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례 (1972년 9월호)

설  교  편

 1. 이스라엘 왕인 여호와의 역사 (사44:1~8)

 2. 산 믿음의 양심 (눅17:1~10)

 3. 복의 근원 아브라함 (창12:1~5)

 4. 믿음과 심판 (요3:17~19)

 5. 버림받은 예수 (마27:27~46) 

 6. 영적 예배 (롬12:1~2) 

 7. 심판 날에 정죄 받을 행위 (유14~16)

 8. 택한 양을 찾는 목자의 인격 (요4:7~19) 

 

 

 

 

 

 

 

 

 

 

 

 

 설 교 편

 

이스라엘 왕인 여호와의 역사

- 사 44:1~8 -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아니고는 역사하지 않는 신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제 이스라엘에게 역사하시는 여호와의 역사를 본문으로 증거한다.

 

  1. 조성하고 도와주는 역사 (1~2)

  하나님께서는 모태로부터 사람을 택하시고 그를 도와주시는 것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이 조성하고 도와주는 사람이라면 이스라엘이라는 승리의 이름을 갖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조성한 자가 아니고는 돕지도 않으시고 도움을 받는 자 외에는 하나님의 종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 인생이 원하므로 되는 것보다도 우리가 세상에 날 때부터 하나님의 종으로 지음 받았다고 믿어야 된다. 아브라함의 가정에 이삭을 통하여 증거를 나타내신 것은 하나님의 역사는 모태로부터 택하는 역사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하나님은 아무런 사람이나 불러서 종으로 삼은 것도 아니요, 예지와 예정 아래서 종될 자를 택하시고 그가 행함이 있든지 없든지 도와주시는 것이다. 사람이 행하므로 도와주고 행치 못하므로 돕지 않으신다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고 택한 자는 부족이 있다하여도 도우시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이다.

  아무리 기독교를 박해하고 훼방했다 하여도 예수님께서 바울에게 나타나서 그를 부르신 것은 택한 그릇이기 때문이다(행9:1~9). 만일 하나님께서 사람의 옳은 행위를 보고 택하신다면 택함 받을 자는 이 세상에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역사가 택한 자를 조성하기도 하고 도와주기도 하는 것이다.

 

  2. 자녀를 축복하는 역사 (3~5)

  하나님은 택한 종에게 자녀의 축복을 주시는 것은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혈통적인 자녀의 축복도 있고 영적인 자녀의 축복도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종을 통하여 낳은 자녀가 축복을 받도록 하시는 것은 그 종의 힘으로가 아니요 그 종을 들어 쓰시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가장 복 있는 종은 복 있는 자녀를 많이 열매를 맺게 된 자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스스로 역사하지 아니하시고 그 종을 들어서 열매를 맺게 하시는 것은 참된 이스라엘을 이루기 위한 것이다. 옛적에 야곱을 들어서 이스라엘을 이루게 하시는 것은 앞으로 택한 종을 통하여 새로운 시대가 이루어질 것을 예언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복 있는 종은 변화성도라고 볼 수 있다.

 

  3. 처음과 마지막의 역사 (6~7)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처음의 역사는 종말의 역사를 뜻한 예언적인 역사로 나타내고 마지막 역사도 그대로 끝을 맺는 것은 택한 자에게 더 확실한 증거를 보여주어 담대히 나가게 하기 위한 방법이다. 언제나 완전한 역사라는 것은 시작과 마지막이 꼭 같은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과거 이스라엘에게 나타낸 역사를 그 시대에 목적을 두었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도 필요가 없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전한 역사를 이루고자 하는 것이니 구약 시대의 역사는 전부가 이스라엘의 왕국이 이 땅에 이루어질 정로로 보여 준 것으로 본다. 하나님은 어리석은 인간들에게 완전한 것을 주기 위해서는 처음에 주는 것이 아니요, 마지막에 주시는 것은 처음에는 완전한 것을 주겠다는 증거를 보여 믿게 한 것이요. 마지막 역사는 믿게 한 것을 그대로 이루어주는 역사이다. 증거를 보여 주면서 말씀한 것을 믿지 않는 자를 악한 자로 인정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4. 택한 자를 증인으로 쓰는 역사 (8)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택한 자를 증인으로 쓸 때에 두려워 말고 겁내지 말고 증거하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옛적부터 말씀한 예언이 정확히 이루어지는 역사이기 때문이다. 증거라는 것은 이루어지는 일이 증거가 되는 동시에 그 말씀대로 인간 종말에도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담대히 증거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반석이 변함없는 것과 같이 변함없이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누구든지 담대히 전할 의무가 있다.

  기독교라는 것은 합법적인 진리가 옛적부터 정확히 기록된 동시에 정확히 이루어지는 역사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은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꼭 같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처음에는 증거로 이루어졌고 현재는 축복으로 이루어지는 동시에 미래에도 영원한 축복이 되는 것이다.

 

  결    론

  하나님은 택한 이스라엘에게 왕이 되는 동시에 예지와 예정 아래서 말씀한 대로 역사하시되 조성하시고 도와주시고 축복하는데 있어서는 시종여일하게 역사하는 신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증거하는 일인 동시에 영원한 영광을 우리는 누리게 될 것을 믿는 것은 영원한 이스라엘이 되기 때문이다.

