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새일 교회
 

  

차    례 (1970년 11월호)

설  교  편

1. 기도 생활에 있어야 될 원칙 (마7:1~14)

2. 흑암이 깊음 위에 빛이 있음 (창1:1~5) 

3. 하늘과 땅의 의의 (창1:6~13) 

4.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할 일 (사40:9~11)

5.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가 받는 새 힘 (사40:12~31)

6. 기독교 종말의 변론 (사41:1~7)

7. 땅 끝에서 붙든 종의 승리 (사41:8~13) 

8. 여호와의 응답과 새 시대 (사41:14~20) 

9. 성도의 고난과 기도 (시102:1~28) 

10. 온전함을 이룬 자의 사상 (빌3:10~16) 

11. 대강 기록한 바울의 편지 (엡3:1~9)

12. 지혜를 진주보다 낫게 여기는 사람이 되자 (잠8:11~21)

13. 욕심은 마귀에서 난 것이다 (요8:42~49) 

14. 기도인과 정치 문제 (딤전2:1~4)

 

장년 공과편 - 촛대교회의 역사

제1과  시련을 통과함 (슥3:1~5)

제2과  택한 종의 축복 (슥3:6~10)

제3과  촛대교회의 권위 (슥4:1~9) 

제4과  감람나무 두 가지의 역사 (슥4:11~14) 

제5과  저주를 받지 않는 촛대교회 (슥5:1~11) 

 

논  설  편

1. 인생과 종교에 대하여 

2. 인생의 두 가지 노선에 대하여 

3. 탈선된 종교 사상은 무엇인가

4. 갈팡질팡하는 사람이 많은 세상  

5. 종교가 부패되는 원인에 대하여

 

신 앙 문 답

1. 영의 생명과 육의 생명의 차이점을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2. 사람이 어떤 방침으로 살아야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고자 합니다 

3. 기독교에서 이적이 나타나는 일에 대하여 구체적인 설명을 듣고자 합니다. 

4. 신앙 발전에 대하여 구체적인 설명을 듣고자 합니다 

5. 마귀 근본과 종말에 대하여 구체적인 설명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

6. 기도 응답 받는 일에 대하여 구체적인 설명을 듣고자 합니다

 

특    집

1. 할 일 많은 세상에 일꾼 없는 탄식

2. 사랑 떠난 교회를 위한 눈물의 기도

 

설 교 편

기도 생활에 있어야 될 원칙

- 마 7:1~14 -

 

  기도 생활에는 원칙을 떠날 때에 그 기도는 아무런 열매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기도는 진리의 하나님께 상달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기도를 받으시기를 원하시고 더 좋은 것을 주고 싶은 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심정이기 때문이다.  

  이제 기도 생활에 없어서는 안될 3가지 원칙을 본문을 통하여 말한다.

 

  1. 마음의 원칙 (1~6)

  마음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교통하는 문이요, 제단의 위치라고 본다. 기도의 사람이 마음에 죄가 있다면 도저히 하나님과 교통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마음속에 있는 들보를 먼저 빼라고 했던 것이다. 어떤 사람이 자기 죄를 숨기고 남의 잘못을 판단한다면 이 사람은 하나님과 상대가 될 수가 없을 것이로되, 먼저 자기의 마음 가운데 숨은 죄를 회개하면서 형제를 대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상대 할 수 있는 마음의 위치를 가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기도의 사람의 마음은 항상 자기 마음속에 숨어있는 들보와 같은 정욕을 버리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만을 바라보는 마음의 터가 확정되어야 되는 것이다. 금일에 많은 사람이 기도를 하지만 기도의 열매가 나타난 일이 적은 것은 그 마음과 하나님과에 가까이 부딪쳐지는 위치에 있지 못한 원인이라고 보게 된다. 항상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되 하나님께 은밀히 보시는 마음에 숨은 죄를 항상 통회하는 애통이 있는 마음에 여호와의 신은 응답의 역사를 내리시는 것이다.

 

  2. 생활의 원칙 (7~12)

  기도는 실천의 생활이 있어야 한다. 아무리 중심에 원함이 있다 하여도 실천이 없는 생활이라면 기도는 응답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구하라 문을 두드리라 찾으라 하는 말씀을 하셨다. 그러면 두드리고 찾는 목적이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고 남을 대접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움직이는 활동이 있어야 된다. 예를 든다면 나무 가지가 진액을 받아서 열매를 맺는 것은 사람을 대접하는 열매가 되듯이 우리가 기도하는 목적은 하나님이 사람을 살리고자 하는 일에 완전한 열매를 구해야만 될 것이다.

  어떤 종이 기도 할 때에 자기의 만족이나 영광을 목적했다면 그 사람에게는 있던 것도 다 빼앗기게 될 것이로되 마음에 어떠하든지 형제를 살리는 열매를 구하는 종이라면 생각 밖에 더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란 것이다.

  하나님께서 언제든지 택한 자에게 무엇을 주실 적에는 직접으로 주시는 것이 아니고 모든 종들을 통하여 주시는 것이니, 과거에 선지들이 기도하다가 묵시의 글을 쓰게 된 것은 억울한 사람에게 압박을 받고 배척을 받는 자리에서, 그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에 뜻밖에 홀연히 묵시의 글이 나타나서 그 글을 기록하게 된 것이니, 이글로 말미암아 많은 생명이 참된 진리를 찾게 되었고, 새 시대의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것을 생각할 때에, 남을 대접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종에게 묵시를 보여 주기도 하시고, 또한 그 말씀대로 역사하는 종들이 신약 시대에 예수님을 비롯하여 사도들을 통하여 모든 성도가 하나같이 그들이 기록한 진리를 받으므로 하나같이 큰 구원의 축복을 받고, 하나같이 새로운 시대에 왕권의 축복을 누릴 수 있는 왕국 반열이 이루어질 것은 어떤 사람이 감히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큰 축복이라고 보게 된다.

  그러므로 본문에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했던 것이다.

 

  3. 노선의 원칙 (13~14)

  우리의 신앙 노선에는 언제나 넓은 길과 좁은 길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넓은 길이라는 것은 세속화된 노선이요 좁은 길은 성별된 생활에서 순교적인 노선이라고 보게 된다. 그러므로 세속화된 노선은 다수가 가는 것이요.

  순교적인 노선에는 언제나 적은 수가 가는 것이니 주님께서 너희가 내 제자가 되려면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라고 했고 부모나 형제나 처자를 나보다 더 사랑해도 내게 합당치 않다는 것은 좁은 길을 뜻한 것이다.  

  언제나 많은 사람이 기도하지만 기도의 응답을 받고 승리의 생활을 하는 자는 구약 때나 신약 때나 심히 소수의 사람이라는 것이 증명된다. 그러므로 좁은 길, 좁은 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알아야 한다.

  첫째 : 양심에서부터 신앙 지침에 획선이 바로 서야 한다. 예를 든다면 태평양 바다를 건너가는 큰 기선은 지남침의 획선에 따라서 방향을 바로 움직여야 할 것이다. 우리는 물결치는 파도가 많은 세상에서 좁은 문, 좁은 길 같은 그 획선을 양심에서 바로 가져야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없는 신앙이라면 파선된 배와 같다(딤전1:19~20). 하나님은 위대한 신이시요 가장 세밀한 신이시니 양심 속에 조그마한 티와 같은 것이라도 잘못된 획선을 가진다면 하나님은 응답의 역사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 싸우는 생활에서 가장 날카로운 말씀을 써야 한다. 만일 어떤 종이 말씀에 날카로운 칼이 없이 하나님 말씀을 아무렇게나 제 마음대로 이리 저리 갔다 붙여 이용하는 사람이 된다면 그 사람은 밝은 진리 획선을 잡지 못한 자로서 자기도 죽고 대중을 죽이게 될 것이다.

  셋째 : 분별력이 강해서 영적으로 멀리 내다보는 획선이 있어야 한다. 영계라는 것은 반드시 그 획선을 바로 찾지 못하면 얼마든지 혼란한 영계가 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요일4:1에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그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고 했던 것이다.

  우리 영계 분별이라는 것은 먼저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잉태된 그 역사에서부터 금일에 우리에게 역사하는 그 영계의 획선이 있는 것이니 언제나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하여 역사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마리아 몸에 잉태될 때부터 재림의 주를 맞이할 때까지 진리가 조금도 하나님의 말씀에서 혼선되지 않도록 역사하는 진리의 영이시다. 그러므로 영계를 분별할 때에 말씀의 획선을 바로 찾는 지식에서 성령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역사를 바로 분별해서 나갈 수 있다.

 

  결    론

  하나님은 기도의 사람을 통하여 당신의 할 일을 알게도 하시고 행하게도 하신다. 그러므로 기도의 사람은 양심의 원칙, 생활의 원칙, 노선의 원칙을 바로 찾아야 열매있는 생활이 있게 될 것이다.

 

 

흑암이 깊음 위에 빛이 있음

- 창 1:1~5 -

 

  하나님은 빛의 자체가 되시며 빛의 역사를 하시는 능력의 신이시며 능력을 통하여 창조의 열매로써 당신의 사랑의 본위를 나타내서 영광을 받으시기도 하시고 영광을 누리게 하시는 신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상에 모든 활동하는 물체가 그 자체에 어떤 힘이나 빛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근본은 혼돈, 공허, 흑암에 있던 것인데 빛의 자체가 되시는 하나님의 빛의 역사가 물체에 부딪쳐 역사 하므로써 물체는 움직일 수 있는 힘을 받게 되고, 모든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생명을 받게 된 것이다.

  이제 혼돈, 공허, 흑암 위에 빛이 있으라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전 세계 인류를 이루는 시발점의 하나가 된다고 보는데는 다음과 같은 의의가 있다.

 

  1. 빛이 있으라 한 의의

  하나님은 빛의 자체이신데 영원부터 스스로 계신 신이시다. 그러나 영원부터 빛으로 홀로 계셔서 영원히 홀로 있다는 것은 빛의 가치를 발휘할 수 없고 아무런 효과 없는 빛이 될 것이로되 물체에 “빛이 있으라” 하는 그때부터 하나님은 기뻐하실 일이 시작되었다. 예를 든다면 아무리 부족함이 없는 인격이 있는 사람이라도 자기 홀로 있다는 것으로는 인격의 가치를 발휘할 수가 없다. 빛이 있으면 어두움을 찾아가야 할 것이고 힘이 있다면 약한 자를 찾아가야 그 가치를 발휘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 자체가 아무리 생명의 빛의 자체라 하더라도 생명 없는 물체에 들어와서 역사하는 일이 없다면 아무런 열매를 나타낼 수가 없을 것이므로 하나님은 영원한 빛의 나라를 이루기 위하여는 먼저 물체에서부터 역사해서 천지를 창조하므로 영원한 천국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는 흑암 위에 빛이 있으라 할 때부터가 천국 건설 운동에 개업을 하는 시발점의 선언이 되었다.

  지금 유물론자는 신의 존재를 부인하고 물체 자체가 점점 진화하는 변동의 힘이 있어서 이것으로써 이 세계가 이루어졌다고 본다는 것은 영적 흑암의 마귀의 미혹이라고 본다. 물체 자체의 힘이 천지만물과 일월성신이 이렇게도 조직적으로 이루어지되 인간 생활에 필요한 것은 빠짐이 없이 있게 되었다고 본다면 이 이론은 허무맹랑한 이론이 된다. 왜냐하면 사람의 가치라는 것은 어디 있느냐 하는 것조차 모르는 이론이다.

  오늘이라도 내 몸에 생명의 빛이 떠나면 내 몸 자체가 즉시 혼돈, 공허, 흑암에 들어가고 말 것이다. 인생이라는 것은 육체의 몸을 흙에서 받았고 생명의 활동을 할 수 있는 영과 혼은 하나님 본체에서 왔다는 것은 틀림이 없다. 왜냐 할 때에 하나님이 창조한 만물을 바로 사용할 수 있는 기능이 있고 또는 종교적인 신앙에서 창조주 신과 교통할 수 있는 생활을 체험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빛이 있으라” 할 때에 그 목적은 물체에서 사람을 창조하여 그 사람으로 창조주의 영광을 누리게 하기 위한 목적에서 시작했다고 보게 된다.

 

  2. 빛이 있으라 한 기능

  하나님은 당신의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생명의 빛이 물체로 들어와야만 할 것은 이 물체라는 것은 하나님의 기능이 없이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무소불능의 역사가 물체를 찾아 왔던 것이다.

  예를 든다면 산 속에 있는 광물이 사람을 찾아 올 수 없고 사람이 광물을 찾아가 그것을 바로 사용할 때에 그 광물은 효과를 발휘하므로 사람의 생활에 필수품이 되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빛의 활동이 흑암을 찾아오므로 물체에서 여호와의 능력이 말씀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본다. 물체가 움직여지는 그때부터 창조적인 활동이 물체에 들어오므로 아름다운 우주의 세계를 이루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생명의 빛의 자체인 동시에 그 빛이 먼저 물체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면 아무런 것도 없는 혼돈, 공허, 흑암의 세계만이 있었을 것이다. 기능적인 활동에 빛이 있으라 할 때부터 지금까지 끊어지지 않고 있으므로써 역사적인 조류가 흘러온 것이다. 그 기능은 영원히 우리 사람을 위하여 활동해 주므로써 세세 영광이라는 것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3. 빛이 있으라 한 사랑

  사랑이라는 것은 완전한 삼위에게 있는 것이니 그 사랑은 빛이 있으라 할 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아무리 무소불능의 생명의 빛이 되시는 신이시지만 당신의 가진 것을 주고 싶은데서 말씀으로 움직이는 기능을 통하여 사랑의 자체가 되는 신의 소원을 이룬 것이 창조의 역사이므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이 따라 오게 된 것이다.

  사랑이라는 것은 주기를 좋아하는 것이 본질이니 완전한 신께서 그 완전한 것을 누구에게 주어야만 그 신의 마음은 기쁨이 되겠으므로 빛이 있으라 할 때부터 지금까지 어두움을 찾아오시면서 역사하는 사랑의 신이시다.

 

  결    론

  물체가 흑암에 잠겨 있을 때에 빛이 있으라 한 것으로 창조의 일을 하여 물체가 열매를 맺게 하시었고, 피조물된 인생이 타락하므로 흑암에 떨어질 적에 생명의 빛이 되시는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서 빛이 있게 했고(요1:4~5), 또는 온 세계가 극도로 부패하여 흑암으로 들어가는 환란기에 빛의 말씀을 동방에 나타내어 그 말씀으로써 새 시대를 이루는 것이니(사60:1~3) 이와 같이 어두움이 깊음 위에 빛이 있게 하는 역사가 세 번 있으므로써 하나님의 목적을 달성하게 되는 것이다.

 

 

하늘과 땅의 의의

- 창 1:6~13 -

 

  우리 인생은 하늘과 땅의 의의를 바로 아는 데서부터 참된 지식을 소유할 수 있다. 동방에 소위 문학이라는 것은 천지는 작부모 라는 문귀가 있다. 이것은 하늘은 아버지요 땅은 어미라는 말이니 이것이 문학의 근본이라면 이 문학으로는 옳은 발전을 볼 수 없을 것이다. 소위 역사라는 근본을 천황씨, 지황씨, 인황씨라는 것으로 역사의 근본을 삼았다는 것은 그 근본조차 바로 찾지 못한 역사이다. 완전한 문학을 가져오는 하늘과 땅의 의의를 아는 데서부터 바로 알아야 할 것이다.

 

  1. 하늘의 의의 (6~8)

  하늘이라는 것은 궁창을 뜻한 것인데 궁창은 창조할 때 물을 갈라서 놓기 위하여 창조한 것이다. 창세 전에는 전부 물 위에 하나님의 신이 운행한 것뿐이고 이 물체라는 것은 전부가 많은 물 속에 잠겨 물만이 가득한 것 뿐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궁창을 만들어 물을 몰아내어 궁창 위로 나가게하고 궁창 아래에 물이 없는 세계를 이루어 놓은 것이다.

  예를 든다면 큰 그릇을 물 속에 넣으면 그릇 안에는 물이 없는 세계가 있듯이 궁창 안에 들어온 별 세계는 궁창이 물을 막아주므로 물이 없는 공간을 보존하고 있다. 이렇게 한 것은 궁창 안에 우주 세계를 두어 여기에서 역사를 시작하여 궁창 밖에 천국의 세계로 사람을 인도하여 영원한 왕국을 이루기 위한 목적이니 궁창은 천국과 지옥 세계와 인간과의 어간에 있는 한계를 막고 있는 궁창이다.

  그런데 이 하늘을 아버지라고 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며 또는 궁창 안에 사는 사람이 궁창 밖의 일을 모르고 소위 유물론 공산당이란 사람들이 하는 소리가 인공 위성을 타고 지구를 돌면서 망원경을 쓰고 아무리 살펴보아도 천국을 보지 못했다는 망령된 소리를 하고 있다.

  하나님이 인간을 볼 때에는 예를 든다면 세계 인류가 사는 큰 그릇 안에 벌레들이 오물거리듯이 살고 있다는 것을 하나님은 말씀했다(사40:15, 22). 다시 말한다면 큰 천막을 치고 그 속에 공장을 시설한 것과 같다. 세계 인류가 사는 생활은 하나님이 볼 때에 한 공장으로 보는 것 같이 되어 있다. 사람이 만든 공장은 고장이 나도 하나님이 만든 우주 공장은 쉬지 않고 돌고 있는 것이다.

  우리 인생은 하늘의 의의를 바로 알므로 천국을 바로 알 수 있고 인간을 바로 알 수 있다. 인간 우주 공장에서 모든 활동하는 것은 천국을 위한 건설이라고 본다. 이곳에서 인격을 바로 이루는 자라면 천국에 가서 큰 자가 되는 것이 공장 안에서 바로 만들어진 기계가 공장 밖에 나가 가치가 있듯이 우주 공장 안에서 바로 이루어진 인격이 궁창 밖의 세계에 나가서 영원히 가치가 있는 인격으로 왕권을 누리게 된다(계21:1~2, 22:1~5).

 

  2. 땅의 의의 (9~13)

  궁창을 지어서 궁창 아래에 물이 없는 공간을 내시고 적게 남은 물을 한 곳으로 모아 바다가 되게 하고 흙을 한 곳으로 모아 지구성을 이루어서 지구에서 자동적으로 열매있는 각종 식물을 내게 한 것은 그 열매로 말미암아 천국을 이루는 활동에 필수품이 되게 했다. 만일 금일에 지구에서 맺어주는 열매가 없다면 궁창 밖에 아무런 것도 이룰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고 한 것은 이 땅에서 사는 생활에 먹고 입고 사는 생활을 염려하지 말고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 모든 것을 천부께서 더하여 주신다는 것은 궁창 밖에 나라를 위하여 바로 일하는 자에게 땅에서 열매를 많이 맺게 축복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 위에서 날마다 그날 그날의 수고를 영광으로 알고 일해 나가는 것이 가장 족한 생활이라고 말씀했다(마6:33~34).

  하나님께서 우주 안에 모든 별 세계가 움직이는 것은 지구 위에서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하여 활동하고 있는 징조, 사시, 일자, 연한으로 규정되어 움직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구를 싸고 생명을 주는 공기는 움직이고 있고 그 공기 안에서 사람에게 활동할 수 있는 작용을 하고 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들의 백합화도 하나님이 입히시고 공중의 나는 새도 하나님이 먹이신다고 말씀한 것이다.

  천하에 제일 큰 일은 천국으로 사람을 인도하기 위하여 전도하는 일이라고 부탁하면서 주님은 승천하셨다(행1:8~9). 올라가신 주께서 지금 이 땅에 사는 사람이 천국 건설 운동을 하게 하기 위하여 성신의 역사를 부어 주시되 20세기에 도달하도록 계속으로 역사하시는 것이다.

  오늘에 과학이 극도로 발전하게 한 것은 지상에 완전한 새 시대를 이루기 위한 모략적인 방법이니 지구에서 되어지는 모든 열매는 천국을 위한 활동 기간이 되는 것 뿐이다. 아무리 유물론 사상이 과학 발전을 하나님 같이 알고 있다 하여도 필경은 하나님 모략 안에서 이용을 당하는 것 뿐이다.  악자의 활동이나 의인의 활동이나 다 천국을 위한 활동이 되고 만다.

 

  결    론

  인생이라는 것은 하늘과 땅의 의의를 바로 알고 움직일 때에 그야말로 복된 생활이요, 이것을 모르고 산다면 그야말로 가련한 생활이다. 오히려 동물은 하늘과 땅의 의의를 따라서 움직이고 있지만 사람이 바로 살지 못하므로 동물보다도 더 화가 크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만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 뿐이니 심판이 하등 관계가 없고 사람은 하나님을 위하여 있는 사람이니 하나님의 심판이 해당되는 것이다.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할 일

- 사 40:9~11 -

 

  아름다운 소식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죽음을 맛보지 않고 새 시대에 들어가는 비밀의 진리를 말한다. 이날까지 기독교에서 전한 비밀은 누구든지 십자가의 보혈을 믿으므로 죄를 사한다는 비밀이다.

  나사렛 동네에서 목수 일을 하던 예수 한 분이 죽으므로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죄가 사하여지고 민족적 국경의 차별이 없이 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시민권을 받는다는 비밀도 인간의 지혜로써는 알 자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이 사40:1~5까지의 예언이 자기에게 응하였다고 하면서 외치는 증거를 오히려 유대인들은 반대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나사렛 목수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라고 증거하기 때문이었다(요1:19~34). 이제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시온이 되고 예루살렘이 된 교회에 아름다운 소식을 전할 때는 어느 때냐 하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이다.

 

  1. 강한 자로 임하실 때다 (9~10상반절)

  하나님께서 어린 양 예수의 보혈을 통하여 죄인을 부를 때는 잠잠히 계셨고 모든 종들을 들어 쓸 때 아무리 핍박이 있고 심지어 하나님의 종들을 죽이는 일이 있다고 해도 때가 올 때까지 잠잠히 계신 것은 다음과 같은 의의가 있다.

