 힘을 받는 것이 없이 한 주관적인 자아를 중심하여 인본주의적인 사상에서 움직이게 된다는 것은 자연적으로 세상의 세속주의 문명을 벗어날 수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시대적인 조류를 인간의 몸으로서는 거스려 나가기가 어렵지만 이 시대가 변천되는 징조를 성서에 의하여 심판기의 징조로 알고 진노의 날에 설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각성이 있다면 어려운 풍조가 부딪칠수록 더 힘을 말씀에서 가지고 나가는 동시에 하나님께로부터 초자연적인 역사가 오게 될 것이다.

 

  3. 모든 일이 잠깐이라는 생각에서 새로운 시대를 내다보고 잠깐인 고난도 영화도 다 이것으로 우리의 사명이 아니요 우리의 사명은 이것을 초월해서 새 시대를 목적한 것이니 잠깐인 고난을 참아야 되는 동시에 잠깐의 바벨론의 영화를 따라갈 필요도 없다는 것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축복은 오직 남은 가정이 되는 것만이 축복 인줄 알고 가정의 모든 일을 믿음으로 움직일 때에 하나님의 신비가 같이 하므로 모든 일이 초인간적인 것으로 이루어지는 일을 체험케 될 것이다.

  인간이 볼 때에 실패같이 보이나 실지는 실패가 아닌 것이 나타나고 인간이 볼 때 확신 있는 것 같으나 가고 보면 허사가 되는 것을 체험할 때 지금 이때에 성도의 가정은 모든 일을 영적이나 육적이나 그 생활을 하나님이 친히 간섭하신다는 것을 더욱 알게 될 것이다.

  인간이 자기 계획과 방법을 취한다는 것은 변화성도에게는 있을 수가 없다. 왜냐할 때에 모든 일이 하나님의 보호 없이는 생계를 보존할 수 없는 재앙이 오는 때이니 만큼 모든 일을 인간의 힘을 초월한 하나님의 간섭이 같이 한다는 것을 믿어야 될 것이다.

 

  4. 일상생활을 하나님의 축복 속에서 이루어질 것을 믿고 악한 자들의 피해를 두려워하지도 말고 또는 그런 자에게 도움을 얻어 보려고 타협하지도 말고 조금도 불의와 동참치 않는 성별된 생활에서 나가야만 될 것이다.

  만일 인간의 방법으로 재앙 받을 악인들에게 무엇을 의탁하고 나간다는 것은 불의와 동참하는 일이 될 것이니 어떻게 하든지 악자와의 관계를 가지지 않도록끔 방법을 취해서 악한 자의 주권이 내게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을 취해 나가야 될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까지도 성별된 교회가 있어야 될 것이고, 사업도 성별된 사업이 있어야 될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하나님을 상대하는 예배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 성별이 있어야 하고, 사업에는 신비적인 새로운 축복을 받기 위해서 사업에 성별이 있어야 될 것이다.

 

 

2. 불가피한 환란에 대하여

 

  이날까지의 인류 역사는 때를 따라 어지러운 환란이 없은 것은 아니로되 우리 앞에 오는 환란이라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 되는 동시에 이 환란을 어떻게 극복할 것이냐에 대하여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날까지의 모든 문제는 한 사람이 정권을 쥐고 권력을 내세우려고 할 때에 그 사람이 거꾸러지면 그 환란은 끝을 맺고 만 것이다.

  그러나 이제 오는 환란은 한 사람이 주권을 쥐고 침략적으로 들어오는 환란이 아니고 세계 인류가 사상적 대립인 동시에 무력적으로도 도저히 인력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난제가 봉착했으니 여기에는 피차에 승부를 해결하기 어려운 난제가 태산같이 가로 막혀 있다. 세밀히 말하자면 사상적인 대립은 사람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고 무력적인 대립은 세계 인류의 생명이나 만물까지라도 다 살라져 버리고 마는 위협을 주고 있는 현실에서 환란이 오지 않게 한다는 것도 한 공상에 불과한 일이고 또 어떤 정권이나 사상이 자기가 통일한다고 꿈꾸는 것도 한 공상에 불과하다.

  그러면 인생이라는 것은 동물보다도 특이한 점은 여러 가지 생각하는 두뇌를 가졌고 그 밖에 장래일을 알 수 있는 영계를 가진 것이니 앞으로 오는 환란에 대하여 두뇌로만 생각한다면 협상이라는 것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오늘에 와서 정치가도 협상할 생각을 하고 싸움을 싸우는 용사들도 협상할 생각이고 오늘의 종교인까지도 다 협상할 생각이다. 협상 시대를 이루는 시대는 우연한 일이 아니고 사람의 정신 작용 안에서 생각한 필연적인 결과라고 본다.

  이제 영계적으로 깊이 생각한다면 환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볼 수 있다.

 

  1. 영은 하나님을 상대하여 활동한다. 그러므로 하나님 편에 대한 일을 영적으로 알게 될 때에 하나님은 진노할 수밖에 없는 때임을 알 수 있게 된다.

  과거 구약 말기에 북방에서는 배도적 세력인 앗수르와 바벨론이 일어나고 예루살렘 거리에는 거짓 선지만이 왕래하고 소위 다윗 왕국이라는 국내에는 위정자가 가득하고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사회는 극도로 악화된 사회가 되었고 하나님을 공경한다는 가정들이 가정에서부터 불의한 재물과 자녀의 악화와 경제적인 혼란이 올 때에 하나님은 크게 진노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루살렘도 망하고 그 민족도 망하고 정객, 정치가, 종교가가 다 망하고 나중에는 앗수르와 바벨론이 망할 때에 하나님은 동방의 고레스를 들어서 강권 역사하여 예루살렘을 복구했던 것이다.

  오늘의 20세기 말기에 중공, 소련의 북방 정책도 하나님이 진노할 일이요, 자본주의 정치 부패도 또는 기독교의 부패도 인심 악화도, 또는 빈부의 차이가 심해서 부자는 극도로 호화롭고 가난한 자는 도저히 살 수가 없는 때가 오는 것도 성서를 볼 때에 지금이 영적 방면으로 보아서 하나님의 진노의 날이 왔다는 것을 맑은 영감을 가진 자는 다 알게 된다.

 

  2. 성경은 완전한 지식으로 볼 때에 과거나 현재나 미래가 너무나 똑똑한 사실인데 성경을 아는 지식으로 미래를 내다 볼 때 우리에게 완전한 소망을 주는 길이 있다. 사람이 앞일을 아는 것이 아니고 앞일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지금으로부터 2천 6, 7백년 전 선지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묵시로 말씀한 일을 지식으로 분명히 알 수 있다.

  성경은 완전한 지식이다. 세상의 과학은 사람의 두뇌 속에서 물체를 사용하는 지식이 현 과학 문명을 좌우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의 지식은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어떻게 행하시겠다는 것을 분명히 아는 지식인데 그것을 바로 안다면 조물주 하나님의 지식이다. 다시 말하면 과학은 인간의 지식이요, 성경은 하나님의 지식이다.

  이 지식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예지와 예정 안에서 앞으로 어떻게 행하시겠다는 일이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한 것이니 하나님은 이 말씀대로 행하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경륜이다. 보통 세상 사람은 천시라, 천명이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뭐냐할 때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모든 자연계까지도 움직인다는 것이다.

  사람이라는 것은 아무리 애써 보았던들 지나고 보면 하나님께서 말씀대로 움직이는 역사에서 나기도 하고 세상에서 움직이는 것인데 그것이 전부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는 활동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아무리 오늘의 무신론자가 하나님이 없다고 야단을 치나 성경을 보면 이러한 일이 말세에 가서 그 세력이 북방에서 자리잡고 한 때에 전 세계를 악화시키는 사회가 되도록 할 것을 가르쳤다.

  오늘의 아무리 인본주의적인 신학자가 새로운 논설을 쓰고 있지만 그것도 성경에 미리 나온다는 것을 말한 대로 이루어지는 것 뿐이고 과학 문명으로 달나라에 가고 모든 교통이 번개같이 빨라도 이것도 모든 선지가 말한 대로 이루어진 것 뿐이요, 아무리 인간 기술이 화려한 사회를 만든다고 야단쳐도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과정인 것을 분명히 알게 된다.

  이제 전쟁이 난다면 세계 인류가 불에 사름을 당하고 무서운 일이 닥쳐오지만 이것도 성경이 이루어지는 사실인데 이러한 일이 있고서 세상에는 새로운 시대가 올 것을 말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앞일을 어떻게 할 것이냐 할 때에 이미 성경대로 이루어진 사실이 그리스도 탄생에서부터 금일까지의 이루어진 일이 역사적으로 너무나 똑똑한 사실이니 이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될 것도 똑똑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은 환란이 불가피하게 온다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이요 환란 가운데서 어떻게 되므로 살길이 있다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이니 환란이 무서워 그럴 필요도 없고 또는 환란이 오지 않는다고 방심하는 것도 위험한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 지혜로운 생활이라는 것은 이 때에 필요한 것이니 이 지혜라는 것은 인간 과학을 초월한 데서 미래를 바로 아는 생활이 될 때에 그 사람의 생각하는 것이나 움직이는 것이 공상에 머무를 것이 아니고 완전한 열매를 이루는 사상, 정신이 움직이는 생활이 될 것이다.