 

 

산 믿음의 양심

- 눅 17:1~10 -

 

  믿음이라는 것은 도덕 아래 속한 것이 아니요, 어떤 의식이나, 법도에 속한 것도 아니요 산 믿음이라는 것은 그 양심에 속한 것이다. 믿음이라는 것은 사람을 중심한 것보다도 하나님을 향하여 나가는 양심의 활동이 있어야 한다. 아무리 사람에게 자기 옳은 것을 나타낸다 하여도 형제를 실족케 하거나 용서치 않는 것이 있다면 그 믿음은 아무런 열매를 나타낼 수 없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기뻐하지 않으므로 하나님 앞에 책망을 받게 되는 것이다. 믿음이라는 것은 어떠한 양심에서 움직여야 된다는 것을 본문으로 증거한다.

 

  1. 형제를 실족케 하는 것이 있을까 조심하는 일이 있어야 한다 (1~2)

  하나님께서는 모든 자의 생명을 하나 같이 사랑하므로 남을 실족케 하는 일이 있다면 큰 화가 오게 되는 것은 하나님과 대적이 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완전한 사람이 없는 것이로되 형제를 실족케 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항상 조심해서 형제를 아끼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진리가 탈선된 길을 가지 않은 형제가 아무리 실수가 있다해도 그 형제를 실족하지 않도록 붙들어주는 일이 있어야 할 것이다.  

  나의 체험은 형제가 아무리 실수가 있고 나를 괴롭히는 일이 있다 하여도 그 형제를 아끼는 마음으로 붙들어 주고 일으켜 주는 일을 하고자 할 때에 내가 구하지 않아도 뜻밖의 큰 은혜가 오는 체험을 많이 받을 때에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는 일은 남을 실족하지 않도록 아끼는 사랑으로 대해 주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리 형제가 나를 억울케 하여도 같이 불평을 두지 않고 그 형제가 복을 받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면 항상 하늘로부터 강한 은혜가 나리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2. 형제를 얼마든지 용서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3~4)

  우리는 주님 앞에 용서를 받는 신앙 양심에서 형제의 죄를 너그러이 용서하는 맘이 없다면 십자가의 사랑의 대적이 되는 일이니 하루에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마18:22). 회개치 않은 자를 용납한다는 것은 불의와 동참하는 일이 되지만 회개하는 자를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은 큰 죄를 범하는 일이 된다 (마18:28).  

  우리는 사람을 대할 때 도덕에 속한 양심도 아니요 율법 아래 있는 양심도 아니니 너그러이 용서받은 양심에서 남을 너그러이 용서하는 것은 내가 너를 사랑한 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이니, 누구든지 형제의 죄를 용서할 때에 십자가에 속한 사람이 되고 형제의 죄를 용서치 않을 적에 십자가의 대적이 되는 사람이다. 산 믿음의 양심이라는 것은 항상 예수님의 사랑의 불이 있는 마음이다.

 

  3. 항상 자기가 하는 일에 부족감이 있어야 한다 (5~10)

  누구든지 예수를 믿는 산 믿음의 양심을 가진 자는 항상 자기가 수고할수록 자기 하는 일에 부족감을 깨닫는 마음이 있어야 될 것이다.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는 그 사랑을 생각할 때에 밤낮으로 수고하여도 항상 자기는 아무 것도 한 일이 없다고 생각나게 된다. 만일 어떤 사람이 주님의 일을 하고 대접을 받고자 하는 맘이 있다면 이것은 산 믿음의 양심이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자기를 위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맡은 일에 충성을 다해 보려고 할 때에 일을 할수록 점점 나는 아무런 일도 한 것이 없다는 생각이 나는 것은 점점 하나님의 은총을 받게 될 때에 그 은혜를 보답할 길이 없다는 마음이 점점 많아지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작은 일에 충성을 다할 것뿐이라는 마음을 가지면 주님께서 가장 큰 일을 할 수 있는 믿음을 더해 주시기를 기뻐하신다.

 

  결    론

  기독교 신앙 양심이라는 것은 하나님께로 온 사랑을 받은 자리에서 깨끗한 양심을 가지게 되는 것이니 그 양심 속에는 아무 것도 자랑할 것도 없고 원망할 것도 없고 항상 그 사랑을 남에게 주고픈 마음밖엔 있을 수 없다.

 

 

복의 근원 아브라함

- 창 12:1~5 -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할 때에 복을 사람에게 주기 위한 목적에서 창조한 것인데 아담이 범죄 하므로 복을 줄 수 없게됨을 하나님은 탄식하셨다. 하나님의 진노는 복을 주고자 하여도 순종치 않을 때에 복 받을 사람만 이 땅에 살게 하기 위하여 순종치 않는 무리를 없이하는 심판을 나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홍수 심판을 내린 것은 순종하는 사람만 이 땅에 살게 하여 그들에게 복을 주자는 목적이었다.