  첫째 : 아들을 보내서 죽기까지 순종케 한 하나님의 사랑이 세계에 알려지는 때이니 만큼 하나님께서 어린양의 피를 보시고 모든 죄인을 부르시는 역사이므로 아들을 보내서 털 깎는 자 앞의 소리 없는 양 같이 아무런 입을 열지 않고 죄인들에게 악행을 받으면서도 오히려 그 무리를 위하여 이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요 하는 기도로 죄인을 용서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둘째 : 무조건 용서해 주라는 해방 운동이니 이 해방이라는 것은 그리스도 한 분이 죽기까지 순종했으므로 이루어지는 해방이다. 이 해방은 단체적인 해방이 아니고 개인 개인의 영혼이 해방을 받는 역사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이방 세력이 억압을 하고 압박을 해도 그 사람의 영혼을 죄에서 해방을 주면 아버지의 뜻은 다 이룬 것이었다.

  그러나 아름다운 소식이라는 것은 개인적인 영적 해방이 아니고 시온의 자녀를 압박하고 죽이고 쫓아내던 그 세력을 모두 지상에서 없애버리는 역사를 하러 오시는 주님은 강한 자로 임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것이 어째서 아름다운 소식이 되느냐면 시온을 통하여 아름다운 세상을 이루기 위한 목적이기 때문이다.

  이날까지는 영혼 구원을 목적한 운동이므로 악한 세상이 악한 자의 정권 아래에서 아름답지 못한 더럽고도 누추한 사회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강한 자로 오시는 주님은 아름답지 못한 정치나 종교나 또는 어떠한 단체든지 침략의 정신을 가지고 남을 해코자 하는 마음에서 자기의 복리를 도모하는 자나 또는 하나님의 말씀에 응한 아름다운 시대를 목적하지 않고 현실주의로 흐르는 사람들을 다 없애 버리고 가장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므로 만이 아름다운 시대가 온다는 것을 정확히 가르친 것이 여호와의 말씀인 선지서란 것이다.

 

  2. 친히 그 팔로 다스리는 일이다 (10중반절)

  이날까지는 이 세상을 악한 자에게 맡겨서 다스리게 했으므로 의인이 악인에게 억압을 당하고, 진리가 비 진리에게 피해를 당하고, 거룩한 단체가 속화된 단체에게 축출을 받고, 거짓된 사람들이 정직한 사람을 모함해서 죽이는 일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주께서 친히 팔로 다스릴 때는 의로운 자가 불의한 자를, 정직한 자가 거짓된 자를, 거룩한 단체가 속화된 단체를, 진리의 역사가 이단적인 세력을 완전히 없애버리고 시온이라도 하나님과 의합된 시온 만이 남아서 아름다운 시대를 이루는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은 각 사람의 인격이 아름다워지는 것을 목적하고 잠잠히 역사하지만 친히 팔로 다스릴 때는 잠잠히 개인에게 역사해서 아름답게 할 때에 아름다워진 자라야 아름다운 시대의 왕권을 받고 시민권을 받게 되는 것인데 하나님의 종이라도 아름다워진 자라야 남은 자가 되고 하나님의 자녀 중에서도 아름다워진 자가 새 시대에 들어가는 것을 아름다운 소식이라는 것이다.

 

  3. 상급과 보응이 있음 (10하반절)

  이날까지의 거룩하고 지혜롭고 정직하고 사랑의 심정을 가진 자들이 억울하게 순교의 피를 흘리게 한 것은 상급을 주기 위한 목적이요 아무리 악한 자라도 권세를 그냥 주어서 역사하게 한 것은 원수를 갚아주기 위한 하나님의 모략적인 방법이다.

  왜냐하면 악한 자가 강하게 일어나도 정직하게 나가고 담대히 진리를 위하여 싸우는 자가 왕권을 받게 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그러므로 악한 자들은 자기네가 영원히 주권을 쥐고 지상을 지배할 것 같았으나 보응의 날에는 악하고 강한 세력은 모두 없이하고 아무리 미약해도 아름다운 소식의 말씀을 겸손히 받는 자만 말씀에 의하여 보호하고 그 밖의 세력은 다 없애는 것을 하나님의 종말의 역사라는 것이다.

 

  4. 택한 자를 안아주고 인도하는 일 (11)

  지금은 하나님께서 택한 자를 악자에게 억울함을 당하고 멸시를 받기를 애굽이 이스라엘을 압박할 때에 잠잠히 있듯이 때가 찰 때까지는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안아주고 인도해주는 일이 없는 것 같이 쓴잔을 맛보게 하고 고통 중에 부르짖어도 큰 역사를 하지 않고 있는 것은 과연 안아주고 인도할 수 있는 사람을 찾기 위한 목적이다.  

  이날까지의 인도라는 것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모르고 죄를 범하는 사람을 회개하고 돌아오라는 인도이지만 여기에 인도라는 것은 모든 사람이 다 재앙을 받고 환란 중에 쓰러져 죽는 날이라도 당신의 시온은 안아주고 인도하는 것은 환란과 재앙을 받지 않고 아름답게 보호하고 아름답게 인도해서 아름다운 소식의 요지를 간단히 말한 것이요, 40:30이하와 이사야 전체는 아름다운 소식을 구체적으로 말씀한 것이니 동방 역사가 이사야 41장 같이 일어나서 새로운 시대가 오는 것을 아름다운 소식이라는 것이다.

 

  결    론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가 높은 산에 올라간다는 것은 성산을 가르친 것이니 이 성산이라는 것은 아름다운 소식의 말씀이 임한 산을 말한다. 사25:6에 이 산에서 만민을 위하여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맑은 포도주로 연회를 베푼다고 하였고, 7절에 이 산에서 모든 민족의 그 가리워진 면박과 열방의 그 덮인 휘장을 제하시며 라고 하였고, 10절에 여호와의 손이 이 산에 나타난다고 했으니 말세에 맑은 포도주와 같은 아름다운 소식이 나타난 산이라고 보게 된다.  

  앞으로 기독교는 개포도주를 먹고 취하는 자가 사28:7과 같이 있고 맑은 포도주를 먹고 심령 소성을 받은 자가 사55:1~3같이 있게 된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가 높은 산에 오른다는 것은 높은 산에 올라가 기도하므로써 완전히 이 소식을 전하게 된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사40:3에 광야라고 말씀한 그대로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외쳤다면 기독교 종말에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한 것도 실지에 높은 산으로 보아야 될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아름다운 소식이라는 월간지를 발행하는 이뢰자 목사는 새일수도원이 자리잡은 높은 산에 올라가서 굴속에 자리잡고 기도하다가 새힘을 받고, 입에 말씀을 받아서, 얼마든지 각종 서적이 그 입에서 말하는 대로 받아쓰면 성경을 보지 않고도 환하여지는 진리가 햇빛같이 나타나서 새일수도원의 학과인 성경해석법, 요한일서 강의, 선지서 강의, 계시록 강의, 인간론, 새일 성가집, 또는 말씀의 칼과 아름다운 소식의 월간지가 달마다 70페이지를 발간하여 금번 11월 호를 발행케 된다. 누구든지 이 책을 읽어보면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일의 대표자가 누구인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가 받는 새 힘

- 사 40:12~31 -

 

  인생의 최고의 가치는 조물주 여호와를 바라보고 새 힘을 받는데 있다는 것을 본문에 말씀했다. 하나님은 완전한 사람을 찾으시는 하나님이 아니요, 겸손한 마음으로 당신을 바라보는 사람에게 당신이 쓸만한 사람이 되도록 새 힘을 주는데는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의 위대성을 알아야 한다 (12~26)

  사람이라는 것은 하나님은 얼마나 위대하다는 것을 아는 지식을 가져야 한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자기에게 표준하여 생각한다는 것은 뚝배기가 토기장이를 자기와 같다고 하는 것이니 우리 사람으로서 완전한 인격을 소유하려면 조물주 하나님의 위대성을 바로 알아듣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어린아이가  완전한 장부가 되기 전에 자기를 기르는 부모나 가르치는 선생의 그 인격을 바로 알 수 없고 또는 기술자가 기계를 제작한 사람의 그 기술을 알려면 그 기계의 내용을 아는 자라야 아는 것 같이 사람으로서 조물주 하나님의 위대성을 아는 것은 조물주 하나님의 광대한 섭리를 알 수 있는 지혜와 총명을 받은 자 밖에는 조물주의 위대성을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최고의 지식은 조물주 하나님의 위대성을 아는데서부터라야 바로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인간 두뇌로서 하나님을 알아보려는 것은 작은 조갑지로 바닷물을 되려는 것과 마찬가지요, 작은 저울로 산을 달아보려는 사람과 일반이요, 자기 뼘으로 하늘을 재어 보려는 사람과 일반이라고 보게 된다. 그러므로 사40:12이하를 보면 하나님의 위대성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이나 말로써 감히 말할 수 없고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신이시며, 무소불능의 신이시며, 진실 무위하시고 영원 존재하신 완전무결의 신이라는 것을 신앙하므로 만이 그의 완전성을 신앙할 수 있는 증거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2.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할 입장 (27)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볼 입장은 하나님만이 알고 사람은 모르는 사정을 당할 때, 하나님만이 책임지고 해결해 주어야 할 원통한 일을 당할 때 여기에서 자기가 방법을 취하여 보려고 하지도 말고 나의 사정을 나보다 더 아시는 하나님이여, 내가 사람에게 원통한 일을 당하였으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책임지고 해결해 줄 것을 믿는 신앙에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가장 사랑하는 종에게 이런 일을 당하도록 모략적인 방법으로 까불어 보는 것은 당신의 사람으로 더 완전한 영계로 올려놓기 위한 방법이다. 어느 종이든지 딱한 사정과 원통한 일을 당할 때 하나님께서 인정해 줄만큼 여호와를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3. 하나님의 완전한 형체가 사람에게 새 힘으로 온다 (28~29)

  하나님은 뼈와 살이 있는 실체를 가진 것보다도 영이신 동시에 얼마든지 사람을 완전케 할 힘을 가진 것이니 우리는 그 하나님을 보았다는 것보다도 또는 만진다는 것보다도 그 신의 완전한 새 힘이 오는 것을 받는 자로서 하나님의 완전성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아무리 무능한 지렁이 같은 몸이라도 하나님께로부터 새 힘이 오므로 만이 완전한 인격을 이루는 몸으로서 남은 종이 될 수 있다. 이 새 힘이라는 것은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변화 성도에게 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노의 날에 남은 종이 될 자에게는 여러 가지 시련을 주어서 시련 가운데 하나님을 바라보다가 새 힘을 받으므로 만이 완전한 역사를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4. 완전한 인격을 이루는 일 (30~31)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완전하게 창조한 것이 아니고 완전하게 될 수 있는 사람을 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가 중생을 받는다는 것은 영적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것을 말했고 은사를 받는다는 것은 그 영계가 발전해서 올라가는 것을 목적했고 새 힘을 받는다는 것은 그 몸이 완전해지는 것을 뜻한 것이다.

  중생도, 은사도, 새 힘도, 받은 자 밖에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 자가 없다. 그러므로 신앙 생활이라는 것은 사람의 정신 작용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적 활동 아래에서 영적으로 중생을 받고, 영적으로 은사를 받고, 영적으로 오는 영체를 받으므로 만이 종말에 변화성도의 인격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결    론

  하나님께서 새 힘을 주는 이유는 진노의 날에 역사할 수 있게 하기 위한 목적이니 은혜시대의 종으로서는 모든 육체가 풀같이 쓰러지는 때이므로 새 힘이라는 것을 무엇인지 체험할 수 없으나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는 대표적인 사람이 먼저 새 힘을 받으므로써 심판의 다림줄의 변론을 바로 증거하게 되고 바로 증거하게 되므로 만이 일반이 다 같이 새 힘을 받고 남은 종이 될 것을 이사야 41장에 가르친 것이다.

 

 

기독교 종말의 변론

- 사 41:1~7 -

 

  하나님께서 완전한 변론이 없이 완전한 역사를 일으킬 수 없는 것이니 완전 변론이 어디서부터 나온다는 것을 가르친 것이 본서에 기록되어 있다. 이날까지 기독교 역사라는 것은 성경대로 이루어진 일을 증거하는데는 온 세계 인류가 다 육체는 풀같이 쓰러지지만 그 영을 구원해 준다는 것을 목적한 것이다(벧전1:5~9). 모든 사도들은 말세에 나타난 영혼 구원을 목적하고 증거한 것이 기독교 중생의 도리라는 것이다. 이것은 누구든지 회개하고 주 예수를 믿으면 다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이다(눅24:44~49).

  그러므로 선지서의 변론은 목적이 하나님의 자녀인 이스라엘이요, 야곱이요, 시온이지만 어떠한 자가 되어야 재앙의 날에 남은 자가 되어서 지상에서 축복을 받는다는 것을 목적 두고 가르친 것이다. 어느 선지나 동일하게 영혼 구원을 목적 두고 묵시의 말씀을 받은 것이 아니요, 진노의 재앙이 오는 날에 남은 종, 남은 백성이 지상에 평화 왕국이 올 때에 축복 받을 것을 목적하고 말씀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말미암아 세계 통일의 나라가 올 것을 가르치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도리를 이날까지 전한 것은 온 세계 인류를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는 역사이기 때문이다(계5:9). 이제 기독교 종말의 변론에 대해서 본문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세계적인 변론 (1)

  하나님께서 이날까지 기독교가 세계에 확장하도록 하는 동시에 과학적인 발전을 가져와서 세계를 마음대로 왕래할 수 있는 자리에 이르게 한 것은 기독교 종말의 변론을 세계적으로 하기 위한 방법이라고 본다. 만일 기독교가 세계에 확장되지 않았다면 섬들아 내 앞에 잠잠하라. 민족들아 힘을 새롭게 하라 하는 말을 할 수가 없을 것이며, 만일 과학이 발전 안되어서 세계를 자유롭게 왕래하며 활동할 수가 없게 되었다면 기독교 종말의 변론자가 세계적인 역사를 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금일에 와서 세계 인류적인 큰 변론의 역사는 반드시 있어야 될 때가 왔다고 본다. 어느 선지나 묵시를 볼 때에 세계적인 인류가 다 들으라고 하는 말씀을 기록한 것이다. 사1:2, 24:1, 미1:2, 욜2:1, 옵1:1, 합2:2, 8, 습1:2~3, 슥12:3~4을 보면 전부가 세계적인 변론을 목적한 것이다. 이것은 세계 인류적인 심판과 세계 통일의 새로운 시대를 목적하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종말의 변론 앞에서는 세계 사람이 다 그 변론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게 되고 구원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이사야 40장은 세례 요한의 증거와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종말의 사명자를 구분하여 말씀하셨고 41장은 기독교 종말에 변론의 역사가 나오므로 새로운 시대가 이루어질 것을 목적하고 가르친 말씀이다.

 

  2. 동방에서 대표적인 사람을 일으킨다 (2)

  세계 인류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일을 하기 위하여 유대 광야에서부터 외치고 세계 인류를 다 통일시켜 새로운 시대를 이루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동방에서 일으키되 세계 통치권을 준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동방에서 일어나는 심판 변론의 역사로써 세계를 심판하고 구원하기 때문에 인간 죄악의 정권이 다 그 앞에서 굴복하는 일이 있게 될 것을 말했다. 하나님께서 이날까지는 세계 열왕을 다 기다리고 참으시면서 용납했지만, 심판의 변론이 동방에서 나올 때부터는 세상의 죄악의 정권을 다 없애버리는 때이므로, 자동적으로 동방 사람 앞에 굴복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사24:14이나 다 동일한 뜻이라고 보게 된다. 이 동방이라는 것은, 서 아시아를 뜻한 것이 아니고 동 아시아를 뜻한 것이다.

  왜냐하면 서 아시아에서 동방이라고 가르치되 사59:19에는 해 돋는 편이라고 했고, 41:25에는 해 돋는 곳이라고 했고, 단11:44에는 동북이라고 했고, 사24:16에는 땅 끝에서부터 노래한다고 했고, 사41:8에는 땅 끝에서부터 종을 붙든다고 했고, 42:10에는 땅 끝에서부터 노래한다고 했고, 43:6에는 내 딸들을 땅 끝에서부터 오게 하라고 했고, 사60장에는 열방의 재물이 동방으로 들어올 것을 가르쳤다. 이것을 보면 동방 땅 끝이 즉 대한 민국으로 보게 된다.

  왜냐하면 극동 아시아에 교회가 남아서 발전하는 것은 남한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땅에 하나님의 말씀이 새 힘 받은 종의 입술을 통하여 아름다운 소식이라는 월간지로 완전한 변론이 나오게 되는 것은 작은 일이라고 볼 수 없다.  

  지금 이 일이 작은 일 같으나 앞으로 세계 열방을 깨우칠 진리 운동이 되리라는 것은 너무나 똑똑한 사실이다. 기독교 역사상 많은 신학자의 변론이 있지만 그것은 바울 서신에 의하여 부분적인 변론을 말한 것 뿐이다. 이제 기독교가 새로운 종말의 변론이 나오지 않으면 안될 때가 되었기 때문에 사40:9과 같이 높은 산에 올라가서 새 힘을 받되 30절과 같이 이루어지는 역사를 현저히 받고 있다.

  이 뢰자 목사가 매일 10시간씩 강의하고 남은 시간은 월간지를 쓰게 하고 밤마다 밤을 새워 기도하고 음식은 아무런 영양이 있는 것은 먹지 않고 단지 채소와 한 홉에 불과한 음식으로 하루를 지내면서 사자같이 외친다는 것은 기독교 역사상 없었던 새 힘이라고 보며 얼마든지 기독교 종말의 변론을 입으로 불러서 책자를 쓰고 있는 것도 새로운 역사라고 아니할 수 없다.

  누구든지 이 변론을 듣지도 않고, 그 책자를 읽어보지도 않고 함부로 이단이라고 판단한다는 것은 멸망 받을 일이라고 본다. 누구든지 가까이 나아와 서로 변론해 보자. 누가 동방에서 사람을 일으켰느냐 하는 것은 오늘의 이 역사라고 본다. 지금 이 뢰자 목사의 입에 완전한 변론이 임한 증거는 현재의 서책으로 증명된다. 언제나 대중 앞에서 강단에서 입으로 불러 변론의 서책을 내고 있다. 이 목사는 세상 학적으로 학교에 다닌 일도 없고 고려 신학에 2년밖에는 거친 일이 없다.

  순수한 노동자요, 농민이요, 아버지를 잃은 유복자로 세상에 나서 서글픈 곡산이란 대각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동네에서 자라난 사람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피난민의 한 사람으로 지나는 부산 영도 빈민굴에서 남루한 옷을 입고 빈민을 봉사하던 사람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해서, 그 종을 통하여 어느 종이나 다 만족한 수도를 받게 된 것은 하나님이 일으킨 일이 아닐 수 없다. 누구든지 경솔히 생각지 말고 그 입에서 나타난 아름다운 소식을 자세히 읽어 보라.

 

  3. 자유로운 권세를 준다 (3~4)

  동방에서 일으킨 사람은 어느 곳에나 원수의 나라라도 마음대로 들어가서 복음을 전할 수 있고 그 종 앞에는 누구나 다 떨 수밖에 없는 일이 온다는 것이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진노의 날에 원수를 무찌르고 나가서 원수의 손에 사로잡힌 양떼를 해방시키는 역사를 하기 위한 것이다.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던 이스라엘을 고레스를 통하여 해방을 주듯이 앞으로 동방의 역사가 일어나므로 바벨론은 완전히 망하게 되고, 새로운 시대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원수를 갚는 심판의 다림줄의 변론을 받은 종이니 만큼, 그 말씀대로 권세있게 들어 쓰기 때문에 모든 인간 세력이 그 앞에서 굴복을 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알 것은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멸시받고 천대를 받고, 무시를 당하던 사람에게 묵시를 보여준 것은 종말에 동방 땅 끝 가련하고 빈핍한 백성 중에서, 하나님의 사람을 일으켜 원수를 승리하게 하므로 새로운 시대를 가르친 것이다. 아무리 우상적인 세력이 합심 단결해서 일어난다 하여도 동방 역사는 반드시 원수를 이기고 새 시대를 이룰 것을 가르쳤다(6~7).

 

  결    론

  하나님께서 마지막의 변론을 할 사람을 동방에서 일으키는 것은 하나님은 셈의 하나님이니 묵시를 보여 줄 적에도 셈의 장막에 보여 주었고 그 묵시의 말씀을 완전히 세계적인 심판의 변론으로 말해서 열왕이 굴복케 하는 것도 셈의 장막에서 나오되 동방 땅 끝이라고 가르친 것이다.

 

 

땅 끝에서 붙든 종의 승리

- 사 41:8~13 -

 

  땅 끝이라는 것은 언제나 우리 나라를 뜻했다고 보아야 된다. 주님께서 승천하실 적에 너희는 권능을 받아 가지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고 하시었다. 그런데 성신의 역사가 임하여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는 바울에게 하나님은 마게도니아로 건너가도록 지시하여 빌립보 교회를 비롯하여 로마에까지 복음을 전하고 로마의 네로 황제의 박해로 모든 사도는 다 순교를 당하고 남은 자는 사도 요한이었다.

  요한은 기독교 종말의 변론을 계시로 받아쓸 적에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을 들고 동방 땅 끝인 해 돋는 편에서 나오는 것을 계시로 보고 기록할 때에 이스라엘 중에 종된 자가 14만4천이 인을 맞는 광경을 보고 기록한 것이다. 그러면 오늘 이 본문에 나의 종 이스라엘아 나의 택한 야곱아 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라고 한 것을 보면 이것은 육적 이스라엘이 아니요 기독교 종말에 승리의 이스라엘이 될 종들을 가르쳤다고 본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계시록까지의 성경 전서가 되어 그 책이 외국어로 번역될 때에 서양의 문명을 따라서 되되 루터 종교 개혁을 중심하여 번역이 되어 어느 누구나 성경을 마음대로 읽을 수 있는 해방 운동이 일어나서 이 말씀을 비롯하여 모든 민족들은 새로운 문명을 가져오게 된 것은 아시아가 아니요 유럽의 지중해를 비롯하여 대서양 바다 해변으로 발전되어 세계적인 문명을 자랑할 수 있는 발전을 보게 되었다. 과학의 발전은 기독교인을 통하여 가져 왔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아시아보다도 유럽의 과학 발전은 세계를 정복할 강대국을 이루었던 것이다. 아메리카 대륙을 얻은 자도 기독교인이고, 그 땅의 이상적인 민주 국가를 개척한 자도 기독교인들이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이 서아시아에서 서쪽으로 발전되어 아메리카에 합중국이라는 나라를 이루어 그곳에서 극동의 복음을 전하는데 큰 승리를 이루게 된 것이니 동양 삼국에 일본도 2~3백년의 역사를 가지게 되었고 중국도 3~4백년의 역사를 가지게 되었지만 우리 나라는 기독교 역사가 80년에 이르는 금일에 세계적으로 으뜸이 될만한 교회 확장을 가져 온 것은 동방 땅 끝의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가져야 될 일이라고 본다.