 

  3. 투쟁하는 일이다.

  투쟁이라는 것은 동물같이 먹기 위해서 싸우는 투쟁도 있고 옳은 진리를 바로 아는 사람으로서 그 진리대로 따라 살기 위해서 싸우는 투쟁도 있으니 오늘의 공산당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공산주의 학설대로 될 것을 확신하고 그들은 투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유 진영의 자본주의라는 것은 어떤 획선을 가진 것이 없이 한 자본을 옹호한다는 것은 투쟁력이 흙과 같이 무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히 아는 지식에서 진리로써 반공 투쟁을 할 때에 공산당의 사상을 무너뜨릴 수 있는 진리 투쟁이 될 것이다. 아무리 공산 사상을 가진 자라도 인류 종말에 완전한 지식이 되는 계시록과 선지서를 안다면 자동적으로 그 사상은 불 앞의 초가 녹아지듯이 없어지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분명히 알지 못했던 사람이 바로 알게 될 때에 자동적으로 잘못 알았던 것은 포기하듯이 오늘의 공산당이 선전하고 있는 그것은 한 공상에 불과한 것이니 이러한 것은 진리 안에서 알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므로 공산 사상은 자연적으로 밟힘을 당하는 동시에 결국은 옳은 진리로 투쟁하는 용사들 앞에 자동적으로 없어지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이 투쟁이라는 것은 사상과 정신이 그 진리 안에서 움직이는 것으로만이 근본이 되는 것이다.

  이제 불가피에 오는 환란을 앞에 놓은 이때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세상에서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사상을 가지고 투쟁할 때에 필연코 승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 없이 믿고 움직이는 사상에 있을 것이다.

 

 

3. 거짓 많은 세상에 양심 바른 사람

 

  거짓의 근본은 마귀요 양심의 근본은 하나님께로 온 것이다. 하나님께서 거짓된 마귀와 양심의 사람과 대립을 시킨 것이니 거짓이 있으므로 양심의 사람을 인정하고 양심의 사람이 있으므로 거짓된 세력을 없애고 양심의 사람만이 사는 시대를 새 시대라 하는 것이다. 이제 어찌하여 세상에는 거짓이 많게 되었느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1. 거짓이 세력을 잡게 됨

 이것은 거짓된 마귀의 말을 참되신 하나님 말씀보다도 더 따라가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에덴 동산에 아담 하와가 간교한 뱀의 말을 하나님 말씀보다도 더 믿었다는 것이 인생 타락의 시발점이니 타락한 사람이라는 것은 누구나 마귀의 말을 더 믿게 되는 것은 하나님은 공의를 말하고 마귀는 거짓으로써 사람의 마음을 미혹하는 말을 하므로 어리석은 인간들은 그때 그때에 자기에게 만족을 주는 것을 따르기 때문이다.

  사람이라는 것은 내일 일을 모르는 것이 인간이니 하나님은 사람에게 장래를 행복된 길로 인도하기 위하여 말씀한 것이요 마귀는 흑암을 넣어 주어서 그때에 그날 그날 되어지는 일만을 생각하는 마음을 가지게 하는 감화를 주고 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인간들은 참되신 하나님의 장차 될 일을 말한 것을 믿지 않는 것은 인간들의 마음이 어두워진 까닭이다.

  2. 거짓된 마귀가 기회 있는 자에게 역사하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죄를 지을 때에 참되신 하나님의 신이 떠나고 거짓된 마귀가 지배하는 영이 된다. 그러므로 죄의 근본은 정욕이요 정욕의 근본은 마귀가 되는 것이니 인간들이 정욕이란 들보가 마음에 있을 적에 자동적으로 거짓말을 해서 자기들의 유익을 보려는 것이 자동적인 행동이 되는 것이다.

  흑암이라는 것은 거짓이요 거짓이라는 것은 마귀의 것이니 누구든지 죄가 있는 자는 자동적으로 거짓된 마귀 감화를 받게 되는 것은 피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거짓을 행하는 자는 양심을 떠난 마귀의 도구가 되는 것이다. 이 세상의 사람들이 거짓을 오히려 자기 도구로 쓰는 것은 그 자체가 마귀의 도구가 된 인격이니 거짓이란 자체는 인간을 망치는 악의 근본이다.

  3. 거짓으로 교제하는 세상

 사람은 양심적인 교제를 하는 것보다도 일시 그 사람의 마음을 얻기 위한 교제는 자기의 욕망을 채우려는 교제이니 이것으로 말미암아 세상은 믿을 수가 없는 세상이 되는 것이다. 저 사람이 나를 좋게 대한다 해도 이것이 오히려 나를 해치기 위한 일이 되는 것을 미혹이 많은 세상이라는 것이다.

  참된 교제라는 것은 조금도 자기의 이문을 위한 것보다도 남을 살려 보겠다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교제가 아니고는 다 거짓을 가져오는 일이 있게 된다. 도덕적으로 사람이 볼 때에는 옳은 것 같으나 참되신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을 볼 때에 바리새 교인들이 아무리 남을 구제한다 하여도 주님은 독사의 자식이라고 책망했던 것이다.

  거짓 선지가 아무리 여러 가지 방법으로 사람의 마음을 끌어서 자기의 앞으로 사람을 모은다해도 이것은 참된 교제가 아니요 자기의 목적을 달성할 야심에서 남을 이용하는 교제가 된다. 사람이 무조건 자기를 좋게 한다고 해서 마음을 두는 일도 속는 일이요 자기를 일시 괴롭힌다고 해서 원망한다는 것도 어리석은 행동이 될 것이다.

  이제 참된 양심의 사람에 대하여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양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사람의 양심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양심도 있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으면서도 사람을 대하는 양심도 있고 또는 사람을 대하는데 있어서 그 사람에게 무엇을 얻어보려는 데서 신용을 보이는 양심도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양심 외에는 온전한 것을 소유할 수 없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양심에는 조금도 자기라는 것이 없이 하나님을 중심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말씀을 믿는 양심에서 아무리 인간이 나를 존경하고 이롭게 한다해도 진리에 합당하지 않다면 그것을 끊어 버리는 것이 신앙 양심이다. 이 양심으로만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이러한 자를 찾으신다. 이러한 자에게 초자연적인 신의 세계를 체험하는데서 하나님을 바로 알게 된다.

  또는 양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야 앞으로 될 미래의 비밀을 분명히 알게 된다. 하나님은 언제나 양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나타나서 묵시로써 앞으로 될 일을 모두 기록하도록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보아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양심이 있는 자라야 성경을 바로 깨닫게 되는 것이다. 바리새 교인들이 아무리 성경을 많이 읽었지만 양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기 때문에 성경을 바로 알지 못하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역사를 반대하는 대적이 되었던 것이다.

  2) 양심으로 남을 사랑하는 자

  하나님은 언제나 양심으로 남을 사랑하는 자에게 일할 수 있는 것으로 주시는 것이다. 아무리 양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한다 하여도 사명맡은 불타는 양심에서 남을 살려 보려는 행동이 없다면 큰 역사가 일어나지를 않는다.

  양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되 보수적도 있고 진보적도 있는 것이다. 보수적이라는 것은 과거의 것을 지키자는 것이라면 진보적이라는 것은 그때 그때에 아무런 난관이 부딪혀도 그 시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는 새로운 역사를 일으켜야 된다는 것을 목적하고 싸우는 사명자의 양심이다. 아무리 바리새인들이 보수를 지켰지만 남을 살린다는 양심의 불이 없는 자이다. 에베소 교회가 보수적인 사상을 가졌지만 사랑의 불이 꺼졌던 것이다.

  우리는 남을 살린다는 양심에서 불이 붙는 것이 있어야 새로운 열매가 나타나는 사람이 될 것이다. 지금 아무리 거짓된 세상에서라도 이 시대를 바로 알고 환란과 재앙 속에서 남을 살려 보려는 불타는 마음을 가지고 나서는 자라야 권리 행사의 새로운 역사를 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정한 일이 있다 하여도 불타는 사랑, 양심적인 사람이 아니고는 아무런 역사를 할 수가 없으므로 언제나 악한 사회에도 사랑의 불이 붙는 자를 들어서 그 시대 사람을 깨우치고 새로운 변천을 가져왔던 것이다. 아무리 붉은 용의 앞잡이 거짓선지의 미혹이 세계를 덮는다 하여도 참된 사랑의 양심에서 순교자의 뒤를 따르는 자를 통하여 촛대교회가 이루어지는 동시에 새로운 시대를 이루는 한 새로운 단체를 이루게 될 것이다.

 

 

4. 숨은 종의 기도

 

  할렐루야 영광 돌리려는 날은 필연코 가까운 줄 믿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시련이 길 때에 인간은 아브라함 같이 실수할 수밖에 없는 인간입니다. 아브라함이 사라의 몸에 잉태될 소망이 없게 될 때 하갈의 몸에 동침을 하니 기독교의 원수가 되는 이스마엘이 나온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나의 믿음 이날까지 참고 왔사오나 저 산 넘을 용기조차 잃어버린 맥 떨어진 지렁이가 되었나이다. 무소불능하신 하나님 바라보는 마음 하나 가졌사오나 어느 날 그 능력으로 날 끌어 세우시겠나이까. 숨은 기도 통하여서 잠잠히 내리는 은총 속에 내 신앙 자라고 있으나 어느 날에 완전한 열매를 맺사오리까.