  그러므로 순종하는 노아의 가정만 땅위에 살게되고 순종치 않은 사람들을 전멸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홍수 심판 후에 다시는 홍수로 멸하지 않겠다는 언약의 표징으로 비온 후에 구름 사이에 무지개를 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홍수로 심판치 않겠다는 말씀을 믿지 않고 바벨탑을 쌓을 때에 하나님은 그들을 또 저주한 것은 말씀을 믿지 않은 까닭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복을 사람에게 주어야만 할 일이므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서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다음과 같은 언약을 세우셨다.

 

  1.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 하심 (1)

  하나님께서 세계 인류에게 다시 복을 주기 위해서는 세계 인류가 복 받게 되는 복음 운동의 근본 되는 거룩한 성지를 아브라함에게 주기 위하여 급한 명령을 나리었다. 네가 사는 본토를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고 하시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는 마음이 있는 것을 하나님께서 아시고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것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중심을 보시되 순종하는 마음이 있나 없나 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사명을 맡기시는 것이다. 만일 순종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에게 사명을 맡긴다면 그 뜻을 이룰 수 없음을 아시고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공경하지만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복 받을 사람을 인도할 때에 홀연히 급한 명령을 내리신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무조건 순종하는 자에게 복을 준다는 것이 하나님의 법이기 때문이다. 정든 고향을 떠나 정처 없이 간다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어려운 일이라고 본다. 그러나 복 받을 사람은 인간이 볼 때에 어리석은 것 같으나 하나님이 볼 때는 가장 지혜로운 사람으로 인정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명령하는 그 일을 순종하는 자라면 지혜로운 자가 되기 때문이다.

 

  2.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라 하심 (2)

  누구든지 복 받을 사람은 하나님께서 귀한 이름을 주시며, 그 이름을 존귀하게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아브라함’ 이라 이름을 주신 것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한다는 뜻이다(창 17:4~5).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세우신 대로 모든 족속이 다 지상왕국의 축복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브람’을 ‘아브라함’ 이라고 이름을 주신 것이다.

  가장 큰 축복은 영원히 없어지지 아니할 이름을 받게 되는 것이라고 보게 된다. 인생이라는 것은 자기 홀로 잘 먹고 잘 입고 죽는다는 것이 축복이 될 수 없고 영원하고도 완전한 복된 나라를 이루는 일이 큰 축복이라고 보게 된다. 아브라함은 인간이 볼 때는 남보다도 시련을 많이 받았지만 아브라함의 이름 아래서 지상왕국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복의 근원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사41:8 이하를 보면 동방 땅 끝에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내가 너를 싫어버리지 아니하고 도와주며 붙들어 주며 너를 대적하는 자를 멸망케 하므로 완전 승리의 열매를 맺게 되어 지상왕국이 이루어질 것을 말씀했다. 

  아브라함에게 너는 복의 근원이라 한 것은 인간 종말에 아브라함의 자손만이 남은 자가 되어 새 시대를 이루는데는 동방 땅 끝에서부터 하나님의 응답이 나리게 되므로 새 시대를 이룰 것을 말씀했다. 우리는 복의 근원이 되는 아브라함의 자손된 자로서 지상왕국을 이루게 된다.

 

  3. 하나님께서 친히 갚아주시겠다고 언약하심 (3)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복을 주시되 친히 갚아주는 일을 하신다. 택한 자를 축복하면 축복으로 저주하면 저주로 갚아주시는 것이다. 이렇게 하시는 것은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하기 떄문이다. 언제나 대표적인 사람은 하나님의 대행자가 되기 때문에 하나님은 갚아 주시는 것이다. 우리의 완전 승리라 하는 것은 하나님이 갚아 주느냐에 있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이나 할 수 없는 것을 아시고 택하여, 세운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그를 위하여 싸워주기로 작정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승리는 우리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적에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이 싸워주시는 것은 아브라함에게 세운 언약을 따라 행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의 근원이라 하신 것은 아브라함을 통하여 복을 받는다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말씀대로 새 시대가 이룰 때까지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복의 근원이 되는 아브라함의 자손 된 축복을 예수를 통하여 받게 된다는 것이다. 누구든지 주님께 속한 자라면 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다(갈3:29).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세울 때에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는다고 한 것은 벌써 육적 이스라엘을 중심하여 새 시대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신앙 중심으로 새 시대가 이루어지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라고 하는 축복을 받을 때는 할례를 받기 전이요, 이삭을 낳기 전이었다. 우리가 아브라함에게 시작된 그 축복을 지상에서 완전히 받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세우신 대로 역사하기 때문이다.

 

  결    론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이시니 언제나 시작할 때에 끝을 어떻게 맺을 것을 미리 말씀하시고 그때부터 시작한 그 역사는 조금도 변함없이 끝까지 그대로 역사하는 것이다.