  만일 어떤 종이 이스라엘을 팔레스틴의 유대족으로 본다는 것은 기독교인으로서 십자가를 무시하는 망령된 말이니 동방 땅 끝의 이스라엘을 우리 나라로 보는 것이 합법적인 진리라고 본다. 이제 동방 땅 끝에서 붙든 종의 승리를 본문을 통하여 말한다.

 

  1. 싫어버리지 아니하심 (8~9)

  이 붙들었다는 뜻은 죄인을 불렀다는 뜻과는 다르다. 부르심을 받은 자는 버림을 당할 수도 있다(사65:1~5). 그러나 붙들었다는 것은 시련 가운데서 인정하고 완전히 쓰려고 붙들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종된 자로서 특별히 뽑아 낸 자라고 보게 된다. 죄인을 부르는 은혜 시기가 아니고 동방 땅 끝의 종을 붙들어 쓸 때는 진노의 날에 원수를 갚는 역사를 하기 위하여 붙들었기 때문에 다시는 버림을 당하지 않는 완전 역사를 하게 될 것을 뜻했다.

  십자가의 도는 중생 받은 자가 즉시에 전하는 것이요, 기독교 종말에 승리의 역사라는 것은 은혜시대의 종 중에서 붙들어 완전한 무장을 주어 쓰는 것을 뜻했다. 아무리 원수 세력이 강하다 하여도 이 종을 해칠 자는 없다는 것이다. 동방 땅 끝에 붙든 종은 사40:9과, 27절과에 연결되는 말씀이다. 가장 원통하고도 딱한 사정을 만난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붙들어 쓰는 종이다.

 

  2. 참으로 도와주시므로 (10)

  아무리 두려운 일이 오고 놀랄 일이 동방 땅 끝에 온다 해도 하나님은 그 종을 굳세게 들어 쓰시는 동시에 도와주신다는 것이다. 가장 두렵고 놀랄 일이 앞으로 동방 땅 끝 종에게 올 것을 가르쳤다. 하나님은 언제나 큰 역사를 일으킬 때에 인간으로서 두려워하고 놀랄 수밖에 없는 일을 만나게 하고 거기서 하나님만 바라보는 사람이라면 초인간적인 역사를 하시는 것이다.  

  모세를 들어 쓸 때도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해서 이스라엘이 두렵고 놀라게 만들었고, 엘리야를 들어 쓸 때도, 아합의 마음을 강퍅케 하고 이세벨을 들어서 종들을 해치게 만들면서 엘리야를 들어 역사했던 것이다. 지금 우리 대한민국은 산 같이 강한 원수가 아시아를 다 집어먹고 작은 반도의 남쪽 땅 끝에 자리잡은 우리로서 반공 투쟁의 일선에 섰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월남이나 일본 같은 나라는 용공주의 사상이 대대적으로 활동을 하고 미군은 후퇴 작전을 하고 날마다 경제 혼란이 극심한 이 땅에 인심 악화를 수습할 길이 없고, 경제 혼란에 쓰러지는 이 민족을 구출할 길은 막연하다고 볼 수밖에 없는 이 때에, 아무리 하나님이 보호 하사 우리 나라 만세 라는 애국가를 부르면서도 실지는 하나님의 보호를 받을 일을 하는 정부가 되며  민족이 되었느냐에 대하여 두렵게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오늘에 동방 땅끝, 이 나라에 있는 하나님의 종들이 두렵고 떠는 심정으로 밤을 새워 기도하여야만 될 것이니 이러한 자에게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 하는 음성이 하나님께로 오게 될 것이고 내가 너를 도우리라 하는 음성이 오는 동시에 완전 승리의 역사가 오게 될 것이다.

 

  3. 대적을 멸망시킴 (11~13)

  말세에 하나님이 붙들어 쓰는 종은 대적을 멸망케 하기 위한 목적에서 들어 쓰는 것이니 모세를 들어 애굽을 치듯이, 엘리야를 들어서 바알 선지를 치듯이, 기드온을 들어서 미디안을 치듯이, 하나님께서 기독교 종말에 완전 승리의 역사를 하기 위하여 들어 쓰는 종이니, 그 종을 대적하는 자는 전부 멸망을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날까지는 수많은 순교자가 피를 흘려서 쓰러지는 자리에서도 원수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 뿐이었으나  동방 땅 끝의 종으로 붙들어 쓸 때는 용서없이 멸망시킬 마지막 심판의 변론을 가지고 나오기 때문이다.

 

  결    론

   하나님께서 동방 땅 끝에 종을 붙드는 때는 부활성도의 역사가 아니고 변화성도의 역사라는 것을 가르친 것이다. 부활성도는 은혜 시대 역사라면 변화성도는 진노의 날에 역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변화성도는 대적을 짓밟고 나가는 역사를 하다가 재림의 주를 영접하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진노의 날에 주님을 맞이할 남은 종이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응답과 새 시대

- 사 41:14~20 -

 

  하나님께서 언제나 새로운 역사가 올 때는 홀연히 응답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역사가 증명하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새로운 역사를 일으키는 목적이 타락한 인생을 위하여 그 소원을 이루어주는 것이니 언제나 시련 가운데서 어찌할 수 없는 난관을 당하게 하고 거기서 원망하지 않고 낙심하지 않고 부르짖는 자를 통하여 새로운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성경 말씀이 세상에 기록되어질 때도 시련 가운데 기도하는 종에게 응답이 오면서 묵시의 말씀이 나타났고 그 말씀이 이루어질 때도 시련 가운데 기도하는 종에게 응답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나 시련 중에서도 낙심치 않고 기도할 때 네 씨가 이방의 객이 되어 400년 동안 압박을 당하다가 내가 그 압박 속에서 그들을 징벌하고 네 자손을 인도하여 가나안 복지에 새로운 왕국을 이루겠다고 언약을 세우셨다. 그 언약이 이루어질 때에 애굽에 내려가서 바로에게 압박을 당하는 자리에서 모세의 간곡한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을 나리어 그 민족을 강권으로 인도하여 가나안 복지에 다윗 왕국을 이루었다.

  다윗 왕국 말기에 극도로 부패할 때 시련을 받던 종들이 낙심치 않고 기도할 때에 그들에게 묵시의 말씀이 임하여 기록된 말씀이 구약 말기에도 예언대로 앗수르와 바벨론에게 무서운 압박을 받게 되었고 그 압박 속에서 낙심치 않고 기도하는 사람을 통하여 응답이 나리어 새로운 성전을 짓고 예루살렘을 복구한 것과 같이 인간 종말의 말기에도 시련 가운데 부르짖는 종들에게 응답이 나리어 새로운 시대가 올 것을 가르친 것이 오늘 본문이다. 이제 어떤 자에게 응답이 오느냐는 것을 성경을 통하여 말한다.

 

  1. 지렁이 같이 된 야곱에게 강한 역사가 임한다 (14~16)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당신의 종을 강하게 들어 쓸 때는 극도로 미약해지고 멸시를 당하고 인간이 볼 때는 아무런 소망 없는 사람이 되게 하고 그러한 가운데서도 부르짖는 종에게 강한 역사가 임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는 것은 영광을 받기 위한 목적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쓸 때 도저히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다는 입장에서 인격이 극도로 무가치하게 되는 환경에 떨어뜨리는 것은 사람으로 하나님만 자랑하게 하는 방법이요, 그렇게 하므로 하나님의 마음은 만족함을 받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체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완전하다면 하나님의 사랑은 필요가 없게 될 것이요, 그 능력도 하등의 효과를 발휘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할 때에 신과 같은 인격으로 창조한 것이 아니고 지렁이 같이 무능한 인생으로서 하나님의 완전한 역사를 받으므로 만이 승리하게 하는 것이 사랑의 자체가 되시는 하나님의 법이라는 것이다.

  언제나 원수의 세력은 강하게 하고 인간의 힘으로서는 도저히 그 원수를 당할 수 없게 하신 후에 홀연히 나타나서 당신의 종으로 그 원수를 이기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약한 종을 쓰는 방법이다. 이렇게 하므로 사람에게 요구하는 것은 겸손과 진실이다.

 

  2. 가련하고 빈핍한 자의 기도를 응답하심 (17)

  하나님께서는 풍성한 것을 주시기를 기뻐하시고 풍성한 것을 주시므로써 당신의 백성이 극도로 아름답게 사는 것을 원하시는 신이시다. 그러나 이러한 것을 아무에게나 준다는 것은 공의가 아니므로 언제나 완전한 것을 주고자 할 때에는 그것을 받을 수 있는 인격을 시험해 보는 것이니 지상의 축복을 받아서 새 시대의 영광을 누릴 종의 장막에 가련과 빈핍을 거치게 하는 것은 무한한 축복을 주기 위한 선한 방법이니 아무리 궁핍하고 가련해도 물질에 끌려서 따라가지 않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끝까지 자기의 사명을 다하고자 하는 자에게 새 땅의 축복을 주시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말씀을 믿나 믿지 않나를 시험해 보는 것이다. 어느 선지나 다 하나같이 남은 자가 되어서 새 시대에 가는 사람은 가난한 자라고 한 것은 인심이 악화된 사회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보려는 사람은 악당들에게 피해를 당하는 일이 있게 되므로 억울하게 물질의 손해를 보고 억울하게 사기를 당하게 되는 일도 있게 되므로 시련 가운데 기도할 수밖에 없는 난제가 온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게 하는 것은 강한 기도의 힘을 주기 위한 목적이다.

  우리 나라의 성도들은 남의 나라보다도 경제 시련이 많은 것은 오히려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높은 영계의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한 방법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가장 빈핍한 민족이 백의 민족이요, 가장 빈핍한 사람이 기도의 사람이요, 가장 빈핍한 사람이 양심의 사람이다. 우리는 물질에 국한된 인격을 가지지 말고 하나님의 응답을 받는 인격을 가져야만 될 것이다.

 

  3. 새 땅의 축복 (18~20)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의 축복은 무조건 주었으므로 그것을 길이 누릴 수 있는 사람이 되느냐 되지 못하느냐에 대하여 시험을 해 본 것이 마귀의 시험이다. 둘째아담 예수를 통하여 중생 받은 이스라엘이 새 시대를 축복으로 받는 것은 미리 시련을 통과시키고 시험을 해 본 다음에 주는 축복이니 완전한 왕국이 된다. 만일 지금도 시험을 해보지 않고 준다면 또다시 부패가 있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시험을 해보고 응답 받는 자로써 이루어지는 새 땅은 에덴 동산보다도 더 완전한 왕국이 된다. 완전이라는 것은 응답으로 만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응답은 시련을 통과한 자에게 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어 중생을 받은 이스라엘이 되므로가 완전이 아니요 이스라엘이 된 백성으로 시련 가운데 낙심하지 않고 기도 하므로써 응답의 열매가 즉 새로운 시대를 성도의 나라로 이루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창조를 받은 사람만이 아니요, 인정을 받은 사람으로서 이루어지는 새 시대니 하늘과 땅과 산천 초목이 다 같이 기뻐할 일이다.

 

  결    론

  응답을 받는 사람이 누구냐 하는 것을 본문에서 깨달은 자가 조금도 이 본문을 통하여 새로운 힘을 얻지 못한다면 그야말로 영원히 지렁이 같은 인간이 될 것이로되 이 본문을 통하여 새 힘을 얻고 용기있게 나가는 자라면 새 타작기 같이 강하게 쓰여질 것이다.

 

 

성도의 고난과 기도

- 시 102:1~28 -

 

  하나님께서 택한 자에게 억울한 고난을 당하게 하는 것은 그를 통하여 영원한 축복을 받게 하기 위한 목적이란 것을 본문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이제 고난 당하는 성도의 기도에 대하여 본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괴로운 날 내 기도 (1~11)

  성도의 괴로움이라는 것은 극도로 심령의 피곤이 올 때라고 본다. 하나님께서 택한 자에게 영적으로 피곤이 오게 하고 원수에게 훼방 거리가 되게 하고 눈물로써 기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난관을 당하게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의의가 있다.

  극도로 심령의 곤핍을 느끼게 될 때 자기 약점을 깨닫게 되고 억울하게 훼방을 받고 괴로움을 받을 때에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하는 마음이 생기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람을 괴로운 날을 통과시키는 것은 더욱 자기의 부족을 깨닫는 것과 더욱 하나님 앞으로 가까이 나오는 것을 기다리는 심정에서 괴로운 날을 통과시키는 것이다.

 

  2. 영원한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심 (12~14)

  하나님께서 택한 자에게 주시는 긍휼과 자비의 은총은 영원한 것으로 주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괴로운 날에 부르짖는 기도를 하는 사람은 영원한 왕권으로서 주는 은총이 있기 떄문에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영원히 그 종에게 임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무런 시험이 없이 긍휼을 베푼다는 것은 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택한 자의 원한이 이루어지는 것은 고난의 날을 통과한 후에야 있기 때문이다.

 

  3. 세계 통일의 역사를 하게 된다 (15~22)

  주님께서도 고난의 날을 통과하시므로 세계 인류를 구원하는 복음의 자체가 되셨고 사도들도 고난을 통과하므로 세계적인 열방에 전파될 복음을 기록하게 되었고 말세에도 고난을 통과한 자라야 세계적인 통일의 완전 역사를 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는 것은 고난을 통과한 종에게 세계적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왕권을 주기 때문이다.  

 

  4. 영원한 축복을 받게 된다 (23~28)

  고난의 날에 응답을 받는 종을 통하여 영원한 왕권을 받는 동시에 그 자손은 영원히 복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는 것은 변화성도를 통하여 이러한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영원한 축복을 자손까지 받을 종에게는 누구보다도 시련이 많고 공연히 사람에게 훼방을 받고 멸시를 받게 되는 것이다. 가장 복 있는 자는 고난 가운데 기도로 승리한 종의 자손이라고 보게 된다.

  사랑하는 여러 사명 동지들이여! 본문 성경을 읽어서 큰 힘을 얻기를 바랍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내게 쓰라린 고통을 주시는 것을 원망치 않겠나이다. 내가 아무리 괴롭다한들 주의 십자가에 비할 수 있사오리까. 할렐루야로 영광을 돌려서 감사할 일은 영원한 왕권과 내 자손의 영원한 축복을 받게 될 것을 감사할 것 뿐이로소이다.

 

  결    론

  하나님께서 고난 없이 응답하지 않고 응답이 없이 긍휼이 없고 긍휼이 없이 영원한 축복이 없다. 그러므로 시편 102편은 시련 받는 종이 세계를 통일하는 왕권을 받고 그 자손이 영원히 왕족으로 축복 받을 것을 두고 가르친 말씀이라고 생각된다.

 

 

온전함을 이룬 자의 사상

- 빌 3:10~16 -

 

  인생이라는 것은 온전함을 이루는 것이 없다면 이것은 아무런 열매 없는 동물에 불과한 것이로되 온전함을 이루게 될 때는 그리스도와 동등권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동물은 하늘과 땅의 차이를 가질 수 없는 것이로되 사람은 큰 차이를 가져오게 된다.

  기독교를 박해하고 대적하던 사울이 바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붓을 들어 기독교 성경을 14권이나 썼다는 것은 개인의 생활에도 믿기 전 생활과, 믿은 후 생활이 너무나 차이를 가진 것이니 어찌하여 한 사람이 이렇게 인격을 온전히 이루게 되었느냐에 대하여 본문을 통하여 알 수가 있다.

 

  1. 그리스도의 죽음을 본받는 생활 (10~11)

  그는 십자가의 도를 반대하는 한 사람이었지만, 다메섹 광야에서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서 그에게 십자가 도에 대한 확신을 가지도록 하셨으므로 그는 예수와 같이 자기도 만민을 위하여 죽되 예수는 죄를 위하여 죽었지만, 자기는 이 십자가의 도를 만민에게 전하기 위하여 죽는다는 것과 죽어도 주와 같이 산다는 소망에서 담대히 나설 때에 아시아를 비롯하여 유럽에까지 복음을 전했던 것이다. 우리의 사상이라는 것은 희생을 각오한다는 것이 없다면 그 사상은 아무런 효과를 발휘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요, 살고자 하는 자는 죽으리라”고 말씀했던 것이다(요12:25). 하나님은 무소불능의 신이지만, 희생적인 사상이 없는 자에게는 능력을 주지도 않고, 역사도 하지 않기 때문에 희생을 각오하는 사상이 없이는 그 능력을 체험할 수가 없다.

  밀알 한 알이 완전한 열매를 맺는 것도 그 자체가 희생이 없고는 열매가 있을 수 없다(요12:24). 식물이 완전한 열매를 맺는 것은 희생이 없이는 있을 수 없는 것 같이 사람의 인격이 온전함을 이루는 것도 희생이 없이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2. 돌진의 걸음을 걸어야 된다 (12)

  사상이라는 것은 뚜렷한 목적이 없이는 있을 수 없고, 목적을 위하여 돌진의 걸음을 걷지 않는다면 그 목적지를 도착할 수 없음같이 우리 기독 신자가 그 목적을 땅에 두지 않고 위에서 갚아 주시는 것을 목적했다면, 그것을 얻기까지 전진해 나가는데는 조금도 다른 곳에 정신을 둘 수 없고, 일구월심에 그 목적 하나만을 이루기 위하여 생각하는 것이나 움직이는 것을 꼭 같이 해야만 될 것이다. 사람의 인격이라는 것은 그 목적에 따라서 좌우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온전함을 주고자 하는 것이 사랑의 본질이다. 사람을 낼 때에 온전함을 준 것이 아니고, 온전함을 이룰 수 있는 자격을 준 것이다. 동물과 식물을 창조한 목적은 사람을 위하여 지은 것이요, 사람을 창조한 것은 하나님께서 가지고 있는 완전한 것을 주기 위하여 창조한 것이니, 사람이라는 것은 조물주 하나님의 주고자 하는 온전을 바라보고 돌진할 때에 무소불능의 신은 그 사람에게 온전함을 이루도록 역사하는 것을 기독교 능력의 역사라 하는 것이다.

  천하에 제일 어리석은 사람은 땅의 것만을 생각하는 자요, 제일 지혜로운 자는 위의 것을 생각하고, 용기있게 나가는 생활에서 위의 것을 받는 생활이라고 본다. 하나님께서 악한 자를 들어 쓰는 것은 온전한 사람을 이루기 위하여 쓰는 것이니 아무리 악한 자의 박해가 있다 하여도 조금도 여기에 눌리지 않고 모든 것을 돌파하고 전진할 때에 악한 자의 박해가 오히려 온전함을 이루는데 요소가 될 것이다.

 

  3. 하나님의 뜻만 생각해야 된다 (13~14)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은 사람에게 수고한 대로 갚아 준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조물주이신 동시에 사람에게는 갚아 준다는 것 하나를 더 두시고 사람을 상대해서 역사하시되 갚아 주는 일에 목적을 두고 약한 자를 돕기도 하시고, 어리석은 자를 지혜롭게도 하시는 동시에 잘못된 것을 고쳐 주기도 하시되 은혜는 거져주고 일한 데는 갑절이나 갚아 준다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이다.

  사랑의 범위는 사람을 창조한 데서 시작되어 사람을 일한 대로 갚아 주는 천국으로 끝을 맺는 것이니, 그 범위는 무한 광대한 사랑이다. 이 사랑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택한 자를 불러서 역사하게 하는 것을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이다.

 

  4. 잘못된 사상을 가진 자를 받지 아니 하심 (15~16)

  하나님은 외모를 보지 않고 중심을 보시사, 그 중심에 하나님이 갚아 주시는 것을 목적하지 않고, 다른 생각을 가졌다면 하나님은 오히려 그 사람을 미워하시는 것이다(말2:1~3).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대적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대 자연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낼 때에 그 목적이 사람에게 법을 주고 그 법을 지키면 더 좋은 것을 주어서 이 물질계  밖에 있는 영원한 도성을 왕권으로 주고자 하는 것인데 이 대 자연의 섭리를 거역하는 자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목적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생각과 그 사상이 맞지 않으므로 오히려 버림을 당하는 것이다.

 

  결    론

  온전함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라면 이 역사를 믿고 순종하는 것이 우리 인생의 본분일 것이다. 그러므로 온전함을 이루는 자의 사상은 온전함을 이루어 주는 하나님의 뜻과 합하는 생활이 있음으로만이 온전함을 이루는 인격을 가지게 될 것이다.

 

 

대강 기록한 바울의 편지

- 엡 3:1~9 -

 

  우리는 성경을 읽을 적에 대강 기록한 책도 있고 빠짐이 없이 기록한 책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될 것이다. 사34:16을 보면 여호와의 책은 하나도 빠진 것이 없다고 말씀했다. 그러나 바울의 편지엔 대강 기록했다고 했으니 여기에 대하여 차이점을 알고 우리는 이 말씀을 증거해야만 될 것이다. 이제 대강 기록한 바울의 편지와 빠짐이 없는 여호와의 책과의 연관성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대강 기록한 편지의 목적 (1~4)

  바울 사도가 편지를 쓴 것은, 성경을 보고, 계시의 역사로 깨달아진 것을 기록한 목적은 무엇이냐? 라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한다. 그때에 바울은 율법주의자와 변론하기 위해서 편지를 쓰게 되었다.

  왜냐하면 율법주의자들이 바울을 염병 같은 이단이라고 하며 이단 중에 괴수라고 정죄를 하고, 바울이 교회를 세운 곳마다 율법주의자들이 따라가서 파괴 운동을 할 때에, 바울은 급하게 대강 기록해서 보낸 것이 그의 서신인 데는, 율법과 은혜를 잘 구분해서 율법시대에 된 일과 은혜시대에 되는 일은 시대가 다르다는 것을 목적 두고 말할 때에, 율법주의자들에게 성도들이 미혹 받지 않도록 하는 것을 목적하고, 또는 신앙 생활에 있어서 성령의 법을 따르는 성도 생활의 성신 도리와 생활 도리를 쓰게 되었고, 고통을 당하는 성도들에게 주님 다시 올적에 받을 상급을 말했던 것이다.