  주님만 알게 숨은 봉사 해온 일도 있지만 너무나 부패된 종들을 볼 때에 상처를 받았나이다. 이 상처는 주님만이 아물게 할 줄을 믿나이다.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이 되는 마음도 없지는 않지만 사람은 약하므로 홀로는 일할 수 없나이다.

  주여! 누구를 만나게 해주시겠나이까. 저 산을 같이 넘을 수 있는 동지를 만나게 해 주옵소서. 살아서 주님 맞이할 시대 징조 확실하오나 나는 준비가 못되었사오니 어찌 하오리까. 완전 준비 나 어찌 스스로 가질 수 있으리요. 주님께서 강권으로 주시기 전에 주 앞에 설 자는 하나도 없으리라고 깨닫는 것 뿐입니다.

  우렁찬 승리의 개가 소리 숨은 종을 통하여 올 것을 믿사오나 도저히 자신이 없는 맥 떨어진 걸음을 걷게 되나이다. 눈물없이 갈 수 없고 피땀없이 갈 수 없는 길인줄 알았사오나 너무나 시련이 클 때에 기도의 힘조차 잃어버리고 몸부림치는 내 모양 주님만이 알겠사오니 7배나 강한 힘을 내려 주시옵소서. 남을 살려보겠다고 기도했지만 나 자체에는 형제를 살릴 능력이 없사오니 능력을 내려 주시옵소서.

  약한 자에게 능력을 주실 줄 믿사오니 약할 대로 약해진 이 모양, 주님만이 나를 붙들어 주실 줄 믿나이다. 혈혈단신 외로운 걸음 이날까지 걸었사오나 나 홀로 도저히 싸울 수 없나이다. 강권으로 싸울 수 있는 단체를 이루어 주시옵소서.

 

 

5. 생활 난제 해결에 대하여

 

  인생이라는 것은 먹어야 산다는 것도 또는 믿어야 산다는 것도 다 없을 수 없는 일이라고 보게 된다. 먹는 것도 인생의 난제요, 믿는 것도 인생의 난제라고 본다. 무조건 먹자는 것도 탈선의 길이요, 무조건 믿자는 것도 탈선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생활 난제라는 것은 무엇이냐는 것을 먼저 아는데서 해결될 것이다. 이제 생활 난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다.

 

  1. 먹고사는 생활

  사람이라는 것은 먹고사는 것이 난제라고 들어갈 때에 그것은 양심을 떠난 행동을 하게 되는 제 일보가 될 것이다. 인생이라는 것은 먹을 것을 따라가는 것이 인생이 아니고, 동물만은 먹을 것을 따라서 움직이는 것이 그 자격의 적합한 일이라고 본다. 동물은 먹는 것 외에는 더 생각할 무엇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사람은 먹는 것 이상의 것을 생각할만한 자격을 하나님께로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인생이 먹고사는 것을 따라갈 때에 퇴보요, 어떻게 되므로써 사람이 먹고사는 것은 별 문제가 없다는 것을 깨달아 들어갈 때에 이것을 진보적인 생활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먹는 생활이 왜 있느냐에 대하여 아는 것은 인격을 바로 찾는 지식의 근본이 되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자동차의 휘발유와 물이 불과 더불어 움직이는 것은 목적이 무엇이냐는 것을 바로 알아서 움직이는 것이 운전수의 할 일이라면 사람이 먹고 활동하는 목적이 무엇이라는 것을 그 심령 자체가 바로 알아야 할 것이다.

  만일 사람이 먹고 배부르는 것만을 목적하고, 영적으로 먹고사는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인격을 바로 찾지 못할 때 금수보다도 더 악한 행동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금일에 인간들이 유물적 사상이라는 것은 사람을 고등 동물이라는 것은 짐승보다도 더 악한 행동을 하게 되는 생활을 하므로 결국은 악한 사회를 이룰 것이다.

  우리가 먹고사는 생활은 목적이 무엇이냐는 것을 바로 아는 것은 반드시 물질에 국한된 과학으로써 해결할 수 없고 과학을 초월한 힘이 어디서부터 온다는 것을 알 때에 먹어야 산다는 생활에서 한 계단 더 올라가는 것을 가지게 된다.

  금일에 자본주의가 자본이 많이 있으므로써 생활난이 해결된다는 것도 현실이 증명된다고 볼 수 있으나 자본으로만이 식생활의 해결을 본다고 보면 자본을 위한 인격이 될 것이다.

  사람이라는 것은 자본에서 생활난이 해결될 줄만 안다면 아무런 사상이든 기계가 될 수 있는 것이니 돈에 따라가는 기계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자본을 주관하는 것은 사람의 노력에만 있지 않고 자연을 지배하는 조물주께 있다는 것을 신앙하는 신앙 양심에서 그 자본을 먹기 위해 움직이는데 국한시키지 말고 인생의 최고의 향상을 가져오는 초자연적인 발전에 도달하는데 그 물질을 사용할 때에 그 물질은 영원한 것을 이루는 열매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고 했던 것이다.

  금일에 과학 문명을 자랑하는 현실에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깊이 알아볼 때에 잘 먹고 잘 산다는 간판 밑에서 하나는 이렇게 하고 하나는 저렇게 하는 방향인데 이것만으로는 생활 난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먹고사는 문제 하나를 문제시하되 무서운 재앙이 올 때에 어떠한 자가 그 재앙을 피하고 새 시대의 축복을 받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려면 조물주 하나님의 오메가 역사라는 진리를 분명히 알고 대자연을 지배하는 하나님과 의합하는 사람이 될 때에 육적 생활 난제가 완전히 해결되는 새 땅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날이 가면 갈수록 모든 인간들은 먹어야 산다는 문제가 닥쳐올 것인데 여기에 국한된 인간들은 내일 일을 모르고 식충이 생활을 하다가 하루아침에 하루살이 같이 없어지는 것이 인간의 종말이라고 모든 선지는 예언한 것이다. 이날에 남을 자는 누구냐 하는 것을 분명히 가르친 것이 기독교 종말론이다.

 

  2. 믿어야 사는 생활

  믿음이라는 것은 동물은 가질 수 없는 것이로되 사람은 반드시 양심의 작용으로 없을 수 없는 일이다. 무신론 공산당도 종교 신앙을 반대하지만 그들도 무엇을 믿어야만 살 것은 분명하다. 인생관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각자가 다른 것인데 그 중에서 조물주 하나님이 기뻐하는 인생관이 있으니 이 신앙 노선만이 생활 난제를 해결하는 지침이 될 것이다.

  금일에 이방 종교를 제외하고 기독교 신앙 노선에서 서로 자기 노선이 바르다고 생각하는 것이 기독교의 혼란을 가져오는 미혹의 시대라고 볼 수 있다. 기독교가 이렇게 신앙의 혼선을 가져오게 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

  신앙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있다고 믿는 것보다도 하나님의 뜻을 믿는 것인데 성경을 손에 들고도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라는 것을 바로 알지 못하고 자기 멋대로 말하는 것이 마귀의 미혹이라는 것이다. 에덴 동산에서 하와를 찾아와서 말하던 마귀는 오늘도 우리를 찾아오고 있다.

  신앙은 법을 떠난 신앙이라면 오히려 불행을 가져오는 것이니 법이라는 것은 입법자이신 하나님밖에는 바로 행할 자가 없는 것이다. 신앙이라는 것은 내가 행할 것을 믿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법대로 행할 것을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법대로 행하시는 그 뜻을 바로 믿는 자를 통해서 법대로 역사하는 것이 과거나 현재나 미래가 꼭 동일한 것이다.

  법대로 믿어 순종하는 자를 들어서 법대로 행할 것을 기록한 것이 예언의 말씀이요 법대로 신앙하는 자가 그때 그때에 그 예언의 비밀의 뜻을 바로 알아서 증거하는 것을 시대적인 증인의 역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말하기를 이스라엘이 열심히 있지만 지식을 따르지 않으므로 그 열심은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열심히 되었다고 롬10:2~3에 말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법을 순종하는 자와의 친밀한 교통을 하는 신이요 그 밖의 사람에게는 오히려 자체를 감추시고 시대적인 비밀을 깨닫지 못하도록 미혹의 영을 부어 주시는 신이시다(사29:10~12).

  이제 신앙 생활 난제를 해결하는 것은 장차 될 일이 아니고 현재에 나의 신앙이 하나님과 의합되느냐에 따라서 즉각적인 난제 해결을 체험하는 것을 갖게 되는 것이다. 만일 기독교가 이러한 체험을 받지 못한다면 미신적인 종교에 불과할 것이로되 합법적인 신앙 노선에서 도덕이나 수양이나 의식으로 얻어 볼 수 없는 산 체험을 받게 되는 것을 기독교의 신앙 생명의 역사라는 것이다(롬7:6).