 

 

믿음과 심판

- 요 3:17~19 -

 

  하나님께서 당신의 거룩한 뜻을 이루는데는 믿음과 심판이라는 두 가지 법으로 완전히 말세의 뜻을 이루는 것이다. 구약시대의 모든 역사와 말씀은 믿음과 심판으로 끝을 맺는 것을 목적하고 언약하신 말씀이다. 그러므로 독생자를 보내서 십자가에 죽게 하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승천하신 것은 누구든지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자들의 신앙의 대상이 된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 부활 승천이 있기 전에는 완전한 신앙 운동이 일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이것은 신앙의 대상자의 완전 승리가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제 신앙의 대상자가 되시는 주님의 역사는 믿음과 심판으로 결단을 나리는데 대하여 다음과 같이 증거한다.

 

  1. 구원을 받게 하려 보내신 예수를 믿음 (17)

  우리는 예수를 믿는 것은 구원을 받게 하려고 보내신 예수를 믿는 것이다. 우리가 완전하므로 된 것이 아니고 믿게 하려는 불타는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이다. 구원을 받게 하려는 하나님의 역사를 믿는 일에 대하여 3가지로 말하게 된다.

  첫째 : 하나님의 열심에서 되어지는 일이다.

  예를 든다면 어떤 사람이 급한 일을 만날 때에 급한 일을 만난 사람의 열심으로는 도저히 벗어날 수가 없게 될 때에 그 사람을 사랑하는 자의 열심이 없이는 도저히 어찌할 수가 없을 때에 죽게 된 사람은 활동할 수가 없고 죽게 된 자를 살려주려는 자의 희생적인 활동이 있어야만 하듯이 죽게 된 인생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열심에서 되어지는 일이다.

  둘째 : 하나님의 책임에서 되어지는 일이다.

  예를 든다면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죽어 가는 사람을 만난다면 그 사람을 돌보아 주어야 할 책임이 길 가던 사람에게 있는 것과 같이 죽게 된 인생을 구원할 수 있는 하나님은 인생을 버려 둔다면 하나님이 큰 책임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택한 인생을 구원받게 하려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의로운 하나님이라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억울하게 미혹을 받고 타락한 인생이기 때문이다.

  셋째 : 끝까지 참는데서 되어지는 일이다.

  예를 든다면 어떤 부모가 자식이 병들어서 애를 쓰는데 아무리 고생이 된다 해도 아들을 끝까지 붙들어 주어야 할 책임이 있다. 심지어 가산이 파괴되고 사업이 파괴된다 하여도 병든 아들을 살리고 본다는 마음에서 부모는 끝까지 참고 견디면서 자식을 구원하고자 할 것은 부모의 불타는 마음일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인생을 구원받게 하기 위해서는 아무리 괴로운 일이 있고 핍박을 받는 일이 있다 하여도 끝까지 참으시면서 기다리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생을 구원하고자 하여 역사하는 일이 없다면 하나님을 훼방하고 핍박하는 자도 없을 것이다. 아무리 훼방하고 핍박한다 하여도 끝까지 참으시면서 기다리시는 것도 인간의 구원을 받게 하려는 데서 역사하시는 것이다.

 

  2. 예수의 이름을 믿지 않으므로 받는 심판 (18)

  심판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랑을 베풀되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심판을 받게 되는데는 죄를 지었느냐 짓지 않았느냐 하는 문제보다도 너는 이미 멸망 받을 죄인인데 예수를 믿었느냐 믿지 않았느냐 하는 것으로 결정된다. 이제 예수의 이름을 믿지 않으므로 받는 심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할 것이다.

  첫째 : 하나님의 사랑을 반대했다는 죄는 완전히 멸망 받을 죄가 된다. 조상 적부터 죄 아래서 출생하여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자리에서 범죄 했다는 것보다도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 않고 반대했다는 죄는 다시는 용서받을 길이 없는 죄다.

  둘째 : 예수를 반대했다는 죄는 심판권을 가진 자를 반대한 죄이므로 심판을 면할 수 없다. 예를 든다면 어떤 사람이 자기를 살려주기 위하여 역사하는 사람을 원수로 알고 오히려 자기를 죽이는 사람의 말을 따라간다는 것은 망한다 하여도 누구든지 합당하게 볼 것이다. 왜냐하면 짐짓 죄를 범한 일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복음을 온 천하에 전파한 이때에 예수의 사상을 대적하는 유물론 공산주의 사상을 따라간다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심판의 대상자가 된다. 그러므로 오늘에 이 세상 사람들이 예수를 믿지 않고 유물론 사상으로 기울어지는 것은 멸망 받을 바벨론을 이루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 종말의 심판은 의로운 심판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계19:1~21). 만일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보내지 않고 심판한다면 의로운 심판이 될 수 없지만 독생자를 보내서 복음을 전하고 믿지 않는 자를 심판하는 것은 가장 참되고도 의로운 심판이 되는 것이다.