  이 때는 대강 기록한 편지로라도 그 때에 오는 혼란을 이길 수 있는 형편이었다.

 

  2. 기록한 사명적인 한계 (5~7)

  사도 바울은 내 사명은 십자가 외에는 말하지 않는다는 한계를 말했다. 이것이 자기의 사명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기독교 종말론을 중심한 편지가 아니고 십자가의 도를 바로 전하는 것을 목적하여 십자가 도를 믿으므로 받는 구원의 확실성과 구원받은 성도에게 성신의 역사에 대한 확정적인 것을 자기 신앙의 생활의 체험에 의하여 글을 썼던 것이며, 모든 성도로 하여금 자기가 받은 십자가의 비밀을 바로 증거하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성신의 역사를 혼선시키지 않고 생활에 부덕을 끼치지 않기 위한 범위 안에서 이 글을 기록한 것이다.

 

  3. 활동의 범위 (8~9)

  그는 문서 운동을 할 때에 이방을 중심하여 어떠하든지 이방 사람들에게 풍성한 은혜가 있을 것을 기록한 서신은 금일에 이방의 모든 민족들에게 다 해당되는 글이 되었던 것이다. 바울의 편지 문서 운동이 아니었던들 우리 이방은 사망의 그늘 밑에서 생명의 빛 되는 복음을 받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사도 바울이 붓을 들어서 눈물겹게 기록한 책은 오늘 우리 마음속에 산 체험이 되는 복음이 된다는 것은 누구나 다 확정할 일이다.

  이제 은혜를 받은 성도들은 대강 기록한 바울 서신으로서 기독교의 종말에 끝을 맺는 것이 아니고, 계10:7과 같이 하나님의 비밀이 그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외칠 때는 세상 나라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된다고 계시를 보았다.

  그러므로 요한 사도는 계5:1에 안팎에 기록한 책을 만민의 죄를 위하여 죽었다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맡아서 떼는 광경을 계시를 보고 기록한 것이 ‘요한 계시록’ 이란 것이다. 이방 사람에게 풍성한 은혜가 되는 바울의 서신은 세계 인류에게 빛이 되는 서신이요, 사도 요한이 받은 계시록은 환란과 재앙의 날에 성도들이 읽고 듣고 지켜야 될 예언의 말씀인데, 이 계시록은 사도 바울이 대강 기록하고 남은 것을 모두 전해야 될 말씀인데, 이것은 변화성도들이 전하는 복음이 된다.

  그러므로 20세기 말기를 당하여서 붉은 세력이 세계를 침투하고 협상주의 거짓 선지가 교회를 짓밟고 들어오는 이 때에 우리들은 성경을 대강 기록한 바울의 서신으로는 막을 수 없고 계시록과 선지서를 밝히 빠짐없이 알아서 증거해야만 될 때가 왔다고 본다.

 

  결    론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은 구약 때는 언약을 세우는 하나님께 묵시를 받아 빠짐없이 기록했고, 은혜시대에는 사도들이 십자가 부활을 증거하기 위하여 선지서에서 대강 기록했고, 마지막 환란과 재앙이 올 때는 변화성도들이 하나님의 비밀이 옛날 선지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이루어진다는 경고의 나팔을 불어야만 된다고 본다.

 

 

지혜를 진주보다 낫게 여기는 사람이 되자

- 잠 8:11~21 -

 

  가장 가치있는 생활은 지혜를 진주보다도 낫게 여기는 자에게 있다는 것을 본문은 가르쳤다. 사람이 물질을 따른다는 것은 물질의 종이 될 것이고, 세력을 따른다는 것은 세력의 종이 될 것이로되, 지혜를 따르는 자는 지혜로운 종이 될 것이다.

  이제 지혜를 진주보다도 낫게 여기는 자의 생활 가치를 본문에서 찾아보기로 하자.

 

  1. 참된 지식을 얻게 된다 (11~12)

  지식이라는 것은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지식이 있어도 지식을 악한 자의 도구로 쓰는 지식도 있고, 지혜로운 자가 얻는 지식도 있으니 과학적인 세상 지식은 망할 자도 가지는 것이로되, 참된 진리를 바로 아는 지식은 지혜로운 자만이 가지게 된다. 그러므로 완전한 새 시대를 이루는 지식은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라고 사11:9에 말씀했다.

  금일에 유물주의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고 물체가 움직이는 힘을 신과 같이 생각하며 이것을 과학적으로 바로 사용하는 것만이 참 진리고, 그 밖에는 다 미신이라고 하는 현실 사회가 된다는 것은 내일의 멸망을 모르고 사치와 음란의 도성은 바벨론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자라야 조물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지므로 모든 활동은 완전한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아무리 열심이 있다 하여도 하나님을 바로 아는 지식이 아니라면 그 종교는 아무런 필요가 없다는 것을 롬10:1~2에 말했다. 사람이라는 것은 참된 지식을 얻은 자가 아니고는 아무런 가치를 발휘할 수 없다.

 

  2. 능력이 있게 된다 (13~15)

  능력이라는 것은 하나님께만 있는 것이니 이것은 지혜를 받은 자에게 주는 선물이다. 솔로몬이 지혜를 구할 때에 하나님은 모든 열왕을 통치할 능력을 주었던 것이다. 능력이라는 것은 지혜를 따라오는 것이니 아무리 정권이 있다해도 지혜가 없는 정권은 아무런 힘을 발휘치 못할 것이다.

 

  3. 옳은 판단을 내리게 된다 (16)

  사람이라는 것은 옳은 판단을 못한다면 아무런 가치를 발휘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옳은 판단을 내릴 수 있게 해 주시므로 가장 영화로운 왕이 되었던 것이다. 인생에 가장 무가치한 일이 판단할 줄 모르는데 있고, 가장 가치있는 일이 옳게 판단하는데 있는 것이다.

  이 땅에 모든 사람은 다 옳은 판단을 하는 자가 없는 것은 하나님의 지혜를 받지 못한 원인이다. 심지어 주의 종이란 자들이 사28:7과 같이 재판할 때에 실수하므로 더러운 것이 가득한 행동을 하게 된다.

  예루살렘 거리에 왕래하는 소위 제사장의 무리가 옳은 재판을 못하고 하나님의 아들을 바알세불이라고 판단하므로 예루살렘은 황폐화되고 만 것이다. 실패 중에 큰 실패는 하나님의 종이 옳은 판단을 못하는 일이라고 본다.

 

  4. 사랑을 입게 된다 (17)

  솔로몬이 지혜를 받으므로 누구든지 그를 사랑해주므로, 사랑을 입고 최고의 행복된 왕이 되었던 것이다. 억지로 남을 지배하려는 자는 침략자이로되 지혜를 받은 자가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고 숭배를 받는 것은 얼마나 가치가 있는 지도자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지도자가 지도를 받는 자들에게 사랑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면 그 지도자는 무가치한 인격이라고 보게 된다.

 

  5. 부귀가 있게 된다 (18)

  부귀라는 것은 지혜로운 자에게 필연코 따라오는 열매이다. 사람이 물질을 위하여 노력하는 것은 무가치한 일이요, 지혜를 받으므로 부귀가 따라 온다는 것은 과연 가치가 있는 생활이라고 보게 된다. 하나님은 지혜로운 자에게 부귀를 주는 것을 기뻐하시는 신이시다. 가장 이 땅에 부귀와 영화를 누릴 자는 지혜로운 자가 되어서 새 시대에 들어가는 자라고 보게 된다.

 

  6. 의롭고 공평한 길을 걷게 된다 (19~21)

  물질 자체가 죄가 아니요, 물질을 바로 쓰지 못하는 것이 죄다. 그러므로 지혜를 받은 자가 부귀를 누릴 때에 가장 의롭고도 공평한 길을 행하면서 그 부귀를 누리므로 여호와의 영광을 나타나게 된다. 하나님께서 물질을 주신 것은 의와 공평의 길을 걸어가면서 사용하라고 주신 것인데 사람이 의와 공평을 떠나서 부자가 빈민을 압박할 때에 그것은 오히려 그 물질로 말미암아 큰 화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결    론

  가장 복되고도 영화로운 일은 지혜를 진주보다 귀하게 여기는 사람의 생활이라는 것을 이 본문을 통하여 분명히 알게 된다. 우리는 이 시대에 무엇보다도 완전한 지혜를 얻기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할 책임이 있다. 지혜를 구하는 것은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는 일이 되는 것이다(약1:5).

 

 

욕심은 마귀에서 난 것이다

- 요 8:42~49 -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고 사람을 낼 때에 사람에게는 양심을 주고 간교한 뱀에게는 욕심을 주었다. 그러므로 욕심을 받은 마귀와 양심을 받은 사람과에 대립을 시킨 것이니 이것은 양심을 가진 사람으로 욕심을 가진 마귀의 말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 말씀을 따르는 자에게 모든 영광을 주기 위한 작정이다.

  그러므로 가장 간교한 뱀이 역사하는 것은 어떻게 하든지 사람이 잘되는 것을 싫어하고 공연히 욕심을 내어서 속이도록끔 하는 본질을 가진 것이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단이란 것이다. 마귀도 하나님이 있는 줄 알고 천국도 지옥도 다 알지만 근본이 욕심으로 지은 피조물이니 도저히 그 욕심을 떠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욕심을 떠날 수 없는 것이 마귀요, 양심을 떠날 수 없는 것이 사람이다.

  이제 욕심의 근본인 마귀 역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하나님의 아들을 공연히 미워하는 일 (42)

  예수를 사랑하는 마음은 마귀는 도저히 가질 수 없는 것이니 이유없이 미워하는 것은 마귀의 역사이다. 그러므로 바리새교인들이 이유없이 예수를 미워할 적에 예수님께서 가라사대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 나서 왔음이라”고 말씀했던 것이다.

  누구든지 마귀 역사가 그 마음에 있을 적에 자동적으로 남이 역사하고 잘 되는 것을 보면 심술이 나고 미워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 마귀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바리새 교인들이 예수님이 아무런 역사도 하지 않을 때는 가만히 있었으나 예수님이 역사해서 많은 사람이 따를 때는 미워서 죽이려고까지 한 것은 마귀의 역사라고 본다.

  지금도 하나님을 공경한다는 사람들이 남의 교회가 부흥되고 남이 역사하는 것을 보면 공연히 그 사람의 흠을 잡아 보려고 하는 것은 바리새 교인에게 같이 하던 마귀라고 본다. 왜냐하면 바리새 교인들이 자기의 교권을 위하여 자기의 명예를 위하여 야욕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를 따라 갈 때에 그를 믿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흠을 잡아 해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따라갔던 것이다.

  지금도 교회 안에서 남의 흠을 잡아보려는 마음을 가지고 공연히 남의 말을 한다는 것은 자동적으로 마귀의 자식이라고 보게 된다. 사도 요한은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마귀에 속한 자라고 요一3:10에 말했던 것이다. 지금 예수라 하면 누구든지 그 진리를 싫어하고 마음으로 미워하는 것은 전체가 마귀가 주는 마음이라고 본다.

 

  2. 진리를 들어도 깨닫지를 못함 (43)

  언제나 마음에 욕심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듣기를 싫어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것은 그 사상이 말씀과 맞지 않는 원인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사상은 자기가 목숨을 바쳐 남을 살리겠다는 것이요, 마귀의 사상은 어떻게 하든지 참된 하나님의 자녀를 죽게 하겠다는 것이 사상이니 하나님 말씀과 그 사상은 원수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사랑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요일4:7~8에 말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은 남을 살려보려는 마음을 가진 자라야 듣는 대로 보는 대로 깨달아지는 것이다.

  지금 아무리 교회에 성경을 들고 가르치는 자가 많지만, 욕심이란 것이 있는 사람은 그 진리를 바로 깨달을 수 없으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의 마음에 맞춰서 말하게 되니 독주를 먹고 취한 자가 된다(사28:7~8). 이러한 자들은 오히려 참된 진리를 바로 해석하는 것을 듣기를 싫어하고 오히려 비평하며 마귀와 타협을 하는 동시에 거짓을 행하여 자기의 위신을 세워 보려는 자들이다(사28:14~15).

  하나님의 말씀을 묵시로 받는 자들이 다 욕심이 없이 남을 살려보려는 마음으로 눈물 흘려 기도하다가 묵시를 받았고 그 진리를 바로 깨닫는 사람들도 남을 살려보려고 기도하는 자라야 그 묵시의 진리를 바로 증거할 수 있다.

 

  3. 살인자다 (44)

  살인이라는 것은 마귀의 자식이 하나님의 사람을 죽이는 일이 첫째아담의 집에서부터 가인이 동생을 죽였던 것이다. 간교한 뱀이 사람을 속여 선악과를 먹게 하므로 사망이 왔고 사망의 권세가 사람을 지배할 때에 사람을 죽이는 사회가 되고 보니 아담의 가정에서부터 싸우던 싸움은 금일에 와서 세계 인류의 전멸이라는 비참한 살인적인 무력이 완비되는 흉악한 세상이 되었다.

  사람이라는 것은 남을 살리면 하나님의 일꾼이요, 남을 죽이면 마귀의 종이다. 그러므로 남을 살리기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친 것이 주님의 십자가의 도라면 이 십자가의 도를 반대하는 세력은 누구나 다 살인자라고 보게 된다. 살인도 3가지로 볼 수 있다.

  말씀을 잘못 전하는 것도 살인이요, 남을 미워하는 것도 살인이요, 직접으로 남을 죽이는 살인도 있는 것이다. 사람을 죽이는 일도 의를 위하여 죽이는 일이 있으니 이것은 살인으로 볼 수 없고 옳은 심판으로 본다. 이제 살인을 하지 않고 남을 살리던 자가 왕권을 받게될 때에 마귀의 자식들을 모두 죽여 없이 할 권리를 받게 된다(계19:19~21).

 

  4. 성신의 역사를 마귀라고 하는 일 (45~49)

  언제나 마귀의 충동을 받은 자가 자기의 세력을 옳다고 내세우기 위하여 공연히 남을 마귀라고 하는 것은 그 마음에 욕심이 있는 증거이다. 요즈음 교회가 남을 이단이라고 정죄하기를 좋아하는 것은 자기가 마귀에게 속한 증거라고 보게 된다.

  에덴 동산에서 간교한 뱀이 하나님을 거짓이라고 말하듯이 금일도 거짓 선지의 세력이 오히려 참된 종을 거짓이라, 이단이라, 마귀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귀는 언제나 자기가 옳다는 것을 내세우고 하나님이 옳지 않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마귀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결    론

  참된 하나님의 종은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아무리 억울한 욕을 먹고 훼방을 받아도 악으로 말하지 않고 정당한 진리만을 말씀한 것 같이 아무리 동역자의 비방을 받고 악한 자들의 모략을 받는다 하여도 거기에 탓하지 않고 진리만을 증거하는 것이 진리의 사람이라는 것이다.

  어떤 종이 남이 욕하면 같이 욕을 하고 내 흠을 말하면 같이 남의 흠을 드러내어 말하고 남이 권리를 내세우면 나도 권리를 내세워 보려고 한다는 것은 참된 하나님의 종이 하는 일이라고 볼 수 없다. 언제나 세세 왕권을 바라보는 참 종이라면 금일에 원수를 갚으려는 마음이 없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가서 설 것을 생각하고 하나님께 부탁의 기도를 할 것 뿐이다.

 

 

기도인과 정치 문제

- 딤전 2:1~4 -

 

  우리는 기도인과 정치 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알아야 된다. 기도하는 사람이 나라의 정치를 무관심 한다는 것도 탈선이요, 또는 기도하는 사람이 정권을 잡아 보려는 것도 탈선이라고 본다.

  기도의 사람은 나 하나를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니 기도하는 사람이 자기의 안락이나 명예나 권세를 탐한다는 것은 기도의 정신을 벗어난 일이라고 본다. 기도의 정신이라는 것은 무엇이냐 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1. 모든 사람을 위하는 정신 (1상반절)

  기도는 하나님의 사랑의 법을 이루기 위한 것이니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은 모든 사람을 하나같이 사랑하는 것이므로 편벽이나 차별을 두는 것이 있으면 안될 것이요,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구원하고자 하는 것을 믿는 동시에 아무리 부족한 자가 있다 하여도 그 사람을 무시한다든지 버리는 것은 기도의 사람으로 있을 수 없고, 우리는 기도할 것 뿐이고, 그 사람이 모두 되는 것은 하나님 장중에 있다는 것을 믿고 기도할 때 그 사람이 기도를 받기에 합당치 않을 때는 그 기도가 기도하는 사람에게로 돌아오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사람은 언제나 모든 사람을 위하는 마음이 있을 때에 기도하는 본인에게 지혜도 능력도 오는 것이다. 왜냐하면 기도하는 사람에게 지혜도 주고, 능력도 주므로 그 사람을 통하여 모든 사람을 구원해 주는 일을 하시기 때문이다. 기도의 사람은 절대로 자기란 것을 위한다는 데서는 아무 것도 받을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기도를 응답할 때에 한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고, 모든 사람을 위해서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종이므로 나 자체가 완전해지는 것도 나를 위해서가 아니고, 모든 사람을 위해서 완전해지기를 구해야 될 것이다. 만일 종이 부족하면 대중에게 큰 피해를 주는 일이 있을 것이므로 대중을 유익하게 하기 위하여 자기의 완전을 구해야 될 것이다.

 

  2. 감사를 하는 일이 있어야 된다 (1하반절)

  기도의 사람이 불만을 둔다는 것은 벌써 그 심령은 기도할 자격을 잃은 것이라고 본다. 우리 기도하는 사람은 첫째로 남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을 감사해야 될 것이다. 왜냐하면 나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므로 내게는 나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보다도 더 큰 상급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주님께서 갚아 주실 적에 “네가 너를 위하여 기도했으니 상급을 받으라”는 것은 있을 수 없고, “네가 억울함을 당해도 참고 기도했으니 상급을 받으라”는 것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사람은 무엇이나 다 감사할 수 있는 마음에서 기도해야만 그 기도는 하나님께 상달되는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기도할 때에 남을 원망하면서 불평을 두고 “하나님이여, 나를 왜 이렇게 하십니까?” 하는 기도란 것은 아무런 열매가 없고, 원망스러운 일이 있어도 “하나님이여, 나를 아시나이다. 내가 무엇을 잘했다 할 수 있사오리까?” 하는 마음에서 내 부족을 깨닫는 대로 모든 일을 진행해 나가면 여호와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다.

 

  3. 정치인들을 위하여 기도할 일 (2)

  정치인이라는 것은 신, 불신을 막론하고 다 하나님이 그 나라를 주관하는 섭리 하에서 있는 것이니 기도하는 사람이 정치인을 억지로 간섭해 보려는 것은 과오를 범하는 일이요,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움직여 나라를 바로 다스리길 기도한다면 내가 직접으로 정치하는 것과 같이 열매를 거둘 수가 있다.

  왜냐하면 정치인이라는 것은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섭리 하에서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 자기가 잘해서 바벨론 나라를 이룬 줄 알고 말하기를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을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 했더니 하늘에서 소리가 있어 가로되 “느부갓네살아, 너에게 말하노니 나라의 위(位)가 네게서 떠났느니라, 네가 사람에게서 쫓겨 나가서 들짐승과 함께 거하며,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나서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더니 그대로 대왕이 미쳐 소처럼 풀을 먹으며 짐승같이 산에 나가 이슬을 맞고 다닌 일이 있었다.

  예루살렘이 부패할 때 느부갓네살을 들어 예루살렘을 황폐화시킨 일이 있고, 그 왕을 미친 사람이 되게 한 일도 있고 정신이 돌아오게도 한 일이 있으며, 고레스를 들어 바벨론을 치고,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매 즉 그가 조서를 내려 예루살렘을 복구하게 한 일도 있다. 아무리 강대국이라도 그 왕의 마음을 하나님이 주관했다는 것이 분명한 사실을 보아서 우리는 정치인을 위하여 기도할 책임이 있다. 기도하는 사람이 정치를 반대하는 데모를 한다든지 비난을 한다든지 하는 것은 기도의 양심을 떠난 사람이다. 그러므로 기도의 사람과 정치와는 떠날 수 없다.

  정치란 것은 무력이나 경제력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장 중에 있다는 것은 성경에 구약 역사를 보아 분명히 알 수 있다. 계17:17을 보면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할 마음을 저희에게 주사 한 뜻을 이루게 하시고, 저희 나라를 그 짐승에게 주게 하시되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기까지 하심이라”고 한 것을 보면 심판기까지 나라 정치인의 마음을 주관한다는 것을 가르친 것이다.

 

  결    론

  하나님께서 이것을 기꺼이 받으실 일이라고 3절에 말했으니 우리 기도의 사람으로는 나라와 정부에 대하여 기도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며, 더욱 우리 대한 민국에 사는 성도로서 하나님이 보호 하사 우리 나라 만세란 것을 믿을 진데는 극동 난제를 당한 이 때에 더욱 금식을 하며 기도할 의무가 있다고 본다.  내가 이 나라를 위하여 받은 체험을 말한다.

  한번은 9일간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특별 기도를 할 때에 하나님께서 기도의 힘을 주므로 하루에 6시간씩 눈물 흘려 부르짖는 일이 있었다. 일어서서 하늘을 바라보고 기도하던 중 기도를 마치는 마지막 날 새벽이었다. 하늘에서 큰 징조가 나타날 때 별이 12개가 빛을 내어 우리 나라로 비춰지는 광경을 보았다.

  그 때 이상한 방언이 내 입에서 나오며 알려오기를 “네 민족을 위하여 낙심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12별과 같은 종들의 역사가 이 나라에 나타나서 세계 열방을 깨우치므로 네 나라가 빛나는 나라가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나는 우리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는데 전력을 두었습니다. 하나님이 보호 하사 우리 나라 만세는 하나님께서 사명적인 국가로 예정한 약속의 말씀으로 믿습니다. 기독교 종말에 새 일이란 진리가 즉 이 뜻인 것을 성경에서 알았습니다(사43:19).