  신앙은 인격적인 난제를 체험으로 해결할 때에 생활 난제가 해결되고 생활 난제가 해결될 때에 시대적인 난제도 해결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천국은 내 마음에 있다고 했던 것이다. 겨자씨 한 알이 큰 나무를 이루는 것은 그 속에 생명이 있는 원인이요 아무리 큰 배라도 물결을 따라가게 되는 것은 그 속에는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생명이라는 것은 신앙을 따라가는 생명이라야 완전한 인격을 이루는 열매가 있고 그 열매가 있는 인격이라면 모든 난제가 해결되는 것은 인간 자력에 있는 것이 아니고 대 자연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있는 것이니 주님께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이것을 가르친 것이다(마6:31~33).

 

 

 

신 앙 문 답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문제와 은혜시대의 속죄, 은사. 교회의 주일문제와 교파를 초월한 참된 교회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다음과 같이 알려드립니다

 

【문】1.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마리아 몸에 잉태 된데 대하여 정확한 신앙의 확실성을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답】그리스도의 성령의 잉태설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알아야 됩니다.

  1. 그리스도의 몸이 이루어진 것은 마리아의 몸의 피를 힘입어 된 것이 아니고 성신의 역사 아래서 마리아 몸에 새로운 피와 새로운 물이 신의 능력으로 임하여 이루어진 몸입니다(요一5:8). 만일 그리스도의 몸이 마리아의 피로 이루어졌다면 마리아도 선악과를 먹은 몸의 계통이요, 또는 마리아의 몸의 피가 뭉쳐서 이루어진다면 남자의 정충을 받아야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거룩한 피와 물이 그 몸에 계속으로 임할 때에 신성과 인성이 결합된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성신은 하나님의 역사를 할 때에 지금도 우리 몸에 와서 역사하면 우리 몸도 그리스도의 몸과 같이 이루어지는 것은 맏아들 되시는 예수님이 승리한 역사로 말미암아 성령이 와서 역사하므로 우리 몸도 그리스도의 몸과 같이 영생할 몸이 되는 것입니다(롬8:11).

  2. 그리스도의 몸은 인간 죄악을 걸머진 몸으로 날 때에 하나님께서 완전한 몸으로 나게 한 것입니다. 그 몸은 만민의 죄를 걸머질 가치가 있는 것은 직접 조물주 하나님의 신의 역사에서 이루어진 몸이므로 흙에서 난 몸이 아니요, 하늘로부터 인간에 내려온 몸입니다. 만일 그리스도의 몸이 흙에서 난 몸에 속했다면 만민의 죄를 걸머질 몸이 될 수가 없습니다. 고전15:21~22을 보면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의 몸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의의가 있습니다.

  첫째아담의 흙에서 난 몸이 범죄하므로 흙으로 돌아가고 그 후에 그 몸에서 나온 자들은 다 선악과를 먹은 피에 의하여 사망을 가져오게 된 것인데 둘째아담 그리스도께서 물과 피로 임한 몸이 십자가상에서 완전히 승리했으므로 부활을 하게 되어 지금 성령으로 우리에게 부어 줄 때에 그 역사 아래서 우리 몸도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 변화체를 이루는 것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3. 그리스도의 몸은 처음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얼마든지 우리에게 영생의 씨를 줄 수 있는 근본이 되었습니다. 첫째아담의 범죄로 몸에 사망의 씨가 왔고 둘째아담 예수가 승리하므로 그를 통하여 영생할 씨가 우리 몸에 오는 것이니 중생이라는 것은 영이 중생하는 동시에 몸까지도 영생의 진액을 그리스도를 통하여 받게 되므로 그 몸은 죄의 도구가 되지 않고 거룩한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그리스도의 대행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그 몸의 인격이 이루어질 때에 성령의 역사를 받는 분량에 따라서 인격의 차이점을 가지게 됩니다. 중생을 받았지만 그 몸이 그리스도께로 오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쓰여질 수 있는 몸이 되는데는 죄와 상관이 없는 자리에 들어갈 때에 재림의 주를 맞이할 수 있는 변화체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한 분이 성령으로 잉태된 그 몸을 통하여 그리스도왕국을 이루는데 있어서 처음 열매가 되는 것입니다(고전15:23).

 

【문】2. 그리스도의 영원한 속죄에 대하여 구체적인 설명을 듣고자 합니다.

【답】영원한 속죄라는 것은 다시는 속죄제가 필요 없는 것을 뜻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오시기 전에 어린양을 잡아 드리는 제물은 그리스도의 영원한 속죄를 기다리는 자들에게 한 예표에 불과한 영자적인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의 속죄제라는 것은 생령을 가진 자만이 드릴 수 있고 죽은 영을 가진 자는 그 제사를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생령적인 사람이 예언의 말씀을 신앙했기 때문입니다. 오실 메시야를 믿는 신앙은 생령의 계통적인 사람이라야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영원한 속죄는 죽은 영혼을 살릴 수 있는 제사가 되었으니 다시는 그 이상 더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고 이루어진 속죄제의 피의 공로를 믿는 것만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일이었습니다. 믿으면 영생하고 믿지 않으면 멸망이라는 것이 영원한 속죄로 이루어진 법입니다.

  이제 영원한 속죄의 피를 믿는 신앙에는 다음과 같이 나가야 할 것입니다.

  1. 영원한 속죄는 율법을 도말했다는 것을 믿어야 됩니다. 이것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오는 인간의 죄를 전부 청산할 영원한 속죄이니 하나님께서 인생을 대할 때에 율법에 의하여 대할 수 없고 신앙의 법인 성령의 생명의 법에 의하여 인생을 대해서 역사하는 것이니 누구든지 율법에 대한 행위를 의지한다면 그리스도의 영원한 속죄를 완전히 믿는 신앙에 섰다고 볼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영원한 속죄를 믿을 때에 하나님은 그 믿음을 보시고 성신의 법에 따라서 역사하는 일이 우리에게 완전한 인격을 이루는 동시에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은 율법을 행하고자 하는 인간의 힘이 아니요 영원한 속죄를 믿는 믿음에 따라서 하나님의 신이 역사하는 열매가 되는 것입니다.

 

  2. 영원한 속죄는 인간의 죄를 기억도 하지 않는 것이니 이것은 아주 죄를 없애는 능력이 십자가에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죄를 지어도 좋다는 것이 기억치 않는 일이 아니요 그 사람의 죄를 전부 청산해 버리는 동시에 하나님은 그 사람을 죄의 세력이 와서 다스리지 못하도록 역사해 주시는 것이니 우리는 죄와 싸울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에 이끌려 생활하는 것입니다.

  능력이 마음에 역사하는 자는 마음에 죄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마음에 죄가 있는데 죄를 짓지 말라는 율법을 두려워하는 것이 영원한 속죄를 믿는 신앙이 아니고 영원한 속죄를 믿는 신앙 속에 완전한 신의 능력이 올 때에 그 사람 마음이 죄를 짓지 말라는 것을 가르친 것보다도 죄를 짓지 아니할 사람을 만들어서 죄와 싸우는 십자가 정병이 되게 하는 것이 영원한 속죄를 믿는 신앙의 열매라는 것입니다.

 

  3. 영원한 속죄는 영생의 생명을 얼마든지 받을 수 있는 생활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영생이라는 것은 죽어서 천당에 가서만 있는 것이 아니고 현재에 영원한 속죄의 은총을 힘입어서 날마다 하늘로 오는 영생의 진액이 되는 역사를 받을 때에 영생을 받은 사람으로서 그 생명을 통하여 나날이 자라나는 것을 기독교 신앙의 장성이라는 것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항상 그 마음에 죄를 질 마음이 있다면 이 사람은 영원한 속죄의 능력의 역사가 없는 자라고 보게 됩니다.

  속죄라는 것은 과거의 지은 죄를 사해 주는 것만이 아니고 완전한 그리스도의 형체가 이루어지기까지 역사하는 신의 능력이 영원한 속죄를 통하여 영원이라는 나라에 속한 것을 받을 때에 무엇이나 이 땅에 쌓아 놓는 생활이 아니고 영원한 영생의 나라를 위하여 날마다 쌓아 놓는 생활이 됩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속죄라는 것은 율법은 완전히 폐지가 되고 영원한 성신의 법에 의하여 활동하는 것이 영원한 속죄를 이룬 그리스도의 완전 역사라는 것입니다.

 

 

【문】3. 성신의 은사에 대하여 구체적인 설명을 듣고자 합니다.

【답】성신의 은사라는 것은 은사를 위한 은사가 아니고 완전한 진리를 믿게 하고 진보를 행할 수 있는 인격이 이루어지는 것을 목적한 것인데 이 역사라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완전 승리를 하셨으므로 자기를 믿는 사람도 승리하도록 역사해 주시는 것을 성신의 은사라고 합니다.

 

  1. 은사에 대해서 잘못된 노선을 말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신비를 중심한 은사

  은사는 신비만을 중심한다면 오히려 마귀가 틈을 타는 기회를 주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신비를 중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진리 하나를 바로 믿는 것이 있을 때에 인간의 힘으로서 할 수 없는 것을 진리의 신이 진리대로 이루어지도록 역사하는 것이니 신비라는 것은 신비를 위하여 있는 신비가 아니고 진리를 위한 신비이니 진리라는 것은 사람이 행하는 것이 진리가 아니고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이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진리라는 것은 인간이 죽은 영이 되고 죽을 몸이 되고 보니 도저히 사망의 법을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 인간인데 그 사람이 할 수 있어서 진리가 필요한 것이 아니고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이 해주시겠다는 것이 진리의 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비라는 것은 하나님이 친히 아들을 보내서 대신 죽게 하고 영원한 속죄를 이루는 그 피를 믿는 자에게 죄가 사해질 적에 성신은 임재해서 역사할 때에 은사로 할 수 있는 목적을 두고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사자가 그것을 목적하지 않고 은사로서 어떤 자기의 목적을 이루려는 탈선된 길이 될 때에 마귀는 기회를 타게 되는 것입니다.