 

  결    론

  가장 큰 일은 예수를 믿는 일이다. 심판을 받느냐 받지 않느냐 하는 것이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예수를 믿는 일을 어리석게 본다는 것은 자기의 본심이 아니요 마귀 흑암에 빠진 양심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해 주려고 보내신 예수를 반대한다는 것은 너무나 악한 일이 되기 때문이다. 사람의 양심이라는 것은 다 선한 양심이 있는 것인데 예수를 반대한다는 것은 흑암 덮인 양심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예수를 반대하는 자는 마귀의 도구가 된 인간들이므로 멸망을 받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버림받은 예수

- 마 27:27~46 -

 

  하나님은 공의의 신이시니 공의의 죄 대가를 아들에게서 받으실 적에 사정없이 아들을 버리셨다. 이것을 본다면 죄라는 것이 얼마나 무섭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 주님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는 말을 했던 것이다. 이제 하나님 앞에 버림을 당하는 예수의 고난을 우리는 본문으로 깊이 생각한다.

 

  1. 머리의 괴로움 (27~31)

  가장 괴로운 것은 머리가 괴로운 것이라고 본다.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쓰고 갈대 몽둥이로 머리를 칠 때에 그 괴로움은 무엇으로 표현 할 수 있을까? 어찌하여 하나님은 아들에게 이런 괴로움을 주셨는가! 무엇보다도 인간이 머리의 정신작용을 죄 되게 사용하면서 간사한 죄를 많이 진 대가를 친히 받으신 것이다. 가장 큰 죄는 짐짓 머리 속으로 연구하므로써 지은 죄가 너무 큰 죄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인간의 죄를 위하여 목이 잘린다든지 간단한 사형을 한다는 것보다도 갖은 괴로움을 당하게 할 때에 먼저는 머리에 괴로움을 당하게 하신 것이다. 우리는 머리의 정신 작용으로 죄를 짓는 일을 했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죄라는 것을 여기에서 알아야 할 것이다. 지금 기독교 안에서 소위 하나님의 종이라 하면서 머리에 생각으로 악한 계획을 하는 자들도 있다고 본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책잡기 위하여 갖은 모략의 방법을 쓴 일이 얼마나 무서운 죄인가.

 

  2. 입의 괴로움 (33~34)

  인간들이 입으로 지은 죄라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 죄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오늘에 신자라 하면서 심지어 주의 종이라 하면서 입으로 하지 못할 말을 한다는 것은 얼마나 가증한 일인가?

  우리 주님께서 쓸개 탄 포도주를 마셨다는 것은 입술로 지은 죄를 위하여 당하는 괴로움이다.

 

  3. 수족의 괴로움 (35)

  가장 무서운 죄는 손과 발로 지은 죄인 것이다. 손과 발에 못박혀 장정된 몸이 허공에 달려 있을 때에 못자욱은 찢어지고 쓰라리고 아픈 그 고통은(시22:16)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가장 괴로운 것은 사정없는 쇠못으로 힘줄을 뚫어 나무에 못박은 그 자리 얼마나 쓰라릴까.

  나는 1953년 5월에 조용한 산을 찾아가 기도할 적에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을 때에 된 모양이 똑똑히 나타났다. 못자욱에서 흐르는 피는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오며 못자욱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려오며 뼈마디가 우두둑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며 주님이 고통 중에 시달리는 모양으로 나를 바라보며 나는 너를 인하여 이렇게 고난을 받았는데 너는 나를 위하여 무엇을 했느냐 하는 음성이 거듭 들려왔다. 이러한 광경을 약 3시간 동안이나 나타나 보일 때에 그때에 나는 작정하기를 아무리 괴로운 일이 오고 억울한 일을 만난다 해도 나는 원망치 않고 강한 마음으로 일하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그 후로부터 이날까지 20여년 간 이상하게도 사람에게 버림을 당하는 것과 같은 원망스러운 일을 계속으로 당하게 될 때에 십자가 앞에서 작정한 그 마음 잃지 않고 나오는 중에 십자가를 통하여 오는 은총을 너무나 많이 받을 때에 더욱 감사 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아무리 억울함을 당한다 하여도 우리 주님의 당하신 고난에 비교할 수가 없다. 우리는 십자가의 고난을 참을 자격은 없지만 억울함을 당할 때에 십자가를 바라만 보면 괴로움은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4. 귀의 괴로움 (39~44)

  인간들이 하나님의 말씀은 듣기 싫어하고 마귀의 말을 듣기를 좋아하는 인간이 많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극도로 괴롭히는 모욕과 훼방을 받게 되었다.

  지나가는 자마다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하는 말이 성전을 헐고 사흘만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고함을 지르는 것이다. 대제사장과 서기관들과  장로들도 함께 희롱하는 말이 남은 구원을 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가 없도다 하면서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오면 우리가 믿겠노라고 하였다.  

  인간이 볼 때는 이러한 자리에 들어간 것이 십자가이다. 인간의 지혜와 지식으로 누가 이 때에 인간의 죄를 위하여 죽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자가 있으리요, 사정없이 매를 맞고 사정없이 쓰라림을 당하고 사정없이 버림을 당한 십자가였다.

 

  5. 고통의 큰 소리 (45~46)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는 이 슬픈 소리, 고통의 소리, 천지가 캄캄하고 산천이 슬퍼할 고통의 소리였다. 우리는 이 십자가의 고난을 생각할 때에 조금인들 죄를 용납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이 조금이라도 죄를 용납한다면 죄 값으로 고통을 당한 예수님의 저주가 되는 일이라고 본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버림당한 그 일은 우리에게 기쁨과 평화를 주는 열매가 되었다.