 

 

 

장 년  공 과 편 - 촛대교회의 역사

 

  총    론

  촛대교회란 것은 끝을 맺는 역사를 뜻한다. 예를 든다면 하루 동안 일하는데 낮에 일하는 인부가 있고, 밤에 일하는 인부가 있어서 공장을 계속 돌리므로 하루의 생산 분량을 채우듯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가 메시야로 와서부터 재림의 주가 올 때까지를 인간이 볼 때 하루 기간 같이 정해 있다.

  그러므로 밤에 일하는 인부는 공장에서 등불이 없이는 일할 수 없는 것같이 기독교 복음운동에 있어서 낮과 같이 그리스도의 빛으로 밝아질 때의 역사는 누구든지 빛으로 오신 예수님만 믿으면 다 빛 가운데 행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주 재림기는 메시야의 빛으로 역사할 때가 아니고 재림의 주를 맞이할 신부들이 등불을 들고야 영접하는 때다. 왜냐하면 구약 이스라엘이 부패하므로 북방 앗수르와 바벨론에게 먹힘을 당하고 예루살렘 성전이 다 없어지고 도저히 성전에서 제사도 할 수 없고 모세 율법을 가르칠 수도 없는 흑암 시대가 왔던 것이다.

  그때에 흑암 속에서도 하나님을 찾고 남은 자들이 동방 고레스의 역사로 예루살렘을 다시 복구할 때에 그 역사를 신약 때 가서 재림의 주를 맞이할 촛대교회의 역사를 목적하고 스가랴 선지에게 묵시가 나타났던 것이다. 이제 스가랴의 묵시를 공부할 때 촛대교회의 역사가 무엇이냐는 것을 공부하고자 한다.

 

제1과  시련을 통과함

- 슥 3:1~5,  요절:5 -

 

  서    론

  하나님께서 어두운 사망에서 죽은 영들을 살리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극도로 쓴 고난의 과정을 거치게 하므로 그 십자가의 승리의 역사가 흑암을 물리치는 권세가 되어 많은 생명을 살리는 중생의 역사가 일어나므로 천하에 교회가 서게 되었고 환란과 재앙 가운데서 그 재앙을 면하고 새 시대에 가는데는 환란, 재앙을 벗어날 수 있는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고는 살 자가 없다.

  그러므로 먼저 대표적인 종을 시련을 주어 말씀으로 완전히 승리케 하는 동시에 그 말씀으로 마귀와 싸워 승리하는 역사가 일어나서 모든 사람은 그 말씀에서 단결할 때에 원수의 세력을 이기고 새 시대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의 승리 역사라는 것은 일반에게 오는 것이 아니고 말씀으로 완전히 승리한 종이 전하는 말씀에 의하여 승리하게 된다.

 

  1대지 : 사단으로 대적하게 하심 (1)

  언제나 하나님께서 시대적인 역사를 일으킬 때는 그 역사를 일으킬 대표적인 종이 그 인격을 이루기까지 대적을 하는 사단으로 시련기를 주고 거기에서 완전히 쓰여질 종이 되도록 하는데는 다음과 같은 의의가 있다.

  첫째 : 충성된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한 목적이요,

  둘째 : 겸손한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한 목적이요,

  셋째 : 권세있게 쓰기 위한 목적이다.

  하나님께서 사단을 들어 시련을 주므로써 그 종을 통하여 하나님의 새로운 일을 하는데는 무조건 들어쓰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인정을 받는 인격이 되기까지 사단으로서 괴롭혀 보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큰 싸움을 할 군대를 거느리는 대장은 적군의 무서운 침투를 막을 수 있는 인격이 있어야만 될 것이다. 이 인격을 이루는데는 원수에게 시달리는 전쟁을 통과한 자라야 많은 군대를 거느릴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기독교 종말에 흑암을 뚫고 나가는 촛대교회의 역사를 일으키려면 자기 자체가 흑암을 뚫고 나갈 인격을 가져야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만민의 죄를 걸머지고 인간들이 죄 값으로 받는 쓰라린 세상, 빈민의 노동 생활과 또는 심령 고통의 쓰라린 겟세마네 또는 인간이 죄 값으로 받는 사망의 고통을 골고다에서 십자가 사형을 친히 받은 후에 승리의 부활을 하므로써 전 세계 인류의 죽은 영들을 살리는 역사를 하므로 세계 만방에 교회가 서게 되었고 종말에 북방으로부터 환란이 올 때에 남은 자를 새 시대로 인도하는데는 아무리 환란과 재앙이 와도 그 가운데서 남은 교회가 되도록 진리를 바로 가르치는 종이 나와야 될 것이다.

  금일에 기독교가 세계에 대 확장을 가져 왔지만 이 교회가 이대로는 도저히 남은 교회가 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사단의 미혹을 이길만한 말씀으로 가르치는 진리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교회는 예루살렘 다락방에서 시작된 오순절 교회를 도저히 찾아 볼 수가 없게 된 것은 구약시대의 예루살렘 성전이 이방 세력에게 망하고 황폐화 된 것 같이 현 교회의 영적 상태가 마귀 흑암에 빠져 참된 교회를 다시 세우지 않는다면 재림의 주를 맞이할 수가 없을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짓듯이 지금 교회가 새로운 역사로 개혁되지 않으면 도저히 이 상태로는 새 시대를 이룰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스가랴 선지에게 예루살렘 성전 복구를 할 때에 보여준 묵시는 기독교 종말에 촛대교회의 역사를 보여주는 동시에 대표적인 여호수아가 사단에게 피해를 당하는 광경을 본 것은 종말에 촛대교회를 일으키는 역사에 대표적인 종이 나올 때 당할 시련을 보여준 것이다.

 

  2대지 : 사단을 책망하심 (2~3)

  하나님께서 아무리 당신의 종이 그슬려 더러워진 나무같이 되어 더러운 옷을 입었지만 그 종을 책망하지 않고 사단을 책망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 하나님께서 모략적으로 사단을 들어 대적하게 했으니 종에게 책망을 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둘째 : 종이 끝까지 사단을 대적하다가 그슬려진 것이니 사람으로서 더 이상 할 수 없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그 종을 책망하지 않은 것이다. 사람의 실수도 자기가 욕심에 끌려 받는 시험도 있고, 마귀와 싸우기 위해서 받는 시험도 있으니, 우리 주님께서 받은 시험은 진리를 가지고 싸우기 위한 시험이었다.

  이와 같이 촛대교회를 일으키는 역사를 하려면 정욕에 끌려 시험을 받는 정도이라면 안된다. 왜냐하면 마귀가 권세를 받고 나오는 때에 그 권세를 이기고 나가는 교회라야 남은 교회가 되기 때문이다. 적어도 촛대교회의 사자가 되려면 정욕에 끌리지 않고 진리 하나를 목적하고 사단과 싸우는 생활이 있어야만 될 것이다.

 

  3대지 : 정한 관을 씌우심 (4~5)

  하나님께서 시련기를 주는 것은 그 종을 망하게 하자는 것이 아니고 정한 관을 쓰는 왕권을 주기 위한 목적이다. 욕심에 끌려서 받는 시험은 회개할 문제가 있고 사명을 위하여 시험을 받은 것은 왕관을 쓸 조건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대표적인 종은 하나님께서 이미 죄과를 제해버린 종이므로 아무리 사단이 대적해도 마음에 사단이 들어와 역사하지 못하고 겉만 그슬려졌으므로 사람이 볼 때는 누명을 쓴 것 같으나 하나님은 그 종에게 대하여 회개하라는 말이 없고 아름다운 옷을 입히라고 하는 동시에 왕관까지 씌우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아들은 물과 피로 임한 몸이므로 그 몸에 죄가 없는 몸이시다.

  그러나 여기의 종은 죄과를 제하였다는 것은 완전 개조를 시킨 몸이라는 뜻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여호수아를 예수로 본다는 것은 잘못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죄과를 제하였다고 하면 그 자체가 완전하지 못한 사람이란 뜻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므로 이 여호수아는 말세에 촛대교회를 일으키는 대표적인 종으로 보아야 되는 것이다.

 

  결    론

  사단을 들어 쓰는 이도 하나님이요, 종을 들어 쓰는 이도 하나님이시니 우리는 사단이 아무리 대적한다 하여도 절대적으로 택한 종에게 유익이 되도록 하시는 하나님이란 것을 배워야 할 것이다. 한때는 괴로운 것 같으나 그 시련을 벗어나고 뜻밖에 영광스러운 일이 올 때 더욱 감사하게 될 것이다.

 

 

제2과  택한 종의 축복

- 슥 3:6~10,  요절:10 -

 

  서    론

  가장 복 있는 자는 시련 가운데 떨어지지 않고 인정을 받은 종이다. 첫째아담은 사단을 이기지 못하므로 축복을 빼앗겼고 촛대교회의 사자는 사단을 이기므로 큰 축복을 받는 광경을 본문에 가르친 것이다. 이제 택한 종의 축복을 다음과 같이 알 수 있다.

 

  1대지 : 자유로운 권세를 받음 (6~7)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에게 사단을 대적시켜 시련을 준 것은 자유로운 권세를 주어 그 종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하되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게 해서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며 지키고 자유롭게 활동하게 하자는 목적이다.

  아무리 사명을 맡았지만 사단의 시련을 이기지 못하고 사단에게 정복을 당한다면 오히려 사명을 옮겨갈 것이로되 그 종이 그슬림을  당할찌언정 정복을 당하지 않고 나가는 자라면 사단을 책망하여 물리치고 당신의 종으로 인정하는 동시에 모든 것을 맡겨서 자유롭게 활동하도록 하는 것이다. 가장 복된 일은 하나님의 집을 맡아 다스리는 자라고 보게 된다.

 

  2대지 : 하나가 되는 일이다 (8)

  금일에 종들이 하나가 되지 못하는 것은 가장 슬픈 일이요, 불행스러운 일이라고 보게 된다. 이것은 완전한 것을 받지 못한 원인이다. 지금은 각 교파가 갈려 있고 종들이 다 혼란 중에 있지만 완전히 무장을 갖춘 대표적인 사람이 나타날 때 어느 교파나 하나님이 기뻐하는 종이라면 자동적으로 하나가 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기 때문이다. 지금 종말관의 진리가 완전히 나타나지 않았으므로 참된 종들은 잘못된 노선을 가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만은 사실이다. 종이라는 사람은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면 하나가 될 수가 없을 것이로되 참된 종을 통하여 참된 하나님 말씀이 나타날 때 참된 종은 그 말씀으로 하나를 이루니 시련을 통과한 종을 통하여 모든 종들이 바로 깨닫고 하나가 되는 일이 얼마나 복된 일인가!.

 

  3대지 : 세계를 통일함 (9~10)

  하나님께서 이날까지는 머릿돌의 진리를 완전히 들고 나오는 종이 없게 한 것은 정한 때가 아니므로 각 종들에게 버림돌 예수의 진리를 증거하도록 한 것이다.

  온 세계 인류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로 말미암아 얼마든지 죄 사함을 받게 되는 소식은 천하에 교회를 확장시킨 것이다. 그러나 버림돌 되시는 예수님이 재림할 때는 모든 성경의 말씀을 바로 깨닫도록 하기 위하여 일곱 영의 완전 역사가 임하는 동시에 진리가 완전히 새겨지는 역사가 있으므로 세계 사람이 다 하나같이 그 역사 아래에서 강권으로 죄악이 소멸되는 역사를 받게 되고 서로 하나가 되어 피차에 서로 초대하는 일이 있게 될 것이다.

  오늘의 교회가 서로 담을 막고 자기 교파의 사람만 인정한다는 것은 기독교가 완전한 진리를 깨닫지 못한 원인이라고 보게 된다. 그러므로 대표적인 종이 나타나므로 모든 사람들이 진리가 정확히 깨닫도록 새겨지는 동시에 하루아침에 큰 변화를 받는 역사가 오므로 재림의 주를 맞이하게 될 것을 가르친 것이다.

 

  결    론

  할렐루야로 영광을 돌릴 일은 시련 끝에 남은 종이 나오고, 남은 종으로서 새로운 촛대교회가 나오고, 촛대교회로 말미암아 완전한 평화 왕국이 이루어지는데는 새로운 순의 종들이 나오므로 이루어지는 일이라고 본다.

 

 

제3과  촛대교회의 권위

- 슥 4:1~9,  요절:6 -

 

  서    론

  촛대교회는 없던 교회를 개척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있던 교회가 다 황폐화 된데서 다시 일어나는 교회다. 그러므로 이 교회는 완전한 교회로서 새 시대를 이루는 것이다. 세밀히 말하자면 시련이 없는데서 있는 교회가 아니고 큰 시련을 통과한 다음에 남은 자로 이루어진 교회이니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1대지 : 완전 준비가 된 교회 (1~2)

  완전 준비란 것은 아무리 어두운 밤이 와도 빛이 꺼지지 않을 준비를 갖춘 교회다. 주 재림시에 남은 교회는 천국을 목적한 교회가 아니고 지상 왕국을 목적한 교회이니 만큼 아무리 흑암의 세력이 온 땅을 덮어도 그 흑암의 지배를 받지 않고 나가는 교회라야 순금 등대 교회가 되는 것이니 완전한 교회로써 새로운 왕국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2대지 : 인간의 힘과 능이 필요없음 (3~6)

  기독교가 이날까지는 완전한 것을 이루지 못하고 완전한 교회를 이루기까지 개인적인 신앙에서 하나님과 교통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교회로서는 완전한 단체를 이루지 못하고 인간의 하는 일이 가입되어 여러 가지로 교회의 모든 사업에 부패성을 가져 온 일이 많이 있지만 이 촛대교회는 진노의 날에 남은 교회로서 조금도 인간의 힘이라는 것은 필요가 없고 직접 하나님의 신으로 다스리는 단체를 이룬 것이다.

  왜냐하면 조금이라도 말씀이 혼선되면 진노의 날에 남은 교회가 될 수 없으므로 여호와의 신께서 직접으로 하나님 말씀이 혼선되지 않도록 가르쳐 주는 일이 있게 되므로 말씀이 완전히 밝아야 하고 남은 교회로 새 시대를 이루니 만큼 행정적인 사무에도 조금도 사람의 방법이 들어가지 않고 하나님 신의 명령에 의하여 움직이는 것을 촛대교회라 하는 것이니 권리 행사의 역사가 있으므로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단체를 이루게 된다.

  다시 말하면 장성한 장부와 같은 신앙에서 움직이는 것이니 조금도 인간의 어떤 속된 것이 있을 수 없고 하나님의 권세로서 이루어진 교회다. 예루살렘 성전이 복구될 때에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난관에서 권리 행사가 나타나 원수를 제어하고 권세있게 쓰는 것을 촛대교회라 하는 것이다.

  지금 교회가 종교 서적이나 모든 의식이나 행정이 극도로 속화된 이때에 신께서 이것을 전부 개혁시키어 촛대교회를 이루게 하는데는 택한 종에게 권세를 주어서 진리에 완전한 다림줄을 쥐고 다시 척량해서 집을 짓듯이 교회의 모든 혼선을 바로 세우도록 하는 것을 증인 권세 역사라 하는 것이다.

 

  3대지 : 머릿돌을 내놓은 역사 (7~9)

  이날까지 기독교는 버림돌 예수를 통하여 속죄 은총을 받았지만 머릿돌 예수님의 역사로 완전히 승리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머릿돌 예수는 권세 역사이니 원수가 다 그 앞에서 쓰러지고 말 것이다. 이날까지 은혜는 중생의 은혜요, 머릿돌 되시는 주님이 나타날 때의 역사는 원수의 세력을 없이하고 당신의 자녀만으로 남은 자가 되게 하는 역사이니 이것을 완전한 은총이라는 것이다.

 

  결    론

  촛대교회란 것은 완전히 끝을 맺는 역사를 뜻한다. 구약 역사가 예루살렘이 복구된 데까지 기록되어 있고 모든 선지 예언이 예루살렘이 복구되는 것으로써 인류 종말에 촛대교회를 가르쳐 하나님의 역사가 끝날 것을 말했다.

  구약 교회의 모세 5경으로 선 교회는 어린 양 예수의 화목제로 완전히 끝을 맺고 예루살렘의 황폐와 복구는 신약 교회의 촛대교회로서 끝을 맺을 것을 가르친 것이니 촛대교회의 권위라는 것은 완전한 평화 왕국을 지상에 이루므로써 완전한 열매를 이루는 것이다. 세밀히 말하자면 은혜시대 교회는 천국을 목적했고 재림시의 촛대교회는 지상 왕국으로 끝을 맺는다.

 

 

제4과  감람나무 두 가지의 역사

- 슥 4:11~14,  요절:14 -

 

  서    론

  감람나무란 것은 다음과 같은 의의가 있다. 이제 산 생명의 활동이 있는 종의 역사가 감람나무이다. 생명이란 것은 하나님께 있는 것인데 자기가 무슨 주권을 쥐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역사하는 대로 순종하려는 것이 생명의 활동이란 것이다. 시52:8~9을 보면 “오직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의지하리로다. 주께서 이 일을 행하셨으므로 내가 영영히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이 선하므로 주의 성도 앞에서 내가 주의 이름을 의지하리이다.” 라고 다윗 왕은 말하였다.

  이 말을 할 때는 사울 왕이 이유 없이 다윗 왕을 해코자하여 따라 올 때에, 그는 사울을 해코자 하지 않고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그에게 임하기 위하여 기도하는 마음으로 사울을 회개시키기 위하여 죽일 기회가 있어도 사울에게 인자를 베풀며 악을 악으로 대하지 않는 다윗이 될 때에, 사울은 하나님이 죽게 하고, 다윗은 만왕의 왕조가 되게 했으므로 그리스도의 왕국은 다윗의 왕국이라고 사9:7에 말했고, 다윗을 들어서 하나님은 시편을 기록할 때에 자기의 왕권을 감람나무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종말에 다윗 왕국을 지상에 완전히 이루는 역사를 감람나무라고 계11:4에 말했다. 이제 감람나무에 대하여 본문에서 공부할 때에 두 가지로 말할 수 있다.

 

  1대지 : 등대 좌우에 있는 감람나무 (11~12)

  이 순금 등대는 하나님의 제단을 가르친 것인데 예루살렘 성전의 제단인 지성소가 바벨론에게 파괴를 당하고 제사를 드릴 수 없는 자리에 70년간 있다가 동방 고레스의 명령에 의하여 그 제단을 다시 쌓게 될 때에 그 제단을 순금 등대로 묵시를 보여준 것은 기독교 종말에 황폐된 교회가 다시 왕권 받은 권세의 종을 통하여 이루어질 것을 가르친 것이다. 그러므로 주 재림 시까지 남아 있는 교회로 말미암아 이 땅에 다윗 왕국인 성도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지되 그리스도께서 사도 요한에게 ‘너는 내 대신 아들’이라고 한 것은 단지 마리아를 섬기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만왕의 왕이 되는 동시에 지상에 왕국을 이루기 위하여 역사할 사명은 사도 요한에게 있다는 뜻으로 계11:1에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면서 성전과 제단 안에서 경배하는 자를 척량하되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 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고 한 것을 보면 이방 세력에게 밟히지 않고 남아서 새로운 그리스도 왕국에 들어갈 자는 사도 요한에게 다시 예언하는 권세의 척량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이다.

  이것은 사도 요한 당시에 된 일이 아니고 계시록 13장과 같이 붉은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어 마흔 두 달 동안 성도의 권세를 이기고 세계를 어지럽힐 때에 그 환란의 재앙을 받지 않고 남을 자는 사도 요한이 맡은 사명인 계시록을 통하여 역사가 일어나므로써 다윗왕국이 이루어질 것을 뜻하여 11:3에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 이백 육십일을 예언하리라. 이는 이 땅에 주 앞에 섰는 두 감람나무” 라고 한 것은 사도 요한이 받은 계시록을 가지고 다시 예언할 시기는 주 재림 전 삼년 반 동안 변화성도가 기독교 종말에 예언을 증거할 것을 가르친 것인데 이 예언을 증거하므로 그 증거를 믿고 따라가는 자들이 모인 교회가 촛대교회란 것이다.

  이 교회는 목적이 예언의 말씀을 지키기 위하여 뭉쳐진 단체이니 이 단체를 통하여 남은 종과 남은 백성이 새 시대에 들어가 다윗 왕국인 성도의 나라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상의 성도의 나라는 감람나무 왕권 받은 종들을 통하여 이루어지되 촛대교회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2대지 : 온 세상의 주 앞에 모셔 섰는 자 (13~14)

  이것은 세계를 대표한 것인데 주께서 두 대표를 앞에 세웠다는 뜻으로 주 앞에 모셔 섰는 자라고 한 것이다. 이날까지는 주 예수님의 십자가로 세계에 모든 민족을 사망의 구렁텅이에서 올라오게 했고 마지막 때는 주님께서 두 종을 앞에 대행자로 세우되 그 종을 통하여 지상왕국이 이루어지도록 역사한다는 뜻이다. 막3:17을 보면 야고보와 요한에게는 두 사람을 합해서 이름을 ‘보아너게’ 곧 ‘우뢰의 아들’이라는 이름을 준 것은 말세에 뢰자적인 사명은 두 대표가 있을 것을 뜻했다.

  예수란 이름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뜻이요, 뢰자라는 이름은 원수 세력을 때려 없이하므로 새로운 시대가 온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두 감람나무 가지는 말세에 촛대교회의 역사로 새로운 시대가 이루어지는 일에 두 대표를 뜻한 것이다. 언제나 하나님은 그 시대의 사명을 행하는데는 대표자를 세우는 것이다. 대표란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응하여지는 일에 총 책임을 맡은 자이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실 적에 만민의 죄를 위하여 대신 죽어서 그들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을 목적 두었고 주 재림시의 남은 종은 그들이 나가서 예언하는 목적이 지상 왕국을 이루기 위하여 목적을 두고 역사하는 데는 대표의 사람이 말씀을 통하여 권세를 받으므로 그 권세 아래에서 푸른 감람나무 같은 가지의 단체가 나온다는 것이다. 이것은 변화성도의 한 단체가 감람나무의 가지라는 종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촛대교회의 역사가 아니고는 새 시대의 다윗 왕국에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새 시대 왕국이라는 것은 영혼이 가는 것이 아니고 환란 가운데서 보호받고 남은 자가 다윗 왕국의 백성이 되는 것은 증인 권세 역사로 남은 교회가 된 촛대교회로 말미암아 남은 백성이 있게 되므로 지상에 새로운 왕국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결    론

  감람나무 두 가지의 뜻은 부활 성도를 가르친 것이 아니고 주 재림시에 남은 종으로서 촛대교회를 이루게 되므로 새로운 왕국이 이루어지는 일에 대표적인 사람을 가르친 것이다.