  2) 은사를 악용하는 일입니다

  이것은 은사를 통하여 완전한 성경에 도달하는 것을 목적하지 않고 은사를 통하여 자기의 어떤 명예나 권리나 또는 물질적 욕망이 있다면 그것은 악용하는 일이라고 봅니다. 그러므로 은사자는 하나님만 영화롭게 한다는 것과 어떠하든지 남을 살린다는 불타는 마음과 또는 세상을 분토같이 보고 하늘의 상급 하나만을 바라보는데서 움직여야 될 것입니다.

  3) 은사를 등한히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은사를 받고 진리의 노선에 바로 서지 못하므로 실패를 당할 때에 은사를 중심한다는 것을 위험하게 보고 은사를 받으려고 하는 필요조차 없다고 하는 자리까지 들어갈 때에 이 사람은 마른나무 가지같이 외식하는 형식주의가 되기가 쉽습니다. 왜냐할 때에 성령은 떠나기 때문입니다.

 

  2. 은사 받은 사람의 완전 결실에 들어가는 노선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은사를 받은 자는 봉사에 전력을 두어야 합니다

  봉사라는 것은 은사를 받은 자의 사명이니 은사를 받지 못한 자의 사명이라는 것은 아무런 열매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봉사라는 것은 도덕과 의식을 초월해서 중심에 불타는 마음에서 봉사하는 것이라야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가 되기 때문입니다(엡4:12). 은사를 받은 자의 봉사 없이 하나님의 교회를 이룰 수 없고 성도의 생활을 완전케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은사를 받은 자의 봉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온전이라는 것을 이루는 것입니다.

  2) 진리가 통달되어야 합니다 (고전2:10)

  아무리 은사를 받은 자라도 말씀을 통달하는 일이 없게 되면 아무런 발전이 없는 신앙이 됩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은사로만 장성하는 것이 아니고 은사를 받은 자가 말씀으로써 마귀시험을 이기고 나갈 때에 신앙은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신 목적이 진리를 통달케 하시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3) 겸손한 생활입니다 (약4:5~6)

  성령은 온전한 자에게 역사하는 것이 아니고 항상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 부족을 깨닫는 자에게 고쳐주는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최고의 겸손이라는 것은 성신님이 가지고 계신 것인데 성신님이 하시는 일을 겸손한 자라야 순종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은사를 받고라도 날마다 겸손해지는 일이 없고 교만해지면 성신과는 대적이 되는 것이니 교만한 자에게 성령은 역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내가 약할 때에 강하다고 했던 것입니다(고후11:30). 하나님은 언제나 은사를 받은 종에게 더욱 겸손을 주기 위하여 마귀 시험을 통과시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어려운 시험을 당할 때에 마음이 겸손해지면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은사를 받은 자는 항상 봉사하는 일에 전력을 두되 말씀이 밝아지고 겸손한 자가 되어야만 은사 받은 종으로서 완전한 승리의 열매를 이루게되는 것입니다.

  은사를 받은 종이 약간의 시험이 올 때 오히려 은사를 받는 것은 위험하다고 보며 후퇴한다는 것은 큰 과오라고 봅니다. 은사를 받은 자로서 여러 가지 시험이 올 때 더 겸손한 마음으로 성신님께 순종할 때에 완전한 승리를 이루는 용사가 될 것입니다.

 

 

【문】4. 안식일과 주일 문제에 대하여 구체적인 말씀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답】안식일이라는 것은 흙에서 지음 받은 아담의 몸에 축복한 날입니다. 그 축복이라는 것은 네가 이 땅에서 충만하고 다스리며 세계를 정복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슨 행함이 있는 조건에 의한 축복이 아니고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사람을 내고 네 사명을 이제부터 충실히 하면 복을 받으리라는 축복입니다. 이 축복을 맡긴 것은 완전한 것이 아니고 완전해 질 수 있는 사명을 받은 축복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선악과를 따먹은 죄로 말미암아 지상 축복을 빼앗긴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축복을 다시 찾아 주마 하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인데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가진 민족에게 십계명을 줄 때에 이것은 하나님께서 축복을 주는 계명이 아니고 축복을 주기 위하여 다시 언약을 세울 때에 죄라는 것은 무엇이냐는 것을 가르쳐 주는 몽학적 교훈에 관한 것입니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안식을 이루는 것이 아니고 안식을 찾아주기 위하여 속죄의 큰 뜻을 이루고자 하여 먼저 하나님의 공의라는 것은 무엇이냐는 것을 가르친 것입니다. 공의를 분명히 알려주지 않고 무조건 죄를 사한다는 것은 완전한 공의를 행하는 일이라고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것은 그 안식일을 사람이 지키므로써 안식의 축복을 받는다는 목적이 아니고 하나님이 아담에게 준 안식의 축복을 받으려면 그날은 평안히 쉬는 날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전히 이루어질 것을 목적 두고 가르친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안식일 날 완전히 무덤에 들어가서 하루 죽어 있게 된 것은 첫째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안식의 축복을 빼앗긴 것을 찾아주기 위하여 그 죄의 대가를 걸머진 몸으로 죽음에 처하여 있었고 이레 중 첫날에 사망을 뚫고 부활한 것은 잃어버렸던 안식을 개척한 날입니다.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창조는 사람을 위해 창조한 것인데 사람의 범죄로 만물이 다 저주를 받았고 둘째아담 예수가 완전히 승리의 부활을 하시므로 새로운 시대가 이루어지는 날이 부활의 날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으므로 중생 받은 영적 이스라엘은 육적 이스라엘이 지키던 안식일이 우리와 하등 관계가 없고, 그 율법을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주님의 부활날이 우리에게 참된 안식을 주는 날이므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안식의 축복을 받는 동시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신령한 제사를 드릴 수 있는 날이 온 것이니, 우리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신의 법 아래 다스림을 받는 신앙 양심에서 그날을 지키므로 복을 받는다는 것이 아니요, 이미 복을 받은 우리들이 그날에 신령한 제사를 드리는 동시에 복 받은 사람으로서 안식을 주시는 예수님의 은총을 힘입어 새로워지고, 하나님을 섬기는 동시에 그날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이루어지는 은총을 크게 입으므로 안식의 축복을 받은 자로서 날마다 자라나는 과정에서 예배하며, 말씀을 배우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을 진행하는 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날을 지키므로써 복을 받는다든지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을 한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승리를 오히려 무시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십자가에는 우리가 지키므로 된다는 조건이 있을 수 없고 축복을 받은 사람으로서 복을 주신 주님을 경배하며 섬긴다는 것밖에는 아무런 진리가 없습니다.

  율법이 안식을 주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직접으로 안식을 주시는 것이니 그리스도의 은총 속에서 주시는 은혜를 더 받기 위한 마음에서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해서 바치는 것인데 이것은 의식이 아니요 은혜 가운데서 마음이 더 간절해지므로써 세상의 모든 일을 잊어버리고 신령한 세계에서 그날을 지키게 되는 것인데 이것은 억지로 지킨다는 법이 아니고 은혜 속에서 자동적으로 하루를 지내게 되는 성신의 열매라고 봅니다.

  우리 기독교에는 모든 전부가 우리 자체가 행하므로 되는 세계가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신 부활을 통하여 흘러오는 은혜로 말미암아 영적이 새로워지는 동시에 몸으로 움직이는 일까지 이루어지는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을 지켜야 된다, 주일을 지켜야 된다 하는 말은 사도 바울 서신에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고 모이기를 힘쓰라고 한 것뿐인데 우리는 주일을 지키기 위해 모이는 것이 아니고 거룩한 예배를 사모해서 모이게 되므로 그날을 거룩히 지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주일을 지켜야 된다는 것보다도 은혜를 받지 못하면 안되고 받아야만 된다는 것이 앞서야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되려면 성령의 역사가 떠나지 않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이니 성신의 역사 아래서 입도 생활도 몸도 전체가 그날에 바쳐지는 예배가 될 때에 그날 하루의 받은 은총 속에서 세상에 나가 무엇을 하든지 활발하게 승리의 길을 걸어나가는 열매로 주일 하루 거룩하게 지내므로 이루어지는 열매로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주일날을 우리에게 축복할 적에 모세 율법에 의해서가 아니고 주님의 부활을 통하여서 은총을 베풀어주시기 때문입니다.

 

 

【문】5. 참된 교회라는 것은 무엇인지 구체적인 설명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답】교회라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찾기 위한 목적이 아니고 하나님이 택한 자를 찾기 위한 목적에서 세운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했던 것입니다.