 

  결    론

  공의로우신 하나님 공의의 죄 대가를 아들에게 짊어지우고 사정없이 버린 하나님의 사랑 절대로 택한 자를 버리지 않는 사랑이 되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아들을 버리신 하나님의 사랑 우리에게 무엇을 아낄 것이 있겠는가. 우리는 그 사랑 속에서 넉넉히 이기고도 남음이 있는 그 능력을 받게 되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버림을 당했기 때문이다.

 

 

영 적  예 배

- 롬 12:1~2 -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은 영적 예배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것이다. 과거 육적 이스라엘 백성이 유형적인 제사를 드릴 때는 새로운 성신의 역사를 나리는 일이 없지만, 주님께서 세상에 오시어 십자가상에서 유형적인 제사는 완전히 끝을 맺었고, 주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부터는 유형적인 제사는 필요 없고, 영적 예배로만 하나님의 역사는 완전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오늘에 예배를 드리는 자가 많이 있지만 영적 예배가 되는 일을 하는 자는 하나님의 역사를 받게 되고 영적 예배를 드리는 일을 못하는 자는 하나님의 역사를 받지 못하므로써 아무런 열매도 없는 마른나무와 같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적 예배는 어떻게 하는 자라야 드릴 수 있다는 것을 본문으로 증거한다.

 

  1. 몸을 산 제사로 드려야 한다 (1)

  우리의 몸을 산 제사로 드릴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 몸을 화목 제물로 영원한 제사로 드렸기 때문이다. 우리 몸을 산 제사로 하나님께 바치면 하나님께서 그 몸을 다스리게 되는 것은 주님의 희생적인 피의 제사가 우리를 깨끗케 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 몸에 오기 때문이다. 아무리 예배를 드린다 하여도 몸을 하나님께 바쳐 하나님이 다스리는 몸이 되기 전에는 영적 예배가 될 수 없다.

  어떤 사람이 예배를 드릴 때에 육적 생각에 머물러 있다면 이 사람은 육적의 사람이요, 영의 사람이 아닌 고로 영적 예배를 드릴 수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 몸을 다스릴 때는 우리가 육적에 있지 않고 영에 있게 된다(롬8:8~9). 영적 예배라는 것은 우리 몸은 성령이 다스릴 때에 영적 예배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의 몸을 성령이 다스리게 되는 원인은 주님께서 의로운 제사를 드렸으므로 우리가 주를 믿고 하나님께 드릴 때에 하나님의 신은 예수의 의를 믿는 의를 통하여 우리를 다스리게 된다.

 

  2. 마음이 새로워지므로 (2상반)

  영적 예배라는 것은 마음이 새로워지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몸을 하나님께 바치는 생활에서 영적 사람이 될 때에 항상 세상을 이기는 생활이 있게 되므로 마음이 새로워지는 것이 있으므로 영적 생활에 향상이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마음이 새로워지는 생활을 못한다면 이 사람은 육에 있는 사람이요, 영에 있는 사람이 아니다.

  신앙 생활이라는 것은 육의 생각이 영을 지배하게 된다면 타락하는 것이요, 영이 육의 생각을 지배하게 되면 향상하게 될 것이다. 우리 몸이라는 것은 거룩한 영이 내주 하여 있는 성전이 되므로만 항상 마음이 새로운 생활을 하게 된다. 예수의 십자가는 육체의 정욕을 온전히 죽이고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여 예수의 형상이 이루어지게 하는 열매가 있게 된다.

 

  3.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일 (2하반절)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자가 되려면 영적 예배를 드리므로 마음이 새로워지는 사람이 될 때에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가를 분별하게 되므로 생활의 열매를 맺게 된다. 오늘에 교회가 혼란에 빠진 것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치 못하고 사람의 생각을 따라서 모든 일을 움직이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교회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치 못하고 공연히 남을 판단한다든지 필요 없는 일에 참여하여 교회 일을 움직인다면 그 교회는 벌써 흑암의 세력에게 먹힘을 당했다고 본다.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일에 있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첫째 : 예수의 완전한 의로만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는 것이요,

  둘째 : 예수의 대언 기도로만 응답이 나린다는 것이요,

  셋째 : 예수의 권세로만 마귀를 이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적 생활이라는 것은 예수의 의로만 우리의 죽은 영이 중생을 받게 되는 동시에 주님의 대언 기도로 영적 발전을 보게 되었고, 예수의 권세 아래서만 승리의 왕국이 이루어진다. 온전이라는 것은 하나님께만 있는 것이요, 온전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이루어지는 것은 예수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결    론

  하나님께서는 영적 예배를 받기를 기뻐하시고 그 예배를 통하여 당신의 역사를 나리시기를 기뻐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영적 예배를 통하여 사람과의 교통할 수가 있고 사람과의 교통이 있으므로만 하나님의 섭리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심판 날에 정죄 받을 행위

- 유 14~16 -

 

  하나님께서 아담의 7대손 에녹의 예언한 일을 본문에 기록하게 한 것은 변화 승천할 종들이 일어날 때에 정죄 받을 자들의 형편을 말했다. 심판 날에는 아무리 하나님의 종이라 하여도 경건치 아니한 자들이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정죄 받을 것을 말했다. 강퍅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동을 말했다.