 

 

제5과  저주를 받지 않는 촛대교회

- 슥 5:1~11,  요절:9상 -

 

  서    론

  하나님께서 이 땅을 저주의 두루마리로 망하게 할 때에 남을 교회는 촛대교회란 것을 보여준 것이다. 이날까지 교회는 죽은 영을 살려주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촛대교회가 나올 때는 저주의 두루마리가 온 땅을 덮을 때에 그 저주를 받지 않고 남은 자가 되어서 새 시대 가는 것을 목적한 것이니 이제 저주의 날은 어떠한 것이며 어떠한 교회가 남느냐에 대하여 공부하기로 한다.

 

  1대지 : 저주의 두루마리가 들어가는 집 (1~4)

  하나님께서 저주의 두루마리를 내 보낼 때는 진노의 날이란 것이다. 이날까지는 어느 사람의 집이나 다 같이 양식을 주고 자녀를 주고 평화롭게 살 수도 있게 했지만 저주의 두루마리가 어떠한 집에 들어간다는 것을 가르쳤다.

  첫째 : 도둑의 집에 들어간다.

  이 도둑이라는 것은 다음과 같이 볼 수 있다. 우리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만 영화롭게 한다는 것 외에는 전부가 다 도둑이 된다. 왜냐하면 종이란 사람은 주인의 것이니 오직 주인의 영광을 위하여 순종할 것 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공경하는 일은 하나님의 사랑의 법을 순종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모든 말씀을 주신 것은 사람에게 복을 주기 위한 목적인데 그 말씀을 순종치 않을 적에 자동적으로 저주를 받게 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 모든 무리를 몰아낼 때에 “너희는 강도의 굴을 짓지 말라”고 했던 것이다. 이들은 전부가 다 자기의 직업적인 영리를 위하여 하는 것 뿐이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겠다는 마음이 없고 자기의 사는 생활을 목적 둔 것이므로 그들을 책망했던 것이다.

  아무리 주의 종이라도 자기의 명예나 사리나 안락을 따른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집에 도둑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종이 하나님의 성금으로 생활하는 것이 도둑이 아니요, 그 마음에 양떼를 살린다는 희생적인 순교 정신을 가지지 않고 한 직업에 불과한 일을 한다면 이 사람을 도둑이라고 취급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없다면 아무리 그 사람이 그 말씀을 가르친다 하여도 이 사람은 열심을 이용하는 도둑이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재앙의 날에는 순교적인 생활에서 양떼를 위한 목적이 아니고는 다 저주를 받게 될 것이고 아무리 교회라 하여도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 순종하는 교회가 아니라면 다 저주를 받게 될 것이다.

  둘째 : 망령되이 맹세하는 자의 집에 들어간다. 망령된 맹세라는 것은 다음과 같이 볼 수 있다.

  ① 우리 사람은 맹세할만한 자격이 없다. 하나님께서 이미 할 수 없는 인간에게 해 주겠다는 맹세를 세우셨으니 그 맹세를 믿고 순종한다고 하는 맹세밖에는 할 수 없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에 탈선이 된 일에 맹세를 세운다는 것은 망령된 일이라고 본다. 다시 말하면 오늘에 공산 기독교 연맹 같은 것은 다 망령된 맹세라고 본다. 공산 사상은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사상인데 공산주의 정치가 세계를 통일하는 일에 같이 일하겠다는 연맹이라는 것은 주님 앞에 망령된 일이라고 보게 된다. 또는 그러한 무리들과 같이 협상주의 노선으로 흐른다는 것도 망령된 맹세라고 보게 된다.

  ② 하나님께 세운 맹세를 지키지 않고 변경시키는 일이다. 적어도 하나님 앞에 맹세를 하고 지키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만홀히 아는 행동이 된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맹세를 세우고는 그대로 행치 않는다면 하나님은 참된 신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하물며 참되신 하나님 앞에 한번 작정하고 그대로 실천하지 않는다는 것은 망령된 행동이니 언제나 하나님 앞에 맹세를 세운 일은 지켜야만 저주에 해당되지 않는 남은 자가 될 것이다.

 

  2대지 : 촛대교회의 승리 (5~11)

  오늘에 각 교파가 자기의 교세를 확장시키며 교권으로서 세력을 잡고 있지만 이것으로서 승부를 이루는 것이 아니고 저주를 받느냐 받지 않느냐에 따라서 승부를 이루게 된다.

  첫째 : 저주받은 교회의 형편을 에바 속에 들어간 여자로 보여주었다. 에바 속에 들어간 여자와 같은 교회는 악이라는 둥근 납으로 에바 아구리를 덮어서 그 여자는 캄캄하고 답답한 형편에 들어간 것을 말했으니 성신이 떠나고 저주의 두루마리가 들어간 교회는 캄캄한 흑암이 오고 아무런 은혜가 없이 답답한 형편에 떨어진다.

  공기가 없고 빛이 없는 가운데서 생명을 보존할 수 없는 것 같이 저주받은 교회에서 그 영들이 살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여자는 영원히 저주를 받는다는 뜻으로 시날 땅으로 간다는 것이다. 시날 땅은 바벨탑을 쌓다가 저주받은 땅을 가르친 것이다.

  둘째 : 축복 받은 교회 형편은 여인이 학의 날개 같은 것이 있는데 그 날개에 바람이 있더라고 했으니 이것은 가장 명랑하고도 용기있는 상태를 말했다. 축복 받은 촛대교회는 언제나 씩씩한 새로운 힘이 나리고 모든 진리가 밝아지기를 공중에서 싸우는 자가 사방을 보듯이 그 교회 영계는 극도로 밝아져서 완전 승리에 들어가는 형편을 보여준 것이다.  

  이제 앞으로 극도로 타락하는 교회도 있고, 영계가 발전하는 교회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이렇게 되는 것은 심판기에 하나님께서 버릴 자는 버리고 취할 자는 취하기 때문이다.

 

  결    론

  가장 복된 자가 촛대교회에 있고, 가장 가련하고도 불행스러운 자가 속화된 교회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앞으로는 촛대교회가 아니고는 저주의 두루마리를 피할 수 없고 재앙의 날에 남은 자가 되려면 촛대교회를 통하여야만 된다는 것을 묵시로 보여준 것이다.

 

 

 

논 설 편

 

1. 인생과 종교에 대하여

 

  현대 과학 문명이 최고로 발달되는 일에 따라서 사람의 마음에 종교심이 박약해지고 점점 물질 향락에 도취가 되어 그날 그날에 육적 만족을 누리는 일에 도취가 되어 영적 방면은 생각할 여지조차 없이 되는 현실이라고 보게 된다.

  소위 자본주의 정치 아래서는 황금만능의 시대라는 것을 생각하리만큼 금전만 있으면 얼마든지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이요, 소위 공산주의 정치 산하에 있는 백성들은 공산주의가 세계 통일한다는 허위 선전 하에서 미칠듯이 날뛰고 있는 사람들은 먹지도 입지도 않고 전쟁 준비에 전력을 두며 침략적인 사상에 충동을 받아 목숨을 아끼지 않고 침투하는 현실에 있는 철의 장막 속에서는 자기의 힘을 하나님같이 믿고 하나님이 보호 하사 우리 나라 만세라는 것은 정신이 빠진 사람의 잠꼬대 같은 소리라고 하고 있다.

  소위 협상주의라는 간판 밑에서 세계 평화를 꿈꾸는 인본주의적인 문화인들은 어떻게 하든지 전쟁을 하지 않도록 협상을 해야만 산다고 최선의 노력을 다해서라도 평화를 보존해야만 된다고 하고 있다. 심지어 기독교의 목사라는 인물들 중에서도 이일을 적극 찬동하며 어떻게 하든지 우리 사명은 협상주의를 적극 협력해 주는 교회가 되어야만 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참된 종교의 가치라는 것은 무엇이냐는 것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종교인의 특징

  종교라는 것은 세상을 비관한다든지 또는 원수시한다든지 하는 것은 산 종교가 아니요 우상적인 종교가 될 것이다. 종교는 세상을 떠난다는 것보다도 세상이 어떻게 되어서 인간다운 가치를 발휘하는 새로운 시대가 온다는 것을 정확히 가르친 것이 없다면 그 종교는 이 시대에 아무런 효과를 발휘할 수가 없을 것이다.

  오늘의 기독교가 죽어 천당만을 말하는 교회라면 이 시대에는 빛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현세에 큰 위기를 만난 백성들에게 이 난국을 돌파할 진리 운동이 없다면 이 시대 사람에게 아무런 변화를 줄 수가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의 진리는 이 시대 사람에게 가르쳐 주어야 할 말씀이 성경 전체에 8할을 점령하고 있는 것인데 죽어 천당이라는 진리는 대강 기록한 바울의 서신이요, 완전한 것이 올 때는 지상 왕국이 이루어지는 것이니 이것은 사도들이 해석한 것밖에 성경은 다 이 시대의 사람에게 가르칠 말씀이다. 세밀히 말하자면 기독교에서 이날까지 모르던 성경은 전체가 현 시대 사람에게 해당되는 진리라고 보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 종교인은 자본주의나 공산주의나 협상주의를 따라서 움직일 것이 아니고 자본주의, 공산주의, 협상주의에 따라가는 자들로 그 종말이 어떻게 된다는 것을 성경을 들어 가르쳐 주고 우리의 살길은 그 삼대 주의를 초월하여 진리에 명랑한 빛의 사람이 되어 이 시대에 모든 인간들의 앞길을 삶의 길로 인도해 주는 것이 있어야만 될 것이다.

 

  2. 종교인의 특권

  현 사회 사람이 다같이 찾고 있는 것은 자기의 주권을 바로 찾아보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혹은 경제권, 혹은 정권, 혹은 교권, 혹은 자기의 주관을 내세워서 자기 인권을 목적둔 자도 있다. 그러나 종교인의 특권이라는 것은 물권, 정권, 교권, 인권을 초월하여 있는 특권이 있다. 이것은 모든 권세를 지배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인생이라는 것은 물권에 매이면 물질의 종이 되고 정권에 매이면 정권의 종이 되고 교권에 매이면 교권의 종이 되고 인권에 매이면 사람의 종이다. 그러므로 종교인은 조물주 하나님의 특권 아래에서 활동하는 것이 있어야 완전한 종교인이라고 보게 된다.

  그러면 하나님의 특권이라는 것은 그 시대에 숨어있는 진리를 따라 신앙자에게 오는 것이니 우리가 이 시대에 종교인의 특권을 가지려면 이 시대에 숨은 비밀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바로 알아야 될 것이다.

  노아는 양심 시대 종말의 비밀을 바로 알므로 특권을 가졌고, 아브라함은 언약 시대의 비밀을 바로 알므로 특권을 가졌고, 율법 시대에는 모세가 그 비밀을 알므로 특권을 가졌고, 은혜시대에는 사도들이 그 비밀을 알므로 특권을 가졌고, 지금 환란의 시기를 놓고 이 시대의 비밀을 바로 아는 자라야 특권이 있을 것이다.

  이 시대의 비밀을 바로 알려면 누구든지 새일수도원에 가서 1개월간 그 학과를 공부하면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다. 앞으로 우리 나라의 특권은 이 시대 비밀을 바로 알고 진리 멸공 운동에 선지 국가가 되어야 할 것이다.

 

  3. 종교인의 특색

  이 시대 사람들은 시대적인 풍속과 사치를 따르는데 심히 바쁘게 따라가고 있다. 이것이 무가치한 생활이라고 보는 자를 종교인의 특색이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모양을 내려는 것이 종교인이 아니요, 종교인으로서 특색은 다른 사람에게 새로운 감화를 주는 것이 있어야 할 것이다.

  소위 현실주의란 것은 알맹이 없는 겨 같은 인격이라고 보게 된다. 종교인으로서는 언제나 초인간적인 특색이 있어야 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신앙하는 자로 하여금 그 시대 사람에게 특색이 있게 하여 그 시대 사람이 감화를 받고 그 시대의 조류를 거스려 나가게 했다는 것이 그 시대에 빛이라는 것이다. 언제나 인간들은 종기속(세속) 종기풍(풍속)이라는데 흘러가는 것이 생명의 진리가 없는 인간의 생활이다.

  만일 현 사회에 종교인이 공산주의 변론을 때려부술 만한 변론이 없다면 어찌 종교 지도자가 될 수 있으며, 과학의 힘을 초월한 힘을 받은 것이 없다면 어찌 과학자를 이끌 수 있으며, 현 문학을 초월한 지혜와 지식을 하나님께 받지 못했다면 어찌 문학자를 이끌 수 있으며, 현대의 물질 문명의 쾌락보다도 더 완전한 쾌락을 받지 못했다면 현실 방랑주의에 떨어진 사람을 이끌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 종교인으로서는 특징, 특권, 특색이 있어야만 현 사회의 모든 사람을 바로 가르칠 종교인이 될 것이다.

 

 

2. 인생의 두 가지 노선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할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여 하나님의 법도를 순종하면 얼마든지 인생의 가치를 가지고 생명과를 따먹고 영생하며 영원히 하나님과 동거동락 하자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인생에게 두 가지 노선이 생긴 것은 다음과 같다.

 

  1. 선악과를 먹은 죄에서부터

  사람의 몸에 선악과라는 나무의 과실이 들어갈 때 아담이 그 몸에서 가인과 아벨을 낳게 되었다. 이것은 아담의 영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령에 잡힌 바는 아니요,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이었지만 그 몸에 선악과의 질이 들어올 때 그 몸은 악한 자도 선한 자도 출생하는 열매가 나타났다.

  언제나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이라도 그 몸에서 두 가지 길을 걸어가는 자식을 낳게 되었다. 노아의 몸에서도 셈과 함이 나게 되고, 아브라함의 몸에서도 이스마엘과 이삭이 나게 되고, 이삭의 몸에서도 에서와 야곱이 나게 되고, 야곱의 몸에서도 악한 형들과 의로운 요셉을 낳게 되었다.

  이것을 본다면 아무리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의 몸에서도 두 가지 길을 가는 사람을 낳게 되었으니 이것은 질적 타락이 된 몸이기 때문이다. 자기 한 몸을 가지고도 의를 행하는 때도 있고 악을 행할 때도 있는 것이니 타락한 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 때에 아무리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하지만 항상 그 나라안에는 하나가 되지 못하고 두 길을 걸어갔던 것이다.

  그리스도가 세상에 올 때도 이스라엘 가운데 그리스도를 믿는 자와 대적하는 자가 대립된 것이 예루살렘의 비극이요, 또는 아무리 오순절 교회가 성신의 역사로 섰지만 그 가운데도 두 가지 길이 생겼던 것이다. 이렇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가 잘못이 아니요, 그 역사는 완전한 인격을 이루기 위한 역사이니 반드시 마귀의 역사가 대립되기 때문에 알곡과 쭉정이로 갈라지는 것이다.

 

  2. 중생 받은 자에게 미혹이 오므로

  이날까지는 중생을 받고 받지 못하는데 따라서 두 길이 있었다. 구약 때도 죽은 영과 생령으로 두 길이 있었고 신약 때는 세계 인류적으로 중생을 받은 자는 천국이요 받지 못한 자는 지옥이라는 두 길로 갈라진 것이다. 그러나 환란기에는 중생 받은 자를 미혹해 보는 흑암을 개방시킬 때에 아무리 하나님의 자녀라도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미혹을 이기게 될 것이고 지키지 않는 자는 미혹을 받으므로 재앙을 받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두 가지 노선이 된다.

  이 두 가지 노선은 주님 오실 때까지 계속 될 것이다. 만일 이것이 없다면 참된 그리스도의 왕국을 이룰 수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미혹을 이긴 자를 진실한 자로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계시록에 기독교 종말의 두 가지 노선은 붉은 짐승의 표를 받고, 받지 않는 것으로 갈라지는 것을 기독교 종말의 역사라고 말했다. 지금 여러 가지 교파가 생기고 복잡한 문제가 많이 있지만 결국은 두 가지 노선으로 끝을 맺고 마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용공, 반공 두 가지가 대립되는 것이 인류 종말에 끝을 맺는 싸움인데 이 싸움은 교회 안에서 끝을 맺게 될 것이다.

  지금 붉은 세력을 강하게 쓰는 것은 심판하기 위한 모략적인 방법이니 에덴 동산에 있는 아담, 하와를 꾀던 옛 뱀을 다시 한번 들어 쓰는 것이 기독교 종말의 큰 미혹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완전한 것을 주기 위해서는 붉은 용을 들어서 미혹해 보고 마지막 결전을 이루는 전쟁을 하게 한다. 붉은 용의 세력을 대항해서 말씀대로 싸우는 자에게 하늘 권세를 주고 붉은 용의 세력을  따라 가는 자에게 마귀 권세를 주어서 인류 종말의 끝을 맺는 전쟁을 하게 되는 것을 인류 역사의 끝을 맺는 아마겟돈 전쟁이 된다.

  지금 불가피 세계 인류는 두 가지 노선으로 갈라지고 마는 것이 심판기에 이루어질 일이다. 그러므로 새 시대를 이루는 심판은 붉은 용의 세력을 이겼느냐, 타협을 했느냐에 의하여 끝을 맺는 심판이 온다. 이 심판이 있으므로 다시 전쟁이 없는 평화 왕국이 이루어진다.

 

 

3. 탈선된 종교 사상은 무엇인가

 

  종교라는 것은 사람이 어떤 욕망을 가지고 연구나 또는 요구한다는 것보다도 조물주께서 피조물 된 인생을 더 완전한 곳으로 이끌어 주기 위한 사랑의 법칙을 세운 것이 완전한 종교의 진리라는 것이다. 그런데 종교의 탈선된 사상은 무엇이냐는 것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인본주의적 사상

  인본주의적인 사상이라는 것은 자기의 인격을 존중시하는 동시에 그 인격을 위하여 종교를 이용하는 것을 말한다.

  종교라는 것은 자아를 희생하는 것이 참된 종교의 본질인데 자아를 위하여 종교를 이용한다는 것은 아무런 생명 없는 종교가 되고 말 것이다. 종교란 자체는 자아를 초월한 신의 완전성을 믿으므로 자아의 부족을 그 신 앞에 깨닫고 그 신의 역사에서 자아라는 것이 완전히 개조되는 체험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 종교는 내게 아무런 효과를 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인본주의적인 사상이라는 것은 실지에 있어서는 참되신 신과는 대적이 되는 사상이라고 본다.

 

  2. 다신 숭배의 사상

  종교라는 것은 신 중에도 가장 위대하고도 참되신 여호와의 신을 공경하는 것 외에 여러 가지 신을 숭배한다는 것은 오히려 그 종교는 죄가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신은 여러 가지 마귀를 숭배하라고 낸 것이 아니고 그 마귀들이 아무리 방해해도 내 말만 믿고 순종하는 자라야 진실한 사람으로 인정하고 그 사람에게 복을 주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법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여러 가지 신을 섬긴다는 것은 오히려 그 종교를 통하여 자신을 망치는 일이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여호와 한 분만을 섬기는 종교로만이 완전이라는 것을 소유할 수 있는 것이다. 금일에 우리 나라에 종교가 많지만 다신 숭배의 종교 사상으로 말미암아 흑암에 떨어진 민족이 되었던 것이다.

 

  3. 방랑적 자유의 사상

  이것은 소위 신앙 자유라는 것을 악용하여 오히려 육체의 소욕을 따르는 자들이다. 성신의 역사로 육체의 소욕을 죽인다는 것을 목적하지 않고 육체의 쾌락을 목적하여 흥분 감정 오락적으로 흐르는 것으로써 하나님의 진리를 위하여 순교한다는 정신이 없이 그때 그때에 현실주의로 흐르는 자들이다. 소위 신 신학이니 세속화 신학이니 위기 신학이니 하는 명칭을 가지고 그 시대에 보조를 맞추자는 것이다. 이런 사상은 오히려 종교를 이용하여 육체의 만족을 찾는 음녀적인 신앙이라고 볼 수 있다.

 

  4. 봉건적인 사상이다

  이 사상은 과거에 자기 교파만이 정통으로 내려 왔다는 것을 고집하면서 새로운 발전을 오히려 무시하고 심지어 신비적인 역사가 있을 수 없다는 신학설을 주장하며 이적은 폐지라 하는 말까지 하게 되니 이러한 사상은 마른나무같이 되어 아무런 열매가 없게 될 것이다. 이러한 사상을 가진 자들은 자기가 정통이라는 것만을 세우기 위해서 인간의 수단 방법까지 부리면서도 자기의 신앙 노선만이 정통이란 것을 고집하는 자들이다.

  신앙은 시대를 따른다는 것도 탈선이요, 시대적인 변동을 가져오는데도 불구하고 그 시대에 전할 말을 오히려 무시하고 과거 시대에 전하던 그 말대로 전해야만 보수라는 것은 망령된 일이 아닐 수 없다.

  인력거를 끌고 가던 사람들이 아폴로를 타고 달나라에 가며, 나무 끝에 쇠를 맞춰 가지고 서로 찌르면서 싸우던 전쟁이 한번 던지면 세계 인류는 삽시간에 횟돌같이 되고 말 원자 전쟁이 나온 데도 불구하고 자기의 교파가 시작할 때 세운 교리와 해석만이 정통이라고 따지면서 이 시대의 비밀을 들고 나오는 새 일의 역사를 부인하며 심지어 새 시대가 없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터무니없는 정통주의라고 본다. 우리는 이 시대의 종교로써 할 일이 무엇이며 전할 말씀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될 것이다.

 

  5. 신비주의적 사상

  신비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는 신비가 아니고 성경 말씀을 오히려 혼선시키는 신비라는 것은 마귀의 미혹이라고 보게 된다. 그러므로 신비주의를 잘못된 사상으로 보는 것은 완전 계약의 말씀이 모든 선지를 통하여 빠짐 없이 기록된 후에 메시야 탄생에서부터 재림 시까지 기독교 역사라는 것은 약속을 세우신 하나님께서 그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 기독교의 신비적인 역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비주의적인 사상은 용납할 수 없다. 왜냐하면 자기가 어떤 환상, 입신, 영음을 듣는 일을 기준하여 나간다는 것은 오히려 교만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미 말씀한 대로 행하시는 신이신데 그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은 목적하지 않고 자기 신비적인 체험만을 중심할 때에 자동적으로 성경을 대적하는 적 그리스도의 영이 올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동정녀 잉태로부터 그리스도의 강림시까지 역사라는 것은 완전한 인격을 이루는 동시에 완전한 교회를 이루어 남은 종과 남은 백성으로서 이 땅에 새 시대를 이루는 것 외에 그 밖의 것은 아무런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신비를 인격 완성과 완전 승리의 역사로 중심되어 나갈 때에 빌라델비아 교회 같이 항상 열린 문이 있게 될 것이다.