  모세5경으로 섰던 예루살렘 성전은 모든 전부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써 이루어질 교회를 가르쳐 준 예언적인 교회요, 그 성전이 황폐되었다가 복구될 것을 중심하여 모든 선지가 묵시를 받아 예언한 것은 주님이 재림할 때 영적 교회가 다 황폐된 가운데 있다가 다시 회복됨으로써 기독교는 완전히 새 시대를 이루는 열매가 될 것을 목적하고 말씀한 여호와의 책입니다.

  참된 교회라는 것은 무엇이냐는 것을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이 참으로 이루어진 교회입니다

  말씀대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은 예수 이름으로 교회가 된 것은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완전히 하나님의 명령을 행해 나가므로써 성경대로 죽기까지 순종했고 성경대로 승리의 부활을 하였고 성경대로 승천해서 성경대로 성신을 보내서 역사하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사람이 아무런 것도 한 것이 없이 그리스도 한 분이 행하므로 성립된 교회이니 기독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하여 행하신 것이 아니고 세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행하신 일이 기독교이니 세계적인 대종교로 이루게 된 것은 구원의 종교이기 때문이다. 구원이라는 것은 사람의 행위에서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아들로 말미암아 행하는 것이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참이라는 것은 인생 자체에 있을 수 없고 성부, 성자, 성신이 참신인 동시에 그 신의 역사가 기독교를 온 세계에 확장시킨 것이며 사람은 그 역사의 힘에 끌려서 죽기까지 순종할 한 도구에 불과한 것입니다.

 

  2. 이루어질 말씀을 위하여 싸우는 교회입니다

  이날까지 기독교는 그리스도께서 싸워 승리하므로 교회가 선 것이요 이제 끝을 맺는 것은 교회가 예언대로 싸워 승리함으로만이 새로운 시대를 이루는 것입니다. 금일에 아무리 기독교가 확장되었다 하더라도 이제 참되신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대로 싸워 이기지 못하면 오히려 음녀적인 바벨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날까지 성령의 은사를 나린 것은 당신이 이기신 십자가의 승리로 말미암아 누구든지 십자가만 믿으면 무조건 성령을 부어 주므로 세계 만방에 성신의 역사로서 대승리의 열매를 이룬 것이 기독교라고 봅니다.

  그러나 금일에 있어서 기독교가 이렇게 부패된 것은 그리스도가 약해져서가 아니고 구약 때 예루살렘 성전이 황폐화되듯이 말세 영적 교회가 황폐될 것을 예언한 말씀이 응하는 과정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가 이렇게 부패한 것을 당신이 할 능력이 없어서 이렇게 된 것이 아니고 알곡과 쭉정이를 가르기 위해서 교회의 사람들에게 마귀의 흑암을 허락하여 까불어 보기 때문에 교회가 혼란해지는 것입니다.

  이제 참된 촛대교회가 나오려면 종말의 예언의 말씀을 정확히 가르치는 종이 필요하고 예언의 말씀대로 새로운 역사가 내리는 것이 아니라면 참된 촛대교회는 나타나지를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세운 것은 십자가의 법으로 세웠고 교회의 끝을 맺는 것은 예언의 법으로 끝을 맺는 것이니 재림의 주를 맞이할 교회가 되려면 예언의 말씀을 바로 증거하고 지키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계22:6~7, 16~19).

  에덴 동산에 있는 아담, 하와를 간교한 뱀으로 꾀어본 것 같이 심판기에도 용의 앞잡이 붉은 짐승과 거짓 선지를 내보내서 교회를 꾀어볼 때에 아무리 꾀어도 하나님의 말씀만이 참이라는 것을 믿고 예언을 지키는 교회라야 참된 교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참이라는 것은 그리스도가 행하는 일이 참인 동시에 참으로 예언을 지키는 자에게 예언의 말씀대로 하나님이 참으로 도와주고 보호해서 참으로 남은 자가 되어 참으로 새 시대에 들어가는 것을 참된 교회라는 것입니다. 지금 기독교가 극도로 혼란해진 것은 참된 교회가 말세 증인을 통하여 다시 나올 시기가 된 증거라고 봅니다.

  그러므로 계시록 11장에 말세 증인을 세워서 1260일 동안 예언할 때에 참된 교회가 촛대교회로 나올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참된 교회를 통하여 모든 영들이 중생 받아 천국으로 인도를 받았고 또는 참된 교회를 통하여 예언의 말씀을 바로 듣고 지키므로 모든 사람이 환란에서 남은 자가 되어 지상왕국이 이루어질 것을 참된 교회의 열매라는 것입니다.

 

 

【문】6. 성경을 분명히 바로 알 수 있는데 대하여 분명한 말씀이 있기를 바랍니다.

【답】성경은 사람이 스스로 안다는 것은 오히려 큰 불행을 가져오는 일이 있기 쉬운 것입니다. 오늘의 기독교가 누구나 다 성경을 들고 자기가 바로 안다는 것이 큰 병적이라고 보게 됩니다. 이제 성경을 바로 아는데 대하여 간단한 시간에 다 말할 수 없으나 요점을 들어 말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성경을 기록한 목적을 먼저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 목적이라는 것은 사람이 행할 것을 목적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행하실 것을 목적으로 말씀한 것이 성경이라 한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기록한 것은 그 시대 시대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지 않으면 안될 시기에 하나님의 사람을 통하여 기록하도록끔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첫째로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가나안 복지를 향하여 갈 때에 이스라엘 나라라는 신정 국가가 시작될 때에 그 민족에게 없어서는 안될 것이 모세 5경이란 글입니다. 이 글은 그 민족이 신정 국가를 이루는데 있어서 여러 가지 법을 세운 것인데 이것으로서 그 민족에게 몽학적 교훈을 주었던 것입니다.

  ① 죄가 무엇인지를 가르친 일,

  ② 하나님의 성전을 어떻게 짓는 일,

  ③ 제사를 어떻게 드리는 일 등 모든 의식의 절차를 가르친 일인데 국민의 모든 행정법이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시대의 그 법은 그 민족에게만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 민족이 그 법을 순종하면은 나라가 잘되고 순종치 않으면 그 나라가 망한 것입니다.

  이러한 민족 중에서 예언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때는 그 나라가 신정적인 국가로서, 타락하여 세속화되고 심지어 이방신과 타협하는 일이 있게 될 때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을 통하여 책망을 내리므로 타락한 정치인과 종교인과 모든 백성들은 하나님의 사람을 대적하므로 박해를 받고 순교를 당하는 과정에까지 처할 때에 그 선지들에게 묵시가 나타나기를 심판과 새 시대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하나님의 자녀지만 참된 종을 대적하는 정치인이나 종교인이나 인간들은 다 망하게 되고 하나님의 사람이 전하는 말을 순종하는 자라야 남아서 새 시대 가는 이치를 하나님이 묵시로 알려주었던 것입니다. 그 때에 선지들에게 나타난 말씀은 그 시대 사람을 책망하는 말 같으나 이 말이 인간 종말의 경고가 됩니다.

  왜냐하면 선지의 묵시의 말씀에 그리스도 탄생을 말했고, 십자가를 말했고, 부활, 승천, 성신 강림, 세계적인 복음 확장을 말하면서 심판이 오되 아무리 시온이며 이스라엘이라도 참된 선지의 말을 듣지 않고 대적하는 자는 다 없이하고 속화된 시온이 망하는 동시에 이방적인 세력이 강하게 일어나서 북방으로부터 환란이 오게 되므로 부패한 이스라엘과 시온이 망하게 되고 하나님만 바라보는 시온과 이스라엘은 남은 자가 되어서 새 시대 간다는 것을 가르쳤으니, 이 시온과 이스라엘은 금일에 그리스도의 피를 믿고 아브라함의 자손 된 우리 기독교인을 가르친 말씀이라고 보며, 북방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황폐화시키고 동방 고레스가 바벨론을 칠적에 바벨론의 세력 아래서 서로 개인 신앙을 지키던 자들이 소수이지만 동방 고레스의 명령에 의하여 예루살렘을 복구한 것을 들어서 인간 종말에 바벨화되는 세상이 될 때에, 참된 성도는 심히 적은 수로되 남은 자가 되어 동방에서 일어나는 권세 역사에서 새로운 촛대교회가 나타나는 동시에 새 시대가 올 것을 가르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모세 5경으로 섰던 교회도 완전히 폐지가 되고 완전한 교회가 이루어지는 동시에 그 민족에게 말기에 경고를 준 선지서는 전부가 말기를 당한 우리에게 주는 경고이며 우리가 전할 복음이 됩니다(계10:7). 지금 이때는 선지서를 그대로 읽어서 얼마든지 이 시대 사람에게 전할 복음이 됩니다.

 

  2. 신약 성경을 말하자면 4복음은 예수 행적인데 메시야가 성경대로 출생하고 성경대로 자라나서 성경대로 가르치고 성경대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했다는 것을 증거해서 예수는 참 하나님의 아들이며 우리 구주시라는 것을 전도하는 복음인데 이것은 사람이 친히 보고 들은 것을 저술한 책입니다.