  이제 하나님의 일을 대적하는 행동은 무엇이냐 하는 것을 본문으로 증거한다.

 

  1. 원망하는 자

  원망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동이다. 이스라엘이 아무리 애굽에서 구원받아 나왔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할 줄 모르고, 항상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망의 말이 있으므로 하나님은 진노하여 그 무리를 진멸시킨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는 하나님을 위하여 싸우는 생활에서 목적을 달성하기까지 원망 없이 나가야 한다.

  예를 든다면 한 가정에 부부가 목적을 두고 생활해 나갈 때에 아내가 남편을 섬기는 일에 아무리 어려운 일이 와도 그 남편을 받들어 섬기므로만 그 가정은 목적을 달성할 수가 있다. 우리는 남편이 되시는 예수를 맞이하려면 아무리 난관이 와도 원망 없이 싸워 나가야 한다. 만일 원망하는 말을 하는 자가 있다면 정죄 받게 될 것이다(약5:9).

  주께서 심판하시는 날은 끝까지 원망하지 않고, 나가는 자만이 남은 자가 될 것이니 우리는 끝까지 원망치 않고 나가는 자가 되어야 재림의 주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2. 불만을 토하는 자

  불만이라는 것은 주님을 대적하는 일이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것은 일한 대로 갚아 주시는 것인데 갚아 주시려 오시는 주님을 영접할 자가 주님께 대하여 불만을 가진다는 것은 주님을 대적하는 일이 될 것이다. 주의 종이라 하면서 주님의 일에 불만을 가지는 자는 자동적으로 정죄를 받게 된다.

  예를 든다면 어떤 군대가 전쟁에 나가서 자기 나라에 불만을 가지고 있다면 이것은 애국 정신이 아니요, 나라를 대적하는 정신이니 반드시 엄중한 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끝까지 순종하신 십자가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자가 주님의 일에 불만을 가질 수 없다. 불만을 가지는 자는 십자가의 원수가 되는 행동이니 마땅히 정죄 받아야 될 것이다.

 

  3. 정욕대로 행하는 자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린 것은 죄를 위하여 고난을 당한 것인데 정욕대로 행하는 자는 십자가를 대적하는 자이니 정죄를 받게 된다. 예를 든다면 어떤 종이 주인의 집에서 일하면서 자기 정욕에 따라서 일을 한다면 주인의 집에 도둑이니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의 피로 산 백성 중에서 주의 것으로 쓰여져야 할 종인데 자기 정욕대로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집을 망치는 행동이니 이러한 자는 용서 없는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4.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하는 자

  우리 입술이라는 것은 주의 십자가만 자랑하는 것 외에 자기의 것을 자랑한다면 십자가의 대적이 된다. 어떤 사람이 먼 곳에 급한 소식을 전하러 보냄을 받은 자가 그 소식을 전하는 것보다도 자기를 내세우는 말을 하고 있다면 이러한 사람은 용서 없이 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는 제일 급한 소식은 죽어 가는 죄인들에게 십자가를 말해 주는 일인데 어떤 종이 강단에서 자기의 지식이나 인격을 자랑하게 된다면 십자가의 강단을 더럽히는 행동이니 정죄를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십자가를 전하지 않으면 자기에게 저주가 온다고 생각을 했던 것이다. 바울은 절대로 자기 지혜나 지식을 말하지 않은 것은 십자가의 권능을 나타내기 위한 목적이다.

 

  5. 이익을 위하여 아첨하는 자

  어떤 종이 충성된 말을 하지 않고, 자기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아첨하는 행동을 한다면 이러한 자들은 정죄를 받게 된다. 종이라는 것은 자기 생명이 끊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충성 되이 말하는 것이 충성된 증인이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싸워야 할 사람이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아첨한다면 이 사람은 삯꾼의 행동이니 이러한 무리는 재림의 날에 용납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충성된 증인으로 자기에게 불리한 일이 있다 하여도 끝까지 주의 일을 지키는 자 외에는 주의 날에 설 자가 없는 것이다. 가장 옳은 일은 주님 올 때까지 충성 되이 증거하는 자요, 가장 불의한 자는 주님 올 때까지 이익을 위하여 아첨하는 자이다.

 

  결    론

  가장 두려운 일은 종 된 자로서 정죄를 받는 일이요, 가장 영광스러운 일은 종 된 자로 칭찬을 받는 일이다. 우리는 주님께서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여 심판 날에 그 거룩한 반열에 들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노력하여야 한다.

  첫째로 중심 성결을 위하여, 둘째는 양떼를 살리기 위하여, 셋째로 사상을 지키기 위하여, 넷째는 진리를 변론하기 위하여  조금도 타협치 말고, 용기있게 싸워 나가야 한다.