 

 

4. 갈팡질팡하는 사람이 많은 세상

 

  인류 역사상 어지러운 세상이라고 하는 말은 이미 있어 왔지만 지금같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갈팡질팡할 수밖에 없는 난제가 부딪친 일은 처음일 것이다. 왜냐하면 전부가 인류 역사상 없던 일이 닥쳐왔기 때문이다.

  1. 소위 사상 문제란 것이다. 이날까지는 사상 문제 때문에 자기 민족끼리 가슴에 총을 대고 싸우는 전쟁은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우리 백의 민족은 동방의 예의지국이라는 미명을 가지고 삼강 오륜이라는 뚜렷한 도덕의 강령을 지켜오던 나라다. 그런데 남의 나라보다도 더 악착같이 싸우는 민족이 되었으니 이것이 어떻게 될 것이냐는 것을 생각할 때 백의 민족의 사명을 모르는 사람은 갈팡질팡할 수밖에 없는 난국을 당했다고 보게 된다.

  우리 나라는 지리적으로 볼 때 남북 통일이 되지 않고는 도저히 민생을 보존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크나큰 대륙을 북방에 지고, 동해 서해 남해로 아름다운 금수강산, 공기 좋고 물 좋은 곳, 천하에 제일 명산인 금강산을 중심하여 북방에는 지하 자원이 풍부하고 남방에는 미곡 창고라고 하는 말도 있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 나라가 금강산을 경계로 하고 북으로 남으로 갈라지고 보니 북방도 남방도 아무런 발전을 볼 수 없는 강토가 되었다.

  그러는 중 북방은 넓은 대륙을 공산당이 점령했으므로 남한 반도에 사는 우리에게 큰 압력을 주는 원수의 나라가 되고 보니 이 민족의 살 길이 아득한 것 뿐이다. 그러나 성경을 깊이 알고 보면 동방 땅끝 남한에서 반드시 세계를 통일할 진리 운동이 일어나므로 북방을 정복하고 새로운 시대가 온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갈팡질팡하는 이 민족에게 무엇을 주어야 할 것이냐 하는 것을 바로 알아서 바로 가르치는 사람이 나서야 할 것이다.

 

  2. 소위 W.C.C.라는 운동이 서양에서 시작되어 한국에까지 들어오는 이때에 교회 양떼들은 이것이 좋은지 나쁜지, 죽는지 사는지를 모르고 무조건 도와준다면 좋다고 한다는 것은 참된 그리스도인의 행동이 아니다.

  공산당은 무력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을 때에 기독교에 가장을 시킨 공산당을 만들어서 자유 진영의 심장이 되는 대 종교인 기독교를 통하여 사상을 침투하자는 것인데, 이때에 이 미혹을 막을 만한 진리 운동이 아니고는 갈팡질팡하는 기독교를 바로 잡을 수 없다. 그러므로 지금 큰 난제는 정치적으로는 극동 난제요, 종교적으로는 아메리카 교회를 향하여 큰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극동 난제와 아메리카의 종교 부패의 난제를 어떻게 해야 해결한다는 것은 기독교 종말론의 진리를 바로 증거하는 일이 동방에서 시작되어 서방을 깨우칠 적에 서방 교회가 각성을 받고 자기들을 깨우친 그 은혜를 감사해서 각성 받은 성도들이 동방 땅끝의 나라를 돕기 위하여 이사야 60장과 같이 이루어지므로 동방에서 역사가 일어나 북진을 하게 될 때에 극동 난제와 아메리카의 종교 부패를 바로잡게 된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작정이란 것이다. 이 비밀을 바로 아는 지식을 가진 자라야 이 시대의 새벽 별이 될 수 있다.

 

 

5. 종교가 부패되는 원인에 대하여

 

  종교라는 것은 언제나 부패를 가져오는 것은 말단에서부터가 아니고 지도층에서부터라는 것을 구약 말기를 보아 알 수 있다. 지도자 부패가 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의의가 있다.

 

  1. 작은 일에서부터 온다

  다윗 왕국이 북방 사마리아가 생긴 것은 솔로몬왕이 너무나 영화로운 생활에서 이방 여인을 사랑하는 데서부터 시작되어 예루살렘 앞산에 그모스라는 모압의 신을 위하여 산당을 지을 때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본다(왕상11:1, 7). 이것이 근본 되어 이스라엘을 망치는 부패의 쓴 뿌리가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종교 부패는 지도자가 마귀편과 싸우지 않고 타협하는 시간부터 오는 것이다. 왜냐하면 종교는 의식이나 도덕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영적의 생명을 위한 종교이니 영적으로 타협이 있을 적에 그 시간부터 영적 생명은 빛을 내지 못하고 어두워지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종교는 예배를 드린다 하여도 하나님께서 받지를 않으시면 그 시간부터 죽는 것이다. 그러므로 강단에 서는 종이 영적으로 마귀를 이기지 못하고 타협하는 시간부터 그 강단은 마귀가 정복하기 때문에 그 아래에 있는 양떼들에게 영적 소성이 없고 피곤이 오기 시작될 때에 교회는 식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한 시간, 두 시간 계속으로 은혜가 내리지 않을 때 자연적으로 예배에 성의가 없어지게 된다.

  종교라는 것은 불완전한 인간이 예배를 드리므로 예배의 대상자이신 하나님께로부터 새로운 것을 받으므로 만이 인생은 영적 생활을 보존함으로써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강단에 지도자가 하나님과 의합이 되지 못하면 하나님은 그 종을 통하여 아무런 것도 허락치를 않으므로 교회는 시일이 갈수록 식어지는 동시에 결국은 우상적인 종교가 되고 말 것이다. 우상은 기독교 안에도 형식적 예배가 될 적에 하나님은 우상과 같이 취급하는 것이다(사66:3).

  그러므로 금일에 종교 부패는 강단에서부터 시작되되 사람이 보이지 않는 영계에서 되는 일이므로 교회에 의식과 정치와 도덕과 모든 사업이 있다 해도 그것이 다 부패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단지 교회는 그 제사를 하나님이 받으시므로 만이 신령이요, 받지 않으실 때에 그 시부터 보이지 않는 영계의 부패는 시작되는 것이다. 종교는 지도자가 하나님과 의합이 되는 것으로만이 나날이 영적 발전을 가져오는 동시에 모든 열매가 좋아질 것이다.

 

  2. 경솔한 것이다 (습3:4)

  아무리 기도의 용사로 앗수르 군대를 물리친 히스기야도 경솔하게 하나님 앞에 물어 보지도 않고 바벨론 사신에게 거룩한 성전의 모든 것을 보여준 일로 그 성전이 바벨론에게 다 무너진 사실을 볼 때에 경솔이라는 것이 얼마나 교회를 망치는 지도자의 죄라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종들이 깊은 기도도 없이 하나님의 일을 한다 하면서 경솔하게 일을 저지르게 되므로 도리어 일을 하지 않은 것보다도 못하게 된다. 경솔하게 일하는 자는 언제나 결말은 부패를 가져온다. 왜냐하면 시작은 하나님의 일이라고 시작했지만 하나님께서 역사하지 않을 때에 사람이 애써 본다 하여도 그 수고는 인위적인 방법이 되므로 부패를 이룰 것이다. 함부로 경솔하게 남을 이단이라고 판단하면 그 시간부터 그 입은 실수한 입이므로 그 입에 여호와의 말씀이 떠나게 된다.

  그러므로 종교 지도자는 듣는 대로 보는 대로 판단하지 않는 자가 되어야 한다(사11:3).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을 쓸 적에 시련을 시켜 보는 것은 심지가 견고해서 흔들리지 않는 자에게 평강으로 지켜주는 것이니(사26:3) 언제나 경솔하지 않는 자라야 여호와의 사자가 될 것이다. 모세가 경솔하게 반석을 두 번 치므로 가나안 복지를 들어가지 못하고 모세를 따라가던 60만 대중이 경솔하게 원망하다가 다 광야에서 쓰러지고 여호수아와 갈렙만 남았던 것이다.

  언제나 종교 지도자는 경솔을 주의하고 항상 하나님께 부탁하고 하나님의 역사로만이 될 줄 믿고 아무리 어려운 시험이 와도 움직이지 않고 담대히 나갈 때에 모든 일은 다 좋은 열매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금일에 주의 종들이 경솔하게 움직일 때에 교회는 자동적으로 분열이 되고 자동적으로 부패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교회 사업이라는 것은 함부로 시작하기도 어렵고 함부로 활동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언제나 떨리는 마음으로 희생적인 기도가 있어서 응답으로 이루어지는 것 외에 그 밖의 것은 결말은 부패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성신으로 역사하는 일로 시작이 되면 그 결말은 신령한 것을 이루게 될 것이니 항상 지도자가 성신에 사로잡혀 있는 생활이 아니라면 사람은 다 경솔하게 되고 실패하게 되므로 부패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3. 주권을 다투는 일이다 (미3:1~4, 요삼 9)

  교회란 것은 어려운 시험이 없이 선 교회는 없다고 본다. 핍박과 시험이 올 때에 교회를 세우는 자는 순교적인 사람이 아니고는 도저히 복음을 전할 수가 없는 것이므로 지도자가 양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고 나섰던 것이다.

  그러나 교회가 확장되고 환영을 받게 될 때에 자동적으로 그 주권을 쥐고 나갈려는 야욕이 있는 사람이 학적으로나 인격으로나 우수한 것을 보고 따라가는 자가 많게 될 때에 자동적으로 영적 방면으로 신령한 자가 물러나게 되고 인간 육안으로 볼 때에 유명하다는 인물이 주권을 쥐게 되면 그 사람이 자기의 주관에 따라서 교회를 지도하게 되므로 자동적으로 영적 방면보다도 인간 학적으로 흐르는 일이 있게 될 때에 이러한 지도를 받는 일꾼들이 다수를 차지하게 되고 신령한 사람이 소수가 될 때에 교회는 자동적으로 속화되는 것이다.

 

  4. 목자가 삯을 위하여 일하게 될 때 (미3:11)

  강단 생활을 하는 자가 성금으로 생활하는 것은 구약 시대도 십일조의 성금으로 제사장들이 생활하는 것을 법으로 세웠고, 신약 시대에도 초대 교회의 전도자에게 물질로 봉사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이라고 요三 8에 말했고 딤전5:18에 말했다.

  그러나 신령한 은혜로써 약한 교회를 부흥시키고 교회가 없는 곳에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보다도 약한 교회를 버리고 큰 교회를 찾아가려고 노력한다는 것은 목자의 양심이 아닐 것이다. 삯을 위한다는 것보다도 계1:6과 같이 하나님을 위하여 제사장의 일을 바로 하기 위해 충성을 다할 때에 하나님의 은총이 내려 모든 일에 축복을 받게 되는 것이 있어야만 될 것이다.

  교회의 양떼들이 억지라는 것이 있게 될 때에 거기서부터 부패는 시작되는 것이다. 목자가 삯을 위하는 것보다도 그 교인들이 목자를 위하여 노력하고 받드는 것은 하나님이 역사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목자가 자기의 명예나 안락을 위한다는 데서부터 하나님은 그 교회에서 역사하지 않으므로 모든 일은 오히려 죄악으로 이루어지는 일까지 있게 될 것이다.

 

  5. 성경에 잘못된 해석이 있을 때 (사8:20, 사28:7~8)

  하나님은 진리를 바로 가르치기 위하여 교회를 세운 것인데 그 교회의 목자가 성경을 잘못 해석할 때부터 마귀는 그 강단에 역사하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은혜시대 교회는 사도가 전한 말씀 그대로 가르쳐야 사도에게 역사하던 성령은 역사할 것이다(요一2:27). 사도가 해석을 하지 않은 예언서를 억지로 푼다는 것은 오히려 주의할 일이라고 벧후1:19에 말했다. 왜냐하면 이미 이루어진 십자가, 부활, 승천, 성신 강림을 세계 만방에 증거하는 기간은 이루어질 예언을 증거할 필요조차 없는 때이다.

  예언을 증거할 때는 1260일을 증인 권세로 역사할 때이어야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은혜시대는 사도 교훈에 가감 없이 증거할 때에 성령의 은사가 역사하는 것이요 환란기를 앞에 놓고 예언을 증거하는 전 3년반에는 그 예언을 바로 증거해야만 촛대교회가 되는 것이다.

 

 

 

신  앙  문  답

 

【문】1. 영의 생명과 육의 생명의 차이점을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답】하나님께서 흙에서 사람의 몸을 창조하고 생기를 불어넣어 호흡을 하게 하되 생령이 되게 하셨다고 창2:7에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동물에는 생기를 불어넣었다는 것이 없고 사람에게만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의의가 있습니다.

  동물이란 것은 활동을 하게 하되 영의 활동이 없는 활동을 하도록 해서 단지 공기와 물을 통하여 움직이는 것 뿐이요 사람은 공기와 물을 초월한 생명을 하나님께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몸도 이 땅에서 공기와 물을 통하지 않고는 육의 생명을 보존할 수가 없는 것이로되 육의 생명과 영의 생명이 결합된 활동을 하는 것이 인생의 가치란 것입니다. 그러므로 동물은 살되 아무런 발전이 없이 움직이는 것 뿐이요 사람은 얼마든지 발전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상대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발전할 기능을 준 것은 하나님 자체가 완전이신 동시에 사람에게도 완전을 주는 것은 사람을 창조할 때 완전케 한 것이 아니고 완전할 수 있는 영과 육을 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동물은 죽으면 없어지고 마는 것이며 사람은 몸은 부활하고 영도 하나님 앞으로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이니 동물의 몸과 사람의 몸은 그 생명이 같지 않고 다르다.

  사람의 몸에는 얼마든지 영생할 수 있는 몸이 되게 하는데는 아무런 식물이 없이 되는 것이 아니고 영생과를 먹으므로 육의 생명이 영생을 하며 그 몸으로 모든 영광을 누리도록 하는 것입니다. 영생과라는 것은 몸에 해당되는 것이며 영에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람의 영은 영생과를 먹기 전에 성신의 역사 아래서 얼마든지 발전해서 그 영이 완전하도록 해주는 것이며 육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성신의 역사를 통하여 날마다 거룩한 생활에 들어가도록 역사해 주시므로 그 몸이 영생과를 먹을 수 있는 자격이 이루어지게 합니다.

  아담, 하와는 성령을 받지 못했으므로 영생과를 따먹을 영생할 인격을 못 이루었지만 예수의 피로 산 백성은 살아서 영생과를 따먹을 수 있는 인격이 이루어지도록 역사하는 것을 기독교 종말에 완전 역사란 것입니다. 사람이 영광을 누리는 것은 육의 생명과 영의 생명이 결합되는 생활에서 영광을 누리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완전 사랑의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문】2. 사람이 어떤 방침으로 살아야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고자 합니다.

【답】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가장 귀한 사명을 맡긴 것은 사명을 행함으로써 하나님과 같이 영광을 누리되 하나님께는 몸이 없지만 사람에게는 영·육이 있는 사람으로 피조물인 만물을 금세에도 내세에도 사용하라는 것이 인생의 가치 있는 생활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사람에게 말씀을 주신 것은 어떻게 살아야 가치가 있다는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아무리 사람이 범죄하고 타락했다 하여도 어떻게 살면 타락한 사람으로써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다 사용하게 될 수 있느냐는 것을 가르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란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가치 있게 사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 : 땅의 것을 생각지 말고 위의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골3:1).

  사람은 생각을 바로 가질 수도 없게 된 타락한 인간이지만 생각을 바로 가지도록 하는 것을 성신의 역사라고 합니다(롬8:6). 이제 사람이 하나님 앞으로 생각을 돌이킬 때에 사람의 생각은 그때부터 바로 깨닫는 지각을 체험하게 됩니다(요一5:20).

  둘째 : 말을 조심하는 것입니다(약3:2~6).

하나님께서 동물보다도 사람에게 말을 주신 것은 그 말에 대해서 하나님은 책임을 지고 갚아 주는 것입니다(마12:37). 말이란 것은 사람에게 준 특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새 땅의 축복을 받는 일에 대표적인 사람에게 입에 말씀을 준다고 사59:21에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상대하여 말할 때에 가치가 있고 하나님을 상대하지 않고 세상을 생각하여 나가면서 말하는 것은 전부가 아무런 필요 없는 객설이 됩니다. 인생으로서 최고의 가치는 그 입에 열매가 있는 사람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이 하시는 일을 종의 입을 통하여 증거하게도 하시고 또는 말씀대로 이루어지기 위하여 기도할 특권을 주셨으니 인생의 가치있는 방법은 입으로 하나님 말씀을 전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셋째 : 양심으로 하나님을 공경하는 일입니다(딤후1:3).

  하나님은 사람을 대할 적에 양심 하나를 보고 죄를 사하기도 하고 은혜를 내려서 그 사람을 완전히 들어 쓰기도 하는 것이니 언제나 양심이 하나님을 향한 인간이라면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께서 책임을 지시게 됩니다. 종교라는 것은 양심을 통하여 신의 존재를 믿는 동시에 그 신께 인정을 받는 생활을 하기 위한 양심이라고 보게 됩니다.

 

 

【문】3. 기독교에서 이적이 나타나는 일에 대하여 구체적인 설명을 듣고자 합니다.

【답】이적이라는 것은 세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 : 전도를 위하여 나타나는 이적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믿음이 크고 작은 것이 문제가 아니요, 너무나 모르는 지방에 하나님이 계신 것과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라는 것을 알리기 위한 목적에서 나타나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적 자체가 복음이 아니요,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문을 열어주기 위하여 나타나는 것입니다(행4:29~31).

  둘째 : 승리를 이루기 위하여 나타나는 이적입니다.

  이것은 도저히 인간의 힘으로써 이길 수가 없을 때에 하나님께서 이기도록끔 해주시는 것입니다. 행12:1이하를 보면 베드로가 깊은 옥에 갇혔을 때 천사를 보내어 옥중에서 인도해 나올 때에 사람이 보지 못하도록 한 일이나 철문이 열리게 한 일이나 모든 일은 베드로를 건져내기 위하여 나타난 이적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을 바로의 압박에서 건져낼 때에도 이적을 통하여 구원했습니다.

  셋째 : 각성을 주기 위하여 나타나는 이적입니다.

  이것은 기독교 말기에 잠든 심령을 깨우치기 위하여 나타난 것인데 이것을 권세 역사라고 합니다.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재앙으로 땅을 치고 나가는 역사입니다(계11:3~6). 이 이적은 원수를 굴복시키고 나가므로 사로잡힌 백성을 찾기 위한 목적입니다. 이 역사가 있으므로 재림의 주를 맞이할 교회가 완전히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계12:1이하는 하늘에 큰 이적이 나타나는데 해를 입은 여자가 발아래 달을 딛고 머리에 열두 별의 면류관을 썼고 해산의 수고를 다하므로 철장 권세를 받은 자가 나오고 그 교회가 보호받는 광경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재림 후에도 이적으로 보호하는 일이 있으므로 만이 교회가 남아서 이 땅에 새로운 시대를 이루는 것입니다.

  넷째 : 이적이라는 것은 언제나 계속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개인적인 인격으로 받는 체험도 있게 하고 시대적인 말씀을 증거하기 위해서 있기도 하고 어려운 위기를 당할 때에 종을 돕기 위해서도 종말에 완전 승리를 이루기 위하여 있는 것이니 이적을 폐지라 하는 신학설은 모순이라고 봅니다. 앞으로 큰 이적이 없다면 기독교는 도저히 보존할 수가 없는 위기가 오기 때문입니다.

  나도 과거에는 칼빈 신학에서 이적 폐지란 것을 그대로 받아들였지만 그 신앙관으로는 도저히 발전이 없다는 것을 알고 중심 성결을 위하여 해산의 수고를 다할 때에 하늘이 열려지는 광경이 나타날 때부터 약 15년간 계속으로 인격적으로 이루어지는 체험을 받을 때에 그 은혜 한계를 척량할 수가 없다고 봅니다. 어떤 종이 이적을 나타나는 것을 부인한다면 이것은 망령된 생각이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완전성을 부인하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적을 중심한다는 것도 잘못이요 이적을 부인한다는 것도 탈선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약속을 세운 것이니 우리는 그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것을 목적할 때에 이적은 사람이 구해서가 아니고 그 말씀이 이루어지는 역사를 위하여 하나님 편에서 자유롭게 역사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이적을 보기 위하여 기도하는 것도 잘못이요 이적을 믿지 않고 기도하는 것도 잘못이요 이미 이루어진 말씀을 믿는 동시에 이루어질 일에 그대로 될 것을 믿고 매일같이 충성을 다하는 것밖에는 없다고 봅니다.

 

 

【문】4. 신앙 발전에 대하여 구체적인 설명을 듣고자 합니다.

【답】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은 사람에게서 나온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아 발전하는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아 끝을 맺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하나님께로 난 것이요 하나님의 역사로 자라나는 것이요 하나님이 갚아 주는 일로 끝을 맺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 발전에 있어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 : 발전의 요소

  신앙은 사람이 할 것을 믿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행하실 것을 믿는 것이니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인 데는 말씀의 지식이 풍부해야 됩니다. 금일에 교회가 신앙 발전을 가져오지 못하고 퇴보 상태에 있는 것은 신앙의 지식이 하나님 말씀에 의하여 너무나 희박한 증거입니다.