  사도행전은 그들이 복음을 전한 행적이며 편지서는 복음을 전한 자들이 교회를 세운 다음에 신자들에게 이단에게 속지 않고 옳은 신앙을 지켜 나가기 위하여 기록한 편지인데 이 글은 그 시대 사람에게 썼지만 그때나 금일이나 한 은혜시대이니 만큼 어느 곳에서나 교회를 세울 때에 4복음과 사도행전과 편지서가 필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바로 믿어서 그 영혼이 구원받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금일에 사도적인 신앙을 보존하여 내려오던 교회가 세속으로 흘러갈 때에는 하나님은 구약 말기에 경고한 선지서가 필요한 동시에 계시록이 필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금일에 모든 정치, 사상, 인심 악화, 정치 부패, 모든 되어지는 일은 선지서와 계시록을 맞춰 볼 때에 분명히 진노의 날이 가까운 환란, 재앙기에 접어든다고 봅니다.

  그래서 지금은 계시록은 주석이 필요 없고 그대로 읽어서 바로 깨달아 듣게 말할 수 있고 선지서를 그대로 읽어서 이 시대 사람이 깨닫도록 말할 수 있는 동시에 불가피로 오는 환란 재앙 속에서 어떠한 신앙 노선을 가야 남은 자가 되며 새로운 시대에 들어간다는 것을 햇빛같이 밝히 말할 수 있습니다.

  모든 선지는 북방 세력이 종말에 환란을 일으키고 내려오지만 그 세력이 망하고 새 시대가 오는 것과 계시록에는 붉은 짐승이 환란을 일으키고 나오지만 이것이 망하고 새 시대가 온다고 가르친 것이니 북방 세력이 망하는 것은 주님의 재림으로 망한다고 했습니다. 모든 성경은 짝을 맞추어 읽어볼 때 분명히 이때를 주 재림기로 봅니다.

  언제나 성경은 그 시대를 따라 하나님의 자녀가 본문을 읽어서 깨닫게 한 것이니 은혜시대는 4복음과 사도행전과 편지서를 읽어서 깨닫되 선지서의 은혜시대를 가르친 말씀만 깨달았고 지금 이때는 선지서와 계시록을 맞추어 읽어서 충분히 신자들이 깨닫게 되는 시대입니다. 금일에 기독교가 계시록과 선지서를 읽어서 만족하게 받는 진리 운동이 아니라면 거짓 선지의 미혹을 도저히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언제나 마귀 미혹을 이기는 것은 하나님 말씀을 본문대로 읽어서 이기는 것이 정확 무오한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율법시대에는 모세 5경을 읽어서 모든 것을 밝혀 나갔고, 은혜 시대는 신약 전서를 읽어서 깨달아 나갔고, 환란시대가 올 때는 계시록과 선지서를 읽어서 깨닫게 되므로 마귀의 미혹을 이기고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특  집

 

1. 그리스도인의 애원

 

  언제나 어려운 일이 올 때에 참된 성도의 애원을 통하여 하나님은 난제를 해결시켜 주는 것이다. 이제 이 시대에 그리스도인의 애원이라는 것은 무엇이냐는 것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순교적인 생활을 말하게 된다 (계6:9~11)

  우리는 기독교가 협상적인 노선을 걷게 되고, 북방의 붉은 세력은 날마다 강해가고, 교회 안에 사랑이 식어져 도저히 위로를 받는 것보다도 상처를 받게 되고, 점점 교회 안에 분쟁만 일어나고 말씀은 새로운 것이 없고, 도저히 예배의 신령한 은혜가 없게 될 때에 참된 그리스도인은 몸부림치며 목숨을 내걸고 나서야 되겠다는 마음이 자동적으로 생기게 될 것이다.

  만일 이때에 이러한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면, 이 사람은 죽은 영이 되었던지 그렇지 않으면 깊이 잠이 들어서 분별을 못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보게 된다. 믿음의 양심이 살아있는 기독교인이라면 이때에 각자가 목숨을 바쳐서 투쟁하지 않으면 기독교의 장래는 큰 위기가 왔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언제나 무서운 환란과 재앙이 올 시기에는 구약 말기에도 참된 선지가 목숨을 바쳐 싸워서 증거하게 되었고, 신약시대에 기독교가 극도로 부패될 때에 하나님의 종 되는 자들 중에서 목숨을 내놓고 싸우는 일이 있으므로 교회는 다시 새로워지는 일이 있는 것이다. 만일 오늘에 기독신자들이 순교적인 사상을 포기하고 협상적인 노선을 취한다는 것은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탄식하며 슬퍼할 일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천천만 천사도 이 땅에서 순교자의 동무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순교자들까지도 호소하고 있다.  

  땅에서 굶주린 양떼들은 아우성치는 탄식이 있게 되는 현실이라고 보게 된다. 때는 과연 왔다. 그리스도인이 슬피 울며 애원하는 호소가 있지 않으면 안될 때가 이때이다. 이래도 저래도 큰일은 기독교에 닥쳐오게 된 것이다. 이 큰일이라는 것은 크게 싸움이 일어날 일이다. 성서를 비추어 볼 때에, 이제 기독교 안에 큰 싸움은 역사적으로 없던 무서운 일이 닥쳐올 것이다. 이 싸움에 승리하면 영원한 평화요 축복이다.  

  그러므로, 하늘에서는 순교자 동무가 되는 사람에게 권세를 줄려고 살피고 있는 것이다. 이날까지에 담겨 있던 순교자의 기도의 향은 애원하는 자에게 응답으로 올 것이니 해산의 수고를 다하여야 할 때가 왔으니 우리들은 요엘 2장과 같이 합심 단결하여 애원하는 호소가 있을 때에 여호와 응답할 것이다.

 

  2. 쉬지 않는 생활 (사62:6~9)

  지금 이때는 참으로 애원하는 마음이 있는 자는 밤낮으로 쉬지 못하고 활동하게 된다. 무엇으로 보든지 때가 임박한 것을 알 때에 일초 일각인들 방심할 수 없고 할 일 많은 이때라는 것을 하나님 말씀에서 알게 될 때에, 조금도 쉴 수는 없다. 이날까지의 기독교의 할 일이 많았지만 금일같이 여러 가지 모든 난제가 닥쳐와서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생각할 자는 그리스도인이다.

  역사상 지금같이 기독교인에게 어려운 난제가 많을 때는 없었던 것이다. 만일 지금 이때에, 기독교인이 할 일 없이 어떤 오락이나 어떤 연락을 일삼고 쓸데없이 세월을 보내고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사상, 양심을 잃어버린 자라고 본다.

  이때에 할 말이 많고 갈 곳이 많고 싸울 일이 많고 깊이 기도해 볼 일이 많고 정신을 차려서 자세히 보고 자세히 듣고 하여야 할 일이 많은 때다. 만일 이때에, 쉬지 않고 일해도 그 힘을 하나님께 받지 않으면 도저히 기독교인으로서 신앙 생명을 보존할 수 없고 심지어 육의 생활까지라도 바로 살기가 어려운 난제가 닥쳐온다고 보게 된다.  

  사람이라는 것은 쉴 때도 있고 깰 때도 있다. 예를 든다면, 하루 일하는 노동자가 낮에는 쉴 시간이 있지만 저물어 가고 어두워 갈 때에 쉰다는 것은 일꾼의 양심이 아니다. 그러므로, 일꾼이라는 것은 아무리 쉬는 시간이 있다해도 날이 저물어 갈 때는 쉬지 않고 그날의 할 일은 해야만 되는 것이다.

  주인이 노할 일은 시간이 다 되었는데 쉰다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때에 잠깐이라는 시기가 지나면 다시 일할 기회도 없고, 일한 대로 갚아주실 주님이 나타날 때를 당하였다. 지금 이때는 쉬지 않고 애원하는 자라야 하늘로부터 오는 새 힘을 받게 될 것이다.

  가장 역사적으로 급한 때는 금일이라고 본다. 중동의 바람집을 막았다고 쉴 때가 아니고 계7:1~3을 보면 땅이나 바다나 피해를 줄 권세가 있는, 네 천사에게 다른 천사는 나타나서 해 돋는 편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크게 외치기를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에게 이마에 인 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고 하는 광경은 금일에 우리가 마땅히 일어나야 할 시기를 보여준 것이다.

  그러므로 이때는 쉬지 않고 애원하는 자가 영원히 안식에 들어가서 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누구든지 지금 하나님과 교통하는 자라면, 하나님께서 그 마음에 격동을 주어서 쉬지 못하게 할 것이다. 지금 제일 어리석은 자는 할 일 없이 잠자는 자이다.

 

  3. 여호와만 바라보는 자 (미7:5~8)

  참으로 애원하는 자라면 사람에게 상처받을 필요가 없고 하나님께만 애원하는 자가 될 때에 이것저것 보지 않고 하나님만 바라보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 여러 가지로 난제가 닥쳐오는 것은 하나님만 바라보라는 것 인줄 알고 조금도 사람에게 치우치지 말고 용기 있게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암7:1이하와 같이 야곱이 미약하오니 어떻게 서리이까 하는 자라면 하나님은 피해를 당치 않도록 해준다는 것이다.

  아무 때든지 어려운 일이 올 때에 하나님을 바라보고 애원하는 자에게 초인간적인 역사가 왔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증명하는 사실이지만 이제 하나님만 바라보는 자에게 오는 축복은 다함이 없는 축복이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지금 이때에, 하나님만 바라보고 눈물 흘려 호소하고 돌진의 걸음을 걸어야 할 때가 왔다고 본다. 아무리 바로 황제가 강퍅했지만 모세의 애원을 들어주시고 하나님의 백성을 구출시킨 것이다.