 

 

택한 양을 찾는 목자의 인격

- 요4:7~19 -

 

  기독교는 택한 양을 찾아 한데로 모으는 것을 목적하니 만큼 목자의 인격이 온전하게 되므로만 열매를 거두게 된다. 오늘에 기독교가 많은 목자가 있지만 목자의 인격을 상실하게 될 때에 교회는 아무런 발전을 보지 못하게 되는 일이 있게 된다. 이방 종교는 택한 양을 찾는 종교가 아니요, 사람이 신을 찾아오는 데서부터 시작 되었으므로 다신 숭배가 있다. 여러 가지 신을 섬기는 그 것은 신이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신을 찾다보니 여러 가지 신을 공경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방 종교에는 목자의 인격이 완전치 못해도 종교를 유지해 나가는 것은 사람이 무엇을 찾아보는데 불과하기 때문에 사람이 어려운 일을 당할 때도 덕을 보겠다는 욕망에서 이것저것을 찾아보는 정도로 나가는 것뿐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택한 양을 찾는 목자의 인격이 완전하므로 얼마든지 말할 수 있는 생명이 있는 것이다. 이제 생명 있는 교회에서 택한 양떼를 찾는 목자의 인격은 다음과 같다.

 

  1. 겸손한 인격 (7~9)

  목자는 겸손한 인격이 없이는 택한 양을 찾을 수 없다. 왜냐하면 양과 목자의 인격 차이가 너무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목자가 양을 찾아가지 양이 목자를 찾아가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죄인을 찾아오는 인격은 인간으로서 찾아볼 수 없는 겸손이다.

  같은 야곱의 자손이지만 유대인이 사마리아 사람을 대하여 상종치 않는 것은 사마리아 사람은 야곱의 자손으로 속화되었다는 이유로 정통을 주장하는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을 대하여 상종하면 자기가 더러워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겸손히 사마리아 여인을 찾아가서 물을 구할 때 사마리아 여인은 이상하게 보았던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겸손하게 사마리아 여인을 대하여 구하는 인격은 인간이 볼 때는 무가치한 일이나 하나님이 볼 때는 크게 기뻐할 일이다. 우리는 예수같이 겸손한 인격을 가지지 않고는 택한 양을 찾을 수 없다.

 

  2. 영생의 물을 주는 인격 (10~14)

  완전한 인격이라는 것은 받는데 있지 않고 주는데 있다. 죄인을 만나서 구하기 전에 먼저 내가 영생의 물을 준다고 하신 것은 주님밖에는 이런 일을 행할 자는 없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은 구원이 없다고 상종치 않는데 예수님은 영생의 물을 주겠다고 말씀하셨다.

  참된 목자의 인격은 목마른 양떼에게 물을 줄 수 있는 인격이 있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이 영생의 물을 주기 위한 목적에서 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줄 수 있는 인격을 홀로 가질 수 없고 주님이 쓰시는 종이 될 때에 주님께서 영생의 물을 주는 일을 하기 위하여 종을 들어 쓰시되 주님이 주시는 그 사랑에 이끌려 남을 살려 주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순종하는 자라면 그 종을 통하여 모든 심령들이 영생의 물을 마시게 되므로 주님과 같이 영광을 누릴 수 있는 인격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언제나 목자는 영생의 물을 주는 역사가 있어야 한다. 계22:17을 보면 성령과 신부가 말하기를 “오라 하시는 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고 하였다. 언제나 주님께서 지금도 택한 양을 찾는 목자를 통하여 영생의 물이 되는 은혜의 역사를 강하게 나리는 것이다.

 

  3. 부족을 깨닫게 해주는 인격 (16~19)

  목자라는 사람은 부족한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니 양떼가 완전하다면 목자가 필요 없고 너무 어리석고 미약한 양이 되므로 목자가 필요하다. 주님께서 언제나 택한 양된 우리에게 괴롭히는 말씀을 하지 않고 소망 있는 말씀을 하시어 택한 자의 부족을 깨닫게 하사 부드러운 말로 죄를 깨닫게 해 주시는 예수님은 언제나 죄인을 향하여 그를 완전히 깨닫도록 해주시는 것을 영광으로 아는 것이다.

  의사는 언제나 병자를 바로 진찰하여서 그 병의 내막을 바로 알게 하여 그 병을 없이 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참된 목자는 택한 양이 되는 사람의 마음을 괴롭히지 않고 부족을 깨닫도록 해주시는 것이 목자의 인격이다. 우리는 언제나 모든 사람이 부족을 깨닫고 회개하게 하되 부드럽고도 사랑스러운 태도로 대하는 인격이 있어야 한다. 어떤 목자가 강단에서 부드럽고도 사랑스러운 태도로 택한 자의 부족을 깨닫게 해준다면 그 목자는 완전한 인격을 가진 자라고 볼 수 있다.

 

  결    론

  기독교는 작은 자가 큰 자를 섬기는 종교가 아니고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는 종교이며, 죄인이 의인을 섬기는 종교가 아니고 의인이 죄인을 섬기는 종교이며, 약자가 강자를 섬기는 종교가 아니고 강자가 약자를 섬기는 것이 기독교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어느 단체보다도 목자의 인격이 완전해야 되는 것이다.