  신앙 발전이란 것은 열심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의를 바로 아는데서 있습니다. 자기의 의를 세우려는 것은 언제나 퇴보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의를 바로 알아서 그 의에 뜻을 순종할 때 의를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역사가 있게 됩니다. 인간의 지식은 정신 작용을 발전시키는 것이요, 하나님의 지식은 사람의 심령을 발전시키는 동시에 완전한 인격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 발전의 소망

  신앙의 소망이라는 것은 현세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완전한 신앙으로 이루어지는 지상 통치 왕국입니다. 그러므로 현 교회가 소망의 확실성을 가지지 못할 때에 신앙은 정지 상태에 있습니다. 금일에 있어서 기독 신자에게 어떤 소망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가르쳐야 할 책임이 있고 또는 역사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세계 인류가 전멸될 위기를 앞에 놓고 이 세파 속에서 우리의 살길이 무엇이냐는 확실한 소망이 성서에 기록되어 있고 그대로 시대를 따라 역사가 오는 것이니 현 교회가 이 진리를 완전히 깨달아 소망의 확실성을 가지고 담대히 나서는 자라야 그 역사가 임하는 체험을 받게 되어 삼대 확증이라는 체험을 갖게 되므로 소망의 확실성을 가지게 됩니다.

  삼대 확증에 있어서 첫째는 역사적으로 흘러온 신앙의 체계를 확증해야 될 것이요, 둘째는 자신의 인격적인 체험에서 신의 역사를 확증적으로 체험해야 될 것이며 셋째는 실천 생활에서 확증적인 체험을 가져야 될 것입니다. 이 세 가지 확증이 있으므로써 완전한 소망이 확실한 동시에 그 신앙은 나날이 발전하는 것입니다.

  예를 든다면 어떤 사람이 산 속에 있는 귀한 광물을 발견했다면 자동적으로 그 광물을 완전히 내 것을 만들 때까지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은 사실입니다. 이와 같이 신앙에 있어서도 확실한 소망을 가지게 될 때에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열심은 정상적으로 있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 : 발전의 위치

  신앙이 위치라는 것은 가정도 교회도 사업도 신앙의 위치가 됩니다.

  첫째는 가정 환경이 신앙을 발전시키는데 좋은 위치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가정을 떠나는 데서 발전이 아니요 가정을 중심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기독교의 진리에 합당한 생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결혼을 하여도 신앙을 중심해서 자녀를 교육해도 신앙을 중심해서 이루어진 가정이 될 때에 그 가정을 통하여 많은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교회는 내 영적 신앙 생활을 위하여 있는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조금이라도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것이 있는 교회는 신앙 발전에 오히려 큰 손해를 주는 것이로되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이는 교회의 강단을 통하여 날마다 신앙 발전에 큰 힘을 얻는 것입니다. 아무리 신앙 생활을 한다 하여도 그 강단에서 내려오는 신령한 힘이 없다면 그 신앙은 발전에 큰 지장을 가져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두 세 사람이라도 합심하여 모인 곳에 같이 하신다는 것은 합심된 교회를 통하여 역사하겠다는 약속입니다.

  셋째는 사업은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육적만을 위한 사업도 있고 영적을 위한 사업도 있으니 그 사업이 영적의 손해가 되느냐 되지 않느냐는 것을 목적하고 사업을 움직여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시니 언제나 사업을 통하여 복을 주시고 그 사업에서 천국 건설 운동을 하는데 물질을 사용함으로써 하늘에 보화를 쌓아 둘 수 있게 해 주는 것입니다.

 

 

【문】5. 마귀 근본과 종말에 대하여 구체적인 설명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

【답】마귀라는 것은 왜 있느냐에 대하여 먼저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마귀를 사용한다는 것이 분명히 성경에 있는 것을 보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택한 자를 시험해 보기 위하여 들어 쓴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욥2:1~6, 계20:1~3, 7을 보면 욥을 시험한 것도 사단을 들어 썼고 그 밖에 모든 종들이 다 마귀에게 시험을 받는 것은 하나님이 허락한 일이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허락지 않은 마귀가 자기 마음대로 활동한다면 하나님과 동등권을 가진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마귀를 들어 쓸 수도 있고 없앨 수도 있다는 것이 성경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계시록을 보아도 원수의 세력을 허락하기도 했고 없애기도 하는 것을 계시에 보였습니다.

  마귀를 들어 쓰는 것은 마귀를 이기는 자에게 세세 왕권을 주기 위한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시대나 하나님의 종은 특별히 시험과 핍박이 많도록 한 것은 그 종에게 특별한 왕권의 축복을 주기 위한 목적입니다.

  이제 마귀 근본을 말하자면 하나님의 피조물이라고 보게 됩니다. 창3:1을 보면 가장 간교하게 뱀을 창조했다고 했고, 계12:9을 보면 큰 용이 내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이는 자라고 했고, 계20:2을 보면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단이라고 하는데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한다고 했으니 미혹을 하게 하는 것도 못하게 하는 것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뱀을 들어 사람을 꾈 수 있게 허락을 해서 뱀의 말을 듣지 않고 하나님 말씀만 순종하는 자라야 그 몸이 영생과를 따먹고 영원히 산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것은 생령되는 사람을 시험해 보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생령된 아담, 하와를 꾀어 본 것 같이 인간 종말에도 중생 받은 사람을 꾀어 볼 때 붉은 용의 앞잡이 거짓 선지에게 미혹 받지 않고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라야 그 몸이 살아서 죽음을 맛보지 않고 새로운 시대에 간다는 것이 계시록입니다.

  계22:6, 18~19을 보면 주님 다시 올 때에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라야 복이 있다고 했고 예언을 가해도 감해도 재앙이라고 했으니 이것이 살아서 지상왕국에 들어가는 자라고 보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생령의 사람 아담, 하와는 말씀을 지키지 못하므로 에덴 축복을 빼앗겼고 둘째아담 예수를 믿고 중생 받은 자녀들이 마지막 때에 예언의 말씀을 지키므로 에덴 축복을 다시 받게 되는 것을 기독교 종말적인 역사라는 것입니다.

  이날까지는 예수를 믿으므로 천당을 가는 것은 죽었던 영혼이 중생을 받아서 가는 거요, 중생 받은 사람이 마귀 미혹을 이기고 예언의 말씀을 지키므로 지상 축복을 받는 것을 천년시대라 하는 것입니다.

  마귀의 종말에 대하여 말하자면 마25:41에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영한 불이라고 했고, 계20:10에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진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모든 선지와 사도와 성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했어도 하나님 말씀보다도 마귀의 말을 따라간 자는 마귀와 같이 영원한 불에 들어가는 거요, 마귀의 말을 믿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생령의 사람이 양을 잡아 제사드리므로 받는 구원은 구약 때 사람이요, 죽은 영들이 예수를 믿고 중생을 받아 천국에 가는 것은 은혜시대 사람이요, 중생 받은 사람이 예언을 지키므로 천년왕국에 들어가는 것은 환란시대 사람입니다. 그러나 남을 살리기 위하여 말씀을 가지고 싸워 이긴 자는 왕권을 받고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사람은 시민권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종말의 행위 심판은 천국과 지옥으로 갈라지는 심판인데 왕권을 받은 자 외에는 다 그 심판을 거쳐서 행한 대로 보응을 받게 됩니다.

 

 

【문】6. 기도 응답 받는 일에 대하여 구체적인 설명을 듣고자 합니다.

【답】응답이라는 것은 어떤 음성이나 환상이나 신비의 체험만을 응답으로 본다는 것은 마귀 미혹을 받을 우려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응답 자체는 인생이 할 수 없는 일을 신께서 해 주신다는 것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기도라는 것을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해 주실 줄 믿고 기도할 때 이루어지는 체험을 받은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첫째 : 알고자 할 때에 깨달아지는 일이 있습니다.

  제가 예수를 믿기 전에 기독교에 영생이 있는 것을 알아보려고 성경을 구해다가 매일같이 읽어본 일이 있습니다. 그러던 중 예수를 믿게 되어 이상하게도 죄를 깨닫는 마음이 생기어 눈물 흘려 기도한 다음에 성경이 깨달아지는 체험을 받았습니다. 확실히 믿을만한 진리라는 것이 깨달아지는 동시에 심령에 큰 소망을 가지는 생활을 할 때 자동적으로 믿어지는 체험에서 생활을 하였습니다.

  둘째 : 성결함을 받아 보려고 했을 때에 중심에 성결을 체험한 일이 있습니다. 성결이라는 것은 인생의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로부터 온 응답의 역사로만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셋째 : 남을 살려 보려고 밤을 새워 눈물 흘리면서 기도하다가 피곤이 없는 세계를 체험한 일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새로워지는 소성이라는 것은 남을 살려보려는 불타는 마음이 있어야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넷째 : 원망할 일에 원망하지 않고 기도하다가 뜻밖에 하나님 말씀이 통달되는 체험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마귀의 시험이 오는 것은 억울하게 하는 일이 있는 중에서 진리가 밝아진다는 체험입니다.

  다섯째 : 낙심할 일에 낙심하지 않고 기도하다가 새힘을 받고 입에 말씀을 받는 체험이 있는데 그때부터 내 입으로 얼마든지 책자를 불러서 쓰게 되는 일이 있습니다. 그 밖에도 여러 가지 개인적인 응답이 계속으로 있지만 크게 응답의 단계를 말하자면 다섯 가지로 구분을 지어서 말합니다.

  기도라는 것은 나 자체가 바로 서 보려는 기도로써 오는 응답도 있고 원망할 일, 낙심할 일, 억울한 일이 와도 원망하지 않고 낙심하지 말고 기도하다가 받은 체험도 있는데 기도라는 것은 그 신앙 향상에 따라서 그 응답이 있되 때를 따라 그 사람의 인격에 의하여 있다고 봅니다.

  우리 인격이라는 것은 기도를 통해서만 있는 것인데 최고의 영계에 올라가는 자리는 자기를 위하여 기도하는데서가 아니고 남을 위하여 기도하는데서 남을 살릴 수 있는 종이 되도록 하나님은 들어 쓰는데는 많은 열매로 이루어지는 것이 응답으로 되되 내가 목적한 바가 있다해도 그것은 다 실패로 돌아가고 뜻밖에 홀연히 이루어지는 응답이 있으므로 하나님을 자랑할 수밖에 없는 자리로 들어간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죄 사함을 받은 정도에서 감사하는 기도도 있고, 여러 가지 실패를 당했지만 다시 새로워지는 체험에서 드리는 감사의 기도도 있고, 남을 도와 보려다가 그 사람에게 큰 손해를 보고서 뜻밖에 다른 사람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체험을 받을 때 감사하는 기도도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 응답이라는 것은 나의 소원을 이루는 것보다도 하나님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깨달을 것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예지와 예정 아래서 우리보다도 먼저 아시고 계신 것인데 사람이 구할 때에 그때 가서야 하나님이 깨닫고 주시는 것이 아니고 예정하신 뜻을 이루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적에 우리에게 기도할 수 있는 환경과 힘을 주고 뜻밖에 홀연히 이루어지는 일이 있되 무엇이나 인생의 계획밖에 큰 일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저는 체험한 것뿐입니다.

 

 

 

특  집  

 

1. 할 일 많은 세상에 일꾼 없는 탄식

  가장 슬픈 일은 부모가 자식을 낳았는데 수는 많지만 부모의 속만 썩이고 부모의 소원대로 일해 줄 사람이 없다면 그것이 얼마나 그 부모의 탄식일까요. 또는 백년해로하자고 철석같이 약속을 하고 무엇이 잘되면 좋다 하고 안되면 나간다, 들어간다 하면서 야단을 치는 아내가 있다면 그 남편에게 얼마나 탄식일까요. 무서운 적군이 국경을 넘어오는데 군대들이 겁을 집어먹고 도망하는 것을 일삼는다면 이것이 나라의 책임자에게 얼마나 탄식일까요.

  친구가 좋다해서 마음놓고 말했더니 그 친구가 날 잡아먹으려고 뒤집어 꾸민다면 그 친구의 마음에 얼마나 탄식일까요. 이와 같이 되는 세상이라면 어찌 탄식하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까. 오늘에 교회 탄식은, 신학생들은 많은데, 은혜를 끼치는 일꾼이 없다는 것은 얼마나 양떼들이 탄식할 일이며 교회는 많은데 부흥 발전하는 교회는 적고 날마다 부패하여 간다면 교회의 머리되시는 주님이 얼마나 괴로운 일입니까?

  오늘 이것보다 더 탄식할 일은 공산당이 기독교를 삼키려고 들어오는데 이것을 물리치지 못하고 오히려 아부를 떨며 협상 운동을 한다는 것은 심판 받을 음녀의 행동이 아닐까요. 이제 일꾼이 없는 것을 탄식하신 하나님께서는 사59:16이하와 같이 역사하실 것입니다. 이때에 서방에서는 여호와의 이름을 두려워하겠고 해 돋는 편에서 그 영광을 두려워할 것은 여호와께서 그 기운에 몰려 급히 흐르는 하수같이 오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때에 동방 사람에게 신이 임하고 입에 말씀이 임해서 이것으로써 기독교 역사의 끝을 맺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지렁이 같은 동방 야곱을 새 타작기 같이 들어 쓰므로 태산같은 교만의 세력이 거꾸러지고 여호와를 자랑할 일이 동방 땅 끝에 나타나서 새로운 시대가 온다는 것을 사41:14이하에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은 무소불능하시니 아무리 쓸 사람이 없어도 나같이 무식하고, 가난하고, 약하고, 입이 둔하고, 머리가 둔한 사람도 입으로 불러서 아름다운 소식이라는 월간지를 발행케 하는 것은 여러 종님들에게 큰 소망이 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2. 사랑 떠난 교회를 위한 눈물의 기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너무나 큰 사랑을 받았사오나 그 사랑 그대로 남에게 주지 못하여 교회는 다 식어지나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너무나 넓고 높고 깊고 길어서 인간들이 그 사랑을 받고도 깨닫지 못하는 자리에 있으므로 사랑이 식어지는 것이로소이다. 우리에게 이러한 시련이 오는 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큰 축복이 올 징조라고 성경을 통하여 깨달으면서도 실지 시련이 오면 감사하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이 식어지는 것이 인간이로소이다. 아버지 하나님 좀더 뜨거운 마음을 내게 주시옵소서. 강단에 선 종의 마음 식어지면 굶주린 양떼를 어떻게 하오리까.

  억지로 설교 본문을 택하고 억지로 제목을 택하고 억지로 여기 저기서 이말 저말 끌어다 횡설수설한다면 나 어찌 강단에 서서 주님 올 때까지 지킬 수 있사오리까. 아무리 생각을 해 보아도 강단의 생활부터 개혁이 일어나야 하겠나이다. 세파에 시달리던 양떼들은 하늘로부터 나리는 새로운 만나를 찾고 있는데 과학적, 철학적 하는 설교 듣기 싫어 교회 출석할 힘조차 잃어 먹고 갈팡질팡하면서 왔다 갔다 하는 양떼를 어떻게 하오리까. 주여, 당신의 양을 사랑할진대 는 내 입에 말씀을 주시옵소서.

  예배 시간 되고 보니 은혜 없는 맥떨어진 찬송 억지로 불러 보아도 오히려 열 적은 생각나서 천장만 바라보는 그 태도, 하나님 보시기에 기뻐할 수 없으리이다. 하나님이여, 지절거리는 노래 부르지 않고 하늘 보좌 위에 올라가는 우렁찬 호소에 찬송을 부를 수 있는 입을 열어 주시옵소서. 마지못해 예배 시간 지키는 사람 되고 보니 시간만 지루해서 졸고 있는 그 모양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할까 두려운 것 뿐입니다.

  하나님이여, 예배 시간 그리워서 모이기를 힘쓰고 설교 말씀 꿀보다 달아서 시간가는 줄 모르는 교회가 되도록 일으켜 주시옵소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내가 오히려 은혜의 문을 막는 설교자가 될까봐 떨리는 것 뿐이니 나를 때려서라도 은혜에 사로잡힌 종이 되도록 만들어 주시옵소서. 죄중에 큰 죄는 강단에 선 종이 은혜없이 설교하는 일 인줄 눈물겹게 깨닫게 되나이다.

  한 사람을 죽이는 강도보다도 대중을 죽이는 설교자가 될까봐 떨리오니 나를 말씀으로 사로잡아 괴로운 자의 마음을 만족하게 해주는 전도자가 되도록 만들어 주시옵소서. 의식만 따지다 보니 경건한 모양은 있으나 능력이 없으므로 자동적으로 외식하는 자가 되므로 환란 바람 불어올 때 겨같이 날아갈까봐 두려운 것 뿐입니다.

  하늘에 하나님이여, 어찌 하려나이까.  의식에 매이지 않고 사랑에 녹아진 인격을 주시옵소서.  사랑 떠난 의식은 진액 없는 나무 가지 되어 열매없이 찍힘을 당할까봐 두려운 것 뿐이로소이다. 하나님이여, 사랑의 불 가운데서 자동적으로 질서 정렬하게 이루어지는 역사를 주시옵소서.

  억지로 열심을 낸다한들 그 열심은 오히려 외식하는 열심이 될까봐 두려운 것 뿐이니 억지가 아닌 자유로운 열심을 주시옵소서. 참된 자유를 위하여 우리를 부르신 아버지여, 그 자유 안에서만 승리가 있을 것이로소이다. 무소불능하신 아버지여, 우리가 억지로 몸부림쳐 보았던들 무슨 소용 있겠나이까.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주시는 격동을 받아 몸부림쳐 기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고 말씀을 외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해주시옵소서.

  숨은 봉사 해보려고 작정을 했사오나 사람이 알아주지 않을 때 봉사하던 일에 맥이 빠져 쓰러지는 자가 될까봐 두려운 것 뿐이니 주여 잠잠히 나를 사랑하는 증거를 내게 주시사 고요히 문을 닫고 골방에 앉아서 기도로 봉사할 때, 손으로 봉사할 때 거기서 보좌와 교통하는 영계를 주시옵소서.

  할 일 많아서 이것 저것 만져보다가 나 홀로 할 수 없어 낙심하는 사람 될까봐 두려운 것 뿐이오니 신앙에 동지를 만나게 하옵소서. 환영받을 때 많은 사람 따라오고 억울함을 당할 때 많은 사람 나를 배척하니 괴로운 세상 더 살 마음 없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가 될까봐 두렵습니다.  

  하나님이여, 억울함을 당할 때 더 큰 역사를 주시옵소서. 하나님만 자랑할 수 있는 일을 내게 주시옵소서. 아버지만 자랑하는 사람이 된다면 무엇이 부족하겠나이까. 하나님 아버지여, 아버지만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는 인격과 생활이 있게 해 주시옵소서.

 

3. 10월에 대한 기독교인의 감상

  언제나 10월이 되면 무럭무럭 자라나던 곡식은 완전히 결실을 맺어 쭉정과 알곡은 부득불 갈라지게 되는 때입니다. 곡식을 가꿀 때는 아끼는 심정을 가졌던 농부가 10월이 되면 날 센 장기를 사용하여 거두기도 하고 날 센 타작기를 사용해서 알곡만 모으는 때가 옵니다.

  이와 같이 10월달에 일어난 10월 혁명은 그 불길이 지상 삼분지 일을 살라버렸고 그 혁명으로 이루어진 공산 정권은 그야말로 세계를 침투해 나오므로 이것으로 말미암아 기독교 안에까지도 소위 협상주의라는 세력을 통하여 기독교는 불가피에 쭉정과 알곡을 가르듯이 짐승 앞에 머리를 숙이느냐, 싸우느냐, 하는 것이 계시록에 보여준 말씀대로 표를 받고, 받지 않은 문제가 결국 심판에 해당되는 문제가 됩니다.  

  표를 받으면 누구든지 다 죽는다는 것이 새 시대를 이루는 심판의 요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0월달이라는 것은 일년간 계획한 농장이 끝을 맺는 달입니다. 이와 같이 영적 농장에 끝을 맺는 일은 10월에 일어난 혁명을 비롯하여 세계적인 인류의 큰 심판이 오는 시발점이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만일 기독교가 10월 혁명을 비롯하여 나온 적색 사상을 조금이라도 용납한다면 누구든지 쭉정이가 될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붉은 세력을 통하여 쭉정과 알곡을 가르는 일이 기독교 안에 있게 되고 이것으로 말미암아 기독교는 오메가 역사가 일어나야 할 때가 왔다고 봅니다. 오메가 역사라는 것은 여호와께서 사43:19과 같이 새 일을 행하므로 악의 세력은 없이하고 의에 세력으로 새로운 시대를 이루는 것을 가르친 것입니다.

  10월에 일어난 적그리스도의 세력은 반드시 그리스도의 강림으로 완전히 없어지게 되고 그리스도의 왕국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0월은 기독교의 종말에 심판의 대상자가 일어난 달이니 만큼 우리도 10월달부터 일어나는 역사가 완전히 승리하므로 새로운 평화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 나라는 개천절도 10월이요, 국군의 날도 10월이니, 이 10월에 하나님의 사람도 완전한 것을 받는 달이 된다는 것을 믿고 감사합니다.

  나는 언제나 10월달에 완전한 것을 받는 체험이 계속 3번 있게 될 때에 이달은 마귀 세력도 일어난 달이요, 하나님 편도 일어나는 달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알 리 는  말 씀

 

  1. 누구든지 정식 수도 학과를 공부하고자 하시는 분은 매월 1일부터 25일 까지 수도회가 진행되오니 오실 분은 식대 매일 80원, 학과 책 대(성경 해석법, 요한一서 강의, 조직신학 강의, 선지서 강의, 계시록 강의, 인간론, 새일성가집 합계 7백여원)만 준비해 가지고 오시면 설비는 얼마든지 자유롭게 수도할 수 있습니다.

  2. 교통은 어디서든지 대전에 하차하면 대흥동 버스 정류장에서 신도안행을 타고 종점에 내리면 됩니다. 또는 기차로 하차하실 분은 두계역에서 하차하여 신도안행을 버스를 타고 종점에 내리면 됩니다.          

  3. 서울에서 이 진리를 탐구하실 분은 서울 종로구 종로 1가 3번지 (광화문 비각옆) 의사빌딩 새일중앙교회에 오시면 얼마든지 진리를 탐구할 수 있습니다. 시간은 주일 오전, 오후, 저녁, 매일 저녁 계속 진리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4. 서책을 구독하실 분은 서울 특별시 종로구 종로 1가 3번지(의사빌딩) 새일중앙교회로 연락하시거나 충청남도 논산군 두마면 신도내 새일수도원으로 연락하시면 됩니다.

  5. 친히 진리를 듣고자 하여 강사를 요구하실려면 상기의 주소로 연락하시면 얼마든지 강사를 보내드릴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