  우리 극동 난제가 닥쳐온 현실에 동방 땅 끝 작은 반도에 남은 그리스도인들은 지금 이 때를 놓치지 말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애원하는 간곡한 호소가 있어야만 할 때가 왔다고 본다. 사41:17이하를 보면 가련한 빈핍이 닥쳐온 사람들이 혀가 마를 딱한 사정을 만났지만 애원함을 들으시고 응답이 오므로 새 땅 축복이 올 것을 말했다. 하나님께서 가장 큰 일을 행하실 때는 반드시 당신의 백성의 애원을 들으시고 역사하시겠다고 미리 약속을 세우신 것이다(시12:5).

 

 

2. 9월 소식

 

여호와새일교단 제4회 총회

 

 상기 총회가 8월 14일 12시 새일수도원에서 개회되어 임원을 개선하니 다음과 같습니다.

   총 회 장   구완대 목사  

   서    기   박능도 목사

   상임위원   이완만 목사,  구완대 목사,  박능도 목사

              송진모 목사,  안전대 전도사

 

 본 총회에 새로 가입된 교회 수는 13교회가 편입되었고, 금년부터 모든 활동은 문서운동을 적극 전개하기로 하고 총회 사업에 새로운 출발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날까지에 이 교단은 각 교파에서 새일수도원에 수도한 종님들이 말씀을 전할 때에 자력적인 정신에서 조금도 원조를 받은 일이 없이 성도들의 합심단결에서 교회가 이루어지므로 이날까지에 여러 가지 시련속에서 내려 왔지만 오늘날에 와서 43교회의 수를 이루게 되는 동시에 미국과 일본에도 복음을 전할 길이 열리어 적극적인 문서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3.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종님들에게 축복을 빕니다

 

  때를 따라 양식을 집안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자, 얼마나 복 있는 자인가요. 이 월간지는 이 시대 사람에게 주어야 할 생명의 떡이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이 시대는 살아서 주님을 맞이할 변화성도의 눈물겨운 호소가 필요한 때라고 봅니다. 변화성도라는 것은 붉은 용, 붉은 짐승, 거짓 선지 세력과 싸워서 그 육 육 육의 표를 받지 않도록 하는 것이 변화성도의 순교적인 생활에서 말씀으로 싸워야 될 복음이 즉 계시록입니다.  

  하나님은 정한 때가 왔기 때문에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그 간교한 미혹을 막을 변론을 할 자가 없음을 아시고 사28:11같이 우리 나라 방언으로 직접 사람의 입술을 통하여 말씀한 것이 여러 종님들이 전하고 있는 아름다운 소식의 월간지입니다. 이 글은 한자도 가감 없이 입에 말씀이 임하여 나타나는 대로 기록한 것인데 이 책을 전하는 종은 다음과 같은 축복이 올 것입니다.

 

  1. 한 나무가 이루어지는 새순의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순이라는 것은 한 가지를 통하여 그루터기에서 흡수되는 진액을 받아서 사방으로 뻗어나가 꼭 같은 열매를 맺는 것이니 이 말씀이 한 사람의 입을 통하여 하나님께로 말씀이 왔지만 여러 종님들이 전하는 것은 성령께서 꼭 같이 순 되는 종님들에게 승리의 열매가 되도록 역사할 일입니다. 왜냐하면 이 글은 조금도 인간의 무엇이 섞이지 않은 까닭입니다. 이야말로 완전히 한 나무를 이루는 역사가 될 것은, 인간의 힘과 능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여호와의 신으로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월간지 같이 설교자나 논설자의 이름을 기록할 수 없고, 전부가 한 사람의 입을 통하여 말씀이 오는 대로 기록한 책이니 누구의 이름을 기록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되는 일은 기독교의 역사상 없던 일입니다. 앞으로 점점 더 세밀한 변론이 하나님께로 올 것이니 전하는 종님들은 친히 많이 읽어보시면서 전하신다면 전하는 종님들에게 큰 역사가 같이 할 것입니다.

 

  2. 하나같이 완전한 영감과 변론을 받게 될 것입니다

  언제나 완전한 것이라는 것은 인생 자체에는 있을 수 없고 하나님께만 있는 것이니 이 말씀을 입에 말씀이 오는 대로 여러 종님 앞에 기록해 보내는 본인으로서 심히 떨리는 마음 금할 수 없습니다. 저도 이 책을 계속으로 읽어 볼 때에 새로운 진리를 배우게 되며 내 심령이 새로워지는 은혜를 받게 되며 맑은 영감을 받게 됩니다. 누구든지 이 책을 계속으로 조용한 시간을 이용하여 기도하시면서 읽으신다면 꼭 같은 완전 영감과 변론을 받게 될 것입니다.

  아무리 영감을 받고 변론을 받은 자가 있다해도 서판에 새겨서 일반이 다 읽어 볼 수 있게 되기 전에는 아무런 열매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금번에 8.15를 기하여 강권으로 2천부를 출판하되 농촌의 어떤 학생에게 지시해서, 이 학생의 정성어린 헌금으로 8월달 월간지를 보내게 된 것입니다. 2천부가 부족하여 주문하는 대로 다 보내지 못하여 대단히 미안합니다. 9월호부터는 여유 있게 출판하고자 하오니 더 주문하실 분은 연락처로 알려주시면 보내드리겠습니다. 아무쪼록 꼭 같은 순의 열매가 있으시길 바랍니다.

 

  3. 가정에 큰 축복이 있을 것입니다

  아름다운 소식이라는 것은 개인의 영혼 천당을 목적한 것이 아니고 노아 때보다도 더 좋은 축복이 가정에 오는 것이니 온 가정이 하나같이 보호받고 새 시대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인데 이 소식을 전하는 자의 자손은 만대에 복을 받을 것을 사66:22에 가르쳤습니다.

  아름다운 소식이라는 것은 살아서 새 시대 들어가는 진리인데 이사야서를 비롯하여 모든 선지서가 다 변화성도가 전할 아름다운 소식입니다. 언제나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실 때에, 아름다운 소식의 주신 말씀을 학생들에게 읽으라고 하시면 그 학생들에게 신의 감화가 임할 것입니다. 앞으로는 가정 생활에 대한 모든 세밀한 것까지 말씀이 올 것입니다.  

  우리 성도의 가정은 앞으로 반드시 아름다운 소식에 그달 그달 새로이 주는 말씀대로 가정을 움직이도록 하는 것이 큰 열매가 될 것입니다. 우리 성도는 가정이 하나같이 진리로써 뭉쳐지되 검은 연기 같은 압력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진리 안에서 밝아져야 할 것입니다.

 

 

4. 부탁의 말씀

 

  우리는 마지막 변론을 해야할 때가 이때입니다. 왜냐하면 붉은 짐승과 거짓 선지의 변론인 용의 말을 완전히 꺾어버리는 역사는 우리가 말씀 변론을 바로 하는데 있다고 봅니다.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에서 간교한 뱀을 들어서 말하게 한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말씀을 바로 변론해서 지키면은 영생과를 따먹고 영생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와가 말씀 변론을 바로 못하고 뱀의 말에 굴복했다는 것이 오늘에 인류 타락의 비참을 이룬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완전 승리는 그리스도인 된 우리들이 마지막 변론을 바로 하므로 붉은 용, 옛 뱀을 이김으로써 다시 에덴 동산 새로운 시대를 이루게 되는 것이 새 일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달마다 아름다운 소식의 글을 모든 종님들에게 보내도록 하시는 것을 종님들은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많은 종님들에게 이 글을 받아 읽도록 해야만 여러분에게 큰 축복이 올 것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이 그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이루리라(계10:7)

  아름다운 소식을

    1. 가까운 신앙 동지에게 전합시다.

    2. 숨은 기도 용사 진리 용사에게 전합시다.

    3. 참된 진리를 모르고 이단시하는 종에게 깨우칩시다.

 

 

5. 알리는 말씀

 

  1. 누구든지 정식 수도학과를 공부하고자 하시는 분은 매월 1일부터 25일까지 수도회가 진행되오니 오실 분은 식대로 매일 80원, 학과 책대(성경 해석법, 요한일서 강의, 조직신학 강의,선지서 강의, 계시록 강의, 인간론, 새일 성가집 합계 7백여원)만 준비해 가지고 오시면 모든 설비는 얼마든지 자유롭게 수도할 수 있습니다.

  2. 교통은 어디서든지 대전에 하차하면 대흥동 버스 정류소에서 신도안 행을 타고 종점에 내리면 됩니다. 또는 기차로 하차하실 분은 두계역에서 하차하여 신도안행 버스를 타고 종점에 내리면 됩니다.

  3. 서울에서 이 진리를 탐구하실 분은 서울 종로구 종로 1가 3번지(광화문 비각 옆) 의사 빌딩 새일 중앙 교회에 오시면 얼마든지 진리를 탐구할 수 있습니다. 시간은 주일 오전, 오후, 저녁, 매일 저녁 계속 진리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4. 서책을 구독하실 분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가 3번지(의사빌딩) 새일중앙교회로 연락하시거나 충청남도 논산군 두마면 신도내 새일수도원으로 연락하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